합포승전길
이월 셋째 금요일이다. 어제가 우수였는데 그제부터 바람이 심하게 불고 아침 기온이 영하권으로 곤두박질했다. 밭둑에 피어난 매화나 산수유꽃이 화들짝 놀랐지 싶다. 소목고개 웅덩이 슬어 놓은 계곡산개구리 알은 얼지 않았을까 염려된다. 봄방학을 맞아 여가에 근교 산야를 누비고 있다. 어제는 날씨가 차가워 창원 천변 산책으로 끝냈다만 금요일 아침은 동선을 멀게 잡아 봤다.
집 앞에서 반송 소하천 따라 걸어 창원실내수영장으로 나가 진해 용원으로 가는 757번 좌석버스를 탔다. 시내를 관통해 남산정류소에서 성주사역을 거쳐 안민터널을 지났다, 진해구청에서 대발령을 넘은 stx입구에서 내렸다. 조선소 뒤를 돌아 수치 방향으로 들었다. 직원들이 출근을 끝낸 시간대인데 이면도로에 주차된 차량이 헐거웠다. 몇 년째 계속되는 조선업 불황이 감지됐다.
내가 학기 중 머무는 거제 두 개 대형조선소는 외국 선사로부터 조선 수주 실적이 오른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다. 근년 들어 거제 조선 경기는 겨울잠을 깨고 기지개를 켠다고 한다. 그러나 진해의 중형 조선소 stx는 여전히 침체의 늪을 헤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대숲 울타리 너머로 둔탁한 마찰음은 들려오지 않고 철판 용접 불꽃도 튀지 않았다. 겨우 명만 붙은 부분 조업인 듯했다.
이면도로를 끝에 이르자 정지된 크레인과 텅 빈 도크가 드러났다. 조선소로 출근하던 그 많던 직원들은 어디로 떠났을까 궁금했다. 조선소 불황은 부품을 납품을 하는 하청업체 공장들도 연쇄 도산을 가져온다고 들은 바 있다. stx조선소 불황 여파는 진해와 창원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지 싶다. 예전에는 이면도로 주차장 곳곳 통근버스는 물론 승용차들이 빼곡했는데 썰렁했다.
수치 해안으로 들자 바다 건너는 거가대교 연륙구간이 드러났다. 침매터널에서 솟구친 교량은 중죽도와 저도를 통과해 장목 유호리로 이어졌다. 예전에는 그곳은 막연한 섬이라 여겼는데 내가 주중 머물면서 발자국을 남긴 산등선이고 포구였다. 이른 새벽어둠을 뚫고 달린 첫차 시내버스로 다녀갔던 상유와 하유와 구영이었다. 퇴근 후 날 저문 어둠 속에도 서성였던 포구이기도 했다.
수치 해안 몇몇 횟집들은 수족관 고기가 비어 손님 발길이 끊어진지 오래 된 듯했다. 찻집과 모텔들도 마찬가지지 싶었다. 해안을 따라 학개로 갔다. 학개는 토박이말이고 행정 동명은 합포였다. 횟집이 서너 채 있는 작은 포구였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에서 첫 승전을 거둔 이순신이 두 번째 해전에서 승리한 포구였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당국에서 세워둔 기념 빗돌이 있었다.
내가 앞으로 가려는 행암에서 합포를 거쳐 조선소까지가 진해 바다 70리 길에서 ‘합포승전길’로 명명 된 구간이었다. 산등선을 따라 난 포장도로를 걸으니 수치 앞 바다와 거가대교가 다시 한 번 훤히 드러났다. 맞은편에서는 나처럼 트레킹 나선 사내가 다가왔다. 그 뒤를 이어 중년 부부도 보였다. 행암으로 내려서니 진해 앞 바다와 시가지를 에워싼 장복산과 웅산이 우뚝 버텼다.
장천 산업부두에는 하역된 바다모래를 실어가는 덤프트럭이 자주 드나들었다. 장천에서 풍호동을 지나면서 철길을 따라 덕산동과 석동을 거쳤다. 임항선은 폐선 시키지 않음은 행암 바깥 군부대와 연관 있는 듯했다. 당국에서는 철길 주변을 공원으로 꾸며져 주거 환경 개선이 잘 되어 있었다. 내친 김에 경화시장까지 걸었다. 오일장터는 3일과 8일이면 서는 장날이 아니라 한적했다.
가끔 찾은 ‘박장대소’ 주점에 들렸다. 장날이 아니라선지 테이블엔 손님이 없었다. 주인장은 젊은 날 사학재단 교직에도 몸담은 적 있는 분이다. 주인장이 구워낸 명태전으로 진해막걸리를 시켜 자작으로 잔을 채우고 비웠다. 이태 전 내 임지가 거제로 정해지기 전 박장대소에 들렸다. 그때는 혹시 내가 진해지역으로 근무지가 정해질지 모르겠다는 기대감으로 사전답사 걸음이었다. 21.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