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동저수지- 유등천 안영교)
코스: 방동저수지입구-구봉산(263.1m)-대고개-구름다리-구봉정-헬기장-괴곡동 고릿골마을-새뜸 느티나무-갑천-정림중-효자봉(194m)-쟁기봉 (193m)-유등천 안영교
(9.4km/5시간)
행복한 사람.
요즈음엔 이따금씩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자주본다.
새벽 1시경 지하철역을 청소하는 60대쯤의 여성이 보인다.
플랫폼 벽 아래 의자 주위에 떨어진 쓰레기들을 빗자루로 쓸어내어 쓰레받기에 담는다.
수세식 변기를 세제로 닦고 반들반들하게 윤을 낸다.
저런 여성들의 수고로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악취 없고 깨끗한 지하철역이 되는것을 알았다.
노조가 파업할 동안 파리의 지하철역에 진동하는지린내를 맡아본 적이 있다.
낙서 가득하고 더러운 뉴욕의
지하철을 탄 적도 있다.
화면 속의 그녀는 밤일이 끝난 후 혼자 사는 단칸 지하방으로 돌아가 밥을 먹는다.
잠시 후 그녀가 또 다른 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백화점의 종이 쇼핑백들이 방바닥에 가득 쌓여있다.
그녀는 종이 쇼핑백에 플라스틱 손잡이를 끼우는 일이다.
한 장 끼우는데 10원이라 몇시간을 해야 겨우 8,000원 을 번다고 한다.
그외에도 그녀는 공공근로나 일거리만 있으면 마다하지 않고 다 하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녀가 방에 앉아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제 번 돈으로 오늘을 살고 생존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한다.
그걸 보면서 가슴이 찡하고 내가 편하게 사는 게 죄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변호사를 40년 하다 보니까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도 보았다.
소아마비로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편한 여자 판사 였었다.
명문 여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시에 일찍 합격하고 판사가 되었다.
그녀가 있는 판사실을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녀는 내게 다음 번 세상에는 청소부나 매춘부가 되더라도 정상적으로 걸을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 같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 말의 진정성이 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천만명의 기독교 신도들이 애창하는 찬송시를 지은 여성 시인을 여러번 만났다.
심한 뇌성마비로 그녀의 몸은 작동기능을 거의 잃었다.
물체같이 굳어버린 몸에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두 손가락과 높은 아이큐의 두뇌 뿐인 것 같다.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이따금씩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그녀에게 가서 목욕을
시켜주는 봉사를 하는 여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목욕을 시켜 주고 돌아갈 때 혼자 몸을 닦을 수 있는 것만도 행복이라고 느꼈어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뇌성마비의 그녀는 유일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카톡을 통해 내게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변호사님 한번만 입을 테이프로 막고 손발을 꽁꽁 묵고 사람들 사이에 쳐 박혀 있어보세요. 그게 60년 넘게 일생을 지내온 제 상태랍니다.’
나는 그 머리 좋은 찬송 시인이 다리를 절더라도 혼자 일어나 걸을 수 있다면, 혼자 목욕을 하고 혼자 밥을 먹을 수만 있다면, 분명 행복해 할 것 같았다.
나는 가난하고 험한 삶의 밑바닥에서 맑은 샘물같은 행복을 퍼 올린 사람을 많보기도 했다.
노동자 출신 시인인 그는 폐암 말기였다.
달동네 꼭대기 어두컴컴한 임대아파트 방에 혼자 누워 있는 그를 찾아갔다.
세상의 고난은 모두 그를 찾아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난과 고독, 병과 늙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고통의 바다인 이 세상의 마지막 파도에 그는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같이 죽어가는 환자가 하루종일 누워있을 수 있는 방이 있다는 게 감사해요.
이웃의 중학교에서 급식에 남은 누룽지도 가져다 주지요.
성당에선 나물 반찬까지 가져다 냉장고에 넣어줘요.
목욕 봉사를 하는 분이 더러 와서 몸도 씻겨준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투명한 이슬이 맺힌 호박꽃이 보입니다.
누가 호박꽃을 밉다고 표현 하나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요.
저는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시인은 내가 만난 후 죽을 때까지 몇 달 동안도 매트리스 아래 공책과 연필을 놓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그는 내가 그의 마지막 시집을 내줬으면 하는 것 같았다.
어젯밤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환한 달빛 띠가 펼쳐진 번들 거리는 밤바다를 보았다.
하늘에는 총총한 별들이 떠 있었다.
멀리서 색색으로 반짝이는 보석같은 부둣가의 불빛들이 검은 바다 위에서 물결쳤다.
걸으면서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하루하루 에서 작은 성취와 기쁨을 발견해 내야 하는 건 아닐까 하면서 오늘도 걸음을 멈출수 없네요.
이런 저런 궁리와 고민을 다방면으로 하다보면 별거 아닌 가운데서도 뜻밖의 좋은 결과의 실마리를 잡아줄 기회가 생길 것이란 작은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차츰 얼굴의 주름살이 늘어나고 거울속의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허무하고 쓸쓸해지는 마음이 자꾸만 무거워 지지만 인생이란 어차피 늙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데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사실 늙어지기 시작 하면서부터 시간적 여유는 많아졌지만 그 여유를 여유로 그냥 두지 않은 게 지금의 나의 생활이다.
가족의 부양(扶養)도 아니면서 내 일생동안 이렇게 바쁘게 살아보기는 요즘 나의 삶인가 싶다.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나 자신을 두고 슬퍼하거나 괴로워하기보다는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주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가면서 늙은 몸이지만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이루어 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서로가 서로의 사정도 모르고 서로를 부러워하며 질투를 하는 그런 시간에 노년을 마음껏 나름대로 즐기며 행복한 마음을 만들어 가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기도 할 것이다.
더 이상의 많은 행복도 이제는 바라지말자.
이 정도에서 마음만 비운다면 이 세상 모두가 나의 행복일 것이니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건강이나 돌보면서 작은 행복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도 무사한 하루에 대해 감사하며 다음 가야할 산줄기를 골라보지만 주변에 같이하던 동료가 한사람 두사람 주변을 떠나갈 때면 괜시리 슬퍼지는 이심정을 어느누가 알아 주겠는가.
차츰 가까워지는 내 순서를 막연하게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금이니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할 지라도
베풀어가며 살아갈 생각이다. 남아있는 생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부디 좋은 기억으로 영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도 B조 산행이다.
C조 개인산행팀외 7명은 둘레길 차원의 여유로운 발길이었다.
A조 종주팀도 이리로 올 것이다.
가지않은 산들을 눈으로 그리면서 변두리를 돌아돌아 걷는다.
이런 노거수도 보고...., (버드나무)
고택은 사람이 살고 있기에 들어가보진 않았다.
고릿골 구름다리 아래.
700년된 느티나무 고목.
700년된 느티나무와 함께.
갑천을 내려다 보고..,,
낚시하는 사람도 있고.
갑천을 건너면서,
오순도순 얘길하며,
학교들도 지나고.
탱글탱글한 탱자.
하얀맨드라미.
급수대.
간만에 나오신 정규청씨.
이젠 많이 시원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땀이 줄줄,
안평지맥을 넘어갑니다.
(2018년1월 14일 종주)
6년 만에 다시 찾은 안평지맥.
맥을 따르지 않고 마을길로 탈출.
축구장쪽으로 하산.
유등천교를 건너 뿌리공원입구로,
산행을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