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의‘개여울’첫 사랑의 아름다움이 흐르고 있다
봄이 오는 길목에 여울물이 사랑의 노래를 한다
첫사랑과의 이별 담은 詩, ‘ 개여울 잔물’ 등 창작 단어 사용
진달래꽃보다 먼저 발표…대표작 개여울에서 초혼까지 이어진다
개화기에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배출된 한국 정상급 문인이 생각보다 많다.
나이 순으로 소개하면 소설가 이광수는 1892년 갈산면에서 태어났고,
1년 후 김억은 곽산면에서 태어나 오산학교 졸업 후 일본에 유학,
게이오대학 문과를 중퇴하고 1916년 귀국해서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억은 당시 서구의 시들을 전문적으로 번역,
한국 최초의 번역 시집인 ‘오뇌의 무도’를 발간함으로써
이 땅의 현대시 발전에 촉매제 역할을 한 시인이다.
소월 김정식은 1902년 9월 7일, 평안북도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 외가에서
부친 김성도와 모친 장경숙의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조선은 개화 말기로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 영토였던
만주와 대한제국의 정치 외교 경제권을 장악하던 시기였다.
아버지 김성도가 곽산과 정주 사이에 경의선 철도를 놓던 일본인 인부들에게
어떤 일로 심하게 두들겨 맞아 폐인이 되면서,
소월은 가부장적이었던 조부의 보살핌으로 성장했다.
소월은 1915년 13세에 오산중학교에 진학했는데,
그해 봄 꽃피는 계절에 동급생 오순이와 운명처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이듬해 조부의 강압적인 권고로 외갓집 근처 평지동의
처녀 홍단실과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은 오순이를 만날 자격을 상실했다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진달래 꽃’의 첫 구절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고 읊은 것이다.
그러므로 ‘진달래 꽃’은 김억의 지도로 1916년께 초안이 잡힌 시로 짐작된다.
‘개여울’은 1922년, 소월이 20세 되던 해 천도교 교단이 후원하던 월간 잡지
‘개벽’ 6월호에 실렸다.
당시 기록들을 참고하면‘진달래 꽃’은 한 달 후인 7월호에 또 게재됐다.
1921년 오순이가 시집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마음속 깊이 품어왔던
그녀와의 이별을 아쉬워했던 소월의 심정이 물망초의 꽃말처럼 담겨져 있어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그러나 ‘개여울’이란 말은 우리말 사전에는 없다.
소월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벽지에 개여울이란 제목 뒤에
물가 ‘저’(渚)자로 토를 달아놓았다.
이 토를 해석하면 겨울에는 하상(河床)이 말라붙어 아예 물기가 없다가
봄비가 내리면 계절을 따라 시냇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하는 개울을 뜻한다.
물 깊이는 발목이 잠길 정도로 얕으며,
자갈과 모래가 섞인 평지를 만나면 7~8㎡ 정도의 얕은 물웅덩이가 생겨나기도 한다.
‘여울’이란 물 깊이가 허벅다리 혹은 엉덩이까지 잠기는 비교적 깊은 곳을 뜻한다.
‘개살구’란 말이 있듯이 이 여울물은 아직 하상의 대부분이 땅으로 남아있는
여울이라는 뜻에서 ‘개여울’이란 명사를 소월이 창작해 붙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른 봄,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얕은 물이 넓게 고인 수면에
한줄기 봄바람이 스쳐 지나면 개여울 표면에 작은 파장의 물 주름(1.7㎝ 이하)이 생긴다. 파장이 연속적으로 간격을 두고 일어나기도 하는데 소월은 이런 풍경을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라고 얄밉게 읊었다.
위의 ‘파릇한’이란 표현도 색상이 약간 파란 듯하게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므로
3월 초쯤 아주 이른 봄날의 정경을 묘사한 것이리라.
잔물결이란 말은 사전에 있으나‘잔물’이란 단어는 역시 사전에 없다.
‘개여울’의 전문을 고려할 때,
시내 바닥 군데군데 고여 있는 얕은 물을 가리키는 풍경인 것 같지만,
소월이 주관적으로 만들어 낸 시어이기 때문에 상징적 혹은 추상적인 표현으로
명료한 분석이 불가능하다.
두 번째 연의‘파릇한 풀포기가 돋아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라는
표현에서도 ‘풀포기와 잔물’은 소월이 창작한 단어이다.
그러므로‘파릇한 풀포기, 잔물이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라는 시구에서
시인은 개여울이란 이른 봄의 어떤 자연의 한 공간 풍경을 내면적 또는 신비적이거나
심오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이런 표현이 바로 상징적이기 때문에 이 시가 상징주의 색채를 지녔거나
혹은 상징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징주의 시는 19세기 초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 ‘검정고양이’ 등
전율적인 문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선구자 보들레르 등에 의해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던 시의 한 유파이다.
소월의 시들 가운데 ‘개여울’의 둘째 연은 표현기법 자체가 서구 상징주의 특징을 가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김억은‘진달래 꽃’보다 한 달 먼저 개벽지에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오순이가 1924년 남편의 심한 의처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소월은 그녀의 장례식에 다녀온 후‘초혼’을 지은 것을 보면 면면히 이어져 온
그녀와의 인연에서 소월의 시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시의 첫사랑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1902~1934년)의 시집 《진달래꽃》
올해로 출간 100주년을 맞았다.
김소월 시집은 훗날 ‘진달래꽃’‘못 잊어’ ‘초혼’ ‘금잔디’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 후일’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엄마야 누나야’ ‘소월 시선’ 등
소월의 사랑의 노래
오산중학교 동급생 신 여성 오순이
첫 사랑 오순이를 그리워
봄 바람이 여울을 지나며 개여울 지나면 작은 물 주름이 생긴다
사랑에 마음이 떨린다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신비적이고 심오한 공간 개여울
사랑을 속삭인다
첫 사랑을 마음에만 그린다
개여울 / 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물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 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約束)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할아버지의 강압적인 권고로 외갓집 근처 평지동의
처녀 홍단실과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소월은 오순이를 만날 자격을 상실했다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혔다.
오순이도 시집을 가에 되어 마음으로 그리워 하며
진달래꽃이란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3월에 산천을 분홍빛으로 물들일 진달래꽃을 기다리며,
한국인의 최고 애송시 ‘진달래꽃’을 음미해 보자.
소월의 진달래꽃 영혼이 세계인의 가슴에도 뜨거운 울림을 줬으리라.
진달래꽃/ 김소월
When seeing me sickens you (나 보기가 역겨워)
and you walk out (가실 때에는)
I’ll send you off without a word, no fuss.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Yongbyon’s mount Yaksan’s (영변에 약산[藥山])
azaleas (진달래꽃)
by the armful I’ll scatter in your path.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With parting steps (가시는 걸음걸음)
on those strewn flowers (놓인 그 꽃을)
treading lightly, go on, leave.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When seeing me sickens you (나 보기가 역겨워)
and you walk out (가실 때에는)
why, I’d rather die than weep one tear.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첫사랑 오순이가 잘 살기를 마음으로 빌었지만
오순이가 1924년 남편의 심한 의처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소월은 그녀의 장례식에 다녀온 후‘초혼’을 지은 것을 보면
면면히 이어져 온 그녀와의 인연에서 소월의 시가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혼(招魂)/ 김소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