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당시 농촌은 다그러 하였지만.... 저는 어린시절을 참으로 힘들게 보낸것 같습니다. 할아버지때는 마당백석을 하는 부자였다고 하지만.... 저는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끼니를 죽으로 국수로 때우고 으례 학교에 돌아오면 소꼴을 베고 소먹이고 개간밭에서 늦게 돌아오던 부모님을 대신하여나무를 때어 저녁밥을 짓고 겨울방학이면 어린나이에 지게를 지고 어른들과 같이 산에 땔나무를 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아버지는 원래 강한 체질이 였지만.... 이웃의 어려움을 보면 집안식구들이야 굶어 죽든살든 남의집 먼저 걱정하시고 많은 재산을 어려운 이들에게 빌려주고 돌려 받지도 못하고.... 해방공간에서 빨치산 산패들이 우익 청년단장집에 불을 질러 불에타는것을 새벽에 오줌누러 밖에 나오셧다 불이여 라고 소리쳣다고 다음날 영문도 모르고 지서에 끌려가 경찰과 우익청년단 테러집단에게 죽도록 얻어 맞어도 원래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라 경찰서에 넘겨져도 엄청나게 얻어맞고논밭을 팔아 풀려 나셨다고 합니다. 평생 억울한 화와 장독으로 농사일을 제대로 못하신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아버지가 양반집 부잣집 둘째아들이란 말만 믿고 그당시는 보기드문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춘 분이신데... 아버지 얼굴도 한번도 못보고 우리집에 시집을 오셨다고 합니다. 일평생 호강은 고사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선조들은 이성계쿠테타에 반기를 들다가 두문동 70賢人에 한분이십니다. 평생 재야사림에서 민초들과 동고동락 하면서 사시다가 숙종때 남인천거로 잠시 白衣 이조판서로 조정에 나간것을 마지막으로 그뒤 300년간 이조가 망한 고종때까지 외세에 앞잡이 백성의 착취수탈세력인 노론들과 맞장을 뜨다가 귀양과 유배생활을 거듭 하면서 지키며 사신것 같습니다. 중앙정계진출은 노론세력들의 괘씸제인 연좌제에 걸려서 그길을 마지막으로 벼슬길과는 영영 담을쌓고 江湖의 머물면서 부패한 노론과 지배권력에 맞서 가난한 선비의 양심과지조를 지키며 이조봉건 시대 외적이 침입하면 앞서 재산을 털어 의병을 모아 의병장으로 나섰습니다. 곳곳에 항일순직비가 있습니다.
외가에 남자들은 기골이 강대하고 뱃짱이 좋고 한학과 신식교육을받은분 같습니다. 어릴때 주위에 나이드신 어른분들이 나보고 너 외아재는 통이 크고 베짱도 좋고 잘생기신 훌륭한 사상객이라고 너도 크면 큼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일제때 훌륭한 사상객이라고 많이 들었습니다
일제때부터 외삼촌들은 사회주의독립운동을 하셨다고 합니다. 일본경찰이 온몸을 인두로 지지고 거의 초죽음이 되도록 고문을해서 내놓으면 집에서 정성껏 치료를 햇서 보양한것을 어릴때 옆에서 보신 어머니가 가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1930년대 말부터 민족,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견디지 못하고 다 친일민족반역에 길로 돌아 섰지만... 외아저씨는 끝가지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일제말 일본고등계형사가 위에서 전령이 왔는데 여기에 있으면 죽을지 모르니 멀리 피하라 해서 서울로 가족이 전부 이사를 갔하신것습니다. 당시 그래도 일본 형사는 직책상 어쩔수 없이 악랄한 고문을 했지만... 독립운동가와 사상객에 대해서는 인간적 존경심과 대우는 정중히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놈 밑에있는 조선인 고등계 형사보조하는 인간들이 더 야비하고 악랄했다고 합니다.이사가서 일제 해방후 해방공간에서 나이든 외가 형님 들은 서울홍릉 옛서울공대근처에 사시다 우익테러로 돌아가시고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사상의 고향을찾아 북으로 가신지 그 생사를 알길이 없다.
오래전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연관되어 6년간 옥고를 겪은 기록을 찾아서 사회주의독립운동가도 유공자로 추서한다고해서 국립 문서보관서에 자료을 찾아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한적이 있습니다. 담당직원의 말인즉 이런분들을 마땅히 일제때 독립운동 서훈을 해야하나 북에서 농림차관까지 하신분이라 현행법으로는 곤란하니 훗날 좋은세상이오면 하라고 한다.
내위로 형들이 있었지만 그당시 농촌은 예방의학이 제대로 안되어 요즘 같으면 큰병도 아닌데 어릴때 저세상으로 다 보내야만 하였고 그래서 바로위 누나와는 12살 차이가 납니다. 그당시 가난한집 아이들은 다 그러 하였지만 나는 다른집 애들보다 더어렵게 산것 같습니다. 국민학교 저학년 어린나이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었습니다. 어김없이 일요일이 되면 뒷산 500고지가 넘는 개간밭에 이른 아침을 먹고25키로가 넘는 쟁기나 비료를 지고 오ㅡ르막 산길을 올라가 올때는 내리막길이 쉽다고 40키로가 넘는 땔나무를 지고산꼭대기에는 해가 있지만 ...집에내려 오면 저녁 9시가 가까운 밤중 입니다. 그때 어린나이에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힘들고 고단했으면 .... 소원이 더도 덜도 아닌 제발 일하고 내려갈대 빈짐으로 가고 싶다고 했을까요 평소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소를먹이고
소꼴을베놓고 마을뒤 집에서 10리 이상 떨어진 개간 밭에서 일하시고 밤 늦게 돌아오시는부모님을 위해 나무를때어 쌀이 귀한 시절이나 보리쌀을 삶아 불려서 밥을 지어야했다. 나무를 때어 밥을 하다보면 물과 불을 조절을 잘못하여 밑에는 타고 중간에만 밥이되고 위에는 죽이되는 삼층밥이 되기가 일수 였다. 각자 식미와 좋아하는 대로 먹으면 되지 하지만.... 밥도 아니고 죽도 아닌것이 생쌀을 그대로 먹는것 같은 가난해서 오래 먹다보니 질려버릴것 같다.
평소에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에 소먹이로 가는것이 일상사였다. 산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산딸기등 나무열매를 따먹고, 나무를베어 칡으로엮어 어설프게나마 원두막도 지어보면서 그때 어린시절 산에서 뛰어놀며 호연지기와 야생성을 키우면서 ......... 자연속에 살아가는법을 일찍 배운것 같기도하다. 부모님은 농사일에 바빠서 한번도 자식에게 이래라 저래라 별간섭은 없으신것같다. 모든것을 너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그냥 내버려두셨다. 산에서 감자를 삶거나 구워먹으면서 형들이 재미있는 이야기에 날이 저문줄모르고 듣다가 소를타고 집에돌아오고 .....
딴집소들은 등에타면 발로차고 난리를 피우지만 ......... 우리소는 어머니와 내가 소를 가족의하나로알고 사랑으로 보살펴서 그런지 ........... 소가 죽을안먹고 아플때는 소마구에서 같이 자기도했다. 어릴때 소장수에게 소를팔아 일주일넘게 밥도 안먹고 울정도로 소를 끔직히도 사랑했다. 항상 소는 나의분신이였고 내사랑의 대상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소도 내마음을 아는지 내가 소를 타면 가만히 등을 내밀어 주었다. 아마 그때를 생각하니 감성지수가 소,돼지,개가 사람보다 높은것 같다.
어머님은 소등이 굽는다고 절대로 소를 타면 안된다고 야단치시지만......... 부모님몰래 어린 우쭐한 마음에 .......... 동네 동생과 형들이 부러움속에서 소먹이러 갈때는 언제나 개선장군처럼 제일앞장서 소를 타고다녔다. 특히 동네사람이 모여있는곳과 동갑내기 여자애들이 노는곳에서는 일부로 보란듯이 소를 타고다니기도 했다. 저는 중학교 어린나이에 이미 아버지를 대신하여 어른 장정들과 대등한 노동력을 갖추어 모내기 손바꿈 품앗이를 할정도 체력과 노동력을 길러야 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슬며시 웃음을 짓고 하지만 ........ 모듯것이 부족하고 가난하고 힘든시기 였지만 ........ 그속에서 재미있는 어린시절을 즐기며 보낸것같다. 누나들도 예외가 없습니다. 아버지 농사일을 대신하여 낮에 남이 볼까봐 처녀들이 지게를 질수가 없어서 밤에 볏단을 지게로 져 나르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강하게 자란누나와 동생들이 가난하고 어려운집에 시집가서 자식들 잘키우고 成家해서 잘 사는것을 보면 어릴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닌것 같습니다. 그당시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자녀 교육은 요즘사람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사내애는 다섯살만되면 안방 어머니 곁에서 사랑방 아버지 방으로 사정없이 내쫓아 버립니다. 사내가 안방구석 여자들속에 크면 암사내가 되어 제대로 사내답게 크지 못한다는 것이였습니다. 부부사이라도 합방할 시기가 아니면 부부유별이 엄격했고 유가적법도에 철저했습니다. 누가보든 안보든 행동을 함부로 하지않으시고 아무리 화가나도 어머니에게 욕설은 하지 않으신것 같습니다. 사랑방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글을 읽거나 본인일만 하시면서 집안식구에게는 엄했지만 내집보다 이웃을 먼저걱정하고 꼿꼿하게 사시다 가셨습니다. 네다섯살 어린나이에 새벽단잠을 깨워 찬물에 세수하고 꿇어앉아 천자문을 외우게 하고 제대로 외우지 못하거나 잘못 읽고 해석하면 예외없이 몽치미 (木枕)위에 종아리를 걷고 올라서게하고 싸리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리셨습니다. 당시 자식은 속으로 사랑하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는것이 전통적 자식교육 방법이였습니다. 늦게 얻은 귀하게 얻은 아들이지만 엄하게 키워야한다는 교육관이 확고한것 같습니다. 자식을 속으로 사랑했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신것 같았습니다.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참으로 야속하게 느껴 졌습니다. 지금도 아버지像은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賞罰은 사사로운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분명 하셨던것 같습니다. 저의 어릴때 기억력은 좋았던것 같습니다. 네 다섯 살때 천자문을 달달외왔으니
지금도 제밑 동생 해산을 큰집 백모님이 와서 도와주는것을 기억하고 어머니 등에 엎혀 시장에 가서 가르쳐주지도 않는 한글과 한자로된 간판을 읽고..... 그때 주위에서는 무슨 큰 난리를 낼줄 알았겠지만.... 지나보니 전생의 기억이 5세까지 간다고 한다 어릴때 능력을 찾아서 제대로 키워주지 않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다 그렇고 그런 삶을 살다가 가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의 제도권학교 공부는 당시 6학년때를 마지막으로 별로 열심히 해본적이 없습니다. 별 재미도 없고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가 죽도록 얻어막고 부터 싫은 공부를 왜 죽자사자 해야하는지 의문도 들고 해보니 별 재미가 없고 어린나이에도 시시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당시 서울에서 혼자 고학하면서 대학을 마치고 이제 막 직장을 잡아서 어렵게 사는 큰누나가 중학교를 서울에 데려가서 시키겠다는 말만 믿고 공부를 한것 같습니다. 당시는 중학교를 모두 시험봐서 갈때니까요 밤에 담임선생집에서 함께 합숙을하며 공부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서울에 원서를 한번 내보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새롭습니다. 서울에 공부하는 꿈이 깨어지고 부터 중학교때 나보다 한해 위 친구가 앞장이 날라간 교과서를 물려받아 좀 하다가 그냥 빈가방으로 학교에 들락거린 뒤로 고등학교때 별로 공부한적이 없는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이해부족은 어렵게 학교를 마치고 사는 딸에게 학비도 제대로 보태주지 못하면서 짐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서울유학이 중도에 좌절되어 어린마음에 너무나 실망하여 상처가 커서... 성인이 되고도 오래도록 내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때부터 학교공부와는 담을쌓고 중학교때 공부가 재미없고 하기도 싫어 놀기만 좋아하던 때 그냥 생각없이 농고를가서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말이 씨가되어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때 부터 땔감 준비를 위해 겨울철에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 가까이는 나무가 없어서 걸어서 오르막 내리말길을 10리 거리는 매우 가까운 거리였다. 한번은 열살 어린나이에 소등에 나무를 싣고오는 동네 머슴과 어른들따라 왕복13km 나되는 이웃동네산으로 나무를하러 간적이있다. 산에불이나서 소나무잎이 벌겋게 말라 온산에 왠나무가 이렇게 많은가 싶었다. 잎만 말랐지 완전히 생나무였지만. 그것도 모르고 나무에 욕심이나서 다른사람은 서둘러 다 집에가고 나혼자 남아 겨우 일어설 정도로 한짐을지고 무거워서 조금가다가 쉬고 쉬면서 점심도 저녁도 굶고 별이뜨고 나서야 밤이늦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왔다. 집안사람들이 횃불을들고 밤늦게까지 애가 오지않아 나를 찾으러 오고 야단이났다. 한번은 12살때 겨울 시골장날에 지게에 나뭇짐을지고 나무를 팔러갔다가 아버지께 죽도록 맞은적도 있다.
이어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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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비슷한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잘 읽고 갑니다
어렵고 힘든 때였지만
그래도 그때 함께 했던 분을 만나뵙게 되어 너무나 반갑습니다.
그 시절 이해가는 글.
소를 키우셨다니 그래도 부자이셨습니다.
참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그때가 오히려 그립기도 합니다.
그때는 집에 농우로 한두마리 집 음식 찌꺼기 꾸정물로 소죽을 쒀 먹이든 시절 요즘같이 대규모로 사료먹여 키우는 때와는 전혀 다릅니다.
소 한마리가 전재산이고 한식구와 다름이 없었는것 같습니다.
어릴적 시골일상을 소상히 맛깔나게 쓰셨네요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부족한 글 끝까지 읽어 주시고 아낌없는 격려를 해주🐨 부끄럽고 고맙습니다.
선생님 께서도
건강하고 행복 하시길 바랍니다.
글을 읽으면서 어린 꼬맹이가 너무 기특해서 미소가 절로 납니다
지역이?
제 어린 시절이 생각나며 글 읽는 내내 공감이 갔습니다.
단편 소설을 읽은 것 같습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뭐 저야 말그대로 시골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소풀이나베면서 살아오다가 어찌어찌하여 서울올라와 직장생활을 했지만 그래도 저보다는 훌륭하시네요 모쪼록 항상건강하시고 행복한날들 보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