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년 자바에서는 켄 안로크가 싱가사리라는 왕국을 세웠다. 이 나라는 제 5대의 구루타나가라 왕이 이웃 나라 게랑구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고 바로 전해인 1292년부터 국운이 쇠락하고 있었다.
그 후로는 구루타나가라 왕의 사위 비자야가 마자파히트에 수도를 두고 게랑구와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원 세조 쿠빌라이가 자바 원정을 단행한 이유는 몇 번이고 사신을 보내 원에 조공을 바치도록 재촉했는데 그것에 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3년 전에는 사자를 모욕해서 쫓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모욕이란 사신의 얼굴에 문신을 새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적에 의한 형벌이므로 원의 사신을 도적 쯤으로 간주한 모양이었다.
쿠빌라이는 이런 무례에 격노하여 1292년, 병사 2만 명과 전함 1천 척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동원해 자바를 치도록 지시했다. 2만 병사들의 집결지는 복건의 천주였다. 사령관은 사필이었으며 위구르인 이크미슈와 복건과 온주에서 해적과 싸운 적이 있는 고흥도 종군했다.
그러나 원군의 사기는 그리 높지 않았다. 원정을 지시한 쿠빌라이의 나이가 80에 가까워 언제 서거할 지 몰랐고, 이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령관 사필은 전장에서 적극적일 수가 없었다. 또한 익숙하지 못한 장거리 항해로 인해 병사들의 마음도 불안했다.
더구나 원의 사신을 모욕한 구루타나가라 왕은 이미 살해되고 싱가사리 왕국은 멸망해 버리고 없었다. 따라서 누구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싸워야할 주적의 동정과 현지의 정보에 어두웠고, 더구나 구루타나가라 왕의 사위 비자야는 교활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원군은 농락당하고 말았다.
비자야는 처음에는 원군과 협력해서 자신의 적인 게랑구를 치도록 했다. 비자야와 원군의 연합군은 협력해서 게랑구를 격파했다. 게랑구 군대는 수도인 케디리 성 안으로 쫓겨가고 원과 비자야 군이 이를 포위했다. 성은 함락되고 게랑구의 국왕 핫지가탕은 마침내 투항했다.
드물게 치루는 격전이었는 듯, <원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껴안고 강으로 뛰어들어 죽은 자가 수만 명, 5천 여 명이 살해되었다.
원군의 총수 사필은 이만하면 자신의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게랑구 국왕과 그의 가족, 대신들을 포로로 잡고 성 안에서 노획한 보물들을 가지고 귀국길에 오르려 했다.
그런데 원에 협력했던 비자야가 돌연 배신을 하고 말았다. 원군으로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었으나 비자야에게는 예정된 행동이었다. 적인 게랑구를 원의 힘을 빌려 멸망시킨 것 뿐이었다. 게랑구가 소멸하면 비자야에게 원군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자국과 가까운 곳에 외국 군대를 더 이상 오래 머물게 하면 위험이 되리란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게랑구와 싸우느라 힘이 빠진 원군을 격퇴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필이 이끄는 원군은 배신한 비자야군과 싸우면서 어렵게 귀국길에 올랐다. 적에게 쫓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게랑구군을 격퇴하고 국왕인 핫지가탕을 포로로 잡고 있었으므로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전투는 아니었다.
- 바다를 건너 행군하기를 68일 낮과 밤, 마침내 천주에 이르다.
그다지 훌륭한 개선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망한 병사가 3천여 명으로 너무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자바 전투를 보고 받은 쿠빌라이는 '그의 (병사)손실이 너무 많았으므로 곤장 70대, 재산의 3분의 1을 몰수하라'란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총수 사필과 이크미슈에 대한 처분이었으며 고흥은 처벌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공과를 논함에 있어 공이 많다'라는 이유로 오히려 금 50냥을 상으로 주었다.
이 전투를 쿠빌라이는 승리라고 보았을까, 아니면 패배라고 보았을까?
이 때의 원정군을 2만이라 일컫고 있었지만, 사실은 5천 명 밖에 가지 않은 것 같다. 2만 명을 위한 군자금을 지출했으니 차액을 반환케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쿠빌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말했다.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짐이 중지시켰던 것이다. 반환할 필요는 없다."
아무튼 이상한 원정이었다. 귀국 후 곤장형을 받았으니 승리라고는 할 수 없고, 곤장형을 받은 뒤 재산의 3분의 1을 몰수당했으니 결코 가볍지 않은 처분이었더.
2년 후인 1294년, 쿠빌라이가 사망하고 새 황제인 테무르가 즉위하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부터 다음과 같은 상주가 있었다.
- 사필 등은 5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기를 25만 리, 최근까지 일찍이 가본 적이 없는 나라로 들어가서 그쪽 왕을 생포하고 항복시켰다. 이러한 전공을 다시 참작해 주기 바람.
이것에 의해 사필 일행은 몰수된 재산을 다시 반환받았을 뿐더러, 평장정사로 승격되었다.
한편, 사필과 연합해서 게랑구를 토벌하고 그 뒤 원군을 배신했던 비자야는 곧바로 원과 화해를 했다. 양국 사이에 재빨리 통상이 재개되고, 상인의 왕래가 활발해졌다.
원군은 자바 원정에 끝내 실패했지만 (그 목적이 애매모호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패퇴한 것이니)1293년 전후에는 남중국해-자바해-인도양을 연결한 남해 무역로는 원의 세력권 하에 들어갔다.
그 증거로 <집사>와 <동방견문록>에서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마르코 폴로 일가가 함께 탄, 일칸국으로 시집가던 원 황실의 공주를 태운 함대가 천주를 출항하여 동남아시아 각 연안 도시에 기항하면서 이란의 호르무즈항까지 나아간 것이다. 쿠빌라이가 죽기 바로 전, 원의 자바 원정이 끝난 바로 직후의 일이었다.
두 세계를 꿰뚫는 무역로는 하나의 큰 순환체계로서 연결되었다. 유라시아 세계의 동쪽에서는 천주와 광주, 서쪽에서는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인도 남단에 가까운 말라바르나 마아바르 해안의 여러 도시들, 그리고 북쪽으로는 흑해 연안의 수닥, 아조프해에 면한 타나 등 항구도시들이 활발한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성종 테무르가 사망한 지 2년 후인 1309년, 원 무종 카이샨은 동남아시아 다도해 해역으로부터 인도양 방면의 지역 항구 도시국가들에게 황제의 칙사인 우호대표단을 해로로 파견했다. 쿠빌라이 이래의 정경일치에 바탕한 해상 무역로의 장악이라는 방식을 신정권으로서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라는 세계규모의 환상적인 평화와 안정 상태가 만약 그 나름대로 상정된다면 그것은 정치, 경제의 양면에서, 그리고 내륙과 해상에서 완전히 장벽이 없어진 이 무렵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문화, 사상, 기술, 정보, 종교, 산업의 벽이 이미 한 걸음 앞에서 제거되었다. 쿠빌라이의 구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 무렵에 실행되었다.
훗날, 원조가 북으로 철수하고 명조가 들어섰을 때, 명 3대 황제인 영락제가 단행한 정화의 대항해는 바로 이러한 원의 해상 무역로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출처: 스기야마 마사아키 <몽골 세계제국>
진순신 <칭기즈칸 일족>
김호동 <동방 견문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