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어야 한다. 문학적 고전은 정신의 양식을 예술적 감동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敎養(교양)을 쌓는 데에 최고의 교재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고전에 대한 깊은 이해는 교양교육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될 것이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가치판단에 있어서 합리성을 추구하며 偏向(편향)과 독선과 狂信(광신)을 경계한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이상을 추구하지만 이상에 중독되어 괴물(grotesque)로 변형되지도 않지만 현실에 몰입되어 정글의 짐승으로 전락하지도 않는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존재론적 혼돈’(ontological chaos)은 이해하지만 인간사회에 있어서 법과 질서의 중요성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최소한도 “남에게 폐가 되는 언행”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한국에서는 문학적 고전에 대한 교양교육이 未洽(미흡)하다. 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에서도 고전교육은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햄릿(Hamlet)’ 같은 인류 최고의 고전도 극소수의 전문학자를 제외하고는 내용을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저 작가나 주인공이름이나 알고 있을 정도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도 고전교육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논술고사 광풍에 온 나라가 허둥거리고 있다. 고전에 대한 지식이 극히 미약한 상태에서 어떻게 상상력이 풍부하고 날카롭고도 창의적인 글이 나올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교양에 필수적인 고전교육에 실질적인 보탬이 되고자 영화나 신문.잡지 등을 통해서 일반대중에게 다소 親熟(친숙)해진 영문학고전 15편을 선정하고 英·美 비평가들의 비평을 참고로 하여 고등학생과 대학생 및 일반인들의 교양을 위한 “국민교양을 위한 영문학산책”을 내놓게 되었다. 고전을 읽을 때는 1. 먼저 작품을 읽고 2. 해당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비평을 읽은 후에 3. 작품을 吟味(음미)하면서 다시 읽는 것이 고전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일상의 삶에 바쁜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서 작품의 줄거리에 맞추어서 해설을 하거나 별도로 줄거리를 제시하고 작품을 분석하였다. 영문독해력이 있는 독자들은 원문을 바로 읽으면 고전의 眞味(진미)를 더욱더 심도 높게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조지 오웰 이야기 정치적 이상주의의 허상 George Orwell(조지 오웰. 본명은 Eric Arthur Blair)의 '동물농장'은 전체주의 국가의 絶對權力者(절대권력자)와 절대 권력에 의해 이용당하고 고통 받는 인간에 대한 寓話(우화:allegory)이다. 東西古今(동서고금)을 통해 민중은 언제나 지도자와 지도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적인 제도로부터 압제를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이 오웰의 持論(지론)이다. 특히 전체주의 국가의 권력자가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자신의 絶對權力(절대권력)을 무자비하게 행사할 때 민중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된다. 폭정에 시달리는 민중에게 해방을 약속하며 권력을 장악하는 '혁명지도자'나 '이상주의자'도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오웰은 “기존의 폭군으로부터 권력을 물려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폭군은 항상 있다. 새 폭군은 전임자만큼은 나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폭군임에는 틀림없다” 라며 정치적 이상주의자들을 경계하였다. 그는 “도덕주의자(moralist)들이 급진주의자가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혁명가들은 도덕주의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의 모습(the shape of society)을 변경시키면 모든 일이 바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도를 變革(변혁)함으로써 모든 惡(악)을 제거하고 사회를 완벽하게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어떤 종류의 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라며 인간의 현실적 生存條件(생존조건)에 바탕을 두지 않는 觀念的(관념적) 사회혁명의 無望(무망)함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비현실적인 사상을 거부하라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사상은 그 것이 아무리 고상하고 이상적일지라도 거부하여야한다는 것이 오웰의 생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저항 독립운동가로서 聖人(성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Gandhi(간디)도 오웰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오웰은 간디의 聖者(성자)의 이상을 (성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인간이 되고픈 유혹을 결코 느껴보지 못한다면서)비인간적이라며 비판하였다. 간디의 無抵抗主義(무저항주의)도 영국같은 민주주의 정권하에서나 가능한 방법이며 나치스 독일이나 소련같은 전체주의국가에서는 전혀 효력이 없을뿐더러 항의시위에 참여하는 자들은 가차없이 처형당할 것이다. 그러나 오웰은 증오와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 정치투쟁의 理想(이상)을 실천한 간디의 숭고한 인격은 높이 평가하였다. 사기당하는 민중 간디처럼 증오와 권력의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간디 같은 인물은 인류역사상 예외적인 인물이다. 어떠한 인간도 증오와 권력욕을 超越(초월)할 수는 없다.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거나 경쟁자가 되는 삶의 투기장에서는 증오와 권력의지는 생존본능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인간이 조직을 이루어서 투쟁할 때에 생존의 가능성이 보다 더 확실하게 보장된다. 조직에는 어떤 형태로든 지도자가 있어야 조직이 유지된다. 대중은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지도자는 대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이들 지도자는 언제나 대중을 지배하거나 조작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래서 오웰은 “역사는 일련의 詐欺(사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詐欺劇(사기극)속에서 민중은 유토피아(Utopia)의 약속에 따라 蜂起(봉기)하도록 誘引(유인)되지만 일이 끝나면 새로운 주인에 의해 또 다시 노예가 된다.”라며 정치지도자와 민중의 지배-종속적인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인간은 계급적 동물이다 오웰은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당대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처럼 현실과 유리된 관념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서점점원, 농장 일군, 식당종업원, 교사, 가정교사, 방송요원, 군인, 영화평론가, 장기입원한자, 특파원, 작가 등으로서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관념이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浮浪者(부랑자)의 생활을 하면서 貧民(빈민)들의 고통을 체험적으로 관찰하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빈민들의 세계에도 精巧(정교)하고 엄격한 계급이 제도화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호텔종사원의 경우 위로는 호텔 총지배인으로부터 최하층의 화장실당번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업원이 계급화 되어 있었다. 요리파트에는 요리장, 요리사 인사관리자, 요리사의 계급이 있고 접대부분에는 급사장(headwaiter), 웨이터, 견습웨이터의 계급이 있었으며 객실정리담당과 화장실담당도 계급화 되어 있었다. 심지어 런던의 거지들 상호간에도 평등하지는 않았다. 인간은 계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계급적인 동물이라는 사실을 오웰은 체험을 통해서 인식하게 되었다. 계급은 인간의 생존조건이며 계급이 없으면 인간사회는 유지될 수가 없고 사회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환상이며 이러한 환상에 사로잡히는 민중은 혁명가나 정치인들의 권력획득이나 유지의 도구로 악용 당하기 마련이다.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오웰은 또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좌익의 편에서 우익 파시스트와 싸웠다. 그는 국제노동당 分遣隊(분견대)원으로서 스페인 동북부 Aragon(아라곤)전선에서 싸우다가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重傷(중상)을 입었다. 관념적이기보다는 행동하고 실천하는 인간으로 살아온 오웰에게는 부상으로 인해 實戰(실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커다란 타격이 되었다. 그는 스페인 공산당의 대숙청을 피해 프랑스군 전선으로 피신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는 공산주의자나 파시스트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무수한 시체를 보고 “역사는 친구와 친족이 無意味(무의미)한 內戰(내전)에서 파멸되고 투옥되고 잔혹하게 살해되는 정치적 분노의 이야기에 불과”하며 특정 이념으로 무장한 인간이 그 이념을 전체주의적으로 강행할 때 무참한 殺戮(살육)을 당연시하는 可恐(가공)할 참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웰은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고 사회주의가 전체주의로 타락할 때는 가차없이 비판하게 되었다. 위선적인 유럽의 지식인과 좌익작가들 뿐만 아니라 오웰은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정권이나 독재자를 용인하거나 이들에 대해서 비판을 유보하는 西歐(서구)의 지식인이나 좌익작가들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자유와 인권이 완전히 보장된 나라에서 성장하여 독재의 慘狀(참상)을 경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의 대다수 지식인과 좌익작가들은 肅淸(숙청)과 비밀경찰의 공포를 인식하거나 體感(체감)하지 못하고 단지 소련이 파시스트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련의 實狀(실상)을 바로 보기를 거부하였다. *오웰의 개탄 오웰은 ‘동물농장’ 序文(서문)에서 소련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는 영국의 지식인 및 당시(1930년대와 1940년대)의 사회분위기를 개탄하고 있다: <현재 영국의 정통 주류사회는 소련을 비판 없이 찬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있고 이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소련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소련정부가 掩蔽(엄폐)하기를 원하는 어떤 사실의 폭로도 출판되는 일이 거의 없다. 소련에 아첨하는 이러한 전국적인 음모에 대해서 기이하게도 지식인들이 관용과 침묵으로 대하고 있다. 소련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이 자유롭기 때문에 더욱더 기이하다. 스탈린을 공격하는 글은 거의 누구도 발표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Churchill(처칠)에 대해서는 신문이든 잡지든 책이든 어디에서나 마음 놓고 공격하는 것이다. (중략) 소련의 위신만 다치지 않는 한 언론의 자유는 잘 유지된다. 1941년 이후 소련의 선전을 그대로 삼키고 되풀이하는 대부분의 영국 지식인들의 비굴함은 그들의 지금까지의 행적으로 보아 놀라울 것도 못된다. 모든 이슈에 있어서 소련의 관점은 아무런 검증도 없이 수용되고 역사적 사실이나 지적인 품위도 없이 그대로 발표된다. (중략) 영국의 대부분의 지식인은 소련에 대해서 민족적인 충성을 바치고 스탈린의 지혜에 대해 의심을 품는 것은 일종의 不敬(불경)이라고 가슴속 깊이 느끼고 있다. 소련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 밖의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은 각기 다른 기준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일생동안 사형제도폐지 운동을 한 사람들이 1936년에서 1938년 사이에 일어난 소련의 대숙청은 찬양한다. 그리고 인도의 大饑饉(대기근)은 당연히 보도해야 되지만 소련의 우크라이나의 대기근은 보도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戰前(전전)에도 사실이지만 지금의 지적 분위기도 조금도 나아진 바 없다. (중략) “아무리 인기가 없고 아무리 어리석은 의견도 발표할 자격이 있는가?” 라고 물으면 영국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Yes(예)”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을 공격하는 말은?” 라고 물으면 대답은 “No" 일 것이다.>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나라에서 성장한 영국의 작가들 특히 좌익 작가들은 전체주의국가의 가공할 독재를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소련정권이 恣行(자행)한 대학살을 묵인하게 된 것이다. 전체주의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는 영국 좌익작가들에게는 소련의 恐怖(공포:horrors)는 觀念(관념)이지 實在(실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廣野(광야)의 외로운 先知者(선지자) 우리가 오웰을 높이 평가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사회주의자이면서도 사회주의국가 소련을 용인하고 찬양하는 시대의 主流(주류)에 沒入(몰입)되지 않고 소련의 독재와 蠻行(만행)을 바로 인식하고 비판할 수 있는 叡智(예지)와 勇氣(용기)를 가졌다는 것이다. 스페인에서의 경험은 이념의 이름으로 인간이 자행하는 악마적 폭력에 대한 오웰의 警覺心(경각심)을 심화시켰을 것이다. 그는 전체주의적 이념이 초래할 미래의 지옥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하는 先知者(선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廣野(광야)의 외로운 선지자였다. 그가 진리를 아무리 외쳐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1930년대 및 40년대 초의 영국 및 서구는 오웰의 경고가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오는 荒蕪地(황무지)같았다. 20세기 영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며 비평가인 T.S. Eliot(엘리엇)조차도 스탈린의 잔혹한 독재에 침묵하였으며 오웰을 외면하였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스탈린의 대학살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소련의 공산독재를 庇護(비호)하고 찬양까지 하게 되는 현상에서 인간 이성이나 인간 양심에 대한 신뢰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웰은 노동자계급은 인류가 생존의 과정에서 당하는 苦痛(고통: suffering)의 化身(화신)이며 노동자의 해방에 인류의 구원이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는 지식인은 노동자의 고통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을 구원 할 수 있으며 노동자를 위한 지식인의 희생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나는 압제받는 사람들 속으로 내려가서, 압제자들과 싸우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기를 원하였고(중략)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인 부랑자, 거지, 범죄자들, 매춘부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삶을 직접 보았고 일시적으로 나도 그들의 일부라고 느꼈었다. 내가 그들 중의 하나가 되고 그들이 나를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나는 사회의 최하층 바닥에 닿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 때도 비이성적이라고 의식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나의 죄의 일부를 떨쳐 버릴 수 있다-라고 느꼈었다. 그리고 나는 더러운 빈민굴속에서 그리고 무섭도록 지겨운 부랑자들의 하층세계에서 해방감과 모험심을 느꼈으며 지금 되돌아보면 그런 느낌은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생기발랄한 느낌이었다.” 라고 고백하였듯이 하층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 병적일 만큼 깊은 동정과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배신 오웰은 인류역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서 유럽 지식인들의 동경의 대상이며 압제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위해서 세운 나라로 자부하는 소련이 사회주의이념의 실천과정에서 전체주의국가로 변모함으로써 인류의 소망을 배신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가난과 억압과 착취가 없으며 지배와 피지배가 없는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약속으로 권력을 잡은 소련공산주의자들은 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변신하였다. 새로운 지배계급은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선전선동을 통한 대중조작과 대숙청이나 인민재판 같은 공포정치를 恣行(자행)하여 인민을 ‘자유의지와 생각이 없는 순한 대중’으로 전락시켰다. 그래서 소련은 소수의 관리자와 비인간화된 다수의 노예들이 한 명의 카리스마적 독재자를 우상숭배하도록 세뇌되고 강요당하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폭력이 일상화된 집단수용소 같은 나라가 되었다. 이념이 권력의 도구가 되고 독재자가 그러한 권력을 남용하여 인민을 공포로 지배하게 되는 나라는 마왕이 다스리는 地獄(지옥)이 된다. ,,,,,,,,,,,,,,,,,,,,,,,,,,,,,,,,,,,, 著者 약력 : 朴承用 1941년 일본 히로시마 출생. 부산교육대 졸업. 호주 시드니大 대학원 수학. 부산대 문학박사(영어영문학). 초ㆍ중ㆍ고교 교사. 장학사 역임. 2003년 부산중학교장 퇴임.
{동물농장 - 조지 오웰| 독후감 & 책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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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지 오웰의 ‘1984’라는 문학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다.
1984의 세계는 오세아니아의 위대한 지배자 빅 브라더가 통치하는 세계이다. 빅브라더의 사진은 거리 곳곳과 공공기관 집과 거리 등 어느 곳에나 붙어있다. 그리고는 그의 사진에는 언제나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세계는 이제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의 거대한 3대륙으로 나뉘어져 있고, 오세아니아는 3대륙 중 가장 큰 대륙이며, 오세아니아를 지배하는 ‘당’이 있고 그 당의 우두머리는 빅 브라더이다.
1984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곳은 감시받고 지배당하는 디스토피아이다. 그들의 세계 어느 곳 에서나 빅 브라더가 있듯이 그들을 감시하는 텔레 스크린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텔레 스크린으로 사람들의 행적 하나하나를 모두 다 감시한다. 그리고 심지어는 서로가 대화하는 소리까지 자동으로 녹음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당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행동을 한 사람은 그 다음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된다. 그들이 어느 곳으로 갔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유를 착취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디스토피아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로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자유 의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어느새 지구 최고의 통치자의 자리를 차지한 ‘빅 브라더’와 ‘당’에게 무조건 복종하고 철저히 감시당하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거부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긴다.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나오는 동물들을 살펴보자. 동물농장, 아니 동물공화국의 최고 통치자로 군림한 나폴레옹 그리고 그 밑에서 노동하고 감시당하는 동물들…. 그렇다. 동물 농장의 동물들 역시도 자유 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 ‘나폴레옹의 말은 모두 옳다’ 나폴레옹은 동물 농장의 최고 통치자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곳은 예전 존스의 농장과 다를 게 무었이 있는가? 그들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걸고 얻는 것이 무엇인가? 고작 쌓으면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풍차를 만드는 일과 기타 등등의 노동을 묵묵히 하며, 채찍을 들고 당당히 두발로 걸어 다니는 지도자가 잘 먹고 잘사는 일을 바라보는 것뿐이다.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꼭 세상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먼저 자신이 확고한 자유의식을 갖고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아야한다. 그리고 내가 한명의 사람으로서 내가 존중받아야 할 최소한의 인권을 존중받고 있는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당신은 자유의식을 갖고 있는가? 혹은 아직도 암울한 디스토피아에서 허우적대고 있는가?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들, 나를 단단하게 묶어놓는 족쇄들에 아직도 연연하는가? 저 먼곳에 당신의 유토피아가 있다. 당신이 기다리는 자유의 땅이 있다. 이제 당신이 저곳의 주인이 될 차례이다.
황지우 <조봉초 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