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엔 문이 없다.
문이 있어도 잠그지 않는다.
그래서 문이 없다.
어제 오전에 많은 양의 김장을 했다.
부르지 않았어도 동네 형수님, 누님, 아주머니께서 오셨다.
누가 언제 얼마만큼의 김장을 하는 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으므로 자발적으로 도와주러 오셨다.
고마웠고 흐뭇했다.
'내것' '네것'의 경계는 있지만 서로 나누며 공유하는 삶을 살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즐겁고 빠르게 맛있는 김장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월동준비'를 잘 마쳤다.
점심 때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성대한 ''수육파티'를 열기로 했다.
원래는 형제자매들만 조촐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판이 커졌다.
판이 커진 게 아니라 키우자고 했다.
숟가락 하나 더 얹자고 했다.
엄청난 양의 고기를 추가로 사왔고 막걸리도 더 구입했다.
싱싱한 배추속, 맛있는 겉절이, 오징어 호박전, 새우젓, 풍미 깊은 수육까지 푸짐하게 준비했다.
김장, 뒷정리, 장보기, 음식준비까지 무척 바쁘고 정신 없었지만 그런 값지불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하고 싶었다.
나눔의 삶, 공감하는 삶이 우리의 이정표였으니까.
마당 한 켠에 야외 테이블 2개, 그 위에 각종 맛깔나는 음식을 차려놓고 동네 사람들을 불렀다.
쌀쌀한 날씨에 민감한 80-90대 어르신들은 집안 거실 테이블에서, 70대 이하의 비교적 건장한 사람들은 마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웃고 떠들며 맛있는 '수육파티'를 즐겼다.
풍성하고 구뜰한 음식을 먹고 마시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이웃들 간에 긴밀하게 소통하고, 감사를 전하며 깊은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삶이 더 귀하고 좋았다.
행복했다.
식사 후엔 옆집으로 불려가 직접 로스팅해 내린 커피와 쿠키, 과일을 먹으며 또 길고 찰진 수다를 끝도 없이 떨었다.
어찌나 웃고 떠들었는지 눈가 주름살이 몇 개는 더 늘은 듯했다.
고향엔 문이 없다.
대문도 있고, 현관문도 있지만 항상 열려 있고 누구나 편하게 들락거린다.
그래서 문이 없다.
장거리 출타를 할 때에도, 며칠씩 집을 비울 때에도 문을 잠그는 법이 없다.
그런 삶이 좋고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사람이든, 가문이든, 동네든, 국가든 각 주체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를 갖고 있다.
문화는 산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며 그들의 기록이자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합이다.
인생 후반전.
어디에서, 어떻게 살 것인 지는 각자가 결정할 문제겠지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사람들끼리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공감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삶이다.
내가 아는 지인 중에 몇 십억 재산가가 있는데 그이는 나이가 들어 복잡한 서울 생활을 접고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인생 2막을 살고 싶어했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품고 있었던 꿈이었다.
그래서 실제로도 양평에 땅을 매입했고 멋진 집을 신축하여 이주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이는 채 2년도 안돼 다시 서울로 컴백했다.
집도 팔리지 않아 부동산 사무실에 매매를 의뢰해 둔 채로 서울에 아파트를 구입해 다시 들어왔다.
그는 동네 사람들의 '텃세'를 탓했다.
그리고 틈만나면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오픈 마인드'형 인간이 아니었고 먼저 베풀며 주변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받았으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돌려주긴 했었다.
그러나 계산된 비슷한 질량의 반대급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 '돌려줌'엔 삶의 향기나 인생의 훈염이 빠진 '물질'만 존재했다.
시골살이가 어찌 일대일 물물교환하는 곳이던가.
'마음'이 먼저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철학'이 먼저다.
교류와 스토리텔링은 그에 따른 결과치일 뿐이다.
서울이든, 제주도든, 이름없는 시골이든 어디나 다 사람 사는 곳이다.
장소나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한 그 삶의 속성과 특징은 대개 비슷하다.
'마음의 문'이 없어야 하고 먼저 섬기며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예 몸에 배 있어야 한다.
고향에서 2박3일을 보내고 오늘 조식 후 상경하려 한다.
많은 양의 '김장김치'를 차에 실고 '감사의 마음'을 간직한 채로 말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개인에게도, 가문에도, 마을에도 각각의 고유한 문화가 있다.
그런 문화와 풍습은 절대로 하루아침에 형성되지도 않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지도 않는다.
문화, 풍습, 전통이 중요한 이유는 감사와 행복의 싹을 건강하게 틔워주고 무럭무럭 자라게 하여 훗날 2배, 3배, 10배로 행복을
열매 맺게 해주는 가장 확실한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맨땅에 행복의 씨앗을 뿌린다고 다 풍성한 열매를 맺는 건 아니다.
세상살이에 그런 요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행복과 감사가 자녀들의 마음밭에도 그대로 계승되기 때문이다.
부모가 폭넓게 복을 지으면 그 달콤한 과실은 자식 세대에서 딴다.
절대로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값진 선물이며 유산이다.
또한 무언의 인생 교훈이자 삶의 지혜다.
조건 없이 도움을 주고 받으며 행복을 차곡차곡 엮어가는 고향 사람들께 이 지면을 빌려 다시 한번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몇 달 후면 설날이 다가온다.
어르신들과 형님들이 벌써부터 "돼지를 잡아 동네 잔치를 하자"고 하신다.
다시 한번 나의 다양한 '고기칼'을 칼집에서 꺼내 숫돌에 갈아두어야 할까 보다.
전통과 문화 그리고 나의 역할을, 열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가슴에 새기면서 말이다.
모든 분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해 기도하는 일요일 아침이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갖은 양념보다 정이 더 많이 들어간 맛있는 김장김치가 먹고 싶네요. 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