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를 권하노니
고전 1:10-17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0-17 / [고린도 교회의 분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제발 싸우지 마십시오. 교회 안에 분열이 없도록 참마음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같은 생각과 목적으로 한마음이 되십시오. 11)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이 논쟁을 하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을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 편에 들었습니다. 12) 여러분 가운데는 `나는 바울을 따른다',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 `나는 베드로를 따른다'고 하면서 제각기 편을 가르고, 또 다른 사람은 `우리들만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다'라고 떠들고 다닌다고 하니 13) 그게 바로 여러분 스스로 그리스도를 산산조각이 나게 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 바울이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죽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가 내 이름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14) 지금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아무에게도 침례를 주지 않은 것을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15) 혹시 누구라도 내가 `바울의 교회'라는 것을 시작해서 어떤 새로운 것을 일으키려 한다는 오해라도 있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16) 아, 생각납니다. 나는 스데바나의 가족에게도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 밖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침례를 준 기억이 없습니다. 17) 그리스도께서는 침례를 주라고 나를 보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비록 내 설교가 빈약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려운 말이나 현학적인 사상 따위를 섞어 설교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러한 말재간으로 헛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분쟁이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지적합니다.
부드러운 권면(10) 노련한 외과 의사가 부드럽게 상처를 치유하듯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부드럽게 다룹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로 명령할 수 있지만 부드럽게 권면합니다. 그것은 분쟁이 없이 합하라는 것입니다. 스키스마를 번역한 분쟁은 찢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분쟁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제시한 해결책은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합하라는 말은 부러진 뼈를 접합하거나 탈구된 관절을 결합하는 의학용어로도 사용된 말입니다.
분쟁의 어리석음(11-13) 글로에는 고린도 교회의 신실한 여성 신자입니다. 사업상 글루에의 식솔들이 고린도와 에베소 사이를 왕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에베소에 있던 바울이 그들을 통해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듣습니다. 교회 안에 여러 파가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파는 바울이 교회의 설립자라는 사실을, 아볼로파는 아볼로의 언변과 성경지식을(행 18:24), 게바파는 베드로가 수제자임을, 그리고 그리스도파는 당연히 예수의 구세주 되심을 내세웠습니다. 바울은 즉각 이 분쟁의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예수 한 분뿐이신데 어찌 그리스도께서 나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사실상 이러한 분파들은 자기들이 교회 내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지도자들을 이용한 결과이며, 그 뿌리는 교만입니다(고전 4:6). 하나님께서 각각의 특징을 가진 여러 지도자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이 지도자들을 이용해 분쟁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죄악입니다.
세례 베풀지 아니함을 감사(14-17) 분명 고린도 교회 내에서 누군가가 바울에게 세례 받은 것을 자랑했을 것이며, 그것이 분파의 한 요소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베푼 사실을 감사합니다(행 18:8). 물론 세례가 중요하지만, 구원의 필수요건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례가 구원의 필수요건이었다면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사람을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할례와 같이 세례는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일 뿐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만을 드러내기 위해 화려한 언변조차 삼가 했습니다.
적용: 교회 내의 크고 작은 분쟁을 해소하는 비결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린 여자 아이가 양손에 사과를 들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네가 사과 2개가 있으니 하나는 엄마 줄래?" 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 거리더니, 왼손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빤히 바라보다가, 오른쪽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습니다. 엄마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욕심 많은 아이인지 미쳐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잠시 뒤 왼 손을 내밀면서 “엄마! 이거 드세요. 이게 더 달아요.” 이 아이는 진정으로 사랑이 많은 아이였던 것입니다. 만약 엄마가 아이에게 곧 바로 욕심쟁이라고 화를 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섣부르게 판단하고 행동하면, 아픔과 상처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기다리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고 사랑입니다.
< 설 교 >
십자가 붙들고 사는 삶
고린도전서 1:17-25 / 김광일목사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경비행기가 비행을 하다가 야산 중턱에서 어떤 물체와 부딪혀 마을로 추락을 하면서 폭발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건물 안의 사람들까지 많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사고가 난 산 중턱에는 미국 감리교 훈련센터가 있고 그 꼭대기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 경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등대역할을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조종사는 십자가의 불빛을 보고 고도를 조정하여 산에 부딪히지 않도록 비행을 했다고 합니다. 사건을 조사하던 AP통신의 기자가 이렇게 타전을 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바로 야산 중턱에 있던 철탑 십자가였습니다. 사고가 나던 날 밤 그 십자가는 불이 꺼져 있었고 비행기는 그 십자가에 부딪혔습니다'. 불 꺼진 십자가는 무익합니다. 즉 십자가 없는 승리, 십자가 없는 축복, 십자가 없는 행복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 신앙으로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금번 태풍으로 인하여 우리교회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8층 종각 꼭대기 십자가의 네온 불이 고장나 꺼진 것입니다. 서울 업자를 불러 네온 수리를 하며 저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수리 업자는 높은 십자가 위에 달린 네온수리를 위해 종각에 매달린 사다리를 타고 아주 높은 그 끝까지 올라갔습니다. 저는 보는 것만도 아찔했습니다. 그는 바람이 부는 그곳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꼭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허리의 안전띠를 확실하게 매어놓고 작업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꼭 붙들고 일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삶의 모습도 저와 같아야 된다고 감동이 왔습니다. 우리의 삶도 십자가를 붙들고 그리고 십자가에 꼭 매어진 삶이 될 때 가장 안전한 삶이 되어지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삶 속에서 얼마나 십자가를 붙들고 사십니까? 그리고 그 십자가에 삶을 매어놓고 진정으로 사십니까? 이 시간 믿음으로 십자가와 연합되어지는 삶이 되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붙들고 사는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옵니까?
첫째로 십자가는 능력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니라". 22절부터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는 자에게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간 십자가가 삶의 능력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솔제니친은 구 소련 작가로 체제를 비방하는 반역자로 수용소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고생을 하다가 서방으로 망명한 사람입니다. 솔제니친의 감옥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그는 특별 범죄자로 구분되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고통으로 인해 정신력과 신념이 모두 탈진했을 때 솔제니친에게 한 사람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바닥에 십자가를 그어주며 그것을 바라보라고 한 후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솔제니친이 그 십자가를 한참 주목했다고 합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는 지식인이었고 러시아에서 이미 성경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솔제니친은 그 사나이가 바닥에 그어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에 알지 못하는 힘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그에게 참 자유와 능력이 되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고통에 처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붙잡고 그 앞에 나아가는 믿음, 그 십자가로 인하여 능력이 되는 믿음을 힘입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자기 문제를 참 진지하게 대화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시간도 좋고 두 시간도 좋고 남에게 자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5분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선 시간을 내 놓고 자신의 문제를 내 놓고 넋두리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는 진지하게 5분도 기도하지 않는 그에게 과연 십자가가 능력이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오늘 여러분은 어디서 힘을 구합니까? 어디서 답을 구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능력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 앞에 한 시간 얘기했다면 하나님 앞에는 두 시간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도 남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미국 켄터키 주립 정신병원에 캐롤이란 30대 후반의 여자가 입원을 했습니다. 이 여자의 병명은 ‘광기 우울증'입니다. ‘광기 우울증'의 증세는 평소에는 얌전하다가 한번 발작을 시작하면 성격이 거칠어져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칼을 들고 설치기도 합니다. 그리고 깊은 우울증 때문에 도저히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직장을 다니다가 쫓겨나고, 남편한테 이혼 당하고 결국은 정신병원 장기환자로 입원을 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고, 그녀가 언제 발작을 일으킬지 겁이 나서 옆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평소 다정했던 그녀의 친구가운데 아주 믿음이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 성경을 읽어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의지하라. 십자가를 붙잡아야 질병과 싸워서 이길 수 있고,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고 말하며 그녀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고 반대하던 그녀도 찾아오는 사람이 그 친구 밖에 없고,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찾아오니까 고맙고 감격해서 그 친구가 하는 말을 조용히 들었습니다.
부활절이 다가오자 그 친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사건을 얘기해 주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사망권세를 이겼으므로 너도 이길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 아침 그녀는 '내가 이겼으니 너도 이길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그 음성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자신감이 생기고 마음에 용기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고, 예수님만이 나를 이 질병에서 고쳐 주실 수 있고, 나를 승리하게 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광기 우울증을 이길 수 있다'고 계속해서 외쳤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입으로 시인할 때, 그녀의 증세는 서서히 사라지고 정상적으로 고침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질병을 고쳐주시고 승리의 기적을 허락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1219년에 덴마크의 왈뎀카 왕은 군대를 이끌고 적군과 싸우러 나갔습니다. 이길지 질지 모르는 불안한 가운데 왕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전쟁을 하나님께 맡깁니다.'그런데 갑자기 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나 보였습니다. 왕은 그 십자가를 보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확신하고 싸운 결과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부터는 전쟁 때마다 붉은 바탕에 흰 십자가를 그린 국기를 만들어 앞세우고 나가 승리를 하였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승리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질병과 싸워 이겨서 건강한 삶을 살고, 가난,저주와 싸워 이겨서 풍족한 삶을 살고, 죄악과 싸워 이겨서 의로운 삶을 살고, 모든 시험,유혹과 싸워 이겨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승리하기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나가면 여러분도 승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잡고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하도록 역사 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십자가는 변화된 삶을 살게 합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도 영화관에서만 감동을 받고 생활과 전혀 무관하다면 나와는 관계가 없는 영화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알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간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내 사건으로 믿을 때 인생이 달라집니다. 생활이 변합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나의 사건임을 믿을 때 십자가의 능력은 삶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을 받던 그가 41세의 젊은 나이에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은 백혈병이라는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그러나 호세 카레라스는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붙잡았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은 그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신을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는 고백했습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호세 카레라스는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변화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이 증거 될 때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가정이 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리할 때 우리의 인생은 활기가 있고 능력이 넘치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지성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며 믿음의 대상이며 믿을 때만 강하게 역사 합니다.
어떤 아버지가 여섯 살 된 아들을 데리고 교회를 왔는데 아들이 십자가를 보고 큰 더하기(+)표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맞다. 십자가는 너와 내게 더하기 표이다’라고 했답니다. 십자가가 여러분 인생의 더하기 표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는 삶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만이 영원한 축복의 원리가 됨을 깨닫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십자가의 도
고전 1:18 / 이수영목사
이 본문은 참 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구원을 얻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똑같은 사건을 두고서 어떤 이들은 미련스럽게 바라보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 이를 우리들은 이 시간에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도란, 나사렛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 죽음이 사람의 죄를 씻고, 사망의 세력을 이기고, 구원의 길로 향하게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십자가가 지금은 자랑스러운 심벌이 되었음을 세상 사람들도 인정합니다. 이 천국 복음이 겨자씨와 누룩처럼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전파될 것이라는 2000년 전 예수님의 예견대로 복음이 전세계에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월드컵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 36개국의 참가 국가들의 국기가 광화문 네거리에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심방을 가다가 차 안에서 이 국기들 가운데 십자가를 그려 놓은 국기들을 발견했습니다. 나라의 모든 문화와 전통과 역사와 국민성을 융합하여 표현하는 것이 국기일진데, 그 국기에 십자가를 새겨 넣은 것은 예사롭게 볼 일이 아닙니다. 그 36개국 나라 중에 십자가가 있는 국기가 영국, 스웨덴, 덴마크입니다. 이 세 나라는 다 16강에 들어갔습니다. 그 외에 이 월드컵에 참여하지 못한 나라들이지만, 그리이스, 노르웨이, 뉴질랜드, 도미니카, 스위스, 아이슬란드, 통가, 투발루, 피지, 핀란드, 슬로바키아의 국기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의 모든 병원의 마크는 십자가를 쓰고 있습니다. 국제적십자사의 마크는 글자 그대로 붉은 색 십자가입니다. 영국과 미국에서 가장 영예로운 군인에게 수여하는 훈장이 무공십자훈장입니다. 이번 영국 월드컵의 대표팀 주장이 데이비드 베컴(27)이라는 미남 선수인데, 그가 신고 있는 축구화를 눈여겨 보면, 흥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축구화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성 조지의 십자가'입니다. 올해 즉위 50주년을 맞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 대한 존경과 팀 승리의 기원을 담고 있는 표시입니다.
지금은 신자나 불신자나 이 십자가를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때로는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여 어떤 이들은 목걸이로, 어떤 이들은 귀걸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집에도 걸려 있고, 그것도 가장 은밀한 안방에 십자가를 걸어놓는 집들도 많습니다. 가게나 사무실에도 이 십자가를 걸어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귀한 장식품이 되었습니다. 이제 십자가는 영광이요, 승리요, 환희요, 구원이요, 치유의 상징으로 우뚝 서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감격과 기쁨과 평화와 능력이 있습니다. 이는 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안목에 대한 놀라운 변화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들 ! 이 십자가가 원래는 당당하게 드러내 놓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사형도구이다. 로마제국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자를 죽이던 사형수단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영어로 크로스(CROSS)라고 하는데, 이 말은 라틴어의 크룩스(CRUX)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고문대, 형틀'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헬라어로 스타우로스(STAUROS)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불행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암시하듯, 십자가는 사람들이 만든 형벌 가운데 가장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옆에 함께 죽었던 강도 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 강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 하느냐 ?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이 십자가형으로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그들은 그 십자가에 처형당할 정도로 파렴치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런 십자가를 목걸이를 해서 목에 걸고 다니고, 귀걸이를 해서 귀에 걸고 다니겠습니까 ? 어느 정신없는 사람이 그런 사형도구를 자기 안방에다가 버젓하게 걸어놓고, 아침 저녁으로 그것을 쳐다보겠습니까 ? 심지어 국가의 모든 뜻과 의지와 방향을 함축하고 있는 국기에다가 그것을 새기겠다는 그런 파격적인 발상을 하겠습니까 ?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부끄럽고, 저주스럽고, 창피스러움의 극치였습니다. 입에도 감히 언급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였던 십자가입니다. 이런 사형도구에 죽은 사형수 나사렛 예수님은 극악무도한 자로 여겨졌는데, 그 예수님과 그 예수님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는 십자가의 도는 정말 우매하고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믿을 것이 없어서 저런 사형수를 구세주로 믿고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특별히 당시 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것으로 공히 받아들이면서도,그 관점에서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과 로마사람들이 이 십자가를 어리석게 받아들인 이유가 다 달랐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은 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서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라고 평했습니다. 표적이나 이적이나 기적을 추구하고 열광하는 이들이 유대인입니다. 쇼킹한 것, 재미 있는 것, 흥분시키는 것,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여 군중심리를 부추기는 것, 이런 것을 아주 좋아하는 민족성이 유대인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관점에서 메시야를 받아 들일려고 했고, 그런 안목으로 십자가를 바라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기적이나 이적이나 시람의 감각적인 호기심을 끄는 것과는 너무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세속적인 왕이 되는 것도 거부하고, 이적을 보이되, 그 이적에서 영생의 떡으로 나아갈 것을 말씀하시자, 이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는 아주 싫어졌습니다. 특히 왕은 왕이로되,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그런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야가 아님을 알고부터 그들의 마음은 실망을 넘어서서 분노로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터무니없게도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심지어는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 이런 말까지 서슴없이 내 밷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39).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7:22-23) 바울은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2- 24). 요 1:9 에서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않았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미련스럽게 여기고 배척한 동족이 이 유대인이었습니다.
다음으로 헬라인들입니다. 헬라사람들은 지혜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그 인식체계의 잠재력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들은 이데아의 세계로 인도해줄 지혜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지성으로는 예수님의 인카네이션, 곧 성육신화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말씀, 곧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사람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그 하나님의 아들, 곧 창조주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요, 불합리한 것이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것이 말이 안된다, 그것도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은 말 같지도 않다고 보왔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도가 헬라사람들에게도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말씀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리냐, 무엇이 지혜냐, 이렇게 인간의 이성과 자연의 법칙에 다 수용된 것만이 진리인가, 그 진리를 발생케 한 진리는 더 큰 진리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 자연을 누가 만들었으며, 그 진리를 규정하는 인간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는가 ? 그렇습니다. 사람의 이성이 추구하여 정립해 놓은 법칙과 공식만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적인 교만입니다. 과학과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도 인정하는 자가 정말 지혜로운 자입니다. 이는 신앙의 세계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 물질이란 '있다. 본다. 그리고, 발견한다'는 세계입니다. 신앙은 이런 물질과 자연이 '어디에서 왔는가 ? 특별히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왜 있는 것이고,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관조하는 세계입니다. 이를 깊이 깨달아 가는 품성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부른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보다 더 위대한 진리는 없고, 최고의 지혜는 없습니다. 최상 최고의 복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참배 거부로 경찰서에서 심문을 받았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책에서 읽어 보왔습니다. "기독교는 지식적인 종교가 아니요, 신앙적인 종교입니다. 감정적인 종교가 아니라, 체험적인 종교입니다. 그런고로, 학사 박사가 믿지 못하는 진리를 무식한 노인들은 믿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와 무식한 부인들이 체험한 사실을 학사 박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을 수 법입니다. 그래서, 지식적 세계와 신앙적 세계는 서로 통하는 점도 있으나, 서로 통하지 못하는 점도 있는 것이니, 그런고로 기독교는 초자연적인 종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10:21-24)
다음으로 로마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예수, 네가 왕이라면, 왕다운 실력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 리더의 자리에 걸 맞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십자가의 도를 바라보는 로마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강자의 철학이요, 정복의 관점입니다. 로마제국은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했고, 약 500년 동안 팍스 로마나를 이루었습니다. 뛰어난 인물을 찾았습니다. 소수의 천재, 소수의 비범한 자를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운명을 그에게 맡겨 제국의 계속적인 부흥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리더쉽에는 다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 째는 사자의 리더쉽입니다. 이는 물리적인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스타일입니다. 포악하고, 잔인합니다. 노루나 사슴을 사정없이 물어뜯어 죽이는 강인한 발톱과 이빨을 실력으로 내거는 리더쉽입니다. 후진국의 리더들이 대개 이런 성격의 리더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규범이나 원칙이나 법이나 제도가 없이 그저 물리적인 힘이 있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정글의 사자와 같은 리더입니다. 여기에서는 법치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짐이 곧 국가입니다."
두 번째는 로마 황제가 지닌 리더쉽입니다. 원래 로마는 공화정으로서 그 리더가 세습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뛰어난 인재의 장군이나 원로원 의원이 황제가 되어 그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지와 덕과 용, 세 가지 미덕을 조화롭게 갖춘 자가 철인이요, 그가 리더가 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황제나 리더는 이런 인품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현대 국가나 민주 사회, 건실한 기업이 요구하는 리더쉽은 대개 이런 종류의 리더쉽이라고 하겠습니다. 학교 교육의 목표도 바로 이것이요, 학생은 이런 세 가지 자질을 갖추게 하고자 교육을 시킵니다. 요즘 기업의 뛰어난 CEO는 이 리더쉽을 지니고 있어야 그 회사를 잘 유지 관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하나님 나라에서의 리더쉽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지도자는 선한 목자상으로서의 리더쉽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리더입니다. 이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이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치루시고자 십자가에서 묵묵히 죽어가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강자의 논리, 힘의 숭배라는 관점에 바라본 로마사람에게 십자가의 도는 너무도 어리석게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런 로마 사람들을 염두하고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장)
로마를 가보면, 우리들은 콜로세움이라는 대형 원형경기장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로마의 권력이 십자가를 오해하고 미워하여, 심히도 모독하고 저주했던 장소입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대에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에서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로마의 황제보다 더 위대한 황제로 모신다고, 인류의 구주라고 믿는다고 그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의 밥이 되어야 했고, 검투사의 상대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로마제국의 힘과 권세를 상징하는 이곳에 지금은 대형 십자가가 우뚝 세워져 있는 것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간이 흘러 누가 이런 십자가를 약하다고 하겠습니까 ? 외모로 보기에 약한 것 뿐이었습니다. 십자가가 정말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는 자가 영안이 열린 자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요,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한 자입니다. 십자가는 강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님을 구주로 섬기고, 성령님의 감동과 인도하심에 따라 사람들의 심령에 에덴동산을 다시 세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죄로 잃어버렸던 그 아름다운 세계,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세상을 이루어낼 수 방법, 그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다만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약해지신 것뿐입니다. 속은 참으로 강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약한 자, 어렵고, 불쌍하고, 병든 자들을 위하여 약하게 보여진 것이고, 그래서 말구유간에서 시작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팍스 로마나는 역사의 무대에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가장 약하게 보였던 십자가의 도와 그 복음은 로마로부터 전세계 펴져 나가 진정한 살롬을 이루고자 하며,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팍스 크리스투스 "그리스도의 평화가 완전히 실현되는 날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온 지구상의 모든 크리스챤들, 로만 캐톨릭, 동방정교회, 모든 개신교들인이 손에 손을 맞잡고, 한 믿음 가지고, 한 주님 모시고, 한 성령님의 역사 안에서 이 날을 대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안따갑게 지금도 이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고 미련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이 없고, 영적인 혜안이 잆는 자들에게 이 십자가는 도무지 손에 잡히지를 않는, 답답하고 괴로운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이렇게 예배당에 앉아 예배 드리는 것을 미쳤다고 봅니다. 이 좋은 날씨에 야외에 나가지 않고, 휴일을 즐기지 않는 것을 참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도무지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참 어리석고, 재미없고, 답답한 맹추 정도로 바라봅니다. 교회를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정성을 다 쏟는 것은 더 더욱 이해 못할 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초창기는 다 이런 훌륭한 믿음의 선진들이 흘린 땀과 피에 의해서 지금 이렇게 거대한 한국교회가 되었습니다. 처음 그분들은 온갖 오해와 시기와 미움을 다 받아가며, 교회를 품에 안고서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애지중지 보살피고 키웠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집안의 문중과 마을 유지들의 유교 봉건적인 눈총을 수없이 받아가며,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 희생으로 지금은 그 교회가 마을 어구에 우뚝 서서 구원의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교회와 혼인하셨습니다. 교회가 당신의 가정이었고, 일터였고, 남편이었습니다. 그 교회를 사랑하여 가난하고, 어렵고, 병든 사람들의 집을 찾아 다니며, 무수히도 많이 심방하셨습니다.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또 가서 권면 하고, 설득하고,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가방 하나 들고, 한복 입으시고, 논두렁을 지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일일히 심방하셨던 어머님입니다. 그 어머니는 당신의 남편보다 목사님을 더 극진히 섬기시고, 주일학교 교사들 식사 대접하는데 으뜸이셨습니다. 구역식구들을 당신의 자식보다 더 받들었습니다. 성탄절 새벽송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 언 손을 녹여주시고, 따뜻한 떡국으로 한 사람 한 사람 다 먹여주셨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무척이나 절약하시면서도, 교회를 위한 일에는 그 소중한 물질을 덤성 덤성 내놓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한국교회가 이렇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 평생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직 교회만을 위해서 살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 수고와 노력과 눈물을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런 어머니를 미쳤다고 조롱했습니다. 누구는 계산할 줄 모릅니까? 누구라도 편안하게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왜요? 십자가의 도가 어머니를 너무도 감격시켰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첨단 생명공학이 복제인간을 가능하게 하고, 장차 불로장생이라는 인류의 꿈도 실현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종교나 신앙의 세계까지 거침없이 파고 들어오는 이 무서운 과학과 기술과 이성의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십자가의 도가 정말 미련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근본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는데, 영원한 세계입니다. 미지의 세계요, 사후의 세계요, 영적인 세계요, 가히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 곳을 연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끈은 바로 십자가의 도입니다.
요즘 혜화동에 있는 서울 과학관에서 '인체의 신비'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21세기는 몸 학이 성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과학·예술·인문학의 오랜 화두였지만, 몸의 실체와 신비로움은 의료인 등 특정 직업인만의 관심사였을 뿐, 보통 사람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전시회는 독일에서 시작했는데, 20여 구의 시신들을 기증 받아 그 시신을 해부하여 골격은 골격대로, 근육은 근육대로, 신경계, 그 미세한 혈관들, 오장육부의 장기들을 세밀하게 해부하여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곳을 보면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의사도 아닌 저 같은 일반인들도 사람의 신체 내부를 저렇게 자세하게 볼 수 있구나 하는 것이 참 많은 감동과 충격과 지식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곳을 약 3 시간 동안 쪽 돌아보면서 의사가 아닌 목사로서 느끼는 바가 있었는데, 그것은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영혼이 빠진 몸 둥아리, 생명이 사라진 시신은 그저 살코기에 불과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표현을 써서 저의 느낌을 그대로 전한다면, 허벅지의 한 부분을 절개해 놓았는데, 그 단면이 선홍빛을 띠고 있는 소갈비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빨간 고깃살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뼈들은 사골과 같았습니다. 제가 앞으로 소갈비를 먹을 수 있을런는지, 갈비탕, 곰탕을 먹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인간이 존엄하다는 것, 인간이 고귀하다는 것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 그 몸이 수 천년 동안 이루어 놓은 문화와 그 위대한 문명이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는 것인가 ? 그렇다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은 그 문화를 이루어놓은 지능과 머리입니까 ? 그렇지만, 생명이 없는 시신에는 그 지능을 담고 있었던 뇌도 한 낫 주름살만 보이는 살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도대체 사람의 존재성을 규정하는 그 본질적 요소가 무엇입니까 ? 왜 사람의 인권은 동물이나 식물의 권리보다 더 소중하게 다루져야 합니까 ? 동물의 살이나 뼈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그 시신 앞에서 누가 윤리를 만들었고, 누가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창 2:7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있는 영이 되니라" 그래서, 마 4:4 말씀 "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고 하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 이것이 진정한 사람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몸은 사람이 죽일 수 있을지라도, 그리하여 그렇게 의사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해부되어 그 살덩어리와 뼈들이 남에게 보여질 수 있을지라도, 그 영은 죽일 수 없고,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 존재를 아는 것이 신앙이요, 십자가의 도입니다. 전도서 3:11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3:21에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월드컵의 열기가 온 나라를 들썩이고 있습니다. 온 국민은 한 마음이 되어 레드 데블의 열화와 같은 응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이 축구가 현대인들의 심성을 완전히 사로잡는 이 능력 앞에 십자가를 붙들고 산다는 것이 궁색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잠시 휘몰리아치는 이 소용돌이, 그래서 잠시 반짝했다가 사라질 것에 자신을 내던지지 말고,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은 십자가의 도에 자신을 내던져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복음과 교회는 따분하고 답답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성도들에게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 죄 사하는 능력이요, 구원의 세계로 이끄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신앙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우리 속의 침윤되어 있는 죄성의 뿌리를 인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여도 역시 죄인이요, 이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며, 그 내일이 저 천국으로 이어질 것이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십자가에서 대신 죽어주신 예수님의 피 공로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사하여 정결한 심령으로 거듭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심령이 되게 합니다.
죄 짐을 지고 괴로워하십니까 ? 주님과 나만의 아는 죄로 그 무거운 발걸음을 걸어 겨우 이렇게 예배당에 나오셨습니까 ?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 앞에 흐르는 생명수가 그 죄와 허물을 씻어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요일1:7)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1:18).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합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병을 치유하는 능력이요, 하늘의 문이 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통로가 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힘이 있습니다. 이는 마귀가 도망가는 능력입니다. 각색 병들이 고쳐지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찔리는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이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영도 병들고, 마음도 병들고, 육체도 생활도 병든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쫓겨난 인간은 그 자체가 병든 인간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치료의 능력을 베풀어 주셔서 고침받는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질병과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안고서 이 예배당을 찾으셨습니까 ? 그렇다면, 십자가에 달리셔셔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 십자가의 도에는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도 담고 있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능력입니다. 영원히 삽니다.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누리며 영원토록 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십자가를 붙들고서 오직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들은 이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영 죽을 우리를 살리려 그 영광 버리고, 그 부끄러운 십자가 우리들을 위해 지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혜요, 저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이길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그 길이 곧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살이가 힘들고 어려워도, 이 땅이 죄 많은 세상일지라도, 이 십자가의 도가 있으므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이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사랑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저희를 위하여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때로 저희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그 십자가의 도를 미련스럽게 생각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저희들의 이런 영적 무지와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시고, 이제 이 십자가가 지닌 능력을 의지하며, 십자가 붙들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불안이 있는 곳에 평안을 주시옵고, 죄가 있는 곳에 죄 사함의 은총을 베푸시옵고, 죽음의 권세를 무서워 떠는 자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쉽지 않는 인생길, 광야 같은 삶을 걸어가는 저희들이오매, 십자가의 보혈로 약한 것과 질병과 마음의 상처와 연약한 삶을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을 주님의 보혈로 인쳐 주시옵소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주님을 찬양하오며, 저희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가에 달리사 피를 흘려주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이사야 65:23-25, 고린도전서 1:14-17 / 이성희목사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3년, 정전된 지 60년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종전이 되지 않고 대치 상태에서 남북의 대결이 완화될 분위기가 아닙니다. 더구나 남남의 이념갈등으로 여야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결구도로 치닫는 것을 보니 참 안타깝습니다. 속히 남북이 통일되어 우리끼리 대결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시대는 다른 나라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세계화의 무한경쟁 구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데 안에서 싸우니 마음이 씁쓸합니다.
여러해 전에 웨일즈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영국이 한국전쟁 참전국이었는데 웨일즈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정전기념일인 7월 27일에 기념행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도 그 때는 정전기념일이 7월 27일인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6월 25일은 기억하지만 7월 27일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참전용사들은 군복을 입고 예배당에 모여 함께 기념행사를 한 다음, 운동장에 나가서 열병 분열행사를 하였습니다. 그 때 마침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그들 앞에서 축사하는 순서를 맡았습니다. 영국군(UK)은 한국전쟁에서 전사자가 1,109명이며 실종자가 1,263명이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귀한 생명이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한 것입니다.
한국전쟁 당시에 유엔 참전국은 전투지원국이 16개국이었고, 의료지원국이 5개국이었습니다. 참전용사 가운데 67,794명이 사망실종이었습니다. 한국군은 570,947명이 전사하였고, 460,428명이 실종하였습니다. 103만 명 이상이 사망실종이 된 것입니다. 한국전쟁이 정전된 지 6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천만에 가까운 이산가족과 청춘을 보훈병원에서 보낸 상이용사도 있습니다. 호국보훈의 달이 다 가기 전에 다시 한 번 그들의 희생을 기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이 우리나라를 지켰습니다.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헛되지 않는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민주주의, 평화를 잘 지켜야 앞으로도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의 생명이 절대로 헛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된 죽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상징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고기, 별, 알파와 오메가, 십자가 등이 모두 의미를 가진 상징들입니다. 상징이란 신앙의 표현이며 중요한 기호입니다. 그러나 상징이나 부호만 있고 의미가 사라졌다면 이런 상징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십자가는 그 의미는 온 데 간 데 없이 표시만 가지고 있기가 쉽습니다.
십자가 목걸이는 있는데 십자가의 의미나 감동이 없습니다. ‘할렐루야’라는 말은 잘 하는데 마음에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찬송이 없습니다. ‘주여’라고 부르짖는데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습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데 마음에 우러나는 신앙고백이 없습니다. 주기도문으로 잘도 기도하는데 기도하는 삶이 없습니다. 이런 표면적 신앙이 참 신앙을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무력하거나 효력이 없는 상태가 되면 십자가는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하는 말은 십자가가 헛되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삶, 십자가 없는 복음, 이 모든 것이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헛되지’라는 말은 헬라어 ‘케노데’의 번역입니다. 이 말은 이름과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남아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만일에 바울의 설교가 십자가의 도 대신 인간의 지혜나 인본적인 철학으로 대치되었다면 그의 설교는 미천한 인간의 지혜에 불과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설교에서 십자가를 전하려고 애썼습니다. 십자가 외에 어떤 것도 그의 설교에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굳게 믿고 전하므로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를 바랍니다.
첫째, 복음만을 전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7 상반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합니다. 복음은 전도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전도의 핵심내용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사변적, 이론적 신앙이 아니라 경험적, 실제적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그의 신앙의 시작이고,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복음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113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빼면 히브리서에 2번, 베드로전서에 4번, 요한계시록에 2번 나옵니다. 그 외에는 모두 바울서신에 이 단어가 나옵니다. 특히 로마서에 14번, 갈라디아서에 11번 나옵니다. 바울의 신학적 이론서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복음이란 말이 가장 많이 등장합니다. 바울신학의 핵심이 복음인 것을 증명합니다.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구원받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이야기의 절정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빠진 복음은 거짓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복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1:7에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면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단호함은 다음 절에 분명이 드러납니다. 복음을 변질하거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1:8에는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사도의 저주권은 무서운 권리입니다. 사도가 저주하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변질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하여 이 저주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1:9에도 다시 말합니다.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로마서 12:14에는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도 저주하지 말라고 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합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 제일주의 정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휴 매킨토시는 “복음이 역사적 존재와 단절되고 복잡한 형이상학적 이념과 동일시될 때 그것은 토의할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분명히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변질된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설교는 윤리강의가 아닙니다. 건강식품을 소개하고 건강강좌를 한다면 설교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사라졌다면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회개와 십자가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과 같은 복음의 핵심이 없으면 아무리 재미있어도, 아무리 유익해도 복음은 아닙니다. 강단에서 외치지 않아도 되는 헛된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계시록을 풀어주며, 천당지옥을 가르치는 계시록도 십자가 없이 아무개 목사나 자기 교회만 가르치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려”라는 말은 “유앙겔리제스다이”라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의 현재형은 현재진행을 포함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계속적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아닌 죽음은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없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빛을 밝히지 않는 어둠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고통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복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게일선교사의 선교편지’에 보면 1891년 11월 25일에 게일목사님이 마펫선교사를 송도에서 만났습니다. 그날 마펫이 게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게일, 한국 땅 방방곡곡에 소중한 것(treasures)을 전해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바로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이야”. 복음은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합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밤마다 붉은 십자가 네온사인이 동네를 뒤덮습니다. 십자가가 헛되지 않은 것은 복음 덕분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마을이 없게 된 것입니다.
둘째,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아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17 하반절에는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말의 지혜로 예수님을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말로 설득하고 나의 재주로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말의 지혜”란 헬라어 “소피아 로구”입니다. 이 말은 ‘말의 명석함’이란 뜻입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인간의 지혜와 달변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수사학과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복음은 말을 잘 해서 전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쟁이들은 말은 잘한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에 듣던 말에는 “말 잘하면 공산당(빨갱이)”이란 말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로 사람을 현혹케 할 수 있습니다. 공산당의 말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단들이 말을 잘합니다. 아주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솔깃하게 하고, 넘어가게 하고, ‘이런 말씀도 있었네’라고 놀라게 합니다. 이런 것들은 악한 영의 술수에 불과합니다.
사기꾼을 보세요. 사기꾼은 한 결 같이 말을 너무 잘합니다. 말을 잘 못하면 사기도 못 칩니다. 사탕발린 말로 진실을 포장하는 것이 사기입니다. 요즘에는 TV 쇼핑채널을 보면 쇼 호스트들이 말을 아주 잘합니다. “이제 몇 개밖에 안 남았습니다”, “몇 분 후에 마감합니다” 라고 하니 집에서 부인들이 넘어가지 않습니까? 귀를 솔깃하게 만들어서 사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철학과 수사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말을 잘 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이 말을 잘 한다고 하여 웅변의 신, ‘헤르메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7:18에는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라고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바울을 말쟁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말을 잘 하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소중하므로 말을 잘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십자가가 드러나게 하려고 말을 잘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말도 재주도 감추고 십자가와 복음만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찰스 뉴먼은 ‘말의 인플레이션’(Inflation of discourse)이란 용어를 썼습니다. 말이 너무 풍성하게 되면 말의 과장법이 정교하게 개발되고 공중의 유익이나 그에 관련된 것과는 어떤 연계도 맺지 않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는 아름답게 포장된 말이 난무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도 물속의 물고기는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물고기는 자신이 물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현대인은 말의 홍수 속에 살고 있지만 불편하지 않고 홍수 속에 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탈무드에는 “말을 많이 해서는 안 된다. 말하는 것의 두 배는 듣도록 하라”고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흠이지만 말을 많이 듣는 것은 지나쳐도 흠이 안 됩니다. 사람들의 노닥거리는 말, 험담, 잡담에는 전혀 호소하는 힘이 없습니다. 이런 말로는 복음의 능력이나 십자가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잠언 7장에는 말에 대한 잠언이 있습니다. “음녀와 말로 호리는 이방여인에게 빠지지 않게” 하라고 합니다. 잠언 7:21에는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라고 합니다. 꼬이는 말로 넘어지는 자들이 많습니다. 항상 말에 조심을 해야 합니다. 진실이 없는 말 즉 말재주나 말장난은 넘어지게 하는 독과 같습니다. 이런 말은 파멸하게 하는 쓴 잔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4:20에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전해지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전해집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말의 지혜로 하면 실패합니다. 제일 큰 실패는 십자가의 공로가 헛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진실해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해로울지라도 말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말에 꾀를 섞지 말고, 말재주로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지 말고, 언변은 없지만 우리 입을 통하여 십자가가 강하게 증거 되게 하기를 바랍니다.
결론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란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삶이 헛되지 아니하면 그 이름이 길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한 번밖에 없는 인생, 삶을 헛되이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름 명(名)자는 저녁 석(夕)자와 입 구(口)자를 합한 자입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면 서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이름을 부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름을 부르고, 이름으로 그 사람을 압니다. 또 사람들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이름도 이성희 외에 목사, 교수, 이사, 이사장, 아들, 아빠, 남편 등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헛되지 않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에 걸맞게 사셨습니다. 그 이름대로 구원자가 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죽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므로 그 이름도, 십자가도 헛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으심이 헛되지 않게 되도록 구원받은 귀한 자로 십자가를 증거하며 십자가를 늘 묵상하며 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지 못한 바울
시편 18:31-34, 고린도전서 1:13-15 / 이성희목사
“저승길과 변솟길은 대(代)로 못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죽음과 용변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승길과 변솟길만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란 그 자체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플 때에 대신 아파주지 못합니다. 남이 배고플 때 대신 먹어주지 못합니다. 남이 나이 많아졌을 때에 대신 죽어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 잠자는 것, 밥 먹는 것, 일하는 것 모두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을 느끼고, 즐거워하고, 때로는 슬퍼하는 이 모두가 남이 대신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것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컨설턴트이자 사업가인 ‘허벌 라이프’사의 짐 론(Jim Rohn)은 “나 대신 팔굽혀펴기를 대신해줄 사람을 고용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모든 경험은 내가 직접 해야 하고, 수고와 고통도 남이 대신 할 수 없는 내 몫입니다.
옛날에 양반들은 천민이 양반을 때릴 수 없으니 다른 형으로 벌을 주든지 아니면 천민 중에서 대신 돈을 받고 태형을 맞아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받고 대신 맞다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절대로 대신 해 줄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하더라도 대신 죽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대속의 표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소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를 죽여 태워서 그 향기를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인간이 죽을 것을 동물이 대신해서 드려지고 죽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는 것이 구약의 제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번으로 영원히 모든 인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제물이 되신 사건입니다. 히브리서 9:12에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을 대신해서 심판관이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남이 대신 해 주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이 일을 대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에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대속물은 대신 죽는 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는 제물이 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예수님 외에도 많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양 편의 강도도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 외에도 많은 십자가형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 어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도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대신 못 박힐 수 있습니다.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은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입니다.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아닙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힐 수도 없습니다. 사도 안드레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자입니다. 그는 X자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것도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대단한 학자이며 훌륭한 사도입니다. 로마에서 박해로 참수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대속은 아닙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예수님의 십자가만 우리를 위한 대속입니다.
첫째,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줄 수 없습니다.
13절 상반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라고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를 보면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등 인간 중심의 당쟁이 심한 교회였습니다. 이런 당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값없이 하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훌륭해도 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구속사역을 대신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의 자리를 대신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세례를 주었지만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절대적 유일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사람으로 우리 신앙의 모범적 인물에 불과합니다. 바울이 아무리 큰 사도라도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키는 기적을 베풀었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고 하였고, 바울은 말을 잘 한다고 하여 ‘헤르메스’라고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신격화한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사도행전 14:15에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신앙적 모범이지 우리 신앙의 대상은 아닙니다. 바울은 사람을 구원받을 수 있도록 주님께로 인도하지만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도구입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대신 못 박힐 수 없고, 누구도 대신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구원의 표이며, 예수님만 구원자이십니다.
사람을 신격화하고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믿는 잘못을 사람들은 흔히 저지릅니다. 세상에는 사람 중심의 교회도 많이 있고, 인본주의가 사람의 사고를 지배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보세요. 그들의 광야생활에서 가장 큰 범죄는 금송아지를 만든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하나님의 산에 올라가 40일을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이지 않게 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를 이끌 신을 만들자”라고 하며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신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닌, 보이는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이미 그들에게 신격화되었습니다.
사무엘상서 2:11에는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고 합니다. 3:1에는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합니다. 어린 사무엘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누구 앞에서 누구를 섬겨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섬기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어리지만 엘리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만 섬김의 대상입니다. 사람은 섬김의 대상은 아닙니다. 예수님만 구주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습니다. 시편 18:31에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고 합니다. 오직 야훼 하나님만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 구세주이십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파라오)는 ‘살아 있는 신’ 혹은 ‘신의 아들’이라 칭하였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신 노릇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우습습니까? 일본의 히로히토는 2차 세계대전 후에 “내가 신처럼 군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은 지금도 왕이라고 하지 않고 천황(天皇)이라 합니다. 아직도 신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인간의 교만은 자기 사랑이며 자기 신격화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교만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교만의 결과입니다. 교만한 자는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나 대속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이런 교만은 어리석은 일이고 무지한 일입니다.
사이비 종파의 10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을 부인합니다. 둘째는 성경을 가감하는 일을 합니다. 셋째는 개인계시나 신비적인 계시를 강조합니다. 넷째는 위기의식을 조장합니다. 다섯째는 시한부 종말을 강조합니다. 여섯째는 교주를 신격화합니다. 일곱째는 현실 교회를 비판하고 자기 단체만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여덟째는 현실을 부인하고 내세를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아홉째는 물질을 강탈합니다. 열째는 반윤리적 행위를 합니다.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바른 기독교가 아닙니다. 바른 종교가 아닙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하였지만 바울이 예수님처럼 우리를 대속하고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의미하는 것이지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둘째, 십자가가 하나이듯이 세례도 하나입니다.
13절 하반절에는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라고 합니다. 인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위하여 그 숫자만큼 많은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 하나입니다. 이 하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다 구원하기에 충분합니다.
십자가 없는 세례는 없습니다. 물을 뿌린다고 세례가 아닙니다. 물에 빠졌다고 침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죽으심이며 나의 옛 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세례는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 없는 세례는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야 다시 삽니다. 세례는 죽고 다시 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교 내용에 나오는 주 인물은 다윗과 예수님입니다. 36절에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합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전할 때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여 믿게 되었습니다. 41절에는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에 회심한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세례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는 세례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면 세례도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형태는 각양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십자가의 형태, 정교회의 십자가의 형태, 개신교의 십자가의 형태가 조금씩 모양이 다릅니다. 십자가의 형태가 달라도 십자가는 하나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의 형태는 달라도 세례는 하나입니다.
고린도교회는 파벌과 당쟁이 심한 교회였습니다. 세례까지도 누구에게 받았나를 문제시하였습니다. 이걸 따지고 분쟁의 요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보와 가이오 그리고 스데바나의 집 사람(16절)에게만 세례를 베푼 것을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 몇몇 당파 지도자들이 자기 파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서로 다투어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세례가 어떤 형식이든 세례는 하나입니다. 세례는 크게 말하면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물에 잠그는 형식과, 물을 붓는 형식과, 물을 뿌리는 형식입니다. 그 형식이 어떻든 세례의 의미는 같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산다는 것이고, 죄를 다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물에 잠그든, 붓든, 뿌리든 상징이지 물 때문에 죽고 살고 물이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파에서 세례를 받았든, 가톨릭교회에서 영세를 받았든, 이단에서 세례를 받았든 다 세례로 인정합니다. 단지 우리교회에 오면 다시 입교반에서 공부하듯이 공부를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다른 교파이든, 가톨릭이든, 이단이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을 때에 성부, 성자, 성령이 우리의 삼위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5-6 상반절에는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합니다. 십자가와 세례는 하나입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삼위 하나님의 세례를 대신 할 이름이 없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 유일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세례란 탈선이라는 뜻이라고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사랑에 항복하는 것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세례란 한 사람의 인생이 끊임없이 방해받기로 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한 사람만 사랑하고 한 사람에게 항복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세례가 둘일 수는 없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연옥설’이 있습니다. 연옥설은 6세기 말 그레고리 1세 교황이 교리로 인정하여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의 보상을 다 치루기까지 영혼이 괴로움을 받아 깨끗함을 받는 곳이 연옥입니다. 지옥에 갈 정도의 대죄가 아닌 소죄가 사함을 받는다고 합니다. 죄가 대죄가 있고 소죄가 있습니까? 죽은 자가 산 자의 공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른 성경적 해석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자신의 믿음을 대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며, 나를 대신 할 수 있는 남이 없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려고 면죄부를 판 사건이 연옥설을 대변하는 사건이었고, 이 면죄부의 사건이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예수님의 구원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원은 나와 하나님과의 일대 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 외에 누구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다른 중보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와 세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십자가와 세례를 다른 것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례 외에 다른 세례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믿고,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자, 같은 이름으로 세례 받은 자는 다 한 형제자매이며 같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결 론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시인을 ‘잠수함 속의 토끼’에 비유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게오르규는 잠수함을 탄 수병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잠수함에 산소측정기가 없어 토끼를 태워 산소를 측정하였습니다. 토끼는 산소 부족에 반응이 빨라 토끼가 졸면 산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잠수함이 수면 위로 부상하였습니다. 어느 날 산소를 측정하기 위해 태운 토끼가 죽었습니다. 게오르규는 토끼 대신 산소부족을 알리는 일을 맡아 잠수함 밑바닥에 내려갔습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그는 ‘시인은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은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사회 상황을 먼저 알아차리고 세상에 알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실상 잠수함의 토끼입니다.
게오르규가 토끼 대신 잠수함 밑바닥에서 산소측정을 맡았습니까? 아니지요! 그동안 토끼가 사람을 대신하여 이 일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신하여 이 땅에서 일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찬송합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사람은 예수님을 대신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사람을 대신하십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우리가 되어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
고전 1:12-16 / 피종진목사
오늘 본문에 보면 육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의 두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영과 육을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는 무조건 저주받고, 지옥 가고, 멸망 받는다고 규정한 것은 아닙니다. 같은 그릇이지만 독약을 담은 그릇도 있고, 보약을 담은 그릇도 있습니다. 우리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영을 지니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성령을 지니고 있다면 존귀한 사람이고, 마귀의 영을 지니고 있다면 사탄과 함께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자와 영에 속한 자는 어떤 자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육에 속한 자
첫째, 육신의 일을 생각합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육에 속한 자는 육신의 일만 생각합니다. 자나 깨나 육신의 일, 가고 오나 육신의 일, 먹고 마시나 육신의 일에만 잠겨 있다면 그 마음에는 평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안과 공포가 온상의 잡초처럼 솟아날 것입니다. 염려, 그리고 고난, 고독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그 마음을 사로잡을지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다 육신의 일을 좇는 자가 되지 말고 영의 일을 기뻐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하면서 모든 일을 하게 되고, 일을 해놓고도 또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어디에 집중되고 무엇에 비중이 크게 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행불행이 좌우될 수가 있습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고 그 영의 일을 좇아 산다면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해주십니다. 그러나 육신의 일을 좇아 살면 하나님의 역사가 그 속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좌절과 실망, 시험과 환난, 고통, 고독과 허무감만 있게 됩니다. 절대로 우리는 육신의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고전 15:50) 육신을 좇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지만,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인생은 얼마나 잘 먹고 잘 입고 잘 사느냐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을 했고, 또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느냐 못얻느냐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학교 입학시험, 직장 입사시험, 운전면허 시험 등 합격 불합격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늘 나라 입국시험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 다 합격해도 하늘 나라 입국시험에 불합격되면 그 인생은 모든 것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기를 사람이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는 것은 전체를 다 잃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천국을 잃는 사람은 최고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최고로 행복한 사람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허무하고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벧전 1:24) 왜 육체를 풀과 같다고 비유했을까요? 풀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마르게 됩니다. 요즘에 연로하신 분들을 보면 뼈의 진액이 없어지고, 눈의 시력이 약해지고, 귀의 청각이 약해지니까 만사에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세상의 부귀 영광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언젠가는 떨어지게 됩니다.
넷째,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2. 하나님의 영에 속한 자
첫째,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우리 인생은 종이 조각보다 더 약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에 속한 자는 약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어도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소유한 자는 전도할 때도 담대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10) 하나님의 영을 좇는 자는 하나님의 깊은 것을 헤아려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알아서 그 길을 가게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버릴 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할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이 몰라주는 것처럼 안타까운 것이 없습니다. 부부간에 행복하게 살려면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알고, 아내는 남편의 뜻을 잘 헤아려 알아야 됩니다. 좋든 나쁘든 서로를 잘 알게 될 때 서로 도와줄 수 있고, 이해하게 되며 오해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 4:3)고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를 받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13절) 이것이 죽음의 길인지 생명의 길인지, 저주의 길인지 복된 길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실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에 속한 자는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로마서 12:2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절)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마 11:29).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여러분의 몸이 성령의 전이 되면 여러분이 어느 곳에 있든지 주의 성령이 그곳에 함께 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그곳에 마음을 향하여 주시고 모든 일에 보장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1:10에 보면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에 속한 자는 육신의 일만 생각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고, 허무하고 비참하게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에 속한 자는 성령의 능력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게 되고, 신령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은사가 있게 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로마서 8:6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육에 속한 자가 되어 고통과 불안 속에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에 속한 자가 되어 생명과 평안을 누리며 주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전히 합하라
고전 1:10-18 / 임현수목사
한국역사는 당파싸움을 빼놓으면 남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진보적인 남인/보수적인 노론/혁신적인 소론/배타적인 북인 등의 사색당쟁의 피흘리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노론이 소론을 죽이고, 남인이 북인을 죽이고 북인이 남인을 죽이는 식의 악순환이 반복되어 왔습니다.
요즘도 이런 전통은 변함이 없습니다. 지방색에서부터 정당에 이르기 까지 파벌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한국사람 입니까? 나는 전라도이라에)
그러다가 조선 말기에 교회가 들어 왔는데 파벌에 익숙하다 보니까 교회안에도 자연스럽게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 분열의 모습은 한국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보면 우리 한국교회와 닮은 교회가 하나 있는데 바로 고린도교회 입니다. 이 두 교회의 닮은 점이 있다면 분열하는 교회의 모습 일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도 고린도라는 도시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고린도는 아테네와 함께 희랍의 유명한 2대 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별히 희랍은 철학이 발달한 나라로써 바울이 활동하고 있던 그당시만 해도 철학의 계보 가운데 중요한 학파만 헤아려도 무려 50개 이상의 학파들이 존재 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선생을 중심으로해서 소크라테스학파/플라톤학파/에피큐리안 학파/스토아학파등의 여러가지 학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런 사회의 분열상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서 교회 안에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파벌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짧은 기독교역사에도 보면 왠 교파가 그렇게도 많은지? 긍정적인 측면도 찾을수 있겠으나 우리 한국교회는 이 분열과 분쟁과 파벌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지 못한다면 더 이상 사회를 변화시키는 공동체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좋아하는 초대교회에도 이런 교회가 있었습니다.그래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권면하기를'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분쟁을 원치 않으십니다.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되는 길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합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1. 분쟁을 없애는 길
교회에서 분쟁을 없애려면 성도들 간에 세 가지 합할 것이 있습니다.
(1) 그 하나가 '다 같은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다 같은 말이란 교회에서나 성도들의 모임이 있는 곳이면 대화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한입으로 두말하는 일구이언(一口二言)은 교회를 파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온 성도가 다같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주님을 높이는 말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로 하나가 되면 분쟁이나 파당이 생기지 않습니다.
(2) 다음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은 주님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빌2:5절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스스로 낮추시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시고 나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이 같은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가진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갖는다면 분쟁이 있어도 화합이 되고 다투다가도 화목해 질 것입니다.
(3) 다음에 '같은 뜻'으로 합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에게는 오직 한 가지 뜻이 있을 뿐입니다. 그 뜻은 내 뜻이 아니라 주의 뜻입니다. 우리가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리라는 말씀처럼 주의 뜻이 우리의 중심에 서면 분쟁을 얼마든지 극복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무엇 일까요?
2. 고린도 교회의 분쟁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원인은 사람에 대한 소속감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12절에서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은 소속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sense of belonging 이라는 것은 인간의 필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그룹이든지 소속해야 거기에서 안전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따라 갈수 있는 공동체를 찾고 내가 따라야 할 지도자를 찾습니다.
어떤 사람은 힘있는 사람을 찾아 폭력집단에 소속하기도 하고 / 어떤 사람은 지식이 많은 사람을 찾아 두뇌집단에 소속하기도 하고 / 어떤 사람은 사랑있는 사람을 찾아 사회봉사의 성격을 지닌 단체에 소속되기도 하고 / 어떤 사람들은 용감한 사람들을 좋아해서 군대에 소속 되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소속 자체는 하나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교회안에도 많은 그룹이 있습니다. 특별히 소그룹은 좋은 것 입니다.그리고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그룹도 좋은 것입니다. 기도그룹 / 말씀 공부하는 그룹 /전도하는 그룹 같은 것은 얼마든지 생겨도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교회안의 소그룹을 가르켜서 영어로 셀 그룹이라고 부릅니다. Cell이라는 세포라는 말 입니다.
세포라는 것은 생명체가 존재하는데 가장 중요한 생명의 기본단위 입니다.
사람의 몸이 정말 신비한 것은 우리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세포가 수백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이런 생세포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몸안에서 성장하고 분열하므로 우리 몸도 성장하고 발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교회 안에도 이런 작은 그룹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소그룹들이 서로 교제하고 성숙해 질 때 교회는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소그룹이 건강하지 못할 때 입니다.
부자연스럽고 잘못된 목적으로 성장 할 때 입니다. 그때부터 이런 세포는 병든세포가 되어서 다른 건강한 세포를 죽이고 파괴시키는 악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암세포가 되면 수술하고 잘라내든지 방사선 치료를 통해 치료를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몸 전체가 위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몸 어딘가에 암세포가 돌똘 뭉쳐있어서 주변에 해를 끼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회안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목장들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한다면 그것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목장에서도 목원들이 모일 때 마다 서로 격려해주고 / 사랑해 주고 / 서로 권면해주고 / 서로서로 받아주고 / 들어주고 / 위로해 주고/ 기도해주고 / 섬겨주고 / 용서해주고 / 이해해 주고 / 서로 문안해 줄 때 그 목장은 성장하고 분가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케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도의 교제는 나누지 않고 모여서 힘을 뫃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헐뜯고 부정적인 얘기를 나누면서 다른 지체들을 공격하고 무너 드린다면 그 세포는 그때부터 병든세포가 됩니다. 이런 병든세포가 많아지면 공동체 전체에 병이 들기 시작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안에서 이런 암적인 위기를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무리에게서 나뉘우는 자들이 생기기시작했습니다.
잠 18:1 무리에게서 스스로 나뉘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고린도 교회에서는 끼리끼리 자신들의 소속파를 만들었습니다. 그 파가 네 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는 <바울파> 라고 하는 분파입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옹립하고 리더쉽이 있고 확신에 찬 바울에게 남다른 호의와 사랑을 가지고 바울의 사도권을 주장하면서 다른 분파와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아볼로 파>입니다.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도 능하고 웅변적인 설교로 많은 은혜를 끼치는 지도자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에서 그의 특유한 설교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그를 옹립하는 파가 생겨난 것입니다.
다음에 등장한 파가 <게바 파>입니다. 게바란 말은 바위란 의미를 가진 아람어로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능력의 사람 이었고 행동의 사람 이었습니다.
게바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간에 알려진 것은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급 사도이며 주님의 수제자 였으므로 게바 파라는 파당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파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파가 어떤 파인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파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 이상의 세 파를 비난하고 우리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믿음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주장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경히 여기고 예수만을 내세운 파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얌체파라고 부릅니다.
요즘도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파벌이 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유력한 인사가 모사와 장로로 있는 경우, 파벌을 좋아하는 권사나 집사들이 어떤 인물을 중심으로 파당을 조성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싸움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교회는 할수 있는한 이런 파벌의 문제를 깨긋하게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3. 분쟁의 해결책
바울은 13절에서 고린도 교회의 이런 분쟁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요 성도들은 그 머리에 붙은 지체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파당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나면 그리스도가 나뉘인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13절에 보면 세가지 질문형식으로 공격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 했습니다.그리스도를 왜 찢으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그리스도는 한분 이시니까 그 분을 중심으로 너희들이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마땅치 아니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의 몸을 찢느냐는 것입니다.
두번째 질문은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더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따라 다니느냐는 것입니다.바울은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따른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했던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좋아해도 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엄중하게 꾸짖을 수 있는 객관성을 가진 지도자였습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뇨> 십자가에 못박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신 분은 그리스도 이신데 어찌하여 다른데 생각의 초점을 맞추느냐는 것입니다.
세번째 질문은 <너희가 세례를 받을 때에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유명한 사도라고 하지만 베드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울이 아무리 이방인의 사도이지만 어떤 이방인이 혹시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적이 있습니까?
세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받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는 연합에 있습니다.
특별히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같이 죽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가 된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자라면 우리는 마땅히 누구를 따라가야 합니까?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지요.
백문일답을 해 보셨지요? 백가지 천가지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하나 뿐입니다.
1.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은 누구입니까?
2.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누구의 이름입니까?
3.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까?
4.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구 입니까?
5. 하나님께 갈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진리요,생명은 누구 입니까?
6.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7. 지금도 역사를 다스리는 역사의 주인은 누구 입니까?
8. 가장 위대한 인류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9. 우리나라 남북통일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10.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렇다면 이런 주님의 몸을 찢고 사람들을 따라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고 분쟁을 일삼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을 짓는 자들은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파당으로 교회를 혼란하게 하기 때문에 정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주로 믿고 순종하는 생활을 통해서 올바른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영적인 지도자는 자기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기가 받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에 스테인드그라스가 장식되어 있는데 그 그림의 중간에는 예수님이 서신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강단에 서면 뒤에 있는 예수님의 그림이 잘 안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목사님이 설교를 하다가 옆으로 자리를 비키게 되었는데 앞에 앉아있는 아이가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없어 지니까 예수님이 보이네> 이 아이의 말을 듣고 그 목사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항상 이것을 기억 하십시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영적인 지도자가 있어도 결코 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면 안됩니다. 어떤 특정한 모임에 가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사림이 없으면 신앙생활 못하는 줄 알고 지나치게 사람만 따라 다니는 것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들을 유도하는 지도자도 잘못된 사람입니다.
좋은 영적 지도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신 당나귀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 당나귀가 뭘 모르고 사람들이 자기를 따른다고 착각하고 우쭐 된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 입니까?
사람을 넘어서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소속되는 유혹을 넘어서는 사람이 많아 질수록 교회 안의 파벌과 분쟁이 극복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을 똑바로 알고 만나면 인간들이 저지르는 분쟁의 문제는 얼마든지 예방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 분명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파벌을 형성하게 됩니다. 천국에는 감리교 장로교 침례교 루터교 카톨릭 신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천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만이 들어 갈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신앙을 추구하는 방식이 문화적으로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순절 식으로 접근 할 때 잘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지적인 접근을 할 때 잘 받아 들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체험과 능력이 나타나야만 쉽게 받아 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신앙방식의 차이 / 라이프 스타일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교파를 나눌 필요는 없지요.
한 교회 안에서도 다양한 신앙의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그런 인간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지혜이신 십자가/복음/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많은 기적을 행하고 아무리 많은 능력을 행하고 아무리 기가막히게 아름다운 천사의 설교를 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끊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런 능력은 요술에 불과한 것이고 그런 지식은 말 장난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기쁜소식입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아무리 문벌이 좋고 /학식이 많고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인생은 모두 무지한 인생에 불과 합니다. 복음이 없는 인생은 누구든지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교회 안에서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사람을 나누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자랑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고전1:29,30 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고전 1: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예수님의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속함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 되십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31절에보면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왜 사람들이 나뉘어 집니까? 인간적인 허탄한 자랑 때문에 그런 것 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학벌과 돈과 지식이 도데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만 자랑한다면 나뉠 것이 없습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예수님에게서 초점이 멀어질 때 그사이에 인간적인 것들이 끼여서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우리는 주안에서 형제요 자매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온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되는 것입니다.
치고 박고 싸우는 교회
고전 1:10-17 / 이정선목사
오늘날 교회의 커다란 약점 가운데 하나는 자기들끼리 너무 잘 싸운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분쟁에 휩싸여 법정에까지 가서 결판을 내야 하는 일까지 종종 일어납니다. 그런 와중에 정말 못 봐줄 일들도 발생하는데, 교회의 분쟁에서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뭔가 하면, 목사가 예배를 인도하려고 예배당에 들어오려 하면 반대파가 못 들어오게 막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폭력이 난무하고 경찰이 출동을 합니다. 그래서 또 전치 4주의 상해를 입었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고소를 하고 사건은 더 커지지요.
그렇게 해서 예배당을 차지하면 그게 승리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치고 박고 싸우고 나서 무슨 마음 자세로 예배를 드리게 될까요? 그 예배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 예배를 받으셔야 할 하나님은 기쁜 마음으로 그 예배를 받으실까요? 또 쪽수에 밀려서 본당을 차지하지 못한 쪽에서는 1층에서 따로 예배를 드립니다. 1층에서도 예배를 드리고 2층에서도 예배를 드리는데, 서로가 상대방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각자 하나님께 자기 편 되어달라고 할 것이니, 참 하나님이 곤란하시겠네요.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며 갖는 기대가 있습니다. 자기들은 못하는 것을 교회가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입니다. 자기들은 착하게 살지 못하고 죄를 많이 짓지만, 교회는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또 교회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자기들보다 더 못한 짓을 하면 자연히 욕을 하게 되지요. 조폭들이 패싸움했다고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패싸움을 하면 조폭보다 못한 집단으로 비치게 되는 거지요.
사실 교회에 이런 분쟁이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맨 처음 교회가 생겼을 때부터 분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여기 고린도교회에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많은 문제를 가진 교회였는데, 그래서 그 문제들을 지적하고 고치도록 하기 위해 바울이 이 편지를 써 보낸 것인데, 그 많은 문제 중에서 바울이 맨 먼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바로 이 교회 안의 분쟁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의 분쟁을 보면 파가 넷으로 나뉘어가지고 서로 대립했군요. 바울파가 있었고,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전도하고 가르쳐서 세워진 교회가 바로 이 고린도교회이기 때문에, 바울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또 바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아볼로파는 왜 생겼을까요?
아볼로는 바울의 뒤를 이어 고린도교회에 와서 목회를 한 사람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인데,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였다고 사도행전 18장에서 말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에 있는 도시로서 당시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이 아볼로는 수사학에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매우 뛰어난 언변을 구사했던 것 같습니다. 이 아볼로가 원래 에베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아직 성령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바울과 동업을 하면서 함께 복음을 전했던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볼로가 고린도교회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볼로의 뛰어난 지식과 말솜씨에 고린도 교인들이 뿅 가버렸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유대인들과 말싸움을 해서 지는 법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바울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까 아볼로는 바울에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유능하고 똑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추종자들이 생기지 않았겠어요?
그래도 바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 생각에는 아무리 아볼로가 똑똑하고 잘났어도 바울이 처음 그들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 주었고, 또 바울은 사도라고 하니까 바울파로 남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생겨나 세력을 규합하게 되니까, 어떤 사람들은 바울파나 아볼로파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바울이나 아볼로보다 더 큰 권위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찾아낸 것이 베드로입니다. 바울이야 사도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던 데 비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니까 더 큰 권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요. 거기다가 바울이나 아볼로가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데 비해 베드로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전통 따지기를 좋아하는 유대인들은 베드로파에 들어오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파 저 파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바울파에서도 들어오라고 손짓하고, 아볼로파에 들어가자니 베드로파에 있는 친구가 섭섭해 할 거고, 이 쪽 저 쪽 다 눈치를 보며 살자니 피곤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그래서 무당파들이 모여서 자기들끼리 또 하나의 파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다른 파들이 바울이나 아볼로, 베드로 같은 사람들을 다 갖다 써버렸으니까 같다 붙일 사람이 없어요. 그리고 새로 파를 만들려면 기존에 있던 파들보다 더 권위 있는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찾아낸 것이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편 가르고 당파 만드는 수법은 똑같지요? 교회라고 해서 다르지 않아요. 사람이 둘 이상 모인 곳에는 의견의 충돌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조정되지 않고 확대되면 이렇게 분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 안에 분쟁이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아무도 바울을 위해서 예수 믿은 사람이 없고, 아볼로 때문에 예수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의 공로로 구원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볼로에게 세례 받았다고 아볼로의 교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과 삶의 중심에는 그리스도가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바울의 교회가 아니고 베드로의 교회도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St. Andrews Church니 St. Enoch’s Church니 이런 것은 뭡니까? 교회도 루터교가 있고, 학교도 St. Paul이니 St. John 같은 이름을 붙인 게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앰뷸런스 회사가 St. John이더군요. 훌륭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지을 수도 있고 학교를 세울 수도 있습니다. 아볼로 같은 훌륭한 선생이라면 그를 추종하는 학파도 생길 수 있고, 또 개인적으로 베드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베사모(베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할 수도 있어요.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누구는 바울을 좋아하고 누구는 아볼로를 좋아한다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빌미로 분쟁을 일으키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아볼로를 좋아하고 베드로를 좋아하는 것이 무슨 문제될 게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분쟁을 일으키고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지어야 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모든 분쟁의 원인은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약 4:1) 물론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정의를 실천한다거나 악을 징벌한다는 그럴듯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 명분을 한번 제거해 보세요. 그러고 나서 거기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로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명분을 제거한 후에 나의 원망과 분노가 남아 있다거나 나의 이해관계가 연루되어 있다면 그 분쟁에 참여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교회가 분쟁에 휩싸이고 그렇게 사람들이 원수처럼 갈라지는 것을 종종 보아왔습니다. 교인들이 싸우면 더 지독해요. 용서가 없어요. 또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대부분 목사가 개입된 문제입니다. 목사와 교인들이 대립하기도 하고, 교인들이 목사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대립하기도 합니다. 저의 부친도 목회하시다가 교회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나야 하셨던 적이 있었고, 저의 형님도 목회하면서 모셔오는 데 앞장섰던 분들에게 다시 쫓겨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아직까지 한 번도 그런 일에 연루된 적은 없습니다만,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는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여러분, 할 수만 있으면 저는 교회가 그렇게 갈라지고 싸우는 일이 저를 중심을 해서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 분쟁에 앞장서지 마세요. 그렇게 해서 여러분의 영적 생활과 믿음의 성장에 도움 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사 쫓아내는 일에 총대 메지 마세요. 제가 쫓겨날까 걱정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쫓겨나는 것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싫다는데 남아 있겠다고 버티고 싶은 생각도 없고, 쫓겨날 지경이 되도록 구차하게 인생을 살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분쟁에 앞장선 사람들 자신이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정의를 세우고 목적을 달성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난 후에 돌이켜보면 그 인생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있지 않겠어요? 어디를 가더라도 그 허물은 달고 다녀야 하지 않습니까? 하늘나라 갈 때, 주님 앞에 서는 날, 그 문제는 여기다 남겨두고 갈 수 있나요?
뭐든지 끝까지 지키겠다고 버티는 두 사람이 있으면 분쟁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보하고 포기하는 한 사람이 있으면 분쟁은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끝없는 분쟁 앞에서 누가 잘했고 잘못했고는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분쟁 자체가 이미 더 큰 죄악으로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이 얼마나 애끓는 사도의 권면입니까? 교회 안에 분쟁이 생기고 서로 싸울 때,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의 가슴은 찢어질 것입니다. 반면에 그것을 즐기고 부추기는 것은 누구입니까? 우리의 원수 사탄이 아니에요?
우리가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한 마음과 한 뜻을 품게 되기를 바랍니다. 비록 생각이 다르고 습관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법도 달라서 서로 마음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 차이들을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양보해서 아름다운 화평의 모습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회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천국에 갈 것이고 다 함께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여기서 그렇게 조금 다르고 서로 안 맞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일입니까? 그것 때문에 교회를 깨뜨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면 무슨 수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원수가 되다시피 싸우던 사람들,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이나 목사 쫓아낸 장로들, 모두 천국에 가서 만나겠지요? 거기서 서로 쑥스럽지 않겠어요? 그때 서로 용서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부끄럽지 않겠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가운데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하는 것 같은 파당과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합시다. 마음이 안 맞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 가지고 서로 분노하고 싸울 것이 아니라, 솔직히 꺼내놓고 얘기하고 토론해서 합일점을 찾아내야지요. 그런 다음에 각자 양보해서 협력하는 것, 우리가 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게 하시고, 또한 하나 되게 하시는 영을 부어주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길
고전 1:10-17 / 김태복목사
금년부터는 절기나 중요한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매주 고린도서를 중심으로 강해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고린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았습니다. 말씀이 충만했으며, 은사가 충만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했으나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를 언급한 후 곧 바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을 언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제일 먼저 언급한 문제는 교회의 분쟁이었습니다. 11절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글로에란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석가들에 의하면 고린도에 거주하는 부유한 여성 실업가로, 별 설명이 없는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 잘 알려진 여신도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바울의 선교를 열심히 돕는 유력자로 종들을 통해 선교비나 필요한 물품을 보내는 자였을 것입니다. 여하튼 이 여인이 보낸 분들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 형편을 들어보니 교회 내에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분쟁이 생겼습니까? 12절 "이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안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 즉 베드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서 서로 다툰다는 것입니다. 12절에서 ‘분쟁’이란 말은 헬라어로 ‘에릭스’인데 이는 10절에 말하는 ‘분쟁’의 헬라어 ‘스키스마’와 다른 단어입니다. 10절에서 말하는 분쟁이라는 말은 완전히 분열된 상태이고 12절에 말하는 분쟁이라는 말은 서로 울근불근 다투는 상태이기는 하나 완전히 갈라진 상태는 아닌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파벌 간의 다툼으로 인해서 갈라지기 직전의 위기를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작년 한 해 동안 영락교회의 분쟁을 수습하노라고 갖은 고생을 다 해보았습니다. 한참 분쟁이 심할 때에는 앞장 선 분들의 눈과 말과 행동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당회실에 와서 마구 고함을 지르기일수고, 제가 조금만 누구 편에 서는 느낌을 들면 저한테 달려들어 싸우자고 할 것 같은 태세입니다.
조금만 삐긋했다가는 광성교회 같은 큰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도 보여서 얼마나 마음으로 조바심을 쳤는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런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급한 나머지 글로에가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종을 보내서 이 사실을 전갈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 실상과 바울이 권면하는 교회가 하나 되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고린도 교회의 분쟁 실상과 원인은 무엇입니까?
좀 전에 언급한 대로 고린도 교회는 네 파벌로 나누었는데 분석해 보면 철저히 인간적인 생각들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네 파벌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1)바울파는 이방인들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바울은 한번도 이들에게 자기편이 되어 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음에도 이방인들이 바울에게 속한 자라고 끼리끼리 뭉쳐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소위 구원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도 폐하고 할례도 받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2)아볼로파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유대인이었는데, 그는 상당히 지식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웅변가였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그 곳은 지적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곳에는 학자들이 많았는데 아볼로도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기를 좋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볼로파는 기독교를 철학적인 종교로 믿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3)게바파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게바란 유대인의 이름입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하고 부르지 않고 구지 게바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게바파, 즉 유대인들은 율법과 할례를 존중히 하는 자들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이나 할례를 지키지 않아도 되고 다만 믿음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울을 싫어했습니다.
(4)그리스도파는 은혜 체험자들을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자기들만이 참다운 기독교인들이요, 참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체험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는 파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와 봉사도 많이 하는 자들로 교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문제는 영적 교만과 독선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나 교회 지도부가 자기들을 등한히 하는 느낌이 들면 자기들끼리 가정집회나 기도원 같은 곳으로 몰려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이단같은 잘못된 곳으로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네 가지 파벌이 생긴 원인이 무엇입니까? 교회가 시험이 들어서 그렇게 되었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적 생각들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분쟁이 있는 교회들을 찾아가 이 파나 저 파를 만나보면 열심히 성경이나 법을 갖고 말하지만, 대부분 인간들의 생각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느 교회는 지연 중심으로 이북파, 영남파, 호남파로 나누기도 하고, 어느 교회는 학연 중심, 혹은 혈연중심으로 파벌이 조성되기도 합니다. 경북 어느 큰 교회는 목회자가 자주 바뀝니다. 장로님들의 3분지 1이 강씨인데 당회를 하기 전에 먼저 문중회의를 하고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담임목사가 자기들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계속 목회를 방해함으로 아무리 능력 있는 목회자가 부임해도 감당할 수 없다고 합니다. 너무나 한심한 교회입니다. 또 목회자가 자주 바꾸는 교회는 그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사실, 처음 교회 나와서 은혜 받는데 도움을 준 목회자, 담당 교구 목회자로서 특별히 돌봄을 받았을 때, 혹은 성경공부 반에서 구원의 체험을 받았을 때, 그 분을 일생 잊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좋아했던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어떤 그룹이 형성되기도 하고 은혜를 받았던 어느 기도원이나 어느 부흥 강사 목사님을 중심해서 어떤 아류가 형성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가 홍익교회에서 30년 목회하는 동안 70%이상의 성도들이 저를 통해서 세례를 받고 제직이 되거나 중직이 되었고 집사람을 통해서 병 고침 받은 분들이 상당수 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후임자가 부임한 후에도 아무 생각 없이 우리의 이름과 받은 은혜를 들먹거리지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분들은 후임 목회자에게 미운 톨이 박힙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 것은 세례를 주었거나 주례나 장례식을 집례했거나, 제직이나 중직이 된 것, 혹은 병 고침을 받은 것도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전부 하나님이 하신 일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만 기억하고 인간은 잊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면 우리도 인간인지라 섭섭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덕이 됩니다. 여하튼 어떤 이유든 간에 교회 안에 분파가 있고 분쟁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책망 받을 일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이단 문제를 제외하고는 어치든지 하나가 되어야 하는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그러면 어떻게 해야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한 마디로 인간적인 방법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 온전히 합하는 것입니다.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했습니다. 온전히 합해야 할 이유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한 몸이 된 이상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온전히 합하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절에는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대부분 가정이나 교회나 어떤 기관이든 말 때문에 시험이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하는 데 부인은 저렇게 말합니다. 남편은 이렇게 하자는데 부인은 저렇게 하자고 합니다.
의견이 달라도 둘이 잘 타협해서 하나의 말, 하나의 길로 가야 하는데 끝까지 고집하거나 둘이 결정하고서도 계속 불만을 말하면 결국 둘은 깨지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고 장로님들은 다른 말을 합니다. 결국 교인들은 갈라지고 시험이 들거나 깨지고 맙니다. 물론, 인간이 모인 곳이라 의견이 다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서로 의논하여 결정한 다음에는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같은 마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면 됩니다.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까 다른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마음이 하나가 안 되면 어떻게 됩니까? 정신 분열증에 걸리고 미친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까?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됩니다.
빌 2:2-5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을 가질 뿐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않게 되며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다툼이 생기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은 증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나 당회원이나 제직, 기관의 임원들은 교회의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제일 조심할 것은 말입니다. 어느 분은 교회에 와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입으로만 충성합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말로 온갖 잔소리하고 앞장 서 일하는 사람을 마구 비판함으로 심한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험담은 물론이고 이간질하는 사람입니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말로 나라도 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습니다. 고구려 보장 왕 25년 당대 영웅인 연개소문이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습니다. 남생은 이 귀한 벼슬을 얻어 정사를 맡은 다음 여러 성을 순찰하면서 국민의 여론을 듣기 위하여 정사를 자기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부탁하고 떠났습니다. 어느 날 남건과 남산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당신의 형 남생이가 당신들을 미워하여 장차 없애고자 하는 생각을 품고 있으니 그의 대책을 모색하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으나, 혹시나 하고 의심이 되며 염려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남생이 민가를 순방하고 있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의 동생 남건과 남산이 당신의 자리를 탐하고 있으니 그 대책을 세우라고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남생도 믿지 않았으나, 혹시나 해서 동생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비밀사절을 보냈습니다. 동생들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그 사절을 잡아들이고 형을 왕의 이름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남생은 자기가 보낸 신하는 오지 않고 자기를 불러들인다는 소식을 듣고 동생들이 음모를 꾸미는구나 생각하고, 동생들도 형님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낯선 사람의 말을 믿고, 군대를 동원하여 남생을 잡으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생은 당나라로 피신하였습니다. 당나라 고종은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데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남생에게 현도군공에 봉하고 장군을 명하여 고구려를 치게 하였습니다. 전쟁 2년 만에 신라까지 합병하여 평양성을 에워싸니 한 달 만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하여 고구려 28대 705년간 천년 시작이 하루아침에 끝마치고 말았습니다.
나라도 말에 의해 무너진다면 작은 교회 정도는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말을 옮기는 사람들, 특별히 그 말에다가 나쁜 의도를 보태서 옮기는 사람을 교회는 제일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마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므로 같은 마음과 같은 말, 같은 뜻을 나타내십시오. 그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교회가 되게 하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어떻게 하나가 되었습니까?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십자가 안에서 나란 존재가 목 박혀 죽고 부활 안에서 주님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 다르지만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누가 세례를 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으로 변화 받아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다른 사람이지만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으므로 한 몸이 되었고 예수님의 피로 영적으로 교통하게 된 것입니다.
13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뇨”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나뉨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나눌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도 온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렇게 사도가 되었고 세례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고 있는데 어떻게 나를 교회 분쟁의 도구로 이용하는가 라고 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 교회를 분열시키는 자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자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다른 이의 허물과 죄를 용납하고 대신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교회는 십자가 사랑으로 용납함이 없이는 무너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신이 허물과 죄가 많다고 느끼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자칭 의인은 교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서로 율법의 눈으로 판단하기만 한다면 모두가 정죄 받을 사람들뿐이므로 한 사람도 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 서서 설교하는 저도 여러분들이 율법의 눈으로 본다면 몇 개월도 못 되어 온갖 허물과 잘못 때문에 쫓겨나고 말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가정을 좋아합니까?
가정은 어린 자녀들이 허물 많고 실수 많을지라도 부모님이 사랑으로 덮어주고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실수했을 때 부모님들이 가서 대신 용서를 빌고 대신 그 값을 치러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가정인 교회는, 법정처럼 너나없이 서로의 잘못을 따지고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교회는 아무도 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참석하고 싶은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가 교회에 온다고 하더라도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의 부족이나 허물을 용납하고 덮어주는 교회, 때로 교회의 큰 어려움이 있을 때라도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교회 지도자들이 부모처럼 큰 가슴을 가지고 “이 모든 풍랑은 나의 연고입니다.”라는 고백할 수 있는 교회인 것입니다.
제가 영락교회의 문제를 수습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서로의 잘못을 들추기는 잘하지, 누구 하나 교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나의 연고로 이런 풍랑을 만났습니다.”라고 하는 분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과거 영락교회는 한경직 목사님 같은 위대한 목회자도 계셨지만, 최창근 장로님 같은 큰 그릇의 동역자가 있었기에 은혜가 넘쳤던 것입니다.
최창근 장로님은 신의주에서 월남하신 후, 1948년 12월, 주문진어업조합 이사로 있던 친구의 도움으로 수산업을 시작 했습니다.한 번은 동태를 잔뜩 실은 17t 자리 배에 선원 5명과 함께 승선해 부산을 향했는데, 기상변화로 거대한 폭풍을 만나 죽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그 때 최 장로님은 동해에 빠져 인생을 마감할 생각을 하니 너무나 가슴이 터질 듯싶어 불타는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태어나 그렇게 간절하고 뜨거운 기도는 처음일 정도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먼저, 지금까지 물질욕에만 매여 살던 죄를 회개하면서 “살려만 주시면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비바람과 싸우면서 3시간 만에 통통배가 새벽 6시경에 기적적으로 울진항에 무사히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왔다고 합니다.
특별히 지난 50여 년간 한 목사님를 그림자처럼 보필하며 가장 큰 물질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기드온협회, 군선교연합회, 세진회, 기독공보 사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76년 영락고등학교 건축을 위해 4억원의 토지를 매각해 기증, 보성여고 강당건축을 위해 2억원의 토지를 매각해 헌납, 아세아연합신학대학에 8만평의 현 부지를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최선을 다해 사업을 하고 그 수익을 하나님 사업에 쓰는 것이 사명이라고 여기며 살아오셨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써도 써도 계속 채워지는 샘물’과 같이 물질을 채워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번에 영락교회 문제 수습하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90세가 넘은 최창근 장로님은 문제를 일으킨 장로님들을 만난 후에도 야단을 치기보다는 손을 붙들고 우시면서 “다 선배들이 부족한 탓이다.”고 하심으로 너무나 부끄러웠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교회는 이런 큰 가슴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누구나 남의 잘못이나 부족은 얼마든지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십자가 사랑으로 이루어진 교회이기에 허물과 죄를 덮어주고 대신 그 짐을 질 때에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어치든지 우리 교회는 45년 동안 화목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 주님이 오실 때까지 분쟁이나 분규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시는 홍익교회의 중직들과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그리스도 마음을 품음으로 같은 말, 같은 마음과 뜻을 나타내며, 십자가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며 대신 짐을 짐으로, 어떠한 문제 앞에서라도 하나된 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분쟁의 문제
고전 1:10-17 / 이동원목사
고린도전서 1장10절 말씀부터 17절 말씀까지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한절 읽고 다음절 여러분이 읽고 함께 교독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애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니는 다름이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주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외에는 아무에게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아멘.
아 ,오늘 1장 10절로부터 시작해서 고린도전서4장 마지막절 까지는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여러 가지 문제 가운데 첫 번째 문제 분쟁의 문제 분열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고린도전서는 많은 문제를 직면하고 있었던 고린도교회, 고린도교회를 둘러싸고 있었던 고린도라는 사회, 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문제들과 더불어 갈등하고 있었던 사회인데 이 고린도 교회가 이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을 추구하는 바울의 편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고린도전서 1장10절에서 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를 권하노니 이 고린도전서는 특별히 권면의 성격을 갖고있는 편지입니다.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을 추구하도록 권면하는 그런 편지입니다. 그리고 지나간 시간에 이미 말쓰드린 것처럼 고린도교회는 그런 문제를 넘어서서 성숙한 자세로 문제를 극복하는 그런 모본을 보였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우리는 이 고린도 교회가 부딪혀 있었던 문제 가운데서 첫 번째 문제인 고린도교인들 안에 있었던 혹은 교회 안에 있었던 분쟁의 문제,분열의 문제 혹은 파벌의 문제에 대해서 같이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는 이 분열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 그 원인을 진단해 보고 그 진단에 따르는 처방을 바울이 어떻게 내리고있는가를 같이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이 고린도전서 1장부터 시작해서 4장까지 네가지의 중요한 원인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면 1장에 10절 이하의 부분은 사람들에 대한 소속 교인들 가운데 나는 어떤 사람에게 속해있다, 나는 어떤 사람을 따른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소속감 사람들에 대한 소속이 바로 고린도교회안에 그런 불필요한 분파들을 안고있었던 원인이었던 것을 우리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1장 18절부터 사실은 시작됩니다만 주로 2장에 가서 바울은 지혜라는 문제를 다룹니다. 참된 지혜와 거짓된 지혜,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별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왜 지혜의 문제가 나왔냐면 사람들이 누가 더 똑똑한가 누가 더 지혜로운가에 따라서 편이 갈라진 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원인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고린도라는 도시는 히랍의 유명한 도시가운데 하나입니다 아테네와 함께 히랍의 중심 2대 도시가운데 한 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랍이라는 이 나라는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철학을 탄생시킨 나라입니다. 철학이라는 말은 영어로는 필라소피 라고 말합니다. 필라소피라는 말은 본래 히랍어에서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필로스 라는 단어와 소피아라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일종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로스 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뜻이죠, 친구들간의 사랑이나 우정적인 사랑을 말할 때 필리아, 필로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 다음에 소피아라는 것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지혜 위스톰 지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필로소피아 필로소피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한다, 지식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아 그러나 이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들 가운데도 많은 여러 가지 학파들이 혹은 분파들이 히랍의 역사 속에는 존재하고 있었고 신약성경이 씌여지던 바울이 활동하고 있던 그 당시에도 히랍에는 무려 그 철학의 계보 가운데 한50개의 학파들이 중요한 학파만 따져도 약50개의 학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스승을 중심으로 해서 유명을 스승을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학파, 플라톤학파, 이렇게 해서 에피큐로스를 따라 다니는 에피큐리안학파, 스토아를 따라 다니는 스토익학파 이런 여러 가지 학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한 사실은 이러한 사회적 경향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신앙을 갖게 되었을 때 그 신앙에 있어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 어떤 지도자를 중심으로 해서 고린도교회 안에도 파벌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고린도교회는 파벌주의를 극복해야할 중대한 위기 앞에 서 있던 것입니다. 사실은 이 히랍사람 못지않게 파벌을 좋아하는 문화적 역사적 전통을 갖고있는 나라가 우리 한국이기도 합니다. 주로 이조시대 영향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사색당쟁 그래서 한국 이조시대 역사를 읽으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가 아니라 뭐 노론이 소론을 죽이고 남인이 북인을 죽이고 북인은 남인을 죽이고 뭐 이런 사색당쟁의 피흘리는 역사의 전통을 우리도 갖고있습니다. 파벌이 익숙해 지다보니까 파벌을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생각 되어지던 사회 그것이 바로 고린도사회 였고 오늘날의 한국도 그런 영향에서 아직도 자유하지 못하다. 그래서 계속 끊임없이 계속되는 당들의 이합집산의 모습들, 당파싸움의 영향 아직 민주화된 현대 우리들의 사회 속에서도 우리가 그대로 보고있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들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들어와 있을 수 있다는 고린도교회 안에 있었던 파벌, 몇 개의 파벌을 고린도교회 안에서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자, 이러한 파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지혜를 따라서는 안된다. 사람의 지혜 이상의 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지혜다. 이것은 특별히 2장에서 바울사도가 역설하고 있는 그런 내용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높이는 사람의 지혜를 높이기 시작한다면 끊임없는 파벌주의를 피할 수가 없다. 이것이 두 번째 진단이고요, 그 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면 첫째는 사람을 따라 사람들이 소속하기 때문에 이합집산이고, 둘째로 사람의 지혜를 높이기 때문에 파벌이 생겼고 세 번째는 3장에서 주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인데,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 특별히 지도자 되는 사람들의 각각 역할이 다르다. 은사에 따라서 하고있는 역할이 다르다. 롤이 다르다, 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되는데, 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왜 저럴까, 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비판하고, 거기서 파벌이 생기죠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에 대한 무지 이것이 바로 세 번째로 고린도교회 파벌을 낳은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는 4장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것들 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차이점, 사람들에 대한 판단의 차이점, 나는 저 사람을 이렇게 판단한다. 저 사람은 나를 이렇게 판단한다. 판단, 이 판단이 파벌을 낳고 있었던 것을 볼 수 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중요한 원인을 지적합니다. 고린도교회 분열이 왜 오고 있었는가?무엇 때문에 초래 되고 있었는가? 네가지 원인 첫째 뭐예요? 사람들에 대한소속,어떤 사람을 따라가서 소속하는 사람들에 의한 소속, 둘째는? 사람들의 지혜를 따라갔기 때문에, 사람들의 지혜를 높혔기 때문 세 번째는? 사람들의 역할의 상이성을 몰랐기 때문, 네 번째는?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것이 바로 고린도교회 파벌들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람에 대한 소속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 소속함으로써 그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인간은 소속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딘가 소속되 있어야만 거기서 안정감을 느낍니다.
누군가에게 소속 되어야 하고 어딘가 소속을 해야만 그 소속에서 오는 안정감을 우린 느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속할 수 있는 공동체를 찾고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지도자를 찾습니다. 힘있는 사람을 찾고 지혜로운 사람을 찾고 편안한 사람을 찾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찾아서 거기에 우리는 소속을 합니다.이 소속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예요. 소속은 필요한 것이예요. 소속에 따라서 자연히 어떤 그룹핑을 생길수가 있어요 어떤 그룹이 만들어질 수 가있어요 자연스런 그룹, 전혀 나쁜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오히려 긍정적 이라고까지 할 수가 있어요. 우리교회가 지역에 따라서 마을목장을 나누기도 하고 지역뿐만 아니라 지역을 넘어서서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이런 목장을 우리가 강조하고 있어요. 목장사역, 영어로 말하면 셀 사역인데 세포사역이죠. 셀, 셀 이라는 것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존하기 위해서 살아있는 생물체로서 생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생명의 기본단위가 바로 이 셀입니다. 이 세포입니다. 우리 몸 안에도 수억개의 세포들이 작은 셀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수없이 많은 셀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세포들은 셀들은 계속해서 성장하고 또 분열합니다. 또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죠.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세포분열을 하죠.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네개가 되고 세포가 분열을 합니다. 거기까지는 잘못이 없어요. 자연스러운 그룹핑, 그룹을 형성하고 자연스럽게 그 그룹이 다시 나뉘어지고 이것은 생물체의 살아있는 현상이고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작은 그룹들 건강한 그룹들의 교제와 성숙을 통해서 또 새로운 그룹들이 생겨남으로써 교회가 건강한 성숙과 성장을 추구할 수가 있는 것 입니다. 문제는 언제부터 생기냐면 부자연스럽게 성장할 때 그 성장이 부자연스러울 때 잘못된 목적으로 성장할 때 우리세포도 그것이 컨트롤 불가능하게 막 성장해서 자기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을 파괴하고 공격하기 시작하면 그건 더 이상 건강한 세포가 아닙니다. 그건 병든 세포입니다. 암세포가 됩니다. 그것이, 비나인드로 그래서 수술 하셔야 되고 잘라내야 되는 그러한 위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 자연스러운 세포가 아니라 이 병든 세포 암세포와 같은 병든 세포의 그룹들이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딱 뭉쳐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한 다른 것들을 막 주변을 공격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공격적인 셀, 그러니까 서로 모여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고,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좋은 교제 안에서 우리가 성숙을 도모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라는 교제는 안하고 모여 앉아서 자꾸만 다른 사람 비판하고 헐뜯고 부정적인 영향을 감염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고 찔르고 공격하고 그럼 이건 더 이상 건강한 셀이 아닙니다. 병든 세포, 암세포입니다 이것은 잘라내지 않으면 몸 전체를 공동체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아주 암 적인 요소들이 될 수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암적 위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린도교회 안에서 생겨나고 있는 모습 들을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어떤 파벌들이 존재했습니까? 우리가 12절을 보시면 크게 한 4개의 그룹들이 이러한 건강하지 못한 불건강한 그룹들이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던 것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12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다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 하는 것이니. 네 파가 생겼는데요 첫째는 무슨 파예요 바울파, 그런데 지금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바울도 승인하지 않은 이 바울파, 바울이 좋아한게 아니에요. 나를 따라 다닌다고 해서 좋아한 것이 아니라 바울파도 하나 있었어요. 아마도 어쩌면 이 바울파는 굉장히 확고한 리더십을 좋아하고 확신에 찬 바울의 비젼이라든지 리더십이라든지, 확신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바울을 추종하면서 그들끼리 모여진 하나의 그룹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볼로에게 속해있는 그룹이 있었어요. 아볼로는 아마 우리가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에 능한 사람이라고 그랬어요, 성경에 능한 사람 그 아주 훌륭한 성경교사 탁월한 말씀을 잘 가르치는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었던 교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볼로가 가르치는 성경공부에 매료된 사람들이 또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다음에 어떤 파가 있습니까? 게바파 베드로죠 베드로 베드로 이것은 아마도 게바의 열정 게바의 능력을 좋아했던 사람들, 밤낮 배우기만 하면 뭐하느냐 능력이 있어야지, 이런 사람들은 아마 게바파, 베드로의 능력과 열정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또 하나의 파벌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재미있는 파는 네번째 파인데 그건 무슨 파입니까?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따른다. 굉장히 바람직해 보여요, 그 다음에 문제는 그리스도만 따른다고 자기들끼리만 모였으니까, 이것도 또 하나의 파예요. 이것도 그리스도파예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때 그것도 별 수 없는 행동 하나에 파벌로 형성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자, 이러한 파벌로 형성이 되고 그것이 분쟁에 영역 속에 이미 들어와있다, 그것이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라는 소문을 글로에라는 사람을 통해서 바울이 에베소에서 보고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런 분쟁의 현상에 대해서 바울은 이런 질문으로 해결을 시작합니다. 13절에 보면 세 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던져요 바울이, 세가지의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져요. 그러나 이 세가지 질문은 모두가 다 한 가지 해답을 겨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쟁에 대한 해답 처방은 결국 이거예요. 이게 뭐냐 이 세 가지 질문은 공통된 한 가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를 생각 해 보면서 이 세 가지 질문을 같이 우리 다루어 봅시다. 첫째질문 자, 우리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네. 첫째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어져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을 왜 찢으려고 하느냐 예수님이 나뉘어져 있더냐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해져 있다면 그리스도는 한 분이 아니더냐 그러면 그리스도나 한 분을 중심으로 너희들이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더냐 이 말이예요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어졌느냐 우리가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그리스도는 절대로 두몸이 아니다.그런데 왜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깨뜨릴려고 하느냐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이 진리를 바울은 나중에 고린도전서 12장에 들어가면, 고린도전서 12장에 들어가면, 바울이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나중에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한 몸이시다, 한 몸 그리고 우리는 그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이다. 바울이 그 사실을 나중에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아주 중요하게 강조를 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질문은 어떤 질문입니까? 13절에 나타난 두 번째 질문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더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지가에 못박혔느냐? 아니죠 그런데 왜 바울 따라 다니느냐 바울이 하는 소리에요, 바울이 그러니까 바울이 의식이 분명한 사람이예요. 나를 따라 다닌다고 무조건 좋아 하는 것이 아니예요 나를 따라와도 병적으로 따라오고 그것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엄중하게 꾸짖을줄 아는 그런 객관성을 바울은 가지고 있던 지도자였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지요.
여기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혔느냐?누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이 너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누구를 따라 가야되요? 예수님 따라 가야지 왜 바울을 따라가느냐 이 말이예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 피 흘리신 예수님, 자신의 생명을 버려주신 그 예수님 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기억한다면, 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느냐? 그 얘기죠. 자, 세 번째 질문 어떤 질문이예요 너희가 세례를 침례를 받을 때 누구의 이름으로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의 이름으로 우리가 세레를 받을 때 누구의 이름으로 받으셨습니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우릴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에.. 세례, 침례 이 Baptizm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어디 있을까요? 세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뭐예요? 예?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예요. 네 맞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 새 공동체반 제대로 공부 하셨으면 제대로 대답을 할 수 가있습니다. 또 공부를 해도 워낙 잘 잊어버리시는 분은 또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정신차리고 공부하면 잊어버리지 않아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면, 머리 나쁜 거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머리 나빠도 견고하게 새겨넣으면, 돌 일수록 견고하게 새겨넣으면 절대로 망각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한번 찾아 보세요 6장 로마서 6장에 보시면 로마서 6장 우리가 3절4절에 보시면 침례문제, 세례문제, 이Baptizm의 문제를 바울이 다루면서 제일 강조한 단어가 뭐냐면, 이게 바로 Baptizm의 세례의 침례의 근본사상입니다. 그건 연합이예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이 말이예요 합하여, 연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계속 강조되는 단어가 뭐예요? 연합했다, 합했다. 그리스도에게 내가 연합되는 사건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가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자가 되었고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의식이 바로 Baptizm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네, 우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Baptizm을 받았고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면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니까 누굴 따라가는 것이 마땅해요?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러니까 여기 바울은 세가지 질문을 했지만 해답은 몇 가지 라고 그랬어요? 한 가지다.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제? 네, 바울이 세 가지 질문을 했지만 해답은 하나예요 그래 하나는 뭐냐면 그리스도의 주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참으로 인식한다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시다.
사람은 우리의 주인이 아니다. 내가 존경할만한 스승을 갖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내 신앙생활 여정을 통해서 나에게 영향을 준 분 나에게 좋은 가르침을 준 분, 내가 그 분을 귀히 여기고 또 그 분을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내가 따라 가야 될 것을 누굴 따라 가야되냐 예수님 따라 가는 거예요. 그는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에 불과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에 불과합니다. 훌륭한 영적 지도자는 초점을 자기에게 맞추지 않는사람, 누구에게 맟추는 사람,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맟추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국의 어떤 목사님에게 그런 설교를 들은 일이 있어요. 아마 이분 교회는 뒤에 이렇게 스테인드 글라스가 돼 있고 거기에 예수님이 서있는 모습이 이렇게 조각돼 있었는데 아마 이렇게 목사님이 서시면 강대상에 딱 서면 그게 뒤에가 잘 안보였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한번은 목사님 설교를 하다가 옆으로 이렇게 자리를 비키게 되었는데 앞에 있는 꼬마가 그러더래요 순진한 꼬마가 "목사님이 없어지니까 예수님이 보이네" 그말을 듣고 이 목사님이 크게 깨달았다고 해요. " 아! 내가 예수님을 가릴수도 있구나!" 훌륭한 지도자는 초점을 예수님에게 맟추는 사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을 따라가십시오.
어떤 지도자가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었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사람이 계속 사람들을 붙들고 있어요. 놔 주지않고 여러분이 어떤 영적인 갈망 때문에 특정한 모임에 가서 좋은 영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계속 따라 간다면 이건 잘못된 신앙이에요. 좋은 영향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가 정말 좋은 교사라면 내가 누구를 따라가도록 인도하는 사람 그리스도만을 바라 보고 따라 갈 수 있도록, 네, 그래서 정말 그리스도가 내 신앙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사람에 대한 소속의 유혹을 넘어서서 그것이 파벌이 되지 않도록, 파벌이 되지않도록, 분쟁이 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가 있을까? 아니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되는 어떤 분쟁의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해요. 누굴 바라보면 돼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0절을 다시 한번 읽겠어요. 1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10절 다같이 시작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 10절에 너희에게 권하노니 어떻게 권한다고 했어요? 형제들아 내가 누구 이름으로 권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저는 여기 바울이 의도적으로 주님이라는 단어를 강조 했다고 생각해요. 우리 주 우리의 주인,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권하노니 너희가 같은 마음을 가져라. 어떻게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나, 같은 마음을 합 합시다 그래서 되는 게 아니에요. 초점을 어디다 두는데? 예수님, 예수님 바라보고 예수님 쳐다보면 우린 그리스도 이름으로 다시 한번 연합될 줄로 믿습니다. 네 끊임없이 우리는 사람에 대한 영향 때문에 파벌을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어요. 저는 교파도 그런 의미에서 위험 하다고 생각해요.저는 언제나 교파 라는 것은 필요악 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파는 필요하긴 한데 필요악이에요. 그럼 왜 없애지 못하느냐 다. 없애거나 만들면 그게 또 하나의 파가 되요. 그러니까 이제는 더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많이 있어요. 그리고 교파 안에 소속 돼 있어도 교파를 넘어 설 줄 아는 그런 자유가 필요 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런 유명한 얘기가 있습니다. 감리교 운동의 창설자인 웨슬리, 요한 웨슬리 선생이 기도 하다가 잠이 들었어요.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 천당 문에 자기가 들어가게 되었어요. 천국에 자기가 들어가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천국문을 지키고 있는 천사에게 들어가면서 궁금해서 이런 질문을 던졌데요. "이 천국에는 나를 따라오는, 나를 따라 오고있는 메도디스트, 감리교도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까? 그동안, 천국에 얼마나 많이 왔습니까?" 그러니까 천사가 잠깐 기다리라고, 뭘 한참 뒤져보더니 하는 소리가 " 웨슬리님! 참 죄송합니다. 천국에는 감리교인이 한분도 안 와 계시네요" 깜짝 놀래가지고 "아! 내가 이거 뭘 잘못 믿은 모양이다" 그러면 칼빈주의를 강조한 아마 칼비니스트들이 옳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천사님! 칼비니즘 주의자들 장로교인들은 몇 사람이나 와 있습니까?" 천사가 한참 있다가 대답하기를 "장로 교인들은 한 사람도 와 있지 않네요!" 더 놀래가지고 웨슬레가 "그러면 천사님 제가 틀렸군요, 종교개혁이 틀렸군요. 천국에는 다 카톨릭 교인들이 와 있습니까?" 천사가 "이상하네요, 카톨릭 교인들은 한 사람도 와 있지 않습니다." 더 놀래 가지고 "아! 그러면 뭐 웨슬리 이런거 안 따라 다니고 복음주의적 성서적 신앙을 강조하는 침례교인들이 다 와 있군요" 천사가 "죄송하지만 Baptist 도 침례교인도 한 사람도 와 있지 않네요" "그럼 누가 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천국은 텅 비어 있습니까?" 천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만이 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에게 속한 자들만이" 그렇죠 그리스도가 주인 되신 것을 믿으십니까? 네 그리스도가 주인이라면 우리의 모든 신안 고백의 영역에 삶의 영역에서 그분이 정말 주인이 되셔야 되요. 그래 우리는 사소한 인간적 차이를 극복할 수가 있는 것으로 믿습니다.
자, 고린도교회 분쟁, 파벌은 둘째로 사람의 지혜를 높이는 데서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 이미 말씀 드린 대로 고린도는 철학을 나온 히랍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스승을 따라서 많은 파벌들이 이합집산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특별히 뭐 물론 이제 바울이 복음을 전한 후에 히랍 사람들이 예수를 많이 믿었겠죠. 이방 사람들이 그러나 상당히 그 당시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고린도에 많이 와 있었어요. 유대인들도, 그래서 고린도교회는 히랍인과 유대인,이방인과 유대인으로 형성 되어있던 교회입니다. 히랍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적 배경 때문에 자연히 신앙을 추구해도 자기들의 히랍적인 방식으로 신앙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히랍적인 방식이란 뭐냐면 토의하고 토론해서 무엇을 깨달아 아는 이성적인 추구, 그러나 유대인들은 좀 달라요 유대인들은 같은 신앙을 추구해도 유대인들은 어떤 증거를 구하고 체험을 구하는 체험 중심적인 그런 신앙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우리가 성경을 보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뭘 구합니까? 표적을 달라고 그래요 사인을 달라고 봐야 믿을 수 있다. 히랍 사람들은 뭐냐면 이해가 되야 믿을 수 있다 내가, 내가 이해를 해야만 믿을 수가 있다. 내가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이게 히랍 사람들의 신앙추구의 방식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뭘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믿겠습니다. 자,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해서 여러 가지 신앙의 스타일에 따라서 여러 가지 파벌들이 생긴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추구에 대해서 바울은 어떤 대답을 하고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사람의 지혜를 따라 이루어지는 이합집산의 파벌주의를 극복 하려면 하나님의 지혜로 돌아와야 된다. 사람의 지혜가 아라 하나님의 지혜다. 바울의 강조점 이에요 하나님의 지혜.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 입니다.
복음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지혜다. 우리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18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8절 시작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우리의 생명이 되셨다.이게 아마 히랍 사람들의 그 마인드 생각으로 볼 때는 아주 미련한 얘기일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라 존재가 죽고 사는 것이 나에게 구원인가 아마 잘 깨달아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도 알았어요. 그래서 21절에 보면 뭐라고 말합니까? 2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하나님의 지혜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 전도를 뭐라고 그랬습니까? 미련한 것이다 그랬어요 미련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거 어떻게 생각면 굉장히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존재하던 신앙추구의 대표적인 두 개의 경향 양식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22절 다 같이 읽어요 시작,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 찾으나. 저는 지금도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방식은 크게 이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유대인식,히브리식,하나는 헬라식, 이 헬라식은 뭐냐면 자기 지혜 리즈닝, 이성적인 토론, 추구를 통해서 신앙을 발견하고자 하는것, 이성주의적인 접근방법, 또 하나는 뭐냐면 보여주십시오 그럼 나는 믿겠습니다, 느끼면 내가 믿겠습니다, 신비주의적 신앙추구를 하는 사람들, 우리 가운데도 보면 체질적으로 둘 중의 하나인 사람들이 많아요. 체질적으로 똑같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뭐냐면 화끈하게 뭐가 느껴져야 믿는거 같은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잘 이해가 되야 그것을 통해서 신앙을 발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삶이 있습니다. 어느것이 옳을까요? 이성주의 일까요? 아니면 신비주의 일까요? 어느것이 옳을까요? 바울의 대답은 뭡니까?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러나 우리는 뭐예요 다음절 23절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 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네, 기독교는 이성주의 입니까? 아닙니다. 기독교는 이성에 근거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종교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이성을 반대하지는 않아요. 기독교는 반이성주의는 아니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좁은 이성으로서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을 다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독교는 이성주의가 아니에요, 기독교는 신비주의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는 신비주의적, 체험의 풍성함이 있습니다.그 말이 기독교가 신비주의라는 말이 아니예요. 체험은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체험은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신비주의적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반 사회적이고 반 도덕적인 모습으로 나중에 이단으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볼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신비적 체험들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또 기독교 신앙 안에도 많은 신비주의적 요소들이 존재하지만 기독교는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그러면 뭐냐 기독교는 이성주의도 아니고 기독교도 신비주의도 아니면 무얼까요? 우리는 복음주의예요, 복음주의. 그 말이 어렵습니까?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예수주의 입니다.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예요.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에수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에게는 꺼리끼는 것이요,이방인들에게는 뭐에요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24절에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24절, 24절 다 같이 말 합시다.시작, 오직 부르심을 입는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다. 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다, 예수. 우리가 아무리 많은 지혜를 갖고 있다해도 그것이 우리를 구원에 도달시킬 수 없다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우리를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없다면 그 지혜가 무슨 소용 있겠어요.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다. 우리가 수 많은 기적을 말하고 능력을 말하지만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끊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이런 능력이 없다면 그 능력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요술에 불과하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가 복음이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랑할 것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밖에 없어요.예수만 자랑, 다른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어요. 사람들이 뭐 똑똑하다, 뭐 똑똑하지 못하다, 50보 100보 차이에 불과해요. 하나님 보시기엔 우리는 다 무지한 인생에 불과해요. 능력이 있다, 없다,문벌이 있다, 없다. 다 사람들이 나누는 인간의 방식에 불과합니다. 자, 그래서 그 다음에 보시면 26절 이하에서, 인간의 자랑이 얼마나 허탄한 것인가? 지혜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자랑인데 그 자랑이 다 허탄한 것인가를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셨다. 마지막 29절이하 30절에 보시면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29절 같이 읽겠습니다,시작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의 어떤 지혜도 자랑할만한 것이 못된다. 우리의 자랑의 제목은 하나밖에 없어요. 누구만? 예수만, 예수만 자랑할 것 밖에는 없어요. 3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는 하나님께로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참 중요한 말씀 이예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도 주세요. 예수는 우리에게 의로움도 주실 수 가 있어요.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의로움이예요. 예수가 나의 의로움이고 예수가 나의 지혜고, 예수가 나의 거룩함이고,예수가 나의 구속함이고, 그러므로 예수가 생명이고, 예수가 복음이다. 믿으십니까? 예수가 기쁜 소식이다. 마지막 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하라. 주안에서 자랑하라. 30절 왜 나누어집니까? 허탄한 것에 대한 자랑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것에 대한 자랑이기 때문에 뭐 학벌자랑, 돈자랑, 뭐 지식자랑, 그건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우리가 자랑할 제목은 누구 밖에 없습니까? 예수. 우리가 예수님만 자랑 한다면 우리가 나누어질 필요가 없어요. 왜 나누어집니까? 우리가? 네? 내가 살던 고향이 더 좋다고 고향 따라 나누어지고, 좁은 땅덩이에 어디 뭐 가봐야 그게 그거고 그 땅이 그 땅인데, 지식 따라 나누고, 문벌 따라 나누어지고, 그러나 예수 안에는 나누어짐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이고, 우리의 능력이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또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깨어 주셨습니다, 피를 흘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희생, 그 분의 사랑 때문에 구원 받은 자라면 무엇을 자랑 하겠습니까?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나누어 지겠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초점이 멀어질 때 거기서 인간적인 요소들이 강조되고 거기서 나누어짐이 있는데 우리 사이에 나누어짐의 위기가 있다고 생각되면 어디로 돌아와야 합니까? 예수로 돌아와야 되요. 우리가 예수를 바라 보십시다.
그 분이 나의 의, 나의 생명, 나의 구원, 우리 예수 안에서 다시 우리 같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형제와 자매일 따름입니다. 잘난 자도 없고, 못난 자도 없고, 잘생겨 봤자 그게 그거고, 네, 썩으면 다 흙이고, 따라서 합시다. 썩으면 흙이다, 쳐다보세요. 옆에 사람, "흙이시네요!" 한마디 해보세요. 뭐 잘 생겼다고 자랑해 봤자 다 그게 그거란 날이에요. 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자랑,우리의 영광의 원인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만약 이 초점을 갖고 있다면 나누어질 필요가 없어요. 바울은 그것을 강조한 것이예요. 네, 사람들의 지혜를 따라 나누어질 필요가 전혀 없어요. 그리스도만이 내 지혜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는 바울이 전해준 이 복음의 강조를 붙들고 우리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있을 수는 있어요. 그러나 있을 수 있는 분쟁과 분열의 위기를 넘어서서 성숙한 주안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세상 사람들이 지식 따라, 문벌 따라, 나누어지고 또, 갈등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믿은 사람들이 나누어진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이 예수에게서 멀어질 때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더 확실한 눈으로 주님을 바라 볼 수 있다면 주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 하시고 그리고 내가 어떤 존재 인데 그 분이 나를 받아 주시고 사랑해 주셨는지 그 분의 진노와 그 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나,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안아주시고, 피흘려 죽으시고, 후원해주신, 그 사랑에 빚진 자 라면 우리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함께 전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그런 인간적인 분열과 분쟁의 위기들을 우리가 넘어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를 성숙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7 어린 아이들이 형제들이 자주 싸우다가 커 가면 조금씩, 조금씩, 성숙한 사람들은 그런 분열의 위기를 넘어섭니다, 중요한 것은 성숙입니다. 성숙은 십자가에 대한 묵상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수록 우리는 자랑 할 것 없는 자로 인정하고 주 앞에 겸손 하게 설 것 입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가 우리 주면에 있는 형제들을 정말 주님의 심정으로 바라보고 사랑하고 안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에게 큰 가슴을 주시고 또 주의 사랑의 심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오늘도 귀한 말씀 주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성령의 거룩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를 싸매 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의를 역사해 주시옵소서.
스승 따라, 문벌 따라, 헤어지고, 갈라져서, 이합집산을 하던 고린도사회의 세속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 그렇게 나뉘어졌던 고린도교회를 바라보시며 아파했던 바울 사도의 메시지를 우리가 읽으면서 우린 동일한 바울의 심정과 바울 안에 역사했던 성령의 심정을 느낍니다. 하나님 우리가 주님 안에서 시선이 멀어질 때 우리도 언제든지 형제와 자매사이에 나눔과 벽을 나누는 일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러한 사단의 유혹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 주님이 나뉠 수 없는 한 몸 이라면 우리는 한 몸에 속한 지체인 것을 확인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리고 주 앞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인 것을 깨닫고 겸손히 다만 한 분 그리스도를 높이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이 하나됨의 뜨거움과 열정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우리가 되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완전한 단일체
고전 1:10-17 / 지용수목사
교회는 50명이 모이든, 5만 명이 모이든, 100만 명이 모이든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 가족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형제이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 모두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혈관에도 주님의 피가 흐릅니다.
우리는 성찬식을 기념으로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떡을 떼어주실 때 "이것은 내 살이다."라고 하셨고, 포도주를 주실 때 "이것은 내 피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피로 생각하고 마시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성찬에 참예할 때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지만, 사실은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성경대로 하면 그런 것입니다. 성찬식을 할 때 포도즙을 사용하는 교회가 많은데 제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포도주를 마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살을 먹고 주님의 피를 마시니,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이 주님의 살인지, 우리 혈관의 어느 피가 주님의 피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한 피, 예수님의 피가 흐릅니다.
또 고린도전서 12장 13절에 보면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우리는 같은 몸(one body), 오직 하나의 몸(only one body)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상징이나 특징이나 본질상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는 여당 야당이 있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국회가 아닙니다. 정치 집단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모세가 200만 명의 교인을 거느려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아 그대로 전하여 다스렸습니다. 제직회나 당회를 해서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곳입니다. 교회는 자기 의견을 말하는 곳이 아닙니다. "내 의견은 이렇고, 당신 의견은 이러니 이렇게 해요."라고 하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 교회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말도 못 합니까?"라고 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말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 될 때 아름답습니다.
우리 양곡 교회에 오시는 분마다 놀라십니다. 동양선교교회 목사님, 퀸즈 한인교회 목사님, 펠리세이드 교회 목사님 등 우리 교회에 오셨던 분마다 이구동성으로 우리 교회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고, 기쁘고, 말씀을 잘 받는 향기로운 교회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셨습니다. 인사로 하시는 말씀이겠지만, 근거 없는 인사는 아닌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향기로운 교회가 된 것은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 교회에는 톡 튀어나오는 사람이 없고 모두 하나 되니,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편)
교회가 하나 되면 아름답고 행복하고 기쁘고 하나님의 복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에도 예산이 넘쳐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연고인 줄로 믿습니다. 이상하게도, 교회가 다투고 싸우면 교인들의 비즈니스가 안 됩니다. 교회가 다투고 싸우면 교인들의 사업이 잘 안 되고, 자식들이 잘 안 됩니다. 교회가 화목하면 교인들이 복을 받고, 힘있게 됩니다. 교인이 50명이든, 5만 명이든, 100만 명이든 하나님께서 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양곡교회는 100만 명이 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하실 수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나오신 예수님께서 세계를 구원하신 것처럼, 창원의 양곡교회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하나님께서 양곡교회를 쓰시면 막을 자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1000만 명도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100만 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려도 하나 되어야 합니다. 100만 명 중에 5만 명이 따로 놀면 마귀가 틈을 타고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없게 됩니다.
자동차 부속이 어느 책에는 2만 개, 어느 책에는 3만 개라고 되어 있던데, 2만 개든 3만 개든 그 중에 하나만 떨어져도 차가 달라지 못합니다. 제너레이터의 선 하나만 떨어져 나가도, 타이어 하나만 빠져도 차가 가지 못합니다. 2만 개, 3만 개 부속 중에 하나만 잘못되어도 차가 가지 못합니다. 연합해서 하나 되어 있을 때 힘있게 나가는 것입니다.
한 장군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일곱 아들을 불러 놓고 막대기를 하나씩 주며 말했습니다.
"이것을 부러뜨려라."
아들들도 모두 장수들이라 우지직 우지직 부러뜨렸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막대기 일곱 개가 묶여진 것을 주면서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이것을 부러뜨려라."
장남부터 일곱째 아들까지 아무리 애써도 누구도 부러뜨리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너희가 뿔뿔이 흩어지면 세상의 밥이 된다. 그러나 너희 일곱 장수가 하나가 되면 아무도 너희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
진해에 쥐들의 섬이 있습니다. 전에 해군사관학교에서 아주 큰, 왕 고양이 두 마리를 쥐 수천, 수만 마리가 있는 그 섬에 풀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그 고양이들이 없어졌습니다. 쥐들에게 잡혀 먹히고 만 것입니다. 고양이가 쥐보다 더 세지만 쥐 수백 수천 마리가 대드니 당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께서도 하신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망한다."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1년 반 동안 복음을 전해서 세운 고린도 교회에 분파가 생겼습니다. 글로에(고린도의 큰 거부, 여자 실업가) 집의 종들이 에베소에 와서 말하여 바울이 알았습니다.
때로는 바울이 가보지 않아도 그 교회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신령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셔서 아는 것입니다. 저도 때로는 어떤 사람과 악수를 하면 '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하고 압니다. 하나님께서 알려 주실 때만 아는 것입니다. 제가 손을 잡을 때마다 다 안다면 사람들이 겁이 나서 저하고 악수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려 주실 때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글로에 집의 종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바울 목사님, 우리 교회는 야단이에요. 바울 파, 게바 파, 아볼로 파, 그리스도 파 4개의 분파가 생겨서 아파요."
사도 바울은 심각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바로 잡아야 할 문제가 많은데, 가장 우선 순위로 다루어야 하는 것은 분파를 바로 잡는 것이었습니다.
왜입니까?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면 마귀가 들어와 휘저어서 교회가 어렵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집회하러 갔던 교회에서 그 교회의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800명, 90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던 교회가 싸우니 얼마 후에 400명밖에 모이지 않더랍니다.
교회에 여당 야당이 생기면 그것은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 교회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에, 이 세계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 교회를 세운 설립자, 창립자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울의 이름으로 한 무리가 되었습니다.
아볼로는 누구입니까?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유대인으로 대단한 인텔리이고, 학식이 풍부하고, 성경에 박식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잘 했습니다. 말하자면 변호사 같았습니다. 바울은 글은 잘 써도 말이 서툴렀는데, 아볼로는 말을 잘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말을 잘 하여 말씀을 잘 가르치는 아볼로에게 기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말에 은사가 있어서 교인들의 믿음을 도와 주었지만, 큰 교회를 세우거나 삼천 명, 오천 명을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또 그에게서는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떠나간 후에 고린도 교회에서 한동안 목회를 한 아볼로에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었던 것입니다.
게바는 누구입니까? 베드로의 아람 말입니다. 교회사를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성경 안에서나 성경 밖에서나 베드로가 고린도를 지나갔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 파가 생겼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 으뜸인 수제자입니다. 바울 다음에 고린도에 와서 교인들을 가르친 목회자가 베드로의 제자였거나, 아니면 고린도의 힘있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야! 베드로가 참 사도야. 베드로는 예수님께 3년 동안이나 직접 배운 예수님의 참 제자야. 바울이 어디 예수님의 제자였나?"하면서 사람들을 모았을 것입니다. 거기에도 한 무리가 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에게도, 아볼로에게도, 게바에게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는 뭐야? 그래, 우리는 그리스도 파다."해서 네 파가 된 것입니다.
이제 마귀가 스테이크처럼 한 쪽씩 잘라서 먹으면 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마귀의 밥이 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분당이 생기면 마귀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마음이 급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를 졌냐?"라고 한 것입니다. 뒤의 말을 줄였지만, 그 뒤의 말은 이런 말입니다.
"아볼로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렸냐? 게바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를 졌냐?"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그들을 위해 피를 흘린 적이 없습니다. 만일 십자가를 지고 피를 흘리며 죽었다 해도 그 피는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하나님 아들인 예수님의 피만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만 깨끗한 보배 피입니다. 할렐루야!
바울의 피도 죄인의 피고, 게바의 피도 죄인의 피고, 아볼로의 피도 죄인의 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예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할렐루야!
바울, 아볼로, 게바가 피 흘려 죽어 봐도 효과가 없지만, 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가 있느냐고 바울이 책망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아주 무섭게 책망을 했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다 주님의 종들이고 하인들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주인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여러분, 저 지용수 목사도 70세가 되면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70세가 되려면 아직 멀었으니 기다리지 마십시오. 혹 제가 총회장이 되면 70세를 연장하여 80세로 법을 바꿀지도 모르니 제가 강단에 서지 않는다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지겹도록 이 강단에 서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장례식도 제가 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도 언젠가는 양곡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이 목회하고 지나가고, 아볼로가 목회하고 지나가고… 그런 것처럼 제가 양곡교회를 떠나간 다음에 박용수 목사님이 오셔서 목회를 하고, 또 그 다음에 이용수 목사님이 오셔서 목회를 해도 나는 이용수 파, 나는 박용수 파, 나는 지용수 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에게 잡아먹히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가 변화산에 있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나중에는 모세도 사라지고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으셨습니다. 교회에 영원히 남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목사도 사라지고, 장로도 사라지게 되니, 절대로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만일 제가 우리 교회를 떠나 창원에서 가까운 장유에 가서 교회를 개척한다 해도 저를 따라오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괴로우나 즐거우나 양곡교회만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양곡교회의 몸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양곡교회 지체다.'하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목사가 바뀌어도 그 교회에서 충성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분당이 생긴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해결책을 줍니다.
"형제들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들을 명하고 권한다. 다 같은 말을 하라."
따라 합시다.
"같은 말을 해야 된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말을 쓰시지만 마귀도 사람의 말을 씁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할 때 성령에 의해서(by the Holy Spirit), 하나님의 의해서(by God) 말을 해야 같은 말, 하나 되는 말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을 잘못하면 교회가 시험들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장로님 선거를 하는데 당회에서 몇 분을 추천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자기 이웃집의 아주 훌륭한 집사님이 추천되지 않은 것을 보고 그 집사님께 전화를 했다고 합시다.
"아이고, ○○○ 집사님, 우리 당회에서 실수했다 그지예? 오늘 추천된 분들은 별 인물 아니고 집사님이 우리 교회의 기둥이신데, 집사님 같은 귀한 분을 장로로 추천하지 않고, 당회에서 실수했다 그지예?"
그것은 그분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 그분에게 섭섭 마귀가 들게 하는 말입니다. 그분이 '아, 내가 혹 장로로 추천되나 했는데 추천되지 않은 것을 보니, 나는 아직 부족한 모양이구나.'하고 있는데, "집사님, 이럴 수 있어요? 이건 불공평해요."하는 말을 들으면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맞아….'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집사님, 서운하시겠어요."하는 전화가 옵니다. 그런 전화를 한 다섯 번만 받으면 시험들게 됩니다.
'맞아, 당회에서 잘못한 거야.'
말조심하십시오. 정말 말조심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성공 비결을 얻을 사람은 다 오시오."라고 외쳐서 많은 사람을 시장에 모아 놓고 돈부터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공하려면 말조심해! 말조심해!"하고는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말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당회에서 장로를 추천할 때는 기도를 많이 한 후에 최소한 30명 이상 전도한 사람을 추천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존경을 받고 마을에서도 존경을 받는 귀한 인물, 까다롭지 않고 긍정적인 분을 고민 고민한 뒤에 추천합니다. 그런데 당회에서 실수했다는 그런 말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런 말은 상대방을 죽이는 말이 됩니다.
은쟁반에 금사과 같은 빛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하면 상대방이 은혜를 받아야 됩니다. 그분이 권사님이 되실 만한 분인데 권사님이 되지 않았다 해도 내 말이 그분에게 은혜가 되지 않으면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침묵이 낫습니다. 여러분의 입을 절대로 마귀에게 맡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하는 말에 고라가 늘 반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는데, 모세의 사촌형인 고라는 자기 동생이 왕 노릇하는 것이 싫어서 "못 가! 못 가!"하다가 불에 타 죽었습니다.
여러분, 어디서나 말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말이 떨어지면 상대방이 어떻게 되고, 하나님 앞에 어떻게 되고, 교회는 어떻게 되나를 생각해서 조심하여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같은 마음, 같은 마음'
빌립보서 2장 2절에 같은 마음, 한 마음을 품으라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처럼 사람을 섬기는 그런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게바 파, 아볼로 파, 바울 파는 게바가 만들고, 아볼로가 만들고, 바울이 만들었겠습니까? 아닙니다. 틀림없이 팽 장로님, 노 장로님, 김 장로님 같은 우두머리가 있어 가지고 그들이 사람을 모았을 것입니다. 야당 총재가 있듯이, 팀장이 있듯이, 그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고라를 팀장으로 해서 250명의 장로가 모였듯이, 아볼로 파의 팀장, 베드로 파의 팀장, 사도 바울 파의 팀장, 그리스도 파의 팀장을 중심으로 서로 교회의 주도권을 잡으려 무리가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 12절에 높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고자 하면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할렐루야!
베드로전서 5장 6절에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교회에 큰 예방 주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화목하고 하나 되어 있는 것을 마귀가 얼마나 배 아파하겠습니까? 그래서 마귀에게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예방 주사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제게 인사하러 온 신혼 부부에게도 '남편은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해라.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당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둘째아들이 그 귀한 재산을 창기에게 팔아먹고 거지가 되어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너는 죽었다가 산 아들이요,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다."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소를 잡아라. 잔치를 벌여라. 새 옷을 갖고 오너라. 새 신발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내 아들을 찾았다."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자식이 살아 왔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살아서 돌아온 것만 해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들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섭섭해서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는 양 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지 않더니 재산을 창기와 함께 다 팔아먹은 동생놈이 오니 잔치까지 벌여 주네."하며 집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집이 하나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큰아들이 아버지 입장으로 돌아가야 됩니까? 아버지가 큰아들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작은아들을 쫓아내야 되겠습니까? 큰아들이 아버지 입장으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집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입장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지만, 그 다음에는 여러분이 담임 목사인 제 입장이 되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장로님 입장이 되면 안 됩니다. 장로님 입장이 되면 하나 될 수가 없습니다. 얼굴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장로님이 몇 분이나 계시는데, 그러면 팽 파, 노 파, 김 파…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어떤 일이 있을 때 담임 목사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이 이 일을 왜 이렇게 하셨겠나?'
전에도 제가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오래 전 성탄절에 넥타이 세 개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제게 선물을 주신 분들은 그 다음 주일에 제 넥타이만 보지 않겠습니까? 제가 고민하다가 새 가족에게 받은 넥타이를 메고 갔습니다. 새 가족을 먼저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날 그 새 가족의 얼굴이 환했습니다. 그러나 헌 가족들의 얼굴은 쓸쓸해 보였습니다.
목사가 어떻게 모든 교인들에게 다 맞출 수 있습니까? 교인들이 목사에게 맞추어야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큰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로서는 섭섭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뚝 떼어 가지고 가서 술과 방탕한 생활로 그 재산을 다 쓰고 알거지가 되어 돌아온 놈이니 나쁜 놈입니다. 나쁜 동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님의 입장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살아 왔으니 기쁘고 좋단 말입니다. 그러니 아버지 입장이 되어야, 아버지의 마음을 품어야 집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세워 주신,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파송하신 저의 입장으로 들어서면 우리 교회는 앞으로도 늘 하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같은 마음, 같은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뜻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뜻은 하나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뿐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 말씀하십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교회가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주님께서 높아져야 됩니다. 그러려면 주님의 뜻만 따라야 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빌립보서 2장 1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일으키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립보서 2:13)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뜻을 일으키시고 행하게 하시니, 그러므로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계시고 성령님께서 뜻을 일으켜 주시는데, 성령님의 그 뜻을 무시하고 자기 뜻을 생각하면 교회에 분당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 부잣집의 아들이 울타리 안에 있는 연못에 애완용 거북이를 길렀습니다. 거북이랑 같이 놀고, 뽀뽀도 하며서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연못에 가 보니, 거북이가 죽어서 둥둥 떠 있었습니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죽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아들은 "아빠, 내 거북이가 죽었어. 내 거북이가 죽었어."하며 슬피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연못으로 나와서 확인해 보니 거북이가 죽어서 꼼짝도 하지 않고 둥둥 떠 있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우리가 거북이를 위해서 아름다운 묘를 만들고 묘비도 세워주자. 그리고 매일 꽃을 꺾어서 거북이를 찾아가자."
"야! 좋겠다."
사람들을 시켜서 거북이의 묘를 파고 묘비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꽃도 준비해 놓고 거북이 시체를 가지러 갔더니 거북이가 살아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거북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이 좋아해야 합니까? 싫어해야 합니까? 거북이가 살아 있었으니 아들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는데 시무룩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왜?"
"우리 거북이 죽이자."
거북이를 죽여서 준비해 놓은 대로, 자기가 계획해 놓은 대로 장례식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회사 사장님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여러분의 회사가 아닙니다. 회사는 사장이 결정해서 일을 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병원 원장님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병원의 일은 여러분이 결정하겠지만, 교회는 병원이 아닙니다. 어느 공동체의 부서장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부서의 일은 여러분이 결정하겠지만 교회는 여러분의 부서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입니다. 교회에서는 여러분의 뜻을 다 포기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오직 주님의 뜻만 나타나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 되기 위해서는 내가 더 낮아지고 더 밑바닥에 내려가도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종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7-8)
내 마음에 맞고 맞지 않고를 생각하면 내가 주인입니다. "예, 그럼요. 예."하는 것이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저는 워싱턴 대통령을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매일 저희 아들이 워싱턴 같은 대통령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링컨 대통령이 조금 더 위대하지만 링컨은 중간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희 아들이 워싱턴 같은 위대한 대통령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워싱턴 대통령은 미국의 모든 국민이 왕처럼 모시려 했는데도 스스로 기도하고 물러난 위대한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스 대통령 때 프랑스가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에는 프랑스의 뛰어난 군대를 막을 장군이 없었습니다. 지휘자가 중합니다. 교회나 회사나 군대나 그 지도자, 그 장이 중합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승패가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프랑스의 뛰어난 군대를 이길 사람은 백전의 용장인 워싱턴 대통령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담스 대통령이 워싱턴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대단히 죄송하지만, 사령관이 되셔서 전쟁을 좀 막아 주셔야 되겠습니다."
그때 사령관은 중장이었습니다. 대통령을 했던 분에게 대장이 아닌 중장 계급장을 달고 전쟁터에 나가서 싸워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워싱턴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그래야죠. 미국을 위해서라면 나가서 싸워야지요."
워싱턴 대통령은 기꺼이 중장 계급장을 달고 사령관이 되어 전장에 나가 싸워 이겼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더욱더 "워싱턴! 워싱턴!"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스 대통령이 사령관이 되어 싸워 달라고 했을 때 워싱턴 대통령이 "나를 뭘로 보고 하는 소리야?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돼?"라고 했으면, 미국민들이 "워싱턴도 별 사람 아니네."하며 존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낮아져서 전쟁터에 나갔기 때문에 미국민들이 지금도 워싱턴을 그렇게 존경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우리는 섬기고 주님만 높아지는 길이 교회가 나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할 때 성령님께서 이런 교훈을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마귀는 아니지만 주님께 십자가를 지지 마시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마귀는 아니지만, 그때 마귀가 베드로를 조정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아니가 베드로를 쓰는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아볼로 파, 게바 파, 그리스도 파, 그들은 교인들입니다. 마귀가 아닙니다. 하지만 당을 짓게 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따라 합시다.
"분쟁이 있는 곳에 마귀가 있다."
소곤소곤하고, 섭섭해하는 곳에는 마귀가 있는 것입니다. 그때 단호하게 마귀 분위기를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서 4장 7절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는 말씀이 영어 성경에 보면,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마귀가 도망가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설교하기 전에 녹음기처럼 "내가 예수 이름과 권세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 마귀, 병마, 사탄은 물러갈지어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괜히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명할 때 마귀가 기분 나빠하며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귀를 자꾸 물리칠 때, 마귀가 '아이구, 기분 나빠. 여기는 내 일터가 아니네.'하고 물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도 사탄을 매일 묶으면 욥처럼 시험 당하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마귀를 매일 묶으면 마귀가 들어오지 못 하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사탄아, 물러가라! 마귀야, 물러가라! 귀신아, 떠나가라!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가라!"
그러면 여러분 집에도 마귀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대적하면 마귀는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말을 할 때도 상대방이 들어서 은혜가 되는 말만 하고, 마음도 주님의 마음을 품고, 뜻도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내세우고, 그리고 사탄을 늘 묶으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우리 교회가 하나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와 십자가
고전 1:10-13 / 이규왕목사(수원제일교회)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막연히 믿을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엇이며, 교회가 어떤 곳인지 바른 이해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들은 만물이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오묘한 솜씨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세상과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와 천사는 물론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창조하셨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보면 다 나름대로 지으신 목적과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처럼, 교회 역시 하나님의 기대와 존재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지상에 세우시기 위해 피 값을 지불하셨다고 한 성경 말씀을 보면 교회가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인간도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피 값으로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 20:28]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이 교회를 왜 피로 사셨는지 그 목적과 존재 이유와 더불어 과연 오늘의 교회가 그 목적을 이루어 드리고 있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하겠습니다.
1. 세상에 세워진 교회
오늘부터 새롭게 강해하려는 고린도전후서의 배경인 고린도 지역은 지금 그리스도지역의 고린도 운하가 있는 항구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고린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 로마제국 내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가 60만이나 되며 올림픽의 본고장인 아테네보다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이와 같은 고린도는 항구이며 상업 도시로 아가야 본토의 수도로 헬라의 중심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에는 두 개의 항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아시아에서 온 배들이 정박하는 겐그리아라는 항구이고, 또 하나는 이탈리아에서부터 오는 배들이 정박하는 레케온이라는 항구였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에는 동서양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경제적으로 번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온갖 다신론의 종교와 무신론의 철학과 부도덕한 사회악이 만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셨고,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진 성도’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이는 우상과 환락의 도시인 고린도에 세워진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타락한 고린도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죄를 범하며 살아온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 교회에 출석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신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거룩하다는 말로 그 기준이 고린도 교인들의 삶이 깨끗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죄인들이었지만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백성으로 구별하셨기 때문에 거룩하여진 성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 한 곳에 성전을 세우셨으나 신약 시대에는 사람들이 사는 곳곳마다 교회를 세우시는 이유가 바로 거룩하지 못한 세상을 거룩하신 하나님이 접수하여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이고 인간이 사는 곳곳에 교회를 세우시는 이유이고 그 교회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는 사람은 자신도 죄인이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비난하고 정죄하기 좋아하지만,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인인 인간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도,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도, 피 값으로 교회를 세우신 이유도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함이었음을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으며 어떤 종교는 사람들을 피해 한 적한 곳에 수도원처럼 자리를 잡는 반면에 교회는 사람들이 아귀다툼하며 사는 세속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수도원이 교회보다 더 경건하고 거룩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교회를 세속 속에 세우게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고린도 지역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며, 어느 교회보다 더 많은 은혜를 쏟아 부어주시고 성령의 갖가지 은사를 부어주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하였습니다.
[롬 5:20]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수원도성은 고린도보다 거룩하며,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을 가진 우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보다 더 거룩하고 깨끗한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답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상 대대로 우상을 숭배하고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전도자를 비웃고 조롱하며 교회를 비난하기를 자랑처럼 했던 지난날 우리 민족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교회로 불러 모으시고 거룩한 성도라 일컬으시는 것은 고린도 교회처럼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2. 문제 많은 지상 교회
사도 바울은 제 2 차 선교 여행 기간에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고 일 년 육 개월이나 머물면서 목회를 할 만큼 깊은 관심과 사랑을 쏟았던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한 것은 죄악이 가득한 고린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고린도에 당신의 택하신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 18:10-11]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여기서 ‘가르치니라’는 말씀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뜻하는 현대 능동 분사로 계속적인 가르침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대해 그 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중에 글로에라는 사람의 집을 통해서 궁금했던 고린도교회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바울을 매우 근심하게 하는 부정적인 소식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가 내부적으로 서로 분쟁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고전 1: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여기서 ‘분쟁’이라는 말은 쌍방 간에 심각한 견해 차이로 의견이 분분하여 말다툼을 하고 서로 논쟁을 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고린도 교회가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는 상태였음을 뜻합니다.
물론 각자 견해가 다른 인간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말이 많을 수밖에 없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해 그러한 논쟁을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테면 진리 싸움이라면 추호도 양보해서는 안 되지만 명분 없는 싸움이라면 양보하는 것이 이득이고, 지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의 논쟁은 과연 명분이 있는 싸움인지 오늘 성경 본문은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동일하신 예수를 믿고, 동일한 교회를 다니면서 자기에게 세례를 준 목회자가 누구이고, 자기가 은혜를 받은 목회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추종 세력을 만들어 서로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고전 1: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개척자요, 아볼로는 알렉산더 출신 유대인으로 성경을 잘 가르쳤으며, 게바는 사도 베드로로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그리스도만이 구세주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신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며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를 막론하고 모두 다 죄인인 것입니다.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와 같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급에 두고 마치 이조 시대 사색당쟁을 하듯이 교회안에서 파벌을 형성하여 자기들이 모신 자가 제일이라고 서로 싸움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추종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고린도 교회를 향해 책망을 하기를 과연 누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있는가?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당시 고린도에는 확인된 것만 50여개의 철학 당파 혹은 운동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교회를 다니기 오래 전부터 파벌에 익숙해져 있었으며, 교회에 나와서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므로 마땅히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교회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파당을 하지만 파당을 하게 되면 마치 정치판처럼 자기를 옳다고 하고 상대를 비난하는 싸움판이 시작되며 그로 인해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세상을 화목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지상에 세워진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헐뜯고 분쟁하는 것은 어떤 명분이든지 예수님의 몸을 나누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롬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동일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며 분쟁하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 들 중에 하나로 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5:20-21]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3. 분쟁의 원인과 대책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동일하신 한 하나님을 믿고 한 교회 안에서 한 교단 안에서 한 기독교 안에서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고 분열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가 성도들 간에, 교회 간에, 교단 간에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고린도 교회처럼 분쟁하며 법정 소송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서글픈 현실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흔히 그것은 은혜를 받지 못해서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핑계를 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감사 기도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다른 어느 교회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요, 성령의 갖가지 은사를 많이 받은 교회요, 재정적으로 넉넉한 부자 교회입니다.
[고전 1:4, 7]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오히려 교만해져서 서로 반목하고 분쟁하게 된 근본 원인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망각하고 정반대로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예를 들면 사과나무의 본질은 사과이며, 비 본질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과나무가 잘 자라야만 사과가 달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과가 잘 달리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나무 가지를 자르고 열매를 따버리는 아픔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농부는 사과나무가 크게 자라는 것에만 집중하고 가지를 치지 않고 열매를 솎아내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은 사과가 달린다고 할지라도 상품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분열하고 반목하는 세상 한 가운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 교회가 되어 세를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고, 사회적인 저명인사들이 모이는 엘리트 교회를 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십자가의 사랑을 증거 하는 등대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1)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을 예수님이 얼마나 원하시는지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대제사장으로서 기도가 요 17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세상에 남겨두고 가시는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기를 거듭거듭 비는 기도였습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21, 22, 23)
2) 교회가 하나되기를 기도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당신을 못 박는 원수들의 용서를 구하시는 기도하셨고, 당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강도를 구원하셨고, 가슴 아파하는 모친 마리아를 제자에게 부탁하심으로 십자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본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닮고, 따르는 것이라면 만일 어떤 교회와 성도들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고 인간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는 파벌이 있을 수밖에 없다면 오직 두 개로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전도의 대상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과 이웃과 화목하게 하기 위함이며 그 십자가를 교회가 심벌로 삼는 것은 교회가 그러한 사명을 위해 세움을 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분쟁하는 이 시대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세우셨다면 교회는 바울 사도의 권고처럼 무엇보다 먼저 성도들끼리 분쟁하지 말고 화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고전 1: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여기서 분쟁하지 않는 방법은 외적인 제도나 형식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마음과 뜻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먼저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외형적으로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대내적으로 교회 안에서 영적인 형제와 자매이기 때문에 서로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사랑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외부적으로는 전도의 대상자를 위해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엡 2: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두 눈을 주셨고 두 귀를 주셨지만 그 두 눈은 서로 싸우지 않고 한 곳을 보며, 한 소리를 들음으로 더 세밀히 보게 되고 더 자세히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쪽 귀가 먹고 한 쪽 시력을 잃어도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빈부와 유무식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서로 갈등과 대립을 하지 않고 사랑하고 협력하여 하나가 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인간은 누구나 두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장단점이 다 보지만 상대방에게 말을 할 때는 장점 한 가지만을 말하라고 입은 하나만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고, 약한 사람은 쉽게 노여워함을 알고 먼저 내 실속부터 챙기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인간이 주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 분쟁과 갈등의 요소가 있거든 방관하거나 담을 쌓지 말고, 내가 먼저 그 벽을 부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장벽을 부서뜨리셨기 때문입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사람들은 흔히 아직 여건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환경을 핑계하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분쟁을 버리고 화목하게 될 수 있는 어떤 방법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마음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모든 분쟁의 근본 원인은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고전 1:10]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서 ‘온전히 합하라’는 말씀은 두 단어가 아니라 본래 회복하다, 완전하게 하다는 한 단어로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능동태가 아니라 하나가 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만 가능한 수동태 동사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형편상 고린도 교회를 떠났다고 할지라도 고린도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중단되지 않은 것이며, 그 일환으로 오늘 성경 본문인 고린도 전서를 보내는 것이며, 또 앞으로 고린도 후서를 계속해서 써 보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내가 정말 예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되어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어떤 이유를 막론하고 파당이나 분열이나 불화하는 말이나 행동에 앞장서지 말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할 수 있으면 화평하게 하고 서로 하나가 되는 일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벧전 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그 결과가 사람이 이름이 나지 않고 사람이 주인이 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영광이 돌려져야 합니다.
십자가로 하나되게 하소서
고전1:10-13, 18-25 / 이윤재목사
계속해서 바울을 통해 은혜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오면 어디를 먼저 보시나요? 교회에서 보는 네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먼저 위가 있습니다. 위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다음 옆을 보는 것이 있습니다. 옆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안을 보는 것입니다. 안은 나 자신입니다. 마지막으로 밖을 보는 것이 있습니다. 밖은 세상입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 네 가지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먼저 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이 네 방향중 그래도 우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볼 것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교회오는 것은 하나님 보고, 하나님의 말씀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 와서 가장 먼저 하나님을 봅니까?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가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스피커 상태가 좋지 않아 잘 안들렸습니다. 그랬더니 맨 뒤에 있는 교인 하나가 견디다 못해 소리질렀습니다. “목사님, 뒤에는 안 들립니다. 크게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맨 앞자리에 앉은 교인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괜찮아요. 들으나 마나예요”. 여러분, 이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설교는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중요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신자를 즐겁게 하고, 약한 자를 격려하고, 구제하고, 봉사하기 전에 더 우선적인 일이 있습니다. 예배입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예배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교회 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면 다음은 어디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옆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지금 한번 돌아보세요.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이 있는지? 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없습니다. 교회는 대기업 회장님과 막 들어온 신입사원이 한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두 한 자리에 있습니다. 대통령이라고 해도 더 큰 자리가 아니고 청소부라고 해서 뒷자리 앉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으르렁거리는 여당대표와 야당 대표가 함께 앉고, 법원에서 법리를 다투는 검사와 변호사가 같이 예배드립니다. 거기는 지역구분도 없습니다. 경상도, 전라도가 함께 않고 한 사람은 광화문에서 탄핵 찬성하다가 돌아와 예배드리고 바로 그 옆에는 탄핵을 막아달라며 간절히 기도하는 분이 앉아 함께 예배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이 함께 모이는 공동체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이 늘 한 마음일 수 없습니다. 정치관도 다르고 출신지역도 다르고 자라난 교단도 다르고, 어떤 사안에 대한 교인들의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마크 트웨인은 익살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개와 고양이를 한 우리에 집어넣었더니 잘 어울려 살았다. 새와 돼지와 염소를 한 우리에 집어넣었더니 얼마 후에 친구가 되었다. 이번에는 침례교인과 장로교인 그리고 천주교인을 한 우리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바로 싸움을 시작하더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격렬히 싸웠다.“
자,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주장들을 하다보면 오늘 고린도 교회같은 현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읽은대로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네 개의 당파가 존재했습니다. 하나는 바울파,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힘썻습니다. 그래서 바울파는 주로 이방인신자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직접 배운 자부심으로 자신들이 가장 올바른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아볼로파, 아볼로는 본래 헬라 철학에 능통한 젊은 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볼로파는 예수를 믿되 헬라 철학적 관점에서 믿는 지성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인데 베드로는 유대인 중심의 신자들로 구성되어 그래도 율법은 존중해야 한다고 믿고 자기들이야 말로 구약을 잇는정통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따라는 정통파라고 믿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가 있는 데 이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아무 파에도 속하지 않는 무당파라고 생각하며 탈계보를 선언했지만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파당을 이룬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분열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고린도전서 1장의 구성입니다. 고전1장을 보면 앞부분에는 고린도교회의 분열이 나옵니다. 그리고 뒷부분에는 십자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눈으로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10절부터 18절까지가 네 개의 당파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주제가 바뀌는 데 18절 볼까요?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고 25절까지 십자가 이야기가 나옵니다. 왜 이런 구조가 되었을까요? 앞에서 나오는 분열상에 이어 바로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왜 십자가 이야기로 이어지는 것일까요? 교회 분열과 십자가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혹시 교회 분열에 대한 해법으로 바울은 십자가 신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단순한 죄수의 사형틀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다양성을 하나로 묶는 화합과 일치의 매개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안에서 무엇으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요 오직 예수님으로 하나됩니다. 신학자 D. A 카슨이 말했습니다. “교회는 ...... 서로 원수가 되어야 마땅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은 교육이나 인종, 소득 수준, 정치 성향, 국적, 직종 등의 공통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로 인해 ...... 하나로 모인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서로 사랑하는 원수들의 집단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다양성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교파도 아니고 목회자도 아니고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때문에 하나로 모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하신 사역의 핵심이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로 하나되기 원합니까? 사로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다른 해석, 다른 관점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십자가로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로 묶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되게 할까요? 그것이 오늘 말씀 18절부터 25절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이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사람을 말하고 그들이 이해하는 십자가 십자가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요 다른 하나는 헬라인입니다.
유대인: 십자가는 약한 것
먼저 바울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십자가를 이야기합니다. 23절을 봅니다. 고전1:23,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유대인들은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거리낀다”는 말은 “넘어지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길거리에 있어서 발뿌리에 채여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돌맹이 같은 것입니다. 왜 이렇게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부정적으로 봅니까? 그들의 메시아관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까?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이 짧은 한 마디가 유대인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해줍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좋아합니다. 표적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사람이 메시아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전형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골리앗도 이기고 온갖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 용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입니다. 다윗같이 초월적인 지혜와 불가사의한 용기를 가진 전쟁용사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반드시 죽어서도 안되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바울이 전한 메시아는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토록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믿어 예수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은 나무에 달린 자를 저주받은 자라고 믿었는 데 예수님이 그런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다윗 같은 전쟁용사인 데 용사는 그만 두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믿은 메시아는 오늘 우리의 신앙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힘”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을 추구하며 삽니다. 경쟁사회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돈도 힘이고 권력도 힘이고 심지어 스펙도 힘입니다. 그렇게 힘을 추구하다가 교회오면 또 다른 힘을 추구합니다.
옛날 교인중에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입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도 성공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스스로 교회를 나왔습니다. 고마워서 심방갔더니 아주 어릴 때 교회 나갔답니다. 그러다가 세상으로 나가 열심히 해서 나름대로 성공했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다닌 교회가 생각나 다시 나왔답니다. 그래서 온갖 봉사를 다 했습니다. 궂은 일은 도맡아서 하고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때는 주일날 하루종이 교회에서 삽니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안 보입니다. 처음에는 아파서 그런가 했는 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렵게 만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교회 안나옵니까?”. 그 분이 대답합니다. “재미가 없어서요”. 뜻밖의 대답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았는 데 그가 재미없다는 말은 다른 의미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도 성공했듯이 교회에서도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힘을 가졌으나 교회에서도 힘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행8장의 마술사 시몬과 같았습니다. 교회에서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면 힘이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금방 사람들 앞에 높아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몇 년 했는데도 사람들도 별로 알아주지 않고 지치기만 합니다. 그래서 그만 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예수믿는 목적을 성공에 둘 때 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가끔 교회직분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을 때 이 오류에 빠집니다. 교회는 힘쓰는 곳이 아니라 힘빼는 곳입니다. 십자가는 본래 약한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노예나 종이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약한 자의 신앙입니다. 강한 자가 되려고 십자가 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가 되려고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으로만 가는 신앙은 마틴 루터는 “영광의 신앙”이라고 불렀고 요즘 말로 “승리주의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약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강해질 수 없고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은 승리할 수 없습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가 약해서 싫다고 떠났지만 정말 이 시대 교회는 약해서 문제가 아니라 강해서 문제입니다. 교회는 강해서 세상을 정복할 것처럼 소리치지만 세상은 교회가 약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하다면 자기를 이기는 힘입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힘은 남을 무릎꿇게 하는 힘이 아니라 나를 무릎꿇게 하는 힘입니다. 세상을 정복할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죽을 힘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더 부드러워져야 하고 신자는 더 약해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왜 다툽니까? 힘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힘을 가지려는 사람은 세 종류로 그 특징을 나타납니다. 첫째 직분을 힘을 행사하는 기회로 사용합니다. 저는 세상에 못난 사람이 교회에서 힘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밖에서 힘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무엇 하나 얻으면 어깨에 힘주고 다닙니다. 교회직분은 계급장이 아닙니다. 힘은 가지려는 사람의 두 번째는 파당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로 교회 비주류입니다. 어차피 힘이 없으니 세를 규합해서 그것으로 힘을 과시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노동조합이 아닙니다. 세를 규합해서 교회를 위협하고 괴롭게 하는 것은 신자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교회가 공적으로 세운 목장, 선교회등의 기관외에 다른 사적인 조직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힘을 가지려는 사람은 다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힘이 없으니 힘있는 사람들을 대항함으로 자신의 힘을 나타내려 합니다. 물론 옳은 주장을 위해서 그런 때가 있습니다. 가장 힘있는 사람은 힘이 있으나 안 쓰는 사람입니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합니다. 칼집에서 칼을 빼면 결국 고통을 당하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고전9:18에 아주 중요한 말씀 나옵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따라 합시다. “네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말자”. 19절도 중요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다같이 “스스로 종이 된 것은”. 특별히 교회안에 직분 가진 분들은 그 직분이 힘을 사용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어깨에 힘이 있는 사람은 힘빼고 들어오세요. 여기는 성전입니다. 너도 나도 약해집시다. 이것이 십자가 믿음입니다.
헬라인: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
두 번째 사람은 헬라인입니다. 헬라인의 어떤 사람들입니까? 다시 22절 보면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헬라인은 그리스인입니다. 헬라인들은 역사속에 공헌한 것은 철학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철학”은 “필로소피아” 곧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철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합리성입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자주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합니다. 어떻습니까? 합리적인 눈으로 보면 십자가 달린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어떻게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시 십자가형은 노예나 종들에게만 허용된 사형제도였습니다. 로마의 시민권만 있어도 십자가형은 면제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죄없이 십자가에 죽을 수있어요? 그래서 십자가는 23절에 “미련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헬라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사실 제우스같은 강한 신을 찾고 있습니다. 명령하고 통치하고 다스리고 지배하고 성공하는 신을 찾고 있습니다. 정부나 기업이나 학교가 요즘 공통되게 외치는 말이 “경쟁력”입니다. 경쟁력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 하든 남을 제치고 끝까지 살아남는 세상적 처세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것입니다. 바보같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바보같이 살면 이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까?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일생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어느 설날, 제자 하나가 장박사에게 세배를 올리자 장 박사가 말했습니다. “금년엔 나를 좀 닮아봐”. 제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처럼 살게요”. 그러자 장기려 박사가 말했습니다. “바보처럼 산다는 소리를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처럼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바보처럼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처세술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처럼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애플사의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대학 졸업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굶주리며 살고 바보처럼 살아라“. 그는 그 말대로 살다가 갔습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영약한지 도무지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툭하면 교회문제를 가지고 법정으로 갑니다. 사건만 나면 목사고 성도고 없습니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 죄입니다”하고 국민일보에 신문내는 사람도 없습니다. 뻔히 잘못 해놓고도 변명을 일삼습니다. 결혼을 손해보고 했다는 말을 듣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제가 중매를 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해서 믿음 좋은 청년을 소개했습니다. 그 다음 날부터 묻습니다. 대학은 어디 나왔냐? 키는 얼마냐? 175라고 했더니 “우리 딸이 168인데 180은 되어야지요“ 합니다. 희생하는 교인들 찾아 보기 힘듭니다.
왜 교회안에 다툼이 일어납니까? 너무 똑똑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세상에 바보와 싸운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다 계산이 빠르고 자존심은 강하고 손해보지 않으려 하니까 싸우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골프 선수 로버트 드 빈센조에 얽힌 일화다. 로버트는 그날 대회에서 우승을 해서 큰 상금을 받았습니다. 기분 좋게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는 데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왔습니다. “선생님, 우승하신 것을 축하드려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늘 받으신 상금을 저희 아이를 위해서 쓰실 수는 없으신가요? 저희 아이가 지금 몸쓸 병에 걸렸는데 치료비가 없어 병원에 가지도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로버트는 기꺼이 상금으로 받은 수표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런데 그 다음 주 로버트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한 직원이 다가와 말을 했습니다. “지난 주 선생님께서 우승하신 뒤 한 젊은 여성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선생님은 속으신 거예요. 그 여자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병든 아이도 없답니다. 그녀는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구요.” 그 말을 들은 로버트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죽어가는 아이가 없다는 거군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이번주에 들은 가장 좋은 소식이네요. 안 아프면 됐는데. 감사하내요”. 이게 바보아니면 할 소리입니까? 아니 그 많은 상금을 사기를 당했는 데 가만 있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보 아닌 다음에야 멱살을 잡든지 고발을 하든지 할 것 아닙니까?
제가 목회한 교회 장로님 중 한분이 초등학교 교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로님은 교장으로 승진할 때만 되면 이런 저런 핑계로 양보합니다. 그래서 몇 사람의 후배가 먼저 교장이 되었습니다. 하도 양보하니까 교육청에서 알고 반강제로 교장발령을 냈습니다. 와, 이것이 진짜 믿는 사람 아닙니까? 이런 사람을 좀 볼 수 없을까요? 제가 어느날 보니까 한 집사님이 항상 성가대 구석에 앉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구석입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왜 구석만 좋아합니까? 거기서는 강단도 잘 보이지 않지 않아요?” 했더니 말합니다. “뭘요. 아무도 안 앉으려고 해서 제가 앉죠”. 와, 이것이 진짜 신자아닙니까? 누가 사진 찍을 때 가운데 서고 싶지 않겠습니까? 마5:9 말씀을 잘 보세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화평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화평케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화평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 화평케 하려면 다른 사람을 가운데 세우고 자기는 구석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까? 화평케 하려면 다른 사람 먼저 교장 시키고 자기는 뒤에 해야 하지 않습니까? 캐논 반스톤이란 사람이 <사랑의 수고, 사랑의 희생>이란 책에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했습니다. 사랑은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첫째. “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이 모두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둘째 “상대방을 제약하거나 조종하기를 포기하고 불확실과 실패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랍니다. 사랑은 셋째. “나의 사랑에 대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끝까지 기다려 주는것”이랍니다. 저보고 한 마디로 말하라면 사랑은 그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영악한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조금 더 나를 내려놓고 어리석어지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 십자가는 죽는 것
마지막으로 십자가는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두말할 것 없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형틀입니다. 십자가형은 본래 인도, 수그디아인같은 야만인들에게서 처음 시작되어 로마에 의해 가장 잔인한 사형 수단으로 정착했습니다. 이 형벌이 무서운 것은 사람을 육체적으로만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죽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금방 죽지 않고 수 시간동안 고통하다 죽기 때문에 최대한 형벌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6시간이나 고통을 당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엄청난 모욕과 온 몸의 옷을 벗겨 수치를 당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으로까지 고통을 주었습니다. 십자가가 자주 미화되고 있지만 십자가는 본래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사형 틀입니다.
어떻습니까? 왜 우리가 다툽니까? 죽지 않아서 그런 것 아닙니까? 죽은 사람이 다툽니까? 약 100년전에 살았던 토저 목사님이 <철저한 십자가>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의 세 가지 특징을 말했습니다. “첫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앞에 밖에 볼 수 없다. 옆을 보거나 뒤를 돌아 볼 수 없다. 둘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아침에 길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여보, 5시에 다시 돌아오겠소”라고 한 말을 지킬 수 없다. 못박혔기 때문에 꼼짝 없이 붙잡혀 있어야 한다. 셋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살 수 없다. 모든 것이 끝났다.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계획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다“.
자, 어떻습니까? 지금 한국교회의 침체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죽으라는 복음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너무 쉽게 살려고 발버둥치니까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었다”. 둘째 “나도 매일 십자가에 죽겠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은 것만 믿습니다. He died for us,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만 믿습니다. He died with us,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도 믿어야 합니다. 영성가 요한 비안네의 기도가 참 좋습니다. “거룩하신 주여,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니 감사합니다. 주여, 저도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목박혔으니 나도 못박히겠다”.
어떤 분이 배추도 다섯 번 죽어야 김치가 된답니다. 첫 번째 땅에서 뽑힐 때 죽고, 둘째, 칼로 배를 가를 때 죽고, 셋째 소금에 절일 때 죽고, 넷째 매운 고추와 젓갈과 양념에 버무러질 때 죽고, 마지막에 우리 입 안에 씹힐 때 죽는답니다. 제가 요 몇 년 훈련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죽었는데 뭘, 죽은 사람이 무슨 말이 필요해. 하나님은 알고 계시겠지”.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죽는 것입니다.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려고 하니까 싸움이 납니다. 더 약해져야 합니다. 예수님같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분이 힘없는 죄수로 죽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어리석어야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계산이 빠르고 영악하고 잘났습니다. 그것은 헬라적 가치관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희생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십자가가 아닙니다. 고전1:22-25,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십자가의 삶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정치가가 힘이 있지만 힘을 쓰지 않을 때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돈많은 CEO가 주일아침 일찍 와서 눈내린 교회 마당을 쓸 때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 권사님이, 회갑, 7순, 8순에 돈 들이지 않고 그것을 개척교회지원하고 학교 세우고 가난한 선교사를 지원할 때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교회 성장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지 말고 오직 자기를 죽여 하나님만 나타내려고 할 때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공통당한 분만 우리를 치유할 수 있습니. 십자가에서 죽었던 산 분만 우리를 살립니다.십자가가 모든 것의 해답입니다. The cross is the answer for everything. 전환기를 맞은 한신교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십자가의 믿음입니다. 더 약해집시다. 약한 자가 강한 자입니다. 더 어리석어 집시다. 어리석어야 지혜로운 자입니다. 더 예수님과 함께 죽읍시다. 죽어야 다시 삽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로 하나됩시다. 서로 다른 다양성이 십자가안에서 일치하게 합시다. 한 마음을 품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