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日本語が中国語の中になだれ込む
3, 일본어가 중국어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다
김강현 번역
おびただしい日本の本が中国語に訳され、出版される一方、他方では留学生たちが日本書を読んだ影響で自分の文章にたくさんの日本語を引用した。そのほかに当時の日本は中国、とくに上海で多くの新聞・雑誌を刊行していた。こうして大量の日本語が中国語のなかにどっと入りこんだ。もちろん日本語といっても日本語の語彙が主で、表現法も少々入った。
一九一九年の 「五四運動」 前後の中国は激動のさなかにあった。中国語の書きことばも古代漢語だったところから、いわゆる白話文 (話しことば) を主とする現代漢語へ脱皮する時期だった。「五四」 以後の中国文壇の作家の多くは日本留学生だった。中国新文学運動の主将である魯迅をはじめ、郭沫若、郁達夫、田漢、夏衍など、たくさんいた。まさに今は亡き郭沫若氏が一九五五年中国学術代表団の団長として来日した時、早稲田大学で行った講演で述べているように、「中国文壇の大部分は日本留学生がつくりあげたのである。創造社の主要な作家は日本留学生であり、語絲派も同様である。……中国の新文芸はすっかり日本の洗礼を受けている」。こうした日本留学生出身の作家たちは好んで、自分の文章、作品のなかに日本語の語彙や表現法を借りて使った。魯迅は大文豪であり、中国新文芸のリーダーであった。彼は青年時代、日本に留学し、はじめは東京の弘文学院で日本語を学び、のちに仙台の医学専門学校で医学を勉強した。魯迅は古い中国語ではもう不十分だから、外国語から必要なことばをどんどん取り入れるべきだと強く主張した。彼の作品は、内容から見てもことばから見ても非常に中国的であるが、しかし、彼の文章にも日本語からとり入れたことばが少々ある。例として 「万年筆、日傘、人力車、定刻、構想、構想、車掌、残念、夕方、丸、時計、名所、写真」 などが挙げられる。
엄청난 일본의 책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되는 한편, 다른 쪽에서는 유학생들이 일본서를 읽은 영향으로 자신의 문장에 많은 일본어를 인용했다. 그 외에 당시의 일본은 중국, 특히 샹하이에서 많은 신문・잡지를 간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대량의 일본어가 중국어 속에 우르르 들어갔다. 물론 일본어라고 해도 일본어의 어휘가 주로, 표현법도 조금은 들어갔다.
1919년 「5.4운동」전후의 중국은 격동의 한창에 있었다. 중국어의 문장어도 고대 한문어였다고 하는 것부터, 이른바 현대 중국어의 구어문(회화체)을 주로 하는 현대 한문어로 탈피하는 시기였다. 「54」이후의 중국 문단의 작가의 상당수는 일본 유학생이었다. 중국 신문학 운동의 主将인 노신을 시작해 郭沫若、郁達夫、田漢、夏衍등, 많이 있었다. 확실히 지금은 죽은 郭沫若씨가 1955 년 중국학술 대표단의 단장으로서 일본 방문했을 때, 와세다 대학에서 실시한 강연에서 말하고 있듯이, 「중국 문단의 대부분은 일본 유학생이 만들어 냈던 것이다. 창조사의 주요한 작가는 일본 유학생이며, 語絲派도 마찬가지이다. … … 중국의 신 문예는 완전히 일본의 세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일본 유학생 출신의 작가들은 기꺼이, 자신의 문장, 작품 속에 일본어의 어휘나 표현법을 빌려 사용했다. 노신은 대문호이며, 중국 신문예의 리더였다. 그는 청년시대, 일본에 유학해, 처음은 도쿄의 弘文学院에서 일본어를 배워, 후에 仙台의 의학 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노신은 오래된 중국어에서는 이제는 불충분하기 때문에, 외국어로부터 필요한 말을 자꾸자꾸 도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그의 작품은, 내용에서 보아도 단어에서 보아도 매우 중국적이지만, 그러나, 그의 문장에도 일본어로부터 거두어 들인 말이 조금은 있다. 예로서 「만년필, 양산, 인력거, 定刻, 構想, 構想, 車掌, 残念, 夕方, 丸 時計、名所、写真」등을 들 수 있다.
大量の日本語が中国語のなかに入ったことに対し、中国人のなかには、賛成する人もあれば、反対する人もあった。梁啓超は賛成派である。彼は自分の文章のなかでたくさんの日本語を使った。それでも彼は日本人がつくった 「経済」 と 「社会」 という二つの訳語がどうしても気に入らず、別のことばでそれにとってかわるべきだと強く主張した。当時もう一人の翻訳大家の厳復は、西洋語を直接に音訳するか、または中国の古典の書物からそれ相応の、あるいは近い意味のことばを見つけ出して訳語として使う方が良いと主張した。さらに日本からことばを輸入することに断乎反対する人もいた。例えば、彭文祖がその一人である。彭は日本留学生で、一九一五年に 『盲滅法な新語』 という本を出版した。その中で彼は日本からの新語の導入のことを 「民族の存亡と係りある大事だ」 とし、日本語の大量導入を 「恥知らずな行為だ」 と罵り、「そういう人たちの首をばっさりと一刀の下に切ってしまいたい」 とさえ言った。
대량의 일본어가 중국어 속에 들어갔던 것에 대해, 중국인 속에는, 찬성하는 사람도 있으면,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梁啓超는 찬성파이다. 그는 자신의 문장 속에 많은 일본어를 사용했다. 그런데도 그는 일본인이 만든 「経済」와「社会」라고 하는 두 개의 역어가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고, 다른 말로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당시 또 한사람의 翻訳大家의 厳復은, 서양어를 직접 음역하는지, 또는 중국의 고전의 서적으로부터 상응하는, 혹은 가까운 의미의 말을 찾아내고 역어로서 사용하는 편이 좋다고 주장했다. 한층 더 일본으로부터 말을 수입하는 것에 단호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彭文祖가 그 핝사람이다. 彭은 일본 유학생으로, 1915년에 「盲滅法な新語」라고 하는 책을 출판했다. 그 중에 그는 일본으로부터의 신어의 도입을 「민족의 존망과 서로 관계되는 중대한 일이다」라고 해, 일본어의 대량 도입을 「부끄러움을 모르는 행위다」라고 매도해, 「그러한 사람들의 목을 싹독 단칼로 잘라 버리고 싶다」라고 조차 말했다.
さて、はじめのころは、日本の訳語と厳復らがつくった訳語が共存した。例をあげてみよう。
「Economics」 という英語は日本語で 「経済学」 と訳されているが、それにはとても抵抗を感じたようである。なぜなら 「経済」 ということばはもともと中国の古語であり、「経世済民」 の意である。「経世済民」 とは世の 中を治め、人民の苦しみを救うことである。現代語におきかえるならば大体 「政治」 という語に相当するからである。現に竹下登前首相の 「経世会」 は 「経世済民」 という言葉をふまえたように思われる。いうまでもなく、それは政治家のグループであって、経済の組織ではない。そのため厳復は 「計学」 と訳し、梁啓超は 「資生学」 または 「富国学」 「平準学」 という訳語を使った。ちなみに 「平準」 は 『史記』 に出ている言葉で、物の安いときに官が買い入れ、高いときにそれを売り出して物価を調節する制度で、前漢の武帝に始まる。そのほか 「哲学」 (Philosophy) は 「理学」 「智学」 と共存し、「社会学」 (Sociologie) (仏語) は 「群学」 と共存した。そのほか挙げてみよう。
物理学-格致学 地質学-地学 砿物学-金石学 雑誌-叢報
社会-人群 論理学-名学 原料-天産之物 功利主義-楽利主義
그런데, 초기에는, 일본의 역어와 厳復등이 만든 역어가 공존했다. 예를 들어 보자.
「Economics」라고 하는 영어는 일본어로 「경제학」이라고 번역되고 있지만, 거기에는 매우 저항을 느낀 것 같다. 왜냐하면 「「経済」라고 하는 말은 원래 중국의 고어이며, 「経世済民」의 뜻이다. 「経世済民」이란 세상을 치료해 인민의 괴로움을 구하는 것이다. 현대어에 바꾼다면 대개 「정치」라고 하는 말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竹下登 전수상의 「経世会」는 「경세 제민」이라고 하는 말을 근거로 한 것처럼 생각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정치가의 그룹이며, 경제의 조직은 아니다. 그 때문에 엄복은 「計学」이라고 번역하고, 梁啓超는 「資生学」또는 「富国学」 「平準学」이라고 하는 역어를 사용했다. 덧붙여서 「平準」은 「史記」에 나와 있는 말로, 물건의 쌀 때에 관이 매입해 높을 때에 그것을 팔기 시작하여 물가를 조절하는 제도로, 전한의 武帝때 시작한다. 그 외 「哲学」(Philosophy)은 「理学」 「智学」이라고 공존해, 「社会学」(Sociologie) (불어)는 「群学」이라고 공존했다. 그 외 들어 보자.
물리학-격치학 지질학-지학 광물학-금석학 잡지-총보
物理学-格致学 地質学-地学 砿物学-金石学 雑誌-叢報
사회-인군 윤리학-명학 원료-천산지물 공리주의-낙리 주의
社会-人群 論理学-名学 原料-天産之物 功利主義-楽利主義
ところが、厳復らの自作新語の大部分は、日本の訳語ほど良くなかった。というのは、かれらの訳語は古典から来たものが多くてわかりにくかったため、流行しなかったからである。今からふりかえってみれば、厳復らのやりかたには、そもそも無理があった。ことばは社会実生活の反映である。中国語に入った西洋の新語はもともと中国社会になかった事物である。古い中国語からそれ相応の語をさがし出すのは、なんといっても無理な話である。ない袖が振れぬとはこの事だろう。したがって日本の訳語と厳復らの訳語が一時期共存はしたが、結局の ところは日本訳語の勝ちとなり、厳復らの訳語は、姿を消してしまった。のちに梁啓超も 「経済学」 「社会学」 ということばを使わざるを得なくなった。当時、日本の訳語を借りて西洋の新語を導入することが逆らうことのできない趨勢だったといえよう。今では 「経済、社会、哲学」 などの日本訳語はもうとっくに現代中国語のなか に住みつき、帰化している。それが日本からの外来語だということを、ほとんどの中国人はもう知らないのであり、「計学、資生学、群学」 などのことばが昔 「経済学、社会学」 と共存した事実はなおさら知らないのである。日本語が中国語のなかになだれこむ背景には、中国が西洋の新語を積極的に輸入する事情があるほかに、当時日本における新語のつくり方にも原因がある。当時の日本では、西洋の新語を訳すとき、少数の音訳をのぞいて大部分は意訳をしていた。しかも音訳であろうと、意訳であろうと、みな漢字を使っていた。特に意訳の場合は、ちゃんと中国語の造語法のルールを守ってつくられた。具体的には次の通りである。
그런데 , 厳復등의 자작 신어의 대부분은, 일본의 역어만큼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역어는 고전으로부터 온 것이 많고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돌이켜 보면, 엄복등의 사용 방법에는, 원래 무리가 있었다. 말은 사회 실생활의 반영이다. 중국어에 들어간 서양의 신어는 원래 중국 사회에 없었던 사물이다. 오래된 중국어로부터 상응의 말을 찾아내는 것은, 무어라 해도 무리한 이야기이다. 없는 소매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 일일 것이다. 따라서 일본의 역어와 엄복등의 역어가 한시기 공존은 했지만, 결국은 일본 역어의 승리가 되어, 엄복등의 역어는, 자취을 감추어 버렸다. 후에 梁啓超도 「경제학」 「사회학」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 일본의 역어를 빌려 서양의 신어를 도입하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추세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경제, 사회, 철학」등의 일본 역어는 일찌감치 현대 중국어 속에 자리잡고 살아서, 귀화하고 있다. 그것이 일본으로부터의 외래어라고 하는 것을, 대부분의 중국인은 더이상 모르는 것으로, 「計学、資生学、群学」등의 말이 옛날 「경제학, 사회학」이라고 공존한 사실은 더욱 더 모르는 것이다. 일본어가 중국어 속에 떨어져 내리는 배경에는, 중국이 서양의 신어를 적극적으로 수입하는 사정이 있는 것 외에, 당시 일본에 있어서의 신어의 만드는 방법에도 원인이 있다. 당시의 일본에서는, 서양의 신어를 번역할 때, 소수의 음역을 들여다 보고 대부분은 의역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음역이든, 의역이든,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특히 의역의 경우는, 제대로 중국어의 조어법의 룰을 지켜 만들어졌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 一、修飾語+被修飾語
(1) 形容詞+名詞
例=人権 金庫 特権 哲学 表像 美学 背景 化石 戦線 環境 芸術 医学 入場券 下水道公証人 分類表 低能児
(2) 副詞+動詞
例=互恵 独占 交流 高圧 特許 否定 肯定 表決 歓送 仲裁 妄想 見習 假釈 假死 假設
- 二、同義語の複合
例=解放 供給 説明 方法 共同 主義 階級 公開 共和 希望 法律 活動 命令 知識 総合 説教 教授 解剖 闘争
- 三、動詞+客語
例=断交 脱党 動員 失踪 投票 休戦 作戦 投資 投機 抗議 規範 動議 処刑
- 四、上述の語による複合語
例=社会主義 自由主義 治外法権 土木工程 工芸美術 自然科学 自然淘汰 攻守同盟 防空演習 政治経済学 唯物史観 動脈硬化 神経衰弱 財団法人 国際公法 最俊通牒 経済恐慌
1, 수식어+피수식어
(1) 형용사+명사
예=인권 금고 특권 철학 표상 미학 배경 화석 전선 환경예술 의학 입장권 하수도 공증인 분류표 저능아
例=人権 金庫 特権 哲学 表像 美学 背景 化石 戦線 環境 芸術 医学 入場券 下水道公証人
(2) 부사+동사
예=호혜 독점 교류 고압 특허 부정 긍정 표결 환송 중재 망상 견습 가석 가사 가설
例=互恵 独占 交流 高圧 特許 否定 肯定 表決 歓送 仲裁 妄想 見習 假釈 假死 假設
2, 동의어의 복합
예=해방 공급 설명 방법 공동 주의 계급 공개 공화 희망 법률 활동 명령 지식 종합 설교 교수 해부 투쟁
例=解放 供給 説明 方法 共同 主義 階級 公開 共和 希望 法律 活動 命令 知識 総合 説教 教授 解剖 闘争
3, 동사+객어
예=단교 탈당 동원 실종 투표 휴전 작전 투자 투기 항의 규범 동의 처형
例=断交 脱党 動員 失踪 投票 休戦 作戦 投資 投機 抗議 規範 動議 処刑
4, 상술의 말에 의한 복합어
예=사회주의 자유주의 치외법권 토목 공정 공예 미술 자연과학 자연 도태 공수 동맹 방공 연습 정치 경제학 유물 사관 동맥 경화 신경쇠약 재단법인 국제법최슌 통첩 경제 공황
例=社会主義 自由主義 治外法権 土木工程 工芸美術 自然科学 自然淘汰 攻守同盟 防空演習 政治経済学 唯物史観 動脈硬化 神経衰弱 財団法人 国際公法 最俊通牒 経済恐慌
要するに、日本人は西洋のことばを日本語に訳すとき、漢字を使って中国語の造語法の法則にしたがって訳語を苦心惨憺してつくったと言える。特に第三の 「動詞+客語」 の造語法は日本語にはもともとないばかりか、日本語の文法とは正反対である。こうしてできた日本の訳語が大量中国語のなかに入っても、中国人はちょっと見知らぬことばだなと思うことがあったかもしれないが、あまり違和感を持たなかったにちがいない。まるで日本生まれ日本育ちの華僑の人が中国に帰国したようである。もしも当時、戦後の日本のように外来語は全部片仮名の音訳で片づけてしまうならば、日本語の中国語への大量進出はありえなかっただろうと思う。
日本語が中国語に入る時から定着までは1つのプロセスがあった。最初は中国人になじみがないので、そういう語に注釈がつけられたりした。梁啓超の文章から一、二例を挙げてみよう。
またもっぱら日本語から新語を収集する語彙集や辞書類も多種類出版された。第一陣の留学生が来日する一八九六年から新中国が成立する一九四九年まで、五十年あまりの歳月が過ぎたが、日本からの新語はもうすっかり中国語のなかにとけこんだと言える。
요컨데, 일본인은 서양의 말을 일본어로 번역할 때, 한자를 사용해 중국어의 조어법의 법칙에 따라서 역어를 고심 참담 해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제3 「동사+객어」의 조어법은 일본어에는 원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어의 문법과는 정반대이다. 이렇게 해서 할 수 있던 일본의 역어가 대량 중국어 속에 들어가도, 중국인은 조금 낯선 말이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별로 위화감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마치 일본 태생 일본 태생의 화교의 사람이 중국에 귀국한 것 같다. 만약 당시 , 전후의 일본과 같이 외래어는 전부 가타카나의 음역으로 정리해 버린다면, 일본어의 중국어에의 대량 진출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일본어가 중국어에 들어갈 때부터 정착까지는 1개의 프로세스가 있었다. 처음은 중국인에게 친숙함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말에 주석이 붙여지거나 했다. 梁啓超의 문장으로부터 1, 2 예를 들어 보자.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