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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사랑님의 결혼을 축하합니다.
주님 앞에서 한가지 꿈을 가지고 일하였던 아름다운 종이접기의 실력으로 행복을 접어 날려주시길 바랍니다.
국제결혼의 시대에 마음껏 신부님을 사랑해 주시고 다문화선교의 현장에서 헌신해주시길 바랍니다.
축하축하
국제결혼가정을 위한 제언/ 다사랑님의 결혼을 축하하며
먼저 결혼한 이주여성들의 수기를 올려드립니다.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혹 어려운 일이 있으면 상담을 해 드립니다.
국제결혼에 관한 도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시인 김성구 목사/ 다문화가정복지상담사 자격과정 운영 관리. 자격증 발급기관 운영/
광주대학교평생교육원 다문화가정복지상담사 과정 전담강사
국제민간자격전문협회 이사장(http://iaqa.hompee.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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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시대의 도래
우리가 어려서부터 늘 해오던 자부심의 말 가운데 대한민국은 ‘단일민족’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생각을 바꿔야할 시대가 된 듯하다. 어느 날 갑자기 ‘다문화사회’라는 용어가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에도 ‘다문화’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았다. 급기야 종합사회복지의 위치로 급부상하게 되는 ‘다문화복지시대’로 성장하였다.
우리나라는 오랜 세월 동안 농경시대와 대가족 중심사회를 유지하다가 근대화산업을 통한 산업사회로 들어가면서 핵가족중심사회로 변화하여 오다가 국제화시대가 열리면서 외국인과 결혼하는 사람이 증가하면서 다문화가족사회로 변하고 있다. 급기야 다문화가족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로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국가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제2의 민족 형성기’를 맞았다. 고조선건국 이래 수천 년간 지속돼온 한민족이 제1의 민족이라면, 이제는 다국적 다문화 사람들이 뒤섞여 한국인의 새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민족의 새로운 정체성이 형성되는 제2건국과 같은 문화적 과도기를 맞고 있다. 이때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 나가느냐에 따라 국가와 민족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국제결혼한 가정 수기 이야기/==========================================
천천히 조금씩 한국인이 되다!
메리사 큘라리오
저의 이름은 메리사 큘라리오입니다.
하지만 우리 엄마, 아빠, 언니 그리고 친구들은 “밀렛”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1978년 10월 15일 필리핀 타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한국에서의 결혼은 7년차가 되어 갑니다. 춤, 노래, 소풍 그리고 친구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애교 많은 새색시랍니다.
지금부터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의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부모님과 언니 그리고 세 명의 남동생과 필리핀에서 살았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부자이지도, 가난하지도 않았지만 우리 가족은 행복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매우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 것이 제가 부모님을 존경하는 이유이고, 그런 부모님이 계셔서 저는 행복합니다.
제가 아버지와 처음으로 떨어져 있게 된 일을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아버지가 마닐라에 가는 것을 계획한 때였습니다.
마닐라는 필리핀의 수도입니다. 우리 가족이 있었던 곳은 다바오인데 아버지가 계시는 마닐라까지는 배 타고 2박3일, 비행기로는 1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아버지가 마닐라에 가신 후 한달이 지나서 아버지는 편지와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편지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내용이었고, 특별하게도 ‘밀렛’ 저를 보고 싶어 하셨습니다. 엄마는 그 편지를 너무 행복하게 읽으셨고 엄마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저는 엄마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변하지 않는 엄마,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8개월 후에 엄마랑 저는 마닐라에 계시는 아버지를 보러 갔습니다. 언니는 초등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할머니 집에 맡겨졌고, 엄마와 저의 깜짝 방문은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저는 마닐라에서 초등학교 3학년 중반까지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이번에는 사우디를 계획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새로운 학교생활과 친구들과의 사귐이 많이 걱정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고 좋아해줘서 나의 타굼 학교생활은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섯 명의 착하고 예쁜 친한 친구들과 사귀었습니다. 그 친구들과 매일 매일 만나서 장래에 대한 꿈을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장래에 슈퍼마켓을 운영하며 가족과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생각이 성숙해지고 이성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내 미래의 남편은 키가 크고 얼굴이 잘생긴 사람이 이상형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잘생긴 남자 친구들 사귀는 친구들이 몹시 부러웠어요. 그리고 즐거운 고등학교 생활 중에 동생도 생겼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친구들과 서로 다른 대학에서 공부했고 일년! 사년! 육년이 지나서 저는 백화점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친구들도 또 다른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언니는 한국 사람과 국제결혼을 했습니다.
저는 2000년에 일본에서 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돈을 많이 벌어서 저의 꿈!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의 언니는 저의 꿈을 알면서도 엄마에게 다른 나라에 취업하러 보내지 말고 한국 사람을 소개받기를 강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언니는 한국생활이 외로워서 서로 의지하며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 사람과 결혼 생각이 없었습니다.
3개월 후에 언니는 한국 사람을 소개해 주러 우리 집에 데리고 왔습니다. 사진으로도 본적이 없었던 그 사람은 바로 지금의 제 남편이 되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나이는 많고, 너무 마른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었습니다.
3일 만에 필리핀에서 결혼식을 했습니다. 제 남편은 십여 일 후에 한국으로 돌아갔고, 저는 마닐라에서 한국으로 가기 위한 서류를 한 달 동안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기후도 다르고, 언어도 통하지 않고, 낯선 문화도 두려웠습니다.
2001년 9월 20일경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남편이 마중 나와 행복한 얼굴로 맞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나 어색했습니다. 왜냐하면 필리핀에서의 짧은 만남이 전부여서 남편이 어렵고 서먹서먹했답니다.
저는 장수에 도착해서 남편의 가족들을 소개받았고, 이튿날 남편 친구들 모임에 나가 따뜻한 환대도 받았습니다. 언니도 만나 보았습니다. 보고 싶었던 친언니 마리셀을 만나 기뻤습니다.
처음 두 달 동안 저는 매일같이 울었습니다. 필리핀으로 돌아가고도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한국에서 내가 처음으로 만든 필리핀식 생선찌게가 생선국이 되었다고 투정부리고, 굶기 일쑤였습니다.
나는 남편이 일을 나간 뒤 시부모님도 계시지 않는 집에 혼자 남아 있으려니 외로웠습니다. 동네 사람들과도 말이 통하지 않아 집 밖에 나가기도 두려웠습니다. 나에게 말을 하라고 할까봐 겁이 났습니다. 또 두명의 언니가 있어도 다른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가 볼 수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저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들이 있습니다.
2001년 1월 26일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결혼은 제 인생에서 가장 크고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제 결혼식 날은 필리핀에서 보지 못한 함박눈이 내려서 손님이 많이 오지 못해 쓸쓸한 분위기일까 걱정했었는데, 예상외로 많은 축하 손님들이 오셔서 성대한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년 후 2003년 3월 31일, 예쁜 첫 아이 행인이가 태어났습니다.
우리 부부는 드디어 2003년 엄마 아빠가 되었습니다.
저희 남편 친구들은 우리 부부에게 축하의 꽃다발과 축하한다고 내일처럼 기뻐해 주었습니다.
주위에 아기를 같이 키워 줄 시부모님, 부모님도 계시지 않아서 힘들었지만 행복했습니다.
해인이가 8개월 되었을 때, 영어 학원에서 교사로 취직하게 되었지만 주위에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어서 항상 등에 업고 다녀야 했습니다.
처음에 남편이 반대했지만, 필리핀에 계시는 부모님을 도와 드리고 싶었고, 혼자 버는 남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힘들었지만 기쁘게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러자 차차 자부심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년 후인, 2005년 5월 6일, 둘째 딸 지윤이를 낳았습니다.
지윤이는 저희 친정어머니를 많이 닮아서 필리핀에 계시는 부모님이 몹시 좋아하셨습니다. 나의 학원 강사 생활은 여전히 지속되었습니다.
올해 3월, 나에게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그것은 장수교육청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로 채용되어 수남 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상하신 교장, 교감 선생님과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선생님들이 좋았고 집에서 걸어다닐 수 있는 곳에 발령받아, 수남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에 다니는 우리 큰 딸 해인이와 같이 출퇴근 할 수 있어서 더욱더 좋습니다.
사실 지금도 가끔은 웁니다. 아플 때, 좋은 일 있어서 자랑하고 싶을 때,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 또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매일 매일 보여 드리지 못해서 안타까워 눈물이 납니다.
시간은 빨리 흘러갔습니다.
지금은 다문화가정 엄마들을 위한 장수군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한국어 교실’과 ‘민들레’에서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보며 남편은 가끔씩 “미안해”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나는 이런 순간이 행복합니다.
처음에 우리는 서로 다른 생활방식으로 인해 불편하고 인내심을 필요로 했지만, 외국인 아내인 저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기다려준 남편 덕분에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마음이 정말 따뜻하고 자상한 남편과 예쁘고 똑똑한 딸들이 있어서 행복하답니다.
올해 12월에는 제 고향인 필리핀에 가서 작은 가게를 운영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 슈퍼마켓 주인이고 싶었던 제 꿈은 조금씩 이루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은 우리 가족과 함께 한다는 설레임에 작지만 행복을 느낍니다.
앞으로 우리 부부는 열심히 일해서 아이들 뒷바라지도 해 주고 지금 이대로 변함없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뒤늦게 사랑하게 되었지만 사랑하는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있는 제2의 모국! 한국에서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이제 필리핀도 한국도 똑같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도! 내 자리도! 내 생각도! 이젠 한국인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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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결혼한 다문화가정의 애환을 살펴봅니다.
결혼이주민 여성의 한국 시집살이에 대한 이해를 하여 주세요.
남편, 시부모, 시누,시동생이 함께 사랑해야지요....
섬겨주세요. 신부의 언어로 대화를 나눠주세요. 신부의 말을 배워주세요, 그것이 배려입니다.
신랑이여, 신부의 성장과정과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할 때에 국제결혼은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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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편, 그리고 한글수업
팟싸리와티
저는 1974. 08. 28 태국에서 출생하였어요. 이름은 팟싸리와티 싸우와롯이예요. 지금은 나이가 33세 되었습니다. RAJABHAT INSTITUTE PIBULSONGKHRAM PHITSANULOK 민문대학, 도서관학을 졸업했습니다.
1999. 03. 01 푼타친나랓 병원의 간호사로 있다가 2003년 3월 3일 그만두었습니다.
저는 큰 딸이고, 남동생이 두 명 있습니다. 큰 남동생은 PC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작은 남동생은 대학생입니다. 우리 아버님은 집에서 재단사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은 2007년 1월 22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자궁암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많이 비통합니다.
지금은 집에 아버님하고 남동생 두 명 모두 세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냥 전화만 했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으니까 얼마나 걱정하고 불쌍했겠어요.
“아빠, 남동생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작은 남동생은 나이가 어리니 더 걱정이예요. 지난 일주일간 전화 두 번했어요. 큰 남동생은
“누나, 우리 많이 걱정하지 마요. 한국에서 매형이랑 잘 지내세요. 우리는 태국에서 잘 살고 있어요. 누나 힘내세요.”
지금까지 머릿속에 엄마 옆에 있어요. 여러분 혹시 어머님과 아버님 아직 잘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엄마 아빠 많이 돌보고 관심을 가지세요. 그리고 엄마 아빠 무척 사랑해줘요. 저처럼 지금까지 비통하고 속상합니다. 왜냐면 아직 온정에 보답 못해서요. 그래서 “ 엄마.... 천국에서 있으니까 우리 밑에 잘살고 있으니까 걱정마세요. 영원히 편히 쉬세요. 아주아주 사랑해요. 엄마 사랑해요. 너무 보고 싶어요.
2003. 06. 05 한국에 왔어요. 수원에서 살고 있습니다. 2003. 06. 13 지리산에서 남편은 처음 만났어요. 처음 느낌이 어땠을까요? 마음에 들고 점잖은 옷 입고 있었어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2003. 06. 20 춘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남편 너무 보고싶어요. 다른 친구가 매일 전화했습니다. 저 그냥 보고 싶다. 왜냐면 전화번호 물어요. 2006. 06에 남편이 편지를 보내왔어요. 너무너무 기뻤어요.(행복해요) 남편을 다시 만났어요.(가슴이 두근두근 했어요.) 얼굴을 봤어요. 너무 창피합니다. 친구가 남편 아주 잘 생기셨어요라고 했어요.
2003. 07. 11-12 우리 다 같이 행사했습니다. 이틀 동안 저 남편하고 준비를 갖다가 2003. 07. 13 그날 오후 2시 4억쌍 4차 국제합동 축복 결혼식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했어요. 아주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3시에 결혼식이 끝났어요. 30분 후에 남편 가족하고 만나서 인사하고 같이 밥 먹었어요. 시아버님과 식구들 처음 만났을 때 너무 기뻤습니다. 모두 다 마음씨가 좋습니까? (저 생각했어요?) 그런데 5시 전주시에서 왔었어요.
전주교회서 한 달 살고 있습니다. 거기는 일본 언니 4명하고 필리핀 언니3명하고 그리고 우리 태국 3명 모두 10식구 살고 있습니다. 한 달 동안 우리 다 같이 일 도와주셔서 음식 만들어요. 옷빨래하고 교회 청소 다 했습니다.
가끔씩 한국말 공부합니다. 2003. 08. 15 진안군에 왔어요. 임시 생활 진안 교회서 필리핀 2명하고 태국 2명 모두 4식구 살고 있습니다. 3개월동안 무엇 배웠습니까? 우리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어요. 혼자 독회하고 교회청소했습니다. 7시 아침 식사하셨습니다. 8-9시 방에 청소하고 옷빨래했습니다. 11:30-1시 성화 어린이의 집 식당에서 도와주셨어요. 2-4시 한국말 공부합니다. 일요일만 남편이 만나서 같이 예배하고 밖에 점심식사하고 그리고 놀러가요. 이렇게 너무 행복합니다. 교회 있을 때 일요일 들어왔었는데요. 정말 기뻤어요. 그동안 재미 또 있고 힘들어안으지요. 항상 열심히 한국말 공부하겠습니다.
2003. 10. 20 가정 출발하겠습니다. 처음에는 남편 집에 돌아왔을 때 어떻게 살고 있어요? 시아버님하고 남편이 어떻게 밥을 주고요? 어떻게 생활했어요?(많이 생각했어요.) 행운이 시아버님하고 남편이 너무 마음씨가 좋습니다. 무엇은 했주고 다 먹었어요. 저 남편이 막내합니다. 형제 2명, 자매 2명 모두 5명 합니다. 큰고모 전주 풍남시장에서 옷가게 있습니다. 작은 고모 서울에서 노래방 하겠습니다. 큰시아주머님 대전에서 이발소 했습니다. 작은 시아주머님 전주에서 옷공장 다녀했습니다. 그리고 조카 6명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시아주머님 없어요. 모두 이렇게 예쁘게 잘 살고 있습니다. 모두 다 마음씨가 좋습니다. 지금까지 전 예쁜하고 최고하고 똑똑하고 인정을 동서 받았어요. 왜냐하면 시아버님하고 남편하고 그리고 예쁜 딸 잘 자랐어요. 처음에는 남편이 일없었어요. 생활 많이 힘들어요. 그러므로 2003. 11. 22 전 매일제과 공장에서 일 다녀했습니다. 공장에서 일을 다 만들어봤어요.
사장님하고 아줌마하고 아저씨 모두 마음씨가 좋습니다. 전 외국사람 혼자예요. 한국어를 조금 말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일을 잘 하고 근면한 사람이예요. 사장님하고 반장님 칭찬했어요. 2004. 08. 03 출입국 사무소 공장에서 왔었어요. 전 비자공장 없어요. 그러니까 일을 안됩니다. 그리고 벌금 500,000원 받아갔습니다. 그래서 2004. 8. 10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2004. 8. 17 남편이 진안에서 도로공사 일을 다녀했어요. 너무너무 좋았어요. 혼자 일을 열심히 다녀했습니다. 그런데 2004. 10. 10 남편이 콘이콘너를 놓치서 허리를 다쳤어요. 저녁에 집에 돌아왔어요. 말 안해요. 우리 몰라요. 그래서 다음날 아침에 허리가 많이 아파서 하고 일어나서 안돼요. 그 날 시어머님 제사이예요. 우리 모두가 깜짝 놀라서 119 전화 병원 빨리 보냈었습니다.
전 울어서 하도 많이 걱정하고 많이 불쌍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2005. 4. 4 화심에서 다시 고속도로 공사일을 다녀했습니다. 거기는 태국남자 일을 있습니다. 저곳 잠자이예요. 그러면서 전 임신했습니다. 우리는 아주 기뻤어요.
전 일주일 수요일 금요일 한글수업 공부하고 토요일 화심으로 놀러갔다 왔어요. 이렇게 계속 했어요. 드디어 2006. 1. 22 전 예쁜 딸 낳았습니다. 3일동안 병원에서 남편이 많이 도와주고 많이 사랑했어요. 그래서 3일 후에 집에 들어왔어요. 남편이 일을 다 쉬다요. 그리고 저한테 만힝 도와주고 예를 들면 밥주고 옷빨래하고 집에 청소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많이 감사하고 사랑해요. 하나만 안했어요.(궁금했죠?)
“여보! 애기 똥쌌어요. 빨리와요.” 우리 딸 이름은 강유진예요 16개월 됐습니다. 유진이는 얼굴 다 아빠 닮았어요. 그 여자만 엄마 닮았어요. 유진이는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아침에 6시 일찍 일어나서 하고 TV보고 노래들어 춤춥니다. 지금 유치원 잘 다녀했어요. 만약 전 감기에 걸렸어요. 남편이 약 만들어 주었어요,. 정말 감동했어요.
2006. 6. 10 저 큰 남동생하고 사둔 남동생 한국에서 누나 집에 방문합니다. 너무 보고 싶어하고 너무 기뻤어요. 2달동안 남편하고 남편 가족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말 감사하고 감동했어요. 그런데 2006. 8. 10 저하고 유진이 태국에서 한달 갔다왔어요. 왜냐면 저 어머님 이미 수술 했습니다. 한 달동안 많이 바빴어요. 할머니랑 엄마랑 그리고 유진이 다 돌보고 또 밥주고 옷빨래하고 집 청소 다 했습니다. 재미있고 힘들고 또 힘들어요.
2006. 8. 28 제 생일예요. 그날 선생님이랑 친구랑 전화했어요.
“생일을 축하해. 어머니 빨리 건강하고 유진이 잘 자라요.”
저녁때 남편이 전화했어요.
“여보! 생일을 축하해. 오빠 선물없어 그냥! 사랑해.”
다 모두 기뻐하고 눈물이 많이 나왔어요. 정말 감사하고 감동했습니다.
2006. 9. 10 한국에 돌아왔어요. 다음다음날 한글 수업 나갔어요. 선생님이랑 친구랑 저의 파티 생일을 해주고요. 너무 감동하고 감사해요. 그런데 저녁 집에 돌아왔었어요. 태국에 전화했어요. 엄마 검사 나왔어요. 자궁암 걸렸습니다. 많이 깜짝 놀라서 아주 불쌍합니다. 그냥 엄마한테 달랬습니다.
“엄마, 다른 생각하지 마요. 밥 잘 먹어하고 약 잘 먹어요. 엄마 힘내요.”
엄마는 “엄마 괜찮아. 유진이한테 오래오래 살고 싶어. 너는 유진이 잘 키워라.” 그래서 키모약 6개월 받았어요. 이 약은 얼마나 몸에 많이 힘들어하고 많이 아팠어요. 그런데 2007. 1. 20 엄마가 ICU방 돌아가실려고 합니다. 그리고 2007. 1. 22 아침 9:40분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이날 유진이 돌이었어요. 많이 울었고 많이 슬퍼합니다. 아직 은혜를 못갚았어요. 그래서 다음날 남편하고 저하고 그리고 유진이 태국에 갔다왔어요. 남편이 일주일만 있었고, 저와 유진이 한달 있었어요. 지금까지 엄마 아주 보고 싶어요. 남편이 진안 호남 주유소 운전 다니고 있습니다. 항상 일 열심히 합니다. 저한테 월급 다 주셨어요. 그리고 전 건강하기를 바라고 옷사주셔서 와 전 마음대로 말합니다.
요즘 저는 상전면 사무소에서 영어 선생님 되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4시 초등학생 12명, 중학생 7명 합니다. 그날 시아버님 같이 따라갑니다. 왜냐하면 유진이 때문에 바래주고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일주일 수요일 금요일 한글수업 공부하고 토요일 영어 가르쳐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자 아자 파이팅!
그리고 남편한테 처음부터 지금까지 많이 사랑합니다. 그동안 너무 감사하고 감동했습니다. 지금은 혼자 일 열심히 많이 힘들어요. 한말 안해요. 우리 많이 걱정했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프지 말고 일 너무 무리하지 마요. 당신은 없으면 나는 못 살아요. 항상 건강하고 늘 사랑해요. 여보..영원히 사랑해요.
그동안 저는 그냥 집에 있어요. 하루 동안 옷빨래하고 집에 청소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보고 한국말 배웠습니다. 그런데 2004. 9. 3 진안 여성상담에서 좋은 편지 왔어요. 외국 사람들이 한국말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2004. 9. 4 한국말을 공부 시작했습니다. 그 날 친구들을 많이 만나서 너무 기쁘고 반가왔습니다. 우리 친구들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아,,아..일본, 필리핀, 베트남, 중국,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태국예요.
우리 한국말 선생님 예쁜 얼굴, 이름은 장계윤 선생님예요. 일주일을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진안여성상담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자음, 모음 하고 읽기 하고 또 편지 쓰기 하였습니다. 공부시간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2004. 11. 12 공부시간 그만 두었습니다.다. 2004. 12. 14 다시 공부시간 시작했어요. 일주일 수요일 금요일 10-12시까지 진안 문화의 집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우리 한국말 많이 배웠습니다. 또 한국음식 많이 만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닭도리탕, 추어탕, 삼계탕, 육개장, 돼지불고기, 칼국수, 감자부침개, 송편떡, 열무김치, 열무비빔밥, 찹쌀떡, 팥죽, 김밥 다 만들어 봤어요. 우리 다같이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영화 또 보고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노래를 또 배워요. 가끔식 선생님이랑 친구랑 노래방 가서 노래를 신나게 부릅니다. 참 재미있습니다. 전 한국노래 너무 좋아요. 예를 들면 어머나, 너는 내남자, 당신은 바보야, 사랑했나봐, 아싸! 기분좋았구나 노래 한국 1 2 3 빙고.
2005. 4. 29 우리 마이산 벚꽃 현장 학습 갔습니다. 점심 김밥 먹었습니다. 많이 재미있어하고 행복합니다. 2005. 10. 23 우리 전주 한옥생활 체험관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인 한국어 말하기 대회]갔어요. 이날 대회는 아시아 노동인권센터 주관으로 도내에 거주하는 국제 결혼 외국인이 주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어 받아쓰기, 5분 스피치, 한국어 스피드게임, 한국어 ox 퀴즈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어요. 저는 1등상인 세종대왕상을 받았어요. 임신7개월의 몸으로 침착하게 저의 한국에서의 결혼생활과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말하고 저의 좋아하는 한국노래인 “어머나”를 열창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어요. 치도리씨(일본)가 보금상, 띠우띠투이 항씨(베트남)가 인기상을 각각 수상했어요. 스프드 퀴즈에서는 베네시아(필리핀)와 테레사(필리핀)씨, 릴리벳(필리핀)와 로사린(필리핀)씨도 1,2등을 하는 등 진안 아줌마의 저력을 보여주는 한편 심사위원들에게 평생학습고을 진안에 대한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도 했어요. 그날 우리 다 많이 재미있었어요.
저는 많이 기뻤어요. 상은 전자렌지 받았어요. 또 남편이 선물을 휴대폰 사줬어요. 정말 기쁘고 감사했어요. 우리 계속 열심히 공부하겠어요. 그리고 한달에 한번식 생일 파티를 열다 점심먹어 하고 노래를 신나게 부릅니다.
2006. 4. 13 우리 외국인하고 할머니들 그리고 장계윤선생님이 마이산 체험학습 갔습니다. 오랜만에 마이산에 오니까 공기도 상쾌하고 친구들하고 할머니하고 손잡고 이야기하고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가서 참 재미있었어요. 보도에 따라 벚꽃 활짝 피면 좋겠어요. 점심 때는 순두부 맛있게 먹었어요. 오후에 같이 신나게 노래하고 일본친구 악기 연주했어요. 정말 재미있고 행복합니다. 선생님이 일하는 사람한테
“어른부터 주야지” 라고 하셨습니다. 태국에서 똑같아 어른부터 주세요. 해야 되는 것 하나 배웠습니다.
2006. 5. 10 새로운 책 “여성 결혼이민자를 위한 한국어교재” 공부하게 되었어요. 이 교재에는 결혼이민자들의 실제 생활에 필요한 가사, 육아, 가족 등과 관련된 내용을 주로 다루었으며, 부록으로 여성 결혼이민자들이 꼭 알아야 할 법률정보와 생활정보를 실었습니다. 이 책이 마음에 많이 들어요. 그리고 새로 프로그램 “step by step"하고 있어요. 기간 : 2006. 7. 5- 11. 24 매주 수요일 ” 한글교육“과 함께 매주 금요일에 ”즐거운 특별수업“로,,7월 국적법, 노동법, 성교육.. 8월 부부교육, 부부 레크레이션, 자녀교육..9월 자녀교육, 예절교육, 음식교육..10월 국민의 날 참여, 사랑의 도시락 만들기, 전통놀이 배우기.. 11월 표현학습, 자녀학교 둘러보기, 모국음식파티, 평가 종강식 영상물보기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20065. 9. 29-12. 18 매주 월요일 네 시간씩(오전 10:00-오후 14:00)까지 진안 컴퓨터학원에서 컴퓨터 공부 하겠어요. 우리 너무 바뻤어 하고 또 재미있습니다. 2006. 10. 12 진안 전통문화 전수관, 풍년식당에서 ”향토 맛자랑대회“합니다. 태국 전통음식”똠카까이“, 우리 이국인들이 전통의상 입고 했어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칭찬했어요. 우리 외국인 솜씨상 받았어요. 많이 피곤했는데 아주 기뻤고 많이 행복합니다.
2006. 10. 27 전라북도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2회 결혼이민자 가족 한마당] 갔어요. 이날 대회는 아시아 이주여성센터 주관으로 도내에 거주하는 국제결혼 외국인이 주여성을 대상으로 한국어 말하기 대회, 한국어 퀴즈대회, 자국의상 뽐내기 및 장기자랑 대회, 가족사진 찍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됐어요. 그날 시아버님하고 유진이 같이 갔어요. 말하기 대회는 저하고 치도리, 마린로우군다야오, 소관유자, 한국어 퀴즈대회는 소관유자, 유끼꼬, 베네시아, 에니다. 카라타, 노래자랑 레탄혠, 장기자랑 대회는 태국팀하고 일본팀 일본팀은 악기하고 피아노했습니다. 태국팀은 전통춤 5명은 저, 빠자리, 유바란, 칸라야 그리고 니욤. 우리 춤추는데 큰 박수 받았어요. 너무 감동하고 기뻤어요.
저는 말하기 대회 1등 시상 20만원 받았어요. 마린로우 군다야오 3등 5만원하고 장기자랑 상품권 1 면 1만원 받았어요.
2006. 11. 10 “자녀 학교 둘러보기” 프로그램에서 진안초등학교를 둘러보며 한국의 초등학교를 미리 체험했어요. 또 두 번째 프로그램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저의 나라와 필리핀, 베트남 등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 아이들에게 동남아시아의 1일 문화교사로 나섰어요. 아이들은 한국말이 서툴지만 열심히 설명하는 1일 선생님을 보고 아이들은 열린 마음으로 격려의 박수를 받았어요. 너무 감동했습니다.
지금은 계속 한국말 공부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친구 많이 나왔어요. 베트남 6명, 캄보디아, 2명, 공부날 바뀌었어요. 매주 화요일 베트남하고 캄보디아, 수요일 필리핀하고 태국, 금요일 같이 공부하고 있어요. 요즘 우리 한글수업 8-10명 나왔어요. 논밭에 때문에 합니다. 그러니까 재미 또 없고 선생님이 불쌍합니다. 그래서 우리 나온 사람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장계윤 선생님한테 모두 한글수업하고 좋은 말씀하고 좋은 기회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 힘내세요..우리가 있잖아요. 선생님! 파이팅!”
그리고 우리 김완주 전라북도 지사하고 양인석 이사장 아시아 이주여성센터 그리고 송영선 진안군수님 새로 프로그램하고 좋은 행사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 또 하겠어요. 참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 외국인 여성과 가족 모두 항상 행복한 가정하고 늘 예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대단히 감사합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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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국제결혼, 도전과 성공
레오노라 디아즈 큘라리오
제 이름은 레오노라 디아즈 큘라리오입니다. 현재 장수군 장수읍 송천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7명입니다. 우리 아버님, 어머님, 딸 둘, 아들 하나 그리고 남편이랑 모두 같이 살아요.
시부모님은 남편과 함께 농사일을 해요. 저는 영어 강사를 하고 있어요. 우리 큰 딸은 이제 초등학교 5학년, 둘째는 4학년, 막내딸은 2학년 다니고 있어요. 저도 장수초등학교에서 영어 강사 일하고 있어요. 매일 매일 우리 아이들을 볼 수 있으니까 너무 기분이 좋아요. 학생들도 만날 때 마다 웃는 얼굴 하니까 저도 행복해요.
옛날에는 장수에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없었어요. 우리 수진이가 제일 먼저 학교를 들어갔습니다. 피부가 약간 다르니까 처음에는 많이 놀림도 받았어요.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공부를 어려워했어요. 그때는 우리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몰랐어요. 왜냐하면 저는 아직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들어요. 그리고 한국 생활을 잘 몰라요. 그냥 시골에만 있어서 그때는 교육 문제도 아직도 잘 못 느꼈어요.
지금은 이제 11년 됐으니까 한국 문화, 교양, 전통, 사회적 관습을 조금 이해했어요. 이제 걱정도 많이 해요. 특히 경제적으로 잘 안되니까. 여기 한국에서 특히 농촌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으로나 교육문제나 못 이겨내요. 도시하고 시골은 비교 못하니까요. 엄청 차이 많이 났어요. 저는 똑같은 부모 입장이니까 우리 아이들도 잘 키우고 싶어요. 먼저 교육문제 어떻게 해결할까? 제 남편 농사만 하니까 아이들을 학원 보내기 어려워요. 교육 비용 너무 무거워요. 영어 강사로 일하는 것으로는 돈을 많이 못 벌어요. 세 아이들 다 학원 보낼 수 없어요. 제가 가끔 스스로 가르치는데 잘 안돼요. 한국말 부족하니까. 사실은 정부에서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학교에 방과후 수업이 많지만 우리 다문화가정 아이들에게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별로 없어요. 그 과목을 집중한 특별 수업이 있으면 좋겠어요. 요즘에 다문화가정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을 많이 한대요. 그런데 엄마들 교육 아니면 육아 교육뿐이에요. 우리 아이들 교과서와 결부시켜주면 만족하겠습니다.
나는 세 아이를 낳았어요.
처음에 가게 돌봐줄 때 한국말은 아직 잘 못했어요. 동네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할까 너무 고민했어요. 가끔 어떤 할머니가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갔는데 그 할머니 이름을 몰라서 영어로 이름을 썼어요. 할머니 머리카락 스타일 다 똑같아요. 엄청 많이 헷갈려요. 남편이 집에 도착해서 누가 외상을 했는지 물으면 잘 기억이 안나요.
그런 문제도 있고 아이들이 셋이나 되서 정신이 없었어요. 어떤 할아버지가 막걸리 사러 왔어요. 아이가 그 때 똥을 쌌어요. 아저씨가 저한테 “아줌마 빨리 빨리 좀 하세요.” 저는 진짜 화가 났어요.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어요. “아저씨 제가 뭐하고 있는 것 못 봤어요?” 어쨌든 너무 화가 나서 그냥 필리핀으로 가고 싶었어요.
한국 사람들 ‘빨리 빨리’라는 말 잘해요. 우리 외국인들 그 ‘빨리 빨리’ 소리 들으면 너무 싫어요. 천천히 해도 되는데 왜 그런 말 많이 해요? 지금은 좀 이해할 수 있어요. 한국은 사계절이 있으니까 그래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요. 필리핀은 항상 더우니까 그래서 좀 게으르죠. 이제는 제가 필리핀 갔을 때 ‘빨리 빨리’를 많이 해요. 오히려 한국 사람들보다 더 심해요.
“아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아서” 이런 말은 많이 들었죠? 이주여성들 많이 이런 말을 했어요. 저도 그랬어요. 이럴 때 해결법 알려드릴께요. 이주여성들 처음에 어려운 것이 많이 있었을 거예요. 특히 문화적인 차이나 언어에 대한 것이 참 힘이 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모든 어려운 것을 해결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같이 잘 어울리고 즐거워하고, 가슴이 너무 답답하면 밖에 나가 크게 소리를 질러보는 거예요. 그 때 진짜로 가슴 속이 풀려요. 아니면 산책을 해요. 제일 좋은 방법은 낙관적인 생각을 해요. “아 이것도 곧 나아질 거다.” 라고요. 그렇게 생각해야 되요.
제가 이야기할 게 있어요. 뭐냐면 제 야심에 대한 것이에요. 제가 옛날에 학생일 때 내내 외국인이랑 펜팔을 많이 했어요. 미국, 영국, 캐나다, 독일, 스웨덴, 핀란드 등. 그때는 필리핀에서 펜팔이 유행했어요. 외국인이랑 결혼하면 잘 살았어요. 그래서 아직 어린 생각이었지만 외국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었어요.
시간이 빨리 지나가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세관에서 8년 근무를 했었는데 아직 제가 원하는 사람을 못 만났어요. 어느 날 친구한테서 나를 소개받았다고 김종기라는 사람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편지주소는 전북 장수군 장수읍 송천리, 서울, 코리아라고 써있었어요. 결국 저는 결혼하기로 결정했죠.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산으로 뒤덮여 있는 시골마을이었어요. 제가 장수에 처음 왔을 때에는 아직 필리핀 사람이 없어서 너무 심심하고 지루해서 도망을 치려고 했는데 임신을 해서 도망을 못 쳐서 아기 낳고 또 도망을 치려다가 또 임신을 해서 아기를 낳고, 또다시 임신을 해서 그냥 장수에서 살기로 했어요.
제 남편이랑 결혼하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가족간의 갈등이 아주 많았어요. 친구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고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몰라요. 우리나라 문화, 사회적 전통차이 엄청 많이 났어요. 가치관과 종교에 관한 차이가 너무 많았어요. 처음부터 남편은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제가 기대되는 것이 너무 틀렸어요. 그 이유 때문에 오해한 것이 많았어요. 그 때는 매일매일 많이 울었어요. 언어 때문에 표현도 못했어요. 너무 마음이 답답했어요. 몇 년 동안 그렇게 살았어요. 아마도 국제 결혼한 부부 관계는 5년은 참고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돼요. 결혼하고 3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세 아이를 기르고 어디로도 갈 수 없었어요. 4, 5년의 시간이 지나가면서 이제 한국 생활이 재미있어요.
저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포용한다는 게 무척 힘들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아, 나 역시 그걸 경험했다.” 지금까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고난의 길이었지만 내가 처한 환경에 자신을 맞추려 노력했어요. 저 역시 많이 울었지만, 도망도 가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마음속에서 부르고 있었어요.
한국 사회의 여러 면들에 적응하느라 많이 슬퍼했고 탄식했으며 또 후회도 했어요.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한국 문화에 적응하게 되었어요. 이곳 문화를 배우고 수용하려고 최선을 다했기에 현재의 제 삶을 즐기고 있는 거죠. 저는 언제나 가족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요. 사실은 11년간 한국 생활을 해봤어요. 다른 사람을 만나면 저에게 말합니다. “노라씨, 한국사람 다 되었어.” 그때는 기분이 참 자랑스러워요. 아무래도 제가 선택한 인생이 잘 된 것 같아서요.
그래서 이주여성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시간을 가지고 매사를 대하라는 것이죠. 결코 서두르지 말고 우리들 행운이 예정되어 있다면 언젠가는 찾아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요. 그러나 누구나 그만큼 열심히 노력해야 되요. 우리 인생은 마술이 아니니까요. 힘들어도 참고 또 참고 일한만큼 돌려받는 것이죠.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당신이 심고 당신이 거두는 것이다.” 저는 왜 이 속담을 생각했을까요? 처음에 저는 일이 없었어요. 마을에서 우리가 살던 집은 가게에 딸린 집이었어요. 한 3년 동안 가게만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돈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일을 해보기로 했어요.
처음에 수남 초등학교 영어 강사 일을 했어요. 계속 다니다가 다른 학교에서도 일을 했어요. 가르치는 것 너무 힘들었어요. 필리핀에서 세관에서만 일했으니까요. 그래서 학생들을 관리하는 게 참 어려웠어요. 필리핀에서 왔으니까 학생들 처음에 제 발음을 못 알아들었어요.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공부 많이 했어요. 그때는 아직 컴퓨터가 없었어요. 그래서 라디오 카세트로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영어 신문까지 구독했어요.
이제 많은 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2001년 8월부터 2003년 6월까지 전북 프뢰벨 교육원에서 일했어요. 그 때는 자동차도 없었어요. 그래도 익산으로 무주로 다녔어요. 가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많이 울었어요. 몸과 마음이 지쳐갔어요. 불쌍하다는 생각도 했어요. 제가 왜 한국에 왔을까 많이 실망했어요. 눈 올 때, 비가 올 때, 날씨가 너무 더워도 일해야 했어요. 맨날 달리기 했어요. 혹시나 버스가 가버릴까 걱정 많이 했어요. 밤늦게까지 계속 가르쳤어요. 아이들은 집에 돌아가 보면 다들 자고 있어요. 그래서 학원을 그 때 만들었어요. 또 계속 학교 영어 강사 일을 했어요.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아마 더 어려운 것도 해낼 거예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국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면, 부부가 서로 이해되고, 그러면 행복하고 성공적인 가정생활이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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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이 서툴러서 문장이 잘 맞지 않으나 내용을 보면서 국제결혼 여성의 어려움을 이해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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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루니의 사랑의 편지
자루니 숟상
저는 태국에서 온 자루니입니다. 한국에서 결혼 생활이 4년째입니다.
저의 가족 형제는 2남 3녀이고 부모님은 다 계십니다. 저는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은 농사를 짓고 농촌에서 살았습니다.
집안 형편이 힘들게 살았고 우리는 공부를 많이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은 화목한 집입니다.
저는 중학교까지만 다녔습니다. 남들보다 사회생활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부모님은 우리 공부 많이 못시켜서 미안해하셨지만 우리들은 모든 일을 직접해봐서 어려운 일 생겼을 때 스스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착하게 살고 앞으로 부모님 도움 없이 튼튼하게 사는 게 부모님이 원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부모님을 더 편하게 해 주고 싶어서 오빠랑 작은 언니 따라 방콕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제가 열 여섯 살 때였습니다. 처음 직장생활은 힘들었지만 오빠하고 작은 언니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동생 잘 있어? 밥 먹었니?” 그 소리만 들으면 힘이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 언니 선배가 통일교를 통해서 한국 남자를 소개해줬습니다. 그 언니가 “한국 남자는 바람도 안 피우고 가정을 잘 지켜주고 책임감이 많아.”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언니의 말을 믿고 지금 살고 있는 남편을 만나고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저의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한국에 시집왔을 때 결혼 생활을 쉽게 생각했지만 생활하다 보니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음식 맛도 안맞고 한국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틀리고 남편은 짧은 시간에 만났게 때문에 성격도 안맞고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 때는 너무 답답했고 너무 괴롭고 많이 힘들어서 매일 밤 울었습니다. 후회했지만 부모님께 잘사는 약속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 이해해주고 성격도 서로 바꾸고 음식도 연습해서 배우고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힘들지만 우리 부부는 많이 노력했고 생각했습니다.
결혼 처음 했을 때는 제 남편은 직장에 다녔는데 갑자기 몸이 안좋아서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결혼한지 얼마 안되어서 남편이 1차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남편 병원비 때문에 집 형편은 조금 어려웠습니다. 그 때 저는 한국말 전혀 모르고 혼자서 남편 간병했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남편이 퇴원한 후 우리 부부는 임신 소식을 알았고 너무 기뻤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조금 도움이 될까 해서 아는 태국언니네 상추 하우스 밭에 일을 다녔습니다. 돈은 많이 못받았지만 남편 병원비하고 뱃속에 아기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2차 수술날짜가 돌아왔습니다. 2004년 11월 17일. 이 날은 잊지 못하는 날입니다. 이 날이 남편이 마지막으로 스스로 걸을 수 있는 날이 될 줄 몰랐습니다.
수술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늦게 깨어난 상태였습니다. 저는 임신 8개월이었습니다.
의사선생님한테 수술 상태에 관한 말을 듣고 너무 힘들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죽을 수도 없고 언제 깨어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저는 남편을 믿었습니다. 남편은 아기 얼굴을 안보고 못 떠납니다.
드디어 의식이 없던 남편이 2주가 지나서 깨어났지만 장애인인 상태였습니다.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눈 한 쪽은 잘 안보이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자기의 몸 상태를 알았으니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상처를 얼마나 받았을까? 옆에서 계속 같이 있어주고 싶었지만 출산날이 가까워져서 시어머니께서 대신 남편을 간병했습니다.
아기를 출산했을 때 남편의 가족들이 같이 살고 있는 동안 저한테 너무 잘 해주고 친정집처럼 친형제처럼 편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남편의 가족들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너무나 죄송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남편과 저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모두 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태어난 아기에게 너무 미안했고 이렇게 고생시켜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기 출산 후 4개월이 지나서 남편하고 아기의 첫 만남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아기한테 얼마나 미안했을까? 남편은 아기를 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이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왔고 저는 다시 남편 간병을 했습니다. 아기는 형님이 보고 놀이방에도 보냈습니다.
저는 형님과 병원을 왔다갔다 했습니다. 너무 힘들지만 아기한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 남편의 간병을 하고 있을 때 한국말을 거의 못했습니다. 친구들이 한국말 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한글을 혼자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남편하고 옆에 있는 사람들 덕분에 한글 공부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말을 잘 모를 때 알 때까지 설명해주고 텔레비전도 같이 보았습니다. 그 때 공부한 책은 ‘대한사전’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아기가 크면 한국말 못할까봐 저는 한글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한국 결혼 생활이 많이 힘들었지만 남편과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힘들 때 서로 힘이 되어주고 웃을 때 같이 웃고 울 때 같이 울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남편이 퇴원해서 집에 있고 우리는 농촌에 살지만 아기 덕분에 우리 집에 웃음소리가 많아졌고 행복합니다.
작년 8월부터는 장수초등학교에서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아들아! 엄마한테 태어나줘서 고맙고 고생시켜서 미안하다.”
“여보! 아기한테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해줘서 고맙고 이렇게 살아줘서 감사해요.”
“어머님! 저한테 잘해 주셔서 감사하고 옆에서 우리 가족 지켜봐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많은 고생 힘든 시간 잘 이겨냈으니 이제 남들 부럽지 않게 행복하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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