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재 너머로
이월 셋째 일요일은 바삐 보낸 하루였다. 고향을 지키고 계시는 큰형님을 찾아뵙고 설을 쇤 안부를 나누었다. 큰형님이 남겨가는 한문 문장과 한시를 문집으로 엮기 위한 워드 작업을 의뢰받아 펜으로 써둔 방대한 자료 몇몇 부분을 확인 받고 왔다. 오후에는 창원으로 돌아와 신학기를 앞두고 있어 이발을 마쳤다. 나는 이발은 한 해 두 차례 하는데 다음은 추석 무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저녁엔 이웃 학교 근무하는 같은 아파트단지 지기와 함께 거제로 돌아왔다. 신학기를 앞둔 출근이 다가와서다. 지기는 내 근무지보다 하루 먼저 소집일이 정해졌다. 한동안 비워둔 와실을 환기시키고 방바닥을 닦아냈다. 찬과 옷가지를 정리해두고 일찍 잠들어 새벽에 일어나 노트북을 켰더니 부팅이 되지 않아 난감했다. 출고가 오래된 구형이라 사용에 불편을 겪으면서 억지로 버텨간다.
이월 넷째 월요일이다. 내 근무지는 화요일과 수요일에 새 학년을 맞이하는 연수 일정이 잡혀 하루 여유가 생겼다. 아침나절 노트북을 들고 가전제품 서비스센터로 찾아갔다. 연사 들녘을 지나 연초교를 건넜다. 고현 뒤쪽 계룡산으로는 운무가 걸쳐져 있었다. 서비스센터는 고현동이 아닌 수월삼거리에 있었다. 서비스센터 기사는 뭔가를 가볍게 조치하더니 부팅 장애는 쉽게 해결되었다.
와실로 되돌아 와 점심을 해결하고 산책을 나섰다. 날씨가 무척 포근해 더위를 느낄 정도였다. 연사정류소로 나가 옥포 방향으로 가는 16번 시내버스를 탔다. 옥포 시가지를 둘러 대우조선소 서문을 거쳐 아주로 들었다. 아주는 대우조선소 배후 거주지로 아파트 밀집 지역이었다. 안골로 불리는 내곡 일대까지 아파트단지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내가 지내는 와실과 떨어진 데였다.
안골 들머리에서 내려 울음재를 향해 올랐다. 울음재는 울 명(鳴)자 전설이 서린 명재였다. 옛날 고현에 살던 사고무친 오누이가 아주 외가를 찾아 고개를 넘었다. 고갯마루에서 소나기를 맞아 동생이 옷이 젖은 누나 모습에서 음욕을 느껴, 누이를 먼저 내려가라 하고 가책을 느껴 돌로 제 이마를 쳐 죽었다. 동생이 뒤따라오지 않아 누이가 되돌아와 보니 그 현장에서 목 놓아 울었단다.
울음재까지는 임도가 개설되어 산행이 아닌 산책과 같은 느낌이었다. 산허리에서 피부색이 다른 한 사내가 나에게 뭐라고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거제에는 조선소와 연관된 일을 하는지 가끔 외국인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임도가 아닌 숲길로 들어 나목으로 겨울을 나는 낙엽활엽수림대를 지났다. 가랑잎이 덮인 숲 바닥은 이른 봄에 피어날 야생화들이 싹이 돋으면서 기지개를 켜지 싶었다.
숲을 빠져나가니 임도가 끝난 곳이었다. 고갯마루 쉼터에는 젊은 여성이 강아지를 세 마리나 데리고 쉬다가 일어섰다. 울음재는 거제 명산에 꼽히는 옥녀봉이 국사봉으로 건너가는 중간이었다. 나는 옥녀봉에도 올라가 봤고 국사봉에도 올라봤다. 지난해 국회의원 총선일 국사봉을 올랐다가 작은 국사봉으로 내려오다 응달 산자락 두릅과 곰취를 채집해 동료들과 나눴던 기억이 새롭다.
울음재를 바로 넘으면 문동폭포로 가는 길이었다. 전설에 나온 고현에 살던 오누이가 올라왔을 계곡이었다. 폭포로 내려서는 비탈은 돌계단을 놓아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문동폭포는 아파트 수십 층 높이에 해당할 듯했다. 금강산의 비룡폭포가 연상되었다. 겨울 가뭄에도 가느다란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물웅덩이 곁에는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젊은 여성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낙엽활엽수림이 우거진 계곡을 빠져나갔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목은 거제 문사들의 시를 빗돌에 새겨 놓았다. 주차장 밖으로 나가 갈림길에서 동녘마을로 향했다. 산기슭 전원주택 단지였다. 볕 바른 자리는 산책 나온 세 아낙이 허리 굽혀 쑥을 뜯었다. 곁에는 매화가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문동저수지는 오후 햇살에 윤슬로 눈이 부셨다. 맞은편은 계룡산에서 건너온 선자산 능선이었다. 21.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