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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 18. 귀신이 들렸다 19. 죄인의 친구
마 11: 18. 귀신이 들렸다 -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심히 자기 중심적인 판단과 비난을 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어 악을 행하거나 즐기는 자도 아니시다. 지혜의 주님께서는 자기의 자녀들에게는 의로우시다는 인정을 받으실 것이다.
이 구절은 앞 구절에서 예수께서 이 세대를 불일치와 무반응한 아이들의 놀이로 비유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1]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wild honey)으로(3: 4), 개인적인 식사 초대에는 응하지 않았다.
나실인의 규례대로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고, 금욕적인 절제의 생활을 하며 주의 길을 예비하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 눅 1: 15 -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 눅 7: 33 –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2]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요한의 설교에 유대인들은 회개하거나 뉘우치지 아니하고 아무런 반응이 없다가 이제는 그를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주의 선구자로서 금욕적인 모습으로 그가 나타나자 교만한 유대인들은 그를 '슬픔의 귀신'에 사로잡혀(F. R. Fay) 어둡고도 침울한 생활을 하는 자로 매도(罵倒)하였다.
마 11: 19. 죄인의 친구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자녀들로) 옳다 함을 얻느니라.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의 자녀들이 된 것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하신 일들에 대해 무지하게 불평하지 말고, 지혜의 자녀들로서 그 일들을 이해하고 사모하고 협력하는 자가 되고 무지하고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1] 인자는 와서
인자란 칭호는 예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특히 공생애 후반기에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자신이 고난 당하실 종말론적 메시아란 사실이 암시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단 7: 13-14 –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 눅 5: 24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 먹고 마시매
예수께서 세례 요한처럼 금욕적이고 야생(野生)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 똑같은 일상의 생활을 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요한과는 달리 죄인들과 함께 자리하여 세리들과 식사하기도 하였으며 천한 무리와 어울려 다니기도 하였다.
* 마 9: 10-11 –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 눅 15: 1-2 -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 예수의 관점에서
바리새인을 위시한 위선적 종교가들의 가식적 종교 형태를 온몸으로 비난하신 것이 된다.
(2) 바리새인의 관점에서
파행적 행동을 한 예수야말로 율법의 파괴자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소외된 자, 죄인들과의 식사는 복음이 지닌 자유의 기쁨의 한 편린(片鱗)이었음이 분명하다.
3]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아이들과도 같이 이 완고한 사람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던 세례 요한에게는 귀신이 들렸다고 비난하더니 이제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예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하는 대식가(大食家)요,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으로 몰아세웠다.
이 세대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어도 메시지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직 진리를 향하여 악의에 가득찬 비난거리만을 찾는 자들이었다.
4]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문자적으로 술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술꾼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요한처럼 특이한 옷차림을 하였던 것도 아니며 나실인으로서 자신을 성별(聖別)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일상적인 방식에 따라 먹고 마셨으며, 특히 포도주는 그 당시의 주요 음료 중의 하나였기에 마셨을 뿐이다.
5]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그들은 값싼 즐거움(pleasure)을 기다리다가 세례 요한의 절제와 금욕 생활을 보고는 미쳤다고 비난했으며, 죄인들과 분리되기를 바라다가 이번에는 예수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는 죄인의 친구, 곧 죄인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한 통속(secret society)이라고 비난한다.
6]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누가의 평행구에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눅 7: 35)로 기록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두 평행구가 차이점을 가지는 것은 원래 예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대(古代)의 많은 필사자들은 이 부분을 누가의 기록대로 고쳐 '그 행한 일'을 '자기의 모든 자녀'로 표기하였다(레기우스 사본, Vulgate역 등). 누가의 기록이 원래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본 구절은 '지혜의 요구 사항들은 모든 지혜의 자녀들에 의해 진정으로 입증된다.'라고 해석되기도 한다.
여기서 '지혜의 모든 자녀들'이란 지혜의 사자(messenger)들(세례 요한과 예수)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했다(Marshall).
* 눅 7: 29-30 –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마태복음에서 '행한 일'(행위들, actions, NIV)로 변형되어 표현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혹자(Suggs)는 본문의 '그 행한 일'이란 것은 지혜의 성육신(Incarnation)이라는 기독론(Christology)적인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지혜는 그 지혜의 행위들에 의해 옳다고 입증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보고 있다.
구약에서 지혜는 인격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 욥 28 장 – 1 은이 나는 곳이 있고 금을 제련하는 곳이 있으며 2 철은 흙에서 캐내고 동은 돌에서 녹여 얻느니라. 3 사람은 어둠을 뚫고 모든 것을 끝까지 탐지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있는 광석도 탐지하되 4 그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떠나 갱도를 깊이 뚫고 발길이 닿지 않는 곳 사람이 없는 곳에 매달려 흔들리느니라. 5 음식은 땅으로부터 나오나 그 밑은 불처럼 변하였도다. 6 그 돌에는 청옥이 있고 사금도 있으며 7 그 길은 솔개도 알지 못하고 매의 눈도 보지 못하며 8 용맹스러운 짐승도 밟지 못하였고 사나운 사자도 그리로 지나가지 못하였느니라. 9 사람이 굳은 바위에 손을 대고 산을 뿌리까지 뒤엎으며 10 반석에 수로를 터서 각종 보물을 눈으로 발견하고 11 누수를 막아 스며 나가지 않게 하고 감추어져 있던 것을 밝은 데로 끌어내느니라. 12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13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 14 깊은 물이 이르기를 내 속에 있지 아니하다 하며 바다가 이르기를 나와 함께 있지 아니하다 하느니라. 15 순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리니 16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17 황금이나 수정이라도 비교할 수 없고 정금 장식품으로도 바꿀 수 없으며 18 진주와 벽옥으로도 비길 수 없나니 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구나. 19 구스의 황옥으로도 비교할 수 없고 순금으로도 그 값을 헤아리지 못하리라. 20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21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22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 23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며 있는 곳을 아시나니 24 이는 그가 땅 끝까지 감찰하시며 온 천하를 살피시며 25 바람의 무게를 정하시며 물의 분량을 정하시며 26 비 내리는 법칙을 정하시고 비구름의 길과 우레의 법칙을 만드셨음이라. 27 그 때에 그가 보시고 선포하시며 굳게 세우시며 탐구하셨고 28 또 사람에게 말씀하셨도다. 보라.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 잠 1: 8 -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유대 전승들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어떤 대리자로서 하늘에 있는 반신 반인적인 존재(a guasi - personal hypostasis)의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로 표현되었다.
본문의 지혜는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 잠 8: 12-16, 22-31 – 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14 내게는 계략과 참 지식이 있으며 나는 명철이라. 내게 능력이 있으므로 15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방백들이 공의를 세우며 16 나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느니라.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 눅 11: 49 -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 하였느니라.
따라서 이 구절에서, 지혜와 관련된 기독론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닌 것 같다.
'그 행한 일로 인하여' 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그의 자녀들로 인하여'라고 되어 있다.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상징한 것 같다.
지혜의 주께서 불신앙적 세대의 사람들에게는 비난을 받지만, 자기 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받는다. 실상 주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는 악한 자가 아니다.
이 세상은 믿음이 없고 주께 대하여, 그리고 주의 일에 대하여, 바르게 반응하지 않고 잘못되게 반응한다. 그들은 주의 참된 종들에 대해,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심히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비난을 한다.
우리는 지혜의 자녀들이 되자. 지혜의 자녀들이 된 것을 감사하자. 지혜의 자녀들로서 반응하자. 주의 일에 대하여 바르게 응답하고 호응하고 협력하자. 시기, 질투, 불평, 불만 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의 일을 함께 받들어 나가는 동역자가 되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살든지 죽든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참 교회와 그 복음 사역만을 위하자. 그것이 참 지혜의 자녀들의 표가 될 것이다. 반대로, 주의 참된 종들과 사역들에 호응하고 협력하지 않는 것은 참 지혜의 자녀들이 아니라는 표가 될 것이다.
7] 옳다 함을 얻느니라.
문맥 속에서 이 어구를 이해하면 이 어구는 앞의 비유와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세례 요한과 예수의 생활양식과 결부되어 있다.
사람들은 요한과 예수의 생활 방식을 모두 비난했으나 하나님의 지혜가 인도하는 대로 요한과 예수는 바르게 살았으므로 그 두 사람의 행위는 결국에 가서 옳다 인정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8] 모순된 공격자들
주님의 행위와 그 교육을 나무라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형식적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자들로서 독선적인 자기들의 종교 양식에서 벗어난 세례 요한과 주님의 자세를 비난하였다.
자신들의 헛점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금식하는 것을 트집 잡아 귀신이 들렸다고 비방하였으며, 주님에 대해서는 오히려 금식하지 않는다고 책잡았다.
이러한 자들은 모순 속에 사는 자들로서 자기 논리를 스스로 어기고 변덕을 부리는 자들이다. 이제 이러한 자들이 갖는 특성을 살펴봄으로써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그들은 변덕 자들이다.
주님께서는 자신들을 공격하는 바리새인들의 공격에 대하여 시장에서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셨다. 결혼식 놀이를 하기 위해 피리를 불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고, 장례식 놀이를 하기 위하여 곡을 하여도 가슴 아파하지 않는 무감각한 아이들을 주님은 예로 들으셨다.
이러한 주님의 비유는 모순에 빠져 자기 독선만을 고집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이야기가 전혀 무의미하게 들리는 것임을 꼬집었다.
돌같이 굳어진 이들의 심령은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을 미쳤다고 하여 회개하기를 거절하였고, 천국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복음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책잡고자 오히려 반박하였다.
그러므로 진리의 교회를 향한 변덕은 자기 스스로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성과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불 신앙자 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2) 그들은 오해한다.
자기들의 주장만 옳다고 여기는 고집쟁이의 공격에 대하여 세례 요한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도 만족한 답을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비뚤어진 그들의 마음은 진리 자체가 그들에게 나타났음에도 여전히 오해만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와 같이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자들은 오늘날 우리들 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며 사물을 바로 인식하는 데에 장애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오해로 인하여 분쟁을 발생하고야 만다.
오늘의 사회 속에는 이러한 생각을 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서 진리와 순수함은 오해되고 왜곡된다. 때문에 진리를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불공평한 원망들은 더 많아지며 부당한 처우를 받기가 쉽다.
흔히 사람들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중대한 사건이나 사실에 대하여 말하지 못한다하여 '비겁자'라고 쉽게 단정하며 '겁이 많아서 감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못한다'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반면에 죽음을 각오하고 진리를 담대히 말할 때에는 '이름을 내세우고 싶어서 인기발언을 한다'고 곡해한다.
이들은 급한 판단으로 인하여 진리를 진리 되지 못하게 하고 사실을 올바로 인식 하기보다는 섣부른 오판을 자주하여 그 스스로 곤경에 처한다.
(3) 진실을 미워한다.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됨을 입은 성도는 죄를 미워하고 진실을 사랑한다. 다른 사람들보다도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은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그 부패성을 깊이 인식한다. 이들은 또한 세상의 구원이란 하나님의 유일한 사랑 속에 있음을 알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복음에 대하여 적극적이며 열심을 내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실천을 나타내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변덕을 부리는 자들은 이러한 적극적이고 진실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난하고 헐뜯는다. 교활한 위선자나 미치광이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귀신에 들렸다고 말한다.
(4) 그들은 잘못된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세례 요한과 주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치 않았다. 오히려 합리화하기 위하여 모순된 논리를 가지고 공격을 하였다. 이는 저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가지고 비난의 근거를 찾은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참된 가치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먹고 마시는 것을 문제 삼아 가치관을 판단하는 자들이라면 이는 매우 작은 일을 가지고 큰 것을 견주어 보는 일이고 부수적인 것으로서 본질을 논하는 어리석은 행위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세례 요한과 주님을 공격하는 자들의 비난은 비난 자체를 위한 비난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들은 세례 요한이 금식한다고 비난했었으면서도 주님에게도 금식하지 아니한다고 비난하여 그들 스스로 이중적 가치관, 괴리된 판단기준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놓고야 말았다.
결국은 자신들의 위선을 자기 스스로 드러내 놓은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사물과 사건을 판단하는 기준이 올바르게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곧은 하나의 바른 기준을 갖지 못한 채 상황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식으로 가치 기준을 마구 바꾸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이 될 수가 없다.
주님께서 자기를 공격하여 오는 자들을 강력히 책망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잘못된 이중 가치관을 자신에 대하여는 관대하나 다른 이에 대하여는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 버리는 무서운 독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