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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를 건국한 해모수시대 전후의 세계역사에서 주요인물에 대하여 글을 올리옵니다.
역사는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후 주나라가 진시황제의 아버지인 진(秦)나라 장양왕에게 서주가 BC 256년에 멸하고 난 후 동주가 BC 249년에 멸하고 난 10년 후 단군조선 마지막 47대는 진시황제에게 BC 239년에 일부가 멸하고 백악산의 아사달로 돌아갔다. 그러나 같은 해 BC 239년에 북부여를 일으킨 해모수에게 넘어갔다. 그 다음해인 BC 238년에 단군의 47대 마지막 고열가단군은 백악산에 신선이 되었다. 즉 별세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북부여가 일어나는 역사의 흐름이다.
왕명으로 편찬한 삼국사기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삼국시대의 고구려의 역사가 나올려면은 반드시 북부여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북부여의 역사가 말살되었다. 또한 북부여의 역사가 나올려면은 반드시 단군조선의 47대까지의 역사가 나와야 한다.
현재 제가 이러한 단군과 북부여의 역사가 실지로 있었던 것을 밝혀보고자 발간을 앞두고 있는 것 중에서 세계역사의 흐름에서 아주 주요한 북부여의 역사가 있어서 일부분만 먼저 올리옵니다.
여러분의 지적과 더 좋은 북부여의 역사를 올려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현재 설민석 대역사가(大歷史家)께서 훌륭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즉 왜곡된 역사를 바로 밝히고 나라를 위하여 진정 우리의 위대한 얼이 깃든 홍익역사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리옵니다.
그러나 가슴아파 하는 것은 현재 북부여의 역사를 완전히 없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고주몽을 단군에서 이어온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재정립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위대한 삼국의 시조를 양계장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해모수와 고주몽과의 나이차이가 무려 181년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
그러면 단군의 아들이라면 나이가 더 많이 차이가 난다.
곧 알에서 태어났다는 등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이러한 삼국사기의 잘못을 뛰어넘어야 하며 아울러 식민사관의 역사왜곡을 뛰어넘어야 만이 우리나라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북부여의 역사가 정립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하면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역사도 올바르게 정립이 되며 나아가 단군의 역사도 정립이 된다고 봅니다.
설민석 대역사가(大歷史家)께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아래에 제가 정리하고 있는 북부여의 역사를 읽어보시고 지적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약에 개헌을 하면 복희씨와 홍익역사를 먼저 알아라> 전자책이 발간이 다 된다면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 지적을 하여 바로 잡아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아울려 진정한 실록의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재정립하여 사실의 역사인 실록의 역사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다시 강의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역사는 실록의 이야기를 할 때는 많은 사람을 좋은 얼(슬기가 있는 정신)로 만들지만 왜곡된 역사를 말하면 많은 사람들을 얼간이(정신을 빼앗긴 자)로 만든다고 봅니다.
설민석 대역사가께서 위대한 우리의 단군역사와 북부여의 역사를 재정립하여 강의를 다시한번 더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립니다.
북부여기(北夫餘紀)는 고려 말의 공민왕 때 학자인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지은 것이다.
삼국사기와 국사책에서는 알에서 태어난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연대는 BC 37년으로 되어 있으나 이를 기준으로 삼을 수가 없다.
실상 고구려의 건국연대는 북부여의 마지막 6대 고무서 단제(단군=임금)가 아들이 없어 별세하자 그의 유명으로 고주몽에게 BC 58년에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고주몽의 탄생은 BC 79년 5월 5일이다.
이 북부여기는 바로 고구려(高句麗)의 전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시조 해모수(解慕潄)로부터 6대 고무서(高無胥)단군(단제=임금)까지의 182년간의 역사가 바로 북부여의 역사다.
중간에 북부여 5대로 잠시 재위한 해부루 단제(단군=임금)는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즉 한나라 군사를 물리치기 위해 세상을 구할 뜻을 BC 108년에 세워 졸본에서 나라를 일읕킨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는 한나라를 물리쳤다. 이에 해부루는 고두먁=동명왕=동명단제에게 북부여의 5대 단제(단군=임금)로 넘어갔다.
그 후 해부루는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동부여(東夫餘)]로 옮겼으나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가 분릉에서 북부여를 계속 이어가자 해부루를 제후로 삼고 모든 권한은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 후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가 별세하자 그의 아들 즉 태자인 북부여의 마지막 6대 고무서단제=단군=임금이 이어가다가 BC 58년 10월에 아들없이 별세하여 고주몽에게 나라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북부여의 역사이다.
곧 고구려의 고주몽은 북부여의 마지막 6대를 이어서 고구려 나라를 BC 58년 10월에 건국하게 되었다. 이것이 진정 북부여의 역사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이러한 세계역사에서 아주 주요한 시대를 차지하고 있는 북부여의 역사가 없다. 또한 단군의 역사도 없다. 그리고 북부여를 BC 239년에 건국한 위대한 해모수와 BC 58년에 건국한 고주몽과의 차이는 181년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
고로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 될 수가 없고 또 죽은 해모수가 어떻게 유화와 정을 통해 알에서 고주몽이 태어났다는 것은 너무나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역사를 만들었다. 이는 역사를 모독하는 것이며 역사를 농락하는 처사로 그 역사의 큰범죄를 물어야 한다. 라고 봅니다. 왜놈이 왜곡을 했다면 왜놈을 영구히 그 역사의 대범죄를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삼국사기의 잘못이 결국에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와 그 후 동국통감까지 그리고 현재까지 그 해독이 너무나 크다. 이제는 우리의 위대한 조상이 만든 얼을 찾아서 빛내야 하는 일이 남아있다고 봅니다.
즉 삼국사기에서 고주몽의 왜곡은 삼국유사에서는 고주몽을 단군의 아들로 기록을 하였으며 제왕운기는 삼국사기 그대로 고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요 어머니는 유화라고 기록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서는 고주몽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기록하고 삼국유사에서는 고주몽을 동명왕(東明王)이라 하고 제왕운기에서는 동명(東明)이라고 기록을 하게 만들었다. 삼국사기는 북부여의 역사를 언급도 못하면서 황당무계하게 역사를 모독과 농락을 하였다.
아아 이 해독을 반드시 풀어야 한다. 아아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바로세워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는 그래도 자랑스러운 것은 북부여, 번한조선(위만이 번한조선을 찬탈하여 위만조선을 말함) 단군, 한웅=환웅, 한인=환인, 복희씨, 염제신농씨외에 대하여 문구를 기록하였다는 것은 자랑스럽다고 봅니다.
역사가 왜곡되어있다는 것은 곧 온 백성의 얼이 얼간이로 만드는 것이라고 봅니다.
곧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그 나라는 번창할 수가 없다 결국에는 나라를 오래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곧 온 백성에게 단결과 효심의 역사와 희망과 용기의 역사와 도전정신의 역사를 잃게 만든다.
하루빨리 왜곡된 역사를 뛰어넘어서 우리의 참얼을 찾아서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관건(關鍵: 핵심이며 열쇠)이라고 봅니다.
아래에 북부여의 시조이신 해모수 재위시대와 그 외 북부여 단제(단군=임금)시대의 전후로 세계역사에서 주요한 인물에 대하여 올리옵니다.
북부여의 역사시대는 아주 중요한 인물과 사건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우리가 찾아야지 남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왜곡된 역사를 뛰어넘어봅시다.
□ 해모수단제(단군=임금) 재위 BC 239년~BC 194년 때와 그 외 북부여의 단제시대 전후의 세계역사에서 주요인물로는 다음과 같다.
➜ 이집트역사에서 사제 마네톤이 이집트사를 편찬한 BC 246년은 우리나라의 역사로 보면 마지막 제47대 고열가(高列加)단군시대이며 재위는 BC 295년~BC 238년까지이며 58년간 재위하였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이신 고열가(高列加=古列加=高烈加)단군께서는 BC 295년에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해모수가 북부여(北夫餘)를 BC 239년에 일으킨 그 다음해인 계해년(癸亥年)이며 BC 238년에 마침내 왕위를 버리고 단군조선의 삼한인 진한(辰韓)조선, 번한(番韓)조선, 마한(馬韓)조선 중에서 진한(辰韓)의 아사달(阿斯達)에 있는 백악산(白岳山)에 들어가셨다. 즉 단군조선의 마지막 47대 고열가단군은 목숨을 다하여 막을 내렸다.
➜ 2차 포에니전쟁은 BC 218년은 단군조선을 이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재위 22년이다.
카르타고 나라는 시칠리아 섬(이탈리아 남서쪽의 섬) 주변의 가장 부강하고 번영했던 BC 900년경의 아프리카 북쪽에 있었던 튀니지를 중심으로 한 나라가 바로 카르타고 라는 나라이다.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영웅이다. 역사는 한니발이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3차에서 결국 로마가 승리하게 되었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BC 264년에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싸움을 시작한 것이 바로 제1차 포에니 전쟁이다.(BC 264년은 단군조선의 마지막 47대 고열가(高列加) 재위 32년이다)
➜ 여불위(呂不韋) 자살: BC 235년에 여불위 자살함.
➜ 항우(項羽): BC 232년~BC 202년 초(楚)나라 무장 진(秦)나라 말엽의 무장.
항우는 초(楚)의 명문에서 태어남.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성명인 항적(項籍)보다 자로 즉 항우(項羽)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유방과 5년간 싸우다가 해하(垓下)에서 패하고 오강(烏江)에서 자살함.
해하(垓下)의 싸움은 BC 202년이며 한 고조가 한신(韓信)에게 명령하여 항우를 포위하고 무찔러 천하의 패권을 잡은 싸움이며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오강(烏江)으로 도망했으나 자살했음.
항우는 초(楚)나라가 망하기 11년 전에 태어났다.
20살에 키가 8척 즉 184cm 이상이 넘었다.
제(齊)나라의 땅을 평정하고 발해(渤海) 지방으로 진출하여 파괴와 살육을 많이 했다.
정도를 잃은 항우는 진(秦)나라의 마지막 3세 황제 자영(子嬰)이 항복하였으나 그를 죽였음.
초(楚)나라 의제(義帝)를 양자강 상류에서 의제(義帝)를 살해하고 초패왕(楚覇王)이라고 하였음.
항우의 애첩(愛妾)은 우미인(虞美人)이며 애마(愛馬)의 이름은 추(騅)라고 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고사성어(故事成語)가 나오게 되었다.
항우는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며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에서 패한 것은 나의 죄가 아니다. 라고 했다.
➜ 우희(虞姬): 출생미상~BC 202년 진(秦)나라 말기 항우가 전쟁터에도 꼭 데리고 다녔던 사랑하는 여자. 일명 우미인(虞美人)이라고 한다.
한신(韓信)에 의해 해하(垓下)에서 항우(項羽)는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당하여 유명한 고사성어가 나왔다.
항우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으며 항우가 사랑하는 우희(虞姬)도 이때 죽었다.
우희가 죽어 피가 흘린 곳에 가련한 풀이 싹터서 그것이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이름지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 당시에 유명한 항우(項羽)의 즉흥시(卽興詩)에 대하여 즉 항우(項羽)가 전쟁터에 같이 데리고 다녔던 사랑하는 여인 우희(虞姬)의 답가(答歌)는 다음과 같다.
漢兵已畧地(한병이략지): 한나라 군사는 이미 초나라 땅을 빼앗았으며
四面楚歌聲(사면초가성): 사면이 초나라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데
大王意氣盡(대왕의기진): 대왕은 용맹과 기운을 잃었으니
賤妾何聊生(천첩하료생): 미천한 계집은 어이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리오.
➜ 여홍성(黎洪星)=창해역사(滄海力士)=창해군(滄海君)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潄) 때 역사(力士)이다. 이 시대에 장량(張良)=장자방(張子房)은 전통(田筒: 텁석부리)과 동쪽으로 여행을 하기로 하고 장량은 여행을 나서기 전에 자기의 가재(家財)를 대부분 처분해서 그것을 황금으로 바꾸어 창해군(滄海君) 즉 창해역사(滄海力士)를 찾아감. 이때에 창해역사는 진시황제의 암살 계획에 힘의 역사인 범발(范發)을 소개함.
➜ 장량(張良)=장자방(張子房)은 출생 미상~BC 168년 한(韓)나라의 재상 집안이며 전한(前漢)의 창업 공신이다. 성은 장(張) 이름은 량(良)이며 자는 자방(子房)이다. 곧 장자방(張子房)이라 한다.
장량은 시황제(始皇帝)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황석공(黃石公)에게 태공병서를 얻어 뒤에 한고조 유방을 도와 즉 한(漢)나라 창업 3걸인 소하(蕭何) 한신(韓信) 장량(張良)으로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또한 장량을 유후(留侯)라고 하였다.
유후(留侯)란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세우고 장량(張良)이 유현(留縣)에 봉읍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장량을 유후(留侯)라고 하였다. 이때 서불(徐市)=서복(徐福)=서시(徐市)는 장량(張良)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 서복(徐福)=서시(徐市)=서불(徐市): 진시황제 때의 사람이며 제(齊)나라 방사(方士)이다.
일본의 화가산현(和歌山縣)의 신궁시(新宮市)와 웅야시(熊野市)에도 각기 서복(徐福=徐市)의 무덤이 있다.(괴상한 일이다. 연구대상이다.))
➜ 진승(陳勝)=진섭(陳涉)은 출생미상~BC 208년 진(秦)나라 말의 농민반란의 지도자.(시황제가 BC 210년에 별세한 그 다음해에 왕이 됨.)
진(秦)나라 2세 황제 호해(胡亥) 1년에 오광(吳廣)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BC 209년에 왕이 되었으나 6개월 만에 패하여 죽음.
➜ 노관(盧綰)은 BC 247년~BC 194년 한나라 유방(劉邦)을 도운 장군.
한(漢)나라 고조(유방)와 동향인 노관은 고조가 패(沛)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함께 종군하여 장군이 됨. 그 후 장안후(長安侯)가 되었다가 고조가 연나라를 점령한 후 요동에 위치하고 있는 패수(浿水)를 경계로하여 연왕(燕王)이 되었다.
한고조 유방(劉邦)과 노관은 같은 고향에서 같은 날에 태어났다.
한신(韓信)이 죽는 것을 보고 흉노로 도망하였으나 1년 후에 죽었다.
기해년(己亥年)이며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 단제 재위 38년에 즉 BC 202년에 연나라의 노관(盧綰)이 다시금 요동의 옛 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浿水)로써 경계선을 삼았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에 패수(浿水)는 요동(遼東)의 요양(遼陽)과 험독(險瀆)에 있는 강이다.
➜ 위만(衛滿)은 연나라에서 망명하여 마지막 번한조선(番韓朝鮮: 위만이 찬탈하여 위만조선을 말하며 사마천 사기에서는 조선열전에 진번조선을 말함) 즉 기자조선(奇子朝鮮: 발해=대진국의 나라 대조영의 명으로 만든 단군조선사 중 번한조선을 말함)을 강탈하였으나 번한 즉 발해 대조영의 명으로 만든 우리나라의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역사 중 기자조선(奇子朝鮮)=번한조선을 말하며 위만의 망명자를 받아들여 대우를 해주었으나 도리어 번한조선을 즉 기자조선(奇子朝鮮)을 강탈하여 번한을 빼앗았다.
이때가 BC 194년이며 한고조 유방이 별세한 후 그 다음해다. 곧 위만이 번한조선을 찬탈한 이때는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도 별세하였다. 그 후 한나라 7대 한무제(효무제=이름이 유철)가 위만의 손자인 우거(右渠)를 BC 109년에 침략하여 BC 108년에 멸망시키고 번한 땅에 4군을 두려고 했으나
북부여(北夫餘)의 시조 해모수로부터 북부여의 5대 고두막(高豆莫) 즉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즉 동명단제(東明檀帝)가 곧 동명왕(東明王)이라 하였던 단제(단군=임금)께서 의병을 모집하여 이를 다시 물리쳤다. 곧 한나라를 물리치고 그 후 북부여의 4대 단제가 별세하므로 해서 5대로 해부루가 잠시이어갔으나 한나라를 물리친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의 위협으로 자리를 물려주었다.
➜ 한신(韓信): 출생미상~BC 196년 처음에는 항우의 장수였으나 인정받지 못하고 한 고조의 장수가 됨. 즉 소하(蕭何)의 추천으로 한(漢)나라 창업 명장이다.
소하(蕭何) 장량(張良)과 더불어 한(漢)나라 창업 삼절의 하나이다.
후에 반신(叛臣)이라는 누명아래 유방이 나라 평정 후 죽였다.
한신(韓信)이 지휘하는 군대에 겹겹이 싸여 즉 해하(垓下)에서 항우는 사면초가(四面楚歌)를 당하여 유명한 고사성어가 나왔다.
그리고 진(秦)나라를 멸한 공신으로 초나라로 봉해진 한신(韓信)을 유방은 한신(韓信)의 세력이 자기한테 도전하지 않을까 의심하여 초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강등시켰다.
여기에 유명한 고사성어가 역사에 만들어졌다. 바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고조에게 반역하게 되어 결국에는 여후(유방의 부인)에게 장락궁(長樂宮)에서 죽었다.
➜ 소하(蕭何): 출생미상~BC 193년 유방의 한나라 창조의 제일 공신이며 천하평정 후 진(秦)의 법률을 기초로 하여 구장률(九章律)을 만들어 한(漢)의 안정을 꾀했음.
➜ 유방(劉邦) 사망: BC 195년에 한고조 유방 사망함. 한고조인 유방의 아들이 장량의 지혜로 전한 2대 혜제(惠帝)로 즉위함.
➜ 혜제(惠帝): BC 195년~BC 188년 재위함. 유방의 아들이며 여태후의 아들이며 한나라 2대왕으로 이름은 유영(劉盈)이다.
한나라 2대왕 유영은 천하제일의 지자(智者)인 장량(張良)의 계책으로 즉 당대의 현인 4명을 초빙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어 애첩인 척부인의 아들을 물리치고 여태후(呂太后)의 아들 유영(劉盈)이 한나라 제2대왕인 효혜제(孝惠帝)로 즉위함.
장량의 계책으로 초빙한 4명은 다음과 같다.
현인 4명은 모두 나이가 80여세이고 머리도 눈도 수염도 눈처럼 새하얗다.
그리고 훌륭한 의관을 걸쳤으며 그 태도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안니 것 같은 기품이 있었다.
유방(劉邦)이 거기 있는 네 노인들 이름을 말하시오 하였다.
저는 동원공(東園公)이라 하옵니다.
저는 사람들이 부르기를 염리(冉里)선생 또는 각리선생(角里先生)이라 하옵니다.
저는 기리계(綺里季)라 부르옵니다.
저는 하황공(夏黃公)이라 하옵니다.
이에 유방(劉邦)은 크게 놀랐다.
왜냐 유방이 천하를 잡은 뒤에 평판이 높음을 듣고 초빙하려고 했으나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현인(賢人)들이었다 것이다.
결국 유방은 그대들은 오래 오래 태자의 옆을 지키고 보좌하도록 하오. 라고 말했다.
이 순간 유방은 태자의 폐립을 단념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방은 애첩인 척부인을 불러서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어 여의(如意)를 태자로 세우려고 했소.
그러나 유영(劉盈)에게는 저 네 현인이 딸려있구려 이젠 깃과 날개가 돋아 버렸으니
이제 와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일이오. 단념하오. 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역사는 한고조 유방의 아들이 즉 여태후의 아들이 한나라 2대로 이어갔다.
➜ 카르타고와 로마는 BC 264년에 지중해의 지배권을 놓고 싸움을 시작한 것이 바로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다.
BC 183년 이때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이 운명한 역사는 진시황제가 타계한 후의 역사이며 즉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를 지나서 2대 모수리(慕漱離) 재위 12년 시대의 역사의 이야기이다.
곧 BC 202년 가을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의 싸움이 벌어졌다. 이 결과는 한니발 군사들이 패배했다.
한니발은 여러 나라를 떠돌다 비티니아에 머물게 되었는데 비티니아 국왕은 위협을 느껴 한니발이 숨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 로마군들이 비티니아에 찾아와서 한니발을 포위하자 미리 준비해 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가 BC 183년이며 64세였다. 역사는 포에니전쟁에서 한니발이 용감하게 싸웠으나 결국에는 로마군에 패배하였다.
➜ 3차 포에니전쟁이 BC 149년 시작하여 BC 146년에 끝났다. (BC 149년은 북부여 3대 고해사단제 재위 21년이며 BC 146년은 고해사단제 재위 24년이다.)
➜ BC 179년~BC 122 여년에 한고조인 유방(劉邦)의 손자인 유안(劉安)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의 책 속에 인간훈(人間訓)편에서 나오는 인간만사새옹지마(人間萬事塞翁之馬)란 말을 편찬하였다.
➜ 북부여의 4대 고우루=해우루단제 때는 한무제의 군사를 BC 108년에 물리친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의 역사가 바로 북부여에서 주요한 역사다.
➜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 시대에 무제(武帝)사망: BC 87년에 무제 사망하고 태자 불릉(弗陵)이 뒤를 이음 즉 전한(前漢)나라 8대 소제(昭帝)가 됨.
➜ 사마천(司馬遷) 죽음: BC 86년이다.
➜ 클레오파트라: BC 69년~BC 30년 이집트 여왕이 활약하던 시대이다.
➜ BC 59년에 로마의 카이사르의 전성시대이며 BC 44년에 카이사르는 피살되었다.
곧 북부여의 역사가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찾이하고 있다. 이러한 위대한 북부여의 역사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를 왕명으로 편찬한 삼국사기에서는 해모수를 황당무계하게 죽은 해모수를 유화와 정을 통해 알에서 고주몽을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해놓았다.
또한 해모수의 역사가 나올려면은 반드시 단군조선의 역사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단군과 북부여의 역사가 없다. 물론 삼국사기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고 단 알에서 태어났다는 등 단군과 북부여의 역사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는 무거운 역사의 죄를 지었다고 봅니다. 나머지는 훌륭한 문화업적을 남겼다고 봅니다.
이제는 왜곡의 역사를 뛰어넘어 조상이 일꾼 우리의 위대한 얼을 빛내야한다.
그것은 홍익인간의 얼, 홍복(弘福)의 얼, 빛나는 문화유산의 얼, 유구한 역사의 얼, 맵씨의 얼, 인내심이 강한 얼, 한웅시대에 천부경의 얼, 한웅시대에 복희씨의 체와 용의 얼,(이집트역사로는 BC 3500년에 시간과 달력을 사용하던 시대) 한웅시대에 염제신농씨의 의약의 얼,(이집트역사로는 BC 3200년에 문자를 만든 시대) 한웅시대에 치우천왕의 윷놀이의 얼,(이집트역사로는 BC 2650년에 피라미드를 만든 시대) 단군왕검의 헌짚신도 짝이있다는 단군팔조교의 얼, 2대 부루단군의 삼년상의 얼, 3대 가륵단군의 가륵조서의 얼, 단군의 역사를 이은 북부여의 해모수의 얼, 북부여시대에 한무제의 군사를 물리친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의 얼, 북부여의 마지막을 이은 고구려의 고주몽의 얼, 수나라를 물리친 을지문덕의 얼, 당나라를 물리친 양만춘의 얼, 고구려를 이은 후고구려를 세운 대중상의 얼,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세운 대진국=발해의 얼, 남북국시대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왕건의 얼, 고려시대에 거란=요나라를 물리친 강감찬의 얼, 백성의 애한을 위한 세종대왕의 한글의 얼, 임진전쟁(임진왜란)을 물리친 이순신의 얼, 조선침탈의 원흉을 물리친 안중근의사의 얼, 숭고한 정신을 가진 호국불교의 사명당의 얼, 나라독립을 위한 항일운동의 얼, 여성으로서의 나라독립을 위한 유관순의 얼, 자식을 위하는 얼, 애국심의 얼, 문자가 있는 얼, 설날과 추석이 있는 얼, 내리사랑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얼, 홍익역사가 있는 얼, 조상의 훌륭한 정신을 기리는 제사가 있는 얼, 힘든일도 나누는 품앗이의 얼, 나라를 부흥시키는 단군세기와 북부여의 얼, 온 사방을 걱정해주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얼, 효심과 단결이 있는 얼, 천지와 동락하는 신명나는 얼 등을 찾아서 화랑도(花郞道)와 여랑도(女娘道)들에게 가르치는 일이 남아있다고 보는 바(所=事)입니다.
역사란 과거의 선악을 기억하게 하여 교훈과 방책과 정확한 판단을 배우는데 있다.
역사란 좋은 역사 뼈아픈 역사가 뒤엉켜있다. 단 뼈아픈 역사를 연구하면 더 좋은 방책을 우리에게 준다. 그리고 조상의 훌륭한 업적을 배우게 되면 나라가 일어선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역사다. 그리고 이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최고의 방책이다.
역사란? 알면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방책을 세울 수 있다. 역사를 모르면 모르는 만큼 보인다. 곧 역사를 모르면 국제정세에 밀리게 되며 나아가 남의 역사에 매달려야 한다.
나라는 역사가 왜곡되고 꼬이면 온 백성을 얼간이로 만들고 정신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또한 방책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곧 역사가 바로서지 못하면 세계무대에서 올바른 주장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를 짊어지고 갈 화랑도와 여랑도의 길을 다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곧 나라는 역사가 정립이 않되면 나라를 번창하게 할 수가 없고 오래 유지할 수가 없다. 사업은 기술과 학문이 없으면 번창할 수가 없다.
2차세계대전이 조금만 더 길어졌다면 일본 만행천황은 더 추악한 역사 왜곡과 추악한 만행을 더 많이 저질렀을 것이다.
우리의 지혜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워봅시다.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찾아봅시다.
곧 역사 속에는 만 가지 대안, 대책과 방책이 들어있다. 단 역사를 알 때에 그 방책을 세울 수가 있다. 단 역사를 모르면 내 역사는 비참하게 되며 나아가 백성은 구렁텅이에서 해어나지를 못하는 것이다. 즉 유학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역사의 중요성을 모르면 남의 나라에 당하는 것이다.
역사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목적은 미래를 열기위하여 방안, 대안, 방책을 세우는데 있다.
여러분의 슬기를 서로 뫃아봅시다. 우리의 참얼을 찾아서 후손에게 물려주는데 서로 힘을 뫃아봅시다.
삼국사기의 잘못된 것을 밝혀서 즉 삼국사기에서는 단군역사와 북부여역사를 기록도 못하면서 어떻게 고주몽을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기록해놓았다. 이 왜곡한 역사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봅니다. 즉 동명성왕은 북부여에서 기록하기를 BC 109년에 번한조선을 찬탈한 위만이 그 후 그의 손자 우거왕이 다스리던 중 전한의 한무제의 군사가 침략하여 BC 108년에 멸망시켰다. 그리고 북부여를 또 침략하자 이때는 북부여 4대 단제(단군=임금)시대이다. 이때에 졸본에서 북부여의 쇠약함을 보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뜻을 세워 졸본에서 일으킨 사람이 바로 고두막=동명왕=동명단제 라고 하고 스스로 동명왕 이라고 한 분이 바로 고두막이며 또는 동명왕 또는 동명단제라고 한분이다. 이분이 한무제군사를 물리쳐 나라를 구한 분이다.
이 위대한 분이 바로 동명왕이다. 즉 한무제 군사가 칠략할 때는 북부여 4대 고우루(高于婁)단제(단군=임금)시대이다. 고우루 단제가 별세하자 그의 동생 해부루(解夫婁)가 잠시 북부여 5대 단제로 이어갔으나 고두막(高豆莫)=동명왕(東明王)=동명단제(東明檀帝)가 한나라를 물리친 위력으로 위협하여 해부루는 동명왕에게 물려주었다. 이러한 역사가 북부여기에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서는 북부여의 역사를 쓰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고주몽을 말도 않되는 재위연도도 틀리고 나이차이도 맞지않고 이러한 황당무계하게 삼국사기로는 이미 죽은 해모수와 유화와 정을 통해 알에서 낳았다고 한 고주몽을 동명성왕으로 기록을 해놓아 그 후대까지 또 현재까지도 그 해독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황당무계한 왜곡의 역사를 뛰어넘어서 우리의 올바른 역사를 찾아야한다고 봅니다.
대역사가 설민석님께 미래를 위하여 단군의 역사와 북부여의 역사를 올바르게 재정립하여 다시한번 더 강의를 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을 드리옵니다.
상기의 글은 <만약에 개헌을 하면 복희씨와 홍익역사를 먼저 알아라>에서 나오는 일부의 글입니다. 곧 발간을 하는데 마무리에 온힘을 쏟아보겠습니다.
桓紀 9214년 神市開天=雄紀 5915년 檀紀 4350년 丁酉年(정유년) 西紀 2017년
2월 13일 월요일 (음력 1월 17일)
천지인방연구소(天地人龐硏究所) 삼라만상을 좋아하는 心操彿山(심조불산) 庸史(용사)
* 나머지 자료와 참고문헌은 제 블로그(자료실 또는 홍보실) 첫 글인
천지인(天地人)방으로 http://blog.naver.com/hhs0203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