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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아주 보통의 작별
출처 조선일보 :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03/23/GEYOT7AWH5BYLEZZWYCQQM6464/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죽음은 꼭 절망이며 어둠일까. 김영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에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한적한 곳에 문을 잠그고 홀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게 온전히 하루를 보내면 불안한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감각이 생기는데, 그 느낌이 자기 삶의 단단한 기반이라는 것이다. 죽음이 이토록 명징한 것이라면 태어남과 동시에 우리는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회복 불가능한 불치의 병에 걸려 긴 고통을 그만 멈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조력 사망이 가능한 스위스의 한 단체로 향하는 여정을 지켜봤다. 영상에 달린 수많은 댓글 속, 다양한 의견과 가슴 아픈 사연을 읽으며 나는 국회에서 여전히 계류 중인 ‘조력존엄사법’이 초고령화 시대에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중대 이슈라는 걸 깨달았다.
오래전, 항암 치료로 피골이 상접해 움직이는 엑스레이 사진처럼 보이던 한 선배가 오른쪽 손에 마비가 올 수 있는 위험에도 발작을 멈추기 위해 수술을 시도하는 걸 지켜봤었다. 가족의 만류에도 발작을 멈춰야 왼손으로라도 다시 글을 써 볼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 정체성의 핵심은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가와 깊이 연관돼 있다. 단 한 달의 시간을 얻는다 해도 수술을 감행하는 사람이 있고, 항암으로 일 년을 더 살 수 있다 해도 종일 토하고 혼미해진 정신으로 누워있어야 하는 부작용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삶은 결국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이때의 선택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걸 오롯이 감당해내는 것이다.
스위스에 도착해 활기차진 한 환자가 다시 생각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가족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마침내 고통을 멈추고 죽을 수 있다는 희망에 살맛이 나는 역설을 상상할 수 있겠냐고. 극심한 통증을 연장시키는 선택과 소중한 생명을 단축시키는 선택 중 어느 쪽이 더 두려운가. 정답은 없다. 다만 그 어느 순간에도 핵심은 좋은 죽음이 아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백영옥 소설가
빛명상
행복마에스트로 봉숭아꽃 연정(1-4)
봉숭아 꽃 연정 1 : https://cafe.daum.net/webucs/DJ17/106
봉숭아 꽃 연정 2 : https://cafe.daum.net/webucs/DJ17/107
봉숭아 꽃 연정 3 : https://cafe.daum.net/webucs/DJ17/108
봉숭아 꽃 연정 4 : https://cafe.daum.net/webucs/DJ17/109
봉숭아 꽃 필 무렵
나 또한 우주 마음의 깊은 뜻을 속속들이 다 헤아릴 수는 없다. 다만 아무리 빛VIIT이라 해도 자연 질서에 어긋날 때 혹은 약속된 천명을 다하였을 때에는 도리어 그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우기숙이란 한 여인이 생각난다. 천명을 다하고 깨끗이 이 세상을 떠난 여인······.
하루는 전에 다니던 호텔의 회장님이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등산을 갔는데 말이오, 거기서 한 여자를 봤어요. 얼굴이 상당히 예쁜 여자였는데 등산을 와서도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더란 말이오. 좋은 데 와서 맑은 공기 마시면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라니 이상하지 않소? 그래, 수작이랄 건 없지만 예쁘기도 해서 내가 말을 붙여 봤지요. 여기까지 와서 왜 잔뜩 얼굴이 찌푸려졌냐고. 대답을 안 합디다. 헌데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이 한다는 말이 날을 받아놨다는 거라······."
암으로 시한부선고를 받은 여자라고 했다. 모든 치료가 허사로 끝나고 이제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상태라는 것이다.
"얘기를 들어 보니 참 안됐습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데 그때 정 이사 생각이 퍼뜩 나더구만. 그래 내가 정 이사 이야기를 그 여자한테 했어요. 한번 만나보라고 말이오. 그러겠다고 했으니까 조만간 한번 올 거요."
며칠 뒤에 그 여자가 남편과 함께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우기숙이라고 합니다. 회장님 말씀 듣고 왔어요."
그녀의 모습에 내심 깜짝 놀랐다.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안색만 약간 푸석했을 뿐 밝은 모습이었고 목소리도 무척 쾌활했다. 그 때문인지 병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이상했다.
'유방암이다.'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빛VIIT선생님, 제가 무슨 병인지 아시지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말씀드리기가 한결 편하겠네요. 한 번 만져 보시겠어요?"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확실히 내게 전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서 어떻게 여인네의 가슴을 만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초면이고 옆에는 남편까지 있었다.
"됐습니다. 만져 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 사람 가슴은 가슴이 아닙니다. 돌입니다, 돌. 얼마나 딱딱한지 모릅니다. 이 사람 말로는 감각도 없다고 하는군요."
남편이 얘기하는 동안 그녀는 꼭 남의 얘기를 듣는 것처럼 조용히 웃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물론 손을 놨겠고··· 그래, 지금은 어떤 상태입니까?"
"암세포가 전신으로 퍼져서 말 그대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죠. 저 사람 보십시오. 지금 장갑을 끼고 있지만 팔목이 부어서 옷도 못 걷어 올립니다. 다리도 마찬가지죠. 항암제 때문에 모자를 벗으면 머리카락 한 올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 때문인지 남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통증이 심하시죠?"
"예, 다른 사람들은 참을 만하다고 그러는데 저는 좀 힘이 드네요. 마치 면도날로 피부를 싸악싸악 베어내는 것 같아요. 굵은 대못이 쾅쾅 박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예전에는 진통제를 맞으면 그래도 좀 덜했는데 요즘은 그것도 별로 소용이 없네요. 갈수록 진통제 주사를 늘려 보지만 통증이 줄어들지는 않아요. 하도 진통제를 많이 맞아서 이젠 주사를 꽂을 데도 없어요. 그래서 요즘엔 이마에 주사 바늘을 꽂는 답니다. 우습죠?"
그녀는 통증의 기억이 살아나는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입가에는 여전히 엷은 미소가 머물고 있었다.
그런 심한 고통과 죽음의 절망 속에서도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니······. 또렷하고 맑은 목소리, 밝은 표정, 그리고 남을 배려하려는 듯한 편안한 분위기······. 그런 그녀에 대한 나의 느낌은 차라리 감동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느낌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고통스러운 건 식구들 고생이에요. 아이만 해도 밤새 제 간호를 하면서 몸부림을 받아 주는데 그 고통도 저만 못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고 매일 누워 있으니 아이들 꼴도 말이 아니구요. 다섯 살짜리하고 세 살짜리 애들이 있는데, 벌써부터 애들 얼굴에 그늘이 져요. 사실은 그게 제일 힘들죠. 아내 잘못 만나고 엄마 잘못 만나 고생들이 말이 아니에요."
그녀는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환자보다 더 까실해 보이는 남편 모습을 보자니 말할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쏴하게 밀려왔다.
"제가 여기에 온 건 살려 달라고 온 게 아니에요. 이 지경이 돼서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어요. 다만 고통이나 좀 덜 수 있을까 해서 온 겁니다."
그녀가 말을 하는 중에도 나는 대답 없는 우주의 마음에 매달리고 있었다. 꼭 여인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빛VIIT은 아주머니의 명이 남아 있으면 원래대로 건강하게 해 줄 것이고, 명이 다했으면 최소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홀가분하게 빛VIIT의 세계로 갈 수 있는 마음이 될 때까지 시간을 연장해 줄 겁니다.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뿐이군요. 여하튼 인명은 재천입니다. 편하게 생각하시고 일단 빛VIIT을 받으세요."
인명은 재천이다. 이 말은 내가 살릴 자신이 없는 사람 앞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그 말을 해야 하는 나의 마음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빛VIIT을 주면서 다시 한번 우주의 마음에 간청했다. 마치 고집을 피우는 아이처럼 우주의 대답을 기다렸다.
"통증은 확실히 덜할 겁니다."
통증을 덜어 달라고 한 그녀의 말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얘기해줄 수 있었다. 때를 쓴 때문인지 빛VIIT을 주는 중에 나의 손이 그녀의 가슴께에서 조금은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10시 경 그녀가 남편과 함께 다시 나를 찾아왔다. 원래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날 아침의 여인은 훨씬 생동감 있게 보였다. 나를 보자 입가에 깊은 주름을 패며 눈이 초승달이 되도록 아주 활짝 웃어 보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수선스러움은 없었지만 무언가에 상당히 들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녀 남편의 얼굴은 그녀보다 더했다. 나를 보자 흥분으로 잔뜩 커진 눈이 마치 커다란 자랑거리를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소년 같았다.
"어떻습니까? 간밤에 잘 지내셨습니까?"
"네, 아주 아주 잘 지냈어요. 오랜만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잤지요. 제가 간밤에 어땠는지 아세요? 통증은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마치 아프기 전일 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뒹굴면서 편하게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이것 좀 보세요. 팔목에 붓기가 하나도 없지요? 어제 빛VIIT을 받고 난 후부터 붓기가 싹 빠져 버렸어요. 그뿐인 줄 아세요? 이렇게 팔이 어깨 위로 올라가요. 예전에는 통증 때문에 이렇게도 들어 올리지 못했는데 말이에요. 식욕도 엄청 땡겨요. 잠도 잘 오구요. 어떻게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좋아질 수 있는 건지 신기해 죽겠어요."
그녀는 팔까지 들어 보이며 매우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 말고, 또 있잖아."
옆에서 남편이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아, 그렇지! 선생님, 제 가슴을 좀 만져 보세요."
내 방 안이었기 때문에 주위에 의식할 시선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만질 수가 없었다. 아무런 확신이 없기로는 처음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나의 마음은 비관적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만 하루 동안 아무런 느낌도 다가서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우주의 마음이 안 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 없이 최대한 시간을 연장해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 시간 동안 가족들과의 사랑을 하루라도 더 만끽하고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가슴 아프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말씀만 들어도 되겠죠."
나는 가슴을 만져 보라는 그녀의 말을 완곡하게 사양했다.
"그러면 만져 보시라고 할 게 아니라 당신이 가슴을 한 번 보여 드려요."
그래도 그냥은 넘어갈 수 없다는 듯 남편이 이렇게 거들고 나섰다.
"아, 그럴까요, 그럼?"
"아니 뭐 꼭 그러실 것까지······."
"괜찮아요. 의사 앞에서도 벗는데 뭐 어때요? 한 번 보세요."
나는 당황했지만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옷을 벗었다.
"보세요! 어젯밤부터 그 돌같이 딱딱하던 가슴이 이렇게 말랑말랑하게 풀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여기······."
그녀는 조금도 저어하는 빛이 없이 자신의 가슴을 위로 쓸어 올렸다.
"어쩐지 가슴이 시원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한 번 보니까 어젯밤부터 이렇게 고름이 나오고 있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녀는 가슴께 밑에서 거즈를 떼어냈다. 그러자 종기같이 두툼하게 부어오른 곳에서 노란 고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이건 나아간다는 징조 아닙니까? 이 사람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거죠? 통증도 없고 붓기도 빠졌어요. 잠도, 식욕도, 몸놀림도 다 좋아졌다는 거예요. 무엇보다 환부에서 저렇게 고름이 빠져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다 뭐겠습니까? 그렇죠. 빛VIIT선생님? 지금 저 사람 다시 살아나고 있는 중이죠?
남편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희망적인 것은요, 바로 제 느낌이에요. 지금까지는 어둡고 무겁고 칙칙하고 뭐 그런 분위기들만 끼쳐왔었거든요? 뭐랄까, 꼭 늪 속에 잠겨있는 그런 기분이었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느낌을 밝게 가질 수 없었어요. 그런데 어제 빛VIIT을 받은 이후론 그렇게 마음이 맑아질 수가 없는 거예요. 마치 잔잔한 호수를 보는 기분이었어요. 그러면서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 있죠? 이젠 어둠 같은 게 하나도 안 느껴져요. 사람이 살려면 느낌에서부터 변화가 온다고 하던데 아마 그런 건가 봐요. 이젠 살았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런가요? 제가 다시 살아나는 중인가요?"
그녀는 전날보다 많은 얘기를 했다. 아마도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생기자 흥분된 모양이다. 얘기를 하는 중에도 그녀는 계속 남편의 얼굴을 보며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간 혼란스러웠다. 통증이 가셨다는 건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말하는 다른 호전된 증세들은 분명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환부에서 고름이 빠져나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니 놀랍기까지 했다. 그건 누가 보아도 병이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주의 마음이 다시 돌아섰다는 얘긴가? 나는 잠시 정신을 모아 다시 한번 우주의 마음을 느껴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주의 마음은 여전히 무의 상태에 있었다.
'일 년만 넘기게 하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나는 이렇게 마음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죽음은 돌이킬 수 없는 예정 같았다. 다만 그녀의 증상이 호전되는 것은 연장된 시간만이라도 고통 없이 가족들 곁에 머물다가 깨끗한 몸으로 하늘에 들라는 우주 마음의 마지막 배려인 것 같았다.
"인명은 재천입니다. 이제 하늘의 뜻에 맡겨 보십시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소중한 일이기 때문에 난 그들 부부에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기분을 깨지 않기 위해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러나 인명은 재천인 것을······.
봉숭아꽃 필 무렵
"그런데 산청 어딘가에 조용히 빛VIIT명상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서요? 가서 빛VIIT도 받고 몸과 마음을 정화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거기가 정확히 어디쯤이에요? 저도 그곳에 가도 될까요?
빛VIIT을 받고 난 다음 그녀가 내게 물었다.
그녀가 말하는 곳은 바로 지리산 산청의 초광력전超光力殿이었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이 찾아와 몸도 마음도 쉬어 가는, 일종의 재충전 장소였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여인은 그 초광력전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별로 권하고 싶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 그녀의 몸으로는 무리일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녀에게 헛된 기대만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몸으로 거기까지는 안 오는 게 좋겠어요. 꼭 거기까지 올 필요 있겠어요? 이렇게 만나서 빛VIIT을 받아도 충분하잖아요."
"아이, 그래두요. 어떤 곳인지 한번 가보고 싶어요. 지금 같아선 얼마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쎄요. 그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어쨌든 지금은 몸 관리가 첫째니까요."
그러나 그들 부부는 쑥 향기 퍼지는 계절, 기어코 산청의 초광력전으로 찾아왔다.
"어머나, 이렇게 좋은 곳인지는 미처 몰랐어요. 산속이라 그런지 공기도 무척 맑네요. 올라오다 보니까 요 밑에 저수지가 있던데, 거기 고기가 많아요? 아이가 낚시를 무척 좋아하는데. 어머, 여보, 저기 다람쥐 좀 봐요. 귀엽기도 해라."
그녀는 마냥 들뜬 모습으로 산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면서 마치 소풍 나온 아이처럼 쉴 새 없이 묻고 말하고 하였다.
그즈음 들어 여인의 상태는 더욱 좋아지고 있었다. 통증은 훨씬 잦아들어 가끔 느끼는 정도였고, 가슴도 외형상 거의 정상을 회복하였다. 붓기도 모두 빠졌고, 다른 예후들도 아주 양호했다. 체중이 늘어 살까지 알맞게 오른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말기암 환자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나 자신도 깜짝 놀라 우주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부부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다. 서로 놀리기도 하고 땀을 닦아 주기도 하면서 웃고 떠드는 모습은 그대로 한 쌍의 원앙이었다. 위기는 한편으로 이 부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투병이라는 역경을 거치면서 그들 부부의 사랑은 더 단단해진 것이다.
하지만 저런 행복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내 마음은 더없이 착잡하기만 했다.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빛VIIT선생님, 여기 계셨어요?"
화단을 손질하며 심란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얼굴의 그늘을 지우며 웃는 낯으로 그녀를 대했다.
"왜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뇨, 그런게 아니고··· 이거 말예요."
그녀는 들고 있던 작은 봉지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게 뭐예요?"
"봉숭아에요."
"봉숭아?"
"예, 제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죠."
"그걸 뭐하게?"
"아이 참, 빛VIIT선생님도. 심을 거라니까요? 여기 화단에 심을 거예요."
그러더니 여인은 화단의 흙을 조심스럽게 골라 봉숭아 씨를 심기 시작했다.
그 꽃이 피는 것을 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이 여인이 나를 찾아온 지는 벌써 수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렇게 봉숭아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진정 그녀는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봉숭아를 좋아해요? 왜 봉숭아를 좋아하는데요?"
나는 그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같이 흙을 고르며 물었다.
"예쁘잖아요. 수수하게······. 하지만 사실 그보다는요, 마음이 예뻐서 더 좋아해요."
"마음이 예뻐요? 봉숭아도 마음이 있나?"
"그럼요. 자신이 스러지면서 남을 예쁜 빛깔로 물들어 주잖아요. 얼마나 큰 희생정신이에요? 짓이겨도 한마디 불평도 안 하고 말예요. 불평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아냐구요? 빛VIIT선생님은 봉숭아가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지 아세요? 계속 그 자리에서 씨를 터뜨리잖아요. 갈수록 더 많은 씨를 말예요. 그러면서 해마다 여름이면 더 많은 꽃으로 줄기차게 피어나죠. 불평이 있다면 그렇게 줄기차게 피어나겠어요? 그러면서 매년 자신을 희생해 계속 남을 예쁘게 물들여 주죠. 이게 얼마나 예쁜 마음이에요?"
"듣고 보니 정말 그렇기도 하네요."
그녀는 봉숭아 씨를 다 뿌리고도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화단의 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흐려 있었다.
"빛VIIT선생님, 저는 이 꽃을 볼 수 없겠죠?"
"······?"
"알아요. 제가 이 꽃이 필 때까지 살 수 없다는 걸요."
순간 나는 뭔가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랬구나. 겉으로는 희망에 부푼 척 했지만 속으로는 남몰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구나.
"그런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나의 말을 끊었다.
"됐어요. 아무 말씀도 하지 마세요. 지금은 그냥 이렇게 제가 씨를 뿌린 자리만 보고 있고 싶어요."
그리고 여인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4월의 끝 무렵에 그녀가 다시 산청을 찾아왔다. 이번엔 혼자였다. 그녀는 도착하면서 제일 먼저 화단을 찾았다. 한 달 전쯤 그녀가 뿌린 봉숭아 씨에서는 파릇하게 싹이 트고 있었다. 그녀는 그 여린 싹을 그윽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바가지에 물을 떠다 정성스럽게 뿌려 주었다. 조용조용한 몸놀림에는 부쩍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참 빠르죠? 바로 엊그제 씨를 뿌린 것 같은데 벌써 손가락만 하게 싹이 자랐어요."
나는 그녀의 기분도 풀어 줄 겸 다가가 말을 건넸다.
"그렇네요. 시간이 너무 빠르네요. 너무······."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봉숭아 싹을 쳐다보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요? 몸은 괜찮아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몸은 괜찮은 것 같은데 기분이 어두워져요. 자꾸 이상한 예감도 들고요.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가는가 봐요. 꽃이 부러워요. 얘들은 나보다 훨씬 나중의 세상도 볼 수 있겠죠?"
"언제부터 알았어요?"
"처음부터요. 다만 가족들과 평상의 행복을 느끼고 싶었어요. 그래서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만일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동안의 행복과 웃음은 가능하지 않았을 거예요. 어차피 한정된 시간인데 눈물과 한숨으로 보낼 필요는 없잖아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도 끝나가나 봐요."
"두려워요?"
"아뇨.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냥 좀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서 그러죠. 전 여자잖아요."
그녀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거듭 말하지만, 인명은 재천이에요. 사람이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유일하게 맘대로 못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에요. 살아간다는 말보다는 살아진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거예요. 어차피 맘대로 못할 거면 연연해하지 않는 것도 현명한 방법일지 몰라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 원망합니까?"
"아니에요. 빛VIIT선생님. 절대 그렇지 않아요. 지금까지 산 것만도 얼마나 감사한데요."
"시간의 문제일 뿐이지 사람은 누구나 죽어요. 남는 것은 순수한 마음뿐이에요. 사실 빛VIIT을 받는 이유는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아요. 그보다는 탐욕과 교만과 집착을 떨쳐버리고 본래의 빛VIIT마음을 되찾는 데에 있지요. 처음 아주머님께 빛VIIT을 드릴 때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쁘고 홀가분하게 육체를 벗어 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랬었지요. 바둥거린다고 백 년을 사는 사람은 없어요. 인간의 시각으로 보지 말고 부디 더 큰 우주의 차원에서 바라보기 바랍니다. 분명 빛VIIT의 세계는 있어요."
"알아요. 빛VIIT선생님 말씀······. 사실 빛VIIT을 받을수록 조금씩 그런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집착을 하나 둘씩 접을 수 있었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어요. 다만 지금 제 마음이 어두운 건 가족들 때문이에요. 나 때문에 가족들 당분간 힘들게 살까 봐, 그게 가슴 아파요."
"곧 정리될 거예요."
"그렇겠지요. 또 그래야 하구요. 사실 어제 남편하고도 그런 얘기를 했어요. 새 출발을 하라구요. 전에는 재혼하면 귀신이 되서라도 쫓아다닐 거라고 그랬는데······. 빛VIIT을 받고 일어난 변화예요. 그것도 집착이라는 걸 알게 된 거죠. 그이··· 좋은 여자 만났으면 좋겠어요. 정말 사랑했는데······. 좋은 여자 만나···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했던 거 다 보상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못했던 것까지··· 풍족하게 받고 살기를 빌어요, 그 여자를 한번 보고 싶네요. 우리 애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까요? 부디 우리 애들한테 좋은 엄마여야 할 텐데······."
끝내 그녀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내가 처음 본 그녀의 눈물이었다.
"산 사람은 어찌 살든 살게 마련이에요. 미련을 버리고 가요. 더 큰 빛VIIT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생각해요."
"울지 않아요. 이게 마지막 눈물이에요. 울지 않고 갈 거예요······."
그러면서도 여인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빛VIIT선생님, 이 은혜 다 못 갚고 가요."
"마음 편히 먹어요."
"어제 꿈을 꿨어요. 선생님 모습이 빛VIIT으로 보이더군요. 그러더니 그 빛VIIT의 일부가 내 곁으로 오는 거예요. 그때 알았어요. 이제 제 명이 다 됐다는 걸요. 그러더니 이렇게 금방이네요. 하지만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아니,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져요. 아, 지금은 밝은 불기둥이 느껴져요. 빛VIIT선생님이 말씀하신 빛VIIT의 마음이 무엇인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빛VIIT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전 이렇게 행복하게 죽지 못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 뵙자고 했어요."
여인의 얼굴이 그지없이 평화로웠다. 고마운 일이었다.
"마음이 그렇다니 정말 다행한 일이에요. 그래요, 인생이란 옷과 같은 거예요. 이제 곧 우주의 마음이 더 곱고 화사한 옷을 입혀 줄 겁니다."
"빛VIIT선생님···봉숭아···아직 피지 않았죠?"
"아직 때가 아니니까······."
"꽃이 꼭 보고 싶었는데······. 선생님···, 봉숭아꽃이 필 때면 제 생각해 주세요······."
"그러리다."
그녀의 말소리는 거친 호흡에 묻혀 자꾸 끊기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빛VIIT선생님!"
"여기 있어요."
"나는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홀가븐···해요······."
"그래요. 모두 털어버리고 가요. 우리 인간도 봉숭아와 같아요. 계속 피고 지지요. 하지만 봉숭아보다 나은 건 보다 좋은 세상에서 다시 피어난다는 거예요. 가서 봉숭아처럼 다시 피어나요."
한동안 그녀의 가쁜 숨소리만 들렸다.
"감사···했어요."
"그런말 하지 말아요."
"빛VIIT선생님··· 저··· 가요······."
"잘··· 가시오. 편안히······."
그리고 여인은 길을 떠났다.
그래도 그녀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빛VIIT의 세계를 알고 갔으니 말이다.
작년에도 피었던 봉숭아꽃이 금년에도 언제 돌 틈에서 자랐는지 예쁘게 잎사귀 끝마다 조롱조롱 피어 있다. 초광력전에 들어가 그녀의 이름 석 자 위에 촛불과 맑은 빛VIIT의 향을 피워 본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녀의 가족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디에 있든 언제고 행복하기를 빈다.
행복을 나눠주는 남자
초판 1쇄 발행 1996년 11월 25일
개정판 1쇄 발행 2009년 11월 30일 P. 186 ~203
첫댓글 감사합니다
빛을 아는 행복,
빛안에 있음이 감사합니다 .
빛과 함께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산청 초광력전에 피어있는 봉숭아를 보았을때 이런 가슴아린 이야기가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빛의 축복을 받았내요. 저도 나중에 끝이 왔을때 빛이 함께해 주시길 간절히 바래 봅니다. 감사합니다.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귀한문장 차분하게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운영진님 빛과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행복을 나눠주는 남자
봉숭아 꽃 필 무렵
우기숙님이야기
감사합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천명을 다하고 빛으로 간 여인 봉숭아 꽃연정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봉숭아 꽃 필 무렵 우기숙님은 빛을 알고 갔기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귀한 빛글 감사드립니다.
이생에서의 마지막 삶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마무리하고 떠난 여인의 봉숭아꽃 필무렵 빛이야기 감사합니다.
인명은 재천...
빛으로 떠난 우기숙님의 글 감사합니다.
봉숭아 꽃 필 무렵~
빛이야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봉숭아꽃 필 무렵이면 생각나는 그분. 빛 세상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귀한 빛글 감사드립니다. *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봉숭아꽃과 함께 그분의 영혼도 피어났겠죠. 감동적인 이야기 감사합니다.
감사마음드립니다.감사마음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봉숭아꽃 빛이야기 감사히 잘읽어습니다 ...(())...
감사합니다.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 죽음인가 생각해봅니다.
빛을 만나고 빛과 함께하며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마지막 순간 아주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빛의 세계로 가신
우기숙 회원님의 빛이야기 감동과 감사의 마음으로 담습니다.
빛과 함께하며 맑고 밝은 마음으로 행복한 삶을 살다가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빛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우주마음과 학회장님께 무한 감사와 공경의 마음을 올립니다.
2003년 첫빛만남을 돌아봅니다
저도
이 여인 못 지않은 수많은 사연
.
.
.
빛과함께
이렇게 행복 할 수 있어 감사올립니다
봉숭아꽃 필 무렵 마음에
새겨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빛VIIT을 만나고 빛VIIT으로 떠난 봉숭아꽃 연정의 주인공.....귀한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빛마음을 밝힙니다
가슴이 뭉클한 빛역사 이야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한번 더 생각해봅니다.
빛안에서 살아갈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마음을 가볍게 편안하게, 빛마음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빛역사 이야기 감동입니다.
빛과 함께 하는 최고의 행운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귀한 빛VIIT의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빛역사이야기 감사합니다.
귀한 빛 의 글 볼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빛을 알고 저 세상으로 간다는 거~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요~!
빛의 글 감사합니다.
마음이 뭉클해집니다. 빛이야기 감사합니다
눈물이 그렁거리는 내용입니다.
빛을 알고 떠나간 그분은 행복한 세상으로 가셨을거라 믿어집니다.
빛에 대한 귀하고 소중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눈물겨운 봉숭아꽃 연정 이야기~ 빛VIIT의 세계를 알고 떠난 봉숭아꽃을 사랑한 여인~ 지금은 빛VIIT의 세계에서 행복하시겠지요?! 귀한 사연 감사합니다~
소중한 빛이야기 감사합니다
복숭아꽃이 피면 그녀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래도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빛VIIT을 알고 갈 수 있어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