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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1)
고전 1: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18-25 / [능력과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할 사람들에게 얼마나 어리석게 들리는가를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19) 그래서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ㄱ) `내가 앞으로 계속 이 백성에게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일들을 하겠다. 그러면 이 백성 중에서 가장 슬기로운 이도 그 일을 깨닫지 못하며 총명한 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ㄱ. 70인역 사29:14) 20) 그러니 현명하다는 사람들, 학자, 이 세상의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 간다는 이론가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어리석은 자로 보시고 그들의 지혜를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간주하시지 않았습니까? 21) 이 세상이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경륜으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고 바보 같다고 말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22) 유대인들에게는 이 말이 어리석게만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포된 말씀이 진실이라면 그것을 증명할 수 있게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또한 다만 자기들의 철학으로 해석할 수 있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헬라인들에게도 이 말은 미련하게 들릴 것입니다. 23)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설교할 때면 유대인들은 기분이 상해 있고 이방인들은 모두 잠꼬대 같은 소리라고 합니다. 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가리지 않고 구원의 자리에 부르신 사람들의 눈을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야말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요 지혜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25) 비록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의 어떤 지혜로운 계획보다 훨씬 더 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이 매우 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은 어떤 인간보다도 훨씬 더 강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을 전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십자가의 도(18) 바울이 말의 지혜로 복음을 전하지 않은 이유를 밝힙니다. 십자가는 무자비한 형틀입니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리 지혜롭게 설명해도 십자가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끔찍한 형틀이 어떻게 구원을 주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고상한 도덕적 기준도, 보편적인 형제애도 아니며 오로지 십자가 자체였습니다. 한편, 멸망하는 것과 구원을 받는 것에서 동사의 시제가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기점으로 한 부류는 멸망으로, 한 부류는 구원으로 진행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가 갈라지는 기점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19-21) 바울은 19절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사 29:14). 요점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자나 변론가는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배운 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지혜를 거부하시고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십니다. 이에 스펄전은 “시각 장애인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하고 청각 장애인이 소리를 분별하지 못하듯 믿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 구원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라 설명했습니다(사 55:8-9).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22-25) 당시 유대인들은 출애굽과 같은 표적을 그리스도로부터 기대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 패배, 연약함이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런 연약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자기들에게 장애물이라고 여겼습니다. 한편 지혜를 추구한 헬라인에게는 십자가가 불합리한 어리석음이었을 뿐입니다. 로마의 정치가 시세로는 “십자가, 그것은 부끄럽고 잔혹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바울은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겼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를 만난 후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지금도 믿는 자는 그 능력과 지혜를 체험합니다.
적용: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도 영화관에서만 감동받고 생활과 무관하다면 나와 관계없는 영화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감동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알고 자신과 상관없이 살아간다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능력도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인생이 변화됩니다. 삶이 변화됩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삶의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 설 교 >
그대는 십자가에 가본 일이 있는가?
고전 1:18, 2:1-2 / 김우생목사
찬송가 136장은 '거기 너 있었는가'라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은 흑인 영가입니다. 이 찬송의 저자는 야곱과 라헬이라는 흑인 부부였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그들이 몹시 사랑하는 성경에 나오는 이 두 인물들의 이름을 따서 지었습니다. 야곱이라는 흑인은 준수한 체격에 튼튼한 모습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라헬은 참으로 아름다운 흑인 여인으로 서로 몹시 사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인 야곱이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가족은 헤어졌으며 노예생활은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감독들의 사나운 채찍아래 살아가지 않으며 안되는 고달픈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몹시 사랑하는 형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슬픔과 고달픔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씀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서 주님이 한 기도를 생각하며 그는 마치 자신이 십자가에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하면서 이러한 과정 속에서 찬송을 만들었습니다. 이 찬송은 은연중에 흑인들 가운데서 고통과 아픔 중에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내 주를 저들이 십자가에 못박을 때 거기 너 있었는가? 아 때때로 날 떨리게 만드네. 내 주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거기 너 있었는가? 아 때때로 날 떨리게 만드네. 저들이 주를 나무에 못 박을 때 거기 너 있었는가 ?" 저는 이 찬송을 생각하면 진정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마음속에 눈물을 짓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과 함께 다시 한번 갈보리 십자가가 있는 그곳을 찾아가 보고자 합니다. 그대는 십자가에 가본 적이 있는가 라는 이 질문을 가지고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갈보리라는 곳은 예수님에게 저주와 치욕과 고통의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에게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렸던 축복의 장소입니다. 이 갈보리는 인간이 악을 행한 곳이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나타내 보이는 곳이 바로 갈보리입니다. 그러한 인간을 향하여 최선을 행하신 곳이 바로 갈보리 십자가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습니다. 손과 발은 피가 흐르고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흘러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곳에 가 본적이 있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만을 알기로 작정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에 여러분은 와 보셨습니까?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것만 알기로 한 바로 이러한 사실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다시 한번 이 십자가에 와서 그 의미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Ⅰ.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아들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그의 생애의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38-39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여 아버지가 주신 자를 구원코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갈 것을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으며, 홀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제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가면 버림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 겟세마네와 갈보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포기치 않고 그 길을 가셨습니다. 가장 어려운 시간 가장 힘든 그곳에서 홀로 견디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고난, 수치, 희생이 따른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에게는 놀라운 구원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그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에게는 아무 값을 치르지 아니하여도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나와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죽기까지 복종하신 일로 인하여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지는 구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장 23절에서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내 야망 내 생각의 계획 내가 원하는 어떠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내 생애에 계획하신 것,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Ⅱ.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셨는가를 보게 된다.
갈보리의 십자가에 나오면 또 한가지의 놀라운 사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분이신가, 또한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구약의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지성소 (holy of holies)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시는 곳을 의미하며, 분리되어 휘장이 내려져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 보이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간격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자기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공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지성소로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그 피를 뿌리는데 하나님께서 그 피를 받아주시면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1년 동안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년에 또 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와서 대제사장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때 그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그 피를 힘입은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직접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은 속죄함을 받지 아니하고서는 그 죄가 가리워 지지 않습니다. 속죄함을 입는다는 구약의 의미는 죄를 덮는다는 의미입니다. 잠언 15장 26절과 6장 16-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본성이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그 앞에서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찬양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속죄함을 받지 아니하고는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까?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어떤 선행도 아니고 우리가 받은 의식이 아니고 우리가 하는 봉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보시기에 더러운 걸레와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해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지고 가셔서 단번에 영원히 속죄해 주셨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메시지의 중심이며 바울의 메시지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십자가에서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Ⅲ.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는 이렇게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라고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성경적인 의미의 친구는 누구입니까 ? 우리는 동년배 또는 가까이 지내는 어떤 사람들을 친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연령이 같아서라거나 또는 같은 성이기 때문에 친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친구라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알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죄를 다 아셨지만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는 세리와 창기의 친구가 되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들의 죄는 미워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3절에서 우리는 불순종의 아들이었으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에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이런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했으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것은 다 가진 것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Ⅳ. 용서를 본다.
누가복음 23:34절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더 본다면 십자가 앞에서 용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 1장 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도 구원을 받았으며, 살인자 사울도 구원을 받고 복음 전도자와 선교사 바울로 바뀌었습니다. 부정한 수가의 여인도 변화되어 수가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도록 쓰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는데, 이것은 바로 십자가의 역사였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 주는 자로 변화되었던 것은 십자가의 사건에서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십자가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번에 영원히 속죄함을 입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십자가에서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죤 뉴톤은 노예선의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추한 일들을 행한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후 마침내 그는 복음 전하는 전도인이 되었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명한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는 지옥에서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십자가에 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셨습니까? 이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으며,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까?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
고전 1:21-31 / 조용기목사
할렐루야~ 성령께서 이 자리에 함계 계십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서 퍽 비관적이고 부정적일 때가 많습니다. 자기가 너무 무력하고 무능력하며 못 나고 경쟁에 뒤쳐진 자라고 비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을 택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세상에 잘났다고 머리를 흔들어 가슴을 뻐기는 사람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못나고 형편없이 버림받은 사람이고 무능력하고 무력하다고 생각해서 낮아진 사람을 하나님은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성 프란시스(St. Francesco, 1182-1226)에게 한 사람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나타내시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만날 때 신선한 충격과 도전을 받고 생활에 변화를 경험하는데 그 비밀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선생님을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하게 사용을 하십니까?" 그러자 성 프란시스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느 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연약하고 가장 무지하며 미련한 사람을 찾았다가 성 프란시스를 찾았습니다. 하나님이 불꽃같은 눈동자가 내게 머물고,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내게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통해 나의 지혜로움과 나의 능력을 나타내리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비밀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력을 철저히 깨닫고 낮아진 사람들을 택하시고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무력과 무능력으로 인해 자기에 대해 비관적이고 부정적이 될 때가 많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무얼 하느냐. 나는 너무나 무능하고 교육도 없고 인물도 잘나지 못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인데 내가 뭘 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랑하고 높아지고 거만한 사람을 결코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탄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부름 받은 우리의 처지
우리 각 사람이 받은 처지를 성경은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내 처지를 한번 살펴보라.
내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이 택했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지혜가 많아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고 아이큐가 높아서 칭찬을 받고 하나님이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택해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아요? 가만히 자기를 생각해 보아도 바보 같습니다. 저는 50년 목회를 했지만 돌이켜 보면 바보 같아요. 왜 이 바보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택했을까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은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중에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게 지혜 없는 사람들을 주님께서 불러서 택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따라 능한 자가 많지 않습니다.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있지만 그러나 권력의 상층부에 앉아 권세를 휘두르며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 이 세상에 유능한 사람, 일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사랑하고 택한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무능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고 깨어지고 무릎을 꿇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택한 사람을 보면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습니다. 가문이 좋고, 온 사람들이 칭찬을 하는 그러한 사람을 하나님이 좋아해서 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문도 없고 문벌도 없고 초가삼간 쓰러져 가는 시골농부의 자녀들이라도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택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명성과 재물을 가진 가문에서 안 태어났다고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나는 쓰러져가는 판자촌에서 태어나서 교육을 잘 못 받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보는 척도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를 찾지 아니하고 육체를 따라 능력 많은 자를 찾지 아니하고 육체를 따라 문벌 좋은 자를 찾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야훼는 중심을 보느니라”
외모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교회당을 짓고 온 교회를 벽돌로 건축하고 아름다운 치장을 해놓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 이것 내집 삼겠다.” 들어오지 않습니다. 천막을 쳐도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면 그 자리에 하나님 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식과 의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니까 내가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옷을 입고 나가면 하나님이 나를 기쁘게 여기실 것이라. 아닙니다. 헐벗을지라도 중심이 깨어지고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름 받은 우리의 처지를 살펴보고 낙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복음 전파의 과정을 보면, 일반적으로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멀리하고, 가난하고 병 들고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 무척 애를 먹은 것은 잘 사는 동네에 가서 예수를 전하면 안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현재 돈, 지위, 명예, 권세, 쾌락에 취해 있어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귀뚱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게 가난하고 병들고 못나고 실직자로 빈손 든 사람들이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헐벗고 힘없고 못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외국 선교사들이 가져다주는 구호물자, 옷 보따리가 교회에 오면 잔치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날은 교회는 완전히 축제 분위기가 되어서 성도들은 제비를 뽑아서 물건을 나누어 가고 좋아하곤 했습니다. 또한 가난하고 무식하여 못 배운 사람들이 많아서 교회는 사람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공부를 시켜주는 "성경구락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요사이는 성경구락부가 교회에 없지만 옛날에는 교회 나오는 사람들의 자녀들이 너무 가난하기 때문에 대게 학교를 못 갔습니다. 그래서 성경구락부라는 것을 만들어서 그곳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51년 전 목회를 처음 시작했을 때도 저희 교회에 나온 성도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배우지 못하고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받는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로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나 문벌이 좋은 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내가 지혜롭지 못하고 문벌 좋지 못하다고 탄식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과 관계 없습니다.
저는 천막 교회 개척을 할 때 버스비가 없어서 대조동에서 서울시내 나올 때도 걸어서 나오고 돌아갈 때도 걸어서 돌아 갔습니다. 옷도 걱정할 것 없어요. 한 벌만 가지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대로 입습니다. 두벌 갈아입을 옷이 없었습니다. 내복도 한 벌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 다 자는 밤중에 빨래해서 말리지 사람이 있는 데는 빨래도 할 수 없었습니다. 뚫어진 천막에 가마니를 깔고 있었는데, 그래도 내가 하나 생각할 때 무엇이든지 있으면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좌우간 누가 나에게 무엇을 주시든지 빵을 주든지 쌀을 주든지 돈을 주시든지 무엇이든지 주면 그것을 떼서 십일조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었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 드리기를 좋아했고, 이웃에게 주기를 좋아하는 것이 저의 성격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51년의 목회생활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왜, 벗은 자라야 입힐 수가 있고 빈그릇이어야 채울 수가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꾸 벗어버리고 자꾸 빈그릇으로 만드니까 하나님이 점점 많이 채워 주시고 그릇을 크게 할수록 더 많이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생활을 통해 경험하고 배워서 잘 압니다. 현재는 가난하고 못 배우고 세상 권력도 없지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 심고 이웃에게 나누고 베풀 때 하나님께서는 넘치는 복으로 채워 주셔서 못 배워도 그 사람을 사용해서 크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무지해도 그 사람을 사용해서 능력 있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그 사람을 사용해서 큰일을 일으켜 세우시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세상을 이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 어디에 가나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 이기지 못하고 말재가 되고 형편없는 사람이 된 일이 없습니다. 빈 그릇은 하나님이 채우시고 벗은 자는 입히셔서 반드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느 곳에 가는데 마다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아니하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게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1~5)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받아 들이는 사람에게 들어와서 큰 변화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미련한 것을 택하여서 지혜로운 자를 이기게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세상에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 미련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보태 주시면 하나님의 미련함이 세상의 지혜보다 낫습니다. 아주 미련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하는 것 보면 똑똑한 일을 하거든요. 왜 그러느냐.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일같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를 원하기 때문에 내가 미련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알든지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아~ 나는 하버드대학을 못나왔다. 나는 예일대학을 못나왔다. 나는 서울대학도 못나왔다. 고려대학도 못나왔다. 나는 야간고등학교 밖에 못나왔다. 그러므로 나 같은 사람 이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천만에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모시면 천국대학을 나온 사람인 것입니다. 하버드대학이나 예일대학이나 서울대학이나 고려대학이 천국대학과 맞먹을 수 있습니까? 지혜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이 속에 계시면 어떠한 인간의 지혜로운 사람보다 더 나아질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하나님은 택하셔서 하나님의 지혜를 주셔서 큰일을 이루시고 사람들마다 “아~ 저것은 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축복해 주면 “이것은 내가 했다. 내가 지혜롭고 총명하기 때문에 내 능력과 내 능력으로 이 일을 했다.” 자랑할 것입니다. 세상 지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해 놓으면 사람들이 “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다. 저 사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은 지혜없는 자라도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로 25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세상에 지혜 있고 총명하던 사람 예수를 반대하고 비난하다가 죽어서 지옥에 들어앉아 불타는 곳에 괴로워 할 때 이 세상에 미련하고 보잘 것 없어도 교회 열심히 나가고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 보니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살고 있다. 누가 결과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보십시오.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자 뿐 아니라 관리요, 권력도 있고 해서 밤낮 연락하고 살았지만 거지 나사로는 그 대문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고 온몸이 헌데를 알아 개들이 같이 있으매 핥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좋은 방에서 좋은 옷을 입고 영화롭게 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문밖에 있는 거지 나사로는 맨땅위에서 쪼그라져 살면서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믿었습니다. 부자는 지혜가 없고 거지 나사로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곧 세월이 지나가니까 부자도 죽고 나사로도 죽었는데 부자는 음부에 들어가서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고 나사로는 낙원에서 행복하고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게 된 것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까? 나사로가 지혜로운 사람이지요. 사람은 일의 끝을 보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어렵다고 해서 끝까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잘 산다고 해서 끝까지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끝이 좋아야 좋은 것입니다. 끝이 나쁘면 좋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끝까지 붙들어서 끝을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영화로움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어떠한 괴로움과 고통이 다가와도 세상을 이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소독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조지프 리스토(Josepae Lister) 는 인체 수술이 시작된 19세기에 수술환자의 90%가 수술을 받으면 죽었습니다. 그때는 세균이 있는지 없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쓴 칼을 또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쓰고 그 피 묻은 칼을 또 다른 사람에게 쓰고 세균을 전달시켜서 수술을 받았다면 90%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조지프 리스토라는 의사는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인데 그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 환자들이 수술만 받으면 죽는데 살리려고 한 수술이 왜 사람을 죽입니까?” 그러니까 마음속에 조용한 지혜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 사람아 칼에 세균이 붙어 있어서 병을 옮기는 수단이 된다. 칼을 소독해라”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비웃는데도 불구하고 조지프는 수술하기 전에 불에다가 칼을 소독시켰습니다. 활활 붓는 불에 칼을 집어넣어서 칼을 소독시키고 난 다음 수술했는데 조지프가 수술한 사람은 80%가 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수술을 할 때 반드시 수술칼을 소독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증명을 했는데 먼저 그것을 알려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산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도우심을 구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깨우쳐 주시므로 일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식과 지혜는 틀립니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우면 지식을 얻어요. 그러나 공부는 못해도 문제의 해결을 잘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람이 지혜가 있으면 어려운 문제를 쉽게 쉽게 해결합니다. 지식이 있으면 배운 것이 있기 때문에 지식을 가지고 지식적인 말을 하고 지식적인 일을 하지만 지식이 지혜보다 못합니다. 인류대학을 나온 사람보다도 학교를 공부 못해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이 훨씬 일을 잘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공부해서 얻지만 지혜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받든지 안그러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기 때문에 나를 믿는 백성은 머리가 되고 꼬리 안되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펴볼 때 어느 나라 민족이 잘삽니까? 예수 믿는 민족이 다 잘삽니다. 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일을 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민족이 잘사는 것입니다. 열심히 교육을 시켜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는 지혜가 없으니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지혜에 의지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생활을 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또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약한 자를 택해서 강한 자를 멸한다고 한 것입니다. 약한 자를 택해 가지고서 강한 자를 멸한다. 강한 자가 큰일을 하는 것은 “힘이 있으니까 잘했구나. 그 사람이 했다.”고 하지만 약한 자가 큰 일을 하면 “저것은 자기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셨다.”고 하나님을 칭찬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강한 자를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 자랑하고 교만하고 약한 자를 사용하시면 자기 자랑을 안합니다. 약한자는...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셨다.” 다른 사람들도 “저 사람은 하나님이 도와 주셨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로 29절에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 앞에 아무 육체도 자랑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자랑하고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하고서 고개를 흔들어 제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침을 탁 뱉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 택해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셔서 있는 것들을 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를 비하하지 마십시오. “나는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놈이니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느냐.” 천만에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올바르게 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골리앗과 다윗을 보십시오. 골리앗은 구척 장신의 큰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을 대적해 나오는 다윗은 초립동이었습니다. 15,6살 정도밖에 안되는 소년 목동이었습니다. 소년 목동인 다윗이 대장군 골리앗을 대항해서 나갈 수가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왕 사울과 그 군대들은 골리앗만 나오면 기절초풍을 하고 다 숨었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가슴을 펴고 나와서 “뭐 저놈을 두려워 하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할례 받은 백성으로써 하나님이 같이 계신데 무엇을 두려워 하느냐.”
사무엘상 17장 45절로 47절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야훼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골리앗이 다윗을 찾으려고 살펴보니 안 보이거든 굉장한 작물이 나오는줄 알고 살펴보니 안보이니 어디 있는지 보니까 요밑에 조그만한 애가 하나 걸어나오거든.. 무장도 안하고 반바지에 손에다가 물멧돌 들고서 지팡이 하나 들고 나옵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야 이놈아, 네가 나를 개 인줄 알고 지팡이 들고 나오느냐? 내가 오늘 너를 죽여 공중의 새와 땅에 있는 짐승의 고기로 만들어 주겠다.” 다윗이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했기 때문에 약한 다윗 플러스 강한 하나님 하니까 말할 수 없이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물멧돌 한방에 골리앗이 거꾸러져 죽은 것입니다. 사람이 약하다고 해서 얕보지 마십시오.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약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강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약한 사람 속에 숨어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에는 천지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에 약한 자들을 택하여 강한 자를 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면 바울을 사용하기를 원하는데 바울은 너무 강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최고 학부를 졸업했습니다. 최고 학부인 가브리엘 문화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 교인 중에 바리새 교인이었습니다. 열렬한 청년이었습니다. 너무나 잘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쓰고 싶었지만 그대로는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메섹도상에서 그에게 나타나서 거꾸러 뜨리게 하시고 장님을 만드시고 나중에 보면 장님을 고쳐서 예수를 믿게 하시고 난 다음에 바울에게 무엇을 하시느냐.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보냈습니다. 사탄의 사자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바울은 말하기를 육체의 가시가 되어서 자기를 몹시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한 평생 선교여행을 하면서 몹시 괴로워하고 고통했습니다. 하나님께 이것이 없어져 달라고 세 번 기도해도 응답 안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10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한번 따라 읽으십시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께 의지하지요. 강하면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혈기왕성하고 만사가 형통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약하고 병들게 되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해요. 그냥 있을 수가 없으니까 “아이구 하나님 날 살려 주십시오. 날 도와 주십시오.” 기도 안할 수가 없어요. 바울은 강단에 설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쓰러지지 않고 설교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행할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병들어서 드러눕지 않고 걸어 다니게 해 주시옵소서.” 말씀을 가르칠 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기절하지 않게 정신을 올바르게 차리게 해 주시옵소서.”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순간순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줄 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삶속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의지할 때 하나님이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잘한다.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인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죽어야 하나님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치셔서 늘 약하게 만들어서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왜 담대해야 되느냐.
3. 믿는 자의 신분
우리 신분을 깨달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장 30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은 것은 우리 힘으로 믿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님 안에 있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의도순복음교회 4부예배 나와 계시니 내가 예수를 믿고 싶어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예수 보셨습니까? 예수님이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악수라도 한번 했습니까? 예수님 향기라도 한번 맡았습니까? 전혀 보지도 듣지도 만지지도 못한 예수를 어떻게 믿습니까?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내가 아는지 모르는지 내 속에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로 5절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읽어 보십시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창세전에 우리를 택했습니다.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여러분이 어머니 뱃속에 생겨나기 전에 아득한 옛날에 그때 벌써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택하셨다. 하나님이 조용기를 택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이름을 말하고 택했다고 말하십시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말하십시오. 택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누가 넘어뜨릴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누가 넘어뜨리고 빼앗아 갈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아주 감격적이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왜 택했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택하사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기쁘신 뜻대로 예정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공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찌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택함을 입어서 하나님 백성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형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24시간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은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하나님 포켓에 넣어서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요사이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닙니다. 남자들은 포켓에 넣고 여자들은 핸드백에 넣어서 늘 필요하므로 가지고 다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듯이 여러분을 가지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포켓에 넣어가지고 다니시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영국의 큰 기선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배는 전쟁 중에 중대한 임무를 띠고 가는 것이었는데 그가 가는 뱃길에 독일의 군함들이 처처에 지키고 있었습니다. 큰 위험이 따랐습니다. 영국 기선은 출발하기 전에 위에서 오는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상부에서는 "무조건 앞으로만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는 무전으로 연락하고 지시를 받지 절대로 선장 마음대로 앞으로 가든지 뒤로 가든지 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영국 기선은 미국을 향해 대서양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는데 며칠 뒤에 적군의 함대가 가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무전을 쳤습니다. "적군이 가까이 있음 어떻게 할까요?" 그러니 대답이 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무조건하고 항해를 계속하라." 항해사들은 얼굴에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그러나 명령이 떨어졌으니까 불안하지만 계속해서 미국으로 미국으로 향해 갔습니다. 구사일생으로 미국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선장이 갑판 위로 올라와서 땀을 닦고 후유~ 큰 숨을 내쉬니까 자기 옆에 뭐가 시커먼게 쑥하고 올라옵니다. 깜짝 놀라 보니까 영국의 잠수함이 늘 곁에 따라 왔어요. 기선이 오는데 잠수함에 곁에 붙어서 바짝 물속에서 따라왔기 때문에 상부에서는 염려하지 말고 나가라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그 잠수함을 못 보았습니다. 늘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며 왔지만 태평양, 대서양 내내 잠수함은 그 기선 옆에 물속에서 따라 온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안보이지만 여러분 뒤에 숨어서 늘 따라오는 것입니다. “아~ 내가 겨우 이 시련과 환난을 이겼다.”하며 땀을 닦으면 하나님 웃으십니다. “내가 따라오면서 도와주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이겼겠느냐. 볼지어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떠나지 않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요,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같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내가 너를 붙들어 주리라. 내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포켓 안에 예수님의 손 안에 예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보통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을 얕잡아 볼 수가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게 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 없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 지혜롭게 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의 지혜가 되게 하셨다. 예수님은 누구시냐. 나의 지혜인 것입니다. 나는 지혜가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의지할 때 예수님은 나의 지혜가 되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2절로 3절에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예수님 안에는 온 우주의 지혜와 지식이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지혜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다 지혜로운 분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지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속에 지혜의 예수님이 와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예수님은 나에게 지혜가 되셨다.
에베소서 1장 8절에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또 우리에게는 의로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의롭게 된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 있어요? 태어났으니까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내가 돈 만원 줄테니까.. 한 사람도 없네. 돈 억만금을 준다 해도 죄를 한 번도 안 짓고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이 우리 일생의 죄 값을 십자가에서 다 청산해 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이래나 저래나 예수 덕분에 죄 없는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에 1조원의 빚을 졌다면 일생에 1조원의 빚을 못 갚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와서 1조원의 빚을 갚아 주었으므로 이제 나는 빚이 없습니다. 빚은 내가졌지만 갚기는 예수님이 갚았으니까 예수님이 갚아 주었으니까 내가 갚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죄는 내가 지었는데 벌은 예수님이 받아 버린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지을 죄를 예수님이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용서받은 의인이 된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행위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용서받은 의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으므로 의인처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의로움이란 무엇입니까? 의로움이란 죄를 한번도 안지은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마귀가 참소할 수 없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 부끄럼없이 설 수 있는 것이 의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안돼요.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구나 우리가 숨이 넘어가려고 할 때 온 전력을 기울여 주의 피를 의지합니다. 주의 피를 의지합니다. 주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하면 주의 보혈이 여러분을 붙잡고 나가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혈 없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섭니까? 보혈 없이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 주님의 보혈 주님의 보혈 보혈의 잔 마시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의 거룩한 제사같이
흐르고 있네 흐르고 있네 귀하신 주 보혈 기쁨으로써 노래부르며 영원히 마시겠네 ♬
보혈을 영원히 마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보혈을 마시는 않는 사람은 보혈을 마시는 사람하고 얼마나 틀립니까? 보혈을 마시고 있는 사람은 죄의 빚을 벗어 버린 사람으로 하나님께 마음대로 나갈 수가 있지만 보혈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죄덩어리이므로 자기 죄를 책임지고 지옥으로 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보혈을 흘려서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우리에게 와서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함이 없어요. 우리는 다 더럽지 않습니까? 거룩하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집에 들어올 때 목욕 안하고 온 몸에 때 냄새가 나고 기름 냄새가 나면 더럽지 않습니까? 더러운 것이 깨끗이 씻으면 깨끗한 것을 거룩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 여러분 생각이 더럽고 말이 더럽고 행동이 더럽고 삶이 더럽습니다. 깨끗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기도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 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더러운 것을 단번에 다 씻어 버렸기 때문에 예수 이름만 부르면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보혈과 하나님 성령의 씻음을 통해서 여러분과 나는 거룩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더럽지 않고 추하지 않고 깨끗하게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는 은총이 얼마나 큽니까? 마지막으로 주님 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이고 있을 때 필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그 보고 “당신 훌륭한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다. 인물이 잘난 사람이다. 옷도 잘 입고 맵시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렇게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물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주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보고서 위대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인물이었다. 크나큰 좋은 일을 하셨다. 그 칭찬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람이 죽고 나면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영원히 살 수 있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기억된다 해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고린도전서 1장 30절로 31절 우리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원함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럼 구원받은 사람이요. 여러분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을 찾아서 산과 들로 다닐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이 구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시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 하나님께로 부터 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와서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은혜 아닙니까? 우리는 만세전에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아서 예수님 안에 들어오게 하나님 만들어 주셨고 예수님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우리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이 되시고 거룩함이 되시고 구원함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 팔자가 느러진 것입니다.
<결론>
제가 뉴욕에서 집회할 때 유명한 신문사 기자가 와서 내게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세계적인 주의 종이니까 한가지 묻겠습니다.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와~ 거창스러운 질문을 하는데 기가 막히더라구요. 당장 그 말이 신문기사에 쫙 나갈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지혜가 없으니까 주님께 물었습니다. 속으로.. “주님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묻는데 뭐라고 대답할까요?” 그래서 주님이 지혜를 주세요. “인생이 뭐라고요? 밥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막 기자가 배를 안고 웃더라구요. 밥 먹고 사는거라. 안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인생이란 뭡니까 여러분? 밥 먹고 사는거지.. 어떤 사람은 잘 먹고 어떤 사람은 잘 못먹고.. 그것 다르지. 밥 먹고 살다가 결국은 죽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통해서 보십시오. 위대한 훌륭한 사람 다 밥 먹고 살다가 죽었습니다. 허허허. 오직 다른 것은 예수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예수 믿은 사람은 밥 먹고 살다가 죽었어도 끝장이 좋고 예수 안 믿은 사람은 밥 먹고 살다가 죽어서 끝장이 좋지 않고 그 둘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인생이 가는 길은 두 개밖에 없습니다. 천당길, 지옥길 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예비 인생인 것입니다. 진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영원히 사는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구주로 모셨으므로 우리는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과 인생을 자랑하나 이 세상도 인생도 다 추풍낙엽입니다. 세월이 왜 그렇게 빨리 가는지 8월달이 벌써 다 갔어요.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몰라도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가서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우리가 염려하지 않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고 영화롭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젊음도 늙음도 없이 다 그리스도와 같은 나이로써 영원히 영화롭게 살 것이니 걱정할 것 무엇입니까?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예수님께 맡기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소망차게 사는 것이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입니다. “아이 나 같이 천한 사람...” 주님은 나 같은 천한 죄인을 살리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히 구원하셨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살면 돼요. 세상에서 못나고 천하고 멸시받고 못 산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잠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절대로 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의롭고 거룩하고 구원받고 지혜로운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감추었으니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아도 버림 바 되지 아니하고 거꾸러 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습니다. 보배가 우리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큰 축복이요, 거대한 보배라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이 믿지 못하는 이유
고전 1:22-25 / 이정선목사
우리 인간은 외부의 조건과 상태에 따라 삶의 방향이 좌우되는 수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행복한 가정에 태어나 사는 사람과 결손가정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의 삶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왜 세상이 나에게 이렇게 불공평하고 심지어는 잔인한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관점에서는 궁극적으로 한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요인은 주변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슬픈 일이 나에게 발생해서 내가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조건에 대해서 내가 슬퍼하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에 슬프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환경과 내면의 의지가 모두 중요한 요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외부의 환경보다는 내면의 의지가 훨씬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에 처했어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의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우리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 인간의 의지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기로 작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근간이 되는 사상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 은혜를 베푸시면 인간이 그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결정권과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신학적 써클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인간은 누구의 간섭이나 통제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보면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는데 그렇게 선택된 인간이 구원을 거부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결정과 뜻이 인간의 결정과 의지보다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머뭇거리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의지로 그런 결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는 표적이 나타납니다. 표적이란 sign입니다. 기적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이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증명하는 표시가 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그 표적이 없으면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인정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이유는 표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명백하게 말씀해 주시면 믿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헬라인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자기들의 철학적 사고의 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잘 정돈된 논리와 체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지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을 충족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부활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럴 듯하고 타당한 이유들이 많아요.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다 썩었다고 비난합니다. 목사도 나쁜 짓을 많이 하고, 교회의 여러 비리들이 적발된 것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런 썩은 교회 못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맞는 얘기예요.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혀 윤리적이지 않고 사랑도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예배당은 으리으리하게 지으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 교회에 정이 떨어졌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처럼 얼마든지 많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만약 그 이유들이 아니라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게 될까요? 네,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의 이유가 없어지면 그들은 또 다른 이유를 찾아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자신의 의지의 결정을 감추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말로 설득하고 증거를 제시해도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은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지, 그 부모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본인의 죄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는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해 준비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메시야 되심의 증거였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어도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라는 것을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소경이 눈을 뜬 것을 보고 다른 사람이라고 억지를 부렸습니다. 눈을 뜬 본인이 예수께서 눈을 뜨게 하셨다고 하면서 그 분이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을 쫓아내버렸습니다. 그 사람의 증거는 바리새인들의 믿음을 변화시키는 데 사용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화나게 했을 뿐이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표적을 구한다는 것도 거짓일 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한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 몇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시오.”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과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렇다면 이 돌들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해라.”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는구나. 그러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 즉 그들에게 직접 표적 보여주시는 것을 거절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께서 죽으셔서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혜를 구하던 헬라인들은 그것이 지혜에 합당하다고 생각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오기 전 아테네에서 뼈저리게 당했던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과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을 상대로 바울이 나름대로 논리와 체계를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들은 자기들보다 더 지혜롭고 발달된 학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도할 때 듣는 사람의 갖가지 믿지 못하는 이유를 다 해소시켜야 전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할 수 있을 만큼 설명하고 설득을 해야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패하고 교인들이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논쟁을 하면 끝이 날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예수 믿지 못하는 이유를 확인해 주는 결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사람들,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명확하게 믿어지고 이해가 되어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먼저 믿으려는 마음을 가질 때 전에 안 믿어지던 것도 믿어지고, 이해되지 않던 것도 수긍이 되는 것이지요. 또 온갖 이유를 대며 믿지 못하겠다던 사람도 어느 순간 마음 문이 열리면 백 가지도 넘는 믿지 못하겠다던 이유들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슬픈 일이 일어나서 내가 슬픈 것이 아니라, 일어난 일을 가지고 내가 슬퍼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슬픈 것처럼, 믿어지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로 작정하고 마음을 닫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마음이 열리도록 설득하는 일입니다. 더불어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예수 못 믿겠다는 구실로 이용되지 않도록, 오히려 그 반대로 우리 사는 모습을 보니 예수 믿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말을 듣도록 살아야겠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의 전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고 증거되는 역사를 우리 모두가 체험하며 목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
고전 1:22 / 문기태목사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고전1:22-27)
바울은 전도여행 중에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철학적으로 수사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아주 멋진 설교를 했습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은 매우 종교심이 강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아테네 시를 두루 다니며 살펴보았는데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겨진 제단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해 놓고 예배하는 신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잇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이렇게 멋지게 설교를 했는데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은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그리고는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갔습니다. 아테네의 실패를 경험한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오로지 예수께서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심만을 힘있게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열매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일년 육 개월이나 머물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떠난 후에도 고린도교회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 여러 번 편지를 보내어 그들의 신앙을 바로잡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도록 격려했습니다.
바울은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강조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단순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만을 굳게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여러분에게 임합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24)
당시는 헬라의 철학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입니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며 거리에서 유창한 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고린도 시는 선동적인 연설 가들로 득실거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찍이 헬라의 모든 학문을 배웠으나 복음을 전할 때 유창한 웅변술이나 재치 있는 언변으로 복음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2절) 그 이유는 철학적이며 유창한 웅변을 앞세우면 자신은 드러나지만 그리스도는 감추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의 도시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뽐내는 철학과 논리학이 발달한 도시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상의 지혜가 발달한 도시이지만 그리스의 철학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철학과 변증법을 공부해서 하나님을 알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찾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가 강대상 뒤에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아름다운 그림이 장식되었습니다. 어느 날 외부 목사님이 설교하로 왔는데 그 목사님은 키가 많이 작았습니다. 설교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 한 어린 소녀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매 주일 서 계시던 목사님이 안 계시니까 예수님이 보이네!" 목사님이 안 계시니 예수님이 잘 보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한 이야기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우리는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고자 힘쓰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의 학문을 많이 공부하였지만 복음을 전할 때에 유식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알려고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려고 힘썼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시시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심오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의 도에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에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것이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일로 여겨졌습니다.
사단은 갈보리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대승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잡은 마귀를 박살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온 세상에 입증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진실하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지혜를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판단하지 말고 크고도 높은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하고 십자가를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지혜를 덧입어 복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24)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안에 믿음이 솟아 납니다.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가득하게 됩니다.
26절에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27절에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연약하고, 가난하고, 비천하고, 힘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이들을 부르시고, 믿음도 주시고, 자녀로 삼으셔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고,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비천하고 멸시 받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셔서 잘났다고 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를 보아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저를 봐도 다르지 않습니다. 처음 믿을 때는 몸이 병들어 몹시 연약하거나, 심하게 가난하여 곤고하거나,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만큼 평범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깊어질수록 지혜롭게 변합니다. 강건해 집니다. 부유해지고 지위가 높아지며 이제는 주위에 사랑과 존경을 받는 존귀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증거인 줄 믿습니다.
저 역시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아무 소망이 없었습니다. 몸도 약하고 마음도 우울하고 가진 것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머리 위에는 잿빛 하늘이었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하나님이 내려다보시고 가장 약하고 가장 부족하니까 불쌍히 여기시고 손을 내미신 것 같습니다. 누나의 손에 붙잡혀 억지로 끌려간 집회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 사역 자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유튜브 방송으로 복음을 전하리라 생각도 못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제가 책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두 번째 책을 쓰게 하셨고 좋은 출판사와 연결시켜달라고 기도만했더니 요단 출판사에서 먼저 알고 출판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출판에 앞서 마지막 교정을 보려고 주위에 목사님들에게 원고를 보냈는데 어제 한 목사님이 제게 와서는 “내용이 재미있고 감동이 되어 그대로 설교를 했더니 교인들이 은혜를 받아 눈물이 흘리더라” 고 하며 기대가 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모두 하나님이 약하고 부족한 저를 붙드시고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줄 믿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성경 지식이 뛰어났습니다. 은사도 많았고 영적 체험도 많이 했습니다. 전도도 잘하고 교회 일에 열심도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붙잡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영향으로 자기 자랑에 열심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자기를 드러내려고 힘썼습니다.
자기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늘 갈등을 일으키고 교회를 분쟁의 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늘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23)"
여러분은 바울처럼 날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사십니까? 고린도 교인들처럼 자신만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굳게 붙잡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
고전 1:22-24, 이사야 53:3-5 / 이성희목사
서 론
낡은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야간 순찰을 돌게 되었는데 그 날의 암구호가 ‘반지-구슬’이었습니다. 보초가 ‘반지’ 하면 ‘구슬’이라고 응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군인은 보초가 ‘반지’ 하니까 얼결에 ‘다마’라고 했습니다. 보초는 암호가 틀리니까 총을 쐈습니다. 순찰병은 죽으면서 “구슬이나 다마나”라고 하더랍니다. 본인의 머릿속에는 같은 것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생명이 있고, 하나는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의 차이입니다. 수많은 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도 같은 것 같지만 어떤 것은 생명이 있고, 어떤 것은 생명을 잃게 합니다. 복음의 전달은 중요하고도 어렵습니다. 생명을 바르게 전달해야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암호전달 체계는 다양했습니다. 북소리로 전달하기도 하였고, 나팔소리로 전달하기도 하였고, 연을 날려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연을 ‘신호연’이라고 불렀습니다. 전투 시에는 신호와 암호전달의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통신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호연의 몸체의 무늬, 그림, 색깔, 문양에 따라 이름도 다르고 암호 내용도 달랐습니다.
말이나 몸동작으로 뜻을 전달하는 게임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을 거쳐 가다보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전달이 힘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의 뜻을 잘 보존한다는 것은 그래서 힘듭니다. 똑같은 말을 듣지만 들은 말을 전할 때는 다 다르게 표현되기에 전달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에디슨의 성공을 말할 때 “1%의 영감과 99%의 노력이다”라고 합니다. 어떤 이가 에디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 한 것이 맞습니까?” 그 때 에디슨은 “‘나는 1%의 영감이 없으면 99%의 노력이 소용 없소’라고 하였는데 신문에는 1%의 영감의 중요성이 아니라 99%의 노력에 중점을 두어 나를 노력하는 사람으로 미화하여 진실을 잘못 전달한 것이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신문기자의 잘 못된 전달 때문에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디슨의 의도를 잘 못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간절하게 전하고자 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입니다. 그 외의 어떤 것도 바울의 관심사가 아니며 바울은 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16에는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합니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확실한 전달내용과 동시에 확고한 전달열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달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2:15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된 다음, 다메섹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만났던 그 경험을 간증합니다.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전하려고 했던 것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4:20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보고 들은 것만을 전하려 하고, 보고 들은 것을 반드시 전하려고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본 대로, 들은 대로 십자가를 전합니다. 보고 들은 것이야 말로 가장 강력한 전달 내용입니다.
아도르노(Adorno)는 “그릇된 전달 속에 올바른 삶이란 없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려고 했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바른 삶이 있습니다. 이 복음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바울이 전하려고 했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우리도 전하려는 열망으로 충만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표적도 지혜도 전할 가치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2에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가치한 삶을 삽니다. 그들이 최상의 가치라고 믿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인간의 어떤 것도 가치가 아닙니다.
표적과 지혜는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입니다. 신기한 표적을 보면 믿을 수 있을 것 같고, 인간의 지혜가 생명을 구하고 승리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인간의 최상의 가치가 전혀 아닙니다.
표적을 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신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봐야 믿겠다” “보면 믿을 수 있겠다”고 하는 것은 거짓입니다. 본다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는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푸셔서 먹여주었지만 먹은 사람들이 말씀 앞에서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2:37에는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표적을 보아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자인 빌립도 “내 아버지를 보여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유대주의의 두 파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주의자이었고, 사두개파는 부활을 부정하는 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파의 공통점은 표적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표적은 말씀 안에서 실현될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가장 큰 표적을 보아도 못 믿는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구하는 것도 결과적으로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만한 사람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능력이 무한하다고 합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현대인의 가슴에는 하나님은 쫓겨나고 맘몬이 앉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과학이나, 기술이나, 컴퓨터나, 정보가 모든 인간의 과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로봇이 점점 인간을 닮아가서 인간이 하는 것들을 다 할 것 같습니다. 만능 인공지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로봇은 인간이 만든 또 다른 인간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을 능가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인간의 지혜는 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인간의 지식과 지능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제가 대학 시절에 동양철학을 가르치시던 구본명교수님댁을 방문했습니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던 중 교수님이 제가 목사가 되려고 한 사실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상한 것은 왜 기독교 진리가 과학의 보증을 얻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과학의 보증을 얻으면 그것은 이미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지”. 신앙이란 과학의 보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은사는 중요한 복입니다. 그러나 은사 중심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이나, 환상을 좇아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여! 보여 주시옵소서”라고만 한다면 건강한 신앙은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감성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이성은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성 중심의 신앙도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과학이나, 논리나, 이성을 좇아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이 과학의 보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이성에 기초한 신앙입니다.
신비는 필요하지만 신비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이성은 중요하지만 이성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은사중심의 신비주의나 이성중심의 자유주의는 둘 다 인간성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서로 먼 것 같지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성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말마다 생각마다 귀신을 따지는 그릇된 신앙심이 있습니다. 홍콩에 갔을 때 보니 리펄스 베이라는 고급동네 바닷가에 고급 아파트가 있는데 아파트 한 가운데 큰 구멍이 있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아주 가관입니다. 아파트 공사 중 사고가 났는데 용이 화가 났다고 하여 용이 지나다니는 길을 아파트 한 가운데 뚫었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발리에 갔을 때 보니 건축물 고도제한이 15미터라고 합니다. 힌두 신이 야자수 위를 밟고 지나간다고 믿고 있어 야자수 높이 보다 더 높은 건축을 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신들은 신도 아닙니다. 어쩌면 신이 아파트 하나도 못 넘어가고, 신이 야자수를 밟고 야자수 위만 다닙니까?
인간의 표적과 지혜의 수준은 이 정도밖에 안 됩니다. 인간은 아무리 애써도 영적 신적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표적과 지혜는 믿음의 눈으로 보면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3:19에는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인간의 과학은 결국 어리석은 것이며 자기 꾀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절대 표적을 보고 사람을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은 거의 쇠락한 전도관의 박태선이나 통일교의 문선명도 초기에는 표적을 많이 행했습니다. 성경에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합니다.
사람의 지혜나 과학을 좇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한마디에 인간의 바벨탑은 무너집니다.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많이 쌓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노하시면 살아남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능력이며 지혜인 그리스도는 전할 가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4에는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헬라인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자기 올무이며 자기 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 자체가 능력이며 참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분별력입니다.
인간의 꾀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지식 같은 지식을 얻으려고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인간의 꾀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인간의 꾀는 흩어지지 않고 하나님 같이 높아지려고 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인간의 꾀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고 사람들을 흩어지게 한 것입니다. 인간의 꾀는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성을 높이 쌓으면 불가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꾀의 결과는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입니다. 인간의 꾀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면 이스라엘은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다시 귀환하고 회복하고 강성합니다. 인간의 꾀는 스데반을 돌로 치고, 야고보를 참수하고, 사도들의 입을 막으면 복음이 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같은 속도로 복음은 전파되었고 복음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5에는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 능력과 그 지혜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박히신 그리스도가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능력도 지혜도 아닙니다. 정치적 패배자이고, 미련하여 올무에 걸린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자체가 우리를 살리는 능력이며 지혜입니다.
지난 7월 6일, 아시아나 항공기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착륙 도중 사고가 났습니다. 조종사 과실인지 기체 결함인지 아직 정확하게 조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날 공항의 착륙유도장치가 꺼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항공기의 여승무원들은 침착하게 승객들을 구출하여 영웅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 항공기는 최첨단기술이 응집된 보잉 777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가 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의 한계입니다. 1998년 3월에 대한항공이 괌에서 추락사고가 났습니다. 그 날에는 항공기의 진입방향과 고도를 알려주는 ‘아웃마커’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기술도 허점투성이입니다.
사람이 기계에 의존하여 살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기계가 고장 나면 참사가 발생합니다. 기계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할 일이 없어집니다.
요즘에 스마트 폰을 보세요. 얼마나 스마트합니까? 저의 전화기에는 전화번호가 1,500개 이상 있습니다. 기계가 잘 알아서 전화번호를 찾아 주고, 전화를 해주니까 전화번호를 기억하는 것은 제 전화번호를 비롯해서 10개정도밖에 안 됩니다. 기계는 스마트한데 내 머리는 스마트 하고는 반대로 변해갑니다. 전화기가 없으면 전화도 못하고, 내비게이션 없으면 길도 못 찾고, 스마트 폰이 없으면 정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어떤 것이니까? 하나님은 전지(옴니 스키엔스), 전능(옴니 포텐스), 전재(옴니 프레젠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전지입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에 온전하신 분(wholeness)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불과 구름 기둥이 백성들 어디에 있었습니까? 성경에는 백성들 앞에 있었다고 합니다. 출애굽기 13장에는 여호와가 앞서 가시며 불과 구름 기둥으로 이끄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과 구름 기둥이 자리바꿈을 합니다. 14장에는 애급 왕 바로의 병거가 백성들 뒤를 쫓아옵니다. 백성들 앞에는 홍해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진퇴양난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14:19에는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라고 합니다. 20절에는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저쪽이 이 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애급 병사 사이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백성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하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얻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능력이 생깁니다. 십자가와 순교와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지혜롭게 됩니다. 똑똑해지고 세상을 이기고 가난과 무지와 부패도 사라지게 합니다.
어떤 분이 보내준 자료에 보니 한국은 국민 90%가 국기를 소지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평균 IQ가 세 자리가 넘는 3개국 중 하나입니다. 평균 IQ가 105가 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일하는 시간 세계 2위, 노는 시간 세계 3위의 잠 없는 나라입니다. 문맹률 1%미만의 유일한 나라입니다. 버스와 지하철에 노약자 보호석이 있는 5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여성부가 있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유럽 통계에 의하면 세계여자 미모 1위의 나라입니다. 의술을 빌린 점도 있겠지만 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1위입니다. 세계 4대국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를 우습게 보는 나라입니다. 유대인을 게으름뱅이로 보이게 하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기독교는 문맹퇴출에 기여하고, 교육발전이 헌신하였고, 경제성장에 엄청난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하고, 폄훼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지혜 때문에 똑똑해지고 모든 면에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결 론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증인회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이 이단은 십자가가 우상이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세우는 것을 반대합니다. 십자가를 숭배하는 것이 비성서적이라고 지적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를 교회내부에 부착하기 시작한 것은 주후 431년경입니다. 교회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주후 586년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우리가 십자가를 숭배합니까? 전혀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숭배합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십자가의 의미와 능력과 지혜를 약화시킨다는 점입니다. 왜 십자가의 의미를 약화시킵니까? 자기들의 교주가 재림한 메시야라고 하려다 보니 자연히 십자가가 약화되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메시지 릴레이’라는 게임이 있습니다. 긴 문장을 여러 사람이 차례로 전달한 후에 더 정확하게 전달한 편이 이기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차례로 전달되는 중 그 내용이 변질되어 마지막에는 전혀 다른 말로 전달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을 미국인들은 ‘러시안 속삭임’이라고 하고, 러시아인들은 ‘아메리칸 메시지’라고 합니다. 이것도 냉전시대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확률론’의 대가인 마르코프는 진위의 절반 이상이 변질된다고 하였습니다. 2천 년이 흘러오는 동안 십자가의 복음은 수없이 변질되고, 왜곡되고, 거짓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전할 복음은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할 것은 표적이나 인간의 지혜가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전할 복음의 내용입니다. 십자가가 표적이며,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임을 전하는 우리가 됩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여 참 복음의 뜻을 바르고 확실하게 전하는 전도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쓴물과 단물
고전 1:18 / 문기태목사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하여 홍해바다를 건넜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다를 갈라주시고 밤새도록 바람으로 말려주셔서 모든 백성이 안전하게 건넜습니다. 너무 기뻐서 노래를 지어 불렀습니다.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광야로 들어가자 물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흘을 걸어갔으나 당장 마실 물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마라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그들앞에 물이 보였습니다. 달려가 마셔보니 너무나 써서 아무리 목이 갈한 상태라도 도저히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물이 눈앞에 있어도 쓴 물이라 마실 수 없으니 얼마나 맘이 더 상하겠습니까? 그러자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마라의 쓴 물보다 더 쓴물이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나무가지를 꺾어 물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을 떠서 마시니 이제는 하나도 쓰지 않고 단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달아진 물을 모든 백성들이 마음껏 마시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하나님께서는 쓴물도 단물로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히 12:15 말씀에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사람에게는 쓴 뿌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쓴 뿌리가 나면 본인도 괴롭고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더러움을 입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쓴 뿌리가 어디에서 생깁니까? 마음입니다. 백성들이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자 불안에 사로잡히고 마음에 쓴 뿌리가 나서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던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쓴 뿌리에서 나온 독이 민족공동체 전체에 확산되었습니다.
그 때 그 쓴 물을 해결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한 나무에서 나왔습니다. 나뭇가지를 꺽어 쓴 물에 던지자 물이 치료되고 달아졌습니다. 그 나무는 도대체 어떤 나무이기에 쓴 물을 치료하는 신기한 능력이 있는 것일까요? 그 나무의 수종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나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패하여 쓴 물을 내는 죄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괴롭게 하고 더럽게 하는 쓰디 쓴 사단의 독소를 제거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망하게 하는 쓰디 쓴 감정을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아무리 쓴 물로 가득 채워진 인생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마음에 던지면 새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속에 잠기우기만 하면 쓴 물이 단 물로 바뀝니다. 아무도 마시지 못할 정도로 쓴 물을 내는 사람이라도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절로 얼굴이 찡그려지는 쓴 물을 내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마음에 받아들여 잠그고 살면 단물 인생이 되어 본인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고 만족해하고 행복해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여러분에게는 쓴 물이 없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항상 성공만 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크게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시험에 실패하거나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기도 합니다. 연애를 하다가 실패하기도 하며 자녀양육을 실패하기도
합니다. 실패하고 나면 쓴 물이 생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실패의 좌절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패배감에 사로잡혀 평생을 우울하게 살아갑니다. 실패의 쓴 물이 인생의 행복과 평안을 빼앗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누군가를 미워하다보면 마음에 쓴 물이 솟아나 사랑이 식어버리고 행복감도 사라져서 괴롭게 되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상처를 잘 주는 사람을
만납니다. 해를 입히는 사람도 만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미움이 싹트고
증오심을 품으며 살기 쉽습니다. 그 미움이 우리 안에 쓴 물을 만들어 냅니다. 복수심이 우리의 마음에 쓴 물을 만들어 위장장애를 일으키거나 두통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미움은 인간관계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사소한 일에 불평하고 원망을 일삼다보면 감사한 마음이 사라지고 쓴 물이 계속 솟아나와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쓴 물이 가득한 가정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단이 가져다주는 대로 근심에 사로잡혀 살다보니 질병만 생기고 얼굴은 쓴 물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되어가는 수도 있습니다. 죄의 권세에 굴복하여 사단의 종이 되어 사단이 시키는 대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살다보니 자유도 평안도 다 잃어버리고 독소와 쓴 물만을 뱉어내는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TV를 보면 아침마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 부부탐구시간이
있는데 거기에 나와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에 쓴물로 가득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내가 쓴물을 토해내 놓으면 남편도 뒤질세라 쓴물을 토해 내 놓습니다. 그런 모습을 많은 시청자들이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장수하는 것을 보면 비슷한 쓴물을 간직한 가정이 이 땅에 많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어느 가정이든지 쓴 물이 가득찬 가정을 기대하지 않고 꿀 물이 가득한 달콤한 가정을 기대하였는데 어떻게 단 물은 온데 간데 없고 쓴물만 가득찬 가정이 되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원인이 무엇이든간에 여러분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안에 있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도 먹지
못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쓴 물을 여러분 인생에 갈증을 해소할 수 잇는 좋은 물로 바꾸어 주셔서 유익하고 행복과 만족을 주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쓴 물을 만나 마시지 못하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묵묵히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인생노정에서 쓴 물을 만나 역시 마시지 못하고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동일하게 한 나무를 지시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없이 우리 죄를 위하여 대신 매달려 죽으신 나무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십니까? 그 분을 쓴 물로 가득한 여러분의 마음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모셔 드리십시오.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하여금 여러분 안에 있는 쓴 물로 정화하여 단물로 바꾸실 수 있도록 여러분의 중심에 예수님을 잠기게 하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께 사로잡히고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이 사랑을 부어 주시면 여러분의 인생은 쓴 물인생에서 단물 인생으로 바뀝니다.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염려가 변하여 기도가 됩니다. 불안이 바뀌어 평안이 됩니다. 패배감이 변하여 성공과 승리의 확신으로 바뀝니다. 깨어진 관계가 다시 회복된 관계로 바뀝니다. 좌절과 절망이 용기와 도전과 소망으로 바뀌고야 맙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가장 기쁘고 행복한 사람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어떤 여인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영양주사만 맞으며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아름답게 생긴 여인인데, 의사가 아무리 진찰을 하고
엑스레이(X-ray)를 찍어 보아도 그 병명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에 의뢰했는데, 정신과에서도 아무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심리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할 수 없이 내과의사와 정신과 의사가 그 병원의 목사님께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목사님과 상담하는 중에, 그 여인은 어려서부터 좋은 신앙을 가졌었는데,
결혼하기 전에 순간의 잘못으로 정조를 잃어버린 일과, 그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점점 신체에 마비 현상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마비되고 식도가 마비되어 모든 것을 소화시킬 수 없게 되었는데, 그 까닭은 바로 죄의식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 여인에게 죄 용서에 대한 말씀을 간략하게 해주시고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당신의 죄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 을 알고 있습니까?" "예, 압니다."
"그것을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모든 죄는 이미 용서 받았습니다. 용서받 은 증거로 성찬식을 행하실까요?"
목사님께서는 성찬기를 가지고서 단 둘이서 성찬식을 행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에수님의 살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죄를 씻어 주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피입니다."
목사님은 간곡하게 기도하면서 성찬식을 끝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찬식이 끝나자마자 그녀의 마비 상태가 풀렸다는 사실입니다. 영양 주사를 뽑고 그녀는 국과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차츰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죄의 올무에서 그녀를 해방한 것입니다.
쓴 물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 단물인생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러분안에 혹시 아직 쓴물이 남아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품으십시오. 쓴 물은 사라지고 단물이 솟아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 들임으로 놀라운 변화가 여러분의 삶과 가정에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멸망과 구원의 사이
고전 1:18 / 이정선목사
산골에 살던 소년이 바닷가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년에게 바닷가 마을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신기한 것도 많고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아이들이 바다 속에 들어가서 논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이 소년은 아이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는 줄 알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물속에서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왜 그렇게 위험한 물속에 들어가서 노는 거야? 빨리 나와!” 그러자 아이들이 깔깔 웃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도 이리 들어와. 여기 얼마나 재미있는 줄 알아?” 그렇지만 이 산골 소년은 죽어도 바다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없구요.
우리 인간은 경험이라는 세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래서 경험되지 않은 세계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거나 또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거부를 당합니다. 예를 들어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UFO를 보았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UFO의 존재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경험의 세계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경험의 세계를 굳이 직접 체험한 것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간접적인 경험이나 상상과 추리의 인식작용을 통해 경험세계를 넓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그 경험세계가 다를 수 있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의 말에 의하면 십자가의 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경험세계에서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예수라는 사람이 로마제국의 사형제도에 따라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는데, 그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도대체 납득이 안 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거부하는 사람들은 멸망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련하게 생각되고 이해가 되지 않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은 멸망할 사람들, 즉 지옥에 간다는 것이지요.
반면에 그것을 믿어 구원을 얻게 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멸망당할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대신 죽으신 엄청난 사건입니다. 비록 붙잡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당한 것이 바보같은 짓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죽음을 통해서 죄인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미련한 짓이라고 끝까지 고집하며 거부하느냐, 아니면 내 고집을 꺾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지혜롭다는 생각이 포기되고 나의 고집이 꺾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농담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어떻게 그런 얼토당토 않는 사실을 믿으라는 거냐?” 반면에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한 사실을 어떻게 못 믿겠다는 거냐?” 무슨 차이입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경험세계의 차이입니다. 물 밖에 있는 아이가 물속에 있는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러나 그 결국은 어떤 차이를 가져옵니까? 구원과 멸망입니다. 경험세계의 차이 자체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이 구원과 멸망의 차이가 된다면 대단히 큰 문제입니다.
저는 오늘 여기 있는 모든 분들에게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는 우리의 경험세계가 깨뜨려지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능력, 구원의 능력이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산골에서 온 소년이라도 물에 발을 담그는 것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세계에 접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마음의 문을 조금씩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세계를 경험함으로 구원의 은총이 우리 위에 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라
고전 1:18 / 최낙중목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가 대신 수치와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만 부활의 영광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 일제시대에 평양에 14살에 결혼하여 16살에 남편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과부가 된 백선희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는 새벽이면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목사님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신뢰하고 교회 일에 앞장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삯바느질을 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좋은 산이 하나 있으니 그 산을 사라고 말하니 소개하는 말만 믿고 그 산을 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믿고, 좋은 산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좋은 산이라고 생각하고 산을 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봤더니 그 산에는 나무 한그루도 없고 풀 한포기도 없는 그냥 돌산이었습니다. 속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상하긴 했어도 기도 중에 ‘내가 그 산을 사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 그 산을 샀더라면 얼마나 마음이 상할까?’하고 그냥 참고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누군가가 또다시 찾아와서 그 산을 많은 값을 줄테니 팔아라 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백선희 성도는 거절했습니다. 쓸모없는 산을 내가 파는 것은 양심이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값을 많이 준다는 것은 그것도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거절을 하니 또 다음에 찾아와서는 그때 값보다 10배를 더 줄테니 팔라고 또 매달렸습니다. 당시 일본은 도로를 내고 공장을 짓는 일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를 찾고 찾다가 백선희씨가 소유한 그 산이 온통 석회로 가득 찬 돌산임을 알아낸 것입니다. 그것을 알 턱없는 백선희씨가 그것을 팔지 않겠다고 거절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100배까지 값이 뛰었습니다. 200배까지 뛰었습니다. 그래도 안 판다고 말하자 일본사람은 그 여인의 신분을 조사하게 됩니다. 광물학자가 있는지, 고고학자가 있는지, 어떤 배경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는데, 배경을 알아보니 주위에는 아무 인물도 없고 다만 교회 다니는 신자라는 것만 알아냈습니다. 그때 일본 사람이 생각하기를 교회 다니는 신자들은 다른 사람 말은 안 들어도 교회 목사님 말씀은 잘 듣는다는 것을 알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람은 목사님에게 그것을 팔도록 권고해 달라고 말했고, 사실 그 산은 석회산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제야 목사님은 백선희씨를 찾아가서 하나님이 바로 이때를 위해서 자매에게 큰 복을 주신 것이니 산을 팔라고 해서 250배의 돈을 받고 그 산을 팔았습니다. 사기 당한 줄로만 알았던 그 산, 값싸게 팔아도 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 마음 아플까봐 갖고 있었던 그 산이 황금덩이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조만식 장로님의 기념관을 지을 때 백선희씨가 거금을 내놓아서 기념관을 잘 지을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선희씨는 선한 일을 너무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이름을 백선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남을 돕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영리하고 똑똑한 자기 머리를 써서 살아가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언제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을 도울 마음으로 살 때에 복은 하나님이 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독일에 큰 기근이 있을 때, 많은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고통을 당합니다. 한 마을에 마음착한 부자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네 아이 20여명에게 매일매일 정오 때면 직접 빵을 구워서 하나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손으로 떼어서 만든 빵이기 때문에 어떤 빵은 좀 크고 어떤 빵은 작았는데, 동네에서 20여명의 아이들이 매일매일 정오만 되면 할아버지 집에 가서 빵을 하나씩 얻어옵니다. 그래서 먼저 온 아이는 큰 것을 가져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그레첸이라는 한 아이는 꼭 늦게 와서 다른 아이들이 가져가고 난 뒤에 가장 못생기고 가장 작은 것을 가져갑니다. 그런데 그레첸은 그 작은 빵을 손에 들고 반드시 주인을 찾아와 명랑하고 밝은 표정으로 “아저씨 감사해요. 잘 먹겠습니다.” 인사를 했습니다. 주인은 그 마음착한 아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느 날 이 아이가 집에 가서 어머니와 같이 그 빵을 먹기 위해서 기도를 하고 쪼개어 보니까 그 빵 속에는 50센트 은화 6개가 들어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이 돈을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하니 아이가 그 돈을 가지고 주인에게 달려갑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말합니다. “이것은 내가 너의 마음이 착해서 선물로 준 것이야.”하고 되돌려 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손해 본 것 같은데, 하나님이 복으로 채워주신 이야기,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도 없고 부활도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는 망할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고,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이세상 사람들은 너무너무 머리 영리한 자기 머리, 그리고 손익계산에 빠르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등에 지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늘 당하고 손해보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줄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부끄러움과 고난도 달게 감수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지혜자가 누구입니까? 머리 영리하고 IQ 높고 손익 계산이 빠른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무너지지 아니함과 같은 것이라 그러나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그 무너짐이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성경공부 많이 하고 성경 많이 읽고 암기 많이 해서 성경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말이라도 그 말씀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 그것은 놀라운 비밀입니다. 약한 사람이라도 또 부족한 사람이라도 없는 사람이라도 십자가만 붙들면 그 십자가 속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 십자가로 죄사함이 있고 십자가에 의한 치료가 있고, 십자가에 의한 부활의 능력이 있고, 십자가를 통한 평화가 있습니다. 십자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등에 지고 가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시리아의 침략이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애굽의 말과 병거를 의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십자가의 도를 좇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해결하라
고전 1:18 / 최낙중목사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주로 타락한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과 거역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고 힘 있게 외친 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므로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성령에 의한 여러 가지 은사 체험자들이 많았지만,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깊이 깨닫지 못함으로써 성도들 간에 시기, 질투가 있었고 교회 안에 분파가 있었으며, 부도덕한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기회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말하고 십자가를 주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 문제를 십자가로 해결하셨으니, 첫째는 우리 모든 사람의 죄악을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해결하셨습니다. 사 53:6에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였고 벧전 1:18 이하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 인간이 범했는데,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속의 은혜입니다.
엡 2:8 이하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우리들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모두 다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그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죄에서 해방된 자는 또 다시 모든 일을 십자가의 은혜로 해결하게 하십니다.
선한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더러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명의 십자가를 짐으로 복잡한 어떤 어려운 문제들도 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며 그리스도를 닮은 자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남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빌 2:5 이하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입니다. 남자가 평소에 호감을 가지고 좋아하는 연인에게 초콜렛이나 사탕을 마련하여 카드와 함께 전달하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 가장 풍요롭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며 누군가로부터 또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많은 지식과 재물, 그리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사랑할 대상이 없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타인의 원격조정으로 움직이는 로봇에 불과한 인생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생기 넘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사랑입니다. 동식물도 사랑한다고 말하면 건강해지고 물도 사랑한다는 말을 외치면 아름다운 결정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 그런데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 [발렌타인데이]는 주후 269년에 있었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황제 클로디우스 2세는 청년들을 군대에 보내기 위해 “금혼령”을 내렸습니다. 남자가 결혼하게 되면 처자식에 매여서 전쟁이 났을 때 군대에 나가기를 꺼려하고 도망을 가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 주교였던 발렌타인은 황제 몰래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을 결혼시켰습니다. 결혼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을 실천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제는 크게 노하였습니다. 그래서 발렌타인을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고 로마신 쥬피터를 믿으면 살려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때에 발렌타인은 말합니다. “쥬피터는 신이 아니요, 그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이며 참된 신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구원자도 예수님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황제는 발렌타인을 처형키 위해서 로마시장에게 그를 보냅니다. 시장은 법관 아스테리오에게 맡깁니다. 발렌타인이 아스테리오집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시각장애를 입은 한 딸이 있었습니다. 발렌타인 주교는 그 딸을 보는 순간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는 그를 붙들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의 딸의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 아스테리오 법관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고, 전 가족과 일가친척 40여명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눈을 뜨게 된 그 여자 아이는 발렌타인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결국 황제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법관을 오스티시라고 하는 곳으로 끌고 가서 참수형에 처하게 했고 발렌타인은 끌어다가 회당에서 몽둥이로 때려죽이라고 명하였습니다. 그 날이 바로 주후 270년 2월 14일이었습니다. 그 처형이 있기 전 발렌타인은 그 죽음을 앞에 놓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천국에서 만나자는 작별인사를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우리에게 전해준 그런 [발렌타인데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발렌타인처럼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고난이 있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사명의 십자가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가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한 일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등에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
고전 1:18 / 박봉수목사
이슬람교에 대한 자료를 살피면서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저들의 경전인 꾸란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43:63) 그리고 꾸란에서 참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예수에 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꾸란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성경에 나오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과 그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사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이슬람교는 유대교보다 우리 기독교에 더 가까운 종교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자칫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충분히 대화가 가능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가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저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3:55). 십자가에서 죽음을 모면한 후 샘이 흐르는 곳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23:50). 그래서 이슬람교는 예수를 구세주가 아니라 알라가 보낸 위대한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기독교가 예수를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공격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결정적인 기준입니다. 십자가가 빠진 예수는 참된 예수가 아닙니다. 아무리 예수의 기적을 믿고, 예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승천까지 믿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빠지면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아무리 예수를 치켜세우고 심지어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해도 그들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종교, 많은 사상에서 예수를 인정합니다. 치켜세우고 존경을 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말하는 예수 안에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구원이 없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닮아가야 할 모델로 추앙합니다. 그 말씀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그러나 저들의 예수 안에 십자가가 생략되거나 강조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 능력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설명해 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란 무엇일까요? 헬라어 원어로 ‘호 로고스 가르 호 투 스타우르’입니다. 보다 쉬운 말로 번역해 보면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에 관한 말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이 세상에 선포된 말씀”을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요 1장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 로고스 곧 말씀이 이 땅에 선포된 사건으로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한 말씀의 핵심이요 절정이 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온존하게 선포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땅에 선포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 땅에 선포된 말씀은 무엇일까요?
첫째, 공의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십니다. 죄를 지은 자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롬 3:10-12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롬 1:18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죄인을 그대로 버려두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바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요 3: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롬 5:8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죄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저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셋째,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구원 받을 길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다만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 점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갈 1:4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그리고 살후 2:13 하반 절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활짝 열려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선 이 십자가의 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버럭 화를 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다고 고개를 젓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말에 배타적이라고 조롱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이 합리적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입증해 보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선포된 것입니다. 이해시키거나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엡 2:8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 십자가의 도가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 받는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은혜로 믿어져 구원 받게 된 사람에게 능력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가 어떤 능력을 나타낼까요?
첫째, 변화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선 우리에게 변화가 나타납니다.
고후 5:14-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는 우리를 새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사람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주를 위해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위대한 부흥사 가운데 한 분으로 김익두 목사님을 손꼽습니다. 이 분은 원래 황해도 안악시장을 주름 잡던 아주 못된 깡패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미국 선교사 스왈런 목사님의 사경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세례 받기까지 전력을 다해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찾아와 술을 마시러 가자고 하더랍니다. 이 때 김익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니야 나 지금 약 먹기 때문에 술 못 마셔” 친구가 물었습니다. “무슨 약을 먹는데?” “응 신약과 구약이야”
하루는 성경을 읽다가 갈 2:20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아! 내가 죽어야 내 안에 예수가 살고 내가 믿음 안에서 살 수 있구나”라고 깨닫게 됐습니다. 그 후 김익두는 엉뚱하게도 김익두가 죽었다고 부고장을 발송했습니다. 깡패였지만 그래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문상을 왔습니다. 김익두는 멀쩡히 살아서 문상객을 맞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이자 그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깡패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고장을 돌린 것입니다. 이제 내 안에는 예수가 주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선언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함께 예수를 믿기로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내 중심으로 살던 사람을 주님 중심으로 살도록 변화시킵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도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승리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롬 6:6-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십자가의 도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방탕한 생활을 하시던 중에 나이 40에 회심하고 돌아와서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늦게 목사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워낙 술고래였었기 때문에 짓궂게 물었습니다. “목사가 되신 뒤에도 술 마시고 싶은 유혹이 있었습니까?” “이제 전혀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 졌습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이 분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여전히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술 집 50미터 전방에만 가도 술 생각이 간절합니다.”
계속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럴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선 그 자리에서 십자가를 묵상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가게에 들어가서 우유를 사서 마십니다. 그러면 술 생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 술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우유를 사서 마시면 배가 불러오면서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어도 계속 죄의 유혹은 따라다닙니다. 술에 대한 유혹, 음란에 대한 유혹, 방탕에 대한 유혹, 거짓과 술수에 대한 유혹... 우리 힘으로 이런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바라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 충성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고 따를 때 우리는 끝까지 충성할 수 있습니다.
고후 4:7-11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불굴의 용기로 주를 위해 충성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환란과 박해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 전주시 화산동 외국인 묘지에 가보면 군산 영명고등학교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세우 기념비가 있습니다. 바로 데이비스 선교사의 기념비입니다. 이분은 한국에 파송되어 최초로 순교한 여자 선교사입니다. 1896년 군산에서 주로 어린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했습니다. 후에 결혼하여 전주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 서문 밖에서 약방을 개설하고 환자를 치료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선교부가 이곳에 병원을 짓고 본격적인 의료선교를 하게 됐는데 그곳이 바로 전주 예수병원입니다.
이 데이비스 선교사는 누구보다도 전도의 열정이 강해서 전북지역을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전도해서 한해에 1,885명을 전도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분은 몸을 돌보지 않고 전도하는 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또한 이분은 어린이를 사랑해서 혼신을 다해 어린이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전주 예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어린이들을 정성을 다해 돌보다가 약해진 몸이 열병에 전염이 되어 41세의 나이로 1903년 6월 20일 이 땅에서 순교했습니다. 그의 기념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바쳐 선교한 여장부”
이분이 이렇게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 어머니에게 배운 십자가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전도하고 가나한 사람들을 돌보던 본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충성을 해도 끝까지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죽기까지 주를 따르고 헌신하고 충성할 만한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면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말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그 의미가 대단히 응축된 말입니다.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구원의 진리란 말입니다. 조금 더 길게 설명하자면 <십자가의 도>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그 죄 값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난과 죽음을 당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씻으시고 그를 믿는 믿음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으며 멸망치 않게 하셨다는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사고로는 이해되기가 어려운 말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이고 웃기는 말로 여겨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세상에 내려와서 산다는 것이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말이나,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것이 모든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씻을 수 있다는 주장이나, 그것을 믿기만 하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누린다는 가르침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릴 뿐이고 그런 것을 믿는 자들은 전부 정신이 나간 자들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할 만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마을의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또 십자가는 아주 흉악한 범죄자나 도무지 길들일 수 없는 노예나 로마의 황제 또는 제국에 대해 반역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처형된 한 나사렛 청년의 죽음이 어떻게 온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 하나 구원하지 못한 자를 온 인류의 구원자로 믿으라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반문하며 항변할 수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고 특별히 지혜가 없는 사람 중에도 그런 것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반론은 옛날 사도 바울 때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날도 있으며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꼭 같은 조건으로 사셨으며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셔서 우리의 죄를 다 씻으셨으며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이 <십자가의 도>를 확신하며 그 진리에 목숨을 거는 우리는 다 미련하고 모자란 사람들이며 정신 나간 사람들이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그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에서 그는 쓰기를 “십자가의 도가 ...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구원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문 24절에서도 바울은 말하기를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믿음에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신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도 없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지렁이가 우리 인간의 사고를 이해할 수 없는 것보다도 더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렁이와 우리 인간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무한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큰 지혜를 지녔다 할지라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주시고 드러내시는 대로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지혜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부르셨냐 아니냐에 달린 문제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 안에 있지 않으면 세상의 지혜는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 안에 있으면 특별한 지혜가 없는 사람도 오묘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세상적인 지혜가 많은 사람이나 적은 사람을 각각 어떻게 하나님께서 쓰실 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과 지혜에 달린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를 완전히 뒤엎어놓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세상이 자랑하는 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앞에서 사람의 지혜는 그저 무력할 뿐임을 밝힌 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가 힘주어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 말하는 자들은 멸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셨다고 말합니다. 20절에서는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되묻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혜 있다, 율법을 잘 안다, 설득력 있게 말할 수 있다 하며 <십자가의 도>를 부인하거나 미련한 것이라 할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 다 미련하고 무지한 자로 밝혀지며 입이 닫히고 말 것이라는 말입니다. 21절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합니다.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 수도 없으면서 그의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 말하며 믿지 않고 멸망의 길을 가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지혜가 이해할 수 없는 <십자가의 도>를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이들에게 믿게 하시며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22-24절에서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자기들의 합리적 사고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들 같은 눈에 보이는 표적을 보고야 믿겠다는 합리주의에 빠져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보이지 않는 원리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믿지 않으려는 합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자들 모두에게 나약하게 붙잡혀 처참하고 수치스럽기 그지없는 십자가 형을 받고 죽은 자가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주장은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거기에 다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능력이고 지혜인 줄 알 턱이 없어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전하는 자들을 적대하며 미련하다 하며 그 돌 뿌리에 걸린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필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에 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지혜로운 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런 오묘한 진리를 미련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도 지혜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소리 높여 외친 <십자가의 도>입니다.
우리가 확고하게 믿는 모든 것이 사실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경이 증언하며 가르치는 모든 것이 참되고 모든 진리의 유일하고 확실한 근원이며 규범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틀림없다는 보증을 누가 해줍니까? 그것은 오직 성령께서 우리를 우리 안에서부터 설득시키셔서 이루어지는 확신입니다. 우주만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믿습니까? 천지창조가 이루어질 때 우리가 봤습니까? 안 믿으려면 얼마든지 안 믿을 수 있는 말입니다. 안 믿기가 더 쉬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삼위로 일체 되신 하나님이라든가 성육신이라든가 동정녀로부터의 탄생이라든가 죽은 자가 살아난다든가 우리 모두의 부활이라든가 영생이라든가 하는 것들 모두가 안 믿는 것이 더 정상적이라고 여겨질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다 믿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보가 돼서 그런 것들을 믿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공부를 덜 해서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미개해서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시고 믿게 하시면 안 믿고 싶어도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에로 택하신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에 목숨까지 걸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택하심을 받은 증거이며 구원받을 백성으로서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멸시하며 조롱하며 거부하는 자들이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멸망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로 택하심과 믿음에로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이 아무리 많아진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세상은 계속해서 <십자가의 도>를 비웃고 거부하며 우리를 조롱하며 적대시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날로 강해지는 것 같고 <십자가의 도>를 믿는 우리를 더욱 더 어리석은 자들 취급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사도 바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이 어리석으실 수는 없지만 사람의 지혜를 다 모아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혜의 발끝에도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코 약하실 수는 없지만 세상이 아무리 강해진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서 견딜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우리와 함께 한다면 무엇이 불가능하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십자가의 도>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힘입어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도>를 믿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그 은혜에 신실한 믿음과 열심 있는 전도와 섬김으로 응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고전 1:18 / 이필재목사
지금은 교회 달력으로 대림절 기간, 대강절 기간 이런 말을 씁니다. 성탄절이 되기 전 4주간을 말하는데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거룩한 사건을 기다리는 의미로 지키는 기간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하나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부분을 생각함으로 성탄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또 대림절 기간에 유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수를 믿고 살아갑니다. 왜 믿어야 하는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의 기본적 진리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을 구원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한 사람을 불신자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성경 자체에서 예수라 누구인지 증거하는 기록을 우리가 조명함으로 예수님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하는 시간으로 가져봅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을 먼저 설명하면 고린도 지방이 배경입니다. 이때 고린도 지방은 헬라의 가장 앞서가는 대도시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인구 75만이 살았고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맛묘스 왕이 이 도시를 침략해 완전히 파괴시킨 도시로 약 100년이 지난 후 줄리어스 시저가 다시 이 도시를 보건 시켰습니다. 지역적으로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교통상의 요지이고 외항선박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항구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의 선박산업으로 세계적 부자가 된 오나시스가 재클린을 데려다 살림을 차렸던 바로 그 도시입니다.
이런 환경의 도시는 경제가 활성화되고 문화적으로 발전하고 교육기관도 많아지고 지식인들, 경제인들, 유흥업소가 자연히 많아지게 됩니다. 특별히 이 도시는 철학의 도시로 아주 유명합니다. 그래서 신전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고전 영화를 보면 역사상 유명한 신전인 세라피스 신전, 아시스 신전, 아프로디테 신전이 다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도시에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들어가 지금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 철학의 사변적 사고는 확실한 게 있습니다. 합리적이어야 진리가 됩니다. 그런데 바울의 설교는 그들이 들을 때 절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이다.” “아니, 예수는 예수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지 어떻게 예수가 하나님이냐?” “그는 인간이면서 하나님이 되는 존재이다.” 이 말에는 합리성이 없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단 말이나 사람이지만 하나님이란 말은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고 일반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셨고 그 사람은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나셨고 살아난 그 사람은 하늘로 올라갔으며 때가 되면 그 사람은 세상에 다시 올 것이다. 그것을 믿어라.” 고린도 사람들이 “여보시오! 당신 어디서 온 사람이오? 세계적 사변적 사고인 헬라 철학 중심지에 와서 그런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우리에게 믿으라고 하니 바울이 전하는 기독교 진리는 미련한 것이다. 당신이 전하는 것은 미련한 종교이다.” 이렇게 핀잔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고린도 시민에게 대해 바울이 오늘 말씀으로 답변하는 것입니다. “맞다. 이 십자가의 도는 멸망 받을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기독교 진리를 역설적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말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합리성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 이것이 합리성이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맞지 않잖아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요? 그런데 사실입니다. 말은 안 되지만 사실적 사건, 이것을 패러독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성경에서 예수를 향한 어떤 증거가 있는가 몇 가지 조명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은 모세를 보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어느 날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너무나 크고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계속 이 일을 하라고 하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질문을 했어요. “나더러 이렇게 엄청난 하지도 못할 일을 강제로 시키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렇게 말합니다. “지금 나에게 당신의 정체를 밝히시오.” 존재성에 대해 의문을 던졌습니다. 이 말을 모세가 좀 지혜스럽게 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보고 누가 너를 우리에게 보냈느냐고 물을 때 내가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되겠습니까? 빨리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나에게 대답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나다.” 출애굽기 3장 14절 아닙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고 말하라.”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생각해요. 성경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생각을 고려하거나 살피거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일방적 발표를 하실 뿐입니다. 고린도 철학자들이 미련한 종교라고 비판을 하든지 말든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든가 죽었다고 별 소리를 다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 이것이 하나님 사역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에 대해서 어떤 증언을 하고 계신가? 마태복음 3장 16~17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면 하나님 앞에 이런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도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셨습니까? 하나님이 무슨 아들이 필요합니까? 그러면 이 나사렛 동네에 살고 있는 이 요셉의 아들 예수가 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십시오.” 안하십니다. “잔소리 말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 이상의 아무 대답도 성경은 안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증거하고 계신가?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된 최종적 이유는 이 말 때문입니다. “네가 불경죄이지, 요셉의 아들이고 직업은 목수인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느냐?”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성경 말씀에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러하거늘” “이런 놈은 때려 죽여야 돼!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돼?” 그런데 예수님이 무슨 설명을 하십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이 사시고 계실 당시에 주변 사람들의 갈등 부분을 우리가 성경에서 이해합니다. 예수의 인성 부분에 대해 아무 의심이 없습니다. 나사렛의 한 시민의 한 사람이요 요셉의 가문에서 태어난 집의 아들이요 직업은 아버지를 도와서 목수 일을 하고 나이는 30세가 된 사람! 그는 우리와 똑같이 먹고 자고 즐거우면 웃고 동네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노동의 품삯으로 경제에서 활동을 하고…. 거기에 대해 아무 의심을 안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선언과 함께 그에게 나타나는 게 무엇입니까? 인성 부분이 아닌 신성 부분이 그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그 주변 사람들의 갈등 부분이 된 겁니다. 그 갈등 부분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이는 분명 인간 예수에 불과한데 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된 사람이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체험했으면서도 강풍이 불어 배가 뒤집히려고 할 때 그것을 잔잔케 하셨잖아요? 그랬더니 제자들이 뭐라고 그럽니까? “이가 뉘기에, 도대체 이 분이 누구야? 어떻게 자연 조건을 초월하는 힘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지금 했잖아?”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이것은 자연 과학적이라 누구의 힘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위기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내가 해결하겠다.” “바다여, 잔잔하라!” 말 한마디에 그 풍랑이 일던 바다가 한 가운데서 고요해 지니까 “이가 누구야? 당신 누구야? 어떻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했느냐 말이야?” 이런 갈등이 생긴 겁니다. 물고기 2마리, 보리떡 5개를 가지고 12제자들이 나눠 먹었다면 거짓말이라고 보겠는데 5천명 이상이 함께 배불리 먹은 현장 사건입니다. 12바구니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참석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픈 배가 먹고 배불렀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봅니까? “이가 누구야? 아니, 어떻게 말 한마디 기도로 말미암아 없는 식량이 5천명이 먹고 남을 수 있는 식량이 이렇게 생기는 거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면 이 사람 누구야?” 이것이 갈등입니다. 죽어서 장사지내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가서 상식적인 일로 생각해 보세요. 시체가 부패해서 벌써 썩어가고 있는 그 앞에 가서 죽은 사람에게 “나사로야, 나와!”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헬라 철학의 사변적 사고에 의해서 미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지 죽은 사람에게 이게 무슨 소리야? 이게 합리적이야, 논리적이야?” 아무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적 사고는 합리성이 있어야만 진리인데 죽은 사람에게 가서 나오라니 어떻게 나오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패러독스는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게 뭐냐? 아니, 당신 누구야? 죽은 사람이 당신의 말 때문에 살아 일어나다니! 그러면 이는 누구인가?” “내가 말했지 않느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세요. 사람들이 답답해서 예수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내가 메시야라면 우리에게 밝히 말하라.” 즉, 이 말은 “합리성 있게,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라.”라는 소리입니다. 예수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이미 말했느니라.” 그 이상 아무 대답도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마태복음 1장 20~21절을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천사들이 예수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요셉이라는 청년이 이웃집 처녀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약혼한 상태입니다. 기다리고 있는데 약혼자가 임신을 했다고 하니 그것을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몰라도 대한민국 남자 가운데는 받아들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자존심이 강하거든요?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런데 데리고 와서 결혼했잖아요? 어떻게 했어요? 요셉이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천사는 거짓말 안한다.’ 이것은 자신이 반드시 해야 될 사명이라고 받아들였죠? 메시야 출현이 히브리 민족의 문화 속에서 요셉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자기의 약혼자를 통해서 일이 이루어진다는 천사의 증언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에 마리아를 데리고 온 겁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깝게 있었던 자들의 증언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는데 대표적 증언으로 베드로의 증언을 보면,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말하라.”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맞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알게 해주셨다.” 아마 예수님의 생애 중 가장 기뻤던 순간이 그때일 겁니다. 이 고백 하나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역했고, 오늘 저녁에 75명의 세례식이 있는데 누구한테 세례를 줍니까? 이 고백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네,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의 구원 메시야입니다. 그렇게 믿으십니까?” “믿습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바울의 고백에서 한번 찾아봐요. 본래 바울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이 땅에서 잔멸하려 할새” 다 죽여 버리려고 했습니다. 정부가 주는 힘을 믿고 공문서를 받아가지고 잔멸하기 위해 성경 말씀 그대로 ‘이 예수라고 하는 사람을 싹 죽여 버리는 것이 문제가 없어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잖아요? 그런데 그가 예수 믿었잖아요? 그래서 그가 성경 바울서신 13권을 남겼는데 그 바울서신 13권이 말한 골자는 하나입니다. “예수는 메시야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 그 많은 말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뭐라고 그럽니까? “예수가 살아나서 본 형제들이 지금 태반이나 살아있다. 한꺼번에 500명이 본 적도 있다. 그런데 태반이나 지금 살아있다. 그러니 어떻게 거짓말 하냐?” 바울은 예수를 그렇게 증언했잖아요?
그러면 이제 예수 자신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아닌 정 반대의 입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을 성경에서 한번 들어봅시다. 누가복음 23장에 로마 백부장이 말합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백부장은 왜 거기에 와 있습니까? 이 장면은 골고다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시간에 사령 집행관으로 와 있는 겁니다. 그가 지시해서 지금 로마 병졸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일어나는 광경을 보고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을 보고 심히 두려워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렇게 증언했잖아요? 자기들 손으로 죽인 예수를 보고 자기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다못해 십자가의 강도까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는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지만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자리에서 구원해 주시잖아요? 강도도 예수가 메시야됨을 증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잘못하면 강도만도 못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는 마지막 말을 이 땅에 뭐라고 남겼는가?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스스로 뉘우쳐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사탄의 종노릇하던 가룟 유다도 이 세상에 마지막 남긴 말은 “예수는 죄가 없도다.” 그의 무죄성을 말하고 자살해 죽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 방해꾼인 마귀들은 성경에서 뭐라고 말하는가?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광야 금식 기도하러 가서 끝나셨을 때 마귀가 시험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 말하는 거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그 마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실히 믿고 있기 때문에 그 능력까지 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거 다 할 수 있지 않느냐? 왜 안하느냐?” 그렇게 유혹한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한 의심을 마귀는 한 일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도 거짓말 안합니다. 귀신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아보고 정확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잘못하면 귀신만도 못하게 됩니다. 더 깊은 귀신의 고백! 마가복음 5장 6~7절 밤낮 무덤 사이에서 제 몸을 상하며 살고 있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를 보고 한 말이 뭐냐? 다른 사람은 예수인 줄도 모르는데 그는 멀리서도 예수를 알아봤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멀리서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이 말이 틀렸습니까? 정확한 말을 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귀신이 한 말입니다. 우리가 귀신만도 못한 신앙고백을 하며 사니까 그렇게 예수 믿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장 34절에 보면 마귀가 감탄사까지 표현합니다. 33절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가로되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 기도할 때 그 귀신만큼 감탄사를 씁니까? “주님!” “예수님!” 그러지만 “아! 예수여!” 안 그러잖아요? 귀신들은 예수의 일종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의심하는 말이 성경에 없습니다. 다 정확한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26절에서 28절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다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본 후에 고백하지요? “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만져봤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하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될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평생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결국 예수의 구주성에 대한 고백 하나를 분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가 누구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왜 여기 오셨습니까?” 바로 이 문제! “나와 예수는 무슨 상관인가?” 이것이 해결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실하게 잘 살아요. 그러나 이 세상이 삶의 목표 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고 50~60년 살다가 죽는, 세상이 아닌 영생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이 세상은 그러한 하나님의 진리성이 이 세상에 확장되어 나가는데 필요한대로 내가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순례자라고 부르잖아요? 하나님 나라 확장에 필요한대로 쓰임 받으면서 살아가는, 그것을 위해서 때로는 순교까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됨입니다. “예수가 누구인가?” 이 문제 해결을 해야 우리가 성탄을 맞이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곧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은 메시야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예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이 질문에 대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는 인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렇게 믿으시면 “아멘”하십시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오신 성탄절을 저희들이 대림절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는 누구인가 이 문제를 내 영혼에 질문했을 때 나의 대답은 무엇이며 예수와 나와는 무슨 상관인가 이 문제를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모두에게 가득하게 인도해주옵소서. 그래서 이번 성탄절에 우리는 예수를 맞이하는 행복하고도 기쁜 감격의 성탄을 맞이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십자가의 능력
고전 1:18-25 / 오세원목사(대구칠곡교회)
미국에서 21세기 C.S. 루이스라는 뉴스위크지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목사, 미국의 뉴욕 멘하탄 리디머 장로교회 담임목사인 팀 켈러가 쓴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책 이름이 『왕의 십자가』입니다. 왕이 십자가를 지고 갔다는 이야기를 잘 믿기지 않는 표현입니다. 십자가를 진 왕이 있었다고 할 때 그것이 잘 믿어집니까? 우리가 보통 십자가를 이야기 하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고통이요, 고난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하면 패배나 낙심과 좌절 등을 생각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18절 봅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3-24절 말씀을 봅시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는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능력인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는 강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십자가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십자가는 죄사함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가장 큰 존재가치는 죄사함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는 결국 죄사함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지난 18세기 독일의 스톤벅이라고 하는 유명한 미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죄의 길에서 회개한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을 그리고, 그 그림 밑에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 주느냐?”라는 문구를 적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이 독일 뒤셀도르프 박물관에 걸려 있었는데 한번은 독일의 한귀족의 젊은 아들이 그 박물관에 들어와 오래 머물러 서서 그 그림을 주목하여 보고 그 아래 쓴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청년의 마음에는 변화가 일어났고 그 때부터 그는 완전히 변하여 귀족의 모든 호화스러운 생활을 버리고 그 일생을 복음 전파에 바치게 됩니다. 그가 곧 유명한 보라비아 교단의 창립자이기도 한 진젠도르프백작입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몸소 질고를 겪으신 주님의 십자가 보혈은 이러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자기극복의 능력입니다.
요즘 의대생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과목은 성령외과 의사라고 합니다. 대부분 성형수술이란 봄 부족한 부분을 완전하게 보완한다는 의미로 수술을 하는데, 정작 이 성형수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플래트경”은 몸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아이는 뼈와 관절의 심한 질환으로 언제나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들과 어울릴 때도 적응하지 못해 늘 소외되었는데, 이런 아이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아버지의 교훈과 격려였습니다. 아버지는 “너의 상처를 찬란한 별로 만들어라” 고 말하며 꿈과 힘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 후에 영국외과학회 회장, 국제외과학해 회장을 지내는 훌륭한 의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아픔과 약점이 있습니다. 주님도 십자가 고통의 쓴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원컨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고백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셨기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상처를 극복하고 오히려 더욱 강점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있으면 얼마든지 자신의 핸디켑을 장점으로 만들어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십자가를 잡고 나아가면 주십니다.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보면 힘이 솟아납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여러분의 약점과 나약함을 극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십자가는 화평케하는 능력입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인물 중에 오자서가 있었습니다. 초나라 평왕은 우매하여 충신 오자서의 아버지를 죽이고, 오자서마저 죽이기 위하여 많은 상을 걸고 그를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도망중인 오자서는 큰 강을 만나는데 한 어부의 도움으로 강을 무사히 건너게 됩니다. 그는 생명의 은인에게 차고 있던 보검을 주려 하는데, 어부는 거절합니다. “왕의 엄청난 포상도 하찮게 여긴 내가 어찌 이런 칼 한자루를 받겠소?” 오자서는 한 가지를 당부하였습니다. “뒤쫓는 군사들에게 저의 종적을 말하지 말아주시오” 이 말을 들은 어부는 “난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를 구했는데 그대는 아직 나를 ale지 못하니 그대가 붙들리면 당장 나를 의심하지 않겠소?” 하더니 곧장 물속으로 뛰어들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뒤에 오자서는 오나라의 왕에게 발탁되어 힘을 갖게 되었고, 초나라와 정나라를 정벌합니다. 존망의 위기를 만난 정나라 왕은 나라를 구한 사람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선호하는데, 이때 전에 오자서를 구하고 자신은 스스로 죽은 어부의 아들이 나서서 나라를 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사죄의 은혜를 주님으로부터 받아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도 주님을 따라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가진 자나 믿는 자는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넷째, 십자가는 내려놓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 종착은 어디입니까? 거기에 무엇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봅시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내려놓음의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 다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에 맞는 땅과 형편에 맞는 생활필수품 등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려놓은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려놓았기 때문에 온 인류의 죄를 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려놓지 못했다면 오늘의 지구는 없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 가운데 ‘노마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유목민이나 정착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하는 말로 전통적으로 유목민 생활을 해온 몽골 민족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이어서 나온 말로 ‘천국 노마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가라하시면 가고, 서라하시면 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미국 하바드 대학교를 박사학위를 받고 몽골선교사로 헌신한 이용구 교수는 이 책에서 자신의 것을 내려놓게 된 배경과 이 책에서 자신의 것을 내려놓게 된 과정과 그것을 내려놓은 이후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에 대해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대상은 앞날의 방향과 미래계획, 매일의 필요에 따라 채우는 물질, 생명과 안전, 생명과 안전, 결과를 예상하는 경험과 지식, 죄의 판단의 짐, 명예와 인정받기의 욕구, 사역의 열매 등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사람들은 깊은 불안가운데로 빠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가장 안전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것이 진짜 우리 것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십자가는 헌신의 능력입니다.
로마의 제5대 황제 네로(37-68년)는 17세에 왕이 되어(54-68재위) 통치 초기에는 해방노예를 중용, 감세, 원로원 존중, 매관매직 폐단 시정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차 그의 포학한 성격이 노골화 되어 의붓동생과 어머니와 아내를 살해하더니 마침내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그 책임을 기독교회에 전가시켜 그리스도인 대학살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때 로마의 성도들이 베드로에게 이 환난을 피하여 생명을 보존하도록 간곡하게 권고하므로 그는 남쪽 성문을 나와 압비아 가도를 따라 도망가고 있는데 마침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시는 것을 본 베드로는“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나는 네가 버린 로마의 어린 양들을 위해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러 가노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충격 받은 베드로는 주님의 마음을 읽고“주님 십자가는 제가 지러 가겠습니다”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박해 중에도 목회하다가 바티칸 언덕에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Via Appia 길목에“쿼바디스기념교회”가 세워져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기 중심적 생각을 버리고 주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도록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헌신하신 마지막 종점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헌신해야 할 상황이 발생하면 그 자리에 있다가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십자가는 헌신의 절정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헌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전북 삼례교회에 문형일이라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예배당을 짓다가 완공을 못본 채 불신자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집사는 예수님께 욕을 돌리고 불신자들의 비난을 받게 된 것이 늘 마음 아파하던 어느 날 신문에서 전주 예수병원에서 사람의 눈을 사겠다는 광고를 발견하고는. 문집사는 주님의 도우심이라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는 자기 부인에게 이를 알렸으나 노발대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눈이라도 바쳐서 주의 전을 건축한다면 얼마나 영광이겠는가” 하고 결심한 후 병원에 찾아가서 자기 눈을 팔겠다고 했습니다. 원장은 예배당 완공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감동받아 눈을 뽑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병원에서 헌금을 해 주었고, 본 교단으로 알려서 미국 신문에 보도되기 까지 했습니다. 이를 본 어느 미국인이 헌금을 해 주어서 교회를 건축하여 완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헌신하고자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여섯째, 십자가는 나눔의 능력입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가 있기까지는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이 인류에게 나눠주신 떡과 잔입니다. 한번 말씀드린 기억이 납니다만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자가 친구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인색하다고 날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러나 난 내가 가진 모든 제산을 자선단체에 기증하기로 유언장을 작성해 두었다네‘
그러자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암소와 돼지 이야기가 자네한테 교훈이 될 수 있겠군. 그래, 돼지가 암소를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았다네. ”사람들은 입만 열면 자네를 정 많은 친구라고 떠들어대지. 자낸 사람들에게 우유를 제공하니까. 하지만 사람들이 나에게서 얻어가는 것이 자네보다는 한 참 더 많다네. 훈제한 허벅지, 뱃살고기, 정제된 돼지기름은 물론 심지어 족발까지 한두 가지인가. 그런데 날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그들에게 나는 한낱 돼지요 욕심꾸러기일 뿐이야.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
암소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네.
‘그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나를 내어주기 때문일거야!’
우리 주님도 공생의 기간 내내 자신의 몸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모습을 닮아 언제든지 주님이 원하실 때, 이웃을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기꺼이 나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내어줌의 절정이요, 모범입니다.
주님을 것을 내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네
금은보화 자녀들까지 주님 것을 내 것이라
아버지여 철없는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맡긴 사명 맡긴 재물을 주를 위해 쓰렵니다.
십자가의 능력가운데는 앞에서 열거한 능력 외에는 더 많은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고전1:18-31 / 이윤재목사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나오셨고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번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가장 기독교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다른 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저는 어릴 때 습관적으로 교회 다닐 때를 제외하고 조금 철이 든 다음부터 항상 이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믿는 신앙의 핵심이 무엇일까? 믿는다, 믿는다 하는 데 나는 무엇을 믿는 사람이고 무엇을 믿어 하는가?”
그러다가 이스라엘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로 간 것은 처음에는 미국으로 못 가서 어쩔 수 없이 간 것이었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깊은 계획이 있었슴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저는 처음부터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배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도대체 기독교란 어떻게 생긴 것일까? 구약으로부터 이어져 유대교의 뿌리에서 생겨난 기독교는 어떤 본질적인 특징을 가진 것인가? 그렇게 뿌리를 찾다 보니 점점 유대교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문헌을 읽게 되고 유대인의 역사, 생각, 정신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거의 유대교신자처럼 되었습니다. 한참 있다가 “아, 이것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유대교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연구가 안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가 마침 사순절이어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묻힌 “성묘교회”나 둘러 보고 가자 하고 성묘교회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성묘교회에서 제 인생에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적이 감도는 교회에서 한참 무덤쪽을 바라보고 있는 데 짧은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사람이 저에게 다가오더니 저를 어디론가 데리고 갑니다. 저도 모르게 따라 갔는 데 그가 강단위로 올라가 큰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보았는 데 웬일입니까? 그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분의 옷은 찟기어 있었고 몸은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사라졌습니다. 그때 제가 퍼뜩 깨어나면서 제 머리에 전광석화같이 한 말씀이 스쳐갔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저는 성경에 이 말씀이 있는지는 알았지만 정확한 장절은 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곧바로 집으로 달려왔고 그리고 성경을 뒤적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고전1:22-24절에서 찾았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이 사건으로 저는 성경의 핵심을 재발견했습니다. 몰랐던 것은 아닌데 확신하지 못했던 것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다른 종교나 철학, 특히 유대교 문헌에 없는 유일한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유대교 역사에는 훌륭한 랍비도 있고 기적과 능력도 있고 부활신앙도 자주 나타나지만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유대인 지도자중 누구도 남을 위해 십자가 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목회자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제가 평생 씨름해야 할 과제임을 알았습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이 왜 우리가 믿고 붙잡아야 할 신앙의 핵심인지? 거기에 집중해야함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는 십자가와 관련하여 고민이 많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십자가 신앙이 성경적 십자가 신앙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문제는 십자가를 신앙의 중심에 두지 않거나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십자가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만 성경과 많이 다른 십자가 신앙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느냐? 오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십자가 신앙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십자가 신앙의 세 가지 핵심을 만납니다.
십자가는 약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종류의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요 다른 하나는 헬라인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당시 세계를 말하는 이스라엘식 표현방식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사고에 의하면 세계는 선택받은 유대인과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방인을 대표하는 사람이 헬라인입니다. 그러니까 세계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있고 헬라인이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유대인에게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고전1:23,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유대인들은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리낀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거리낀다”는 말은 “넘어지게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길거리에 있어서 발뿌리에 채여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돌맹이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거리끼는 돌, 거침돌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십자가를 싫어하는지 한번은 제 딸이 히브리 유치원을 다니다가 산수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았더니 플러스 표기를 잘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더하기 표시를 +로 하지 않고 우리 말 오자의 밭침만 따서 ㅗ로 표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하기 표시를 그렇게 하면 안돼” 했더니 딸이 말합니다. “아빠, 선생님도 그렇게 쓰고 친구들도 그렇게 써” 합니다. 제가 깜짝 놀라서 다음 날 히브리 대학에 다니는 학생에게 “플러스 표시를 어떻게 하느냐?” 물었더니 그 학생도 ㅗ로 표시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대학생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플러스 표기를 하다가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도 싫다”. 이 정도가 유대인이 생각하는 십자가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하는 공통적으로 하는 플러스 포시를 이스라엘만 다르게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 보신 분은 아십니다. 도로마다 교차로가 있습니다. 보통은 그 교차로에 신호가 있고 신호에 따라 차들이 다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사거리는 신호도 없고 모두 원형입니다. 십자가 형태가 아니고 원형입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요? 십자가 모양도 싫어서 그런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메시아관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시겠습니까? 고전1: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이 짧은 한 마디가 유대인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해줍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좋아합니다. 표적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원형은 다윗입니다. 다윗처럼 골리앗도 이기고 천하 대적을 이긴 후 시온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메시아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생각하는 메시아는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입니다. 다윗같이 초월적인 지혜와 불가사의한 용기를 가진 전쟁용사입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반드시 죽어서도 안되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메시아로 믿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에서 33년 살다가 어느날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토록 사람들이 메시아라고 믿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고 기대했던 사람이 죄수의 몸으로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입니다. 성경은 나무에 달린 자를 저주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신21:22-23,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아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런데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다윗 같은 전쟁용사는 그만 두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유대인 같으면 그렇게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 이해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힘”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힘을 추구하며 삽니다. 경쟁사회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입니다. 돈도 힘이고 권력도 힘이고 심지어 스펙도 힘입니다. 그렇게 힘을 추구하다가 교회오면 사람들은 더 힘이 들어갑니다. 옛날 교회에서 그런 교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직책도 높았습니다. 그런 그가 스스로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래서 고마워서 심방가서 물었더니 아주 어릴 때 교회 나갔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떠나 세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답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었습니다. 세상의 성공은 바닷물같이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납니다. 그래서 어릴 때 다닌 교회가 생각나 다시 교회 나왔습니다. 교회나와서 온갖 봉사를 다 했습니다. 궂은 일은 도맡아서 하고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안 보입니다. 처음에는 아파서 그러나 바쁜 일이 있나 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님이 하는 말이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면서 담임목사님이 만나 보라고 합니다. 제가 어렵게 만났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때 그 분이 대답합니다.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재미가 없어서 그렇지요”. 그는 끝내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생각했습니다. 왜 그는 스스로 왔다가 스스로 떠났을까? 제가 깨달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는 세상에서도 성공했지만 교회에서도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힘은 다 가졌지만 교회의 힘은 없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하면 교회의 힘이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많이 알아주고 금방 사람들앞에 세워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종류는 달랐지만 힘을 추구하고 살아온 그의 일생은 교회 밖이나 안이나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처럼 그는 이미 다 가졌지만 교회에서 또 하나의 힘을 갖기를 원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가 지치고 잘 안되니까 그만 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예수믿는 목적을 자기 성공에 둘 때 이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회직분을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분상승의 기회로 삼을 때 이 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십자가는 본래 약한 사람이 지는 것입니다. 옛날 십자가는 노예나 종이 졌습니다. 십자가 신앙은 약함의 신앙입니다. 강한 자가 되려고 십자가 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자가 되려고 십자가 집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으로만 가는 신앙은 마틴 루터는 “영광의 신앙”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을 요즘 용어로 “승리주의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약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강해질 수 없고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사람은 진정으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독일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가 나약해서 싫다고 떠났지만 정말 이 시대 교회의 문제는 약해지지 않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너무 강해져서 세상을 정복할 것처럼 소리치지만 세상은 교회가 강해지라고 소리치지 않고 약해지라고 소리칩니다. 우리에게 힘이 필요하다면 자기를 죽이는 힘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힘은 남을 무릎꿇게 하는 힘이 아니라 내가 무릎을 꿇는 힘입니다. 교회는 더 부드러워져야 하고 신자는 더 약해져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아버지 교회에서 어머니 교회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잃었던 자식들이 돌아옵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헬라인입니다. 헬라인에게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다시 22절 보면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했습니다. 헬라인은 곧 그리스인입니다. 헬라인들은 당시 가장 지혜로운 백성에 속했습니다. 왜냐하면 철학이 그리스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란 “필로소피아” 곧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철학은 곧 “애지(爱知)”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리스토텔레스등이 그리스 철학의 황금시대를 열였습니다. 철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합리성입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자주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합니다. 어떻습니까? 그 합리적인 눈으로 보면 십자가 달린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겠습니까? 어떻게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당시 십자가형은 노예나 종들에게만 허용된 처형방식이었습니다. 로마의 시민권만 있어도 아무리 큰 죄를 지었어도 십자가형에는 처형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요? 노예만 아니면 십자가형을 면제받을 수 있었는 데 어떻게 하나님이라는 분이 죄도 없이 십자가에 죽습니까? 그것이 합리적인 이야기입니까? 미련한 짓 아닙니까? 23절에 “미련한 것이로되”했습니다. “미련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모리아”입니다. 이 말은 “웃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신나간 것”이란 뜻입니다. 아니 제 정신이면 괜히 십자가에 죽습니까? 그나마 죄도 없다면서 왜 죽어요? 이해가 가는 이야기입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그렇게 어리석게 죽지 않았습니다. 제우스를 중심한 12주신들은 인간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도 갔습니다. 싸우기도 하고 심지어 중상, 모략, 거짓말도 했습니다. 서로 치고 박고 싸워 끝까지 이기는 자가 최후 승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어떤 신을 소개합니까? 빌2:5-7,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과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스스로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죽은 신을 소개합니다.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옛날 헬라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제우스같은 강한 신을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령하고 통치하고 다스리고 지배하는 신, 그런 신을 찾고 있습니다. 정부나 기업이나 학교가 요즘 공통되게 외치는 말이 “경쟁력”입니다. 경쟁력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어떻게 하든 남을 제치고 끝까지 살아남는 세상적 처세술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것입니다. 미련한 것입니다. 바보같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살면 이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승리하고 최후 승자가 되겠습니까?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일생 바보같이 살던 일생이었습니다. 어느 정월 초하룻날, 아침 일찍 제자 하나가 장박사에게 세배를 올렸습니다. 장 박사는 웃으며 이렇게 덕담을 했습니다. “금년엔 나를 좀 닮아서 살아봐”. 제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처럼 살면 바보처럼 살게요”. 그러자 장기려 박사가 말했습니다. “그래. 바보처럼 산다는 소리를 들으면 성공한 거야. 바보처럼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아나?”.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바보처럼 사는 것입니다. 합리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기 위해 처세술을 배워주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처럼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다. 애플사의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굶주리며 살고 바보처럼 살아라“. 그는 그 말대로 살다가 갔습니다. 잘 먹기 위해서는 좀 더 굶주려야 합니다. 더 잘 살려면 더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말 ”바보“는 ”밥보“에서 왔디고 합니다. 이 말은 밥만 축내는 ”밥통“이란 뜻입니다. ”식충이“와 같은 망입니다. 똑똑한 사람과는 반대입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영약한지 도무지 손해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툭하면 교회문제를 가지고 법정으로 갑니다. 사건만 나면 목사고 성도고 없습니다. 끝까지 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저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내 죄입니다”하고 국민일보에 신문내는 사람도 없습니다. 뻔히 잘못 해놓고도 변명을 일삼습니다. 희생하는 교인들 보기 힘듭니다. 희생도 내가 할만한 수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야 희생입니다. 교회 중진이 수요일, 금요일에 나와 기도하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하루 결근하고 여수에 교인 어머니 돌아가신 집에 문상가는 것이 희생입니다. 부자가 매달 10만원씩 감사헌금하는 것은 희생이 아닙니다. 일용근로자가 매주 10만원씩 헌금하는 것이 희생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머니가 위대한 것은 희생때문입니다. 거창고등학교 전영창 선생은 직업 선택의 10계명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첫째 월급이 적은 쪽으로 가라. 둘째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셋째 승진의 기회가 없는 곳으로 가라. 직장생활도 그리스도인은 어리석게 해야 합니다. 아무도 안 가는 데로 가고 아무도 안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유한양행의 유일한 사장은 그런 의미에서 바보였습니다. 그 큰 기업의 회장이 19년 동안이나 쉐퍼 만년필 하나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만년필뿐 아니라 무슨 물건이든지 사면 좀처럼 새것으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식사할 때는 반찬을 다섯가지 이상 차리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가 76년을 일기로 죽음을 맞을 때, 유품으로는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 몇 가지와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회사의 용품 하나 쓰는 일에도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했습니다. 일하지 않는 주말에는 회사차를 개인용으로 사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서를 비롯한 간부진도 일절 부르지 않았습니다. 회사의 연필 한 자루도 개인용으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프면 사우공제회에 가서 직접 약을 사서 먹었습니다. 죽은 뒤에 공개된 유언장에는 손녀에게 대학 졸업할 때까지 학비 1만 달러 주고 딸에게 유한중고등학교 안에 있는 땅 5000평을 주어 유한 동산으로 꾸미는 것 외에 모두 사회에 환원했습니다. 아들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라고 유언했습니다. 정말 바보같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업정신을 이야기할 때마다 유일한을 말합니다. 그 기업정신이 곧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도 하나님의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어리석게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죽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죽는 것입니다.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죽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나마도 가장 잔인하게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형은 인도, 수그디아인같은 야만인들에게서 처음 시작되어 주전 2-3세기, 로마에 의해 가장 잔인한 사형 수단으로 정착했습니다. 이 형벌이 무서운 것은 사람을 육체적으로만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고통스럽게 죽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도 금방 죽지 않고 수 시간동안 고통하다 죽기 때문에 최대한 오랫동안 형벌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6시간이나 고통을 당했습니다. 정신적으로는 엄청난 모욕과 온 몸의 옷을 벗겨 수치를 당하게 함으로써 정신적으로까지 고통을 주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는 반드시 육체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 법적으로 죽었습니다. 십자가가 시인과 화가에 의해 자주 미화되었지만 십자가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사형 도구입니다. 십자가의 가장 큰 기능은 죽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기 보다 빨리 부활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어느 교회 주일학교에서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집을 팔고 차도 팔고 그리고 가지고 있는 모든 걸 팔아서 교회에 헌금한다면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아니요”. 선생님이 또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동물을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생각보다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판단을 하고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지요?” 그때 저 뒤에서 맹구가 손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먼저 죽어야돼요”. 맹구는 성경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죽어야 천국간다“. 우선 죽어야 부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는 것이 어디 쉽습니까? 어느 암 병동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열흘을 넘길 가망이 없군요. 마지막으로 만나보고 싶으신 사람은 없나요?” 눈을 지그시 감았던 환자가 눈을 뜨고 말한다. “왜 없겠습니까?” “그렇군요, 물론 가족들” “아닙니다.” “예? 그럼 누구?” 환자가 말했습니다. “다른 의사요.”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영적인 죽음도 우리가 무서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지 않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약 100년전에 살았던 토저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그의 책 <철저한 십자가>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할 수 없는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한 방향밖에 바라볼 수 없다. 옆을 보거나 뒤를 돌아 볼 수 없고 오직 앞만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둘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과거 자기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아침에 길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여보, 5시에 다시 돌아오겠소”라고 한 말의 약속을 지킬 수 없습니다. 못박혔기 때문에 꼼짝 없이 붙잡혀 있어야 합니다. 새째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자기 계획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계획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일은 죽는 일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침체와 일탈(逸脫)은 십자가에 죽으라는 복음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너무 쉽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두 가지를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아멘. 둘째 “나는 이제 육체가운데서 매일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살겠다”. 하나는 죽었다. 또 하나는 “죽여라”. 목회자는 교회성장을 자기 성공의 척도로 삼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사는 나의 성공과 행복의 수단으로 삼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요한 비안네의 다음 기도를 좋아합니다. “거룩하신 주여! 저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저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살게 하시니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감사하고 또한 나를 십자가에 못박힌 채 살게 하시니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어야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었다가 다시 산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순절, 십자가에 가까이 갑시다. 눈에 보이는 저 나무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가까이 갑시다. 십자가에 약한 자로 달린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약해야 강해집니다. 십자가에 어리석은 자로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어리석어야 지혜로워 집니다. 십자가에 죄없이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 갑ㄱ시다. 죽어야 삽니다. 22절부터 다시 읽어보시겠습니까? 고전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어리석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이렇게 글을 써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가까이.
주여, 저로 하여금 십자가 나무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분에게로 가까이 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약해져 주님의 능력으로 강해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어리석어져 주님의 은혜로 지혜로워지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죽어 주님과 함께 매일 다시 살게 하소서
십자가로 가까이 십자가로 가까이 내 생의 종착역이 가까워질수록 주님의 십자가에 더 가까이 가게 하소서.
그리스도-나의 능력, 나의 지혜
고전 1:18-25 / 인명진목사
제가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분이 있는데 저와 함께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같이 하신 분으로 대학총장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이 한번은 정색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만난 지 5년쯤 되었는데 목사님은 한 번도 저에게 교회에 다니느냐 안다니느냐,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예수를 믿어라 하는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으십니까? 5년 동안 한 번도 묻지 않으시니 자존심이 상합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 대답했습니다.
“총장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아십니까? 가만히 보니 총장님은 예수를 안 믿고도 잘 살고 계신데 제가 왜 총장님에게 또 다른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워드리겠습니까?”
“그럼 목사님께서는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예수를 믿으십니까?”
“저는 예수가 없으면 못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듣고 그 총장님이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뒤로 2-3년이 지났는데 그 분이 지금 교회를 다니시는지 안 다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데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종류는 예수가 없어도 인생을 잘 사는 사람입니다. 물론 인생을 잘 사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예수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 한 종류는 예수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때때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에게 올인 한다든지, 예수가 없으면 못산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는 믿지만 인생의 덤으로 생각하고 믿는 것입니다. 아마 짐작컨대 많은 교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믿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 번째는 내 인생에 예수가 꼭 필요하다, 예수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 부류 중에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는 모습을 보면 예수가 없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예수 없이는 죽어도 살 수 없다, 내 인생에 예수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염려하게 됩니다.
저는 평생을 예수를 믿으며 목사로서 한 평생을 산 사람입니다. 제 인생과 예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저는 70년을 예수를 믿은 사람인데 요즘 새삼스럽게 제 인생에 예수는 어떤 분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인데 꼭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살아왔던 70 평생을 가만히 되돌아서 생각해보면서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저는 예수 없이는 인생을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그 어떤 때보다 더 뚜렷하게 절실하게 제 마음속에 다가옵니다. 물론 제가 직업이 목사니까 예수 때문에 평생을 먹고 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가 꼭 필요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스스로 생각해보면 제가 하는 여러 가지 일 중에 가장 잘 못하고 자신 없는 부분이 목사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는 목사를 해서 먹고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목사를 안 했으면 먹고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교만한 생각이지만 목사 한 했어도 먹고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먹고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예수는 제 인생에 꼭 필요한 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예수 없이는 못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 인생 중에 소중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소중했던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가까웠던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제 인생에 저를 도와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중에 가장 고마운 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결론이며 제 인생의 고백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어떤 분이었기에 제 인생에 그렇게도 소중하고 고맙고 가까운 분이었는가 오늘 아침 저는 여러분에게 거창한 신학적인 담론을 말씀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유치하게 제가 느끼는 대로 몇 가지만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는 예수님은 제가 평생을 사는 동안 한결같이 제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너무도 고마운 일입니다.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일은 아이들이 하는 유치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입니다. 집안에서 때로 아버지들이 집안에서 아이들이 전부 아내 편이고 내 편이 없을 때 속상해하고 외로워합니다.
제가 평생을 살면서 아직도 잊지 않고 평생 고맙게 생각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 후배 중에 한 사람이 저에게 “목사님, 목사님이 도둑질을 한다면 저는 망을 보겠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내 편이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너무 감동되어서 제가 곽선희 목사님을 만났을 때 그 말씀을 드렸습니다. 곽선희 목사님께서도 그 말에 감동을 받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내가 아는 후배가 내가 도둑질하면 망을 보아준다.’라는 말씀을 제가 듣기에도 대여섯 번 하셨습니다.
내 편 네 편이 유치한 것 같지만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남편들을 아내가 내 편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든든하여서 밖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다 견디어 냅니다. 그래서 인생을 잘 살려면 내 편이 많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 편인지 아닌지 알쏭달쏭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아내도 남편도 내 편인지 아닌지 믿을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내 편인 것 같은데 아니 분명히 당연히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보니 아니었을 때 그 배신감과 절망감은 인생의 크나큰 아픔입니다. 믿었던 사람들, 당연히 내 편이어야 할 사람들이 돌아섰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인생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이구나, 나 혼자구나’ 하는 절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다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다 그럴 수 있다는 것에 우리 인생의 아픔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그런 아픔을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언제나 어떤 경우에나 내 편이 되어주시는 분, 평생을 살면서 딱 한분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리고 떠났는데 오직 예수님만은 내 곁에 계셨습니다. 만약 그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제 인생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 많은 어려움을 어떻게 견디어냈을까, 절망의 순간을 견디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언제나 제 곁에 계셨던 예수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셨던 예수님이 안계셨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편이었다는 말은 예수는 단 한 번도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비판하거나 비난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내가 잘못을 하거나 실수를 하거나 나에게 허물이 있으면 사람들은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난하고 손가락하고 내 등 뒤에 모여서 쑥덕거립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제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 제 마음의 가장 큰 상처는 내가 잘못하고 나에게 허물이 있었을 때 손가락질하고, 등 뒤에서 쑥덕거리고,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그런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가족까지도 비판합니다. 그런데 내가 겪은 예수는 평생을 통해서 한 번도 손가락질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셨습니다. 등 뒤에서 수군대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을 몰라서가 아니라 다 아시면서도 모른 척 지나가셨습니다. 생각해보면 은혜가 너무도 감사합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옛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 탓하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라고 야단법석을 떨었을 때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저의 평생의 삶 동안 그렇게 대해 주셨습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과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한 분은 한분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예수님 없었으면 쏟아지는 비판의 화살과 비난의 눈초리, 수많은 쑥덕거림을 어떻게 제가 견디어 낼 수 있었겠습니까? 누구에게 위로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런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참으로 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없었으면 저는 한 평생을 견딜 수 없는 아픔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죄 없고 흠이 없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고 흠이 많은 저 같은 사람이라면 저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봐주는 예수가 꼭 필요했습니다.
둘째로 저는 평생에 예수님이 꼭 필요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제가 제 힘만으로 세상을 살 수 없는 부족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저는 참으로 험난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내 능력만으로는 내 힘만으로는 세상을 살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도저히 내 앞의 갖가지 난관을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어려움과 곤경에 빠졌을 때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나를 구해주셨고 죽을 고비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제 인생길에서 온갖 궂은일, 역경과 고난과 환난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제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았지만 예수님처럼 저를 진심으로 도와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안 계셨다면 험난하기 그지없었던 제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 혼자서는 제 인생을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 인생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제 인생에 꼭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예수 때문에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니 예수님 때문에 살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때때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 참 대단하다, 예수 없이 어떻게 저렇게 잘 살 수 있는가, 나는 예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저 사람은 예수 없이 저렇게 잘 살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살아오면서 사람들이 ‘저 일은 인목사가 한 일이다’ 하는 것들 중에 제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나 된 것은 예수의 힘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예수가 없었으면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아마도 갈팡질팡 왔다갔다 하면서 되는 대로 막살다가 지금쯤은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잘못 살았구나.; 수많은 후회를 하면서 회한은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틀림없습니다. 예수 때문에 제대로 된 인생길을 걸으려고 했다는 것이 제 삶의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에게로부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습니다. 인생이 참으로 짧습니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한 평생이 지나갑니다. 지나간 인생은 되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인생에는 지우개가 없습니다. 노래를 잘못 부르면 다시 부르고 글을 잘못 쓰면 지우고 다시 쓰면 되지만 인생은 한번 지나가면 끝입니다. 저도 지나간 인생을 되돌아보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갈지자 걸음이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저는 예수가 있어서 일찍부터 어려서부터 어떻게 인생을 사는 것이 후회 없는 인생을 사는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행운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제일로 여기며 하나님 중심의 삶,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삶, 그것이 인생을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한 인생의 길이며 후회하지 않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저는 예수님 때문에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부족하지만 노력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70년을 살아온 지금 저는 제 인생에 대해 후회함이 없습니다.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잘 살았다고 스스로 고백합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예수님 덕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길로 인도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저는 틀림없이 엉뚱한 길로 가다가 지금쯤 큰 낭패를 당하고 내 인생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크게 후회하며 노년의 삶을 회한에 젖어 쓸쓸히 지낼 것입니다. 짐작컨대 제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따라서 왔다갔다하다가 처참한 꼴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욕심을 부리면서 살아오다가 욕심이 더덕더덕한 추한 모습의 늙은이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제 인생의 지혜였습니다. 그분 때문에 내 인생이 지금 이만한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예수님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살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능력이요 내 인생의 길이요 내 인생의 진리요, 내 인생의 지혜였습니다.
세 번째 과거는 그렇다 치고 인생을 다 산 지금, 아니 앞으로 예수님은 나에게 필요한 분인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나이가 70이 되니까 점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주님을 만날 날에 대해 이런 저런 상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만나게 되는 순간이 어떤 모습일까,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실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하게 됩니다.
제가 늘 부르던 찬송, 493 하늘 가는 밝은 길은 여러분이 다 잘 아는 찬송인데 이 찬송을 부르면서 홀연히 다가온 말씀으로 제 마음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3절 가사인데 내가 천성바라보고 가까이 왔으니
아버지의 영광집에 나 쉬고 싶도다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
사실 장례식 때 많이 부르는 찬송으로 제 마음에 새삼스럽게 와 닿는 가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같은 죄인이 무슨 염치로 주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무슨 공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나는 부족하여도 나는 죄인이여도 예수님 때문에 예수의 공로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지만 영접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70평생 살아오는 동안 제 생전에 예수는 꼭 필요한 분이었습니다. 예수가 없었다면 살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지난날 내 인생에서 뿐만 아니라 앞으로 죽어서도 저에게는 예수님이 꼭 필요합니다. 죽어서도 예수님이 없으면 안 될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여러분 저는 그래서 평생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허물 많은 저는 예수가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유치하지만 내 편이 되어주셔서 내가 잘못하고 실수하는 것 눈감아 주시고 그냥 넘어가 주신 것 고마워서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 없으면 살 수 없었던 사람, 예수 덕분에 살아온 사람이 접니다. 이것이 저의 신앙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분입니까? 아니면 정말 예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입니까? 오늘 이 아침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크게 깨달음을 드리는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것이 여러분들의 귀한 신앙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고전 1:18 / 김양인목사(목양교회)
만약에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서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면 성도 여러분은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권면하기를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벧전 3:15)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남이 장에 가니 나도 간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언제라도 예수 믿는 확실한 이유를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예수 믿는 이유에 대하여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고 하였습니다. 현세적인 번영과 축복을 받기 위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본질상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롭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라야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믿는 도리를 가리켜 “십자가의 도”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말씀해 드림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로, 십자가의 도는 죄인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이상한 종교로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독교는 한 가난하고 젊은 목수, 그것도 로마 당국에 의해서 십자가 처형을 받고 죽은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고, 또한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성만찬은 세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한 때는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마시고 인육을 먹는다는 누명을 쓴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가장 큰 방해꾼은 누가 뭐라고 해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조상 적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섬겨 왔으며,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가 오실 것을 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고대한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요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아였습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인데 탁월한 능력으로 로마를 물리치고 다윗의 왕조를 재건하실 것이며, 그 때가 되면 유대 나라가 세계의 중심이 되어 열방을 다스릴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 같은 유대인들의 열망과는 상관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를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주장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고 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기독교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나사렛 예수는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니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다니 그것은 율법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유대인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꺼림칙하게 만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이 편견을 갖고 성경을 본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선지자들을 통하여 메시아가 고난당하실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발꿈치를 상할 것이라는 구절은 메시아가 고난 받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구절은 메시아께서 마귀를 멸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가 고난 받으실 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예언했습니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메시아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죄인들의 구주로 오셔서 고난당하시는 메시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동일한 성경의 예언을 대할지라도 신앙노선이 다르면 이처럼 전혀 상반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이단들이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미혹의 영인 사단에게 속한 자들로서 성경을 빙자하여 괴이한 가르침을 만들어내어 퍼뜨립니다. 자기들만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찾아다니면서 미혹합니다. 이단들의 핵심 주장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교주가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대신 죄인에 불과한 교주를 구세주로 믿는 자들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그렇지만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는 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 이단의 정체를 알려서 물리치게 할 목적으로 갈라디아서를 써 보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갈 1:)라고 했습니다.
율법주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는 구원 받기에 충분하지 못하므로 율법의 모든 규정을 지켜 인간적인 의로움을 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폄하하는 것으로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기승을 부렸던 또 한 종류의 이단은 영지주의이단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의 철학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온 것으로 영은 선하나 물질은 악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따라서 영지주의에 의하면 메시아께서 물질로 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실 수 없으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일서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으며, 요한일서 1장에서는 “2)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이단들에게 미혹되는 신자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데 힘쓰지 않고 현세적 기복을 강조하는 설교에 치중하면 이 같은 불상사가 생겨납니다. 또는 십자가의 도를 전해도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 이단에게 끌려가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신자들이 듣기 좋아하건 싫어하건 상관 말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하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했습니다.
한편, 십자가의 도는 당시 이방인들에게서도 배척당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너무나 미련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혜를 사랑하고 철학을 꽃피웠던 헬라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 가난한 목수를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십자가의 도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하여 정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무슨 방법을 택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십자가의 도를 꺼림칙하게 여기고 미련하게 보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지혜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또는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를 정치적인 영웅이나 혁명가나 박애주의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함과 죄인 됨을 솔직히 인정하고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도리인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혹 보면, 기독교를 편협하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느냐? 부처를 믿어도 되고, 공자를 믿어도 되고, 또 다른 종교를 믿어도 구원을 받는 것이지 왜 기독교만 구원의 종교라고 하느냐? 너무 배타적이지 않느냐? 고 말합니다. 이런 사상을 종교다원주의라고 하는데 점점 기독교 내부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천주교는 노골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하고 타종교와 교류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절에 가서 강론하고, 스님이 성당에 가서 설법을 하고, 수녀와 비구니가 연합 합창단을 만들어서 절간과 성당을 오가며 찬불가도 부르고 찬송가도 부릅니다.
우리는 타종교를 비방하지 말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도 기독교를 존중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용인하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종교다원주의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종교다원주의를 허용한다면 세상이 기독교를 적대시하는 일이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다른 종교들처럼 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방법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생활을 할 적이었습니다. 한번은 길이 어찌나 험하든지 백성들이 마음이 상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불뱀들을 보내시니 백성 중에 뱀에게 물려 죽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았습니다.
불뱀에게 물렸으면 의과적인 방법으로 치료해야지 어떻게 놋뱀을 쳐다본다고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상식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도무지 맞질 않습니다. 아마 백성 중에는 고집이 강해서 나는 죽으면 죽었지 상식에 맞지 않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놋뱀을 쳐다보지 않다가 죽은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은 다 살았습니다. “불뱀에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는 말씀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중에 찾아와서 구원의 도리를 묻는 바리새인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았듯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그리하여 놋뱀을 쳐다본 자마다 살았던 것 같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성경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의 도를 믿으면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을 받습니다.
예정론을 지나치게 신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나 또 어떤 사람은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였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합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빈부귀천이나 남녀노소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차별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사람은 누구나 본질상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예정과 선택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할 것은 예정과 선택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예정과 선택은 우리의 이해력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깊은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하였지,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도 “15)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는 것이었지, 선택받은 자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누가 택함받은 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예정과 선택에 집착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의 자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0장을 보면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는 하나,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사람 차별하지 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힘써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고 지옥에 던짐 받을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죄인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고행을 함으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세상 종교들은 애당초 잘못된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실상에 대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것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죄는 미워하시나 죄인들은 사랑하십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죄를 대신하신 정도가 아니라 죄로 여김을 받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에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사함을 받았고 의인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도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써 씻지 못할 죄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나란히 십자가에 달렸던 한 강도를 보세요. 처음에 그는 다른 강도와 함께 십자가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고 감화를 받았습니다. ‘아, 이 분이야말로 죄가 있어 십자가 형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구주시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이 강도는 얼굴을 예수님께로 향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강도는 구원받을만한 선을 행한 것이 없으며, 다만 예수님께 한 마디 부탁드린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 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낙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받은 강도와 같이, 오늘날도 임종의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같은 일을 볼 때마다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하신 말씀과 같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당신의 사랑의 나타내셨습니다.
세 번째로, 구원 받은 우리는 십자가의 도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본디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자들이었는데, 누군가가 전하여준 십자가의 도를 듣고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백 삼십 년 전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암흑에 휩싸인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이 일생을 바쳐 복음을 전한 결과로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의 성도들은 그들에게 크나큰 사랑의 빚을 진 것입니다. 우리도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하여 이 빚을 갚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먼저 믿은 신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달받았습니다. 전도는 목회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라면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다 십자가의 도를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자기를 자랑하지 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를 받고 불신 이웃이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다면 이 보다 더 기쁘고 보람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고 하였는가 하면,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고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이와 같은 간절한 소원이 성도님들의 마음속에서 타올라야 할 줄 믿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도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목회자들만 할 일도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복음을 전할 사명이 있습니다. 또한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하지 않아서 누가 멸망당하였다면 그 책임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멸망 길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진흥같이 붉은 죄가 흰 눈 같이 양털같이 씻김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과 영생을 얻었습니다. 썩어질 육신에 속한 자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의 도의 능력으로 되었습니다. 그런즉 십자가의 도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원의 능력과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전하는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언변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주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가능합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 능력 있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증인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