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조성민의 LG입단에 관련된 글을 읽으며 당시 92학번들의 고교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그 해에는 이상하게도 2관왕(2개대회 우승팀)이 많이 나왔습니다.
대통령배와 청룡기에서는 철완 차명주와 곽재성 특급포수 김형남을 보유한 경남상고가 연이어 우승을 했고 화랑기와 전국체전은 염종석, 손민한, 진갑용, 주형광, 김대익이 포진한 부산고가, 봉황기와 황금사자기는 강혁, 백재호, 조성민, 설종진, 조인성, 김재현의 신일고가 움켜쥐었습니다. 이 틈에 3횐가 4횐가를 준우승에 머물며 분루를 삼킨 비운의 팀 광주일고(박재홍, 박주언, 김종국 등)도 있었죠.
당시 91년 고교시즌이 시작되기 전 누구나 인정하던 전국 최강은 다름 아닌 공주고였습니다.
90년에 단 3명의 3년생(강준기, 신재웅, 이보형)만 있던 공주고 야구부는 결과적으로 1,2학년들에게 기회를 많이 줄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구심점이 확실했던 탓에 당초 전국대회 4강을 목표로 했었는데 이미 청룡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고 90년의 마지막 대회인 전국체전에서 이전 우승팀을 모두 꺾으며 우승하여 91시즌 최강자로의 등극을 준비합니다.
91년 공주고의 라인업은 지금 봐도 최강이랄만한 진용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했구요.
오중석(3.유격수)-송재익(2.2루수)-박찬호(3.투수 겸 우익수 겸 1루수)-홍원기(3.3루수)-고경찬(3.포수)-손혁(3.1루수 겸 투수)-한지훈(3.좌익수)-정회선(2.우익수)-김기중(2.중견수)가 일반적이었는데 홍원기와 오중석은 한화에 비교적 거액에 입단했던 선수이니 아실테고, 송재익도 탁월한 수비로 SK의 백업을 하고 있죠. 박찬호와 손혁도 프로야구에서 나름대로 하고 있고, 정회선은 삼성에 훗날 1억을 받고 입단했죠. 김기중은 대학때 야구를 그만두었지만 청소년대표 출신이구요. 투수진도 박찬호, 손혁, 김종국, 노장진 등 말 그대로 빵빵했습니다.
그런데 지역예선에서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번번이 예선통과를 못합니다. 대붕기와 화랑기가 일정이 겹쳐 나눠먹기로 출전했던 화랑기에서 처음 전국무대에 선을 보이며 준우승을 거머쥡니다.
그리고 다시 봉황기에 출전하여 비교적 승승장구하다가 8강에서 기갑부대급 타선을 자랑하던 배명고에 무뤂을 꿇고 맙니다. 당시 9회말 무사만루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4:3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 공주고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면이었죠.
만일 그 때 배명고를 이겼다면 지금까지도 회자될 수 있는 조성민과 박찬호의 맞대결이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엄청난 타선에 엄청난 투수의 두 팀이 맞붙는 장면을 엄청 고대했지만 시즌이 끝나도록 신일고와 공주고의 맞대결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서울에는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김상엽(삼성의 김상엽 아님) 등의 걸출한 투수들이 있었죠.
문제는 이 때 전국무대에 공주고가 크게 어필하지 못한탓에 마치 당시 박찬호가 별 것 아니었고, 에이스가 손혁이었다는 엉뚱한 헛소문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고, 심지어는 고교야구를 알지도 못했던 사람이 박찬호는 고등학교 때 별 거 아니었고 손혁이 에이스였다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는 겁니다. 한술 더 떠 스포츠신문 기자들까지도 이런 헛소리를 한다는 거죠. 하긴 일개 지방야구팀에 누가 에이스였건은 그들에게 관심밖일 수도 있겠고, 오히려 박찬호를 더 드라마틱한 인물로 만들기 위해 로또같은 인생역전을 겪은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말을 만들었을 수도 있죠. 이건희가 로또 당첨되는 거랑, 제가 당첨되는 거랑 어떤 게 더 드라마틱하겠습니까? ㅋㅋㅋ
그러다보니 아마시절의 박찬호는 최대한 깎아 내리려는 사람들로 인해 고교시절 박찬호가 투수도 아닌 수준이라는 말 그대로 박찬호를 두 번 죽이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다니죠.
박찬호가 당시 에이스였다는 정황증거를 몇가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첫째,
90시즌, 즉 신재웅이 3학년이던 시절 청룡기.
공주고는 첫경기에서 위재영의 동산고를 신재웅을 앞세워 잠재우고 8강전에서 덕수상고를 12회말 역전으로 꺾을 당시에는 모든 투수가 나왔고 마지막 마운드는 노장진이 있었습니다.
준결승에서는 군산상고를 손혁이 완봉했고 결승에서는 김종국이 선발로 등판 그 후로 박찬호, 손혁, 노장진 등이 릴레이로 등판합니다. 이 경기를 두고 준결승을 완봉한 손혁이 에이스다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는데 당시 군산상고는 사실 전국 4강권 전력이 못 되는 팀이었습니다. 단적으로 그 후로 4강에 오른 적이 없었죠. 즉, 여러 투수들을 투입할 수 있을만한 상황에서 손혁을 준결승에서 완봉시켰다는 것은 결승전에는 그만큼의 카드가 준비되어 있기에 가능한 거였죠.
둘째, 90시즌 마지막 전국체전 준결승전과 결승전.
전국체전의 4강팀은 충암, 광주일, 공주, 대전이었습니다. 공주고는 준결승에서 안희봉과 정민철의 대전고를 3:0으로 완봉했고, 결승에서 심재학이 이끌던 충암고에 3:1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해 봉황기 우승팀 대전고와의 경기에서 신재웅이 선발, 박찬호가 구원으로 계투했고(3이닝, 6이닝 정도 나누었죠), 결승전에서도 두 선수의 계투(5이닝, 4이닝 정도)로 우승했습니다. 손혁은 당시 등판대상이 아니었다는 거죠.
셋째, 91시즌 봉황기에서 공주고는 3명의 스타를 배출합니다. 지금도 눈에 익은 손혁, 박찬호, 홍원기입니다. 손혁과 박찬호는 투수부문의 꽃이랄 수 있는 완봉승으로, 홍원기는 타격왕으로 지면을 장식했죠. 근데... 박찬호는 당시 영원한 우승후보 광주일고(박재홍이 에이스겸 4번)를 상대로 완봉했고, 손혁은 그 이전 첫 경기에서 강릉고를 상대로 완봉했습니다. 어느 팀이 더 강팀인가는 두 학교 이름값만 비교해 보셔도 아실 테구요.
넷째, 91시즌 봉황기에서 배명고전(8강전이었습니다 여기서 이기면 4강)에서 손혁을 등판시켰습니다. 손혁이 연타석 홈런을 얻어맞고 비틀거리자 바로 박찬호를 올려 진화했으나 이미 늦었죠... 그 때 이겼으면 공주고가 4강에서 맞을 팀은 조성민의 신일고였습니다. 당시 배명고와 신일고는 단연 신일고가 압도적이었습니다. 물론 다음 해인 92 시즌에는 배명이 신일을 압도했죠.
다섯째, 황금사자기 사실상 마지막으로 우승을 할 수 있는 경기의 최대난적 광주일고 전에 등판했던 투수는 박찬호였습니다. 졌죠 ㅡ.ㅡ 결국 광주일고도 마지막으로 우승을 노리지만 결승에서 또다시 조성민의 신일고에 무릎을 꿇고 맙니다만...
이런 여러 정황으로 봤을 때 단연 공주고의 에이스는 박찬호였습니다. 제가 고교시절을 야구에 미쳐 살았기에 정확히 봤구요. 전체 분위기는 박찬호 에이스 분위기였습니다. 문제는 아시다시피 박찬호 선수가 대인관계가 아주 원만한 편은 못 되었고, 당시 공주고의 육성회장님이 손혁선수의 아버지였고, 박찬호 선수는 그런 부유한 집이 아니었다는 거죠.
대학 때도 둘을 비교해 볼 수 있는데 박찬호는 한양대에서 구대성, 차명주와 함께 비교적 자주 등판합니다. 물론 다쳐서 많은 이닝을 던지지는 못했지만 당시 156의 직구는 그 자체로 공포였죠. 하지만 손혁은 이상훈과 조성민에 가려 거의 등판 못하다가 서울대전에 등판했습니다. 만일 한양대가 서울대랑 붙으면 박찬호를 내보냈을까요?
결론적으로 박찬호는 공주고 시절부터 팀의 에이스였습니다. 공주고 에이스가 손혁이었다는 편견을 버리십시오. 그건 정말 박찬호를 두 번 죽이는 겁니다. 고교 3년간 17승 5패 9세이브의 박찬호....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우승이 없어서 조성민에 가려있던 건 사실이지만 손혁의 그늘에는 전혀 가려 있지 않았습니다.
잘은 모르겠는데... 두산의 김인식 감독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근데.. 저희 학교 지금은 없습니다.. 학교 교장(다 아시죠?? 지금은 끝난일...)이 돈 마니 나간다구 해체했다구 하는군요... 옛학교사진 그런거 보면 동대문에서 막 승리해서 인사하는것두 있구 그래요...;;;
노상진 선수는 공주고 노장진과 같은 학번입니다. 경희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후에 기량이 늘지 않았죠. 그리고 조현 선수는 LG에 억대에 입단했던 그 조현이 아니고 왼손타자였죠. 나중에 건국대엔가 진학했던 걸로 아는데 여튼 제가 이때까지 보아온 타선 중에 가장 무시무시한 타선이었습니다. ^^
첫댓글 박찬호는 공주고때부터 에이스가 분명 맞습니다...그런데 손혁이 에이스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지....ㅡ,.ㅡ; 박찬호학번때는 정말 좋은 투수들이 많았죠.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손경수, 차명주, 박재홍....
뜬금없는 꼬리말 인줄 알지만 제가 배명고등학교 출신입니다 ^^; 김동주 이경필 김유봉 최용호 박철순 정현택...^^
1번 선발님의 모교의 92년도 타선을 기억하시는지요? 말 그대로 살인타선이었습니다. 김동주 - 권주현 - 장성국 - 노상진, - 조현 - 황재현 - 이경필... 한경기 홈런 너댓개가 기본이었죠...
92년에는 제가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권주현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전부 기억이 나네요. 김동주 선수가 1학년때 1번타자에 유격수였고, 어느 대회에서는 도루타이틀도 따냈다고 하더군요 ㅎㅎ
저도 뜬금없는 얘기지만 저희학교 야구부 있었습니다... 전국 4강인가?? 들었다는거 같구요.. 감독은 다름아닌 김인식 감독님... ㅋ 전 참고로 상문고입니다... 그리구 잘은 모르지만 sk코치님이 상문고 출신인걸 얼핏 본기억이..
상문고요? 상문고에 야구부가 언제 생겼지? 흠... 고교야구에 최근에는 관심이 없어서 ... 김인식 감독님은 전 두산 감독님이 아닌 전 MBC청룡 출신 김인식 감독님을 말씀하시는 거겠죠?
잘은 모르겠는데... 두산의 김인식 감독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근데.. 저희 학교 지금은 없습니다.. 학교 교장(다 아시죠?? 지금은 끝난일...)이 돈 마니 나간다구 해체했다구 하는군요... 옛학교사진 그런거 보면 동대문에서 막 승리해서 인사하는것두 있구 그래요...;;;
김봉근이라는 sk 투수코치님이 상문고 출신입니다.. 이상입니다..;; ㅋ
노상진.. 대학간이후 못 봤지만 당시엔 조현을 제치고 4번 쳤는데.. 노장진(삼성) 과 비슷한 시기 (아마 1년 후배일걸여?) 비슷한 이름이라 애정이 마니갔었는데.. 참..저도 뜬금없이... 전 위재영 정민태 송지만 권윤민의 인천동산 출신입니다.ㅋ
노상진 선수는 공주고 노장진과 같은 학번입니다. 경희대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후에 기량이 늘지 않았죠. 그리고 조현 선수는 LG에 억대에 입단했던 그 조현이 아니고 왼손타자였죠. 나중에 건국대엔가 진학했던 걸로 아는데 여튼 제가 이때까지 보아온 타선 중에 가장 무시무시한 타선이었습니다. ^^
그리고 노상진 선수는 한화에 지명되어 입단까지 했었는데 기대를 좀 했는데 아쉽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