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에 쳐 박혀 뒹굴다가 영화 한 편을 보았어요. 제가 낯선 곳에서 식당을
고르듯 영화를 고르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무대미술 학부를 성공리에 끝내고 이제 연출을 향해 나가는 잘난 딸내미를
생각하면서 보았는데 이거야 원 제 이야기를 보는 뜻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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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이 있는 가족 영화이면서 느와르입니다. ‘고령화 가족(2013,송 해성)’
은 천명관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습니다. 평균연령이 47세나 되는 정신 못
차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가 이리 감동을
줄 수가 있다니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글이든 영화든 공감대가 1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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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내 이야기 같아야 재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가족해체‘를 대안으로
삼고 살고 있는 제게 ‘엄마의 집 밥‘으로 제 사고체계를 흔들어 놓은 천 작가
의 설득의 기술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인상 깊은 구절이 있어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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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자식들을 집으로 데려가 끼니를 챙겨
주는 것뿐이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엄마가 우리에게 고기를 해먹인 것은
우리를 무참히 패배시킨 바로 그 세상과 맞서 싸우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몸을 추슬러 다시 세상에 나가 싸우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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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기도 했을 것이다.(중략) 우리는 불안정한 상태를 지나 조심스럽게 신뢰를
쌓으며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나는 엄마가 말했던 인간적인 정리가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열정적인 사람보다 더 차원
높고 믿을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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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나는 짐작할 수 없다. 운좋게 피해갈 수
도 있지만 자칫하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 미리 걱정하느라 인생을 낭비하고 싶진 않다.(중략)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 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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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문학 동네, 천 명관, 고령화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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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과 파산을 거쳐 삶의 낭떠러지에 몰린 실패한 영화감독 오 인모(박해일)는
늙은 어머니(윤 여정)의 단독주택에 들어갑니다. 이미 그 집에는 쉰두 살의
전과 5범인 형 오함마가(유 제문) 있고, 이제 막내 동생 미연(공 효진)까지도
남편과 이혼하고 열다섯 살짜리 딸을 데리고 같이 살겠다고 들어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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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옹다옹 지지고 볶는 중년의 삼남매는 알고 보니 형과는 어머니가 다르고,
동생과는 아버지가 다른 사이라는 비밀이 밝혀집니다. 세상의 풍파 속에
철저히 패배한 삼남매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이게 하는 것은 어머니이며,
그러니까 콩가루 같은 이 기이한 가족 이야기는 곧 엄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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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인모가 데뷔작인 ‘길 위의 여자’가 흥행에 참패하면서 월세마저 독촉
당하는 입장에 놓이고 인모는 비관 자살을 하려고 시도하는데, 그러던 중에
닭죽을 먹으러 오라는 어머니의 전화가 아들을 살립니다. 굿 타이밍!
엉엉, 어머니, 저도 어머니랑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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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미 제비처럼 자식들에게 닭죽을, 고등어를, 삼겹살을 먹이며 자식
들을 품어줍니다. 우리어머니가 이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어머니
에게 이런 대목에서 원망이 많지만 어렸을 적 돈을 훔쳐 도망간 아들의 팔을
물어뜯고 울던 그 사랑을 기억하는 까닭에 퉁치고 패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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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평생을 가난에 시달리던 늙은 어머니도 행복 하고 싶은 본능과 여성으로
서 욕망을 가진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들 인모는 혼란스러워합니다.
에브리데이 출근을 하고 지겹게 삼겹살을 사다 나르는 어머니의 직업은
야쿠르트 외판원이거나 화장품 판매원일 것입니다. 왜 암 투병을 하고 있는
처형이 생각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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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효진의 딸 민경은 이제 열다섯 살의 중학생입니다. 맞춤법도 몰라서 엉망인
가시나가 비행 친구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다가 둘째 삼촌한테 딱 걸렸어요.
굼벵이도 재주가 있다고 딜 하는 것 좀 보소? 저도 우리 에스더 질풍노도를
건널 때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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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인모는 어머니가 어떤 노인(박근형)과 같은 방에서 고기를 먹는 장면
을 보고 말았습니다. 식구는 많은데 버는 사람은 어머니뿐이었으니, 그는 엉뚱
하게도 고기 때문에 어머니가 몸을 팔았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고령화 가족
줄거리 중에 '이까짓 고기가 뭐 길래 그러냐'는 대사는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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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고령화 가족은 위기를 맞습니다. 조카 민경이 가출을 한 것입니다.
엄마 공 효진은 큰오빠 때문(빤스 사건)에 딸이 가출을 한 것으로 알고 대놓고
오빠를 구박합니다. 둘째도 형을 개새끼로 보고 미워합니다. 한모는 그래도
삼촌이라고 조카를 찾아 나서고, 그러다가 옛 조직을 만나서 조카를 찾아주면
바지사장을 해 주기로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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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민경은 가출 청소년들을 감금해놓고 성 착취를 하려는 일당에게 잡혀
있었는데 깡패삼촌이 찾아와 구해줍니다. 아이가 삼촌하면서 안기는데 눈물
이 핑 돌았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지난 흉터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더이다.
깡패 한모는 불법 오락실 바지사장으로 들어가기는 했지만, 어차피 조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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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버릴 것을 알았기에 돈을 들고 외국으로 튀려고 합니다. 연병, 인모가
잡혀버리는 최악의 결과가 나오자 출국 전에 돈 가방을 들고 호랑이 굴속으로
기어들어갑니다. 인모가 조폭에게 잡혀서 두들겨 맞고 있던 시간, 한모가 돈
다발을 들고 나타나서 동생을 구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후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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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아킬레스건을 잘리고 뒤질 만큼 쳐 맞습니다.
여기서 형제가 화해를 합니다. 형! 괜찮아? 오락실 시퀀스가 나오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이 영화가 나올 무렵 오락실을 무려 13번을 했다는 것 아닙니까?
통기계 100대 돈 통을 모두 까고 정산하는 기분을 아는 사람만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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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바다이야기' 때는 하루 매상3,000씩 찍었으니 한 달이면 9억의 계산이
나옵니다. 결혼식 시퀀스에서 우여곡절 끝에 미연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
는데, 여기에 한 노인이 나타납니다. 어머니가 몰래 같이 고기를 먹던 그 노인
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미연의 친아버지였던 것입니다. 함께 결혼식에 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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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고 나가는 장면에서 노인은 행복해합니다. 다시 세월이 흐르고, 남매들은
각각 독립해서 나가 삽니다. 미연은 남편과 옷가게를 열었고, 문제아 민경은
춤을 배우며 꿈을 키웁니다. 한모는 맞은 다리가 불구가 되었지만 미용실 수자
(예 지원)와 같이 살게 되고, 인모는 에로영화 감독이 되어 제법 잘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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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미연의 아버지와 정식으로 재혼해서 행복한 신혼생활을 합니다.
때로 삶은 비루하고 구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삶을 버텨내는
것은 비록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한 온기, 인간적인 정리로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가족이란 그런 것입니다. 냄비를 던지고 목을 조르며 피
튀기게 싸울 때 싸우더라도 가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그런 동지애가 아닐까.
2023.2.10.fri.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