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290)
착한 도둑(상)
좀도둑 천석을 제압한 의문의 선비
대궐 같은 집에 데려가 하는 말이…
추석 만월이 두둥실 중천에 떠올랐다. 봉분이 턱없이 납작한 무덤 앞에서 송편·감·대추를 단풍이 물든 떡갈잎 위에 놓고 열대여섯살쯤 된 초립동이 탁배기 한잔을 올렸다. 그런데 큰절을 한 후 일어설 줄 모르고 어깨를 들썩였다.
“사부님, 오늘 밤 꿈에라도 나타나셔서 알려주십시오. 저 혼자 계속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습니다.”
꿇어앉아 머리를 땅에 박은 채 일어설 줄 모르던 초립동이 마침내 몸을 일으켜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털썩 주저앉아 음복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마셨다. 탁배기 한 호리병을 비웠을 때 만월은 멀찌감치 서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가을밤 공기는 서늘했다. 초립동은 빈 호리병과 제수 음식을 싸들고 산에서 내려와 다리 밑 움막집으로 들어 갔다. 아홉살, 열한살 두 녀석은 곯아떨어져 쌔액 쌔액 코를 골았다. 그날 밤, 초립동은 사부를 기다렸지만 꿈에 서도 만나지 못했다. 다리 밑 움막집엔 네명의 거지가 살다가 거지대장 영감님이 이승을 하직하자 이제 세명만 남게 되고 자연스럽게 초립동이 대장이 됐다. 죽은 영감 님과 초립동은 거지이자 도둑이었다. 큰 도둑은 아니고 부잣집 부엌으로 잠입해 은수저와 주발, 쌀 몇됫박, 빨랫 줄에 걸린 옷가지나 훔쳐 장물아비에게 헐값에 팔아 푼돈 을 챙기는 좀도둑이었다. 영감님이 죽고 나자 도둑질을 한동안 손 놓고 있다가 이 진사네 딸이 혼인 날짜를 잡아 놓고 장에서 혼숫감을 바리바리 사오는 걸 보고 초립동이 혼자서 만물이 잠든 사경 녘에 이 진사네 담을 넘었다. 컹컹컹, 삽살개떼가 달려오자 초립동은 마당도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채 장독에 뛰어올라 감나무 가지를 잡고 담을 넘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동네를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가 숨이 넘어가려 할 때 개울 에 머리를 박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려는데 초립동은 기절 을 했다. 누군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초립동의 뒷덜미를 잡아 챙긴 것이다. 그는 초립동 얼굴을 개울물에 처박았 다 꺼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초립동이 두손을 모아 “한번만 사, 사, 살려주십시오” 하자 남정네는 “따라오너 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던지고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초립동은 도망칠 생각도 못한 채 자석에 딸려 가는 쇠못처럼 그를 따라갔다.
대처로 나오자 뿌옇게 동이 텄지만, 안개가 열발자국 앞도 분간 못하게 짙게 깔렸다. 초립동이 따닥따닥 이빨 부딪 히도록 떨면서 따라가자 정체불명의 그 남정네는 장터 주막으로 들어갔다. 그날이 장날이라 꼭두새벽부터 주막 은 장사꾼들로 북적거렸다.
마주앉아 초립동이 고개를 숙인 채 그를 슬쩍 올려다 봤다. 검은 옷에 검은 두건을 쓰고 염소수염을 기른 서른 남짓한 그에게서 선비 풍모가 풍겼다. 이 진사네 하인 이거나 순라군이 아닌 게 틀림없어 초립동은 마음이 좀 놓였다. 국밥을 한그릇씩 먹고 나와 또다시 안갯속으로 그를 따라나섰다. 솟을대문 앞에서 문고리를 두드리자 행랑아범이 나와 대문을 열었다. 대궐 같은 기와집 사랑 채로 들어가 열두폭 병풍이 둘러쳐지고 비단보료가 놓인 상좌에 검은 선비가 앉았다. 초립동이 두손을 모으고 무안하게 서 있자 “마음 편히 앉아라”고 말하는 검은 선비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흘렀다. 초립동은 또다시 깜짝 놀랐다. 검은 선비 소맷자락에서 매 한마리가 나와 날개 를 쫙 펼치더니 선비 어깨에 앉았다가 선비가 손짓하자 펄쩍 뛰어 횃대에 앉아 초립동을 쏘아봤다. 검은 선비가 장죽으로 재떨이를 세번 두드리자 병풍 뒤에서 잽싸게 생긴 새까만 개 한마리가 나와 검은 선비 옆에 앉았다. 똑똑 소리가 나더니 문을 열고 선녀 같은 하녀가 차 두잔 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초립동은 도대체 뭐가 뭔지 몰라 ‘내가 시방 도깨비한테 홀린 게 아닌가?’ 생각 하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침 햇살이 창호지를 하얗게 물들이자 마음이 조금 놓인 초립동은 검은 선비를 자세히 올려다봤다. 검은 옷을 입어 더욱더 새하얀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입가에 는 항상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초립동이 또다시 놀랐다. “네 이름이 천석이라 했던가?” “네, 네네.”
‘그런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놀라움의 연속이다. 검은 선비는 목소리도 부드럽게 말했다. “저 보라매 해동청과 풍산개 행운이는 우리의 동료다. 친밀하게 지내야 한다.”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선비님은 무얼 하시는 분이세요?’라고 묻고 싶은데 꾹 참았다. 검은 선비의 말에 초립동은 기절할 뻔했다.
“죽은 영감님과 천석이 너는 항상 내 사업을 망쳐놨어.”
(하편에서 계속)
(2019. 09. 20.농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