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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김성령
제목부터 어려울 것 같았던 <소유냐 존재냐> 이 책은 나에게 정말로 어려운 책이었다. 인문고전은 이야기 형식이어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깊은 뜻은 몰라도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이 책은 설명문, 이론 같이 딱딱한 형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재미가 있을 수 없어 더욱 힘들었다. 하지만 인상 깊은 부분은 몇 있었다.
소유는 ‘물건, 물질 등을 가지고 있다.’ 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은 과거와 달리 다양한 면에서 평균적으로 개개인의 소유가 증가했다. 이 책에선 소유가 재산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금전적인 재산도 포함은 되었지만 그밖에 병, 신념, 습관 등 매우 폭 넓게 정의하고 있다.
나 또한 과거부터 소유에 욕심을 많이 두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노는 것만큼 즐거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각종 미디어, 게임이 생기면서 그런 생각은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친구들과 다같이 모여 게임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더 좋은 전자 기기들이 계속해서 발표되고 접하게 되면서 욕심과 소유욕은 같이 증가했다. 이렇게 물질적인 것에 계속해서 욕심을 느끼고 잠시의 행복을 맞이한 후 다시 욕심이 생기는 것을 이 책에선 소유양식이라고 한다. 소유양식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당연한 것이고 상징적인 것이라고 하는데 나도 이쪽에 속하지 않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동의 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고 나서 나를 돌아보니 여전히 옷, 게임, 친구, 음식 등 여전히 소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앞을 볼 줄 알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때 잠시 오는 일시적인 행복을 더 추구 하고 있는 나에의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다.
인문고전과 달리 이 책은 두 주제를 대조적으로 나누어서 설명해서 그런지 작가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반면에 나에게 책을 읽고 난 후 얻은 배움을 빨리 적용할 수 있었던 인문고전과는 달리 이 책은 얻은 배움과 교훈을 나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소유욕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지금 계속해서 밤마다 올리는 감사를 꾸준히 하고 평소에도 감사하는 자세를 가짐으로 소유를 줄여가야 겠다. 이 책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할 수 있는 김성령님. 늘 진지하게 접근하는 자세가 좋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늘 사로잡히고 맙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유하려는 자신을 인식하고 있느냐 인식하지 못한 채 폭주 기관차처럼 소유에 매달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인지하고 고민하는 님이 대견합니다. 소유를 넘어서 존재로 나갈 수 있도록, 그래서 능동적인 자세로 생각을 확장하고 인간을 품으며, 하나님의 주인됨을 전적 의지하는 할 수 있는 님이 되길 축복합니다.
닮아가는 윤하진
제목 : 공부하는 법
주제문 : 소유양식과 존재양식의 학습 차이점
이 책에서는 소유와 존재 중 어느 쪽이 우세한가에 의해서 한 인간의 사고, 감정, 행동이 결정된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소유냐 존재냐’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 읽을 때는 이 둘이 어떤 관계이고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왜 중요한지 등 이해가 되는 것 같았지만 책을 잠시 멈추고 내 힘으로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려고 해 보면 방금 읽었던 내용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책을 읽으면서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가 살짝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1부 2장에 학습에 관한 장이었다. 그 전까지는 소유와 존재에 관한 문제가 사람의 사고, 감정, 행동을 결정한다고 했지만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었지만 이 장을 통해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학습에 관한 장에서는 소유양식에 길든 학생과 존재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소유양식에 길든 학생은 강의를 들을 때 놓치지 않고 어휘들을 경청한 후 그 논리적 연관과 의미를 파악하여 가능한 한 모조리 노트에 기록한다고 책에서 말한다. 언뜻 보면 매우 성실한 학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책에서 이들은 그들이 들은 강의내용을 경직된 사고의 집합체로 밀어 넣기 때문에 그 내용은 그들 고유의 사고체계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는 구성요소가 되지는 못하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남이 확인해놓은 주장들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강의 내용과 여전히 생소한 관계에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 모습이 현재 많은 학생들이 보이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열심히 공부하며 많은 지식을 듣고 기록하며 암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내용을 경직된 사고의 집합체에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지식은 그들 고유의 사고체계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는 데에 전혀 일조할 수가 없다. 말 그대로 그들은 남의 주장을 소유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존재양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은 수동적으로 낱말과 사상을 수신하지 않고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수용하고 대응한다. 이들이 들은 것은 이들 고유의 사유과정을 자극해 새로운 의문과 관념, 전망이 떠오르게 되고 강의를 통해 충격을 받아 변화를 하여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나는 이것이 진짜 공부라고 생각한다. 무작정 지식을 습득하고 암기하는 것이 아닌 강의를 들으며 생각을 하고, 질문을 하는 것이 정말로 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많은 학생들은 그저 더 많은 양의 지식을 머릿속에 집어넣기에 급급해 하고 있다.
이 장을 읽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소유양식에 길든 사람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존재양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공부를 할 때 얻은 지식을 정말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닮아가는 윤하진 님. 학습으로 소유와 존재를 잘 이해하셨네요. 그리고 자기 적용까지 잘 해주었네요. 님의 말처럼 적극적으로 존재양식을 취하는 삶을 지향하면 삶이 더 풍요로워지겠지요. 학습뿐만 아니라 기억부분, 대화는 물론 사랑까지도요. 그래야 심리적, 경제적 등의 파국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그동안 인문고전 열심히 읽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것이 자양분으로 앞으로의 독서도 기대하고, 닮아가는 님 축복합니다.
지혜로운 최예은
‘소유’와 ‘존재’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으로 살아야 하는지 책에서 알려주고 있다. 전에 수업 했던 책이라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당시 수업을 했을 때 나는 버거워 했던 것 같다.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것만 딱 기억이 난다.
책에서는 다양한 방법과 예로 소유와 존재를 설명했다. 일상에서 우리가 하는 것 속에서 소유와 존재를 비교해 주었는데 나에게 가장 확실하게 와 닿았던 것이 있었다. 바로 학습이다. 학습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을 때 까지 해야 하는 것이고 학생의 신분을 가진 나는 당연히 학습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 학교에 등교해 수업을 듣던 전과는 좀 달라진 환경에서 학습하는 요즘 마음 다잡기가 힘들어 졌다. 새 학교에 들어가 새 친구, 선생님을 만나 즐겁게 학교생활을 시작하는 상상을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등교와 동시에 적응할 새도 없이 시험을 준비하고 진도를 빠르게 나갔다. 이런 상황을 맞는 나는 불안해지고 나태해 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배우고 필기하며 머릿속에 꾸겨 넣는 느낌이다. 이런 내 모습은 소유양식의 삶을 사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책을 읽으며 학습을 소유적 실존양식에 속한 학생의 특징을 읽으며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학습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하루 동안 가장 많이 하는 것이 학습이다. 학교에서 하는 수업만 해도 7시간이고 학원이나 개인적으로 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하루의 반 이상을 투자한다. 매일 매일 하는 학습에 임하는 태도는 습관이 될 것이고 학습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일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유양식의 태도가 일상생활 속에 스며들어갔다면 대부분의 일을 할 때도 소유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할 것이다. 존재양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변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학습에 흥미를 갖고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대응하기 쉽지 않겠지만 학습에 임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삶 전체 모습이 바뀔 수 있다.
소유하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고 소유하면 만족해하며 행복해 한다. 하지만 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소유물이 사라지거나 없어지면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존재양식으로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책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보면 아주 작고 약한 먼지 같다고 말하지만 인간은 세상에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누군가의 소유가 아닌 개인에게 자유롭게 살 수 있게 하셨다. 인간이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존재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소유물이 아닌 인간의 삶은 존재양식의 모습이어야 한다. 내가 소유하고 가짐으로서 살아가는 것보다 내 자신이 존재하는 사람이란 걸 인지하며 소유하며 사는 내 삶이 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겠다. 노력해야겠다.
지혜로운 님. 학습부분에 소유하면, 일상의 다른 분유에서도 소유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할 것이라는 통찰이 눈에 띕니다. 존재로의 삶은 소유의 삶보다 꽤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본능을 거슬러 손에 꼭 쥐었던 것을 펴는 용기가 필요(‘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소유의 형태를 자진해 포기하려는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자기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사물도 내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함을 인식’ 하고 철저한 독립성을 갖고 집착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부터 독립되어야 하는 반면, 하나님에게는 철저하게 소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 우리 삶의 기준이고 진정한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내면)으로 만드셨기에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존귀한 존재입니다. 나는 존재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 주님과 사귀고 찬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임을 기억하세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지혜로운 님을 축복합니다.
겸비한 황지훈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을 두고 에리히 프롬의 깊은 통찰력이 드러나는 책이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책에서 보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금 사람들이 대체로 살아가는 양식인 소유 양식에 대해서 자세하게 관찰했다. 그리고 많은 성인들이 보여주었던 존재 양식에 대해서도 깊게 탐구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닌 것 같았고 무신론적인 입장이 책에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 책을 통해서 현재 삶에서 소유와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이상적인 생활 양식을 보여주었던 점을 깎아내릴 순 없을 것 같다.
그의 책에서 나오는 소유 양식의 모습은 말그대로 수동적이었다. 존재 양식과 소유 양식은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을 띄었다. 소유 양식은 완전히 부정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 반면 존재 양식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고 올바른 듯이 표현되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기독교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식은 소유 양식이 끝없이 욕망하는 삶이 아니라 존재 양식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작년에도 이 책을 읽었었고 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이 책이 수록되어 있어서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다. 작년에 책을 읽을 때에는 아마 책의 뒷부분을 아예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뒷부분을 보면서 내용에 좀 놀랐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단순히 존재 양식으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이상적인 모습까지 그려내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존재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는 요건들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 문구가 그것을 알려준다. “이 종합은 ‘존재의 나라’이다.”
사실 책이 그렇게 재미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졸면서 읽은 부분도 있는 것 같고 그저 스쳐가듯 눈으로만 읽은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잘 잊히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그가 서구 유럽 세계가 과연 기독교적인지에 대해서 묻는 부분이다. “즉 위대한 박애자인 동시에 자기를 희생하는 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굳게 믿는 사람들은 이 신앙을 소외된 형태의 경험으로 바꾸어 ‘자기들을 대신하여’ 사랑해주는 예수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온갖 사랑을 해주신다. 우리는 그리스 영웅들의 행동을 계속하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사랑에 대한 신앙을 공언함으로써 전혀 사랑이 없는 데 대한 무의식적인 죄악감에서 오는 고통을 어느 정도는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이 부분에서 에리히 프롬은 서구 세계의 기독교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랑 없음을 예수님이라는 사랑의 존재를 믿는다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죄를 짓지만 예수님을 방패로 이용하여 본인들의 죄악을 숨기며 느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이는 서구 세계의 기독교인들에게만 한정되는 아닌 것 같다. 이 부분을 보면 왜 그가 무신론자가 되었는지가 살짝 비추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에게 비추어진 기독교인들은 비도덕적이고 수많은 죄를 저지르지만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자신들을 구원받는다고 말하는 비이성적인 사람들로 보여졌던 것 아닐까? 그가 책에서 예수님을 성인으로 표현하고 존재 양식의 인물로 표현하지만 정작 그가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이 아니라 기독교인들 때문이 아닐까?
기독교인으로써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유튜브에서 잘잘법이라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았다. 왜 기독교인들이 개독교라 불릴까라는 영상이었다. 나는 그 영상을 보고 나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았다. 과연 내가 내 친구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고 있을까? 나로 인하여 예수님의 사랑이 가려지고 다른 이들이 내 모습을 통해 기독교를 개독교라 부르게 되지는 않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절대 그럴 일이 없도록 나를 성찰하면서 나를 보고 친구들이 예수님의 사랑이 궁금해지는 그런 삶을 살거고 싶다고 생각했다.
겸비한 황지훈 님. 지난 주 세계대전 발발 이유와 노아 영화를 기독교적 시각으로 비판한 강의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겸비한 님의 지성과 영성이 점점 무르익어 가는 듯합니다. 훌륭해요. 님의 말대로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제자로 성장해가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