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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2)
고전 1: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설 교 >
십자가의 도
잠 10:28-30, 고전 1:18 / 이성희목사
서론
옛날 중국에는 전설상의 큰 도둑이 있었습니다. ‘도척’이라는 이름의 큰 도둑은 도둑사회에도 도(道)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장자 ‘지협’편에는 도척이 대화형식으로 도둑에게 하는 말이 나와 있습니다. 도둑에게도 도가 있느냐고 도둑이 묻자 도척은 도둑의 도를 말해줍니다. 첫째는 방안에 감추어 둔 것을 미루어 아는 것은 성(聖)이고, 둘째는 앞장서서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고, 셋째는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은 의(義)이고, 넷째는 가부를 아는 것은 지(知)이고, 다섯째는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仁)이라고 했습니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하면 천하에 큰 도둑이 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큰 도둑이 말하는 도둑의 도를 보면 예수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도는 예언을 잘 알아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하고, 의가 있어야 하고, 지식으로 충만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하고, 함께 나누고 베풀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래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큰 길(道)을 만날 수 있습니다.
‘로고스’라는 헬라어는 우주세계의 정신개념을 말합니다. 우주생성의 원리를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로고스는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주의 원리이며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서두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태초에 로고스가 있으니라”는 뜻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글로 번역된 성경에는 “태초에 도가 있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이미 길이 있었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바울이 간절히 전하려고 했던 것은 “십자가의 로고스”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는 진리를 전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로고스는 십자가의 원리이며 십자가의 힘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말은 헬라어 “호 로고스 호 투 스타우루”인데 문자적으로는 “그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말의 지혜”와 대조되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인간의 말의 지혜와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말의 지혜와는 달리 십자가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생명이 있는 말씀입니다.
말의 지혜란 무엇입니까? 말의 지혜는 ‘척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8에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합니다. 입술로 공경하는 척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면 곤충들이나 짐승들 가운데 ‘의사(擬死)행동’을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위급한 일이나, 불리한 정황을 만나게 되면 누워서 죽은 척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척하여 위기를 피하는데 뒤로 넘어져서 아무리 건드려도 일어나지 않는 것들도 있습니다. 죽은 척하여 위기를 피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다가 진짜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의 지혜와 십자가의 도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말의 지혜는 죽은 척하는 것이고, 십자가의 도는 죽는 것입니다. 척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죽은 척하는 것과 실제로 죽는 것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생명의 차이입니다.
설문조사를 한 것을 보면 회사에서 왕따 1순위가 나와 있습니다. “누가 왕따 대상인가?”라는 질문에 잘난 척, 아는 척, 있는 척하는 ‘척돌이’, ‘척순이’가 왕따 1순위입니다. 세상에서도 척하는 것은 탄로가 나고 왕따가 되지만 하나님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척돌이, 척순이는 통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죽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말재주가 아닌 실천입니다. 위선이 아닌 진실입니다. 다른 인간적 조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는다는 진리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의 도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 십자가의 도에 살며,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 상반절에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라고 합니다. 사람이 왜 멸망합니까? 십자가를 믿지 않으므로 멸망합니다.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해보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신을 모독한 죄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황제를 모독한 죄로 법정에 섰습니다. 로마에 대한 국가반란죄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볼 때는 정치범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형당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판단해 볼 때는 십자가는 미련한 자들이나 따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십자가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십자가를 무시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나무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한낱 장식품 정도로 취급합니다.
“멸망하는”이란 말은 헬라어의 ‘아폴뤼메노이스’라는 말인데 현재분사형입니다. 그 행위에 대한 즉각적인 결과가 계속 일어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멸망 받을 일만 끊임없이 한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해서는 안 될 일만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죄의 생리란 죄는 또 다른 죄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습니다. 악은 또 다른 악을 범하게 합니다. 멸망하는 자들은 똑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반성은커녕 더 큰 죄를 계속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멸망하고 맙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깨어 있으라”, “잠들지 말라”고 권하지만 멸망하는 자는 그 말을 듣고도 깨어있지 못하고 졸고 잡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들의 경고의 나팔소리가 미련한 말로 들립니다. 이런 자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믿고 있지만 천주교회에서는 정경과 함께 외경을 믿습니다. 구약 외경에 ‘유디트’가 있습니다. 유디트는 이스라엘의 산악도시 베틀리아에 사는 미모의 과부입니다. 유디트는 프랑스의 잔 다르크나 우리나라의 논개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기원전 2세기 아시리아 군대가 베틀리아를 침략하자 보급로를 차단하여 고립위기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유디트는 홀로 적장을 처단하러 아시리아군의 막사로 갔습니다. 보초병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고 말솜씨에 혹하고 말았습니다. 적장 홀로페르네스와 밤을 보낸 뒤, 적장이 잠든 사이에 적장의 목을 베어 자루에 넣어 돌아왔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멸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미모와 말재주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외형과 말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도인 십자가에 관심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관심이 없는 그 자체가 멸망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동산에서 멸망하고 동산에서 구원받았다. 에덴의 완벽함은 폐허로 끝났고 겟세마네의 구원은 쓰라린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에덴에서 인간의 실패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동산 한 가운데의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였는데 그걸 믿지 않았습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는다고 죽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헛소리냐고 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극대화하고 싶었던 사람은 뱀의 말이 그럴 듯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길이고, 도이고, 로고스인데 이것이 미련해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가 미련해 보이는 것이 멸망을 가져오는 원인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멸망을 예고하셨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 사람들은 노아의 일을 비웃었습니다. 해가 쨍쨍한 날에 홍수를 대비하는 것이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천사가 와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을 예고하자 사위가 될 사람들에게 불의 심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위 감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과 저주’를 그 앞에 두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예언자들을 통하여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공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할 것을 경고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을 미련한 소리로 여겼습니다.
마가복음 13:14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멸망의 경고를 귓전으로 흘려보냈습니다. 경고의 말씀을 듣는 것이 미련한 일입니까? 멸망이 까마득하게 먼 훗날 얘기입니까?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미련한 일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백성들이 뱀에 물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구리로 만든 뱀을 장대 높이 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은 낫게 하고 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살지 못한 사람들은 한번 쳐다보면 될 구리 뱀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뭐 그 까짓것을 본다고 뱀에 물린 것이 낫겠어?” 그들은 구리 뱀을 쳐다보는 것이 미련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5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가정파괴로 인한 혼인질서의 문란입니다. 둘째는 과도한 세금부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의 팽배입니다. 셋째는 지나친 사치와 스포츠의 잔인성입니다. 넷째는 국토확장 전쟁으로 인한 청소년층의 붕괴입니다. 다섯째는 국민 전체를 하나로 묶어줄만한 고급종교의 부재입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데는 다 원인이 있습니다. 개인이나 나라가 멸망할 때는 진리가 미련스럽게 보이고, 십자가가 어리석게 보입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둘째,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8절 하반절에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상반절의 ‘미련한 것’의 반대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든, 하나님의 능력이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멸망과 구원의 차이입니다.
‘능력’이란 말의 헬라어는 ‘뒤나미스’인데 신체적, 영적, 지적 능력을 포함한 총체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우주의 원리로서의 생명력을 말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신약성경에서 ‘뒤나미스’란 단어는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수치이고 험한 물건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힘은 구원의 능력이며, 보혈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을 때에 피와 물이 나왔습니다. 피는 구원을 의미하고, 물은 변화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구원과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변화는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형태는 굉장히 많습니다. 그 가운데 ‘타우 십자가’(T)라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영어 철자로는 T자형이지만 헬라어 철자로 ‘타우’라고 읽기 때문에 그렇게 부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유월절에 자신의 문 앞에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이 십자가를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놋 뱀을 막대 끝에 매달 때에도 이 십자가를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집트의 고대 교회인 콥트교회 교도들은 이 십자가는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현대 서방세계에서는 병자의 쾌유를 기원할 때 이 십자가를 ‘아뮬렛’(부적)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에 힘이 있다고 믿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놋 뱀은 바라보는 자가 치유되고, 회복되고, 구원받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십자가는 만세에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동양귀신과 서양귀신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귀신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귀신에 대한 관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한국 귀신은 주로 원한관계 때문에 귀신이 됩니다. 귀신은 한 결 같이 한이 많습니다. 한이 많은 삼촌 귀신이 조카에게 들어가고, 할아버지 귀신이 손자에게 들어갔다는 말도 듣습니다. 어쩌면 한국 귀신은 사랑이 없이 가족들을 그렇게 괴롭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원한이 풀리면 사라집니다. 서양귀신은 원한관계가 아닙니다. 피를 빨아먹는 귀신이 많습니다. 그런데 서양귀신은 십자가를 보면 사라집니다.
드라큘라는 영국 작가 스토커가 1897년에 쓴 괴기소설의 주인공입니다. 루마니아 백작인 드라큘라는 서양 뱀파이어의 원조입니다.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피를 빨아먹는 귀신입니다. 그런데 드라큘라는 십자가를 보면 두려워하고 도망갑니다. 십자가는 귀신을 쫓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생명이며 구원이기에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능력이란 말은 ‘뒤나미스’인데 는 원래 뜻은 자연적 힘을 의미했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격적 힘과 초인간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다이나마이트’라는 말의 어원인데 폭발하는 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로마서 1:16에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합니다. 복음도 십자가도 폭발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폭발하게 하여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 동화에 ‘오페이로’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오페이로는 ‘지다’(to bear, to bring) 혹은 ‘업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오페이로는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의 부하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힘센 장수에게 가서 부하가 됩니다. 그런데 그 장수가 마귀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는 마귀가 장수보다 힘이 세다고 생각하여 마귀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귀가 길을 가다가 십자가를 보고 까무러칠 정도로 놀랍니다. 그는 십자가가 가장 힘이 센 것이라 생각하여 십자가의 주인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의 주인을 찾지 못한 그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사람을 업어 강 건너편으로 옮겨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소년이 그의 등에 엎였습니다. 강을 건너기 위해 강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엎인 소년은 납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등에 엎인 소년을 돌아보며 “소년은 누구요?”라고 물었습니다. “예수요”. “그런데 왜 이렇게 무겁소?”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가기에 이렇게 무겁소”.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주인은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주는 힘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십자가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십자가 주인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를 부적처럼 이용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인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십자가도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십자가도 아무런 구원의 능력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하셨습니다.
찬송가에는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능력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입니다. 십자가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무 막대기, 나무 기둥에 불과합니다.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의 주인,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십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이며, 능력의 십자가입니다.
결 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2년 밀비안 다리의 결전(Battle of Milvian Bridge)을 합니다. 그는 막센티우스와 대결하기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빛을 발하는 십자가가 나타났고, 십자가와 함께 ‘이 상징으로 그대 정복하리니’라는 문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자신의 군사 모두에게 방패에 페인트로 십자가표식을 그리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 결과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와 그의 군사들은 크리스천이 사교를 이긴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십자가는 분명히 승리하게 합니다. 우리의 영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하고, 구원의 생명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3:4에는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 합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살아있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으로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 이규현목사
우리 시대를 고도의 지식 시대라고 합니다. 지식 팽창의 시대이고, 정보화 시대, 전문화 시대입니다. 인터넷으로 전 세계의 정보를 누구든지 취할 수 있습니다. 요즘 환자들은 너무나 많은 지식을 인터넷을 통해 알고 와서 오히려 의사들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날마다 일어나고 있고, 생활이 첨단화되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고 있을까요? 오히려 지식과 이론으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고, 삶은 여전히 불안하고 무엇인가에 늘 목이 마릅니다. 이전보다 정신적 질병은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지식이 생존의 수단으로서는 문제가 없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직장인들의 상당수는 먹고 살만한 돈만 있다면 당장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토로합니다. 그래서 ‘직장인의 내면적 자기 퇴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퇴직한 상태로 방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에 재미가 없고 살맛이 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증상이 일어날까요? 생존의 수단을 붙잡고 있지만,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붙잡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인 고린도 지역은 문명이 발달했던 도시였습니다. 특히 그리스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문화가 꽃을 피우고 있었고, 그런 도시 안에 있던 교회도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반응은 둘로 나뉩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의 반응인데, 그들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믿고자 했던 그들에게 힘없이 죽어버린 유대 청년은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부류는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심오한 철학이나 지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식을 중요시하는 헬라인에게 바울의 복음 메시지는 천박하고 무식한 소리로 들렸습니다. 강한 신들을 섬기던 로마인들에게는 힘없이 나무에 매달린 채로 죽은 예수에게서 복음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막강한 힘을 절대 가치로 여기고 살던 로마인들에게 예수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 1:18)”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특히 고린도교회는 헬라 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고 있었습니다. 헬라인들은 다양한 철학들을 추구해서 다양한 학파와 웅변술, 토론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길거리에서도 논변자들이 논쟁하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사람들은 지식 쌓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어느 스승에게 배우는가 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한 관심거리였습니다. 이런 문화 때문에 고린도 교회 안에도 아볼로파, 바울파 등으로 분파를 만들어 복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가치란 얼마나 많이 아는가 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그 영향으로 새로운 지식을 찾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고상하고 수준 높은 지식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이런 현상들이 있습니다. 주지주의적인 현상일 수 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수준 높은 내용을 듣기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영혼이 변화, 성장하고 복음 안에서 삶이 풍성해지는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아는 것에 몸부림칠 때가 많습니다. 각종 성경공부와 훈련으로 사람들의 머리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훈련프로그램이 많아지지만, 어떤 과정을 마친 것이 계급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지적 만족, 그냥 똑똑한 신자로 끝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유수 대학들도 처음에는 순수한 신학교로 출발했지만, 학문화되어 갈수록 신앙을 포기하고 철저히 인본주의의 본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린 세속적인 학교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이 빠진 지성, 은혜가 없는 이론적 성경지식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성이 하나님을 떠난 것일 때 그것은 자신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은 어느 시대보다 영적인 시대처럼 보입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도 영성을 이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갖고 달라이라마 혹은 탓닉한과 같은 사람의 글과 강연에 매력을 느낍니다. 물질적 풍요로 인한 내면의 공허함을 무엇인가로 채우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주의의 세상에서 지성인들은 기독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집니다. 바울이 처한 시대도 비슷했습니다. 고린도 이전에 바울은 아덴(아테네)이라는 철학과 지식이 숭배되는 도시에 가서 철학적인 실력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철학이 가미된 복음을 전파했을 때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철학과 지식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 목마르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다른 모습입니다.
한국의 지성의 상징인 이어령 교수는 기독교 신자가 되고 난 후, 최근에 기독교 서적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지성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지만, 요즘 그는 자신의 지식의 한계, 지성의 무기력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딸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지식이 전혀 쓸모없고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지식의 탑을 쌓은 사람의 고백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여준 태도도 분명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바울이 얼마나 복음에 사로잡혀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도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지만 자신의 화려한 학문적 경력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이론적 무장과 지성이 깨어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확고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도’ 외에는 어떤 것도 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23절에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것은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지혜나 지성에서 나온 자랑들을 늘어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지식을 쌓으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지적 허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식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에게는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해주고자 하는 유혹이 많습니다. 말씀 이외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는 죄 문제, 십자가, 회개, 종말, 하나님의 나라, 이런 주제들이 별로 다루어지지 않고, 도덕적 설교나 일상의 가벼운 주제들이 주류를 이루며 청중과 타협하는 설교가 많습니다. C.S 루이스는 “당신을 편안하게 해 줄 종교를 찾는다면 나는 절대로 기독교는 추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리를 갖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그렇게 붙들었습니까?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소개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기독교를 설명할 수 없고 우리의 신앙은 성립이 안 됩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수많은 교훈과 원리들을 발견하고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가정행복의 원리, 비즈니스의 원리, 사회 개혁의 원리, 인간관계의 원리, 리더십의 문제 등 성경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것들을 발견한들 십자가의 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세상에 전달해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인간 구원을 위한 완벽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향해 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덮어 버리면 신앙은 방향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는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헌신이나 활동들은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와야 신앙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사회봉사를 많이 하고 활동을 많이 해도 십자가가 빠지면 세상 단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은 십자가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는데 그 신앙의 뿌리는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헌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인간의 지성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세상의 권력이나 명예나 돈을 제공해준다고 가능한 일일까요?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것들과는 완전히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크고 탁월한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선택할 것인가? 언뜻 보기에는 인간의 지성에서 나온 소리들이 그럴듯해 보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진짜 예수쟁이로,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살려고 하면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을 수 있고 그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사물을 보는 관점과 해석도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의 관심은 이 세상입니다. 지금 당장 행복과 성공이 중요한 것이지 영생의 삶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만족과 행복보다 영원한 세계, 영생의 삶, 구원을 추구합니다. 정신과 치료의 목표는 미친 사람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의 목표는 세상에서의 정상인을 예수 안에서 미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복음을 경험한 사람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정상이 아닙니다. 세상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하지만, 신앙의 논리는 죽어야 산다고 합니다. 세상은 끝없이 높아지려고 발악을 하지만, 신앙은 낮아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논리를 뒤집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고, 약할 때 강함이고,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기꺼이 가고,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마디로 미친 짓을 하라는 것입니다.
21절에서 말씀하는 ‘전도의 미련함’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미련하게 보이나 바울은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고, 그것만을 고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무엇인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지혜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철학과 사상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라는 것은 자기가 노력하고, 득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소망이 없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과 은혜의 세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간단한 복음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아무도 믿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미련함이란 단어를 씁니다. 엉성해 보이고, 비지성적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확실히 미련해 보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전도의 미련한 방법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굉장히 유식하게 말을 하면 어떤 역사가 일어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전도할 때는 복잡하고, 어렵게 말하거나 자기의 생각과 말을 집어넣지도 말아야 합니다. 누가 전도의 미련함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복잡한 이론이나 어떤 철학에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단순한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내 인생을 흔들고 다 쏟아놓을 수 있는 것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났을 때입니다. 우리가 성경공부를 해서 내 인생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니까 성경의 지식이 내 인생에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바울은 깐깐하고 지적이고 논리와 철학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또 다른 철학과 논리를 만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고 삶이 뒤바뀐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자신의 영혼을 파고들어 왔을 때, 십자가의 영광스러운 광채에 그의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밀려오는 풍성함에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의 경이로움에 무릎을 꿇었고, 자신의 모든 삶을 압도했습니다. 그가 붙잡던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은 내가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이나 철학에 내 생명을 던질 용기가 있습니까? 지식은 가질수록 비겁해집니다. 그것을 위해 내 생명을 헌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앎은 가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 가장 성공적인 인생이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믿고, 믿고 있는 그것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칠 수 있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멋진 인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정보일 뿐입니다. 예수도 알고, 성경도 아는 것일 뿐입니다. 지식이 가슴으로 내려올 뿐 아니라 삶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바울은 지식쟁이, 말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자신도 믿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설명해주는 것으로 밥벌이를 하고 산 사람이 아닙니다. 거기에 생명을 바쳤고 다른 사람이 생명을 바쳐도 조금도 후회할 것이 없음을 확신하고 온 인생을 바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귀중한 생명을 바칠만한 것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인생을 살기를 바랍니다. 사실 생명을 바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한 삶이란 뜬구름 잡는 인생입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인생의 끝은 어느 날 황급히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를 위해 생명을 걸고 산 사람은 죽음의 문제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언제 어떻게 죽으나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에 삶을 바친 사람은 생명의 문제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칼 막스는 ‘기독교는 아편이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오해한 말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무엇을 알고 말한 것 같습니다. 칼 막스가 보기에 기독교는 무엇인가에 미쳐있는 것입니다. 공산주의로도 도무지 잡을 수 없는 집단이 기독교입니다. 북한도 무서워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아편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도의 힘이 복음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의 진위를 확인해 보십시오. 교회라는 곳에서 기독교의 문화를 익히고 봉사하기 이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사랑이 농축된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그것 없이 교회에 다니고 봉사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문화화되는 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길에서, 우리의 삶에 수많은 사건과 계획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붙들고 있는 이념도, 철학도, 사상도, 내가 가진 경험도 시간이 지나면 낡아 버립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영원합니다. 아무리 깨어지고, 망가지고, 상했어도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가 다가가면 다시 살아나는 대반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진지하게 십자가 앞에 서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 내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직도 거리끼고 미련하게 보입니까? 십자가가 부끄럽습니까? 이 세상의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그 십자가가 자랑스럽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는 복음이 아니라면 그 신앙은 문제가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당당하게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십자가 안에 우리 인생에 모든 해답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온 세상에 담대하게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전도해야 하는가?
고전 1:18-21 / 박덕기목사(광주송정교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보았더니, 가을걷이가 이제 거의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추수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콩을 심었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었으면 팥을 거둡니다. 많이 심었으면 많이 거두는 법이고, 적게 심었으면 적게 거두는 법입니다. 이것은 만고에 불변하는 자연계의 원리입니다. 또 다른 원리가 있습니다. 젊어서 심고 인생의 중년과 노년에 거두게 되고, 그리고 부모가 심어서 자녀가 거두게 되는 법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세계에도 원리가 있습니다. 곧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부패와 해소의 종자가 있어서, 영혼이 떠난 육체는 죽은 지 삼일만 되어도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은 육체보다 영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도, 또한 재벌그룹의 억만장자라도, 그리고 당대의 최고 탤런트라도, 영혼이 떠난 몸은 시체라 하고 시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영혼의 가치를 전혀 모르고, 오로지 육체만을 위하여 삽니다. 그러나 육체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분명히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심고 성령으로 심어서, 꼭 영생을 거두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또 다른 추수를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곧 영혼의 추수입니다. 11월 25일 주일은 영혼 추수주일인데, 우리 모두 영혼을 추수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을이 되었어도 거둘 것 하나 없는 농부가 있다면, 얼마나 실망하고 허망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령한 추수 군으로 부름을 받았는데, 한 해가 다 지나가도록 한 영혼도 건져내지 못했다면, 도대체 하나님께 무슨 말로 우리들의 불충함을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를 하라고 하면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가리켜 “모이라! 돈 내라! 집짓자!” 하는 집단이라고 하면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성도들은 말하기를, 우리들은 목사님들처럼 숫자에 관심이 없다면서 고상한척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전도해야만 합니까? 단지 이 넓은 예배당을 채우기 위해서만 입니까? 결코 그러한 이유만이 아닙니다. 영혼추수주일을 앞두고 우리가 왜 반드시 전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성경에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겨자씨로 비유된 천국 운동은 예수님으로부터 12제자, 70문도, 120문도로 번져 갔습니다. 전도행전이라 할 수 있는 사도행전에는, 교회 성장에 관한 성경 구절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2:41에 “이 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더라.” 4:4에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5천이나 되더라.” 5:14에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6:7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 하니라.” 9:31에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11:20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허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11:24에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14:1에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16:5에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더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수적인 성장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오늘날 어떤 목사보다 성장에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음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펼치는 전도 운동에 불평하거나 방관하는 신자들이 있을 수 있음으로, 과연 우리가 ‘왜 전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성경적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이기 때문입니다.
마 28:19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했고, 막 16:15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으며, 행 1:8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고, 딤후 4:1-2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했습니다.
전도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면서, 또한 주님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청개구리도 엄마의 유언은 들어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만일 어떤 성도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주님의 최후의 유언과도 같은 전도하라는 말씀을 순종치 않는다면, 그는 청개구리만도 못한 신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성도라면 반드시 전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전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21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왜 십자가와 전도가 하나님의 방법이고 능력일까요? 1)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2)여기에 하나님의 지혜와 열심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왜 십자가의 도와 전도가 미련하게 보이는 것일까요? 1)이해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2)구원 섭리와 사랑을 듣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속, 이것이 하나님 작정이고 섭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섭리를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그와 같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듣지도 믿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의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겔 33:11에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또한 눅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 비유’ ‘탕자의 비유’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고 기뻐하는 양의 주인이나,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고 기뻐하는 여인이나,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왔을 때 기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모두 잃어버린 죄인을 찾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가르쳐 주신 비유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전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구주성과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요 14: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고, 행 4: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강력하게 선포했습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자는 참 도를 알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 도를 알고 구원을 얻게 되었으니, 얼마나 복 있는 사람들입니까? 성도 여러분! 만일 복음 진리 이외에 더 탁월한 진리가 있으면 말씀해 보십시오. 저는 복음 진리를 위해서 더 충성하지 못한 죄스러움은 있으나, 이 진리 외에 다른 진리는 없음을 확신하고, 그러한 점에서 지금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확신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열심히 복음 진리를 전하십시오. 멸망으로 인도하는 이단 사술을 퍼트리는 데에도 얼마나 열심인데, 우리가 생명을 걸고 믿는 복음 진리를 힘써 전파하고, 자랑스럽게 전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4. 영혼에 대한 긍휼 때문에 전도해야 합니다.
마 9:35-36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 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민망히 여기시니 라는 말은, compassion 곧 ‘불쌍히 여김’을 뜻합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단장(斷腸)의 긍휼을 의미합니다. 메튜 헨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를 하늘에서 지상으로 또한 거기서 십자가로 이끌어 온 것은 영혼에 대한 긍휼이었다.”고 하면서 “기독자의 최고의 연민은 영혼에 대한 연민이다. 그것은 최고로 그리스도와 닮은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9:1-3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했습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말 가운데 ‘비원’(悲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중생이 극락왕생 하기까지 자기의 낙원 행을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참 구원이 없는 이방 종교에도 이 같은 구령의 열정이 있다면, 하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만한 구령의 열정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중 지옥에 간 부자는 고통 속에서 한 방울의 물을 구했다가 거절당한 후, 아브라함에게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 하게 하여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라고 간청합니다. 자신은 비록 믿지 않았다가 지옥에 와서 이 고통을 받지만, 지상에 있는 자기의 형제들만은 전도를 받아, 제발 지옥에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인지상정이요 혈육의 정이 아니겠습니까?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천국과 지옥이 있는 것을 확신하는 신자라면, 어떻게 불신 가족을 그대로 두고 혼자서만 왔다 갔다 할 수 있겠습니까? 딤전 5:8에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불신 가족을 주님께 인도하는 일은 쉽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영혼에 대한 긍휼과 사랑의 문제라고 봅니다. 불신 가족의 영혼에 대해 참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인도하는 방법도 있고 길도 있을 것입니다. ♪웬일인가 내 형제여 주 아니 믿다가, 죄 값으로 지옥 형벌 너도 받겠구나. 웬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세상 물질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 하는 심정으로, 불신 가족과 이웃들의 영혼을 건지는데 온갖 힘을 다 써야 할 것입니다. 왜 전도가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1)전도가 중요한 것은 한 영혼이 처한 위험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만 하면 누구나 다 구원을 얻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가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다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게 됩니다. 이렇듯 전도가 중요한 것은 그 영혼들이 처한 위험 때문인 것입니다. 2)전도가 중요한 것은 영혼의 가치 때문입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영혼의 가치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 계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귀중한 영혼을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3)전도가 중요한 것은 전도의 결과 때문입니다. 전도하여 누구든지 받아들이면 영생을 합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흑인이든, 황인종이든, 백인이든 구별치 않고 온 세계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가치를 알고 영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성도라면, 반드시 전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5.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전도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요 15:16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라고 했으며, 벧전 2:9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로,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막과 같은 불모지에서 하나님의 기름진 동산에 옮겨 심겨진 나무들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름진 동산에 옮겨 심어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름만 실컷 빨아먹고 열매는 없는, 땅만 버리는 나무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반드시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6.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틀림없이 에스겔서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악인들, 곧 불신자들에게, 복음으로 깨우쳐 주어야 할 이 시대의 파수군들인 것을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7. 전도하면 놀라운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사람의 영혼구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말씀의 씨를 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12:3에 말씀하기를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전도하면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성령은 전도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사도들과 전도자들에게 놀라운 권능을 부어 주었듯이, 전도하는 성도는 힘이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전도하면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신생아실의 엄마들의 얼굴에 슬픈 얼굴을 찾아 볼 수 없듯이, 전도한 사람을 보면 언제나 기쁨이 가득합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씽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가는데, 한 사람이 눈 위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그냥 가버립니다. 썬다씽이 가보니 그 사람이 거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붙잡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같이 갑시다. 이 사람을 좀 살려갑시다.” 하니까 “나도 힘든데 누구를 돌본다는 말입니까?” 하면서 그냥 가버렸습니다. 썬다씽은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업었다가 놓치면 또 들쳐 업고, 또 업었다가 놓치면 다시 들쳐 업고, 안간힘을 쓰면서 언덕길을 오르는 바람에, 눈 위에 쓰러져 있던 사람의 몸이 녹으면서 둘이 살아서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쓰러져 죽어 있었습니다. 혼자만 살려고 먼저 갔던 사람들은 다 쓰러져 죽었던 것입니다. 같이 살려고 한 사람은 그 사람도 살리고 자기도 살았습니다. 썬다씽은 그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남을 살리려고 하면 나도 살고, 남을 살리려고 하지 않으면 나도 죽는구나!” 자식을 살리려고 우는 어머니는, 자식을 구원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도 삽니다. 남편을 구원시키려고 울고 애쓰는 아내는, 자기도 살고 남편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신학자 부르너(E. Brunner)는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죽은 교회이다. 살아 움직이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이다.” “불은 불이 있을 때 불이듯이, 교회는 전도할 때 교회다.” 라고 말했습니다.
폴 러셀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는데, 그 사람은 할리우드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 존 헤이먼이었습니다. 러셀만과 같이 성경공부를 하다가 존 헤이먼이 “나는 영화도 많이 만들고 상도 많이 받았고, 일생 동안 사람을 타락하게 하는 영화를 많이 만들었으나,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한 영화를 만들겠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누가복음 전체를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그 영화가 바로 대학생 선교회에서 보급하고 있는 ‘지저스’라는 유명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제작 당시부터 제작에 참여한 스텝들을 변화시켰고, 촬영을 구경하고 있던 관중들을 변화시켰으며, 아랍권에서조차도 선교용 영화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는 폐병 3기의 중환자로, 날마다 피를 토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희망이라곤 도무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미우라 아야꼬가 폐병환자 수용소에서 죽어가던 한 청년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나중에 건강을 되찾은 미우라 아야꼬는 작품을 통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가 쓴 ‘길은 여기에’라는 책을 읽은 독자 가운데 80%가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든지, 아니면 예수 믿을 마음을 가진다고 합니다. 수용소에 함께 있던, 피를 토하면서 죽어가는 한 청년이, 버려진 이 여자에게 겨자씨만한 복음의 씨앗 하나를 던져 준 것이, 그렇게 연쇄 파동을 일으킬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할리우드에서, 폐병환자 수용소에서, 그 어디에서나 무심코 던진 겨자씨 한 알만한 복음의 씨앗이, 그렇게 큰 능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시카고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이 한 젊은이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가서 당신 볼일이나 보세요. 난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이것이 내 볼일이오.” 그가 바로 유명한 ‘무디’였습니다. 그는 하루라도 누구에겐가 예수에 관해 전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전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직업처럼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귀를 열어주셔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그야말로 송정 중앙 교회 성도 모두가 총동원 되어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방관자 노릇을 하고, 적당한 구실을 붙여 핑계하기에는, 너무도 분명하고 중대한 주님의 지상 명령이고, 다른 어떤 일보다 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 구주성과 복음 진리에 대한 확신 때문에, 또한 죽어 가는 영혼들을 바라만 볼 수 없는 긍휼의 동기에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이 전도의 열매를 맺게 함에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줄 알아서, 그렇지만 전도자에게는 하늘의 큰 상급이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실천해야만 할 그리스도인 모두의 절대적인 사명임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귀한 일을 위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영혼 추수 하는 일에 동참하여, 귀중한 전도의 열매를 모두 주님께 드릴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 박덕기목사
결혼 20년 차인 여자가 남편의 애정이 식은 것 같다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남편에게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라고 독촉했습니다. 남편은 그 말을 따랐고, 집으로 돌아오더니 아내를 번쩍 안아 들고,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놀란 여자가 물었습니다. “목사님이 도대체 뭐라고 하신 거예요?” “당신이 바로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하시더군.” 유머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는, 결코 그런 의미와는 전혀 다릅니다.
종교마다 그 종교의 핵심을 나타내는 상징이 있습니다. 불교는 만(卍)자 형태를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만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한데, 보통은 시작도 끝도 없음을 상징한 것이며, 온갖 좋고 덕스러운 것이 결집된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원불교에서는 동그라미 형태를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이 상징은 일원상(image of one origin)이라고 불리는데, 모든 진리가 하나의 원리에서 시작되었고, 하나의 진리로 귀결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초승달을 상징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모하메드가 알라로부터 계시를 받을 때가, 초승달과 샛별이 떠 있던 밤이라는 전승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초승달은 달이 점점 커지는 시기에 뜨는 달이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참된 진리의 시작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은 당연히 십자가입니다. 상징 치고는 좀 자극적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당시는 가장 잔인한 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종교에서 교수대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하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십자가 상징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는, 이런 흉측한 물건을 상징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분명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당면한 문제 중, 분쟁 문제는 사도 바울의 가장 큰 관심사여서, 바울은 맨 먼저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쟁의 실정은 바울 파니, 아볼로 파니, 게바 파니, 그리스도 파니 하는 지도자 숭배에서 나온 당파심에서 야기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모든 당파를 전면 부정하고 책망한 다음, 이제는 분쟁의 원인이 된 사람의 지혜와,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여 깨우쳐 줍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으나, 사람의 지혜는 이것을 미련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는 멸망하고,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오늘 분문의 중심 내용입니다.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기독교의 중심 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속이 믿어지면 예수 믿는 사람이고, 십자가의 구속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교회 출석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과, 산상보훈 같은 것은 대찬성하면서, 십자가의 구속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글에서 성경구절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은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때로는 정치가들이 거창하게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을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의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교회당에는, 예외 없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기독교의 심벌마크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종교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되어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만 생각하면, 2천 년 전에 사형 선고를 받아 죽은 예수께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며,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입니까? 인간의 지혜로만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소리로밖에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능력이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 믿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 내고, 생명을 살려내고, 세상과 마귀를 이기게 하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 나가게 합니다.
19절에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29:14를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구약에도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가 전적으로 반대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이나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여 마침내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시고야 맙니다.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여기 ‘지혜 있는 자’란, 헬라의 철학자들을 말하고, 선비란 서기관 같은 유대인 학자들을 의미하며, 변론가란 헬라의 웅변가들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철학자나 서기관이나 웅변가들을 지혜 있는 자라 할 수 있겠지만, 이들의 지혜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이 말씀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못하므로, 그 지혜와 지식은 미련케 된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실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숨겨져 있는데, 이 세상 철학자들이나 서기관들이나 웅변가들이, 그들의 지성으로는 도저히 깨닫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방법이 있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왜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까? 그 원인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이 죄를 범한 결과 때문입니다. 고린도서에 의하면, 이 세상 신 곧 마귀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 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은 자기의 작은 지혜 때문에, 하나님의 큰 지혜를 알지 못합니다. 옛말에 대현(大賢)은 대우(大愚)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크게 현명한 듯 하여도, 결국 그 현명함이란 것이, 큰 어리석음과 통한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부처라는 말을 하는데, 그 뜻은 깨달은 자란 뜻입니다. 그러나 각을 얻고, 크게 깨닫고, 그래서 굉장한 현인이 된 것 같지만, 그 결국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작은 지혜로, 자신과 수많은 인생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종교의 교조가 되었다는 것 외에 달리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의 생일을 경축한다는 추기경이나 교황의 언사를 보면, 저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 진리로, 수 천만, 수억의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등지게 하고, 그들의 영혼을 파멸로 이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축하하고 경축한다는 말인지....저는 무엇 때문에 그러한 추파를 보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상 종교까지 용납한다는 것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만 생각한다면, 어떠한 이방 종교, 우상 종교도 비판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는 것이, 신사적이고 더욱 고상한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 이 같은 태도 자체가 바로 인간의 지혜, 인간의 이성, 인간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은 결코 비 진리에 대해서, 이단사술이나, 사신 우상, 우상 종교에 대해서 관대할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리는 결코 혼합주의 일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 철인이나 종교가의 지혜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했습니다. 여기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말은, 역설적인 형용법입니다. 전도는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일 수 없고, 하나님의 지혜가 미련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할 때, 미련한 듯 보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미련해 보이는 듯한 십자가의 도, 전도라는 미련하게 보이는둣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22-24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1. 유대인은 표적을 구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황금시대가 오면, 굉장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 편지들을 쓰는 바로 그 때에도, 거짓 메시아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속이고 이상한 일을 나타내 보이겠다고 약속했으며, 자기가 구세주라고 믿게 하려고 했습니다. 주후 45년경에는 ‘드다’란 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몇 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집을 버리고 자기와 함께 요단강에 가자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명령하면 요단강 물이 둘로 갈라져, 모두 발을 적시지 않고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또 그보다 9년 후인 54년경에는, 애굽으로부터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어떤 자가 예루살렘에 나타나서, 삼만 명을 설득하여 감람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명령하면 예루살렘의 성벽이 무너진다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이런 일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더러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며, 인기를 끌만한 일은 고의로 피하시고, 오히려 봉사하고 희생하시면서, 결국은 십자가에서 생을 마쳐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또한 제자들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는, 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해주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도 메시아도 아님을 증명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대망하는 메시아가 현세의 위대한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인간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전혀 없이, 그토록 저주스런 죽임을 당한 사람을, 그들의 왕이나 구주로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정죄를 받아 사형당한 사람을 전도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악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란 유대인이게 있어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넘어가는 데 큰 장애물이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한 것입니다.
2.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소피스트란 본래는 좋은 의미로 지혜 자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교묘한 말로 나쁜 것도 좋게 보이도록 하는, 궤변을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무 해결책을 가져올 수 없는 논쟁을 몇 시간이라도 거듭하는 인간, 문제의 해결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정신적 소풍을 즐기는 사람, 교묘한 말과 매끈한 변설을 자랑하며, 청중의 갈채를 받고 우쭐거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소피스트라는 인종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인들은 이 같은 소피스트들의 아름다운 말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무뚝뚝하게 말하는 기독교 전도자들을, 그들은 교양이 없는 조잡한 인간으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기독교 전도자들을 귀를 기울여 들을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조소와 우롱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전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전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이적이나 철학적인 언사를 사용하지 않고, 소박하고 단순하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만 전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도만 전하는 자는, 신비주의자들에게는 거리끼게 보이고, 인간의 지혜로 기독교를 이해하려는 신신학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부르시사 십자가의 도를 믿게 한데 있는 것이며, 결코 이적이나 인간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적이나 인간의 지혜로는 결코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으며,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미국 네바다 주에 ‘죽음의 골짜기’(The Valley Of Death)로 불리는 골짜기가 있었습니다.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고, 벌레 한 마리 살 수없는 그 곳을 일컬어 죽음의 골짜기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30년 5월에 놀라운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9일 동안 폭우가 쏟아졌는데, 그 결과 수십 년간 죽은 듯이 묻혀 있던 씨앗에서 싹이 나고 움이 터서, 온 골짜기를 푸른 초원으로, 아름다운 화원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와 같은 광경을 바라본 사람들이 “죽음의 골짜기가 생명의 골짜기로 바뀌어 졌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이 범죄한 이후, 죽음의 골짜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언덕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골짜기를 생명의 골짜기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할렐루야!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무슨 미련한 것이나, 약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미련한 사람의 눈에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은, 사람 보기에 약하고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저 유명한 철학자들이나, 정치가들이나, 유대의 랍비들이나, 박사들을 모두 무색케 만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십자가는 엄청난 승리를 한 것입니다. 십자가야말로 다른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한 것입니다.
다음은 장경철 저 ‘축복을 유통하는 삶’ 중에서 “죽음 이후에 천사장을 만나면 이렇게 답하십시오.”라는 글입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하늘나라의 현관에서 심문을 받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천사장이 물을 것입니다. “당신은 죄인입니까? 아니면 의인입니까?” 그때, 죄인인 것 같다고 대답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사장은 지체 없이 “당신은 지옥으로 가시오. 죄인이 가는 곳은 지옥입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나는 의인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천사장은 계속 심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 증거를 대주십시오.” 그때 당신은 어리석게 당신의 일기장을 뒤적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이런 착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보다 기억력이 탁월한 천사장은, 당신이 잊어버린 추한 사실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낼 것이며, 당신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아마 그는 당신의 선행 뒤에 숨어 있는, 추한 동기도 끄집어낼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당신의 행위가 아니라 골고다의 십자가를 가리켜야 합니다. “저는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주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내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주님이 흘리신 피로 인하여 저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때 천사장은 당신을 영접하면서, 하늘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혹시 당신이 만나게 될 천사장이 조금 짓궂은 천사장이라면, 아마 한 가지 질문을 더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당신을 의롭게 한다는 표징이 있습니까?” 그때 담대히 말하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는데, 무엇이 나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겠습니까? 당신이 무엇이 관대 그것을 문제 삼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은 나의 구원이며, 나의 의로움이며, 나의 생명입니다.” 그러면 천사장은 당신을 수종들면서 말할 것입니다. “옳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당신을 수종드는 천사일뿐입니다.”> 참 의미가 깊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헬라 철학사상이 만연했던 고린도에서, 복음의 단순성을 강조하고, 사람이 강조했던 말의 지혜를 타파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도덕가들이 가르친 것보다 훨씬 더 순수한 도덕과,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생각한 것보다 더 고상한 철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철학이나 도덕이나 미사려구(美辭麗句)로 장식되면, 그 효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장 단순하게 십자가의 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만 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하게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듯한 십자가의 도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이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이 가졌던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승리
고전 1:18-25 / 박덕기목사(광주송정교회)
핀란드에 한 왕이 있었는데, 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슬하에 오직 공주만을 두고 있었던 그 왕은, 공주의 신랑을 뽑아 대를 잇게 할 생각으로, 전국에 사윗감을 구한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드디어 공주의 신랑을 뽑는 날이 되자, 전국에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려 왔습니다. 첫 번째 시험은 말 타기와 활쏘기였는데, 이 시험에서 20명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지혜의 시험으로, 왕이 한 문제를 그들에게 냈습니다. “저 높은 하늘과 땅을 잇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하는 나무를 구해오라. 기간은 100일이다.” 그러자 20명의 젊은이들은 그러한 나무를 구하려고 제각기 길을 떠났습니다. 그 젊은이들 중에 수녀원에서 고아로 자란 존 페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페로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커다란 나무를 구하다가 찾지 못하자, 수녀원 성당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현명한 왕이 되어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하여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던 페로는, 갑자기 무슨 생각에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나무 십자가뿐이다.” 그 후 페로는 지혜로운 왕이 되어 오랫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 일화가 우리에게 교훈해주는 대로, 십자가야말로 하늘과 땅 곧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도는 양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전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한 없이 미련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철학자들이나, 유대교의 랍비들이나, 헬라의 웅변가들, 곧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님의 실패라고 단정하고 조롱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임당한 예수님을 비웃고 조롱하는 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였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비웃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패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실패로 보는 무리들은,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이단들이 그렇고, 통일교의 문선명은 예수님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인간을 구속하는 일에 실패하였다고 하며, 그래서 자기가 구원을 완성시켰다고 헛소리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 또한 그리스도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실패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위대한 승리의 상징인 것입니다.
1. 십자가는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입니다.
인류 역사는 한 마디로 전쟁과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의 투쟁, 참과 거짓의 투쟁, 사랑과 미움의 투쟁이 교차한 역사가 인류사입니다. 즉 악과 거짓과 증오의 화신인 사탄과, 참과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의 투쟁사라는 말입니다. 이 투쟁에서 항상 사탄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말미암아, 사탄은 여지없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사탄이 승리한 듯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였으나,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을 이기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골 2:15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정세와 권세는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사탄의 권세를 쳐서 파하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은,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대반역자인 사탄의 유혹에 빠져 범죄한 직후,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사단의 머리를 부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목적을 파괴하고자, 사단은 온갖 훼방과 불의로 그리스도를 대적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신음하는 인류를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는, 사탄의 권세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와 권세의 승리인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악에 대한 의의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승리가 있기 전에, 인류사는 항상 왜곡되어 불의가 의에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 왔습니다. 그래서 합 1:4에도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고 탄식했습니다. 양심을 지키는 자는 손해를 보고, 무조건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려는 자는 이득을 보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의의 편에 서는 자는, 패배를 당하고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양심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의가 승리해 주기를 바라고, 선이 이길 것이라고 응원하였으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로 나타나곤 하였습니다. 불의가 승리하고, 거짓이 이기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불의를 이기고 승리하심으로, 그 의를 의지하는 자는 모두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힘은, 악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만일 부활이 없다면, 악이 승리했을 것입니다.
역사가 J. A 프라 은 “역사는 하나의 교훈을, 분명히 오직 하나의 교훈을 명확하게 반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세계는 도덕적인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궁극적으로 선은 승리하며, 궁극적으로 악은 멸망한다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어느 곳에 깨끗하고 정결하게, 술집도 창녀도 없는 것을 자랑삼고 사는 청교도 같은 마을이 있는데, 한 처녀가 어쩌자고 결혼하기 전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 마을에는 한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온갖 궂은일은 그 수도사가 다 맡아서 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마을에서 한 처녀가 임신을 했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대지 못하면, 간음죄로 추방을 당하게 되고 잘못하면 맞아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얘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을 말을 안 해요. 그래서 결국 추방을 당하게 되었는데, 추방 직전에 하는 말이 ‘저 수도사’라고 했어요. 수도사는 그대로 끌려가서 많은 몰매를 맞고, 고역을 당하고 감옥에 처넣어졌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은 감옥에서 죽었어요. 그런데 죽은 다음에 시신을 염하면서 보니까, 이게 남자가 아니고 여자예요. 남장 여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숙연해졌습니다. 이 수도사는 왜 “그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안했을까요? 처녀를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충족되고,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완전한 의의 승리인 것입니다.
3. 십자가는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자 한 자들은, 증오와 독기를 품은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었다면, 인간의 미움과 증오가 하나님의 사랑을 정복한 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미움이 하는 일을 모조리 타파하는 사랑의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싸움을 걸어와도 상대해주는 이가 없으면, 싸움이 되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옛글에 “악한 자가 착한 사람을 꾸짖거든, 착한 사람은 도무지 상대하지 말라. 상대하지 않는 이는 마음이 깨끗하고, 꾸짖는 자는 입이 뜨겁고 끓느니라. 정히 하늘에 대고 침 뱉는 것 같아서, 도로 자기 몸에 떨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소극적인 자세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배우게 될 때에,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가 되고,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4. 십자가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입니다.
롬 6:9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고 했습니다. 인류 역사의 또 다른 표현은, 역사는 죽음의 기록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성인도 죽었고, 철인도 죽었으며, 영웅도 죽었고, 대왕도 죽었습니다. 또한 이 죽음을 극복해 보고자 애쓴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이기거나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 어떤 권력이나 금력으로, 죽음을 극복한 인생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간이 원치 않는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와, 아름답던 인생을 끝장나게 만들고 맙니다. 롬 5:12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모든 인간에게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죽음의 권세는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듯이 하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십자가에서 승리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중생한 자입니다. 요 5: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전쟁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교회가 곡식을 거두고, 감사 예배를 드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감사의 예물 가운데는, 한 묶음의 곡식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감사의 예배는 드릴 수 없었습니다. 토요일 밤 야만적인 공습이 있었고, 그 공습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순식간에 폐허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봄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서 있던 자리, 폭탄이 떨어졌던 자리에, 푸른 새싹이 움텄습니다. 여름이 오고 싹은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깨어진 기왓장 사이로, 잘 익은 작은 곡식밭이 하나 생겼습니다. 엄청난 폭탄의 파괴력도, 그 종자의 생명력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생명은 죽음보다 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철장으로 질그릇 깨트리듯 부수어 버리시고, 그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사망이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 15:26절에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망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기독교의 중심 되는 교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구속이 믿어지면 예수 믿는 사람이고, 십자가의 구속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교회 출석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8년 파리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실화입니다. 한밤중에 불이 났습니다. 4층 아파트에 아버지와 아홉 살 미만의 4남매가 잠들어 있었습니다. 아래층에서 불길이 올라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유럽의 서민 아파트들은 빌딩들이 총총히 붙어있어, 이웃 건물과의 사이는 불과 1.7m로 어른의 키 정도가 됩니다. 아버지는 자기 집 창문으로부터 맞은 편 건물 창문 사이에 매달려 다리가 되어주었습니다. 무서워하는 아이들을 격려하면서, 세 살 난 막내까지 건너가게 하였으나, 아버지 자신은 불길에 그슬리고 지쳐서 결국 추락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실로 위대한 아버지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접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희생의 다리가 되어 주신 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야말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가교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과, 산상보훈 같은 것은 대찬성하면서, 십자가의 구속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은 글 속에서 성구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많은 정치가들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질을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의 종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모든 교회당에는, 예외 없이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기독교의 심벌마크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종교가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탄생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만 생각하면, 2천 년 전에 사형을 받아 죽은 예수가, 결코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2천 년 전에 죽은 예수의 피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며, 죽었던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겠습니까? 인간의 지혜로만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황당무계한 소리로밖에 들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믿은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기 능력이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발하는 힘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도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 믿는 사람을 죄 가운데서 구원해내고, 생명을 살려내고, 세상과 마귀를 이기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어 나가게 합니다.
곽선희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이러 저러한 일로 북한을 자주 내왕하고, 북한에 있는 고관들과 자주 만나서 얘기도 해보았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평양에 과학 기술대학을 세우려는 큰 계획을 세우고, 재단 이사장의 임명장을 받고, 큰 행사를 치루고 저녁에 파티를 하는데, “목사님, 목사님은 왜 우리를 돕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목사님의 아버지가 우리 공산당원에 의해 총살당한 것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북한을 10여 년 동안 돕는데, 그 돕는 이유가 뭡니까? 무슨 대가를 요구하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곽 목사님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평양 시내에다가 굉장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그런 얘기는 안하겠습니다. 내가 목사니까, 뭘 요구한다는 걸 다 알고 있으면서 뭘 물어봅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래도 한 말씀 해주셔야지요.”라고 졸라댔습니다. 그래서 곽 목사님은 “딱 한마디만 할게요. 예수 믿는 사람들 죽이지 마세요. 이것만 약속해주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작년에도 400명 죽였다며, 인정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인들 죽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공산당원들이 말했습니다. “안 죽일 수가 없어요.” “왜요?” “반동이거든요.” “어째서 반동입니까?” “공산당보다 기독교인은 훨씬 셉니다.” 무엇이 세냐고 물었더니 “공산당원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전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기를 기독교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거기서 죽을 뻔했다가 산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그 때 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은, 죽음까지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서울대 총장과 이명박 정부 때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운찬 교수가 미국의 뉴저지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강연을 했다고 하는데, 그 내용가운데 재미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자주 전철을 타고 다녔는데, 그러다 보면 아줌마들의 수다를 귀 너머로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수다를 들으며 관찰을 해 보니, 한국의 주부들은 ‘평등’을 가장 큰 가치로 두고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평등을 최고 가치로 두고 산다? 한국의 주부들이 수준이 대단히 높지 않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닙니다. 한국 주부들은 ‘평’자와 ‘등’자를 좋아하는데, ‘평’자는 아파트 평수의 평자고, ‘등’자는 아이들 학교 등수의 등자라는 겁니다. 한국 가정의 가치가 큰 집을 사는 것과, 아이들 공부시키는 것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이 추구하는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적으로 자랑하자고 들면, 누구보다 더 자랑할 것이 많았던 분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 소지자요, 당대 최고학부인 가말리엘 문하의 출신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알았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찬송가 작시자도 ♪나의 평생 자랑은 주의 십자가로다.♪고 노래했습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과연 무엇입니까?
312년 8월 28일 콘스탄틴 대제는 로마 근교 밀비오 다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력상 우위였던 정적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승리하여,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되는데, 그 승리의 배경에는 신비한 설화가 숨어 있습니다. 전투를 하기 전날 밤 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보여 주며 “너는 이것으로 이겨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십자가 깃발을 들고 나가서 승리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콘스탄틴 대제는 주후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더 나아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게 됩니다. 그 후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을 때, 그것은 정복자의 외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적을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탄을 이기시고, 죄악을 이기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의 승리를 확신하면, 바로 그 능력을 갖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요일 4:4에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탐심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사망까지 이기는 영원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전 1: 18-31 / 김흥규목사(내리교회)
<아부다비, 두바이에 다녀오다>
샤론 중창단을 비롯해서 14명이 아부다비 한인 감리교회 부흥회에 잘 다녀왔습니다. 아부다비에 최초로 세워진 한인 감리교회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서 다녀온 집회였는데, 오히려 저희가 아부다비 교인들로부터 큰 사랑과 환대를 받았고, 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아부다비는 UAE, United Arab Emirates라는 중동 국가의 수도인데, 이 UAE는 7개의 부족이 연합해서 만들어진 국가입니다. 아부다비보다 두바이가 더 잘 알려진 중동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 중에 하나입니다. 두바이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과 세계 최대의 쇼핑 몰 등이 밀집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사실, 아부다비나 두바이는 원유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초라한 유목민족으로 전혀 세계의 이목을 끌지 못했는데, 산유국이 됨으로써 갑자기 부자가 된 나라지요. 기름을 팔아서 부자가 된 나라들 중에는 테러와 전쟁에 시달리는 나라들이 많은데, UAE는 현명한 지도자들을 만나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면서도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중동 국가 하면, 과격한 무슬림이나 테러 등이 떠오르지만, 아부다비와 두바이는 마치 유럽이나 미국에 와 있는 듯이 활발하고 평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전 국토의 98%가 사막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현대적이고 찬란한 도시문명을 이루어낸 저력이 놀라웠습니다. 특히 워낙 부자 나라이다 보니까 인구의 90%가 외국인들이라는 사실도 신기했습니다. 거리에 돌아다닌다고 해서 UAE 시민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부유한 나라가 되다보니까 전 세계에서 돈을 벌기 위해, 혹은 무역이나 샵핑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건물이 휘황찬란하고 사람들이 부유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역시 자연이 제일 좋은 것 같습니다.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100번을 올라가는 것보다 설악산, 아니 인천에 있는 문학산에 한 번 올라가는 것이 훨씬 다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중동 국가를 다닐 때마다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고린도 전서 1장 31절에 보니까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랑이 아침 안개와 같이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님만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돈이든 명예든 외모든 가문이든 어떠한 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지난 번 음력설에 고향에 가서 오래간만에 친척들을 만났는데, 세월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토록 젊고 건강하던 분들이 오래 앓고 나서 눈에 뜨게 늙고 수척해진 모습을 보면서 세월 무상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인간적으로 자랑할 것들이 많겠지만 우리의 약함과 무능함과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함과 무능함과 어리석음과 부족함의 대명사는 십자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약함과 무능함과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곧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우리 예수쟁이들은 참 황당한 것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혀 얼토당토 않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해낸 사형기구들 중에서 가장 잔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잔인한 사형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적인 자랑으로 가득 찬 고린도 교회>
사도 바울이 고린도서를 쓸 당시에 고린도 시는 지극히 희랍적인 도시였습니다. 희랍인들의 특징은 지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희랍인들은 지혜를 구했기 때문에 철학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철학'을 'Philosophia,' 즉 '지혜를 사모하는 학문'이라고 부릅니다. 희랍인들은 지혜를 사모해서 세계적인 철학자들이 모두 희랍에서 나왔습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등 세계 철학의 기초를 쌓은 사람들이 모두 희랍인들이었습니다. 고린도인들 역시 지적인 욕구가 대단해서 너나할 것 없이 철학적인 지혜와 지식을 구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또한 권력을 추구했습니다. 로마 정부가 고린도 시를 재건한 것은 주전 44년경이었습니다. 로마의 지배자들은 고린도 시에 자유를 찾은 농노들을 집중 배치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갓 자유를 얻었기에 실제적인 신분에 있어서는 노예보다 조금 나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로마에서 겪어야만 했던 귀족들의 억압이나 견제가 고린도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귀족과 같은 권력을 얻고자 계층상승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물을 만난 물고기 마냥 돈과 권력과 지위를 구했던 것이지요. 지혜와 지식, 돈과 권력을 구하던 고린도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 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교회 안은 곧바로 세속적인 야심과 경쟁심이 가득 찬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또한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처럼 표적을 구했습니다. 무엇인가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기적을 구했다는 말이지요. 희랍인들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을 찾았다면, 유대인들은 경험적이고 신비한 것을 찾았습니다.
이와 같이 한편으로 세속적인 지혜와 지식, 돈과 권력에 목마른 희랍계 교인들과 다른 한편으로 신비한 표적 경험만 찾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한데 어울려 교회를 만들었으니, 이런 그 교회가 온전할 리가 없습니다. 초대 교회들 가운데 고린도 교회처럼 요란 법석을 떤 교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갈등과 분쟁이 가장 심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적어도 6통 이상의 편지를 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말썽 많은 고린도 교인들을 어르고 달래고 훈계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편지를 써야 했던 것이지요!
<인간의 지혜 대(對) 하나님의 지혜>
이렇게 어리석은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정반대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와 어떻게 다릅니까? 사도 바울은 특히 세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지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을 쫓아다니는 희랍인들이 볼 때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걸림돌입니다. 스캔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다니요!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온갖 고통과 수치를 안겨주는 십자가 극형이 구원의 길이라니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지혜를 구하는 희랍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일거에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승리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만일 십자가가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둠과 죄악 속에서 방황했을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형벌을 면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어둠을 벗어나 빛 안에 거하게 되었고,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과 구원을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 보다 강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다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당해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미련하시다고 해도 사람의 지혜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하나님의 약함보다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연약하시다고 해도 사람보다 강하십니다.
중세 동방의 신비주의자요 현자 한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젊었을 때에 참으로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늘 이렇게 기도했지요. '주님,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제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게 되자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한 채 반 평생이 지나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주여,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제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저 자신만 변화되면 만족하겠습니다.’ 이제 제 나이가 늙어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기도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단 한 가지의 기도만 주님께 드립니다. '주여, 다른 사람들이 아닌 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아, 제가 진작부터 이렇게 기도를 했더라면 아까운 제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을 텐 데요."
이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철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 세상은 고사하고, 자기 주변 사람들조차 변화시키는 일이 자신의 지혜나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백발이 성성해서야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십니다. 강한 자의 강함을 폐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이 세상이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나 그 지혜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스스로 강하다고 하나 그 강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 지혜와 세상 능력이 헛것이라면 이제 우리는 참 지혜와 참 능력을 찾아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희랍인들은 지혜와 지식을 찾습니다. 하지만 진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낍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초라하게 패배하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십자가가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기력한 십자가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논리적인 이치로 볼 때 서로 조화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연약하고 부족한 네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나이 늙도록 자식도 없이 나그네로 방황하던 노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둘째로 용모나 신장이 볼품없었고 늘 바깥에서 양이나 치면서 일을 해야만 했던 다윗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셋째로 늘 경망스럽기 짝이 없었고 의지가 약해서 자기가 한 일을 자주 후회했던 베드로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이루셨습니다. 넷째로 몸에 고질적인 질병을 달고 살아야만 했던 선교사 바울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이들은 결코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약하고 볼품없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삶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멸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십자가 형틀 위에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으심으로써 우리 모두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희랍인들이 볼 때 참으로 무모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센스였습니다. 눈앞에서 기이한 표적을 보기 원하는 유대인들이 볼 때에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렇게 가장 어리석고 무기력한 방법이 인간을 구원하는 가장 지혜롭고도 능력 있는 길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 선생은 고전 2장 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지혜와 진정한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그냥 목에 걸고 다니는 목걸이나 손가락에 끼고 다니는 반지, 혹은 문패로 쓰는 장식물은 아닙니까?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입니다. 본문 18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자랑하려거든 세상에 썩어질 것이 아닌 십자가의 도만 항상 자랑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십자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고전 1:18-31 / 서명성목사(팔로마한인교회)
복음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기초’ 하면 두 가지를 연상합니다. 하나는 쉽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의 기초라 하면 신앙생활 하는데 반드시 알아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기초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으면 믿기 전에 가졌던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에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녀도 삶의 변화가 별로 없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도 별로 거두지 못합니다. 믿는 사람이면 꼭 알아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복음의 정의입니다. 복음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좋은 소식이라고 사전적인 의미만 말하겠습니까? 마가복음 1장 1절에 의하면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그 스토리는 두 가지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첫째는 예수님의 정체성(identity)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물론 여기에다 구원자, 주님, 왕, 영원한 대제사장 등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고린도 전서 15장 3-4절에 의하면,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이 더 핵심적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죄를 위한” 즉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 사건임을 확인하는 것이 그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을 일으킨 사건이므로 그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켰다는 것은 그를 그리스도 곧 종말의 구원자로 확인하는 것이며, 그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죽음이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복음을 자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하면서도 우리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더 무게를 실어 선포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당도하여 복음을 선포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선포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고전 2:2).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선포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 객관적인 사건을 주관적으로 내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주님이 되신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 있어도 먹어야 약효가 생기듯이 구원의 효력은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에게만 임합니다. 믿음의 결과는 구원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0장 9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마지막으로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으니 그 은혜 감사하여 이제는 내가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이런 삶을 사십니까? 본문에 나오는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그랬더니 교회 안에 많은 문제점이 생겼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바른 신앙을 가질 뿐 아니라 그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 교인들이 많이 있는 교회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강조한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를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가리킵니다. ‘십자가의 도’는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나 구원은 선포된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멸망에 이르고, 받아들이는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의 핵심 사역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은 지혜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를 존경합니다. 바울은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과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의 예를 각각 들어 설명하면서, 왜 후자가 우월한 지를 설명합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은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의 표본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그들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끊임없이 이적을 구하며 하나님을 시험합니다.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며 만나로 먹이시고 반석의 샘물을 마시게 하셨는데도 하나님을 거역하며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많은 이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한편 헬라인들은 지혜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끝없이 지혜를 추구하며 새로운 지식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세상 학문이나 세속 문화가 발전하는 것을 보면서 오늘날의 성도들도 비슷한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시대에 뒤진 것으로 여기거나 진리치고는 너무 단순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복음보다는 기적적인 사건이나 심오한 철학 사상, 과학적 이론을 더 의지하고 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을 보내셔서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고 믿음으로 고백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해 계속 알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고 배우고 연구해야 합니다. 복음을 알아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의 부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은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힘을 가진 자 주위에 몰려듭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권세자들이나 부자들이 세상에서 가진 힘을 보고 그것에 많이 끌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연약해보이지만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바울은 왜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해야 하는 가를 설명합니다.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죄를 씻고 의로움을 입어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몇 사람이 아닌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합니다. 롬 1: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의 힘과는 달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생명을 희생하는 역설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이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돈의 힘이나, 권세의 힘이나, 숫자의 힘이 아닌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지혜와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미련함과 약함에조차 미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다. 사람들은 표적과 지혜를 구하고 복음을 거리끼는 것과 미련한 것으로 여기며 배척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믿지 않으면 죄인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 멸망하게 됩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미련하게 여기며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을 구원하십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임을 믿는 성도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1)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고 영광을 돌리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는 우상 숭배라는 어리석음으로 나타납니다.그래서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 즉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리시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세상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눈에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개념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도는 자기를 자랑하고 손해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고 답답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마지막은 부활과 영광입니다. 구원은 이 어리석게 보이는 비밀을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에 근거하여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저주의 상징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언제나 능력과 승리와 영광의 메시아를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고난당하는 메시아,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연약함, 수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는 지혜를 숭상하는 이방인들에게도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된 죄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직 부르심을 받는 자들, 즉 믿는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도 바울 시대처럼 복음을 배척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갑니다. 세상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무능하다고 여기거나, 기독교가 인간이 만든 어리석은 종교일 뿐 이라고 여기며 믿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으로 죄인을 부르셔서 구원하기 원하십니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지혜임을 확신하고 이를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2) 주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파벌 분쟁을 몰고 온 주요 원인이 인간을 자랑하는 교만에 있음을 지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의 출신 배경이 어떠하였는지 생각해 보라고합니다. 그들 중에 학식이 많은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 문벌 좋은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무식한 자들, 연약한 자들, 비천한 자들, 멸시받는 자들, 별로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과 약한 것들과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것들과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십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역사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최강대국인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셔서 그들로 하여금 400년 동안 부리던 히브리 노예들을 내놓게 하셨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내친 김에 남 유다 왕국까지 쳐들어 왔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기고만장하여 외쳤습니다. “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왕하 18:35)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185,000명의 앗수르 군대를 죽였습니다. 산헤립은 얼굴이 뜨뜻해져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가 아들들의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유다 왕국을 멸망시킨 막강하던 바벨론이 페르샤에게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만에 고향 땅에 기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영향력 없는 사람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택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세상적인 지혜나 능력, 신분이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면서 세상적인 것으로 자랑하려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가문, 교육, 지위 등으로 인간적인 자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자기 의를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으로 감동받지 않으십니다. 다니엘이나 느헤미야처럼 그리스도인이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도 인정을 받는 것이 필요하지만, 세상의 것으로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것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광을 창세 이전에 작정하신, 그분의 공의로우시고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 부여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육체를 가진 그 어떤 존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했기에 하나님이 감격하셔서 우리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자랑과 은혜는 반비례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가려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면 자신을 드러내려는 자랑이 사라집니다. 신자는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한 고백과 간증이 많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주님의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자랑할 때 은혜는 사라집니다.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을 때 교만과 시기와 분쟁과 파벌이 생깁니다. 구원이 전적인 은혜로 인한 것임을 망각하면, 주신 이를 생각하지 않고 우월감과 특권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고 다른 것이 모두 무익하다고 인정할 때 우리는 주님만을 자랑하고 그분만을 높이며 오직 십자가의 도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은 인간적인 자랑의 요소들을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갈 6:14). 부르심을 입은 자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세상 기준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진정한 주님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육신에 속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믿기는 하지만 성령보다는 육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세상의 원리를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어린아이들입니다. 세상의 지혜를 멸시한다는 것이 인간의 모든 이성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생각과 지혜를 사용하고 증거를 살펴보며 선택을 하는 이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지혜는 구원과 관련된 지혜를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이 인간의 지혜로 이해되는 것이었다면 오직 지혜자만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든지 구원에 이르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으며, 그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광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지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인간으로 낮아지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얻은 선물은 첫째 ‘지혜’입니다. 그 지혜를 인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영적 진리들을 보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둘째 의로움입니다. 이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말합니다.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고 죽으셨기에 우리가 의로워지게 되었습니다. 셋째 거룩함입니다. 세상의 목적을 좇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목적을 좇아 세상에서 구별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거룩함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면서 예수님을 본받아갑니다. 마지막으로 구속함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율법의 형벌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놓아주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종노릇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주님이 다시 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의 인용을 통해 다시 한 번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인간의 자랑에서 나온 것임을 강조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으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신자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육신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과 하나님에 대한 것뿐입니다. 바울은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약함의 자랑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헛되고 무익한 자랑일 뿐입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 하면 이상적인 교회, 본받고 싶은 교회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줍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방의 수도로 교통의 중심지요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언덕에는 사랑의 여신이라는 아프로디테 신전이 있어 향락을 즐기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도시여서 ‘고린도인 같다’ 하면 음란하다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인 환경에서 살다보니 믿음을 가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그 결과 교회 안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었습니다. 시기와 분쟁 (1:11,12), 음행 (5:1-5), 교인간의 송사(6:11-18), 우상의 제물 (8:1-13, 10:14-33), 결혼 논쟁, 빈부의 갈등 (11:18-22), 은사 논쟁, 부활 논쟁 등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 부딪치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시정하기 위하여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읽노라면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목회 현장에서 만나는 각종 문제들을 고린도 교회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편지에서 좀처럼 변하지 않는 인간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는 그저 지금부터 2000년 전 역사 속에 존재했던 우리와 상관없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들 모습에서 우리를 비추어 보 아야 합니다.
시기와 분쟁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은“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3:17)고 하였습니다. ‘더럽힌다’는 것은 어색한 번역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부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부수겠다는 경고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까? 허물고 있습니까? 나의 행동이 교회에 기쁨을 줍니까 아픔을 줍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는 터에 어울리는 귀한 재료로 교회를 세우며 헌신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기는 십자가의 메시지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에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여전히 깨어지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주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주님 앞에 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주님의 핏값으로 세우신 교회를 통하여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고린도 전서 서두에서 문제 많은 고린도 교인들을 ‘당신들 믿는 사람들 맞아’ 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1:2)이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도 성도라 부르십니다. 비록 부족한 것이 있고 어리석은 것이 있어도 아브라함을 붙드시고 이삭을 붙드시고 야곱을 붙드셨던 하나님은 그의 끈질긴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주신 주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붙들고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예수님을 닮아가며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며 믿음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일을 감당하라고 부름 받은 동역자들입니다. 함께 수고하며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보여주는 교회를 이루어갑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교회를 통하여 새 일을 행하기 원하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가운데 귀한 역사에 동참하며 주님 앞에 섰을 때 거둔 열매를 인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고 상급 받으시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 강정태목사
할렐루야! 오늘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찬양하며 환영하심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주님이 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이유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사역의 마지막 관문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의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악랄한 죄수들과 로마에 대항하는 정치범들을 처형시키는 도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악랄한 죄수들이 받는 십자가의 형틀에서 비참하게 죽어야 했습니까?
본문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십자가의 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 본문을 통해 상고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세상의 지혜로는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
세상이 말하는 진리는 항상 눈에 보이는 성공과 연결됩니다. 20절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 있는 자’란 헬라인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선비’는 유대인으로 최고의 지식을 가진 서기관으로 율법에 능통하여 율법으로 가르치는 자를 말합니다. ‘변론가’는 인간의 지식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헬라인과 유대인을 동시에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기독교를 바라보면 기독교의 신앙이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것들을 세상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최고이고, 그 하나님을 섬기며 그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하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것을 세상은 거부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눅 12:16-21)는 재물을 모으는데 자신의 인생을 투자했습니다. 가룟 유다(마 26:14-16)는 은돈 30개에 스승이신 예수님을 대제사장에게 팔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십자가를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자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수제자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났어도,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며 혹시 일어난다면 목숨을 걸고라도 주님을 지키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흉악한 죄수들에게만 주어지는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주님의 즉흥적인 행동이나 나약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 즉,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실체라면 그림자는 구약의 제사제도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에게 교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사(예배)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올 때 흠 없는 소나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제단에 뿌리고 불태워 드렸습니다. 이것은 장치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모형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오셔서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한 핵심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이방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고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를 기다라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대제사장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자신들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구원관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그들이 오히려 메시아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도록 빌라도에 압박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구원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만고진리의 법칙에 의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웃을 돕고, 봉사하며, 섬길 때 진정한 구원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어진다는 사실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기독교의 타이틀이 있어도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결국 십자가의 구원을 거부합니다.
2. 하나님의 지혜로는 능력으로 주어지는 십자가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만드신 창조자이십니다. 모든 만물이 그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나 은하계에서 보면 티끌에 불과합니다. 우주과학자들이 발견하지 못한 수많은 별들이 있습니다.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우리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가 우리에게는 구원을 얻는 능력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흉악한 죄수들을 죽이는 사형틀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흉악한 죄를 범한 죄인입니다. 우리가 무슨 흉악한 죄를 지었습니까? 이 죄는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원죄입니다.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하여 죽음을 선고했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이 죄에서 자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아담의 피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죄 값을 치르는 것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이 대신 죽기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받아야 죄 값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것도 최고의 형벌인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구원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 능력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야곱의 가족을 비롯한 이집트를 흉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죄 없이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매일 한 바퀴씩 소리 없이 도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삼만 이천 명 중 삼백 명만으로 아말렉 군대와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는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고난인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감격하는데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살았습니다. 출생이 그랬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그랬습니다. 바울은 골 1:24에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길 때 때로는 어려움과 고난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했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번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십자가의 도’를 실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식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불우한 이웃을 찾아가 사랑을 실천하기도 합니다. 미워하고 다투었던 사람들에게 먼저 용서와 화합의 손을 내밀 때 진정 십자가의 도를 실천하는 능력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월리스가 쓴 ‘벤허’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영화로도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비롯한 11개부분에 상을 받은 유명합니다. 대락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인공 벤허는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우발적인 사고로 졸지에 노예가 되고,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문둥병자가 되었습니다. 노예로 팔려갈 때 거의 사경을 헤메고 있는 그에게 예수님이 마실 물을 주십니다. 그후 그는 노예선이 침몰될 때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로마의 호민관의 양아들이 되어 다시 유대로 돌아왔고, 그렇게 증오하던 친구의 죽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사람의 사형 집행이 있다고 하여 그곳에 갔다가 우연히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골고다의 길에서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예수가 바로 몇 년 전 자기에게 물을 주었던 사람임으로 알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을 떠서 예수께 가져가려하는데 로마 병사가 그를 가로 막았습니다. 그의 눈이 예수님의 얼굴과 마주쳤습니다. 그에게 미소 짓는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는 미친듯이 좇아 올라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는 예수님을 목격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오, 주님이여!"라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순간 그의 마음속에 증오가 사라지고 문둥병에 걸렸던 어머니와 누이가 깨끗하게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완고하던 유대인, 복수와 증오심으로 어둡게 살아온 그가 예수를 만나고 십자가에 비참하게 죽어가던 예수님을 통해 십자가의 도를 경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낮아지고 섬기며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도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구원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안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남은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바울은 갈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교만을 버리는 것이 주님과 하나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합시다. 가족과 교회를 사랑으로 섬기고,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십자가의 도이며,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로 우리의 삶이 날마다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자가는 기호가 아니다
고전 1:18-25 / 김기석목사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현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변론가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 죽음에 이르는 존재
벌써 4월의 첫 주가 되었습니다. 이틀 후면 淸明입니다. 방사능에 대한 불안이 우리에게 있지만 대기는 부드럽고 또 청명합니다. 하지만 사순절기를 지나고 있는 우리들은 마냥 봄 신명에 지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다가 저는 젊어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추모하는 글 모음집을 읽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아들을 잃고 쓴 20세기 최대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설교가 마음에 지펴왔습니다. 그의 아들 로베르트 마티아스 바르트Robert Mattias Barth는 1941년 6월 22일, 알프스 산맥을 등반하던 중 추락사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습니다. 처참하게 부서진 아들의 유해를 매장하고 돌아와 바르트는 매우 담담하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르트는 아들이 라틴어로 적어놓고 묵상하곤 했던 고린도전서 13:12절을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Videmus nunc per speculum in aenigmate, tunc autem facie ad faciem).
이 구절 자체가 그의 마음 아픔을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바르트는 아픈 마음을 추스르며 회중들에게 삶은 ‘이곳’과 ‘저곳’ 사이, ‘지금’과 ‘그때’가 교차하는 접경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둘은 결국 하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과 ‘그때’, 이 둘 사이에는 조금의 거리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마티아스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나 그 아이의 생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 있습니다. 마티아스는 변함이 없는 동시에 완전히 다르게 변화되었습니다.”(마이클 부쉬 엮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새물결플러스, 32쪽)
바르트는 지금 당장은 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 해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마티아스는 죽음을 통과하여 결국 하나님의 종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감동적인 설교였습니다.
그 설교를 보는 데 몇 가지 영상이 떠올랐습니다. 지나친 경쟁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카이스트 학생들이 떠올랐고, 일자리를 얻을 수 없어 세상을 버린 이들이 떠올랐고, 일본의 원전 사고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일궈온 생명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부의 자살도 떠올랐습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살기를 원합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도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견디다 못해 결국 튕겨져 나간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직접적으로 죽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 십자가의 길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립니다. 가급적이면 죽음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연재해나 전쟁 혹은 테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우리는 비교적 덤덤합니다. 그것은 우리 문화가 죽음을 추상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대중의 눈길을 받았던 사람이 아닌 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죽음은 통계 숫자로 환원될 뿐입니다. 개별적인 삶의 이야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들의 기쁨, 슬픔, 꿈은 한 순간에 포말처럼 스러져버리고 가까이 지냈던 이들의 가슴에 상실감만 남겨 놓습니다. 김열규 선생님은 이렇게 갑작스럽게 닥쳐온 죽음을 ‘미완의 죽음’이라 했습니다. 갑작스런 죽음은 ‘한限’이나 ‘원寃’을 낳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참 이상한 종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온다고 말하니 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리는 이들이 로마의 처형 도구였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예수님의 죽음 그 자체를 찬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그분의 삶 때문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만연한 죄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당신의 몸을 기꺼이 희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갈3:13a)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5:21)
십자가는 힘과 폭력을 통해 이기는 길이 아니라, 고난을 스스로 짊어짐을 통해 이기는 길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 떠맡을 때 십자가를 진다고 말합니다. 내기 싫은 음식 값을 체면 때문에 내고, 하기 싫은 일을 윗사람들의 눈치가 보여 억지로 하고는 십자가를 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게 십자가는 아닙니다. 옛 사람들은 타락한 사람을 가리켜 ‘자기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homo incurvatus in se’이라 했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그들 곁에 다가서고,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낮아짐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를 살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바로 ‘나’를 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삽니까? 사람들은 대개 십자가를 구원을 가리키는 기호로 이해합니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드라큘라나 악령을 퇴치하기 위해 십자가를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그래서인가요? 어떤 이들은 자동차 룸미러에 작은 나무 십자가를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지켜달라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그 십자가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교통 법규를 잘 지키고 과속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부적符籍(talisman)이 아닙니다. 교단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교회의 중앙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 공간 배치 자체가 교회의 존재 이유가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전면에 걸린 십자가는 더 이상 우리에게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괴테(Goethe)는 십자가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장미꽃으로 촘촘히 둘러싸인 십자가가 서 있다.
누가 십자가를 장미꽃으로 장식하였는가?
그 험한 십자가를 사방으로 부드럽게 둘러싸기 위하여 화환은 부풀어지고 있다.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십자가,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험한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 하나님의 능력
바울 사도는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단언합니다. 남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려는 사람만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기에 평화가 있을 리 없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두려움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겁니다. 자의식으로 충만한 사람, 뭐든 자기 좋을 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은 분리의 담장을 쌓아올리는 사람입니다. 소통의 다리를 끊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내려놓은 사람, 남 좋을 대로 살면서도 스스로 비참해지지 않는 사람들은 담을 허무는 이들입니다.
세상에는 똑똑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어떤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사람도 많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말 잘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세상이 이 지경입니다. 전쟁의 소문은 늘어가고, 사람살이의 풍경은 나날이 팍팍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살기 어렵고, 생태계의 파괴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는 바울의 물음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 사람도 지혜를 찾는 그리스 사람도 세상을 새롭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십자가를 꼭 붙드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만 전하겠다고 말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 밖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고전2:2)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야말로 우리의 살 길임을 알기에 바울은 그 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감동을 일으켰던 사람들, 그래서 잊고 살았던 사람됨의 의미를 다시금 묻게 했던 사람들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그런 이들이 있긴 했습니까?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돈 많은 사람도, 높은 사람도, 유명한 사람도 아닐 겁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거나,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돌보아 주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거나, 자기를 낮춰 세상을 섬겼던 사람일 것입니다. 고 이태석 신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왜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를 통해 인간 본연의 아름다움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 하나님의 어리석음과 약함
세상이 아무리 험해도 우리로 하여금 살아갈 이유를 깨닫게 해주는 이들은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삶을 능동적으로 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바보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거룩한 바보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거룩한 바보들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그들은 굳은살과 같은 마음을 도려내기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칼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우리를 휘몰아치고 있는 욕망의 광풍을 잠재우는 하늘의 노랫소리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25)
말씀 묵상이 이 자리에 이르렀을 때 저를 찾아온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더 이상 생각을 진척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용납하지 못하고, 심지어 아주 불편하게 여기기까지 하면서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고 있는 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먼저 제 마음을 넓혀달라고, 그리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말입니다. 마음으로 이 노래를 여러 번 불렀습니다.
1.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더러운 나의 마음이여
2.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 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후렴>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 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이제 정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의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풍요롭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십자가는 부적도 아니고 구원을 가리키는 기호도 아닙니다. 우리가 택해야 할 생활방식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옛 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죽어야 삽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 우리 내면에도 십자가의 사랑이 자리 잡아, 지친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부여하며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자랑하리라
고전 1:18-31 / 유기성목사
여러분 지난주일 ‘마음조차 하나 되자’라는 말씀을 나누었는데, 그렇게 사셨습니까?
그 말씀 때문에 더 좌절에 빠진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 된다 못 한다’고 포기하지 말고 주 예수님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안될 것이라면 말씀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말씀에서 은혜 받고 그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사 시대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성경 말씀대로 되기를 기도하고 말씀에 철저히 순종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 가면서 ‘마음조차 하나 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조차 하나 되려면 십자가 복음이 분명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복음은 정말 하나님의 능력입니까? 어떤 점에서 능력입니까?
자신이 지옥에 갈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것이 큰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자신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깨끗이 씻음을 받았음이 믿어지는 것이 큰 능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마귀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갈 자가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능력이 어디 있겠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복음은 초대 교회 당시부터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조롱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심지어 증오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누구든지 이것을 믿기만 하면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는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으로 산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이 복음을 이해할 수도 믿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 복음으로 세상 지혜를 멸하고 폐하신 것입니다.
:19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지혜로운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도대체 세상의 지혜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지혜는 근본적으로 ‘내가 더 옳다. 내가 더 강하다, 내가 더 잘났다’ 하며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철저히 강자의 논리입니다. 성공한 자가 선이고 강한 자가 정의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이고 약한 것이 죄입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입니다. 그러니 파가 생기고 싸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도 없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복음으로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21 이 세상은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게 들리는 설교를 통하여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바다가 갈라지고 죽을 병이 낫는 기적이 나타나야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신비한 영적 비밀을 알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든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니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증인이지 않습니까? 복음에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새가족 한분이 양육 수료 간증을 하였는데, 일대일 양육 첫 과를 마치고 자신이 죄인임이 믿어지지 않더랍니다.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2과도 3과도 9단원까지도 믿어지지 않더니 마지막 10단원을 공부할 때, 갑자기 자신이 죄인임이 깨달아지고 십자가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졌다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24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6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본래 학식이 많거나, 권력을 가졌거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겐 복음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선택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7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약한 자, 어리석은 자, 비천하고 멸시받고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통하여 주님이 더 드러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한번은 부목사 한 분을 뽑아야 할 상황이 되어‘성품도 좋고 설교도 잘하고 신실하고 인물도 좋은 목사’를 보내주시기를 기도하는데, “너마저 그렇게 기도하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모두 다 신실하고 설교 잘하는 목사를 찾으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없어 그러신가? 그렇다고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사람을 보내주소서!” 기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기준은 다름을 알았습니다.
고후 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분명한 목사님을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일로 부목사들에게 공개적으로 회개했습니다. 능력으로 평가하고 있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죽었음만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세상 지혜는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한 자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29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미국 코스타에 참석하였을 때, 깜짝 놀란 것이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열등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미국 유학생이라면 한국의 같은 학생들 중 가장 실력 있고, 잘 살고,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열등감은 무슨 열등감입니까? 그러나 그들이 열등감으로 좌절하고, 가정이 파괴되고, 자살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세상 지혜를 붙잡고 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약한데 하나님이 쓰시지 않는데요’ 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정말 약한지 솔직히 대답해보기 바랍니다.
목사님 한 분이 반복하여 짓는 음란한 일에 대하여 고백하셨습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죄를 이기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뿐입니다. 언제나 예수님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하였더니 “자신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싶어도 안 됩니다” 하셨습니다. 이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우리가 약한 것이 아니라 너무 강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안 된다 못 한다’고 하니 자아가 너무 강한 것입니다.
저도 열등감에 괴로워했었습니다. 그러다 고전 1:27-29 말씀을 믿겠다고 고백하는 순간 얼마나 통곡하고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믿는다는 것은 자아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알고 나면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요, 예수님이 나의 의요, 나의 거룩함이요,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30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자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구원받은 사람은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31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만 자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어떻게 사울파, 아볼로파, 게바파가 생길 수 있습니까? 내가 개척 멤버요, 담임목사편이요, 원조라고 싸우고 분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만 자랑이 되지 못하니 그런 것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한 성도님이 동료 학부모 중에 1등만 하는 아이의 엄마 때문에 마음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시험만 끝나면 꼭 전화를 해서 자기 아이가 1등 했다고 자랑을 하는 것 입니다. 어느 날 중간고사가 끝난 후 또 전화가 왔는데, 안 받았답니다.
그날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요즘 맘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아무개 엄마가 시험이 끝나니 또 전화를 합니다. 우리 아이 성적이 낮아 그 엄마의 자랑을 듣고 있기가 싫었습니다. 오늘도 두 번이나 전화를 안 받았습니다. 주님, 제 안에 아직도 자녀를 두고 시기, 질투, 욕심, 불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피하는 것이겠지요. 주님 저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예레미야 말씀을 묵상하는데 한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렘 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주님께서 그 성도에게 직접 말씀해 주시는 것 같더랍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 엄마에게 당당하게 전화했고 축하한다고 만나자고 말했답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게 되면 세상 자랑하는 사람이 불쌍해 보입니다.
여러분, 은밀한 죄가 사라졌습니까?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천국을 믿으니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기쁘십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졌습니까? 부족한 것이 없이 너무나 만족하십니까?
예수님과 함께 자아가 죽었습니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이 질문에 “예”라고 답을 하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만 자랑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고전 1:18-31 / 정용섭목사
오늘 설교 제목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뜻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와 그리스도라는 낱말의 조합은 자연스러운 게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걸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메시야, 즉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라는 말은 둥근 삼각형이라는 표현처럼 형용 모순입니다. 이런 곤혹스런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초기 기독교의 입장을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예수 그리스도는 삼십대 초반 나이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치안을 위태롭게 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입니다. 대개는 반(反)로마 무력 투쟁을 벌이다가 체포된 이들에게 일벌백계 차원에서 이런 형벌이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쳤던 예수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수님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동에 로마 체제를 위태롭게 할 만한 요소들이 실제로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그의 메시지는 당시 절대 권력자들에게 불온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말이 되던 안 되든 어쨌든지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고, 기독교인들은 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거리낌의 대상인 십자가
위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두 세력이 나옵니다. 하나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거리낌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똑같이 로마의 불의한 통제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대항하던 이들에게 십자가 처형이 내려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을 비호할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정도 동정심을 느끼기는 했겠지만 속으로는 귀찮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으로 인해서 불편한 일들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마을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사람이 나왔다고 합시다. 로마 제국은 그 마을에 대한 감시를 더 강화하고 뭔가 트집을 잡으려고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 증거를 기적적인 특별한 현상에서 찾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출애굽 사건이 그것입니다. 애굽의 기마병들을 하나님이 홍해에 수장시켜서 그들은 무사히 광야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고전 1:22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이런 신앙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즉 기적을 구한다.’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기적 신앙과 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로마 군대를 박살내는 기적을 보였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서 십자가에 달린 강도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마 27:40)고, 그리고 관리들이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면 자신도 구원하라.’(눅 23:35)고 빈정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오늘 현대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기적 신앙으로 살아갑니다. 성공신화를 누구나 꿈꿉니다. 세상은 성공하는 길을 제시하고, 거기서 낙오가 되지 말라고 닦달합니다. 그게 매력적으로 들리는 건 당연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런 꿈을 꿉니다.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어느 누가 자신이나 자기 자식들이 삼십대 초반에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따돌림 받는 운명을 용납하겠습니까. 기적적인 성공신화에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거리낌의 대상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부류는 이방인들, 즉 헬라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미련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 것은 헛소리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고전 1:22b절에 따르면 ‘지혜’가 그들의 최고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지혜야말로 진리에 이르는, 즉 신(神)에게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당시 헬라 사람들은 철학 전통을 이어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철학이라는 단어 philosophy는 사랑이라는 뜻의 필로스와 지혜라는 뜻의 소피아의 결합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십자가의 죽음은 무가치한 겁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로마 형벌인 십자가에 처형되는 길을 가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현대인들도 헬라 사람들처럼 지혜를 삶의 최고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을 구원으로 여깁니다. 현대 물리학, 심리학, 경제학, 컴퓨터 공학을 포함하여 모두가 지혜를 추구하는 겁니다. 이런 경향은 우리나라가 특히 강합니다. 어릴 때부터 선행학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교육열이 유달리 강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빠른 속도로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루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것이 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의 태도입니다. 저는 이런 태도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속된 표현으로, 무식하게 사는 것보다는 유식하게 사는 게 여러 가지로 바람직합니다. 시를 이해하고, 물리학도 좀 알고, 예술과 음악도 감상할 줄 알고, 철학을 아는 게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도움이 분명히 됩니다. 신학도 그런 지혜를 얻는 한 방편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에만 절대적으로 묶여 있는 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미련한 사람으로 취급할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는 기적을 추구하던 유대인들과 지혜에 몰두하던 헬라 사람들이 대세였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생각을 물리칩니다. 고전 1:24절에서 바울의 강력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바로 유대인들이 구한 기적, 즉 하나님의 능력이고, 헬라인들이 추구하던 지혜라는 바울의 진술은 놀랍습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는 진술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왜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이게 말이 될까요?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는 말일까요? 단순한 종교적 덕담일까요? 심리적으로 황홀경에 빠진 한 광신자의 독백이나 넋두리에 불과할까요?
먼저 유대인들의 기적 신앙과 헬라인들의 지혜 신앙이 과연 우리를 구원하는지, 또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그걸 뚫어보았기 때문에 과감한 발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기적 신앙은 오늘날 성공신화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 진부한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붙들고 있어야 할 진리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상대적으로 편해질 뿐이지만 그것이 행복의 절대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목회에서도 성공과 실패를 말합니다. 수천, 수만 명 신자가 모이는 교회의 신자들과 담임 목사가 행복할까요, 아니면 백 명도 모이지 않는 대구샘터교회의 신자들과 정용섭 목사가 행복할까요? 물론 교회의 크기로 목사의 행복을 단순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눈에 기적처럼 보이는 목회 성공이 반드시 그 교회 신자들과 목사의 행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지혜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지식인이나 교양인이 되는 수단입니다. 교양인과 지식인이 반드시 세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행복한 게 절대 아닙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 오늘날 스펙이 높고 연봉을 많이 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일출과 일몰의 장엄한 순간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도 아니고, 구원받은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세상에서 실패하고 무식해야만 행복하거나 구원받았다는 게 아닙니다. 구원과 행복은 그런 것과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 전혀 다른 차원을 아는 데에는 성공신화나 지식이나 스펙이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26절 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당시 초기 교회에는 사회적으로 이름 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중산층 이하, 오히려 하층에 속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노예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바울은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공동번역으로 26-28절을 읽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과감하다 못해 무모하다 느껴질 정도의 발언입니다. 이걸 상투적으로 보면 안 됩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값싼 말로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다는 말은 신앙과 삶의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지혜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묶이기 쉽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데에 길들여집니다. 대학교 교수들은 자기가 배운 지식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법조인들도 자기가 아는 법으로 세상을 판단합니다. 국정농단 중심에 선 최순실 씨의 딸 정 아무개 씨가 sns에 올렸던 ‘돈도 실력이야 너희 부모를 탓해.’라는 문자가 이화여대 부정 입학과 연관해서 문제가 불거졌을 때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재미있으라고 날린 문자였겠지만 세상을 그런 방식으로 본다는 게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어느 고위 관료는 민중들을 개나 돼지처럼 먹을 거만 주면 된다는 식으로 폄하했습니다. 인간과 삶에 대한 왜곡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부단히 성찰하지 않으면 자기 주관에 떨어져서 편견을 갖고 세상을 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뚫어 보고,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나님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복음의 세계로 부르셨다고 말했습니다.
해방의 능력인 십자가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의 지혜로 무장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대 부끄러움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은 늘 잘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의 부끄러움 운운은 사람들이 거리끼게 생각하고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로 인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한쪽이 절대 생명을 얻으면 다른 쪽은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은 30절에서 이렇게 풀어서 설명합니다. 공동번역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 구절에 핵심 단어는 지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 해방입니다. 이런 성서 언어를 실감 있게 읽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며칠 전 아침 식탁에서 제가 둘째 딸과 나눈 대화입니다. ‘창문 밖을 봐라. 응달에 아직 눈이 남아 있다. 대나무, 아침햇살, 그리고 딸과 대화하는 이 순간이 꿈결처럼 아름답지 않니?’라고 내가 말하자 딸이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그래요? 그런 게 정말 느껴져요? 나는 그런 게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저걸 보면 그냥 춥다는 느낌만 듭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고, 해방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게 실제로 어떤 건지 이해가 되고 느껴지고, 그래서 거기서 어떤 삶의 능력을 경험하는지요? 아니면 전혀 현실로 느껴지지 않는지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덕택으로 우리가 해방을 받았다는 말을 봅시다. 나머지 세 가지 항목도 해방과 다 연결됩니다. 해방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이고, 그것이야말로 헬라인들이 추구하던 지혜이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근거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처형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예수 당신 스스로도 십자가의 죽음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타협적으로 대처했다면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진해서 십자가에 달려죽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 어떤 위기나 위협이 닥친다고 해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 사실에 전적으로 부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체포당하여 재판받고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한 결과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전혀 새로운 생명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무기력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떨어지는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2: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의 후예들입니다. 이제 세상의 여러 가지 주장에 솔깃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잘 났냐, 하는 것으로 경쟁하지 않아도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란 무엇인가?
고전 1:18-25 / 이종철목사
십자가의 도
뜨거운 여름인데 설교 제목도 뜨겁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헬라어로 간단히 ‘로고스 투 스타우루’입니다. 로고스는 ‘이성’ 또는 ‘말’을 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말’ 또는 ‘십자가의 논리’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십자가의 선포’로 번역합니다. 정확한 의미는 바울이 지금 어떤 맥락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와 맞서는 것은 17절의 ‘말의 지혜’입니다. 말의 지혜를 지난번에 ‘교묘한 말솜씨’로 해석한 바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화려한 수사학과 말솜씨를 선호했고, 아볼로가 이런 경향에 자극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런 내용없이 번지르한 말솜씨를 선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복음 선포와는 반대된다 생각했습니다.
말의 지혜를 선호하는 고린도 교인의 심리에는 20절의 ‘이 세상의 지혜’에 담긴 소위 육체적 욕망이 작용합니다. 바울은 지금 이 세상 지혜의 내용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지혜가 근본적으로 목표하는 욕망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성공이고, 명예이고, 권력 곧 파워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논리 싸움에서 이기는 것, 그래서 자기를 높이고, 이를 통해 재물이나 권력을 얻으려 합니다. 이런 결과를 얻어내는 것을 지혜롭다고 합니다.
이 반대편에 십자가의 도가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는 패배이고, 불명예이고, 어리석은 것이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채우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낮아지는 노예의 윤리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과 지혜를 공격하기 위해 오히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높이 외칩니다. 인간의 교만과 무지가 드러나지 않고는 진정으로 복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지는 23절이 적나라하게 밝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실패하고 저주받아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이 선포했던 복음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다. 그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그 주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중 고린도 교인들이 달갑지 않았던 것은 부활이 아니라, 주님이 저주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고난과 패배의 십자가
십자가의 도는 무슨 신비한 지혜를 담은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그대로 패배와 저주의 도구일 뿐입니다. 십자가를 신비한 지혜처럼 해석한 것이 희생 제사, 곧 대속신앙입니다. 십자가를 희생 제사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는 좋은 은유나 상징이지만 자칫 역사성을 잃기 쉽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실제를 재구성하면 이렇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세상의 권력과 싸웠고, 그 결과가 십자가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길이 옳았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순종이 하늘을 감동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향한 분노를 거두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예수님을 주로 하여 새 역사를 이루려 하십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역사적 실제를 신화적 언어나 신비적 지혜로 푼 것이 바로 십자가를 희생제사로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그리스도는 희생양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다. 하나님은 이 피의 제사를 받으시고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다.’ 바울도 분명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설명했습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고백적 언어로만 그쳐야지 이를 바탕으로 더 이상의 추론을 하면 안 됩니다.
그 무리한 추론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희생의 제사가 결정적이기에 예수님의 삶이나 역사나 공생애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빨리 십자가에서 제사를 치르는 게 더 중요합니다.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치렀기 때문에 어떤 이단은 미래의 죄까지 다 용서받았다는 이상한 논리를 펼칩니다. 사영리의 복음전도 체계는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마치 그 희생제사의 효력이 그 순간에 작용하는 것처럼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빠지고 원리나 교리만 남았습니다. 더 추론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아들의 피를 먹으며 만족해하는 비정하고 괴기한 아버지로 만듭니다.
누가 위험한 순간 뛰어들어 그 목숨을 구하고 자신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살아난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향해 저 사람은 나를 살리기 위해 왔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그의 피가 우리를 살렸다는 말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진짜 희생제사는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결과이지, 사랑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요는 십자가는 그냥 희생일 뿐이지 어떤 신비적 지혜를 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실제 초대교회에는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다양했습니다.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 전하는 십자가는 ‘유대인들에 의한 한 의인의 죽음’입니다. 요한복음은 십자가를 ‘하늘 아버지에게로 가는 영광의 통로’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권력과 대항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결과입니다. 세상적으로는 패배요, 저주요, 수치입니다. 그것을 역전시켜 구원의 도구로 만든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역사적 실제와 이에 대한 해석을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 유대교의 순교자 신앙의 예를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유대교에도 율법을 지키다 죽은 순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황제의 박해 때 죽임을 당한 한 어머니의 일곱 아들도 있고, 엘르아살도 있습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마카비4서〉라는 유대문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립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의 죄를 대신하는 몸값(대속물)이 되었다. 저 경건한 자들의 피와 그들의 죽음이 속죄소 제물(힐라스테리온)이 됨으로 말미암아 전능하신 하나님은 전에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완전히 구원하셨다.”(마카비4서 17:21b-22) 인간이 대속물이나 속죄소 제물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마치 희생제물을 받는 것처럼, 그들의 희생을 계기로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를 거두어 해방시켰다는 설명입니다. 실제와 해석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신학적 설명 이전에 패배와 죽음의 도구입니다. 십자가는 철저히 저항이고, 낮아짐이고, 세상적으로는 패배입니다. 십자가를 희생 제사로 이해하는 것은 좋은 해석일 수는 있지만, 십자가의 역사성과 진정한 본질을 왜곡할 우려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지혜
십자가는 세상 지혜에는 결정적 걸림돌입니다. 모든 세상의 지혜를 박살내는 바윗덩어리입니다. 세상의 지혜가 추구하는 방식과는 정 반대편에 있는 이 패배와 수치와 노예적 굴종에 오히려 구원과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3-24)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힘은 20세기 신학들이 잘 밝혀내었습니다. 본회퍼는 십자가를 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선언으로 보았습니다. 신은 십자가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죽어버리기조차 했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한계에 봉착하여 가설적으로 신을 만들거나, 신에게 책임을 회피하는, 모든 일반 종교에 대한 파산선고입니다. 세상은 성숙해졌고 이제는 인간이 세계를 책임지라는 주체 선언이 십자가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이란 책을 썼습니다. 사실 신이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신은 전능과 불사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신이 고통당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포이어바흐는 신을 인간 소망의 투사물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이 약하니까 강한 신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칸트는 윤리를 위해서 신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 인간적 지혜에 대한 파산선고가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진정한 신의 계시입니다. 인간이 만든 허상들을 무너뜨리고 실제를 보도록 만듭니다. 십자가는 어린아이들이 가진 유치한 환상들을 걷고 성숙한 어른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바로 부활로 넘어가지 말고, 십자가에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십자가가 현실이고, 부활은 미래이자 희망의 사건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좇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예수이지 부활의 예수가 아닙니다. 부활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름에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약속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이것이 제자들이 이루어야 할 최후의 과제였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라는 것이다.” 본회퍼는 닮아야 할 하나님의 형상으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제자의 생명은 바로 이 모습으로 변하는 데 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푯대로 하여 달려간다고 하는데 그 그리스도는 바로 십자가의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 서신에는 바울의 역경목록이란 것을 네 개나 전합니다.(고전4:9-13, 고후4:7-11, 6:4-10, 11:23-27) 바울은 사도 됨을 고난받는 것에서 찾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12:10, 12) 십자가가 사도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리스도가 앞서가셨습니다. 거기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지혜는 그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갖자
고전 1:18-21 / 이종윤목사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막연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 진정으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거나 관심을 갖거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이기는 했지만 그 역시 자기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생각이 없었습니다. 어느날 모세는 불이 붙었는데 타고 있지 않은 가시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데로 그의 손에 있는 지팡이를 들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기 위해 갑니다. 모세의 손에 있는 지팡이는 그냥 지팡이가 아닌 바로 하나님의 지팡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팡이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지팡이는 능력의 지팡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모세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라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지팡이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하셔야만 어떤 일이 성사될 수 있고 그 일을 하시기 위해 모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드림으로 하나님 손에 붙잡힌 지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런 지팡이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 하나님의 지팡이는 불신자들을 심판하신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바로 앞에 가서 자기 백성을 내놓으라고 하였으나 바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팡이를 던져 뱀을 만들어내었고 이것을 본 바로는 자기 나라의 마술사들을 불러 같은 일을 시켰으나 모세의 뱀이 술사들의 뱀을 먹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악한 세력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로 쓰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 부름을 받아 심판대에서 심판 하는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지팡이는 위로와 생명을 가져다 준다.
애굽을 빠져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격하는 애굽 군대들과 홍해 사이에 끼어 곤란을 겪게 되자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두려워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눈으로 보라고 하며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응답받은 모세는 말씀대로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가리켜 갈라지는 홍해위로 이스라엘 백성은 무사히 건너게 됩니다. 믿고 순종하였기에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과 구원이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그분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 우리 가정과 일터와 나라를 구원하는 자녀가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4. 하나님의 지팡이는 공급의 지팡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 이르러 사막지대에서 물이 없어 아우성 치자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바위 위를 지팡이로 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결국 200만 넘는 사람들이 충분히 마시게 할 물을 얻게 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임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는 물과 만나와 메추리를 공급해 주신 것이다.
5. 하나님의 지팡이는 승리를 가져다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전쟁을 치를 때 지도자인 모세는 전쟁은 임하지 않고 산에 올라가 손을 벌리고 기도합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힘이 빠져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졌습니다. 이 손은 들었다는 것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 붙잡힌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 항상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람은 아말렉이 그랬듯이 망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6.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긍휼을 말한다.
모세가 열두 지파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라 명령하고 그 중 레위자손 지팡이에 아론의 지팡이라고 써붙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회막의 지성소 속에 있는 법궤 앞에 놓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가니 다른 지팡이는 그대로 있으나 아론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살구 열매가 맺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지팡이는 생명을 일으키는 긍휼을 보여주는 말씀이 됩니다.
결 론
힘의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우리지만 모든 것을 온전히 바쳐서 크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십자가의 신비
고전 1:18-24 / 손상률목사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Symbol)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교회가 있는 곳에는 십자가로 표식을 하고있습니다.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어디에서든지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사랑과 평화와 봉사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에 대한 의미가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인식되는 것 자체가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본래의 십자가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가장 흉악한 죄수를 처형하는 형벌의 도구가 십자가였습니다. 그토록 사람을 죽이는 고통의 십자가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축복의 의미로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가도록 되어 졌으니 신비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말씀 중에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라는 말을 쓰면서 그 신비로운 특징을 설파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18절). 결국 십자가의 도는 사람의 상식이나 합리적인 지식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적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령한 눈이 열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고전2:13) 그 심오한 도리를 깨달으며 이를 증거하게 됩니다.
바울 자신은 하나님의 계시로 말미암아 이 신비로운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것을 최고의 지식으로 알고 모든 사람 앞에서 이를 증거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17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에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고난의 절기를 맞이하여 그리스도 고난의 표상이 되는 십자가의 신비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Ⅰ. 기독교 복음의 핵심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 선교에 있어서 그 핵심을 십자가에 두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22-24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습니다.
(1)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
이토록 십자가를 기독교 복음의 중심에 두고 그 진리를 전파하며 수호하고자 애를 쓰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이를 두고 가장 못마땅하게 여기며 한사코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입니다.
오순절 이후 초대 교회가 성령의 강권적인 능력에 힘입어 불길같이 부흥되고 있을 무렵, 유대 종교의 최고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는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행 4:5-7, 5:17-18). 그들은 저희가 총독 빌라도를 충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를 다시 살리셨다고 전파하는 사도들의 복음 증거가 못마땅하여 이를 저지하려 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표적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출애굽 여행을 할 때 여러 가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초자연적인 이적을 보면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마 16:1). 표적을 좋아하는 그들이기 때문에 간혹 이적을 행하며 백성을 선동하는 자가 나타나면 그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따라가곤 하였습니다(행 5:36-37). 이와 같은 그 백성들의 성향은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와 같은 이적을 행하실 때 구름 떼처럼 따라다녔으나 복음의 교훈을 강조하실 때에는 모두 다 흩어져 떠나버렸습니다(요 6:66).
(2) 지혜를 찾는 헬라인
22절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옛날부터 헬라인들은 학문과 지식을 숭상하며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습니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은 무력으로 세계를 제패하였지만 그는 여러 곳에 도서관을 세우고 문화 창달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 당시 희랍의 수도 아덴은 철학과 지성을 상징하는 도시답게 학문과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이 바울의 전도 사역에 도전하고 나왔습니다. 그 당시 헬라철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에비구레오(Epicurus)학파와 스도이고(Stoic) 학파의 철학도들이 바울에게 나와서 그가 전하는 십자가의 도리를 철학적으로 논증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행 17:18).
사도행전 17:22-31의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바울의 설교는 철학자들의 지식을 능가하는 복음의 진수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지금도 그 자리에 설교문이 동판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확실히 십자가의 도리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적 지식의 기준으로 보면 분명 미련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8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2:13에는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십자가만 전하는 바울
본문 18절에 말하는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복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도(道)는 말씀(word)으로 번역되는 것으로서(RSV) 요한복음 1:1의 뜻과 같이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으로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존재 목적을 복음을 위하여 있다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1에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하였고, 1:4에는 그 복음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개인이나 교회나 어떤 집단이든지 십자가의 복음에 거스리는 일을 할 때 이를 묵과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적이나 기사를 행하는 것이나 또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이론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와 십자가의 도리를 희석시킨다고 하면 복음에 거스리는 행위가 된다고 보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1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7-8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
Ⅱ.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 십자가는 흉악한 죄수를 사형시키는 형구(型具)입니다. 통나무로 만든 십자가 형틀을 세워놓고 거기에다 죄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아서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 가운데 아픔과 갈증과 최고의 고통을 겪다가 죽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38에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고 하였습니다.
(1) 죄 없이 당한 고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강도와 같이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한 총독 빌라도는 백성들 앞에서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눅 23:14). 그러나 백성들의 압력에 못 이겨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24에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고 하였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그것도 흉악한 죄수와 함께 최악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누가복음 23:41에 보면 예수와 함께 목 박히던 강도 중 한 사람은 자기의 동료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죄가 없으면서도 묵묵히 죄인취급을 받으며 대가를 치르는 경우를 두고 '십자가를 진다'고 말을 합니다.
(2) 대신 당한 고난
예수님께서는 그가 세상에 오셔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된다고 하였습니다(막 10:45).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요단강 근처로 나오심을 보고 무리들을 향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요 1:29).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죄를 자기가 맡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거기 따르는 형벌을 담당하셨습니다. 로마서 5:21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구약의 이사야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하면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사 53:4-6).
(3) 본이 되는 고난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은 의를 위한 고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속죄의 죽음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고난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 그 길을 따르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21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 주심으로 그 공로를 힘입어 사죄함을 받은 사람은 그 자신도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였습니다(마 16:24-25).
Ⅲ. 십자가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란 곧 기독교 복음의 신비를 의미합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십자가로 인하여 나타나는 신비로운 도리를 발견하고 이를 증거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또 십자가의 깊은 도리를 세상의 지혜자나 선비나 변사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가지고 믿는 자를 구원하려 하셨다고 말했습니다(20-21절).
(1) 사죄의 신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을 박히시고 피를 흘리셨는데 그 피가 사람의 죄를 씻어내었다는 속죄의 도리를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의 죄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 중에 그 짐을 벗어버릴 방법을 몰라서 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인간으로서는 사죄의 길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22에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3:23에는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방법으로는 전혀 대책이 없는 사죄의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행한 제사 제도를 가지고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도리를 설명하였습니다. 히브리서 9:13-14에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2) 사랑의 신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사유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이 급기야는 자기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였습니다. 요한 1서 4:10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5:6-8에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부활과 영광의 신비
십자가 복음의 최고봉은 그 죽음이 부활과 생명으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빌립보서 2:6-11에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 후에 부활과 영광으로 이어지는 최고의 소망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일찍이 주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2:24).
바울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증하면서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37-38). 그는 또 십자가의 도에 충실한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것은 해의 영광, 달의 영광, 별의 영광으로 비유됩니다(고전 15:41).
그 영광의 신비는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또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놀라운 축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고전 15:53).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경지에서 모든 신비를 즐기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도
고전 1:18-24 / 조재호목사
1.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1:18-31까지 지혜라는 단어는 13번, 능력이라는 단어는 2번 나옵니다. 지혜와 능력은 사람이면 모두가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혜라고 이름 붙인 자녀들이 꽤 있지만 능력이라고 붙인 이름은 못 들어 봤습니다. 자녀 축복기도를 할 때 지혜라고 이름 붙인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혜에게 지혜를 주시기 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에 13번 나오는 지혜를 보면 다 같은 지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21)
세상의 지혜 혹은 사람들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아무리 미련해도 사람들의 지혜보다 월등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혜교육을 많이 시킵니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도록 가르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 엄마가 어린 자녀에게 지혜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집을 두고 도망쳐야 할 때 무엇을 가지고 가야할까? 돈이나 금은보화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가야 한다. 그것은 지식과 지혜란다" 지혜는 지식의 벌판 위에 세워지는 거대한 피라미드와 같습니다.
2번 나오는 능력이라는 단어는 모두 "하나님의 능력"(18, 24)이라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이루실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전지 전능의 하나님입니다. 능력은 권력과는 다릅니다. 우리 주변에서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후보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후보가 되겠다는 것과 이 나라 최고의 지도자인 대통령 감이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권력은 소금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점점 목이 마릅니다. 교계와 교회 믿음 안에서도 권력과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고 나중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인 요한과 안드레의 어머니가 와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권력을 잡으실 때 한 아들은 우편에, 한 아들은 좌편에 안게 해 주십시오"하고 인사청탁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당신이 지금이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하는 말이오." 즉 "당신은 지금 정신 없는 소리를 하고 있소"라고 주님은 단호하게 배격하고 철저히 거리를 두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을 잡으려고 하고 사람들 위에서 권세를 부리려고 하지만 너희 중에서 크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겨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온 것은 권력을 잡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낮아져 섬기려고 왔노라" (마태 20:20-28)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방법대로 신앙생활하면 성장과 성숙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역전의 진리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낮아져 섬기는 것이 하나님이 높이시고 인정해주시는 십자가의 방법입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정신에 있어서는 섬기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정신은 한 마디로 "당신을 위합니다"하는 것입니다. 즉 "당신 위주입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표 받는 곳"이 아니라 "표 내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간단한 표현 같지만 대단한 발상의 전환입니다. 같은 곳이지만 "표 받는 곳"은 도로공사 위주이고, "표 내는 곳"은 운전자 위주입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모든 헌신자들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야 한다는 철저한 섬김의 정신을 소유해야합니다.
2.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은 십자가에서 나타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에게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같은 물건이라도 달리 보고 같은 사건도 달리 봅니다. 어떤 사람 눈에는 시시해 보이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더 없이 소중할 수가 있습니다.
1947년 봄 이스라엘 여리고 남쪽 광야에서 일어 난 일입니다. 양치기하며 살던 베두인족(아랍계 유목민) 무하마드 아드드립이라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양 한 마리를 잃어 버려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반쯤 허물어진 절벽 중간 동굴에 도착하여 혹시 양이 맞아 소리를 내면 구해오려고 돌을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나 양 소리는 나지 않고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튿날 사촌 형제와 함께 동굴로 기어올라가 보니 항아리 파편과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8개 항아리가 있었습니다. 일곱 개는 비어있고 나머지 한 개에 두루마리 책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와 베들레헴 한 고물상에 넘겼습니다. 어느 날 고물상에서 들린 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당시를 전후해서 광야에 피해 경건하게 살던 에세네파 사람들이 읽던 성경이었습니다.
보통 물건이 아니라 구약 필사본이었습니다. 대대적인 탐사가 시작되었고 쿰란종파 동굴과 사해문서가 발견되었고 세계가 흥분하였습니다. 이것은 2000년 기독교계 최고의 발견입니다.
목동의 눈에는 단지 깨진 항아리였고 낡은 종이 조각이었습니다. 고물상에 엿바꿔 먹는 물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는 상상키 어려운 소중한 물건이었습니다. 가치는 아는 사람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알지 못합니다. 그 가치와 그 의미와 그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세상 사람들은 "미련한 짓이다.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지금 뛰어 내려라" "너나 구원하라" 소리치며 조롱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업신여깁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여깁니다.
조롱하는 사람은 조롱당할 것이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업신여김을 당할 것입니다. 미련하게 여기는 사람은 미련한 삶을 살고 결국은 후회할 것입니다.
3.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 얻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하면 모든 것이 180도로 바뀝니다.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먼저,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편과 우편에는 다른 십자가도 있었습니다. 살인 강도를 일삼고 살던 중죄인 사형수 두 사람이 달렸습니다. 우편 강도는 예수님을 바로 보며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말씀하셨습니다. 살인 강도는 죽음과 함께 영생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좌편 강도는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침 뱉고 욕하고... 그는 죽음과 함께 영벌에 처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중간에 있습니다. 좌편과 우편으로 갈라집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믿고 의지하는 인생을 180도로 바꾸어 놓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약한 사람을 바꾸어 강한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미련한 것 같아 것을 바꾸어서 지혜롭다고 하는 것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 13:44)
우리는 십자가로 살아난 사람이고 십자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는 사람은 모든 것을 달리 봅니다. 여러분 모두 십자가를 통해 세상사람들과는 달리 보는 십자가의 사람들이 되어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道)
고전 1:18-25 / 김태복목사
오늘 사순절 다섯째 주일을 맞아서 ‘십자가의 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도’란 한문으로 ‘길 도(道)’자로 길을 의미합니다. 즉 살 길을 알려주는 진리나 윤리적인 삶을 말합니다. 그 길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철학이나 종교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각기 바른 진리를 알려 주겠다고 종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불교, 유교, 회교, 도교, 조로아스타교, 남묘호랑교, 유대교, 태극교입니다.
그런데 어느 종교는 가정과 사회를 건전하게 발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만, 어느 종교는 사회를 퇴보하게 만들고 정신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가정과 사회가 바로 되려면 올바른 종교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인생에게 바른 삶을 주는 도, 개인이나 사회를 바르게 만들어 주는 종교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는 오직 ‘십자가의 도’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나타나기 전에는 불교나 유교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하지 아니하고 선하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나타남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열어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14:6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영원을 열 수 있는 길이 되시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신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는 기독교가 참된 종교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불교나 유교를 믿어서 잘된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나 조선시대가 정신적으로 병들었던 이유는 바로 불교나 유교가 그 사회를 주도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불교를 보십시오. 미신, 점쟁이, 무당과 혼합하여 이 사회를 아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원래 불교는 그러한 미신이나 무당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질되었습니다.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를 보십시오. 얼마나 형편없이 못사는 나라가 되었습니까? 거지가 득실거리는 비참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강하게 뻗쳐가는 종교가 있다면, 이슬람교입니다.
전 세계의 5분지 1이 이슬람교도일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들 보십시오. 기름이 대단히 많이 나는 나라이지만, 종교를 잘못 믿음으로 비참하게 살고 있습니다. 지난번 성지순례 때 가보면서 다시 한 번 그러한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다섯 가지 신앙적인 의무를 실천해야 합니다.
(1)신앙고백으로, ‘알라 외에는 신이 없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시인해야 합니다.
(2)기도생활로, 하루에 해들 때, 정오에, 오후 중반에, 해질 때, 잠들기 전 등, 하루 다섯 번 손과 얼굴에 땅에 대고 기도해야 합니다.
(3)구제생활로, 자기 수입의 40분의 1을 구제해야 합니다. (4)금식으로, 라마단 기간이 한 달 동안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음식과 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5)성지순례로, 적어도 일생 한 번은 성지순례를 다녀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무나 엄격한 종교 의무에 얽매여 모든 활동에 막대한 지장을 줍니다. 금식기간 동안은 낮에는 굶고 밤에는 지나치게 폭식함으로 건강에도 많은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특히 남자들에게는 네 사람까지 아내를 둘 수 있는 것과 여인들은 외출할 때는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함으로 여성들의 인권은 너무나 비참할 정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여성분들은 크리스챤이 된 것을 항상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스람권에 비해서 서구사회나 미국사회를 가보면 기독교의 영향력에 대해서 큰 감탄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야만족이던 그 사회를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에 얼마나 잘 풍요로운 사회, 얼마나 찬란한 문명사회가 되었는지요? 세계 선진국은 거의가 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가정과 사회에게 가장 좋은 영향을 끼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현세에서만 좋은 열매를 주는 종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는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망한 가정이나 사회, 국가는 없습니다.
기독교의 진수(眞髓)는 바로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4복음서를 읽어보면 3분지의 2가 십자가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십자가 왜 중요하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어떻게 동참할 것인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1. 십자가는 성경의 지혜를 여는 열쇠와 같다는 점입니다.
본문 18절에서 25절 사이에 ‘지혜’라는 말이 8번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애써도 성경의 비밀, 구원의 문, 하나님의 세계를 열지 못했던 것은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고 율법의 열쇠로 하나님의 지혜를 열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세계를 율법이라는 열쇠로 열려고 하나 번번이 실패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여는 열쇠는 십자가 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십자가라는 돋보기를 통해서 볼 때만 하나님의 비밀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집이라도 열쇠가 없으면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때로 열쇠가 없어서 문을 열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온갖 도구나 철사를 동원하여 열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열쇠를 찾아서 돌리면 철거덕 열립니다. 전혀 힘이 들지 않습니다. 성경의 열쇠는 ‘십자가의 도’입니다.
성경은 십자가를 통해서 해석해야 모든 비밀이 열립니다. 부활의 길이 열리고 영생과 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도를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서 주었음에도 십자가를 보는 인간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한 대로 ‘십자가의 도’를 미련하게 보는 부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큰 이적을 나타내서 식민지 문제, 정치 문제, 경제 문제 등 제반 문제를 기적으로 다 해결하고 다윗이 통치하던 이상의 나라, 지상낙원을 이룰 줄 소망하고 있었기에 십자가로 통해서 죄 용서를 받고 의로워지며 구원받는 다는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사상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제일로 여기는 철학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사상이든지 논리정연 해야 하는데 ‘십자가의 도’는 너무나 비합리적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앗수르나 바사, 갈타고, 이집트, 헬라, 로마에서 가장 흉악한 죄수들에게 사형을 시키는 가장 추한 형틀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고 그 거룩한 천국에 간다는 사상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기에 무식한 자나 노예들이 믿는 미련한 종교 사상이라고 비웃었습니다.
기독교 사상은 요3:16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는 너무나 단순한 사상이요, 비합리적인 내용이라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진리는 지혜가 있다 하는 이들이 볼 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십자가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 십자가 안에서 죄 용서를 받습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병 고침 받고, 기도 응답도 받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받아 죄와 죽음과 사탄으로부터 승리하는 삶의 능력을 부여받고 땅 끝까지 증거 하는 담대함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어떠한 문제, 어떠한 역경, 어떠한 시련도 능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대단히 핍박을 받던 시절, 로마 황제 앞에 어느 독실한 신자가 붙들리어 가서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네가 만일 신앙을 버리면 네 목숨을 살려 주고 국외로 추방하겠다.” “폐하께서는 나를 그리스도에게서 결코 떼어놓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나를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좋다. 그러면 네 재산을 몰수하겠다.” “폐하, 그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보화는 모두 하늘에 쌓아 두었기 때문에 폐하의 손이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신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고백하자, 황제는 대단히 노하여 “네 이놈, 네가 나를 약 올리고 있느냐? 너를 죽여 버리겠다.” “폐하. 나는 지난 40년간 죽어 있었습니다. 즉,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살아 있으니 폐하가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황제는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는 신자를 보고 기가 막혀서 체념하고 그를 성 밖으로 내 쫓았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는 모두 십자가만이 속죄의 문, 구원의 문,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여는 하나님의 열쇠인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는 열심히 참석하지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기독교들이 십자가 앞에서 명상하거나 혹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은 여섯 시간 얼마나 고통을 받으셨을까?’ ‘그 가시관의 찔리심, 그 매 맞으심, 그 못 박히심, 얼마나 크셨을까?’라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와 자기와의 연관을 시키려 하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안타까워할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사랑 앞에 모든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자기의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눅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는 줄 믿고 그 앞에서 모든 죄를 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기쁨과 평안이 넘치는 삶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순간순간 붙들어 주셔서 올라가게 하시는 손길을 발견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느 교우들은 교회는 출석하고 있지만, 혹은 세례도 받고 제직으로 임명도 받았지만, 십자가만 바라볼 뿐,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도 않음으로 십자가의 구경꾼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한 교우들은 아무리 교회를 나와서 정신적인 수양을 쌓거나 어느 정도 위로는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결코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회개가 무엇인 줄 압니까?
지금까지 지었던 죄를 다 고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회개는 지금까지 자아중심대로 살았던 죄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끝없이 욕심을 부리고 혈기를 부리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를 중심해서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랍지요. 그 때부터 우리 심령 안에 부활의 능력이 싹이 트는 것을 체험합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깨어짐이 있은 후에야 부활 안에서 주님의 새사람으로 지음 받는 것이요, 그 다음에 가서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채 교회에서 봉사하고 활동하면 교회부흥에 장애요소가 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열심, 자기의 주견, 자기의 혈기로 일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옛사람인 나는 죽고 부활 안에서 주님의 것으로 새사람이 될 때는 주님의 열심, 주님의 주견, 주님의 인격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돌아가시는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몸이 너무 아파서 고함 고함을 지르는 분도 있습니다.
어느 분은 남아 있는 식구들 때문에 하염없이 웁니다. 심지어는 어느 분은 죽음 직전까지 아내 원망, 자식 원망으로 혈기를 부립니다. 그러나 숨이 꼴깍 넘어가면 모든 것이 조용해집니다. 아프다는 소리도 사라지고, 불평도, 원망도 사라지고 빚이 산더미처럼 있든지, 젊은 아내를 두고 가든지, 홀로 남은 어린 아이가 서럽게 울든지, 혹은 자식들이 유산 때문에 서로 울근불근하든지 전혀 표정이 없습니다.
언제도 소개했습니다만, 채필근 목사님이 쓰신 「이야기 철학」이라는 책에 나오는 재미난 예화입니다. 평양시에서 북편으로 한 20리 떨어진 한 촌에서 한 노인이 돌아가셨습니다. 상주는 자기 조카에게 돈을 주면서 평양에 가서 상포 흥정을 해오라고 보냈습니다. 상포 흥정을 떠난 조카는 시내에 갔다가 빚진 채주를 만나서 있는 돈을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그 조카는 돌아갈 염치가 없어서 아는 사람 집에 들어가 박히고 말았습니다.
상가에서는 상포 흥정을 간 사람을 기다리다 못해서 낙심천만이었습니다. 상주는 기가 막혀서 아버지 시신 앞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혼자서 한다는 말이 “원, 이 녀석이 죽었나, 살았나?”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조카를 보고 한 말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아버지 시신을 보면서 그런 말을 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죽은 사람은 일체 반응이 없습니다.
그렇게 혈기가 많고 욕심이 많고 불평이 많던 사람이 죽으니까, 그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맙니다. 공동묘지에 묻든지, 화장하든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혈기를 부리고 욕심 때문에 싸우고 교회 안에서도 흥분해서 옥신각신합니까? 자기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저부터라도 목회 일, 노회 일을 할 때에 어느 때는 누가 칭찬하고 높여주면 공연히 우쭐거리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누가 알아주는 자가 없는 느낌이 들거나 싫은 소리나 비판의 소리를 들으면 공연히 낙심하거나 흥분하여 울근불근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자아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다시 주님 앞에 엎드리어 회개하고 다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아를 뽑아 버립니다. 그러면 누가 칭찬하든지, 알아주든지 말든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평강이 내 영혼 속으로 흘러넘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주님만 높이면 됩니다. 주님만 나타내는 것을 족하게 여기게 됩니다. 여러분이여. 교회에 와서 주님의 일을 제대로 하려면 십자가 안에서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부활 안에서 새사람으로 지음 받아야 합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게 주님의 일을 해 보십시오. 내 혈기, 내 주견, 내 열심 때문에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고 주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어떻게 동참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16:25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아를 십자가를 못 박은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생긴 달란트를 말합니다.
교사이든, 성가대이든, 구역의 일이든, 혹은 집사나 중직, 또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 등을 말합니다. 그 달란트를 바로 지고 주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또한 ‘자기 십자가’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때문에 당하는 핍박, 예수님을 때문에 당하는 손해를 말합니다. 십자가는 신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올바로 믿게 되면 필히 따르는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핍박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원수 같은 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내 시간, 내 건강, 내 물질을 희생하여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바로 지십시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는 못 집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날마다 자기를 죽이어야 했다고 간증했습니다. 그 때마다 큰 능력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십자가 피하다가는 요나처럼 풍랑을 만나고야 맙니다.
그러나 요나가 회개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에 깜짝 놀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에스더가 주님을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면서 ‘자기 십자가’를 바로 지니까, 자기도 살고 민족도 사는 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목회의 길은 어느 때는 보람 있을 때도 많지만 어느 때는 너무 힘이 듭니다.
어느 때는 화가 나서 잠이 오지 않는 밤도 있고, 어느 때는 심한 오해를 받아서 다 버리고 어디 먼 곳으로 가고 싶은 때도 있습니다. 어느 때는 전력을 다해서 일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 나가서는 뒤에서 은근히 비난하는 느낌이 들 때는 사표를 내고 다른 교회로 가고 싶은 유혹을 받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내가 살아 있는 탓입니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내 자아를 부숩니다. 마음을 비우고 주님을 모십니다. 그리고 다시 ‘내 십자가’를 집니다. 그러면 다시 자유로워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강하게 붙드셔서 말씀으로 붙드시고 능력을 나타내 주시며 기쁨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독일 어느 작은 마을에 드보라 라는 가난한 소작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워낙 가난한데다가 2년 동안의 가뭄으로 인해 남은 것이 전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주인이 소작까지 내놓으라고 하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받았습니다. 앞날이 캄캄해진 그는 식구들을 불러 모으고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님, 저희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저희의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도를 끝나자, 그들이 기르던 새가 창문에 매달려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문을 열자 새가 들어왔는데 그 입에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알고 그것을 팔아 쓸려는 유혹을 받았지만 드보라는 자기 욕심을 과감히 버리고 그 반지의 주인을 찾아서 수소문해 보았더니 그 지역의 부자가 반지를 잃고 사방으로 찾고 있었던 것을 알고 즉시, 돌려주었습니다.
그 부자는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고마운 답례의 표시로 집과 땅을 마련해 주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드보라가 욕심의 유혹에 빠져 그 반지를 팔았더라면 잘못하여 도둑으로 몰렸을 번 하였으나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 때에 일생 살 수 있는 집과 토지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여러분의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로 지고 주님을 따라가십시다.
그 십자가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못 집니다. 날마다 자기를 죽이고 그 십자가를 바로 짐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번 사순절 기간에 전 교인이 할 것은 십자가 안에서 철저히 내가 녹아지고 부활 안에서 새사람으로 지음 받아 보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회개의 고백을 해 보십시오.
‘주님, 지금까지 자아중심으로만 살면서 자아의 욕심, 자아의 혈기, 자아의 자랑에만 매여 있었나이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드리오니 받아 주셔서 십자가 안에서 철저히 녹아지게 하옵소서. 그리고 부활의 주님과 함께 주님의 새사람, 주님의 지체가 되게 역사하옵소서.’라고 간구해 보십시오. 성도 여러분들이여, 그 때에 십자가의 강한 능력, 성령의 강한 능력이 여러분을 변화시키시고 강하게 붙드셔서 승리적인 삶을 살게 하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