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급함은 악이다‘고 했는데 뭣 땜에 제가 또 서두르는지 아시나요?
9시 예배 참석해서 터키 지진 성금(30,000)을 내고 혜성 교회를 가기 위해
바쁘게 엑셀을 밟았어요. 솔차니 먼(500m) 파킹을 하고서 교회를 찾아갔어요.
여벌 재킷을 가져왔으니 망정이지 멋 내다가 얼어 죽을 뻔 했습니다.
-
도시계획을 해놓은 탓에 한참을 헤메다가 식당 쪽으로 들어갔지 뭡니까?
모로 가더라도 서울만 가면 된다잖아요. 문을 세개쯤 지나서 본당에 골인
했어요. 집 앞 교회를 나가다 이곳에 오니 헌금함부터 대형교회 느낌입니다.
주옥같은 찬양이 마구 쏟아져 나왔는데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어요.
-
제 입이 터지려면 아무래도 고넬료를 만나야 할 텐데 쉽지가 않습니다.
찬양을 하려고 참여한 9시 예배고 만 지난주도 이번 주도 벙어리신자입니다.
주보를 보니 부활절 이후 전도초청 행사를 하느라고 교회가 바쁜가 봅니다.
작년 추수감사절에 왔다갔을 때보다 목사님 영 빨이 입빠이입니다. 리스펙트!
-
한 개의 대지 가지고 설교를 이처럼 은혜롭게 하는 것도 어지간한 실력
갖고는 턱도 없을 것입니다. 40분 설교에 즉흥 찬양 3곡을 합디다.
과거 하 용조 목사가 종종 설교하다가 필이 꽂히면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위로에 성령님이시여! “ 하면 온 몸에 솜털이 주뼛주뼛 섰던 기억이 납니다.
-
살짝 감흥이 왔어요. 주용이네 식구들이 어디에 있나 하고 살펴볼 즈음
가까이서 김 옥실 사모 목소리가 났어요. 어라, 속았어요. 내레이션처럼
나는 목소리는 바로 옆 스피커에서 흘러나왔어요. 모르는 문자가 뜬
걸 보니 주차장에서 차를 빼란 뜻이겠지요. 오늘 계획 수정입니다.
-
설교 끝나자마자 냅다 튀었어요. 후, 토네이도가 무사한 것은 주의 은혜일
것입니다. 가는 길에 보상심리가 발동을 했던지 태릉선수촌에서 유턴을
했어요. 서울여대가 도로 정비를 한 탓에 조망권이 나이스 해졌더이다.
SU 수련회 때 강의 들으러 몇 번 들린 기억이납니다. 태릉은 한 두 번은
-
왔을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어요. 노화일까요, 치매인가요? 어찌
됐건 서울 시내에서 입장료 1000원에 무료 주차를 한다는 건 행운입니다.
왕릉에 낙락장송이 많긴 하지만 이곳은 온통 소나무밖에 없을 정도로
소나무 군락지입니다. 이어폰 꽂고 사진을 찍으면서 태릉이 누구 무덤인지
-
함 찾아봅시다. 팔로 미! 태릉은 중종(11대)의 제2계비였던 문정황후
(1501-1565)윤 씨의 ‘단 능‘입니다. 어라 무덤 주인은 서방이 미웠을까요?
보통은 무덤이 쌍무덤인데 왜 단 무덤인 걸까요? 저도 시방 무지 외로워요.
초등학교 3학년 땐가 혼자 자고 싶었어요. 자는 것뿐 아니라 혼자만의 공간
-
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식구는 8
명인데 방은 두 개뿐이었으니까 나는 간혹 토방에 나와 아지트를 만들고
혼자 잤을 것입니다. 친할머니 돌아가시고 수곤 씨네 안 집에서 내 방이 생겨
처음으로 혼자 잤고 결혼하기 전까지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한 것 같아요.
-
결혼하고 17년을 어쩌다 아내와 싸우면 혼자 소파에서 자면서 내가 이럴
라고 결혼했냐며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릅니다. 팔자려니 하고15년을 혼자
자고 있는데 어제 밤에는 옆구리가 허전해서 끌어안고 자던 죽부인을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혼자는 외로워 둘이랍니다. 둘은 알뜰이 사랑했어요. 근데 왜?
-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 난정 일화가
재미있어 보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정 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미가
관비 출신이어서 정 난정의 앞길을 막았다 네요. 정난정은 반전을 위해
기생으로 입문했고 고관백작과 어울려 숟가락을 얹는 작전을 펼쳤어요.
-
그녀는 작정한대로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 윤형원의 첩이 됩니다.
마침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윤 형원이 실세가 됩니다. 곧바로 윤형원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를 해요.
-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역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됩니다. (을사사화)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형원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가 되고,
윤형원의 뒷배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합니다.
-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1533년에는 외명부 종
1품 정경부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정난정의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 일색이지만 그녀는 윤형원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게 했대요. 당시로는 신분제도의 근간을
-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호응을 받았다고 합니다. 문정왕후는 당의 즉천
무후, 청의 서테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을 가지고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입니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8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여성파워를 과시합니다. 왕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겠느냐며 호통을 치고 왕에게 회초리를 쳤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결국 아들 명종이 어머니 그늘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셈입니다.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옆에 묻히고 싶었는지 원래 희릉(고양, 서삼릉)우측
에 있던 중종의 능을 정릉 터로 옮겨 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웁니다.
-
하지만 정릉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침수가 잦자 아들 명종이
태릉에 안장해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되고 맙니다. 둘째 매형 한테도 가봐야
하고 에예공 얼굴 본 지도 오래되었고 영어 공부도 해야 하는데 이놈의 돈을
벌어야 하니 죽도 밥도 아닙니다.
-
문정왕후,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좀더 살펴봅시라. 팔로미! 저는 학창시절에는
공부랑 담을 쌓고 지낸 인사라서 한국사가 이렇게 흥미진한 것인줄 미쳐
몰랐어요.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까지 오면서 소현왕후인 인수대비가
1빠 인줄 알았는데 여기 새로운 1빠가 있네요. 문정왕후 말입니다.
-
발을 내리고 하는 수렴청정은 세조의 정실이었던 정희 왕후가 시작하였는데
그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의 탑입니다. '암탁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문정왕후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위는 조선 11대 왕 중종의 왕비이자 13대 왕
명종의 모후로써 명종대에 수렴청정을 실시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문정
-
왕후(1501~1565)에 대해 훗날 실록을 편찬한 사신이 국모였던 왕비를 혹독한
평가로 버젓이 실록에 올린 것을 보면 당시 실록 편찬자들은 문정왕후에게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명종실록은 홍섬을 총재관으로
하여 선조 때에 대거 중앙으로진출한 사림파들에 의해 편찬되었으니 이 문정
-
왕후에 대한 평가는 바로 '사림파'들의평가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릉동에 있는 문정왕후의 무덤인 태릉은 왕비의 단릉이라 믿기 힘들만큼
웅장해 조성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문정왕후는 그녀 이후 조선왕조 내내 왕비가 조금이라도 정치에 관여하려
-
하거나, 처신에 문제가 있을 때면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입니다.
그것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남성 관료들을 호령했고 조선의 국시이던 억불
정책을 보란 듯이 무시하고 호불했으며,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추구하는
성리학의 기본이념을 외면하고 강력한 독재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그녀는 조선시대 내내 남성 지배층에게는불편하고 불쾌한 존재로
자리 잡았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문정왕후는 남존여비가 세상의 정당한
가치관이라고 굳게 믿어지던 시대에 비록 수렴청정이라는 형식을 빌었지만,
누구보다 지적이었던 조선의 남성지배 관료층을 발아래 두고 자신의 권력과
-
왕권을 오로지 하였다는 점에서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불리한 입장을 극복하고 지성과 지성의 대격돌장이던 중앙 정치
무대에서 자신의 주장을 그대로 관철시켰다는 것은 그녀가 매우 지적이며
어떤 남성 관료와 비교하여도 뒤지지 않을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진 사람
-
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지요. 조선왕실에는 몇차례 왕비들의 수렴청정이
있었지만 문정왕후처럼 남성 관료들을 쥐락펴락하며 마음껏 권력을 휘두른
사람은 없습니다. 문정왕후에 대해 이후 남성 지배층들이 보여준 것은 불평
이나 비난의 수준이었을 뿐, 그녀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한 것을
-
보면 문정왕후는 조선 전시대를 통해 매우 강렬하고 독보적인 존재가 아니
었나 짐작하게 합니다. 그녀의 능호를 여느 왕비들의 능호에 주로 붙는 여성
적인 글자가 아니라 ‘태(泰)’자를 붙혀 태릉이라고 부르는 것도 문정왕후가
가진 탁월함과 카리스마를 느끼게 해주는 한 부분입니다.
-
문정왕후는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 덕에 왕위를 차지하게 된 왕, 중종이 세
번째로 맞은 왕비였습니다. 중종의 첫 번째 왕비는 단경왕후신씨였는데 연산
군 때의 권신 신수근의 딸이었다는 이유로 폐출되었고 중종과 단경왕후는
서로 사랑하였지만 신하들에 의해 택군된 왕은 자신의 아내를 지킬 힘이
-
없었고 결국 중종은 신씨가 폐서인이 되는 꼴을 멀거니 지켜보았습니다.
중종이 두 번째로 맞은 왕비는 반정의 주도세력이었던 윤임의 여동생 장경
왕후윤씨였는데 그녀는 왕비가 된지 8년 만에 훗날 인종이 되는 원자를
낳고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
장경왕후 사후 단경왕후를 다시 맞아들이자는 논란이 잠시 일어나기는
했으나 아직 반정주도세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단경왕후의 복위논란은
곧 잦아들었습니다. 당시 반정공신 세력들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서로
분열되고 있었는데 어머니를 잃은 세자가 중종의 총애를 받는 경빈 박씨
-
같은 후궁의 자식들에게 치이지 않게 하기위해 세자(훗날 인종)의 외삼촌
윤임은 세자를 보살펴줄 왕비로 자신 가문의 처녀를왕비 후보로 밀었습니다.
훗날 문정왕후가 되는 이 윤씨 처녀는 당시 17세였으며 어머니 없이 자랐지만
앞서 실록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에서 배제되어 있던 당시 소녀들과
-
달리 글을 배우고 학문을 닦아 아버지 윤지임으로부터 아들들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에예공! 지성의 사유가 주는 혜택을 절대 간과
하지 마시라. 윤임 덕에 국모라고 하는 왕비의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보다 나이
많은 후궁들의 등쌀과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넷을 줄줄이 낳은 탓에 초기
-
문정왕후의 삶은 그다지 녹녹하지 못했습니다. 신하들의 입김 하나에 좌지우지
되는 힘없는 왕, 중종의 왕비로 문정왕후는 자신의 앞날이 언제 단경왕후 같아
질지 모를 위협 속에서 두려움에 떨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세자의 보호
자를 자처하면서 세자를 끼고 돌며 자신의 안위를 간신히 유지하였지요.
-
그녀는 중종이 사랑해 마지않던 경빈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이 정쟁에 휘말려
죽어가는 모습도 지켜보았으며 그녀가 아들을 낳아 세자를 위협할까 두려워하는
윤임의 견제도 호시탐탐 당해야만 했습니다. 말만 국모였지 바늘방석같은 왕비의
자리에서 젊은 시절 문정왕후는 정치의 쓴 맛을 골고루 맛보았습니다.
-
그리고 그녀는 이때의 비참함과 굴욕을 흘려버리지 않고 차곡차곡 앞날을 위한
경험으로 체화시켜 나갔습니다. 지난 긴 세월동안 방패막이 삼아 끼고 돌며 키워
온 세자(훗날 인종)였지만 자신이 아들을 낳게 되자 문정왕후에게 세자는 경원
대군을 위해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등의 도움을 받으며 세자와 그를 보호
-
하는 윤임세력과 맞섰습니다. 두 윤씨의 대립을 윤원형을 소윤이라고 하고 윤임을
대윤이라고 하여 소윤 대윤의 대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야사에 의하면 문정왕후
는 세자를 죽이기 위해 세자 궁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심약한 세자를 독한 말로
구박해 병들게 하고, 때로는 무속의 힘을 빌려 저주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
실제 실록에 남은 기록을 보면 문정왕후는 세자에게 장차 경원대군과 자신의 친정
가문을 죽이지 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여, 자신을 키워준 문정왕후에게 효심을
품고 있던 인종을 근심스럽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정왕후의 이러한 세자측에
대한 날카로운 대응은 단지 경원대군에 대한 그녀의 욕심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
윤임이 김안로등을 내세워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 획책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김안로의 음모는 결국 이를 빨리 알아챈 문정왕후가 중종을 움직임
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으로 문정왕후는 실제 권력이 없는 허울 좋은
자리가 얼마나 소용이 없는지 뼈저리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
병약한 세자를 내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중종 사후 인종이 다음 왕위를
이어받았고 문정왕후의 정적이던 대윤 윤임은 권력의 핵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문정왕후는 여러 면에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이미 권력을 잡은 윤임
에게 대놓고 맞서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몸이 약한 인종을 몰아붙여 힘들게 하였지요.
-
결국 인종은 문정왕후가 바라마지 않게 즉위 8개월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중종의 유일한 적자로 남은 문정왕후 소생의 경원대군이 12살 나이에 조선
13대 왕 명종으로 즉위하였습니다. 문정왕후는 권력을 틀어쥔 뒤 일단 자신을 핍박
했던 대윤파를 일소하였습니다. 이때 윤임과 그 일파가 제거되면서 인종 때 등용된
-
사림들도 대거 피해를 보았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합니다. 을사사화는 표면적으로는
대윤과 소윤의 정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은 이전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훈구세력과
이를 개혁하려는 사림세력 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을사사화는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정계에서 축출함으로써 일시적으로 훈구세력이 승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의 대세는
-
사림에게 있었습니다. 사림들은 훗날 선조대에 가면 대거 중앙에 진출하여 문정왕후는
명실상부 조선의 제1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동생 윤원형이 꾸민 양재벽서
사건에 쓰여진 문구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이 날뛰니...’ 에서 처럼 실질적으로
그녀는 여왕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재난이 일어나면 중론을 모으게 하고 대신들과
-
몇 시간씩 토론을 하는 등 남성 학자 관료군들에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정치를 해나갔습니다.
그녀에게 오점은 그녀의 동생 윤원형과 그의 첩 정난정이 그녀를 도와 정치의 어두운
부분을 도맡아 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은 것이었고 문정왕후 또한 그들을 눈감아주고
함께 일정 정도 부정부패에 일조하였다는 데 있지 않을까?
2023.2.19.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