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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에서 다시 수산으로…왜구 방어 천연의 요새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7.04.
(180)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조선시대 초 9진 중 처음 축조
주 거점지 성산진성으로 이동해
1597년 일시적으로 폐성되기도
일제강점기 거치며 일부 철폐
▲제주9진 중 앞서 쌓은 수산진성
제주에는 외적을 방어하는 관방(關防)시설로 3읍성·9진성(25봉수·38연대)이 있었다. 읍성이 군사기능과 행정기능을 겸한 반면, 진성은 방어기능을 수행하는 군 주둔지였다. 조선조정은 우도 부근에 출몰하는 왜구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1439년(세종 21) 한승순을 목사겸 안무사로 임명해 9진 중 최초로 수산진성을 축성토록 했다. 같은 해에 차귀도 앞에 차귀진성과 새섬 앞에 서귀진성도 쌓았다.
1510년 명월·별방·애월 방호소에 진성이 축성되고, 이후 조천포·모슬포·화북포에도 진성이 구축됐으나 1910년 ‘일제의 읍성철폐령’으로 성문이 먼저 사라지고 1920년대부터 대부분의 진성이 읍성과 함께 항구를 구축한다는 구실 등으로 바다에 매립되기도 했다. 탐라순력도(1702) 수산성조(首山城操)에는 정의현 소속의 수산진성과 옛 정의현청이 있었던 구수산고성(舊首山古城)의 위치가 상세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성산도(島) 터진목 등을 매립하면서 바닷가 인근에 있던 구수산고성 성담들이 주로 사용되고, 수산진성 역시 성문·여장·성가퀴 등이 철폐됐다. 다행히 상대적으로 먼 곳에 위치한 수산진성 성곽은 덜 철폐돼 성곽유적이 9진성 중 가장 양호한 편이다.
2005년 도지정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된 수산진성은 축조방식과 평면형태 등이 읍성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바닷가에 위치한 다른 진성에 비해 내륙으로 꽤 치우쳐 있어, 군사기능 이외에 읍성 역할도 겸해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 둘레가 550여 미터에 달하는 수산진성은 규모로는 명월·별방·차귀 진성에 이어 네 번째 크기이다. 성안 시설로는 성문·우물·객사·익랑·군기고 등이 있었고, 연계된 관방시설로는 수산봉수·독자봉수·성산봉수·협자연대 등과 동남쪽 해변의 환해장성 등이 있었다.
1597년 이경록 목사가 일출봉 바닷가 인근에 축조한 성산성이 왜구침입에 대비한 거점지로 활용되면서 수산진성은 일시 폐성되기도 했었다.
▲성산진성 거쳐 도로 수산진성으로
1592년 부임한 이경록 목사는 1597년 제주의 주 방어진으로 삼을 진성을 성산에 축성하면서 제주읍성의 병력을 성산으로 옮겼다. 성산을 천연의 요새로 여긴 이경록 목사는 삼읍의 군병기와 창고를 모두 이곳에 옮기는 한편, 수산방호소도 이곳에 이전해 왜구침입을 방어하려 하였다. 여러 전시 상황을 맞아 주 방어진 옮김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이경록 목사는 1598년 주성을 다시 제주읍성으로 옮겼으며, 일부 병력만을 성산에 남겼다.
임진왜란 중 부친상을 당하고도 유임돼 성산외성 구축에 전념하던 이경록 목사는 성산성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1599년 이곳에서 병사했다. 수산진성을 성산으로 옮긴 것을 두고 1601년 안무어사로 입도한 김상헌은 ‘성산진성을 중심으로 왜적을 방어한다는 것은 적에게 스스로 포로가 되는 최악의 계략’이라고 주청했다. 이에 따라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온 성윤문 목사는 성산에 남아있던 병력을 수산으로 옮겨 진성을 정비하였다.
다음에 소개될 ‘길운절·소덕유 역모 사건’이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나고, 이에 위무 차 제주에 왔던 김상헌(제주오현)의 주청에 따라 성산성에서 다시 수산진성으로 왜적 방어기능을 환원시켰던 것이다. 현재 성산성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반면 수산진성의 유허는 수산초등학교 울타리에 상당량 남아있으며, 서문이 있던 곳에는 해자가 시설되었던 흔적도 남아있다. 수산진의 장두로 1705년 만호를 두었다가 1718년 조방장으로 환원되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는 ‘돌로 쌓은 수산성은 주위가 1164자, 높이가 16자이고, 좌우에 문이 하나씩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해방 전에 민가가 몇 있던 수산진성 터에서 해방 후인 1946년 지금의 수산초등학교가 개교했다.
민심 흉흉한 틈타 반역 도모…주모자 참형으로 다스려
▲길운절·소덕유 역모 사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정씨가 왕이 된다는 정감록이 퍼지고, 이후 여러 차례 역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특히 1589년(선조 22)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은 정치권력의 지형을 바꿀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1601년 제주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도 그러한 영향 중 하나였다. 정여립 첩의 친척으로 육지에서 일어난 역모 사건에도 가담했던 소덕유는 비밀이 샐 염려가 적은 제주에서 역모를 꿈꿨는데, 이렇게 해서 제주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른바 소덕유·길운절 역모 사건이다.
정여립의 모사(謀士)인 길운절은 앞서 제주에 온 소덕유와 제주에서 1601년 만나, 토호세력 등을 회유해 제주에서의 모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토호 문충기는 납마첨지(納馬僉知)로 제주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양대 전쟁으로 조정의 행정력이 제주에 덜 미치는 시대 상황에 더해, 특히 도민들을 학대하는 성윤문 목사가 민심을 잃고 있는 상황이 역모 사건에 가담할 자를 끌어드리기에 좋은 환경이었던 셈이다.
한겨울에 성윤문 목사는 성을 쌓도록 강제해 도민들의 원성이 매우 높았고, 진상과 부역 등으로 중앙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모 가담자들은 목사와 경래관을 죽이고 무기와 전마를 징발해 바다 건너 한양을 점거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러는 도중 음모를 엿들은 구생이란 기생이 길운절을 추궁하며 고발하겠다고 하자, 길운절은 성윤문 목사에게 거사 2일 전 변란계획을 몰래 알렸던 것이다.
이에 제주목과 조정에서는 주모자 18명을 체포, 한양으로 압송해 소덕유·문충기·홍경원·김정걸·혜수·김대정·이지·김종·강유정 최구익 등을 능지처참으로 다스렸다.
또한 제주 유림 30여 명이 심문을 받고 길운절도 처형되니 제주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이에 조정에서는 1601년 안무어사 겸 안핵사로 청음 김상헌을 제주에 보내어 진상을 조사하게 하고, 동요하는 도민들을 위무하기 위해 제주에서 과장(科場)을 열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적군 방어에 헌신…7년간 섬 수호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7.11.
(181)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목사 이경록, 숨질 때까지 방어시설 정비·군사 양성 힘 쏟아
청음 김상헌, 안무어사로 입도해 제주 체험 ‘남사록’에 기록
음침한 구름과 시든 풀로 덮인 황량한 성은(寒雲衰艸掩荒城)/ 원나라 오랑캐가 말을 기르던 곳이라네(云是胡元放馬垌)/ 옛날 목호들이 여기저기 발호하였을 때(舊致牧胡多跋扈)/ 도통사가 멀리서 여러 번 군대를 일으켰네(屢權都統遠興兵)/ 가을날의 반딧불은 김통정의 놀란 핏빛 같고(通政驚血秋螢碧)/ 파란 도깨비불은 초고(목호의 거두)의 요사한 넋이라네(肖古妖魂鬼火靑)/ 나라 안과 밖이 임금님 교화를 입은 지금(聖化只今覃內外)/ 바다 나라 백성들은 밭을 가고 샘을 파네(海邦耕鑿遺氓矣)
▲무너진 수산진성(시제: 水山廢城)
위의 시는 어사로 제주에 온 김상헌이 수산진성을 돌아보고 읊은 시이다. 학창시절 암송했던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는 김상헌이 중국으로 끌려가면서 읊었다는 시이다.
화친보다 척화와 관련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그의 시는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으로 끝을 맺고 있다. 김상헌이 입도 당시의 제주목사는 백성들을 학대한 것으로 알려진 성윤문이다. 성윤문은 조천진성의 쌍벽(雙碧)루 라는 정자(누각)를 임금 향한 연모의 정이 깃든 연북(戀北)루로 개명한 이다.
임금을 향한 연모지정을 노래하는 김상헌과 성윤문. 하지만 김상헌은 척화로 병자호란을 초래해 인조를 청태종에게 무릎 꿇게 해 결국 군신관계를 맺게 한 선봉장이 됐고, 성윤문은 제주 백성들을 혹사한 목사로 기록되고 있다.
▲제주5현 청음 김상헌
김상헌은 그의 나이 30세인 1601년(선조 34) 제주에서 있었던 ‘소덕유·길운절 역모사건’을 조사하고 민심을 안무(按撫)하기 위해 안무어사로 제주에 왔다. 그리고 제주에서 체험한 것을 남사록(南槎錄)이라는 일기체 문집에 남겼다. 한라산에 올라 산신제를 지낸 것 등을 담은 남사록은 1601년 8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6개월 동안의 제주체험을 기록한 고서이다.
남사록 원본은 서울대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보존 중이다. 김상헌과 상반돼 회자되는 이경록 제주목사는 임진왜란 당시 방어업무에 많은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우도에 숨어 있는 왜구와 대접전을 벌이려 수산방호소를 성산으로 옮겨 외성을 축조하다 그곳에서 병사했다.
그 후 입도한 김상헌이 성산성을 돌아보고는 ‘외적에게 포위될 위험이 있어 계략치고는 졸작이다.’라고 혹평했다. 김상헌의 혹평으로 제주에서 가장 오래 재직한 목사 이경록은 평가절하된 측면도 있어 보인다.
이경록에 대한 김상헌의 혹평에 대해 생각해본다. 서울대규장각 책임연구원인 이숙인은 ‘명가의 탄생, 빛과 그림자’에서 조선시대의 가문은 혈연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이익집단이라고 혹평한다. 가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과 수단이 동원되기도 했다.
제주5현 중 한 분이자 척화파의 거두로 알려진 김상헌의 가문은 어떤가. 김상헌의 친형인 김상용은 병자호란 당시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청나라 침공 시 김상용이 남한산성의 화약고를 잘못 터뜨려 발생한 사고사는, 동생 김상헌과 친족·측근들에 의해 의로운 자결을 한 충절지사로 바뀌었다.
이에서 보듯 이숙인은 국가적 명예를 훔쳐 가문의 번영을 도모한 가문으로 김상헌의 가문인 장동김씨를 꼽는다. 이번에는 이경록 목사의 목민관을 엿보고자 한다.
▲7년 재임한 최장수 목사 이경록
제주는 조선시대 때 총 286명의 목사가 부임했다. 100번째 목사로 부임한 이경록은 이순신 장군과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이순신이 성웅으로 회자되고 있는 반면 이경록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이름이다.
서른 살 넘은 나이인 1576년(선조 9년) 이순신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이경록은 여진족과 맞선 국경지대에 위치한 고을의 수령으로, 이순신은 그 일대의 방비를 맡은 무장으로 근무했다. 당시 함경도 방위의 총책임자인 종2품 병마절도사 이일은, 여러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이순신·이경록의 병력지원 요청을 무시했다. 이 일로 희생자가 대거 발생하자, 이 일은 이순신과 이경록의 잘못인 양 이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과 이경록에게 백의종군을 명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에 앞서 이경록과 함께 첫 백의종군을 겪은 것이다. 그 후 선조는 1591년 이경록을 나주목사,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에 임명했다. 전라도 좌수영을 총지휘하는 좌수사는 정3품 당상관이다. 이어 선조는 이경록을 1592년 제주목사로 임명했다. 임진왜란으로 의병들이 봉기해 왜적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긴장된 순간에 선조가 이경록을 군사요충지인 제주목사로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병력이 모자라는 상황에서도 원병 300명을 제주에 보냈다.
이경록 목사는 오히려 제주에 있는 군사들을 훈련시켜 바다를 건너가 왜적과 싸울 계획을 세웠다. 이에 대해 선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제주목사 이경록이 ‘군사 200명을 뽑아 바다를 건너 적을 토벌하고자 조정의 하명을 청합니다.’하고 장계를 올리자, 비변사(조선 최고의 의결기관)가 답하기를 ‘조그만 섬이 현재까지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아직 침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뿐. 만일 적이 침범한다면 섬의 힘만으로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데, 주장(主將)이 진(鎭)을 떠나 바다 건너 천리 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이경록의 충분(忠憤)은 가상하나 형편상 행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후 이경록은 제주성 위에 제승정(制勝亭)을 짓는 등 방어시설을 정비하고, 목성인 명월진성을 돌로 쌓아 개축했다. 이경록은 1599년 초 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7년 가량을 재임함으로써 최장기간 제주목사 직을 수행한 기록을 남겼다. 또한 여느 목사들의 재임기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오랫동안 제주목사로 재임했고, 마지막까지 제주의 방어시설을 돌보다 병사했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이경록 목사 후임으로 온 성윤문 목사는 기생 하나를 두고 판관과 싸우고, 판관 안극효는 이뿐만 아니라 법을 어긴 채 가족을 데리고 와 갖가지 민폐를 끼쳤다. 한겨울인데도 성윤문 목사는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시달리게 하니, 결국 길운절과 소덕유의 역모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601년 봄에는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고 민원이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성윤문 목사 등의 파직이 논의되기도 했다.
반면 ‘제주목사 이경록은 해외에 거주한 지가 7년이 되었는데 왜적의 변란으로 인해 체환할 수 없었다. 그가 나라를 위해 극히 어려운 고통을 겪었으니 가자(加資)하라.’라고 기록돼 있다. 가자란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더 올려주던 것을 말한다.
굶어 죽는 백성 구한 관리의 선정, 돌에 새겼다
제주일보 기사 승인 2023.07.18.
(182) 탐라·동도·정의현 역사문화 깃든 길
아기 바쳐 만들어졌다는 진안 할망당
영험하다고 소문나 소망 빌러 찾아와
정의현 장교 현윤경 효행 기린 정려비
황구하 어사·윤구동 목사 德(덕)도 비석에
▲수산진성 ‘진안 할망당’
도내 9진성 안에 유일하게 할망당이 있는 데서 유래한 진안할망당은 수산진성 축성과 관련이 깊다.
1439년 수산진성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성을 쌓으면 무슨 영문인지 자꾸 무너지곤 했다.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모두 부역을 하고 공출을 내는데 유독 한 여인은 그러지 못했다. 축성관리가 방문해 공출을 독촉하자 아기가 ‘으앙’하고 우는 게 아닌가. 여인은 집안에 공출할 게 없으니 저 아기라도 데려가라고 했다. 관리가 어처구니없어 웃어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축성 현장을 지나던 한 도인이 ‘왜 주겠다는 원숭이띠 아기를 바치지 않으시오.’ 하는 게 아닌가. 지난 일이 생각 난 관리가 그 집에 가서 아기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망설임 없이 아기를 내주었다. 그리고 아기를 땅에 묻고 성담을 쌓으니 진성은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구축됐다.
어느 날 밤 아기 우는 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려왔다. 이를 가엽게 여긴 어떤 부인이 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 퇴물을 아기 울음소리 들리는 그 자리에 갖다 놓으니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 후 부인은 하는 일마다 잘 됐다.
세월이 흐르며 진성 안은 신앙의 성소가 되고, 신당 영험이 좋다는 소문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지금도 자녀의 진학과 사업 성공 등을 위해 인근 마을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단골들과 학교 측에서 할망당 주변을 정비하니, 신당의 품격 역시 되찾은 듯하다.
▲수산마을 도처에 있던 오래된 비석들
제주도에서 역사문화 깃든 비석이 많기로는 화북·조천 비석거리가 유명하다. 그곳에 못지않게 다양한 비문들을 품은 곳이 또한 수산리이다.
수산리지(水山里誌·2021)에 따르면 26개의 비석이 마을 도처에 전시되고 있으나, 18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공궁연휼민(鄭公躳淵恤民)선정비’와 1880년 세워진 ‘군수강공우진(郡守康公祐鎭)선정비’ 등 고비 3기는 행방이 묘연하단다.
오래전 정의현 사람들은 제주목 관아를 오가기 위해 수산2리와 선비들이 순력을 다니다 쉬던 지역인 ‘선비동산’을 경유해 수산진성과 대왕산·소왕산을 거쳐 구좌읍 하도리를 지나 제주목에 이르렀다고 한다.
통행인이 많은 수산리 한질(대로) 도처에는 여러 형태의 비석들이 세워졌다. 그중에는 정의현 장교 현윤경의 효행에 대한 찰리사 이재수의 치계(馳啓: 말을 달려 임금께 올리는 보고)로 포상돼 1814년 대왕산 근처도로변에 세워진 ‘효자유향별감현윤경지정려(孝子留鄕別監玄胤慶之旌閭)’와 1823년 조정에서 효열정려(孝烈旌閭)가 내려와 세워진 ‘효열고씨지정려(孝烈高氏之旌閭)’의 비석이 지금도 행인의 이목을 끈다.
그동안 마을 도처에 산재해 있던 주요 비석들은 보호 차원에서 2018년 수산1리 사무소 동쪽 구석진 곳에 모셔져 있다. 이곳으로 옮겨와 전시되고 있는 비석 중에는 충혼비, 재일교포 후원 기념비, 특히 4·3 과 관련한 당시 경찰응원대인 ‘충남중대제1소대공덕비·복구기념비·돌아온 3인 비’등도 있다. 수산1리 사무소에 전시되고 있는 오래된 비석 2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황구하 어사 지성 진민비
수산리에 소재한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는 단연 ‘황구하 별견어사의 지성 진민비(別遣御使 黃公龜河 至誠賑民碑)’이다. 지성 진민비란 성심을 다해 백성을 구휼한 이를 칭송하기 위해 세운 공덕비다. 1716년(숙종 42)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치제(致祭)하고자 임금이 보낸 어사가 황구하다. 치제란 임금이 보낸 제물과 제문으로 죽은 백성을 제사하고 산 백성을 위무하는 위령제를 말한다.
황구하 어사는 조정에서 가져온 조 3만여 섬을 제주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한편, 진상품인 전복의 양을 줄여 공납하도록 했으며, 진상품을 감축하고 환곡도 절반으로 줄이도록 주청해 실현시켰다. 또한, 제주유생의 전시직부를 임금께 주청했다. 제주에서 치르는 초시인 향시에 합격한 급제자는 중앙에서 보는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며, 전시에서는 탈락시키지 않고 등위만을 매겼다.
이에 황구하 어사는 제주에서 초시를 거행해 급제한 고처량(화북), 정창선(상도), 고만갑(이호)에게 전시에 응시하도록 했다. 이를 기리는 선정비가 1724년(경종 4)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수산리에 황구하 공덕비가 세워진 이유로는, 여느 마을보다 목사의 시혜를 많이 입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여겨진다.
▲사상 윤구동 목사 휼민선정비(使相尹公久東恤民善政碑)
사상은 은퇴한 높은 관리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1815년 제주목사로 부임한 윤구동은 관리를 단속하고 주민을 안무하고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1817년 형조참의로 제수돼 제주를 떠난 윤구동 목사는, 재임 중 선정으로 이름을 남겨 제주 도처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1815년 외국선박이 본도에 표류됐을 때 표류민을 구휼하기 위해 민폐를 없애려 공적 자금을 사용했다. 흉년이 들자 육지에서 곡식을 옮겨와 구휼했으며, 이후 환모조(還耗租) 즉 환곡으로 2500석을 미리 준비해 흉년에 대비했다.
홍경래난(1812) 시 창의병을 일으키려던 대정현 義士 구제국과 양위국의 가문에 부역을 면제시키기도 했다. 외도동 월대, 김녕리, 화북동 비석거리 등에 윤구동 목사의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충효 홍달한 정려비(忠孝洪達漢之旌閭)
수산1리 남쪽 세칭 효자문거리 인근에는 후손들이 조성한 아담한 ‘홍달한 정려 공원’이 있다. 당시의 수산 지경인 지금의 고성리(동유암)에서 태어난 홍달한은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봉양하며 효도를 다 했을 뿐만 아니라 모친이 죽자 여묘(廬墓), 즉 고인의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또한, 부친상을 보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으로 3년 상을 추복(追服)하였다. 1720년(숙종 46) 숙종이, 1724년 (경종 4) 경종이 승하하여 국상을 치를 때마다 다랑쉬 오름 등에 제단을 마련하여 분향하고 북향재배했다. 한억증과 김윤 목사가 홍달한의 충효에 대한 행장을 조정에 알리니 정려가 내려졌으며, 영조 때의 판서 정실은 ‘홍효자전’을 지어 그를 널리 알렸다.
성산읍 수산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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