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이런 저런 '송년모임'이 많을 때다.
내게도 예외일 순 없었다.
지난주에 '종로 피맛골'에서 그리운 사람들을 만났다.
한 때 뜨겁게 운동했던 순박한 사내들이었다.
내가 거의 막내 클라스였고, 대부분 나보다 선배들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술도 한잔씩 나눴다.
경쾌하고 살가운 자리였다.
다양한 얘깃거리들이 오갔다.
주로 운동과 건강, 인생 2막에 대한 얘기들이었다.
약 2시간 후 자리를 파했다.
감사했고 행복했다.
밖으로 나왔는데 선배들이 굳이 2차를 가자고 했다.
그러고 보니 나를 비롯해 두 명만 일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선배들은 모두가 '은퇴'한 분들이었다.
시간이 상대적으로 널널한 편이었다.
"그냥 헤어지면 서운하니 맥주 딱 한 잔만 하자"며 내 팔을 이끌었다.
그런데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맥주 딱 한 잔이 쉽게 끝날 그 한 잔이 아니란 것을.
한번 자리를 잡으면 길어질 게 뻔했다.
"내일 새벽 04시에 출근해야 하니 정말로 딱 한 잔만 하고 먼저 일어서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에 호프집에 들어갔다.
안주가 나왔고 인원 수에 맞게 호프도 나왔다.
힘차게 건배하며 2024년도, 각 가정의 평안과 개인의 건승을 기원했다.
또 다시 장년 남자들의 거침없는 수다가 테이블 위로 흥건하게 쏟아졌다.
그렇게 20여 분 정도 지나자 내 잔은 깔끔하게 비워졌고, 사전에 얘기했던 대로 나는 외투를 입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로'에서 '산본'까지 지하철로 가야 할 길도 상당히 멀었다.
모든 형제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환한 웃음을 주고 받으며 나왔다.
평소에도 나를 잘 아는 한 분이 따라나오며 내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친 채 한마디를 던졌다.
"아우님. 지금 들어가서 잠간 눈 붙이고 꼭두새벽에 출근하면 잠이 너무 부족한 거 아녀?
내가 아우님 스타일을 잘 알지만 잠을 충분하게 자는 게 건강에 좋을 것 같네"
나를 염려해 주는 형의 따뜻한 마음씨가 읽혀졌다.
진정으로 하는 얘기였다.
그는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빨아들였다.
그의 첫모금이 진짜로 맛있게 보였다.
나는 가타부타 부연하지 않았다.
그냥 밝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한 때는 삼천리 '금수강산'의 온갖 산과 들, 강과 길을 따라 수백 킬로씩 거침 없이 종횡했던 가슴 뜨거운 사내들이었다.
형과 다감하게 포옹을 나눈 다음 혼자 '종각역'으로 향했다.
차장 밖으로 넓고 맑은 '한강'도 보였고, 여의도의 수많은 '마천루들'이 어둠속을 빠르게 스치며 지나갔다.
피곤한지 몇몇 승객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보며 '묵언수행' 중이었다.
그 모습들이 대개 비슷했다.
일제히 전철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저마다 고개를 숙인 채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며 긴 '동안거'에 든 수행자들 같았다.
너무 막나가버린 비약인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헤설픈 웃음이 터졌다.
전철은 빠르게 어둠 속을 뚫고 앞으로 달려갔다.
자리가 있었지만 일부러 앉지 않았다.
오랜만에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아까 그 형의 말처럼 잠, 그 놈의 잠이 문제야. 아내한테도 늘 듣는 얘기니까. 제발 잠 좀 많이 자라고. 후후후"
"다음 달이면 결혼 34년차로 접어드는데 이 나이에도 계속 듣는 거의 유일한 '충고'니까. 그런데 어쩌랴, 팔잔데"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좌우명'이나 삶의 '원칙'을 갖고 산다.
나에게도, 내 혈관을 타고 뜨겁게 흐르는 삶의 지표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잠은 무덤 안에서도 충분하다"
옳고 그름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냥 서로의 '가치관'이나 '철학', 그리고 '삶의 루틴'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실제로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 뿐이다.
'생각'이 다르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다르면 '운명'이 달라진다고 했다.
격하게 공감한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연락하지 않으며, 아무도 성가시게 하지 않는 절대 진공같은, 고요와 침잠의 새벽시간.
나에겐 돈보다 더 귀하고 값진 '영혼의 정화'이며 '하루의 출발점'이다.
사랑할 또 다른 하루를 선물로 받는 은총의 '세례시간'이다.
그 서너 시간의 '큐티'와 '기도'는 나머지 하룻 동안의 시간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내겐 소중하고 의미있다.
벌써 삼십 년 하고도 몇 년째 지속해 온 경건한 '새벽의식'이며 소망으로 아침을 여는 '함묵의 시간'이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맑은 정신으로 '절대자'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며 그 교제의 편린이나 공감의 흔적들, 때로는 결기어린 서원을 기록하기도 하고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두기도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가만가만 내 주변을 살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웃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리하여 소리 없이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맞잡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내겐 무척 귀할 수밖에 없다.
함부로 찍어왔던 나의 어지러운 발자국들을, 성찰의 마음으로 뒤돌아 볼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하고.
사랑발전소 회원님들.
오늘도 행복한 목요일이 되길 빈다.
아자 아자 파이팅.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잠은 무덤 안에서도 충분하다
공감이 갑니다.
그래도 가끔 어쩌다 한 번은 잠에 빠져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듯 하네요. ㅎㅎ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