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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3)
고전 1:18-25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 설 교 >
전도는 구원의 능력
고전 1:18-25 / 김상복목사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린도전서 1:18~25.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운데 많은 곡을 작곡한 존 뉴튼이라는 영국의 작곡가가 있습니다. 그분이 쓴 글을 보면 천국에 가면 놀랄 일이 많은데 그 중에 특별히 다음 세 가지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째는 “저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 왔지?”하는 사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사람은 확실히 천국에 왔을 텐데!”하는 사람이 없어서 놀랍니다. 셋째는 “아! 내가 천국에 왔다니! 이 엄청난 하나님의 나라에 내가 왔구나!” 자기가 천국에 온 것에 놀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천국에 가서 여러분이 천국 간 것에 놀라고 감탄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실 놀랄 것 없는 당연한 일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 때문에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로써 천국 갈 것을 믿습니다.
어느 아내가 남편에게 같이 교회에 가자고 아무리 말을 해도 남편이 듣지 않았습니다. “나 혼자 천국가면 안되는데!” 아내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 남편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의 마음을 움직여 주시옵소서.” 통곡하며 금식기도를 했지만 남편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자꾸 울고 칭얼대니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모양이야.’ 이렇게 생각한 아내는 어느 주일 아침, 남편의 구두를 교회에 가지고 와서 자기 옆에 놓고 “하나님! 제 남편의 구두가 먼저 왔습니다. 이 구두를 따라 남편도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울며 기도할 때는 응답이 안되었는데 하나님을 웃기니까 그 다음 주일부터 남편이 교회에 나왔다는 겁니다.
눈물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발상의 전환을 통하여 하나님을 웃기니까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처럼 기도를 하면 온갖 종류의 상상력이 다 쏟아져 나옵니다. 나 혼자로는 나의 작은 머리, 작은 생각, 작은 믿음 정도뿐이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면 하늘 문이 열립니다. 온갖 창의력이 발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음이 열리니까, 객관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관적이던 인간이 객관적이 되고 닫혔던 인간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 우리는 인생의 수많은 가능성들을 깨닫고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을 좀 더 성공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담이 있으면 “아이고, 길이 막혔네.”하고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의력을 주시면 그 담을 뛰어 넘어갈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고, 밑으로 파고 갈 수도 있고, 다이너마이트로 폭발시키고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계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영혼이 열리고 하늘 문이 열리면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들을 보면서 이 땅에서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을 마칠 때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믿지 않고 멸망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시시해 보이고 ‘왜 저렇게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나?’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구원 받은 우리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고 열린 귀로 들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십시다. 모든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은 하나님만이 열어 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모든 인류에게 희망을 줍니다.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셔서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저 하늘나라에 다 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만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절).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두가 구원 받도록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잠시 후면 죽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알 수가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한 하늘의 세계, 영원한 세계, 하나님의 세계를 알아 낼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인간 중에도 지혜로운 사람들이 많지만 인간의 지혜는 인간을 영원히 구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 지혜로운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 중에 소크라테스는 그리스문명의 꽃이었습니다. 서양의 세계관과 많은 사상들이 BC 4-5세기의 사상가 소크라테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너무 머리가 좋고 지혜로워서 그 당시 아테네의 귀족들과 권력자들이 소크라테스를 자기 집에 모셔다가 자녀들을 교육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침에 집을 나와 이집 저집 다니며 아네네의 젊은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소크라테스를 한 번 모시는 것은 집안의 큰 영광이었으니까 아이들을 1시간이라도 가르쳐 주면 그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스크레데스는 아침부터 이 집, 저 집을 다니면서 조반, 접심, 저녁을 잘 먹으며 매일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매일 잘 먹고 다니는 지혜자 소크라테스가 집에 올 때는 자기 부인에게 먹을 것을 하나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부인은 소크라테스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당신만 먹고 다니고, 나 배고픈 것은 모르냐?” 세상의 지혜로 최고인 사람이 자기 아내 먹을 것도 못 챙겼다는 겁니다. 철학자의 머리가 거기까지는 미치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최고의 지혜자요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는 젊었을 때 인기가 많았습니다. 아테네에서 최고의 미인과 결혼했습니다. “당신, 나하고 결혼해요. 당신은 머리가 제일 좋고 나는 미모가 최고이니 우리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당신의 머리와 내 얼굴을 닮은 최고의 아이가 나올거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렇겠소. 그런데 당신의 빈 머리와 내 못난 얼굴을 닮은 아이가 나오면 어떻게 하오?” 이래서 결혼 초부터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 지혜로운 사람이 그저 입이나 다물고 있었으면 좋을 뻔 했는데…. 소크라테스의 악처 이야기는 그래서 유명하지 않습니까? 지혜로운 소크라테스도 자기 부인 하나조차 구원하지 못했어요.
동양에서는 소크라테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공자가 중용의 사상을 설파했습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라.” 참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극단적인 사람들이 온건하게 되는 사상을 중심으로 유교가 일어났습니다. 한국도 유교사상을 받아 들인지 1,500년이 되었습니다. 공자 역시 소크라테스처럼 아내와의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합니다. 집밖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좋아했으나 아내는 그를 죽어라고 미워합니다. 공자님께서 상당히 까다로운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특히 자기 옷에 대해서 까다로웠던 같아요. 옷이 조금만 구겨져도 마구 아내에게 야단을 쳤습니다. 남편한테 항상 야단을 맞는 아내는 속이 상했지요. 공자는 유교 시스템을 통해 여자를 완전히 남자의 소속물로 만들어 놓았어요. 여자를 영원한 이등국민으로 여기게 한 것입니다. 그분이 비록 지혜가 있었지만 한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있으나 자기 아내를 제대로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통해 “모든 고통은 욕심에서부터 출발한다. 욕심을 모두 버리라.”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욕심을 버리려고 노력하고, 참선을 하면서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평안이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불교에는 환생이라는 것이 있어서 고생스런 이 땅의 삶으로 또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고 또 돌아와야 합니다. 억겁을 거쳐 내가 100% 모든 욕심을 다 버릴 때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욕심이 남아 있으면 부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인간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죽어서 잘못한 것들의 대가를 지불하고 또 돌아오고 또 돌아오면서 고난의 인생을 계속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합니다. 평화는 있으나 구원은 없습니다. 영생에 관한한 희망이 없습니다.
앨버트 까뮈, 앙드레 말로, 장 폴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20세기 중반에 그 시대의 철학으로 대단히 유명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서는 최고였습니다. 이들의 사상은 허무와 절망, 고독과 무의미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의미가 없다. 인간은 그저 던져진 한 줌의 흙과 같은 존재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 없고, 그저 무의미하게 이 땅에서 살다가 죽어 없어지는 존재이다. 그러나 모두 알아서 살라.” 하나님이 없으니까 인간을 절망과 허무에 빠뜨렸습니다. 인간을 고독으로 떨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그 지혜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인간의 현실을 직시했고 노벨상까지 안겨주었지만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했습니다. 고독과 허무와 불안에 대한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최고의 지혜, 세상의 지혜도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했습니다.
“월 스트리트 저널”은 미국 사람들이 우울증 보다 불안증에 더 시달리고 있어서 불안을 잠재우는 약이 지금 제일 많이 팔리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요, 경제와 정치가 가장 안정된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불안에 떨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두려워서 잠을 잘 수 없는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불안과 걱정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시편 55편).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그에게는 부르짖을 하나님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그에게는 믿음과 확신이 있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려라. 그가 너를 붙드시리라.”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찾은 다윗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영생을 알고 천국을 알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영원한 영생뿐만 아니라 삶의 안정을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으로 떠올랐던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 유물론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켰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혔습니다. 인류를 구한다고 장담하던 마르크스와 레닌의 그 철학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은커녕 무고하게 죽어갔습니까?. 지금은 소련연방도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로서 남은 것이 쿠바와 북한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최고의 유물사관 철학을 가졌다는 사람들은 결국 북한마저 저렇게 처참한 나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지혜, 세상의 지혜는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천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상천국을 꿈꾸어도 지옥을 만들어 놓고 마는 것이 인간의 지혜입니다.
때로는 이 세상의 작은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일시적인 세상의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알지 못하고 죄 사함을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루미 한 마리가 좋아하는 먹을거리인 달팽이를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백조 한 마리가 하늘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내려와 앉았습니다. 두루미가 백조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누구냐?” “나는 백조야.” “어디서 왔어?” “하늘에서 왔지. 저 하늘에는 엄청나게 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너무 많아. 너 그 하늘에 가고 싶지 않니?” “천국에는 내가 찾는 달팽이가 있어?” “아니. 달팽이는 없어. 하지만 달팽이 보다 더 좋은 보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말을 들은 두루미는 “내가 좋아하는 건 달팽인데, 달팽이가 없는 곳에는 안 가!” 했답니다.
달팽이 때문에 그 엄청난 천국에 안 가겠다고 하는 두루미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쾌락, 세상의 좋은 것, 그 작은 것에 붙들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여러분 주위에도 많이 있지요? 여러분과 저도 옛날에 몰랐을 때 세상의 작은 것에 붙들려 영원한 축복을 누리지 못할 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하셔서 천국의 길을 알게 하신 것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다.
사람은 아무리 지혜롭고 머리가 좋아도 스스로 인간을 영원히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멸망하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단번에 덮으셨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우리가 전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 형제, 가족, 친구들이 듣고 예수를 믿어 이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 누구든지 천국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본문을 봅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저 종교에 열심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바랍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22절). 지혜 있다 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지식과 철학을 찾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23절).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을 죄에서부터 구원하시고 죄의식과 죄의 세력에서 구원하시고 죄의 결과인 영원한 지옥으로부터 단번에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소식을 여러분의 가족들이 들어야 됩니다.
다음 주일 ‘이웃초청 사랑의 잔치’에 여러분의 가족들을 데리고 오십시오. 2,3부는 김장환 목사님께서 복음을 전하실텐데 꼭 와서 이 복음을 듣고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구원 받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셨는데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고 영생을 소유하고 이 땅에서 살다가 인생이 끝날 때 전부 다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어느 환자가 병이 심하여 그냥 두면 죽게 생겼습니다. 의사가 정확하게 진단을 하고 처방을 했습니다. “당신의 병은 이러한데 이 약을 먹으면 낫습니다.” 환자는 “의사 선생님께서 내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셨고 나에게 처방을 내려서 이 약을 먹으면 낫는다고 했어! 이 약을 먹으면 낫는대!” 그러면서도 정작 약은 먹지 않는 것입니다. 약을 먹어야 삽니다. 처방과 진단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처방대로 지어진 약을 내가 먹어야 죽을병이 낫습니다. 진단과 처방은 내려졌습니다. 이제 약을 내가 먹어야 삽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요, 영원한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선물은 영생이니라”(롬6:23). 죄인의 마지막 결과는 지옥인데, 하나님이 친히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지옥에 가야 하는 이유는 죄 때문인데,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해결해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음으로써 모두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지체 말고 오십시오. 남편이 예수를 믿는다고 아내가 따라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그 처방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직접 구원의 약을 먹어야 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친구는 친구대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다음 주일에 혼자 오지 마시고 누군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이 자리에 데리고 와서 그가 복음을 듣고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축복이 꼭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
고전 1:18-25 / 안효관목사
고대 그리스 소크라테스 시대에 알치비아데스(Alcibiades)라는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부유하고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고, 준수한 외모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머리가 굉장히 좋아서 소크라테스도 그의 외모와 학식을 흠모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좋은 배경과 좋은 머리를 잘못된 곳에 사용해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20살이 갓 넘었을 때 이미 정치적 야망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장군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전쟁에 나가 용맹스럽게 싸웠습니다.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자 그는 점차 명성을 얻게 되었고, 뛰어난 언변술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대신에 다른 사람이 장군으로 뽑히자, 그는 교활한 방법으로 장군으로 뽑힌 사람을 모함해서 자신이 장군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게 그의 나이 30세 때 일입니다. 장군이 된 후 그는 능숙한 언변과 타고난 카리스마로 아테네의 젊은 군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5년 후 35살 때 이웃 섬나라 시칠리아(Sicilia)를 점령하기 위해서 출전을 합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날은 축제일이었는데, 술에 취한 군인들이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헤르마’라는 신상을 모두 파괴해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아테네 시민들은 두려움에 빠졌고, 알치비아데스는 헤르마 모독 사건의 주동자로 고발을 당하게 됩니다. 비록 시칠리아 점령에는 성공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재판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국 아테네로 돌아오지 못하고 아테네의 적국인 스파르타로 도망을 갑니다. 스파르타에서 그는 명석한 머리로 자신을 도망치게 만든 조국 아테네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술로 왕비를 유혹하려다가, 이를 왕이 눈치 채자 페르시아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거기서도 그는 아테네의 반정부군에 가담을 하지만, 아테네의 반정부군이 승리를 거두자 그는 반정부군에게마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반정부군에게 내쫓긴 알치비아데스는 이번에는 아테네 정부군으로 들어가 아테네를 위해 싸우지만, 그가 이끈 군대는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아테네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무리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테네를 큰 혼란에 빠뜨립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웃나라로 도망가게 되고, 거기에서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불과 46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알치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도 흠모할 정도로 많은 학식과 지혜를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정치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변절에 변절을 거듭하다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습니다. 타고난 좋은 머리를 좋은 곳에 쓰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사용하다가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알치비아데스처럼 좋은 머리와 지혜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지혜 때문에 스스로 무덤을 판 경우를 가르켜서 ‘휴브리스’(Hubris)라고 합니다. 휴브리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입니다. 탁월한 지혜를 가졌지만 교만했기 때문에 제우스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인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1889-1975)는 ‘과거에 성공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방법을 우상화하다가 실패한 경우’를 이 휴브리스에 비유했습니다.
때로 우리 인간의 지혜가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전도서 10: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그러나 그 지혜가 때로 우리의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의 노예가 되어버리면 그 지혜는 우리를 성공하게 만들어주기는커녕 우리 스스로를 패망케 하는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든지 지혜를 추구해 왔습니다. 나름대로의 지혜를 갖추고 있었고,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참된 지혜는 그 지혜가 영원한 것도 아니요, 절대적인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잠언 9:10)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참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라 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하지도 않고, 그것은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의 부족함을 깨닫듯이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의 약함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참된 지혜의 근본을 알지 못할 때 인간은 휴브리스(지혜를 가진 자 같으나 결국에는 그 지혜가 자신을 멸망시키고 마는)가 되고 맙니다.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그래서 헬라에서 철학이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21절)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지혜를 가진다 하더라고 영생의 길을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의 한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은 세상 지혜로 한다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 중에서도 중죄인을 처형하는 그 십자가가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주신 제사의 방법도 아닙니다. 그저 잔혹한 십자가일 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 지혜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어 보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지혜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쩌면 그 방법이 너무 쉽기 때문에 우리는 무시해버립니다. 뭔가 힘들고 어려운 방법이라면 사람들이 더 많이 관심을 가질텐데, 너무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듯 쉬운 방법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21장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할 때에 힘든 길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가까운 길로 가면 좋을텐데 왜 이렇게 힘들게 먼 길로 돌아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과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내려주신 음식들도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불뱀을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셨습니다. 그곳 아라비아 반도와 시내 반도의 광야에 서식하는 이 불뱀은 맹독성 뱀입니다. 한 번 물리면 강력한 독성으로 인해 불에 데인 것처럼 온 몸에 열이 나고 극심한 통증으로 고생하다가 죽게 됩니다. 이 불뱀이 나타나서 백성들을 물자 백성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모세에게 ‘이 뱀들이 떠나도록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물려 고통 가운데 있는 백성들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아놓고서 그것을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민수기 21:9)
놋뱀에 물려 고생하던 사람들에게 제시된 방법은 너무 쉬운 것이었습니다. 어떤 약을 바르라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약초를 캐다가 즙을 내서 하루나 이틀 정도 싸매고 있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장대 위에 매달아 놓은 놋뱀을 쳐다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놋뱀에 물려 열이 나고 고통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나을 것입니다.
성경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당시 정황을 유추해 본다면 불뱀에 물린 많은 사람들이 주저하지 않고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진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놋뱀을 쳐다보라. 그러면 살리라’고 외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을 것입니다. 그 방법은 불뱀에게 물린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 아니었고, 치료의 방법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대로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아나자, 여기저기에서 고통에 신음하던 사람들이 놋뱀을 쳐다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한다면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살아나기 위해서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방법입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방법이고 어리석은 짓처럼 보이지만, 그대로 한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너무 쉬운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너무 쉬운 방법이라는 것 때문에 그것을 외면합니다. 더 멋진 방법, 더 복잡한 방법을 찾아내려 합니다. 가장 단순한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임에도 자신의 지혜를 뽐내고 싶은 우리 인간은 더 멋진 방법, 더 복잡한 방법이어야 한다고 고집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방법을 보지 못하고, 정말 최고의 방법을 놓쳐버리곤 합니다.
십자가의 방법이 그렇습니다. 너무너무 쉬운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위에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만 믿으면 됩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 위에 나를 못 박아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 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방법으로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너무 쉽기 때문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한 가지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무너무 쉬운 방법을 주시기 위해 당신은 너무너무 힘든 방법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만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내놓으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의 생명의 값으로 우리에게 가장 쉬운 구원의 길이 열려진 것입니다. 내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고, 내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참혹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싶지 않는 방법이었습니다. 여러분, 자충수(自充手)라는 말을 아십니까? 바둑이나 어떤 운동 경기에서 자신이 선택한 방법이 결국에는 자기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거나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주는 것을 자충수라고 합니다. 십자가의 방법이 그렇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쉬운 방법이지만, 하나님께는 자충수였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방법이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당신은 눈물을 흘리셔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풍요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은 가난한 자리에 내려오셔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이었고,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8:9) 그렇습니다.
-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심은 이 죄악된 세상에 사는 우리로 하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 안에서 부요한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 예수님께서 율법 안으로 들어가심은 우리로 율법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 예수님께서 친히 핍박과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세상의 핍박과 고난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로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지혜는 그것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평가합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당신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을 어리석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을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이 친히 가난하게 되심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친히 사슬에 묶인 바가 된 그분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 친히 종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분의 사랑을 어리석고 헛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의 지혜로 평가하면 모두 어리석은 것 뿐입니다. 세상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본문 18절에서 선언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일 뿐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만큼 큰 능력은 없습니다. 그 능력을 경험해 보지 않는 사람은 그 십자가의 은총이 얼마나 귀한 것이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 능력 안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 십자가의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십자가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 깊은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붙잡혀 많은 고난을 당하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된다.”(마태복음 16:21)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좀 더 일찍 그 십자가가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고, 그 하나님의 방법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는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님의 발걸음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가롯 유다는 절대로 예수님을 팔아먹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때 예수님께서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이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것으로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의 지혜, 세상의 방법으로 생각하니까 예수님께서 잘못 선택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은 인간의 그 어떤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의 지혜에 비추어보면 어리석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안에 들어와 살아가는 우리는 십자가보다 더 큰 능력, 더 큰 사랑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도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우리는 십자가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 끝에 세상이 추구하는 그 어떤 명예나 부귀영화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따라가는 삶 그 끝에 어떤 커다란 상급이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동화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깊은 숲 속에 아주 키가 큰 소나무와 다람쥐가 있었습니다. 이 다람쥐는 큰 소나무에서 놀곤 했는데, 어느 날 소나무가 다람쥐에게 말했습니다. “다람쥐야, 제일 높은 가지 끝에 귀한 보물이 기다리고 있단다.” 다람쥐에게는 소나무 자체가 보물 같이 아주 귀한 존재였습니다. 거기에 보금자리를 만들었고, 또 매일같이 재미있게 나뭇가지를 타면서 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맨 꼭대기에 진짜 보물이 있다는 말을 들은 다람쥐는 귀가 솔깃해졌습니다.
소나무는 굉장히 큰 나무이기 때문에 그 끝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다람쥐는 귀한 진짜 보물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맨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싶어졌습니다.
다람쥐는 조심조심 꼭대기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올라가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줄기도 두꺼울뿐더러, 가지 곳곳에 열매가 많이 있어서 먹을 것도 걱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점점 높이 올라가자 나뭇가지는 점점 가늘어지고,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자 다람쥐는 힘이 빠졌습니다. 그래도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붙잡고 조금씩 조금씩 올라갔습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나뭇가지가 휘청거립니다. 금방이라도 나뭇가지가 부러져 떨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찾아오자, 다람쥐는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로 저 꼭대기에 올라가면 귀한 보물이 있는 것일까? 내가 괜한 짓을 한 것은 아닌가? 그냥 내려갈까?’
그러다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라고 생각하며 위를 쳐다보자 꼭대기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금 힘을 내서 맨 꼭대기를 향해 올라갔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져 다람쥐는 너무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주변에서 다른 다람쥐들이 놀려댑니다. ‘너는 왜 열매도 없는 나무 꼭대기에 오르려고 하는 거니? 괜한 고생 하지 마!’ ‘저 꼭대기에 보물이 있대.’ 다람쥐는 그렇게 대답하며 조금씩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갔습니다. 맨 꼭대기에 가까이 다가섰지만, 보물은 고사하고 열매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는 나뭇가지 끝에 다람쥐가 매달려 있자 나뭇가지는 흔들렸고, 더구나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다람쥐는 곡예를 하듯 공중에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아무리 나뭇가지 끝을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보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크게 실망한 다람쥐는 머리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굉장한 광경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넓고 아름다운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다람쥐는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동서남북 사방을 저 멀리까지 둘러보았습니다. 태어나서 이렇게 멋있고 황홀한 광경은 처음이었습니다.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덧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조심조심 소나무 아래로 내려온 다람쥐는 친구들에게 그 멋진 광경을 하나하나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보지 못한 다른 다람쥐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열매도 없는 소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던 어리석은 다람쥐는 생애 최고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나뭇가지를 타고 오를 때에는 다른 다람쥐들이 어리석다고 놀리고 조롱했지만, 그는 꼭대기에서 자신이 받은 조롱보다 더 멋지고 값진 보물을 안고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 때 때론 힘들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고독할 수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리석다고 놀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값진 보물이 있습니다. 세상의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물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얻는 보물이 아니라 세상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발견하고 얻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마가복음 8:34, 38)
여러분, 하나님께 부끄러움을 당하시렵니까?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당하시렵니까?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믿고, 그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다고 놀림 받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느냐고 조롱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사는 사람을 세상 사람은 어리석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 사는 사람은 분명 세상 사람들보다 더 지혜로운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최후의 승리자, 최후에 웃는 자는 세상의 지혜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도
고전 1:18-25 / 김태복목사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도(道)’는 살 길을 추구하는 진리나 도리를 말합니다. 한 마디로 기독교의 출발은 십자가요, 기독교의 기초도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서 출발해야 부활이 나오고, 부활을 통해야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이 땅에서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다가 주 앞에 가서 칭찬과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와서 충성을 많이 한다 할지라도 아직 기독교의 문에 들어서지도 못한 자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더 쉬운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가 찬송가를 부르면서 십자가라는 말만 나와도 가슴이 젖어져야 합니다.
그처럼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는 아무 때에 생각해도 우리 마음을 감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인들은 가장 진실한 모습을 보이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십자가를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존 핏셔는 중세기의 순교자입니다. 1535년 사형대에 오를 때에 병세가 얼마나 심했는지 계단을 기어올라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두 팔을 펴고 구경꾼들을 향해 외치기를 “주님을 바라보고 빛을 받으십시오. 주님은 여러분들을 대신해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지금 교회에 출석하고 계시지만, 아직도 십자가에 대한 감격이 없는 분들은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심으로 반드시 십자가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1. 십자가에는 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18절에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고, 24절에도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보석처럼 여기는 십자가의 가치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표적을 중시 여기는 유대인들이나 지혜를 중시여기는 헬라인의 입장에서 십자가를 미련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가장 극악한 죄인들이나 처형당하는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예수님을 오히려 십자가에서 생을 마친 실패자요, 동시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여겼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영생의 문을 여는 열쇠인 십자가를 하찮게 여김으로 멸망하는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광물학자가 아프리카에 갔을 때, 아이들이 공기 돌을 하면서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돌들은 금강석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과자를 주고 금강석과 바꾸었고, 다시 돈 많은 부자와 함께 아프리카에 내려가 금강석 광산을 개발함으로 독일의 부강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아프리카 사람들은 땅을 치며 통탄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심판 날에 우리 신자들은 십자가 공로만 의지하고 천국 문에 들어가지만, 십자가를 믿지 않던 자들은 지옥으로 끌려가면서 땅을 치면서 통곡할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십자가를 얼마나 지겹도록 보았는가? 아니 어느 때는 십자가를 목걸이를 하고 다니지 않았는가?”라면서 후회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네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1)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온 인류가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자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감사보다는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불뱀의 징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뱀에게 물리는 자마다 죽었습니다. 모세는 보다 못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장대에 구리뱀을 매달으라고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자마다,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는 자는 기적적으로 다 고침을 받고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 구리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오늘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구원받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십자가는 화목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두 개의 나무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세로목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가로목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원수의 관계였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끝없는 살인과 약탈, 전쟁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로목과 가로목 중앙에서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그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고 더 나가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적십자사의 마크가 될 정도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사랑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3)십자가는 치료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보면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마태가 인용하면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모친인 헤레나가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골고다 언덕을 가 보기를 소원해서 신하들이 모시고 골고다 언덕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교도들이 십자가에 처형된 흔적을 없애기 위해 갈보리 산은 돌과 흙무더기로 덮어 놓았고, 한쪽 모퉁이에는 미(美)의 여신 비너스상을 세워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헤레나는 수행원들에게 삽과 괭이로 흙더미를 파헤치라고 명했습니다. 그 결과, 3개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되였습니다. 그런데 똑같아서 어느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인지 분별하기 어려웠습니다. 때마침 함께 동석했던 예루살렘 주교가 많은 병자들을 데리고 와서 그 십자가 하나하나에 손을 대 보게 했습니다.
첫 번째 십자가는 손을 대어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 십자가에 환자들이 손을 대자,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병세가 더 악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세 번째 십자가에 환자들이 손을 대자, 순간적으로 병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손을 댔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던 첫 번째 십자가는 회개한 강도 디스마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것은 예수님을 저주한 왼편 강도가 매달린 것이었고, 세 번째의 것이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황후 헤레나는 감격에 넘쳐 십자가를 부여안고 입을 맞추며 눈물을 흘리며 ‘할렐루야’ 찬송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건강이 나쁜 분들이 계십니까?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 여러분을 위해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며 찬송을 계속 부르십시오. 어느 순간부터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이 터지고 생명의 기쁨이 솟구치면서 병 고침의 놀라운 역사가 몸 안에 나타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4)십자가는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승리하는 능력입니다. 골2:15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 권세에게 패배 당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세상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시고 사탄 마귀를 십자가로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올라가셔서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마침내 승리자가 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십시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능력을 통해 구원 받는 자, 화목 받는 자, 병 고침 받는 자,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십자가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까?
(1)하나님이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26절을 보십시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 했습니다. 많은 분들은 교회 나오게 된 동기를 사람인 것처럼 말합니다.
자기 스스로, 혹은 부모님이나 아내 때문에, 혹은 친구나 누구의 전도 때문에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우리가 교회 나온 것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나를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셔서 아무 공로 없는 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기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은 대부분이 신분이 낮았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천한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물론 회당장 그리스보 같은 이도 있었고, 고린도 성의 재무를 보던 에라스도 같은 이도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귀족 계층의 사람과 상류 계층의 사람이 얼마만큼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와 반대로 당시 고린도 시에는 노예가 얼마나 많은지, 70만 명의 인구 중에서 약 3분의 2에 이르는 숫자가 노예였습니다.
고전7:21에 보면 고린도 교회는 이 빈한하기 짝이 없는 노예들이 많이 출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으로 뛰어난 분들보다는 가난한 자, 병든 자, 가지가지 고통의 문제를 안고 나온 자들이 교회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메시아인지 알고 싶다고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통해서 문의해 왔을 때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변하셨습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을 더 하시기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식이 높은 자나 부자, 지위가 높은 자나 문벌 좋은 자들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으십니까? 아닙니다. 누구나 부르시지만, 많이 배웠고 많이 가졌다는 자들은 교만 때문에 그 부르심을 대부분 거절한 것입니다. 오직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이 부르심을 받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현재 지위나 물질이나 능력 등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면서 떵떵거리며 사는 자들에게 십자가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런 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깨어지게 만드신 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사실, 바울은 학벌이나 문벌이나 능력이나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부르실 때에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게 하신 후에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모태부터 믿는 사람이라도 평안할 때는 십자가를 지식으로만 알 뿐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진로나 사업의 위기, 가정이나 건강의 위기를 만났을 때, 심령이 곤고해지면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했습니까? 그런 분들은 진정 하나님의 크신 복을 받은 사람들인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십자가에 자아를 못 박고 주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슨 말씀입니까? 자기의 능력이나 세상의 것들을 의지 하지 말고 철저히 주님의 능력만 의지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페하리라 하셨으니”
더 나가서는, 20절부터 교만한 자들에게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변사가 어디 있느뇨”라면서 강하게 비판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28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에 천한 자들, 멸시 받는 자들, 없는 자들을 부르신 이유가 교만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의도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천한 자, 멸시 받는 자들, 없는 자들에게 능력을 부어주심으로 세상 것으로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깊은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는 로마 사회에서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영토에도 노예가 얼마나 많은지 6천 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 인구의 3분지 1에 해당되었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짐승 취급을 받았습니다. 여인들을 성희롱의 대상을 삼기 일 수이고, 가축처럼 시장에 내다 팔고 샀습니다. 심지어 ‘심심해서’ 노예를 죽이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들은 자주 목숨을 걸고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습니다.
그 결과, 노예들을 통해서 로마가 복음화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짐승이나 다름없던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함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외양간 같은 곳에 모여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는데 자기들을 학대하는 주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로마 관리나 주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체포해서 고문하거나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심지어는 시민들의 구경꺼리로 원형경기장에서 노예들을 맹수와 싸우게 하기도 하고 끝까지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자들은 십자가에 달고 기름을 부은 다음, 화형식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잔인한 로마 시민들은 그들이 살려도 몸부림치는 모습이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기독교인들은 로마 시민을 향해 욕하기는커녕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찬송 부르며 웃는 얼굴로 순교를 당합니다. 로마인들은 세계 일류 민족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높은 학문과 관용, 뛰어난 용맹과 예의범절이 가장 특출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짐승이나 다름없는 노예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얼마나 언변도 뛰어나고 죽음도 초개처럼 여기는 용기를 가졌는지, 무엇보다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하는 자기들을 위해서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모습 앞에는 로마 시민들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오늘 말씀대로 천한 것들, 멸시 받는 것들이 소위 귀하다는 자들을 너무나 부끄럽게 만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로마인들이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변하게 만들었고, 무엇이 저들을 그처럼 높은 수준의 인격을 갖춘 자들을 만들었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능력이 이런 역사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고 로마인들이 기독교에 의해 깨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 자아의 교만을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주님의 능력만 의지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십자가의 강한 능력을 체험할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주님만 자랑해야 합니다.
31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도 고린도 교회에는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들보다는 로마의 식민지 아래서 고통당하며 사는 분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런 교인들 가운데 그래도 세상적으로 보면 지위나 재산, 학벌이나 문벌이 뛰어난 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의 일부가 자기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착각한 것이 교회 문제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선택 입은 사람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모양 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결코 세상 것을 가지고 교만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하심으로 세상의 강한 자들을 무색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가난하고 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유가 29절에 나옵니다.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교회를 인도하시기를 원하시기 위해,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자들을 능력으로 붙들어 주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고린도 교인들은 은혜 받을 때에는 자기들 같이 천하고 부족한 인간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부르시고 그 능력으로 강하게 만들어 주셨음을 감사하고 주님의 은혜만 자랑하더니, 첫 사랑을 잃었는지 세상의 것으로 서로 자랑하고 반목합니다. 더 나가서는 그동안 겸손히 충성하던 분들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기 시작함으로 분열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교만들을 가장 앞세우고 있으니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의 고백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야말로 자랑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입니다. 그는 종교적으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가마리엘 문하생으로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이요, 당시에 아무나 가질 수 없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상류 사회 사람이었습니다.
단연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히 변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깊이 체험한 후에는 깨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녹아진 뒤부터 지금까지 최고로 여기던 모든 것들, 율법이나 높은 학벌, 문벌이나 로마시민권을 다 배설물처럼 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교만할 때에는 하나님이 전혀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한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주님만 전적으로 의지할 대는 강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자기는 한없이 연약한 인간임을 고백하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더 나가서는 바울이 자기를 위해 버린 모든 것들을 활용하셔서 이방 선교와 성경 기록 등,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들을 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로마 시민권도 선교를 위해서 쓰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 같은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자랑은 배설물처럼 버리고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높이는 삶을 살아 보십시오.
그 때 하나님은 여러분을 십자가의 능력을 더욱 강하게 쓰실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계 안에 소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분들을 보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세상의 것들을 주님을 위해 배설물처럼 버리기는커녕, 어디 가서 가짜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돈으로 총회장이나 교계 이름 있는 자리를 사다시피 합니다.
명함을 받아 보면 얼마나 맡은 일들이 많은지 깨알 같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습니다. 교계 지도급에 있는 분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탓인지, 많은 교회들 안에도 그런 한심한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니 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주님만 높이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프랜시스 회중 가운데 한 경건한 수도사가 영 안이 열려 천국 보좌 가운데 빛난 좌석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저 보좌를 차지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천사가 대답하기를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어 쫓겨났는데 하나님께서 겸손한 프랜시스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나 신기하여 프랜시스를 시험하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선생과 같이 길을 걷게 되었다. “선생님은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생각합니까?” “나는 세상사람 중에 제일 악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말이 진실치 못합니다. 세상에 악한이 많은데 어찌 그런 자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악한이 적지 않지만 내가 받은 은혜를 저들이 받았다면 나보다 만 배나 주를 사랑하고 봉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어찌 그들에게 비교할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들은 제자는 프랜시스의 겸손에 감탄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철저히 자기를 못 박고 주님만 높이십시다. 자랑을 하되 오직 주님만 자랑하고 높이어 보십시다. 그 때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은 참으로 그런 사람을 존귀히 여기어 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 지신 십자가
>성경본문|
고전01장 18절 ~ 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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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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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김삼환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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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크게 두 가지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지만 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입니다. 없는데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만물 속 에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권세와 권능을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 의 하나님을 우리는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분은 가장 높고 영원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류 는 세세토록 만물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이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아래 질서 있게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 위에 그 아들을 못 박히게 하시면서 우리를 구속해 주신 그 은혜는 골고다 작은 언덕 위에 못 박힌 그 하나의 장면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골고다 위의 십자가 사랑은 우리가 형 언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 온 인류의 사랑을 모두 합하여도 하나님의 사랑과 비 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크신 사랑입니다. 그래서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 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쓸 수 없다고 찬송가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우리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사랑, 골고다 위에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이 사랑을 늘 찬양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위대 하고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주신 하나님의 사 랑, 이것이 성경에 가장 대표적인 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가장 큰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 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버림받고, 쓸모없고, 파괴되고, 온갖 불의와 죄악으로 종노릇하고 더러워진 우리 인간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아 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 마침 서울에 청계천이 복원되었습니다. 아주 악취가 나고 더러운 것, 사망의 무서운 독이 흘 러내리는 냄새나는 이 청계천이 이번에 복원되면서 맑은 물이 흐르고 물고기들이 올라옵니다. 철새들 이 날아오고, 꽃들이 피고, 완전히 복원되었습니다. 새로워진 것입니다. 외국 관광객도 청계천만 보 기 위해서 일 년에 백 오십만 정도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청계천에 대해서 미군들도 미국에서 한국 올 때 아예 그런 지시가 내린다고 합니다. 청계천은 가지 마라. 그 청계천 고가가 아주 위험했다고 합 니다. 위험한 곳, 냄새나는 곳, 완전히 버림받은 청계천이 살아난 것입니다. 아름답게 회복이 된 것입 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쓸모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완전히 복원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처음 청계천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음 자녀로 만들어 주셔서 이전 것 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주의 보혈의 은혜입니다. 주의 십자가의 능력인 것 입니다. 그 아들의 피로 우리의 모든 더러움을 씻으시고 정결케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 어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9장 2절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 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어두운 땅에 빛이 비추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사망이 떠나간 것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므로,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시므 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 물을 나누는 즐거움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곡 식을 거두는 즐거움은 이 세상에 가장 큰 즐거움이요, 전쟁에 승리하고 탈취 물을 가지고 들어오는 이 기쁨은 구속의 기쁨, 골고다 십자가 보혈의 기쁨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 대대로 물려받 은 이 죄악은 그 무엇으로도,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조류독감과도 같습니다. 적은 것이지만 에 이즈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파괴하고 파멸하는 이 저주받은 세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 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멸하려는 원수 마귀를 멸하시고 우리를 잡고 있는 사망의 세력을 물리 치시고 우리를 건져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 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 리가 나음을 얻었도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 “ 그가 저주를 받은바 되사 우리를 모든 저주에서 건지셨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를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 모두 인류의 죽음을 그의 죽음으로 하나님께서는 해결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그에게 다 돌 리셨습니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고 그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저주를 받음으로 우리가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은총인 것입니 다. 저는 이런 책을 보았습니다. 스위스에서 어떤 분이 관광버스를 몰고 내려가다가 관광버스 브레이크 가 파열되었습니다. 내려가는데 너무 놀라운 것은 어린 아이가 그 곳에 놀고 있었습니다. 안에 있는 분들도 놀랍니다. 이 운전사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두 말도 못하고 정말 우리 모두가 죽느냐? 저 아 이는 어떻게 하느냐? 이런 긴박한 순간에 있었습니다. 그 때 운전기사는 방향을 트는 대로 이쪽으로 가면 이쪽 다 죽습니다. 낭떠러지에 다 떨어집니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아이 있는 쪽으로 가서 애를 치고 그 아래에 내려가서 섰습니다. 모두 살아나서 우선 감사하며 그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위로 올 라왔습니다. 애가 죽었습니다. 모두 너무 너무 놀랐습니다. 그러나 모두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 은 하나도 안 우는데 운전기사가 우는 것입니다. 운전기사가 비통에 빠졌습니다. 그 아이는 바로 자 기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살리려고 하 나님의 아들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치고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날 살려주세요. 날 왜 버리십니까?’ 하나님 앞에 막 부르짖는 것을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부 르짖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건지셔야 하겠기에 그 아들을 죽이시고 우리를 사망과 저주에서, 그 낭떠러지에서 반드시 죽어야 할 우리를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들의 희 생으로 사는 것이지 내 노력과 선행으로 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끊임없이 십자 가의 은혜를 감사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늘 감사하고 찬양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증거 합니 다. 십자가가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살 수 있습니다. 멸망 받지 않습니다. 주님 께서 오늘도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시고 우리를 살려주시는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 생명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어린 생명은 부모로부터 태어납니 다. 부모의 고통과 아픔을 통하여 한 생명이 태어나듯이 우리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 아들의 아픔과 하 나님 아들의 저주와 죽음, 그 부끄러움과 멸망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입니 다. 인간의 중요한 것은 구원, 속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힘과 노 력으로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찬송가에 있는 대로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말과 뜻과 행 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천국 갈 수 없고 구원함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 다. 기독교의 능력은 오늘 말씀한대로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유대인은 항상 기적을 찾고 로마인 은 지혜를 찾습니다. 헬라인은 로마시대지만 모두 헬라 문명이니까 지혜를 찾습니다. 나라마다 놀라 운 것을 자랑하고 찾습니다. 이집트 사람은 피라미드를 자랑합니다. 캄보디아에 가면 그 사람들도 자 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라마다, 모든 민족이, 개인도 자랑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자랑 은 헛된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을 자랑하고 군사를 자랑하고 일본도 경제를 자랑하고 독일 사람들도 자기들을 자랑합니다. 모든 민족이 자랑합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자랑하는 것으로 우 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온 인류가 바라보는 것으로는 구원의 길이 전혀 없고, 인류의 구원은 하 나님의 아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바라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무한한 능력입니다. 이 세상에 어떠한 저 주와 어떠한 멸망에서도 십자가는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 온 교회는 항상 십자가로 무장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인이 많고 능력이 많이 있을지라도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 는 교회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것보다 십자가는 앞서고 중요한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선교, 의미 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기도,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봉사, 십자가 없는 충성, 십자가 없는 설교, 십자가 없는 부흥,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2천 년 동안 이 모든 세력을 딛고 끝까지 승 리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능력은 바로 십자가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는 아무도 넘어뜨 릴 수 없습니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마귀는 십자가 앞에 멸망을 당했습니 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긴 줄 알았는데 마귀가 오히려 그 곳에 못 박힌 것입니다. 그래서 벌 이 사람 앞에 침을 쏘면 침이 빠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 지만 못 박힘으로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그 못 박힌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시고 못 박힌 그 못에 사탄 이 못 박히고 자기 무기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벌이 한 번만 쏘면 침이 빠져버리듯이 지금 사탄은 아 무 힘이 없습니다. 성경에 ‘사탄아, 너의 이기는 곳이 어디 있느냐?’ 그랬습니다. 사망, 죄, 원수 마귀 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끝난 것입니다. 갇히고 멸망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만 사랑하 고 십자가 그늘 아래 있으면 여러분은 세세토록 승리할 것입니다. 이 땅을 떠나 천국 갈 때도 십자가 하나만 들고 가면 천국 문이 열려질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는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영원한 능력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지금 갇혔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마귀 가 있는 곳으로 가니까 마귀가 앉아 가지고 웬 밥이냐 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 마귀가 우리를 잡아먹 는 것이지 우리가 말씀대로 진리 안에서 십자가 바라보고 사는 한 마귀는 우리를 해칠 수가 절대 없 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 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믿고 의지하면 늘 불안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배반할 수 있기 때문에 아무리 친한 사람, 가까운 사람도 사람을 가까이 하면 늘 불안합니다. 사람 이 도와주는 것은 불안합니다. 어떤 사람도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늘 불안함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중요할 때는 자기가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우리나라 박대통령도 시해 당할 때 보면 가 장 가까이서 지켜야할 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이 도망쳐 가는 것을 보면 위험할 때는 모두 자기가 살려 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했습니다. 우리가 어려 운 일 당하면 주님은 본능적으로 앞에 와서 가로막으십니다. 나 죽을 대신 주님이 죽으시지 우리는 지 켜주십니다. 십자가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 고 주님을 믿고 나아가는 성도는 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아무도 해칠 수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 리는 담대하게 삽니다. ‘누가 나를 정죄하리요? 누가 나를 송사 하리요? 누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서 끊으리요?’ 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서울에 살면서 제일 신날 때가 있습니다. 자신만만할 때가 있 습니다. 언제냐 하면 지방 집회를 갔다가 저녁 늦게 차를 타고 올라오면 상일동에, 고속도로에서 바 로 내려올 때 항상 열 한 시나 열 두 시가 되면 경찰들이 지키고 있다가 음주 측정을 합니다. 와서 경 례를 하고 ‘미안합니다! 음주 측정하러 왔습니다. 한 번 불어 보시지요.’ 하면 저는 그냥 확 불어버립 니다. 왜? 저는 자신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만은 자신 있으니까 그러면 그 다음에는 이 분이 보지 도 않습니다. 확 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우리 길을 가로막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한 우리를 해칠 자는 없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 에 나오는 것은 십자가 그늘 아래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십자가의 흔적이 있습니 다. 십자가의 사인(sign)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표시가 있습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에 대한 충분한 이 해와 십자가에 대한 확실한 믿음, 십자가에 대한 감격, 십자가에 대한 놀라운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은 온 성도들이 이런 경험을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에 십자가를 바라보고 믿은 개 인이나 민족은 한 사람도 부끄러움을 당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져야할 가장 큰 능 력, 어떤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능력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소유하고 사랑하고 믿고 바라보고 의지하 고 자랑하는 사람은 항상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313년 콘스탄틴이 막센티우스와 로마에서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까? 큰 전쟁, 죽느냐, 사느냐? 로마 의 앞날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전쟁을 앞에 두고 그 전날 밤 잠을 자는데 콘스탄틴에게 십자가가 나 타났습니다. ‘너는 이 십자가로 이겨라. 십자가로 이기라’는 것입니다.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이 십자 가로 가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모들과 함께 작전회의를 해서 모든 깃발을 십자가로 바꾸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콘스탄틴은 승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 로마를 기독교 국으로 완전 히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온 나라의 정치, 경제, 행정 이 로마 세계를 통치하던 유일한 국가가 기독교 국가로 확 돌아옵니다. 자기들이 못 박아 죽였던 예수를 자기들의 구주로 영접하고 자기들의 민족의 황제로 모셔서 로마는 세계를 통치하는 축복 받은 나라가 됩니다. 그 이후로 이 십자가는 언제나 승리 와 구원, 평화와 자유, 우리 인간의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주는 상징이 되어서 국제 적십자사 도 십자가, 유럽도 조금도 십자가를 표현 안 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영국도 십자가, 스위스도 십자가, 스웨덴도 십자가, 제가 모르지만 거의 보면 십자가를 모두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있는 나 라 중에 시시한 나라가 하나 없습니다. 십자가 믿고 나가는 민족 중에 안 되는 나라 하나 없습니다. 지 하자원의 능력, 군사적인 능력, 정치적인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참 십자가의 영적인 능력, 구원의 능력, 죄 사함의 능력만이 그 민족을 잘 되게 할 줄로 믿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솔 제니친도 러시아에서 강제수용소에 이미 붙들려 가지고 죽을 수밖에 없이 하루 열 네 시간씩 노동하 고 병까지 들었습니다. 암에 걸렸습니다. 온 식구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매일 채찍과 혹독한 추위와 고난 속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몸은 이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아서 더 이상 소망이 없었습니 다. 그는 이제 길이 없었습니다. 가족 다 잃게 되고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이 감옥에서 나갈 길은, 러시아에서 빠져나갈 길은 억 만 분의 일도 없습니다. 그는 낙심하고 나를 죽여라 하고 삽을 던지고 그대로 주저앉았습니다. 일어날 힘과 소망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 솔제니친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허연 분이 나타나셔서 막대기를 가지고 십자가를 그어주고 갔습니다. 십자가를 보는 순간 놀라 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솔제니친의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소망과 확신이 왔습니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 누구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위기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소망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솔제니친은 병도 치료받았습니다. 1년 후에 러시아 정부에서 축출해서 미국으로 건너와서 그 이후로 솔제니친이 쓰는 작품들은 모두 십자가를 증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 하는 작품을 쓰고 노 벨 문학상까지 받고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시시한 사람이 십자가를 봤다고 하면, 우 리 명성교회 교인이 누가 십자가를 그리더라 그러면 얘가 명성교회 가더니 돌았다 하고 말할 것입니 다. 솔제니친 같은 세계 최고의 지성인이 십자가를 보니까 이것은 확실한 십자가로 온 세계에 소망을 주는 메시지인줄 믿습니다. 십자가 있는 곳에 승리와 자유와 평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에서 어떤 책에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안정을 주는 것 이 15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153가지가 주로 무엇인가? 하면 예를 들어 촛불, 달빛, 빗소리, 흐르 는 물, 향기로운 차를 마신다든지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 가족사진, 햇볕, 어린아이 뭐 이런 것 은 우리 마음에 평화를 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라고 합니다. 예수 그 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사람은 촛불을 보고 계속 켜 놓으면 슬픔이 생겨나고 내 마음도 촛불처럼 흔들 리고 흐르는 빗물도 슬퍼진다고 합니다. 눈물이 납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도 그걸 틀어 놓 으면 처음에 한 두 번은 좋지만, 그것도 마음이 우울해진다는 것입니다. 비 오는 날은 죽고 싶고 햇빛 도 싫어서 커튼을 닫는다는 것입니다. 차 한 잔을 마시면 옛날 생각이 나고 허무해지고 그게 잠시지 계속 좋을 수가 있느냐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삶은, 십자가가 없는 삶은 어디에 가도 평화 가 없습니다. 촌에 가면 좋으냐? 여행하면 좋으냐? 잘 먹으면 좋으냐? 옷 쇼핑하면 좋으냐? 별의별 것 을 해 보지만 참 평화는 없습니다. 누구로 말미암아 주어집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 집니다. 이번 주에도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 서울 시내에 위기 청소년이 170만이라고 합니 다. 학업을 중단하고 집을 뛰쳐나가는 아이들이 170만, 위기에 몰려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그냥 막 사는 것입니다. 별의별 짓 막 하고 마약까지 복용하고 온갖 음란하고 퇴폐문화에 젖고 되는 대로 살아가는 애들이 170만, 청소년 자살이 두 배나 늘어나고 죽는 것입니다. 왜 이렇습니까?
우리가 이런 경제성장을 이루고 이 문화교육이 발달하고 정치가 발달했다 고 그러면서 왜 이렇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애만 그럽니까? 노인들도 못살겠다고 합니다. 사회연금, 사회 안전망이 너무 부족하고 OECD국가 중에 최하위라고, 노인들도 고달프다. 노인만 고달프냐? 어 머니도 못살겠다. 아저씨도 못살겠다. 근로자도 못살겠다. 다 모두 답답해하고 괴로워하고 불안해하 고 소망이 없고 우울증에 빠져있고 모두 죽고 싶어 하는 것이 어디에서 옵니까? 십자가, 하나님이 없 는 삶, 십자가를 통해서만 위를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소망이 있습니다. 십자가 있는 곳 에만 어두움의 역사가 그 안에서 머물지 못합니다. 전부 십자가를 보면 도망치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 가로 무장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사랑하기 바랍니다. 십자가 짊어지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증 거 하십시오. 예수를 믿으면 십자가와 함께 살아갑니다. 우리 성도들의 가장 큰 위기는 좀 은혜 받았다고, 좀 산다 고, 좀 잘 믿었다고 십자가와 멀어지는 삶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흥은 있을 수가 없고 십자가 없는 찬 양과 기도, 봉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항상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늘 또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을 하나님이 조명해 주시고 십자가 있는 곳 을 기뻐하십니다. 십자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십자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 사하고 천군ㆍ천사가 따라오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 있는 모든 곳에 자유와 평화가 있습니다. 찬송 가에 있는 대로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십자가 짊어지고 살아야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지은 책에 보 니까 그런 말이 나옵니다. 어떤 교인이 너무 내 십자가가 무거워서 아버지 내 십자가는 왜 이렇게 어 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좀 다른 십자가를 주십시오. 그러니까 앞에 십자가가 주욱 놓였는데 황금으로 된 십자가가 있더랍니다. ‘아이고, 저렇게 좋은 십자가 멋있는 십자가를 져야 되겠다.’ 하고 그 십자가 를 졌더니 나무보다 두 배나 더 무거워서 ‘어휴, 이건 더 무겁습니다.’ 너무 감당 할 수 없어서 더 조 금 올라가다 십자가를 바꾸어 주십시오 그랬는데 장미꽃으로 된 찬란한 십자가가 있습니다. 너무 아 름다워서 ‘주여, 장미꽃 십자가를 주십시오.’ 그러니까 그래 장미꽃 십자가 져라 해서 장미꽃 십자가 를 졌더니 좋기는 좋은데 가다가 따끔따끔 가시가 계속 찌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 주여! 처음 십자 가로 주십시오.’ 그러니까 우리 교인들이 나만 십자가를 짊어진다 하지만 이 세상 십자가가 모두 어렵 습니다.
그래도 내 십자가가 제일 좋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도 십자가이지만 그래도 나는 이 십자가가 좋습니다. 항상 밑에서 듣는 것보다는 그래도 여기가 나은 것입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주신 십자가를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십자가 떼버리 지 말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십자가, 아버지는 아버지의 십자가, 집사님은 집사님의 십자가, 장로님은 장로님의 십자가, 선교사는 선교사의 십자가를 감사해야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은 사업하는 십자가 를 감사하고, 학자는 학자의 십자가를 감사해야 하는데 모두 자기의 십자가에 대해서 불평, 불만하고 저런 사람은 십자가가 없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십자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 가는 승리의 십자가인 줄 믿습니다. 십자가 있는 곳에 평화와 사랑, 축복과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너무 가난해서 부잣집에 가면 무 슨 걱정이 있겠나? 해서 부잣집에 가서 좀 일하고 잘 먹고 살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했는데 부잣집 에 가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부잣집에 가니 너무 먹을 게 많습니다.
그런데 높은 사람한테 늘 걸리는 것입니다. 경찰서에서 오라고 하고 검찰청에서 국세청에서 오라고 하니까 ‘아, 정말 부자 못해먹겠구 나.’ 하고 나는 높은 권력이 있는 국정원장이나 검찰총장 집에 머물게 해 주세요. 했는데 정말 그 집 에 가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무슨 걱정이 있겠나 했는데 세상에 대통령한테 한 순간도 잠 을 못 자고 말 한 마디 들을까봐 목이 그 위에 달려 가지고 부자가 걱정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것 입니다. 잠을 못 자고 쩔쩔맵니다. 그래서 ‘아, 역시 대통령 있는 곳에 가야 되겠다.’ 하고 간절히 기도 해서 대통령 있는 곳에 가서 살게 해 주십시오. 정말 대통령 있는 곳에 가서 충성을 해서 비서실에 올 라갔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을 가까이 해보니 대통령같이 고민이 많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쿠데타 를 일으키지 않나, 누가 나를 차 버리지 않을까? 전부 긴장하고 불안해서 어느 나라가 쳐들어오지 않 나? 날마다 귀신 데려다가 푸닥거리하고 굿하고 날마다 악마를 섬깁니다. 자기 힘으로 안 되니까 항 상 귀신을 섬깁니다. 세계의 통치자가 귀신을 안 섬기는 나라가 없습니다.
모두 섬기는 것입니다. 그 래서 이 사람이 ‘아, 그러면 나는 악마가 되어야겠다.’ 귀신이 나와 함께 하면 두려울 것이 없구나 하 고 이리 오너라 해서 귀신이 들어왔습니다. 귀신이 들어와서 그 다음에 돌아다닙니다. 정말 두려울 것 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자기를 해칠 자가 천하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가는데 ‘아이고, 어머나!’ 하고 귀신이 벌벌 떠는 것입니다. 너 왜 이리 떠느냐? 하니까 아니 그리로 가지마. 그 쪽으 로 가면 안 돼. 왜 그러냐 하니까 아 거기 십자가 있잖아, 십자가 보이잖아 아이 무서워 십자가 있는 데로 가지마. 하고 그 쪽으로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기를 ‘아, 천하에 없는 귀신도 십자 가 앞에는 쩔쩔 매는구나.’ 십자가를 이길 자가 없구나, 부자도 권력자도 이 나라에 아무리 높은 사람 도 십자가를 이길 사람이 없구나, 십자가 그늘이 최고 구나, 그래서 예수 믿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 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십자가 사랑하고 이 그늘 아래 있는 한 여러분을 아무도 해치지 못할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능력
고전 1:18-25 / 안양준목사
교회력으로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무리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종려나무를 꺾어 길 위에 펴고 손에 들고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렇게 종려나무로 예수님을 환영했다해서 종려주일이라 부릅니다.
마 21:1-11에 이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 62장의 예언대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문을 향해 올라오셨습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그 소식을 듣고 몰려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길 위에 폈습니다. 마치 왕이 행차할 때 카페트를 길에 깔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왕으로 대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 펴고 또 자기 손에 들고 환대했습니다.
모여든 무리들이 다함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순식간에 예수님의 행렬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마 21:10은 예루살렘 성 전체에 큰 소동이 일었다고 당시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거민 전체가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금은 이렇게 예수를 환대했지만 며칠이 못 가서 이들이 돌변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자기들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고, 로마로부터 정치적인 독립을 얻게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던 대로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산산조각 나버리고, 허탈감과 절망감을 맛봐야 했습니다. 이제 예수께 대한 배신감이 싹트게 되었고 분노되어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 호산나를 외쳤던 무리들이 다시 소리쳤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결국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를 환대했던 무리들이 돌변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만 것입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그 십자가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십자가는 페르시아에서 전래된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와 수치와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 예수를 매달면 그것으로 예수는 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자 그 십자가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됐습니다. 용서와 화해와 생명이 길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 십자가 위에서 진정한 영광을 누리게 되셨습니다.
결국 이들은 배신감과 분노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지만 오히려 예수께 영광의 길을 예비한 꼴이 되었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에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어떤 십자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봉독해 주신 본문 말씀이 예수의 십자가의 능력을 말씀해 줍니다.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이 십자가의 능력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우선 십자가의 능력이란 어떤 능력입니까?
18절에 보면 한 마디로 구원의 능력이라 했습니다.
롬 5:10은 그 구원의 능력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십자가의 능력은 위대한 죽음의 능력입니다. 죽음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죽음으로써 죄에서 구원해 내는 능력입니다.
요 12:24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며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밀 알 한 알이 땅에 묻혀 생명을 잃게 됨으로써 셀 수 없이 많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죽음의 능력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나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을 가장 행복한 죽음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괴롭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예수의 죽음은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새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마치 한 알의 밀이 죽어 수많은 밀 알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입니다. 윤동주는 바로 이런 죽음을 행복한 죽음이라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죽음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바로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능력입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들에게 하나님과 화해하고, 새로운 생명 즉 영생을 얻게 해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의 능력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그렇지만 초대교회 시절에 십자가가 구원의 길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닌 사형도구요 죽음의 상징이 구원의 상징이요, 생명의 상징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지혜 있다는 사람들, 인간 구원에 관한 많은 것을 연구했다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주장은 미련한 것이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십자가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못한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는 유대인입니다.
22절에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표적이란 초자연적인 기적을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모세 시대부터 늘 표적을 경험해왔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 위에서 물이 나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보호해주고, 듣도 보도 못한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으로 시작됐고, 표적으로 이어져 온 민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메시야가 도래하는 그 날에도 놀라운 표적이 나타날 것으로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예언되기도 했습니다. 사 35:5-6절에 보면 메시야가 도래하는 때에 일어날 일들을 이렇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처음에 예수님께서 이런 예언에 부합되는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마 11:5에 보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만 해도 예수님께서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에서 종려나무를 꺾어들고 호산나를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의 최후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아무런 표적도 보이지 못한 채 다른 여느 사형수처럼 십자가에서 그 모진 고통을 온 몸으로 겪으며 죽어갔습니다.
답답한 유대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께 소리쳤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 내려 오라",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예수님께서 목이 타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소리치시자 유대인들이 말했습니다. "엘리야를 부른다.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유대인들은 끝까지 표적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꾸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표적을 기다리던 유대인들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기억하던 유대인들은 신 21:23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표적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따라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고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라고.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불치병이 고쳐지기를 기대합니다. 귀신이 쫓겨 나가는 현상을 기대합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표적이 나타난다는 곳으로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암 환자를 고친다는 무슨 무슨 기도원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귀신이 쫓겨간다는 무슨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손을 머리에 얹으면 사람이 쓰러진다는 무슨 목사의 집회는 인산인해가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표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표적보다 심오한 차원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표적들은 일시적이요 현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뿐입니다.
이런 표적들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못합니다. 이런 표적들이 우리에게 영생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만이 가능합니다.
다른 하나는 헬라인입니다.
22절에 보면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혜란 철학적 지혜를 말하는데, 인간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헬라 철학은 하나의 기본적인 전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분명한 이분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로 나뉜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는 선하고 완벽한데 비해서, 지상의 세계는 악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는 철저하게 차단되어있고 이 지상 세계에는 다만 천상세계의 그림자만 비칠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도들은 하나님이 이 지상 세계에 왔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셨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 치부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헬라 지혜가 인간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까?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실제로 헬라인들은 인간의 지혜로 만물의 근원을 캐며, 인생 문제의 본질을 해결해 보려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들이 만물의 근원이 불이라고, 또 어떤 철학자는 물이라고, 또 어떤 철학자들은 로고스라고 설파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인생의 문제의 본질이 자기 자신을 모르는 데에 있다고 파악하고 자기 자신을 알라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 지혜는 만물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인간 지혜는 인생의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발견해 내지 못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이런 헬라 철학자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늪의 개구리처럼 개굴개굴 떠들며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자기들의 무지를 알지 못하고 지혜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헬라 철학 이래로 서양철학에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이 수없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저마다 보통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설파했습니다. 오늘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대철학자들이 난해한 철학적 진리를 수 없이 많이 토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철학적 진리들은 도서관 서고에서 먼지와 벗하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을 구원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여기에 인간 지혜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헬라 철학자들이 미련하게 보았지만 오늘도 십자가의 능력은 거리에서, 세상 한 복판에서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십자가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십자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누구에게나 그 능력이 나타나 그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귀한 구슬이라도 꿰어서 목거리나 팔찌와 같은 하나의 보화가 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린고비 이야기에서 보듯이 아무리 좋은 음식이 있다고 해도 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음식은 먹으라고 있는 것이지 감상하라고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고 십자가의 능력은 나타나나지 않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표적을 찾아서는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로 따져서도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라
고전 1:18-25 / 황광민목사
어떤 곳에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집은 가난하고 일곱 식구나 되었지만 늘 웃음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형네 집은 부자이고 세 식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늘 싸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이 동생을 찾아가 비결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님 네 집에는 똑똑한 사람만 있고 우리 집에는 바보들만 살기 때문이죠."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형에게 동생은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서로가 자기 잘못이라고 하는 바람에 싸울 일이 없지만 형님 집에서는 서로가 네 잘못이라고 하며 책임을 떠넘기니까 싸울 수밖에 없지요. 그게 다 똑똑해서 생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에 형은 크게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인지를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것이 참 지혜인지, 똑똑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한번 생각해 볼 이야기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도 지혜가 있고 하나님도 지혜를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지혜가 하나님의 지혜와 충돌을 일으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지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뜻이 크게 반영된 십자가의 도를 사람들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평가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외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오늘은 본문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지혜로 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인간의 지혜
먼저 인간의 지혜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20절의 말씀을 함께 보십시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의 어리석음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은 하나님의 약함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개그맨 전유성씨의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는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이 시사하는 내용은 이와 같습니다. "전철을 탔다. 어린 아해들이 싸우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 해답은 간단하다. 못 본 체 할 것이다. 덤벼드는 이해들을 어른들이 혼내준다. 난 그때 가서 큰 소리 칠 것이다. 아직도 전철 안에 저런 놈이 있네 하면서…"
어느 개그맨이 써먹은 방법인데 음주운전단속을 피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있답니다. 미리 차안에 장례식 때 상주들이 머리에 쓰는 삼베수건을 준비해 두었다가 교통순경에게 걸리면 잽싸게 쓰고 "지금 우리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는 길인데 장지에서 한잔… 흐흑"하면 된답니다. 그러면 교통순경의 열에 아홉은 그냥 봐 준답니다. 한국사람이 인정에 약하니까 통하겠지요. 그러니 도덕교과서에 있는 것처럼 "나 음주 운전했으니 처벌해 주세요." 라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눈 딱 감고 적당하게 비겁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당당하게 비겁해 지려면 '나는 원래 비겁한 놈이야'라고 아예 주제파악을 해 두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전유성씨가 '원수를 미워하자'라는 글을 써 놓았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위선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인데 미운 감정이 전혀 없이 그저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행동이요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은 거지 싫은 놈, 미운 놈, 원수 같은 놈을 내 몸같이 사랑하자고 한다면 그것은 천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위선을 벗어 던지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합니다.
또 원수를 사랑하면 그 원수가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사랑하니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도리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고 바른 줄 알고 그 행동을 다시 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상대를 사랑하는 척 하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속이 타서 요절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 '뜨거운 맛을 보여 주자'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전유성씨를 비판하기 전에 나 자신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있는 우리 크리스찬들이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전유성씨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살면서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성도들도 이러한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비크리스찬의 생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솔직한 맛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지혜입니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계가 보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세상에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선비가 어디에 있습니까? 변론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지혜는 미련한 것뿐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길이 참으로 지혜로운 길입니다.
유대인과 표적
이제는 유대인들은 어떠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는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22절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구했던 것은 저들의 신앙관에 기인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적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 차이,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절대능력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절대적 차이가 있으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한 것이었습니다.
또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은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가장 강력한 비유입니다. 토기장이인 하나님 앞에 진흙인 인간은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또한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불가항력적인 힘을 가지신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인간이 이룰 수 없는 기적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적과 표적을 구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났을 때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은 힘없는 고난의 메시아가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메시야, 경제적 메시아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표적과 기적을 추구하는 유대인들이 고난 당하는 메시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표적과 기적을 구하는 신앙에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을 믿으면서도 희생의 사랑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혹시 우리 중에도 표적만 구하는 신앙생활 하다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 지혜입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금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헬라인과 지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 반면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저들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의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미련하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깊은 지혜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헬라인들의 지혜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훌륭한 지혜가 많이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완전한 지혜를 4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첫째는 모든 일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현명함입니다. 둘째는 공과 사를 구별할 줄 아는 공의입니다. 셋째는 위험을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대처하는 담대함입니다. 그리고 넷째가 욕망을 억제하고 절제하는 극기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의 지혜는 철학적 지혜였습니다. 철학은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자신이 진리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아는가?" 이런 것들을 묻지만 스스로 찾는 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헬라인들로서는 하나님의 지혜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십자가를 통한 진리를 접했을 때 이해하지 못하고 미련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표적과 기적을 구하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던 저들로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또 지혜를 구하던 헬라인들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그토록 많으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할 방법이 이것 밖에 없을까? 천둥 번개만 한번 쳐도 벌벌 떠는 것이 인생인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못하셔서 안 하시겠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전도를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한방 날려 구원하면 무엇합니까? 하나님은 미련한 방법을 택하셨지만 이를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의 결정체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였어도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인간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따라가지 못하고 인간의 힘이 하나님의 약함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의 산물로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24절에서도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도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속의 십자가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의심하지 말고 십자가의 대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내 죄를 대속할 수 있을까?" "내가 고행을 하던 벌을 감수하던 속죄를 받아야지 않겠나?" 이런 생각들은 어리석은 생각들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또 성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보면 가장 어리석게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십시오. 인간의 지혜로는 풀리지 않던 숙제들이 십자가의 지혜로 풀리는 것을 보십시오. 꼬였던 것들이 십자가의 지혜로 풀립니다. 막혔던 담들이 십자가의 지혜로 무너져 내립니다.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원수를 미워하자고 합니다. 그것이 스트레스 안 받고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불평은 몸에 좋다고 합니다. 불평이 보약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지혜는 정직해서는 못 산다고 말합니다. 솔직한 사람은 패가망신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이것을 모릅니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평화롭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모릅니다. 정직하고 진실하면 손해볼 것 같지만 후히 갚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온유한 자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석교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사십시다. 표적을 구하는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의 지혜에 순종하십시오. 이해할 수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십시오. 하나님의 지혜는 살리는 지혜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미련하게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그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곳에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고전 1:18-25 / 이삼규목사
일생동안 단 한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태어나 보금자리인 둥지를 떠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가시나무를 찾아 헤매다가 가장 길고 날카로운 가시에 자신의 몸을 찔리게 하여 죽어가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가시나무 새입니다. 이 새는 그 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워 이 새가 울 때에는 온 세상은 침묵에 잠기고 하늘의 신까지도 그 고귀한 소리에 미소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십자가의 가시를 향해 평생을 살았던 나사렛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분을 가리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고 능력이 될까요?
불후의 명작이라 손꼽이는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전통적인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발적인 사고로 졸지에 노예가 되었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문둥병자가 됩니다. 노예로 팔려갈 때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던 그에게 마실 물을 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후 그는 노예선이 침몰될 때 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로마 호민관의 양아들이 되어 다시 유대로 돌아왔고 그렇게 증오하던 친구 세살라의 죽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자신을 배신한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사람이 사형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갔다가 우연히 그 유대인의 왕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골고다의 길에서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예수가 바로 몇 년 전 자신에게 물을 주었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물을 떠서 예수께 가져가려 하는데 로마 병정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의 눈은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미소를 보내고 계셨습니다. 그는 미친 듯이 쫓아 올라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오! 주님이시여!"라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순간 마음속에 증오가 사라지고 문둥병에 걸렸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깨끗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완고하고 복수와 증오심으로 어둡게 살아온 그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바로 그가 십자가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고전 1:18).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란 그 당시에 흉악범을 처형하는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처형을 할 때는 사형수를 발가벗겨서 십자가 형태의 형틀에 못박고 매달아 죽입니다. 그러면 대개의 경우 24시간 안에 탈진하여 죽게 됩니다. 이때 군중들은 형이 집행되는 동안에 야유하거나 조롱할 수 있습니다. 즉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은 최대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긴 시간동안 받으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나 자유민들에게는 이 형벌이 행해지지 않았고 주로 노예나 천민 계층, 이방인들을 처형하는 무서운 사형도구였습니다. 예수님이나 베드로는 로마 시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이 있었기 때문에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란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개념이었습니다. 거기에 무슨 성스러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보면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미련한 것이요, 거리끼는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저주스러운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일까요?
고전 1:19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이 세상의 지혜로 보면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며 미련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가지는 지혜의 한계입니다. 이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에게 참다운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의에 이르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까?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철학적으로 접근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결국에는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하면 된다는 방법과 열쇠가 아니라 우리에게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쓰신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하니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어떤 '道'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태인에도 '미륵도'라는 불교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도의 특징은 자신들이 道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 구원의 길입니다. 십자가란 깨달아야 할 도가 아니고 우리가 이렇게 하면 되는 우리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동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있는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주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반하고 그를 은 30에 팔아 넘겼습니까? 그는 주님께서 자기가 기대했던 메시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배신감을 느낀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께서 유대나라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행동을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본전이나 뽑자는 생각에서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너 죽고 나죽자'는 마음이 그리스도를 파는 자리에까지 가게 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유명한 금문교가 있습니다. 이 금문교는 샌프란시스코와 와 마린 반도를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금문교는 길이가 2925m에 높이가 227m나 되면서도 중간 교각이 없고, 로프로만 매어 달린 세계 최장 최대의 다리입니다. 1933년부터 1937년에 걸쳐 완성된 이 다리 공사에는 70여명의 인명이 물 속에 떨어져 죽는 희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희생의 대가가 없이 다리를 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다리가 놓였기 때문에 이제 사람들은 자유롭게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신 것입니다. 이 다리를 설계하신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십자가라는 다리가 설계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지혜로 구원의 길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까?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다 헛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어떤 공로나 행위를 의지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무용지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방법,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인간의 지혜의 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가 있다고 분명 바울 사도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계십니까? 인간의 지혜입니까?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2.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까? 그분이 흘려주신 보혈 때문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보혈 찬송가 202장이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보다 피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어떻게 해방되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유월절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아홉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더욱 강퍅해져서 이스라엘을 놓아주기를 거절하였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장자의 죽음 재앙"입니다. 처음 난 것들을 다 죽이시는 재앙이 애굽 땅에 임한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름으로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유월(踰越)이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흘림이 있었기에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 곧 희생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고전 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어린양의 피가 흘림으로 말미암아 그 피의 능력으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았듯이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어떤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까?
1)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들의 설교의 중요한 주제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의 근거이십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연약함의 표상이 아니라 놀라운 능력의 도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전설이 있습니다. 주후 3세기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는 엠프레스 헬레나인데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가 지신 십자가를 이제라도 찾아내고 싶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소문해 보도록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었던 많은 유물들을 로마로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루살렘보다 로마에 유물이 더 많이 보관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녀는 직접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곳 감독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날을 다니다가 마침내 십자가를 찾아내었습니다. 헬레나가 찾고 보니 세 개의 십자가가 한 묶음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 중 어느 것이 예수의 것이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다 죽어 가는 한 여인에게 그 십자가들을 대어 보았습니다. 두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마지막 십자가를 대는 순간 그 병자가 깨끗이 낫는 것을 보고 그것이 곧 예수가 달리셨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헬레나는 그 십자가를 분해하여 일부는 예루살렘에 두고 일부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가는 곳마다 여러 가지 능력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되찾아진 십자가를 은으로 된 관에 넣어서 잘 보관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에 선진국들의 대부분의 국기를 보면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축복을 받은 나라들이 되었을까요? 그들은 십자가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국기에 마저 십자가를 넣었다는 것은 십자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 받은 나라들이 된 것입니다.
2) 죄사함의 능력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죄악을 씻을 수 있는 것이 이 땅에 존재할 까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잿물이나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을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렘 2:22)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죄를 깨끗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깨끗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골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 2: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 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 2:15)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요즘에 성도들이 많은 부르는 복음 성가 가운데 '부흥'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부흥(Revival)이란 성령의 능력으로 중생을 체험했으나 차츰 냉랭하고 세속적이며 무사안일주의에 젖어버린 비효율적인 교회나 성도가 생명력을 되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흥은 간절한 기도응답으로 그의 백성에게 갱신운동을 일으키고, 성령을 부으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1907년에 경험한 평양 대부흥 운동은 역사적으로 두 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 웨일즈의 부흥과 인도 카아시 지방의 부흥이 그것입니다. 1906년 경 인도 카아시 지방에 부흥이 찾아왔을 때의 한 광경을 레이놀즈(W.Reynolds)라는 선교사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어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린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기도하던 중, 성령의 감화로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이들은 지옥 불을 실감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모두 예수님께로 피하 자며 기도에 더욱 힘썼습니다. 아이들이 물밀듯 밀려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흐느껴 울음을 그치지 않자, 어른들이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는데,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요. 그래서 가슴아파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인도 카아시(Khassi) 지방에서 일어난 부흥의 주된 특징은 십자가에 대한 대각성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하나님의 능력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능력을 의지 할 때 진정한 살길이 있습니다. 축복 받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시며 능력이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시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능력
고전 1:18-25 / 김필곤목사
아마 세계 장한 어머니 참피언 대회를 하면 우리 나라 어머니들이 금메달을 탈 것 같습니다. 우리 어머님들 참 자식들 끔찍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유치원 선착순으로 받는다고 하면 하루 전부터 가서 줄 서있습니다. 전학 선착순으로 받는다면 밥을 굶으면서도 줄을 서게됩니다. 외국에 가서도 한국 어머니들 이름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 역사상 최초로 어머니와 딸이 동시에 학교에 다니는 기록을 세운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입니다. 미국 육군 소령이자 하버드대학 박사과정을 다닌 서진규씨와 그녀의 딸입니다. 그분은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분은 경남 동래군의 어촌 마을 월내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풍문여고를 마친 뒤 종로에 있는 가발공장에 취직했다 19살에 미국으로 식모살이로 갔습니다. 식당 웨이트리스를 하며 못다 한 공부에의 열정을 불태워 5개 대학을 옮겨다니며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남편의 폭력으로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 그녀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미 육군에 자원 입대하여 소령이 되었고 딸을 하버드 대학에 보내고 자신도 1990년 9월, 마흔 둘의 나이에 하버드대 석사과정에 입학, 1992년 봄에 하버드대 국제외교사와 동아시아 언어학 박사 과정에 합격했습니다. 그의 자녀 교육과 인생 성공의 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목표에서 눈을 떼지 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힘을 얻고 인생에 승리하려면 목표에서 눈을 떼어서는 안됩니다. 운전할 때 목표점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곳을 바라보면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볼록렌즈로 종이를 태울 때도 초점을 정확히 맞추면 조금 지나면 불이 붙습니다. 그러나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하루가 지나도 불이 붙지 않습니다. 목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목표에서 눈을 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시선을 다른 여인에게 줄 때 가정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학생이 공부에서 목표를 다른 좋지 않은 것으로 돌릴 때 문제아가 됩니다. 기업가가 목표를 기업경영에서 눈을 뗄 때 그 기업을 오래 갈 수없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목표에서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릴 때 신앙인은 실패하기 쉽고 사탄의 노리개 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일평생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떼지 말아야 신앙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온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에 우리의 눈이 고정되면 우리 인생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1. 십자가의 도( 복음)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18, 24)
18, 24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기서 도는 " 호 로고스"로 그 말씀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게 되는 진리 즉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이 무엇이냐 하면 이 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사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신 역사적 사실이 바로 복음입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죄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에 복잡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특히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은 분쟁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 분쟁은 누구에게 속하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은 아볼로에게, 어떤 사람은 게바에게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서로 주장하며 자랑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 같은 마음, 같은 뜻,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하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3). 십자가를 떠날 때, 십자가에서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때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지 못하고 바울과 아볼로와 게바만 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인간을 보기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제도를 보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눈을 떼고 자꾸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신앙의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는 능력입니다. '뒤나미스'입니다. 다이나 마이트입니다. 폭발력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 사랑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용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율법의 포로에서 참 자유함을 누립니다. 양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대에 달린 구리 뱀을 보았을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십자가을 바라볼 때 상한 심령이 고침받고 쓰러지는 심령이 일어서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를 깨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씻어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악를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이기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곳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도가 있는 곳에는 절망이 소망으로 변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어떠한 죄악도 용서받는 능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 4:12)"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 바로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공자가 죽은 자를 살립니까? 석가가 죽은 자를 살립니까? 소크라테스가, 아니면 바울이, 아볼로가, 베드로가 죽은 자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1) 이 구원의 능력은 차별이 없습니다(24).
가난한 사람도 부한 사람도, 잘 생긴 사람도 조금 잘 생기지 못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종도 자유자도 차별이 없습니다.
2) 이 구원의 능력은 사람의 것보다 강하고 지혜있습니다.(25).
지존파 살인 기계, 인육식을 하며 죽이지 못하여 한을 품은 자들이 무엇으로 변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 완악한 마음도 십자가의 도가 들어가니까 봄눈 녹듯 녹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1963년 10월 19일 새벽 2시,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이덕주소령 일가족 6명을 몰살시킨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도끼 살인 자 고재봉의 짓이었습니다. 그는 박중령의 집에서 잔심부름하다 작은 물건 훔쳤습니다. 마침 가정부가 보고 난리를 치자 도끼로 위협하다가 살인미수로 육군 형무소에서 7개월 복역하였습니다. 그는 복수의 일념으로 감옥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자마자 찾아가 온 가족을 도끼로 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박중령은 전속되어 가 억울하게 다른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신문에서 본 처음 수간부터 대한성서공회 권서자 안선국집사(현 목사,한길교회)가 사명감을 느끼면서 새벽기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5000번 수인번호, 고재봉을 처음 면회했을 때 요3:16절 읽어 주고, 침묵하다가,"형제여 당신도 죽고 나도 죽고, 당신도 죄인, 나도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습니다. 면회를 거절합니다. 신약성경 넣어주고 돌아왔습니다. 고재봉이 그것을 뒤척이다가 요3:16절 눈이 닿았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이냐!" 그는 스스로 면회 신청했습니다. 그새 다섯번 성경을 읽었습니다. 큰 성경 넣어달라고 하여 넣어 주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아 이 성경을 좀 더 일찍 읽었더라면 내 인생은 아마 변했을 것입니다," 새벽 교회 종소리에 일어나 앉아 찬송으로 시작 기도하고 성경읽기 시작합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말 들으사" 어느날 갑자기 큰 소리 외치며 흐느꼈습니다. "내가 어릴 적 다니던 교회에서 예수님을 안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합니다. 방언 체험을 합니다. 전도 시작합니다. 감방이 변합니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새 소망이 생겼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던 전날밤 감옥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감옥에서 나가면 꼭 교회에 나가라고 당부를 합니다. 검찰관이 마지막 할말을 물었습니다. 그는 "요3:16"을 말하였습니다. 또 할말은 "검찰관 님 제가 웃을 때 방아쇠를 당겨 주세요, 찬양을 부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9명 헌병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습니다. 찬송 끝내고 웃고 있을 때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형수 고재봉과 같은 살인마를 변화시키는 것이겠습니까? 교양으로, 소크라데스의 명언으로, 섹스피어의 작품으로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들어가면 사람이 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들어가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기픔으로, 근심이 평안으로, 증오가 사랑으로, 다툼이 평화로 변화됩니다. 십자가의 도가 들거가면 가정도, 사업의 현장도, 직장도 교회도 변화되는 것입니다.
2. 이 십자가의 도, 하나님의 능력을 무엇으로 전달합니까?(21)
2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전도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기 '전도'라는 말, '케르그마'는 '예고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케룻소'에서 온 말로 '넓은 선포', '큰 선포', '포고' 곧 설교를 뜻합니다. 참으로 전도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것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구제하고 약한 자를 도와 주고, 사회사업을 하고 풍성한 교제가 있다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의미가 없는 교회일 뿐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의 증거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본질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고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좋은 교회는 수가 많이 나오는 교회, 시설이 좋은 교회, 많은 구제사역을 하는 교회이기 보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될 수 없습니다. 전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24) 인간을 구원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택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1)왜 그렇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세상이 자기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입니다.
(1)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로 십자가의 도를 알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법으로 인간의 지혜를 채택하지 않고 버리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 29:14 (LXX)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소피아로 사물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총명은 쉬네시스로 사물을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했다는 말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이 발휘할수 있는 독특한 능력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없애버린다는 사실을 예로 들어 인간의 지혜가 상대적이고 의존적(依存的)이며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이세상 지혜를 영적이 세계에 대하여는 미련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20)
지혜있는 자는 두뇌가 우수한 자입니다. 변사는 헬라의 철학자나 변론가입니다. 선비는 유대인 서기관들을 말합니다. 아무리 그들의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자연계시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특별계시를 해 주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2)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18)
미련하게 보입니다. 십자가의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면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됩니다.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됩니다.
(1)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란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순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는 출애굽 때부터 엘리야, 엘리사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적적인 사건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밖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진정으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표적이 아니라, 십자가인 것을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정작, 우리 인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나 엘리야, 엘리사 시대처럼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표적은 표적으로 끝나는 것이지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인생들을 영원한 죄와 죽음으로부터 살리는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메시야를 상상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행악자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말하는 것은 모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걸림돌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롬9:33,벧전2:8) 그러나, 이 십자가야 말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니의 능력"(롬1:16)입니다. 십자가는 연약함을 상징하는 표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고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완성하는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인의 구원이 아니라 아담 이후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는 도구였습니다.
(2)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이방인들을 대표하는 헬라인들과 로마인들은 십자가의 형벌을 가장 비천한 죄인들이나 받는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십자가와 구세주는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의 관점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된다 해도 육신의 한계로 인해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지혜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그들의 분석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볼 때에 미련하기 그지없는 짓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스철학의 중심은 이성과 합리주의입니다. 이성과 합리에 맞지 않으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성경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신화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도, 동정녀 탄생도, 예수님의 부활도 부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이성을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인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까? 보는 것만 아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하루살이 메뚜기 개구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살이가 놀다가 내일 만나자고 합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웃습니다. 메뚜기가 가을 지나 봄에 만나자고 합니다. 개구리가 웃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한계, 인식의 한계입니다. 개미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아파트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파트에 대하여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인식하는 만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말씀 특별계시이고 우리에게 주신 영안,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을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부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24절)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24-25절)
철학자 파스칼 천제였습니다. 대단한 천재 수학자 물리학자였습니다. 참으로 휘귀한 천재였습니다. 12세 때 논문 쓰기 시작하였고 15세 때 유럽의 지성 감동시켰습니다. 당시, 계몽주의 시대였습니다. 파스칼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 밤낮 책상에 앉아 하나님은 무엇이냐를 질문하였습니다. 제1 원인자, 원인의 원인, 우주론적인 접근, 본체론적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파스칼도 그런 탐구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성령체험을 했습니다. 32세 때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을 때 고백한 글을 평생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나 과학자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확신, 확신. 사랑, 기쁨, 평화 의로우신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했어도 나는 당신을 알았습니다.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이렇게 썼다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순간에 이세상 일체의 사물을 망각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가지고 있던 수저 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다물려 준 다음 39년의 생애를 뜨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 하늘 나라로 갔습니다. 영국의 버틀란트 럿셀은 그가 쓴 철학사에서 파스칼을 가리켜 "참으로 아깝다 이사람이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인류에 공헌한 것이 얼마나 많았을지 모른다." 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러셀은 신령한 복을 몰랐지만 파스칼은 알았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은 전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도를 전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방법은 전도의 방법입니다(21-24). ①전도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23) ②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나 그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③그러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④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습니다(25). 비록 십자가가 인간의 눈으로는 하나님의 패배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전도가 미련한 것같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변하고 그것으로 능력이 나타나고 그것으로 가정과 사회가 변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믿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지구촌을 살아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지혜들을 동원하여도 구원을 받을 만한 지혜를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1-12절에는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거나 찾거나 그 이름을 부르거나 섬길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전하는 자가 없으면 어찌 듣겠습니까?
미련한 것 같지만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받아들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변화됩니다. 헬라의 지식으로, 유대인의 표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교육으로 할 수 없는 능력이 사람가운데 가정 가운데, 사회 가운데 일어나게 됩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자에게 전도를 통하여 복음, 십자가의 도가 들어가면 변화와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게 만들어 줍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지난 주간 기도원에 있는데 수요일 저녁 10가 넘어서였습니다. 핸드폰을 꺼놓고 기도하다고 10시쯤에 핸드폰을 켜니까 전화가 왔습니다. 아는 분입니다. 전화를 받자 말라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형님이 식도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자신도 이제 교회를 나갈터이니 기도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들, 십자가의 도가 없는 사람들은 강하고 지혜로운 것 같지만 위기를 당하면 쉽게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가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1996년의 권위있는 음악지 [클래식 CD]는 독자와 음반 소비자 조사를 통해 호세 카레라스를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했습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장이었답니다. <1990년 로마 월드컵 3테너 콘서트>, 그리고 <1994년 LA 월드컵 3테너 콘서트>,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을 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나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억울한 나이였습니다.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사전 연락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호세 카레라스는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붙잡았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를 받았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은 그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신을 다시 살려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을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두나미스, 다이나 마이트입니다.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것이고 이 복음이 증거될 때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가정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초점을 흐려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초점은 복음의 능력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데 맞추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지혜의 표상
조너 1:18-25 / 황광민목사
톨스토이의 동화에 나오는 「황제와 청소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은 잔치를 베풀고 초청장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참석한 손님 중에 한 사람을 뽑아 왕과 왕후 사이에 앉히고 푸짐한 상품을 주겠다는 내용도 적어 놓았습니다. 며칠 후 잔칫날이 되었습니다. 손님들이 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왕의 신하들은 손님들의 손을 조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궁전의 청소부 할머니가 왕과 왕후 사이에 앉도록 뽑혔습니다. 평생 힘든 노동으로 민망할 정도로 거칠어진 노파의 손이 영광을 얻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십자가를 택하신 하나님의 지혜를 예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사람들에게는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의심하였습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이 십자가를 택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논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야말로 구원의 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중심 하여 <십자가는 하나님 지혜의 표상>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선택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시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바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하나만 어겨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도 모든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경건한 청년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 받고는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통일교의 문선명 교주는 십자가를 그리스도의 실패라고 평가절하 하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십자가를 이해하지 않고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심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을 부인하고 예수님은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한 사람에게도 거룩한 피를 나누어주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응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표적을 구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메시야라면 표적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옛날 모세가 표적을 보이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것처럼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뱀을 만든 것처럼 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갈라지게 했던 것처럼 표적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신비한 능력으로 표적을 보이고 이로써 로마를 무너뜨리고 나라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으나 삼일만에 나와서 니느웨 성에 구원의 사도가 된 것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시어 세상에 구주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구원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경제적 구원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모든 질병을 고쳐 주시는 육체적 구원을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시어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에는 유대인처럼 표적을 구하는 성도가 많습니다. 한국인과 유대인은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하는데 표적을 구하는 성향도 비슷합니다. 유대인과 한국인은 비슷한 점이 매우 많아서 성경에서 사라진 단 지파가 동방으로 이동하여 단군의 백성이 되었다고 가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성도들도 유대인들처럼 표적을 많이 구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세상 적으로 잘 풀려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목사들에게는 가난과 헌신을 요구하면서도 평신도들은 출세하고 사업이 번창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모순적인 논리는 표적을 구하는 신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우리의 모든 질고와 고통과 환난을 다 지셨으니 우리는 주안에서 평안을 누리자고 소원할 뿐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얻어 참 인간이 되는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인간이 지적 성장을 통하여 완전해질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인간이 자기 계발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받는다는 것은 미개한 사람들의 생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계발을 통하여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종교가 훈련을 통하여 구원받는 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학습과 도를 닦음으로 완전의 경지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신학의 세계에서는 자유주의가 실패했습니다. 인간이 자기 계발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 중에도 지적 훈련을 통하여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최근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여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믿음을 따르는 것은 예수를 신앙의 모델로 보고 배우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믿음을 배우고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신 예수님의 믿음은 우리 성도들의 훌륭한 모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를 구주로 인정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지는 않고 그분의 믿음만 배우고 따르자는 것은 지혜로 구원받으려는 헬라인의 입장과 같습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
십자가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였을지라도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이었습니다. 18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아멘. 또 23∼2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아멘.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도가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심하지 말고 십자가의 대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는 대속의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내 죄를 대속할 수 있을까?", "고행을 하던지 벌을 받던지 내가 속죄를 받아야 되지 않겠나?" 이런 생각들은 어리석은 생각들입니다. 스스로 지혜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구리뱀을 장대에 매달아 불뱀에 물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바로 보고 구원받게 하신 것처럼 자신이 직접 장대에 달리셨습니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구리뱀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바라보았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직접 육신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찌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하겠습니까?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십자가는 지혜의 결정체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인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의 결정체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며 또한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십자가의 도가 두 가지 차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는 대속의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지혜의 결정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지혜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25절에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지혜를 예찬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도 아래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인간의 지혜로 보면 십자가는 분명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풀리지 않던 문제들이 십자가로 인하여 풀립니다. 꼬였던 것들이 십자가의 지혜로 풀립니다. 막혔던 담들도 십자가로 허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스트레스 안 받고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불평이 몸에 좋다고 합니다. 불평이 보약이라고까지 합니다. 불평으로 스트레스를 풀면 좋다는 이야기겠지요. 세상의 지혜는 정직해서는 못산다고 합니다. 솔직한 사람이 패가망신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모르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세상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은 콩 심은 데 콩 나게 하시고 팥 심은 데 팥 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들어 올리셨습니다. 정직하고 신실하면 손해일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후히 갚으십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하나님은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십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심한 가뭄이 들어서 농부들이 물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성도도 밤 새워가며 자기 논에 물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집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이고 나와보니 아래의 논임자가 물을 모두 도둑질하여 자기 논에 대놓았더랍니다. 그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이 정도는 참아야지"하고는 그 날밤도 자정이 넘도록 논에 물을 댔습니다. 새벽에 들어와 한숨 자고 나가보니 또 물을 빼갔습니다. 당장 쫓아가서 분풀이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꾹 참고 목사님을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기 전에 당신도 살고 그 사람도 사는 길을 찾아보십시오. 두 번이나 속았으니 한번 더 속는 셈치고 아랫논에 먼저 물을 대주고 당신의 논에 물을 대 보십시오." 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성도는 울분을 달래며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아래 논임자가 울면서 "내가 그렇게 잘못했는데도 이번에는 내 논에다 물을 대주셨습니까?" 저도 당신을 따라 예수를 믿겠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십자가의 지혜가 세상의 지혜를 이겼던 것입니다.
십자가와 나(2) "지혜와 능력"
고전 1:18-25 / 김명혁목사
지난 주일부터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성경의 핵심이고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에는 고상한 윤리도 있고, 철저한 사회정의도 있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첫째 나의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십자가는 둘째 나의 말과 설교를 변화시킵니다. 십자가는 셋째 나의 자랑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지난 주일 설교의 내용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을 때 사람의 운명이 변화됩니다. 이와 같은 운명의 변화가 강도에게서 일어났고 바울에게서 일어났고 어거스틴에게서 일어났고 진젠돌프에게서 일어났고 그리고 십자가를 믿는 여러분들과 저에게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여러분들의 운명의 변화인 것을 날마다 믿고 날마다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도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합니다. 두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십자가는 미련함과 약함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미련함과 약함을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고 약하게 보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고전1:18). 십자가는 미련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1:23). 무식하고 불행한 인간들에게 지혜와 행복을 가져 다 줄 하늘의 신이 세상에 내려와서 사람들에게 붙잡혀서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였습니다. 십자가는 또한 약한 것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고전1:23). 유대인들은 강력한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했는데 십자가는 너무 약해서 그들의 기대에 거리끼는 것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개인과 민족을 구원할 메시야가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는 것은 너무나 약하고 너무나 무력하게 보였습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었고 십자가는 약한 것이었습니다. The cross was foolishness. The cross was weakness.
현대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미련한 것이고 십자가는 약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현대인의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현대인의 정치적인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합니다. 현대인의 상식에서도 벗어나고 민족의 문화와 전통에서도 벗어나고 현대인의 개인적인 욕망에서도 벗어납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미련한 것이고 여전히 약한 것입니다. 니체와 같이 권력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여전히 약하고 거리끼는 것이 되고,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현대 지성인들에게 십자가는 여전히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됩니다. 옥스포드 대학의 철학자 A. J. 에어는 기독교의 교리를 멸시하면서 기독교는 "지성적으로 멸시할 만하고 도덕적으로 분개할 만 하다" 라고 기독교를 비난했습니다. "Intellectually contemptible, morally outrageous." 김용옥이란 사람에게도 기독교는 한갓 조소와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미련하고 약한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의 십자가는 미련하고 약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미련하고 약한 십자가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파했습니다. 철학적 지혜로 옷을 입히지도 않고 정치적인 힘으로 가면을 씌우지도 않고 십자가를 있는 그대로 미련한 방법으로 약한 방법으로 전파했습니다.
둘째, 십자가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미련함과 약함인 동시에 지혜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실패 작품도 아니고 하나님의 실패 작품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의 아우성과 로마 군인들의 무력에 밀려서 예수님이 힘이 딸리고 하나님이 힘이 딸려서 저질러진 실패 작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나님의 최상의 걸작품입니다. 물론 희곡적 작품은 아니고 비극적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지 전능하신 지혜와 능력이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조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만들어진 신조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서 양의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실 때 벌써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전날 밤 모세와 아론에게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먹고 그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명했을 때 이미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모세에게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명했을 때 이미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로 하여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라고 예언하게 했을 때 이미 십자가를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사람이 만들어 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신적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첫 설교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2:23). 인간의 불법이 십자가 사건을 발생케 한 것이 사실이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모두 미리 계획된 하나님의 섭리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지혜와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나타난 신적 작품입니다.
1) 첫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지혜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공의가 함께 어우러져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은혜의 손길과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공의의 손길이 함께 어우러져서 나타난 지혜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면서도 동시에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나타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일이 다른 종교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의 종교인 기독교에만 있을 수 있는 사실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들이 범한 죄악에 대한 심판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몸에 모두 쏟아 부으시므로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시고 그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꾸는 모든 죄인들에게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십자가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나타난 곳입니다. 은혜와 공의가 함께 나타난 곳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거나 대항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A. J. 에어나 김용옥 같은 무식하고 건방진 사람들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고 대항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 세상과 우주에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감히 멸시하거나 대항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 둘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는 외형적으로는 약해 보입니다. 실패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저주 받을 인간을 구원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사실 십자가는 유대인과 로마인은 물론 사탄이 보아도 약해 보였고 실패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능력이요 성공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을 멸망시킬 세 가지 원수들을 깨트려 부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멸망시킬 세 가지 원수들은 죄악의 세력과 마귀의 세력과 인간 자신의 세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 세 가지 원수들의 세력을 깨트려 부셨습니다.
첫째 십자가는 죄악의 세력을 깨트려 부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악의 세력을 모두 자기 몸에 받아서 용해시켜 버렸습니다. 원죄와 자범죄의 모든 독소들을 자기 몸에 받아서 용해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들이 범한 죄악 때문에 우리들을 처벌하라고 부르짖는 마귀의 아우성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둘째 십자가는 마귀의 세력을 깨트려 부셨습니다. 사실 마귀는 예수님이 탄생한 때부터 예수님을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므로 자기가 승리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마귀를 결정적으로 때려 눕힌 곳은 바로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마귀는 죄지은 인간은 대적할 수 있었으나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을 대적할 권리는 없었습니다. 마귀는 인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므로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 자신을 대적하는 결과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마귀의 세력을 깨트려 부시는 승리였습니다. .
셋째 십자가는 인간 자신을 깨트려 부셨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원수는 인간 자신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탐욕적이고 위선적인 인간 자신이 인간의 원수였습니다. 십자가는 인간 자신을 깨트려 부신 곳입니다. 인간의 최고 모델인 예수님이 인간 자신을 깨트려 부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을 깨트려 부실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들의 세 가지 원수들을 깨트려 부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곳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한번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
말씀을 맺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누구에게 그렇습니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잡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사시는 구원을 얻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