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날 부는 아릿한 찬바람
설날 처가에 갔다. 세배를 하고 다른 이들이 윷놀이를 하는 틈에 내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냈던 공간들을 돌아보았다. 20여 년간의 세월을 보낸 잊을 수 없는 공간들. 요즘 꿈에도 자주 나타나는데 그 장면은 옛날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다. 감정의 정리를 위해 한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마음 한 구석에 늘 살아 있는데 그 주변을 들르면서도 정작 찾아보지 못한 곳이다. 현재의 상황도 대충알고 예전의 모습은 더욱 익숙한데 그 두 모습이 제각각이어서 같이 만나 서로 확인을 하고 하나로 새겨 넣고 싶었다.
바람은 조금 찼지만 화창한 날씨다. 운동화를 신었으면 좋겠지만 그리 높거나 험하지 않으니 고생한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것 없는 걸음이다. 20여 년 산 곳이라 눈을 감으면 큰 길과 도랑과 골목까지도 쉽게 되살아나고 몇 걸음쯤 걸으면 어디라는 것도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런데도 눈을 뜨면 현실은 많이 다르다. 먼저 살던 집을 가보았다.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는 주민센터가 있고 절이 있고 집 앞의 산이 있다. 물이 흐르던 도랑은 복개(覆蓋)되어 있어서 생경하다. 골목을 보니 옛 감각이 살아났다. 40여 년 전 골목. 그런데도 당시만큼의 깔끔함이 없다. 몸의 감각을 더듬어 따라가 보니 왠지 길들이 기억속보다 조금씩 짧아져 있다. 갈래 길을 지나 열다섯 발자국쯤 가면 있었던 동네 샘 태용이네 집, 분명했다. 거기서 열서너 걸음 가면 층계와 대문이 있던 무희네 집, 담만 남아있고 집은 형체도 없다. 다시 니은자(ㄴ) 형태로 돌면서 자리 잡은 바위백이 집, 빌라였던 모양인데 비운 지 오래된 듯 인기척이 없다. 이미 길도 허물어지고 형편없이 좁아져 있다. 눈감고 몸의 기억으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잡목과 풀들이 우거져 그럴 수도 없다. 우리 집 밑의 은수네 집, 바로 윗집이 우리 집이었는데 현실은 기억과 달리 어설프다. 다리도 없고 고개도 없고 길이 없어져 너무도 낯설다. 절집이 폐허인 채로 남아있다. 한쪽 외벽의 독특한 동자승 그림이 절이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 옆으로 말 무덤이 있고 밭이 있고 우리 집인데, 너무도 간격이 좁다. 구조가 분명히 우리 집이다. 15년 가까이 살았던 어린 날의 공간이다. 패찰에는 그 시절과 지번이 약간 달라져 있다. 내가 거닐고 뛰놀던 밭 사이의 길들과 산도 그 모습을 잃고 있다. 추억 속에는 너무도 선명한데 현실이 오히려 흐릿하다. 도시가 확산되며 살던 곳에 으레 길이 넓혀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섰으려니 했더니 산을 보호해 도시를 푸르게 하려함인지 산 밑 마을 일부가 없어지는 꼴이 되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어렵지만 꿈을 키우는 한 가족이 내 살던 곳에 살고 있겠지. 그 과수원 너머로 넓은 길이 뚫리고 차들이 심심찮게 다니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 뻔 했다. 오랜 세월 초등학교를 다니던 지름길은 아예 없어져 가볼 수 없다. 한동안 다니던 아랫길을 걸어본다. 마음이 스산하다. 이제는 꿈에도 그 고운 길 밭과 도랑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학교에서 돌아와 뛰어 놀던 곳들을 돌아본다. 덮여진 도랑 뒤에 자리했던 추억의 건물들이 옛날의 모습대로 마음속에 살아난다. 큰 다리와 이발소, 주현네 담배가게와 만화가게, 강씨네 술집, 쌀가게와 동장 아저씨댁 과자집 국수집 그 옆으로 제기차기 딱지치기 하던 공터. 다 사라지고 새 건물들이 즐비하다. 둑 따라 거닐며 메뚜기 잡던 냇가는 간데없고 포장된 도로만 눈에 들어온다. 한 여름 놀이터가 돼 주던 밤나무산과 도랑가에는 교회와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한여름 아카시아 향기를 풍기던 양관 길은 긴 세월 자리를 지키는 건물로 확인한 위치는 그대로나 구름다리가 없어지고 나무들도 그곳에 없었다. 40여 년 전 친구들과 오가던 길을 홀로 걸으니 그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광선 기붕 장현…. 그들과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이다. 함께 다니던 골목길, 걸음걸이들, 보냈던 적지 않은 시간들. 하지만 이제는 한 친구를 빼고는 안부도 모르고 연락도 없이 산다. 초등학교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중학교는 옮겨가고 그 자리에 대단위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다. 평탄하고 바르게 넓게 포장된 새로 난 길에 밀려난 좁다란 옛길을 천천히 걸으며, 넓은 길은 차를 위한 길이요 좁고 오래된 길이 사람을 위한 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새로 난 큰 길에서 한두 집을 건너면 옛집들이 보이고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골목들이 나온다. 듬성듬성 눈에 띄는 단층집과 기와집들을 유심히 살피며 그 옛날 기억을 불러내려 애를 써 본다. 돌연 길가에 음식점 간판을 달고 있는 일층기와집과 골목의 기억이 살아나면서 까만 교복에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걸어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긴 개울을 따라 눈 녹은 물들이 졸졸졸 흐르고 따듯해진 날씨에 동네 아줌마들은 방망이 두드리며 빨래를 하고 학교 갈 나이가 안 된 아이들은 개울을 따라 징검다리를 뛰어다니며 자기들끼리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경로당 노인들은 낮술 한잔씩을 하셨는지 붉어진 얼굴로 개울둑을 산책하고 계신다. 다리 위로는 리어카를 끌고 고물장수가 가고 조금 더 고개를 들면 산 밑에 절이 있고 옆으로 우리 집이 보인다. 서둘러 가도 아무도 없는 곳, 대문도 없고 방문도 잠겨있지 않고 먹을 것도 읽을 것도 없는 우리 집, 그래도 나 혼자 몇 시간이고 묻고 답하며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며 놀던 곳. 그곳이 이제는 이 땅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내 마음에 아릿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간다. 봄은 오고 있는데 나는 춥다.
첫댓글 세월에 밀리고 개발에 밀려간 고향 영상이 아릿한 찬바람이 되는 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개학하면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혼자 몇 시간이고 묻고 답하며 구슬치기 딱지치기하며 놀던 곳.
그곳이 이제는 이 땅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내 마음에 아릿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간다..."
처가 외출 하시면서 건지신 글 감상 잘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