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
고전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전 1:26-31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여러분 가운데 과연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권력을 잡은 사람이 있습니까? 부자가 있습니까? 27)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어리석고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여러분을 일부러 선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현명하고 훌륭한 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28)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하찮은 사람들을 불러 쓸모 있게 하심으로써 이 세상에서 위대하다고 하는 자들을 아무 것도 아닌 자로 만드셨습니다. 29)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30)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을 얻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덕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우리에게 알리는 일을 그리스도께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셔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를 바르고 거룩하게 하고 또 우리를 자유롭게 살게 해주시려고 친히 그 몸을 내어 주셨습니다. 31) 그러므로 성경에도 ㄱ)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만을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ㄱ. 렘9:24)
사도 바울은 세상의 미련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심(26-29) 분명히 고린도의 성도들은 자만심에 빠져 스스로 고귀하다는 우월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오만을 용납하지 않고 진실을 말합니다. 고린도의 성도들 대부분은 지혜자나 능력자나 고귀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믿기 전에 그들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과 약한 것들과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택하여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셨고 그 결과 그들이 고귀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미련하고 약한 자들을 택하신 이유를 밝힙니다. 그것은 세상의 지혜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려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거부하는 세상의 지혜자들을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잘난 체하는 자들을 미워하시고 겸손하게 십자가를 믿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21).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30-31) 본 단락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24)이신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되셨으니”는 예수께서 믿는 우리의 존재 안에 들어오셨음을 전제합니다. 그분께서 믿는 우리의 존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습니다. 곧 이 네 가지 신령한 은혜는 독립적으로 우리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오직 예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신령한 지혜이며, 의로움은 죄의 책임으로부터 면제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적극적인 의로움이며, 거룩함은 예수를 닮아가는 성화이며, 구원함은 십자가의 은혜로 누리는 영원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합니다(렘 9:23-24). 주님 안에서 받은 이 신령한 은혜만이 영원하며, 이 은혜를 오직 주님 안에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예수께서 당신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고 있는지 말해 봅시다.
십자가는 변화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 될 때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가정이 변합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십자가의 진리는 지성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가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며 믿음의 대상이기에 믿을 때 강하게 역사합니다.
< 설 교 >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전 1:26-31 / 조용기목사
<서론>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교만하게 되어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는 것을 금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높이는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하다가 자기와 후손들의 삶을 망쳐버렸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사십주 사십야 금식하셨을 때, 마귀가 와서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만들어주겠다고 자기보고 절 하라고 꾄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언제나 자기의 비천함을 깨달아 알고, 천지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도록 하나님은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자기의 잘난 것보다 자기의 못난 것을 두드러지게 알아 겸손하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 본론>
1. 유일무이하신 하나님의 능력
천지간 유일무이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하나님처럼 섬기고 예배드리고 경배할 상대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야훼 하나님은 유일한 창조주요, 만물을 다스리는 운행하시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로 2절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26절에는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 되니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나사로야! 나오라!”하는 말씀 한 마디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포도주 말을 하니깐 내 눈 앞에 포도주 병이 보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언지 잘 모르시는 분이 선물로 추석에 잘 마시라고 저에게 포도주 두 병을 보냈어요. 고맙습니다. 좋은 추석을 맞이하라고 자기가 아는 바 전심을 다해서 선물을 주신 것이니 나도 그 선물을 도로 잘 포장해서 보낼까 싶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의 특징
그러면 하나님이 택하신 우리들의 신분은 어떠한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며칠 전에 텔레비전에 인터뷰하는 데 보니깐, 우리 한국이 발전을 하려면 머리가 좋은 사람들,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어가지고서 사회 각지에서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야 된다고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에 아멘을 안 하는 것은 우리 한국에 예수를 믿어 나라의 중추가 된 사람들은 다 중간쯤 된 사람인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도 많지 않고, 총명이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도 많지 않고, 교육을 잘 받은 자도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을 우리가 보면,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미안한 말이지만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굉장히 지혜로웠으면 하나님 믿고 안 나와요.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하여서 무엇인지 착착 일을 잘 만들어 내는 분도 많지 않습니다. 가문이 좋은 자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 믿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가 잘 되느냐?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잘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잘난 분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면,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나서 자랑하지 아니하고, 주님 때문에 자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로 29절에 보면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미련한 사람을 택해가지고서 지혜로운 자를 물러가게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가 대단한 것입니다. 별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큰일을 맡아서 잘 해나가는 것을 보면 희한합니다. 하나님이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한다. 강한 자가 일어나서 큰 소리를 하는데, 약한 자가 그보다 더 큰 일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이 약한 자를 택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천하고 멸시 받는 자가 세상에 높고 귀한 자보다 존경 받습니다. 없는 것을 택하사 있는 것보다 더 높게 해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들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 무소부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손에 얹혀 놓으면, 하나님과 같이 전지전능 무소부지한 능력을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의지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났다, 못한다, 안 된다.”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못나고 지혜롭지 못하고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났으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생각이 긍정적이게 돼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못났으나 잘났고, 약하나 강하고, 천하나 예수님 때문에 지혜롭게 된다고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꼭 해야 될 꿈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소원하는 꿈, 여러분 마음에 소원하는 꿈을 안 가진 사람 없을 것입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다 마음에 간절히 소원하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꿈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 꿈이 이루어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들이 그 마음에 꿈을 성취하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고 잠언서 29장 23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서 15장 33절에는 ‘야훼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교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진실로 어떠한 존재인지 우린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로 31절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님 안에 넣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만세 전번에 보시고 사랑하셔서 예수님 안에 넣었습니다.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고, 의로움이 되고, 거룩함이 되고, 구원함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자로서 함께 하시고,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가 구원 해주는 자로서 하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예수님은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시느냐? 내 속에 계신 것입니다. 그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우리의 지혜가 되기 위해서 와 계십니다. 의로움, 죄를 다 청산하고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사람처럼 만들어주는 의로움이 되셔서 오시고, 거룩함이 되어서 허물을 다 벗겨 버리고, 거룩함이 되어서 우리에게 와 있어요. 영생을 얻어 영원히 사는 구원자로서 우리와 함께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혼자 있지 않습니다. 우리 플러스(+)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예수님 플러스(+) 우리.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서 지혜롭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고, 의로운 자로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사람 같이 인정을 받는 신분을 갖고 거룩한 예수님의 성품이 우리의 것이 되어서 거룩한 신분을 갖고, 구원 받은 사람이 되고, 버림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 예수님의 것이 내 것이 되었으니깐 ‘난 이래봬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움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함을 가지고 있다. 나는 구원 받은 사람이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은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자랑해야지 내 인간으로서 자랑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9장 23절로 24절에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와 같이 계신 하나님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거나 용감한 용맹성을 가졌다고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돈 많다고 자랑하지 말라. 여러분이 자랑할 것은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자랑스러운 것이고,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가 하나님이신 줄 깨닫고 아는 자가 자랑할 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계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랑과 은혜를 가지고 자랑해야 될 것입니다.
3. 육체의 가시와 은혜 안의 삶(바울의 육체의 가시와 극진한 영적은혜를 보존하기 위하여)
우리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제자 중에 가장 존귀하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건 사도 바울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것입니다. 근데 바울 선생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사도로 사역을 하는데, 사람들이 핍박을 많이 했습니다. 사도라고 이름을 불러주지도 아니하고, 지식도 별 볼일 없고, 사람들이 사도 바울 선생은 진짜 사도는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바울은 겸손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고 전도한 사람인데, 바울이 나중에 하나님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서 자기가 열두 사도보다 못한 점이 없고, 하나님이 자기를 사도로 만들어서 내어 보내주신 것을 자랑하는 자랑을 여기 좀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 선생을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도, 교만하거나 인간자랑을 하지 않도록 단단히 돌보시고 계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 선생의 생애를 바라보고, 우리도 그에게 배워야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이 고린도 인들이 “바울 선생은 무자격자”라고 비난할 때, “나도 내 자신을 자랑할 수가 있다”고 그가 자랑을 적어 놓은 것을 우리가 읽어 보십시다. 고린도후서 11장 16절로 33절에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내가 조금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고린도후서 11장 16~29절)’ 사도 바울 선생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멸시하니깐 “내가 바보 같은 말이지만은 나도 자랑을 해보겠다.”고, “위대한 사도 지도자들하고 내 인생을 비교해 보아서 못된 적이 어디 있느냐”고. 사도 바울 선생은 여러분 읽은 것을 들은 거와 같이 고생을 많이 한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아니하고, 훌륭한 주의 종으로서 일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린도후서 11장 30~33절)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예수님께 직접 배운 것이 아닌 엉터리라고 비난하니깐 사도 바울 선생은 고린도후서 12장 1절로 6절에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나라의 지식을 배웠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린도후서 12장 1~2절)’ 자기가 하늘나라로 삼층천으로 올라갔는데, 자다가 올라갔는지, 깨어있어서 올라갔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하게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린도후서 12장 3~4절)’ 사도 바울 선생은 천당 셋째 하늘에 올라가서 상상할 수 없는 말을 듣고, 구경을 하고 왔기 때문에 천당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몸 안에 그대로 올라갔는지,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와서 올라갔는지 구별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도 바울 선생의 이야기를 통해서 장차 우리 몸을 떠나면 셋째 하늘이 우리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고하고 고통을 많이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앞날에는 확실한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즐겁게 인생을 재출발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고린도후서 12장 5~6절)’ 더 이야기는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 선생은 몸에 병이 들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사도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안수해서 병을 고쳐주면서 왜 자기는 병들어서 고생을 하느냐? 사도가 아니다.”고. 그런데 사도 바울 선생은 무슨 병이란 말은 안 했었으나, 아주 치명적인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 선생이 시력이 나빴던 것 같아요. 눈병이 있어서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냐. 그가 편지를 쓰는데 직접 편지를 안 쓰고 전부 대필을 시켰단 말이에요. 눈이 밝으면 자기가 직접 쓰지 왜 대필을 시킵니까? 그런데 바울 선생의 편지는 모두 다 대필인 것입니다. 좌우간 살아가는데 그렇게 어려운 것으로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그의 눈이 나빴던지 다른 몸에 무엇이 나빴는지, 나쁘게 해서 교만하지 않도록 만들었단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로 10절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12장 7절)’ 여러분 묵시를 크게 받고 계시를 크게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계시나 묵시를 크게 받으면은 “이것 봐라.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아예 교만심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그 교만을 낮추기 위해서 하나님이 마귀에게 적당한 권한을 허락해서 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는 고통스러우면 교만해질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게 되거든요. 그러므로 묵시를 많이 받고 고통당하고 사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런지 모르겠어도, 나는 묵시를 덜 받고도 건강하게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병들어있다는 것은 참 심히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병드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글에 보면 죄 사함을 줌과 동시에 병든 자를 고치는 말씀이 늘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죄인에게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을 말씀하시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심방해 가면서 병든 자를 고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별나게 계시를 받지 않은 우리들로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병든 사람 고쳐달라고 떼를 써야 됩니다. 마귀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려고 할 때, 예수님께 나아가서 우리가 치료 받고, 건강하고, 명대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병든 사람들이 제게 안수 받으려고 하는데 겁이 나서 못 온다고 그러는데, 내가 협박하고 공갈하는 사람 아니니깐 안수 받고 싶은 사람은 오세요. 언제나. 서로 안수 하면 내 힘으로 안 될 것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빌려서 기도해서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간곡한 기도가 하나님을 감동하시고, 하나님이 그 믿음을 통해서 기적을 행하여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린도후서 12장 7~10절)’ 교만하면 하나님 은혜는 떠나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마귀의 공격을 허락해 놓아서, 마귀가 다니면서 자꾸 공격을 하니깐 약할 때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고 그러므로 은혜가 떠나지 않고 몸에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 있지 기도 안 하면 안 되는데, 교만해지면 기도를 안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교만하지 못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전쟁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에 따르는 32,000명의 장정들 가운데 300명만 데리고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적군이 수 만 명이 쳐들어 오는데, 기드온은 32,000명을 데리고 그도 적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300명만 데려와라. 300명.” 그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내 힘으로 이겼다”고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인간을 자랑하고 인간을 뽐내는 것을 참으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해서 일을 해서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은, 인간 자랑을 하는 것은 하나님은 크게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사사기 7장 2절에 보면 ‘야훼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구원을 얻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잠언 6장 16~19절에 보면, ‘야훼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거 다 심히 어려운 것입니다. 교만한 눈, 교만해서 번쩍번쩍하는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시고, 거짓말 잘하는 자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무죄한 죄의 피를 흘리는 손과 죄 없는 사람 죽이는 것,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말 하는 망령된 증인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는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은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을 낮추시겠다’고 말씀(시편 18편 27절)하시는 것입니다.
< 결론>
바울 선생은 말씀의 지식과 영적체험을 놀랄만치 조화롭게 받았습니다. 인간으로서 바울 선생만치 영적 세계를 두루 가보고 체험한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나 영적으로나 교만하지 못하도록 사탄의 사자, 육체의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육체의 끊임없는 고통이 자기 인간이 스스로 설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선생은 그렇게 묵시를 많이 받은 사람이고, 그렇게 지식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고, 교만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 바울 선생과 같은 생활을 우리가 옳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지에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분이 계시지 않으므로, 유일무이한 하나님을 섬기고 그 다음엔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서 겸허하게 지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어서 예수님이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이 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게 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꿈을 갖게 되고, 믿음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선생 같은 사람 이방인의 사도로 나가서 거대한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 믿는 것 바울 선생의 덕분입니다, 이방인인데. 그렇게 해서 계시를 엄청나게 많이 받았고, 지식도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낮추기 위해서 마귀를 보내가지고서 늘 치게 한 것입니다. 바울 선생은 육신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그를 늘 괴롭히므로 하나님께 늘 기도하고, 하나님 도움을 받고,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 오만하지 아니하고, 착하게 살므로 하나님이 끝까지 바울 선생을 축복해주시고 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교만하지 마십시다. 스스로 낮추시고, 겸허하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이 나의 지혜가 되시고, 주님이 나의 의로움이 되시고, 주님이 나의 거룩함이 되시고, 주님이 나의 구원이 되신다. 내가 잘나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께로서 나서 예수님 안에 있어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칭찬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속에서 우리와 더불어 함께 살므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아서 우리가 잘 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여러분과 같이 해서 살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좋은 대학을 못나오고 일등 생활을 못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계시면 그리스도의 지혜가 그 모든 것을 다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교육이요, 여러분의 재산이요, 여러분의 자랑이요,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인 것입니다. 아멘.
성도의 스펙 쌓기
고전 1:26-31 / 이성우목사(왜관교회)
오늘의 설교 제목에 포함되어 있는 ‘스펙’이라는 단어는 취업을 하려고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업이 원하는 학력이나 학점, 그리고 자격증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치열한 기업 간의 생존 경쟁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기업의 변화와 혁신, 발전을 원하는 기업들은 보다 나은 조건을 가진 인재들을 사원으로 채용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요즈음 젊은이들은 자기가 원하는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조건을 갖출 수 있을까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며 소위 ‘스펙 쌓기’ 경쟁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스펙’ 이라는 단어가 우리나라에서 쓰인 지 올해까지 햇수로 꼭 10년이 됐습니다. 국립 국어원은 '2004년 신어' 보고서에서 ‘스펙’ 이라는 신조어가 경제 불황으로 취업난이 심각해진 우리 사회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소개했습니다. 지난 6월 13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04년 상반기 취업자 수와 올해 상반기 취업자 수를 비교해 보았더니 다행스럽게도 취업자 수가 꾸준히 증가한 것으로 발표했습니다.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정말 피 말리는 경쟁을 하고 있는 기업들이 신규 사원 채용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어쩌면 이 문제가 기업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사활을 건 경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떤 스펙을 갖춘 성도들을 일꾼으로 쓰시기를 원하시는 걸까요? 만약 하나님께서도 어떤 특별한 스펙을 갖춘 사람들만 일꾼으로 쓰신다면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될까요? 다시 말하면 과연 하나님의 일꾼 선발 기준이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저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건강한 생각과 분명한 확신을 가진 성도라면 구원받은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을 받고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하여 헌신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궁금증과 호기심과 관련해서 오늘의 본문 말씀인 고린도전서 1장 26절~31절까지의 말씀은 분명한 대답을 들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일꾼을 선택하시는 기준이나 스펙이 이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과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그의 첫 번째 편지의 서두인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부르셔서 그의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 그리고 복음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일꾼으로 세우시는가를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26절~2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일꾼 선발 기준과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시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밝히시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는 문제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경 말씀이 있다면 아마도 사무엘상 16장 7절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 말씀은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 왕의 아버지 이새의 집에 찾아가서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울 왕의 뒤를 이을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신, 구약 성경 전체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인간적으로 그렇게 좋은 스펙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누구라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선택되어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감당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인간적인 조건, 곧 스펙에 의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이요 부르심이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의 사사기에 등장하는 13명의 사사들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그들은 결코 뛰어난 스펙을 갖춘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음을 성경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예로 사사 입다는 기생이 낳은 자식으로 형제들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잡류들과 함께 떠돌이 인생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사 삼손은 나면서부터 나실 인으로 구별되어 태어났지만 그는 인간적인 약점과 허물, 그리고 실수투성이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사 입다는 암몬 족속의 압제에서 자기 민족을 구한 사람이며, 삼손은 블레셋의 40년 동안의 오랜 압제에서 자기 민족을 구해 낸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사들의 부르심과 활동상을 통해서 성경은 아주 분명한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한 부르심이요 그런 까닭에 그들의 활약상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증거하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볼 때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서 4명의 여인들도 예외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네 명의 여인들은 다말과 라합, 그리고 룻과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인간적인 조건으로 볼 때 도무지 예수님의 거룩한 족보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족보에서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는 과정에서 중요한 몫을 해낸 여인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직접 임명할 수 있는 고위직이 약 3,000명이라고 합니다. 대통령에게 어떤 직책을 받아 임명된다면 개인뿐 아니라 가문의 큰 영광일 것입니다. 작년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다트머스 대 총장이던 김용 박사를 세계은행 총재에 임명하였습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플뢰르 펠르랭(한국명 김 종숙)이라는 한국 출신 입양 인을 프랑스의 장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시편 21편을 보면 다윗 왕조의 왕을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시고 그의 후손이 계속 왕위를 물려받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택함을 받았다는 사실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받은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다윗은 목동이던 자기를 일국의 왕으로 택해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했습니다. 다윗의 대를 이은 후대의 왕들도 이런 하나님의 신성한 언약을 믿고 나라를 통치해 나갔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대는 다윗 왕이 통치하던 시대입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을 많이 정복하였고 영토를 가장 넓게 확장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일찍부터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민족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았는데, 이런 선민의식이 이스라엘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는 거룩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이 사실과 관련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데, 새 번역 성경으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성도들이 쌓아 나가야 할 스펙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여주듯이 믿음과 순종이며, 이삭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헌신일 뿐만 아니라 야곱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간절한 열망입니다. 더 나아가서 요셉의 경우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에 대한 신뢰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을 살리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서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대한 열정과 충성이며, 다윗에게서 발견되듯이 하나님을 순수하게 경외하며 의지하고 찬양하는 신앙적인 자세이며, 사사들과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제자들에게서 발견되어지는 성령의 충만함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직분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직분은 세상의 직분과 비교할 수 없이 신성합니다. 우리는 늘 주님이 직접 나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자들이 하는 일을 모두 형통하게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맡겨진 일에 최선으로 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삶을 사심으로써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는 성도들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기준
고전 1:26-31 / 이필재목사
사람은 누구나 매일같이 어떤 것을 선택하면서 살아갑니다. 오늘 아침에도 여러분은 오늘 교회 가는데 어떤 것을 입고 갈까 선택하셨지 않습니까? 또, 몇 부 예배를 갈까 선택해서 금 이 예배를 오신 것입니다. 선택이 잘되면 아주 행복하고 선택이 잘못되면 좀 고난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는 제3대 담임목사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잘되기를 온 교회가 기도하고 청빙위원들은 너무나도 고생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선택 기준이 뭔가? 서면으로 발표했습니다. 연령은 40세 이상 55세 미만 정도이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했고, “목사로서 필요한 학문인 MDiv학위를 소유하신 분들이어야 한다. 초대목사와 2대목사가 다 신학의 방향이 있었는데 그 방향과 다 큰 차이가 없었으면 좋겠다. 목사 안수 받은지 7년 이상 된 목사이어야 된다.” 이런 조건들을 발표했는데 사실 그런 객관적인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어서 선택이 쉽지 않습니다. 설교의 지혜라든가 말씀의 영감성이라든가 인품, 외모 이런 종합 평가를 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교회에 신문 10가지가 배달이 되는데 5개는 5대 신문이고 5가지는 교계 신문입니다. 교계 신문에는 1년 내내 목사 청빙 광고가 빼놓지 않고 늘 나옵니다. 저도 관심이 있으니까 다른 교회는 어떻게 목사를 청빙하는가 늘 봅니다. 거기 빼놓지 않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말입니다. “최근 3개월 이내에 찍은 명함판 사진” 이게 무엇입니까? 인물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가족사진도 요구합니다. 건강진단서, 과거에 상 받은 거나 혹은 벌 받은 것도 숨기지 말고 밝혀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몇 년에 한 번씩 지도자 선택을 합니다. 성남시장이 누가 되어야 성남시민이 행복할까? 서울 시장은 누굴 해야 할까? 국회의원, 대통령까지 항상 선택합니다. 선택 기준은 다 다릅니다. 여러분의 기업에서 직원들을 뽑을 때도 조건이 있지 않습니까? 이 기업에 유익할 수 있는, 또 능력 있는 사람, 친화력이 있고 문화코드가 같은 사람을 다 보지 않습니까? 제가 청년들과 대화할 때 늘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의 결혼 상대자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뭐냐? 경제 능력, 외모, 성격, 종교, 가정 배경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많은 퍼센트는 삶이 재미있는 사람이 좋다고 합니다. 아무리 성공했으면 뭐하느냐? 삶을 재미있게 이끌어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다고 합니다. 재미있게 사는데 포커스를 많이 두는 문화를 청년들에게서 발견합니다. 오래 전에 제 아들이 총각일 때 누가 소개를 해서 아가씨를 한번 만나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다리지 않습니까? 아들이 갔다 오기에 우리는 “잘 될 거 같으냐?” “아니요.” 왜 아니냐고 물었더니 아가씨 첫 번째 질문이 이거라고 합니다. “개 기르는 거 좋아하나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지금 기르고 있는 개가 있는데 시집가도 그 개를 가지고 가야 한답니다. 그런 사람한테 “아니요.” 대답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다른 이야기는 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썰렁하게 끝이 나서 조그만 강아지 하나 때문에 틀어졌답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뭔가?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동기부터 살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고린도 도시는 그 당시에 세계 최고 수준의 학문 문화가 발달한 곳입니다. 철학의 도시라서 수사학과 변증학이 발달했고 사변적 사고에 의한 합리주의가 발달해서 논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 무식하다고 평가해버렸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적 사변 사고가 발달한 도시로 사실 이 기초에서 서구 문화가 발달했지 않습니까? BC 146년 로마의 집정관 무미우스가 함락시켜 도시를 다 불태워 폐허가 되었는데 100년 후 BC 44년에 줄리어스 시저가 이 도시를 재건했습니다. 당시는 인구 10만 정도가 되어도 대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는 75만의 인구가 살았습니다. 상업을 위주로 하는 항구도시라서 경제 활성화되고, 돈이 돌아가니까 유흥문화, 잡다한 종교가 많아지고 거대한 신전 건축이 잘 이루어진 곳입니다. 바울은 AD 50년 가을부터 52년 봄까지 18개월 동안 이 곳에 가서 전도해서 고린도교회가 생긴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절대 논리적 진리만을 추구하는 철학의 도시에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하니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기독교의 최대의 진리는 두 가지에서 시작하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동정녀이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처녀가 아기를 낳았다는 말을 우리보고 믿으라는 거야?” 일반성 진리가 없지 않습니까? 마지막에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아니, 죽어서 무덤에 장사지낸 사람을 살아났다고 지금 이야기하는 거야?” 일반성 진리가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보고 “당신 정신상태가 정상이요? 우리더러 지금 고린도에 와서 그런 진리를 믿으라고 말하는 거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의 복음의 확신은 지식인들에게는 배척을 당하고 대중에게 잘 먹혀들어가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고린도교인들을 보고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도다.” 이런 조건은 고린도뿐만이 아니고 어느 나라나 선교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선택 기준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대중 앞에서 설교를 했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더니” 베드로는 본래 학문이 없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런 말을 다해? 공부도 안한 사람이잖아!” 이렇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복음의 초기 역사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전도가 되었습니다. 학문 배경이 낮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부분은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역 성격을 말씀하실 때 누가복음 7장 22절 “내 사역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거기 거론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은 그 사회에서 약자들임을 예수님이 발표하셨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니까 자연이 연결되는 문장이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이러했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 초기 역사에 시골 교회들은 너무나도 빈약했습니다. 동네 이장 정도만 교회 나오시면 교회 경사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장 나오신다고 좋아했습니다. 파출소 경찰관 하나 나오면 그 교회는 대단한 인물이 하나 나오는 것 같이 했습니다. 지난 주간에 경찰서 서장님, 경찰들과 식사를 나누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파출소 순경 한분과 너무 좋은 추억이 하나 있어서 이말 하기를 즐깁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을 쳤습니다. 새벽종을 치는데 소리가 굉장히 큽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한번 울리면 “뎅그렁!” 저쪽으로 한번 울리면 “뎅그렁!” 울리는데 고요한 마을에 새벽 종소리 때문에 잠을 다 깬단 말입니다. 청소년 세 명이 돌아가면서 교대로 종을 치는데 그 중에 제가 하나였습니다. 나이가 16, 17세이었습니다. 그러니 잠깬 동네 아저씨들, 특히 건달패들이 가만히 계셨겠습니까? 저만 지나가면 핍박을 하는 겁니다. 와서 다짜고짜 멱살을 팍 잡는데 “어? 왜 그러세요?” 그러면 아주 육두문자도 그런 쌍욕을 할 수가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또 종을 치면 대가리 뽑아서 어디다 집어넣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고민되었습니다. ‘어휴! 내일 아침에 종을 치면 나는 머리 뽑힐 텐데 어떡하지?’ 그러면 어떡합니까? 하지만 저는 ‘에라, 죽여라!’ 계속 종을 쳤습니다. 그러니 한 동네에서 어린 사람이 종을 친다고 죽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파출소에다 민원을 넣은 것입니다. “이보쇼! 교회 종 못 치게 하시오. 우리 모두 잠 못 잡니다. 경찰관이 뭐야? 이것도 못하고….” 파출소에서는 ‘종 못 치게 하면 종교 핍박이라고 할 텐데….’ 고민인 겁니다. 어느 날 제가 파출소 앞을 지나가는데 경찰관 아저씨가 “야! 너 이리 와봐라!” 그때는 순경이 부르면 덜덜 떨었습니다. “얘?” “아니, 괜찮아. 이리 와서 앉아봐. 네가 그 새벽에 교회 종 치는 얘지?” “네!” “그렇구나. 괜찮아. 나는 이 동네 경찰관으로 부임해서 와서 고민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옛날 시골에 날마다 민원이 들어오는데 어떤 놈이 닭 훔쳐갔습니다. 우리 밭에 수박 다 따갔습니다. 참외 다 따갔습니다. 고구마 다 캐갔습니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이 장난삼아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민원이 들어오는데 경찰관도 밤에 잠을 자야지 그것을 어떻게 잡으러 돌아다니느냐? 그런데 너 같은 얘는 남이 닭 잡아먹고 수박 따는 시간에 기도를 하기 위해서 교회 종을 치러 교회 간다니 경찰관이 보기에 너 같은 시민은 아주 훌륭한 모범 시민이다.” 그러니까 그때 내 마음이 막 풀어지는 겁니다. “너 같은 모범 인간은 우리 같은 경찰관들이 너무 좋다. 말썽 아무 것도 없다. 민원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민원이 있다. 종소리다. 이거 어떡했으면 좋겠냐?” 글쎄 그때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너무 신기합니다. “아저씨! 그거 간단합니다. 아저씨만 교회 나오면 아무도 말 못합니다.” 그러니 이 분이 민원은 해결해야 되겠고 이것도 저것도 안 되니까 방법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자기 아내를 자기가 전도해서 내보냈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교회에 나오자마자 얼마나 성령 충만해졌는지 그 다음부터 동네 사람이 뭐라고 불평하면 “뭐요?” 꼼짝 못합니다. 우리나라는 기독교 문화와 같은 국가로 변했습니다. 어느 집단을 조사해도 종교는 기독교인이 제일 많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11명이었는데 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국회의원 종교조사하면 기독교가 제일 많이 나옵니다. 옛날에는 하층 계급, 그러니까 자연히 그 다음 말이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여기서 능한 자가 뭐냐? 실력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실력 없는 사람만 모였다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에는 우리 교인들이 구호물자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만 나왔습니다. 저도 많이 얻어 입었습니다. 미국 교인들이 입다가 보낸 구호물자 많이 입고 자랐습니다. ‘성경구락부’라는 단어를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일반 중고등학교에는 가난해서 못갑니다. 그러한 학생들을 선교사들이 교회에 모아놓고 ‘성경구락부’라고 해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쳐주는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난한 학생들은 정부가 인정해주지 않는 곳이었지만 공부하기 위해서 거기에 모여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선택을 하시는가? 하나님 선택에 대한 신학적 표현이 있습니다. 불가항력적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을 보시면 하나님의 선택이 자기 의사가 개입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세계 3대 문명 발상지 중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 배웠잖아요?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 종을 시켜서 너는 내 며느릿감을 메소포타미아에 가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가서 데려왔지 않습니까? 거기가 아브라함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인류 최초의 문명과 문화의 장소에서 평안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별안간 그를 불러서 제일 먼저 명령하신 일이 “떠나라. 메소포타미아를 떠나라.”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을 불가항력적 자유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 때문에 고생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가나안 땅에 갔다가 애굽 땅까지 식량 구하러 방황했습니다. 낯선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까봐 남매로 가장하는 촌극을 꾸미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결국 부족 왕에게 사라를 빼앗겨 외롭고 슬픈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절대 끊이지 않습니다. 불가항력적 선택입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 여러분도 똑같이, 저도 똑같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선택의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능력 있는 자나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의 택함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련하고 지혜 없고 가난하다고 하나님 앞에서 열등감 갖지 말고 소외감 갖지 말라고 고린도교인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층 계급의 교인들을 놓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유대 나라 왕 될 사람을 찾아 나섰을 때 이새의 집 여덟 아들 중에 누구를 선택합니까? 막내 소년 다윗을 선택합니다. 사실 성경 말씀을 보면 다윗은 그의 아버지조차도 선택권에서 제외시킵니다. “저 얘는 안 됩니다.” 그런데 선택했지 않습니까? 야곱의 열 아들 가운데서도 막내인 요셉을 선택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왜 하나님은 제일 처음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할 때 유대인으로 하셨는가? 로마인으로 선택했다면 훨씬 효과가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바로 그런 판단이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점입니다. 선택을 받은 모든 사람의 판단이 “왜 내가 그런 엄청난 하나님의 일에 가담해야 합니까?”라는 자신은 적합자가 아니라는 판단을 밝혔지만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이런 말이 지금 바울의 고백에서 나왔지 않습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을 비교해서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니라.” 이것을 패러독스라고 합니다. 역설적 진리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도리어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람이 간사해서 내게 어떤 능력이 표현될 때는 그것이 자신의 실력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되고 그로인해 교만한 죄를 범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가 그토록 소원한 언어 장애 해결을 끝까지 들어주지 아니했는가? 그것까지 들어주셨다면 그 민족 가운데는 모세 종교가 생겼습니다. 해결되지 아니한 약점 하나를 끝까지 약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은 모세의 약함을 통해서 강하게 나타나는 패러독스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많이 하면서 바울 사도가 자기의 약점인 이 가시를 빼달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만약 그 가시를 빼주었다면 바울 종교가 생겼습니다. 정말 가능할까? 바울 당시에도 바울을 보고 당신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라고 엎드렸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이단 교주들은 모두 자신이 재림주라고 말을 하는데 수만 명씩 전 재산과 시간을 다 바쳐가면서 재림주라고 믿고 있습니다. 바울과 모세는 넉넉한 자격자입니다. 오늘 성경말씀 29절에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이사야 예언자는 53장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시야는 마른 땅에 나온 줄기 같아서 곧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도 똑같습니다. 왜 메시야는 로마 황제 아들로 세상에 오지 아니하시고 나사렛 빈민촌 노동자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는가?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 상식의 차이를 말해줍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권에 내가 들어있다면 우리는 어떤 믿음의 방향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 기독교 진리는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에 자신의 본질을 잘 정리해야만 기독교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내가 누구인가? 기독교는 절대 자학종교도 아니고 금욕종교도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자아는 아가페의 사랑의 주체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이 땅에 실현시키는데 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주론적인 구원 사역에 쓰시기 위해서 선택된 사람이 누구냐? 나 자신입니다.
우리 교회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셨던 사도들의 신앙 고백서! 존 낙스, 요한 웨슬레 이런 사람들은 그러한 자신의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속에서 발견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를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 이 나라를 내게 맡기세요.” 그룬트비 목사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덴마크라고 하는 십자가를 내게 주세요.” 주셨지 않습니까?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덴마크가 지상 천국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나를 통해서 이 땅에 진리를 살려내소서.” 살려냈지 않습니까? 아무 보잘것없고 멸시받는 존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성경말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다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지혜로운 자가 아니더라도 능력이 없어도 문벌들이 좋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겠다.” 이 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확실한 논리와 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장 악한 존재입니다. 그 사람의 비리는 무슨 윤리, 도덕 정도의 비리가 아니고 예수 핍박의 최선봉장 역할의 악역을 맡았던 사람이었지 않습니까? 스데반을 때려죽이는 그 현장에 가장 열심히 날뛰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다른 사람의 이름이 아무도 안 나오는데 사울이라는 이름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 옮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내가 곧 그리스도가 되었습니다. 삶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일본의 하세가와 다모치의 작품 베스트셀러 “밤도 낮과 같이 빛나다” 그 내용이 뭐냐? “캄캄한 인생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낮과 같이 바뀐다.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새로 만들어졌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도 여러분은 바로 바울과 같이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사심을 믿으십니까? 믿음대로 됩니다.
일본 사람들보다도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일본인이 있는데 바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입니다. 미국에서 미국 사람들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일본사람으로 그 사람이 뽑혔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생아입니다. 호적도 없습니다. 부모도 없이 길바닥에 버려졌습니다. 숨은 이야기는 어떤 건달이 술집에 가서 기생과 바람을 피워서 아기를 낳았는데 이 건달 아버지가 돌아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이 여자가 화가 나니까 그 아기를 그 남자 집에 갖다 버렸습니다. 그 집에 있는 본처가 그 아기를 보고 “이게 뭐야?” 가져다 길바닥에 집어 던졌습니다. 그래서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학교에 입학할 때도 호적이 없어서 위조해서 입학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중학교 때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진리를 깨닫고 중학생 때 세례를 받고 그가 어떻게 되었느냐? 그 길로 일본 빈민촌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일본인으로 뽑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만들어집니다. 제가 목회하던 교회의 집사님 한분은 이름이 ‘풍언’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의 뜻이 뭡니까?” 그랬더니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이름을 한문으로 쓰면 하천풍언(賀川豊彦)이라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너도 그 사람같이 되라고 나를 낳고 그렇게 이름을 지어준 겁니다.” 그러셨습니다. 그렇게 훌륭하신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류의 문명과 문화의 역사는 항상 반복의 과정을 걸어왔는데 다 없어집니다. 잉카 문명 어디로 갔습니까? 이집트 문명 어디로 갔습니까? 마야 문명 다 어디로 갔습니까? 다 없어졌습니다. 우리가 많이 들었습니다. 헬레니즘, 헤브라이즘, 아메리카니즘, 퓨리터니즘, 데모크라시, 카미니즘…. 이게 다 세상을 지배했던 것들입니다. 지나간 몇 백 년 동안은 서구 기독교 문명이 세상을 지배해 왔습니다. 지금은 다 똑같은 말을 합니다. 서구 문명의 황혼기라고 합니다. “이제는 내리막길이다.” 왜 그렇게 찬란한 기독교 문명의 황혼기인가?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너무 물질문명에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잘 먹고 잘 살고 GNP 올리는 데만 노력했지 영혼의 건강에 관심을 안 두었습니다. 그래서 서구 사회의 그 좋은 예배당이 주일날 텅텅 비었습니다. “황혼기이다. 인간됨의 최고의 가치를 영혼 건강에 두지 아니하면 어떤 영혼도 멸망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배가 고팠던 유대인 사회에서 물질문명,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너희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은 해결될 것이다.” “한 사람의 영혼은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정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 문명과 문화입니다. 고린도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기독교는 미련한 것이다.” 그랬을 때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라.”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생겼고 이 말씀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선택을 잘못해서 고생할 때가 있고 선택을 잘해서 행복할 때가 있습니다. 대통령 선택을 잘못하면 온 국민이 괴롭고 배우자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에 이혼율이 높아가고 직업 선택이 행복과 불행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택권 안에 바로 내가 들어있습니다. 왜 들어 있느냐? 하나님의 진리 확장에 도움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초점은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진리와 구원을 확장시키는데 내가 필요하다. 문벌이 없어도 괜찮고 지혜가 없어도 괜찮다.” 그것을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시대에 그렇게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을 자랑하십니까?
고전 1:26-31 / 양인순목사
요즘은 자기 PR 시대라고 합니다.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린다’는 뜻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PR은 원래 기업이 일반 대중들과의 관계를 맺어 기업 이미지나 제품을 홍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로는 ‘Public Relation' 이라고 합니다.
PR은 대중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기업의 장점이나 우수성을 홍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자신의 회사 이미지 PR을 위해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합니다. 자사의 제품을 PR하기 위해 막대한 광고비를 지급합니다. 어떤 이미지로 인식되느냐에 따라서 기업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똑같은 제품이라도 매출이 차이가 납니다. 어떻게 PR을 하느냐에 따라서 기업의 존폐가 달리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능력이나 탁월함을 누군가에게 바르게 알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장점이나 탁월함이 있어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면 바른 평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더십 분야의 책을 보면 자기를 잘 전달하거나 보여주는 이미지 PR에 대해서 강조를 합니다.
좋은 것을 좋다고 바르게 PR하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과장을 하거나 과대포장을 해서 속이는 경우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업이나 개인들이 자기들의 능력이나 실제 이상으로 과대광고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것이 허위나 과장광고로 드러날 때는 더 큰 대가를 지불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PR의 기본은 정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홍보나 광고는 오히려 기업의 가치를 그르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능력과 탁월함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필요이상으로 자기 자랑을 하게 되면 결국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시골 사랑방에 네 명의 할머니가 모여서 자식자랑으로 수다를 떱니다. 이 할머니들은 질투심이 많고, 지기를 싫어합니다. 첫 번째 할머니가 말합니다. “우리 아들은 큰 교회 목사라우. 교인들이 우리 아들더러 우리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따른다우.” 이어서 두 번째 할머니가 말합니다. “그려? 우리 아들은 추기경인디.. 남들은 우리 아들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존경한다우” 그러자 세 번째 할머니는.. “워매~~ 우리 아들은 교황인디... 남들은 내 아들보고 오 거룩하신 분! 그런당께..... 이젠 그 이상 더 높은 사람은 없지?”
그런데 마지막 네 번째 할매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런데 이걸 우짜노... 우리 아들은 숏다리에 곰보, 거기다 뚱보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래두 남들은 울 아들을 보면 한결 같이 이러는기라. Oh My GOD!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자랑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정(recognition)받고 싶어 하는 욕구 때문에 자랑을 한다고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랑함으로 인해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심리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무언가를 자랑을 늘어놓으면 겉으로는 안그런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특히 나이가 들면 자식 자랑, 손주 자랑이 많아집니다. 경로당에 모이면 노인들이 하도 자식 자랑, 손주 자랑하니까 이제는 만원씩 돈을 내고 자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요즘은 돈 내고라도 자랑하려는 사람이 많아서 입을 막기 위해 자랑을 듣는 사람이 돈을 내야 한다고 합니다.
얘나 어른이나 새 옷만 사도 입고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교회에 오시는 분은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랑할 데가 없으니까 친구들 동창들 모임에 폼잡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되면 새 옷 입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백화점을 왔다갔다 합니다. 좋은 시계나 반지나 목걸이나 가방이나 무슨 장신구를 사면 이것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 보는 데서 만지작거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출신 학교를 자랑 합니다. 돈을 자랑하고 지위를 자랑합니다. 자랑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인정받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자랑들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금방 싫증이 나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유난히 힘이 장사인 개미가 있었습니다. 다른 개미들은 쌀 한 톨을 겨우 드는데 이 개미는 두 톨씩도 거뜬히 들었습니다. 많은 개미들이 이 힘 쎈 개미를 우러러 보았습니다. 기고만장해진 개미는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었고,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더 넓은 세상에 나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싶어졌습니다. 개미는 사람들이 많은 시장으로 찾아가서 힘 자랑을 했습니다. 쌀 두 톨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집어던지기도 하며 괴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누구하나 개미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나가는 행인의 발에 밟혀 죽고 말았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 지식의 힘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권세가 있는 사람은 그 권세의 힘을 과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자랑은 개미의 자랑에 불과 합니다.
우리가 가진 힘이란 겨우 쌀 두 톨 드는 힘밖에 안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저 어리석은 개미 같은 무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이 어디 있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이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자랑은 어리석은 개미와 같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았는가를 자신의 존재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가문의 자랑은 부질없다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어서 세상의 가치 기준과 하나님의 가치 기준은 분명히 다르다고 선포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자들, 강한 자들, 귀하게 여기는 자들을 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은 좀 다릅니다. 오히려 미련한 자들을 택하셔서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천한 것,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셔서 세상에서 존경받는 자들을 폐하기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9)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간도 자랑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부르심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랑이나 자기의 공로를 가지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의 기준이십니다. 구원의 기준이 되십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고,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개미의 힘자랑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31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1:31)
그런데 ‘자랑하는 자는’ 앞에 보면 <ㄴ> 이라고 써있습니다. 이것을 관주라고 합니다. 본문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관련된 성경구절을 표시한 것입니다. 성경 밑으로 내려가 보면 ㄴ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렘9:23 이하>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 9:23절 이하를 찾아보시면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9:23-24)
무엇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용맹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자랑들은 결국 개미의 힘 자랑이라는 것이죠.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한 자라고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속성을 자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정말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자랑하면 부모의 큰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이 하나님을 세상에서 자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 자랑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널리 선포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3:16).” 하나님의 가장 긍극적 관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사건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돌 자랑하는 자를 하나님은 높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자랑은 어떻습니까? 결국은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것들을 자랑합니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을 자랑하다가 교만하게 됩니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를 비하하면서 열등감에 빠집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원망과 불평 속에 인생을 살아갑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신앙인으로 살면서 여전히 이런 세상의 도식으로 자기자랑에 빠져있다면 신앙의 초보입니다. 또한 그런 세상의 자랑에 기가 죽어서 자기연민이나 자기비하에 빠져있다면 역시 신앙의 초보 수준임을 드러내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주 안에서 자랑할 것은 무엇인가요?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강한 자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여러분들이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게 교육을 시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강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높은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과 권세를 가진 자가 되라는 기대와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의 자녀들을 세상에서 성공적인 사람으로 키워야 합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 저는 항상 기도합니다. “우리 성지교회가 역사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통하여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리더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중요한 것은 강한 자의 기준이 뭐냐는 것이죠. 우리는 진화론적 사고 속에서 양육강식의 원리에 자기도 모르게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은 좋은 학벌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좋은 인적 네트워킹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안정된 수입을 보장받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야 좋은 가정을 꾸릴 수 있고, 노후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 역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도 항상 정당한 것이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하고 높은 자가 되고자 하는 목표는 필요합니다. 거룩한 비전을 품고 달려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정당하냐는 것이죠. 그 과정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남을 짓밟고 올라가서 나는 이렇게 성공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정당한 수고와 노력을 통해 부자가 됐다면 그것을 시비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변칙이나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 부자가 됐다면 그것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의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니다. 흔히 우리는 남과 비교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약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둘 중의 한 가지 처세술을 가집니다. 강한 자에게 아부를 해서 생존하든지 아니면 그들을 공격하거나 미워하는 자가 됩니다.
성경은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서 배려를 합니다. 약자의 입장을 존중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은 언제나 강자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약자도 동등한 가치기준으로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한 자의 편이 되셔서 배운 자보다는 배우지 못한 자를, 부자보다는 가난한 자를, 존경받는 자들 보다는 그렇지 못한 자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물론 배운자나 부자들을 나쁘게 생각하거나 멸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약자로 생각하는 분들은 이 시간 다시한번 마음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약해도 쓰임받을 수 있다. 같이 따라합니다. “약해도 쓰임받을 수 있다” 믿으십니까?
우리의 약함이 일시적인 고통이나 슬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긴 시간표로 볼 때 그것은 일시적인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오히려 세상의 약함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함으로 더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깨달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강한 자였습니다. 원래 이름은 사울인데 그 의미는 ‘큰 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후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가장 작은 자임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울에서 바울로 이름이 바꾸어집니다. 바울의 의미는 ‘작은 자’입니다. 그는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항상 약한 자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설물로 여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복음만을 알기로 작정합니다. 그리고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그는 생명을 걸고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참된 가치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안질이나, 말라리아, 간질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왜 목숨을 걸고 복음 전하는 자에게 이런 가시를 주셨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이 가시를 뽑아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너무나 싸늘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하나님께서는 이미 너에게 베풀어준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해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람은 자기의 힘이 강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지식이 많으면 하나님의 지혜를 등한시 합니다. 재물이 많으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연약할수록 부족할수록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찾게 됩니다. 따라서 너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오히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육체의 가시를 뽑으려고 애쓰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가시가 너를 찌를 때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며 더욱 힘써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때 너의 약함을 나의 강함으로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바울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응답을 들으면 서운할 법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깊이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아~내가 약할 그때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순간이구나.’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크게 기뻐합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강함이 아닌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결단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바울의 고백과 결단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내가 가지고 있는 약함의 부분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감추려고 애를 씁니다. 약한데도 강한 척 합니다. 때로는 자신을 과대 포장하여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 약함을 자랑하라. 그 약함 속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우리는 강함만을 자랑하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약함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더 큰 힘이 되고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금요일 우리는 색스포니트 강기만 집사의 멋진 연주와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약한 자도 하나님이 들어 쓰시면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30살에 색스폰을 잡았습니다. 그 가정은 불우했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로서 자존심을 지키자.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가 되어한다’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유익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고가 되고자 기도했습니다. 입술의 살이 찢겨나가도록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자기 이름을 건 연주회를 하고, 자기 이름을 딴 색스폰이 만들어졌습니다. 정식 음반을 세 개나 출시했습니다. 대학의 교수가 됐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색스폰 연주자가 됐습니다.
만약 그가 부자집 아들로 태어났다면 지금의 그런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또한 그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그렇게 쓰임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이를 악물고 노력할 때 그 약함 속에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작은 교회를 세우는 홍보대사로 삼으시고, 교회를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지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27:1)
혹시 내가 남보다 강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이 결코 교만함이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그 강함과 능력이 주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아름다운 도구로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요 하나님이 복을 주신 이유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약한 자요,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이 자기비하나 열등감의 요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약함을 통하여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통해 부자를 부끄럽게 하십니다.
약함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십시오. 그 약함이 자기비하나 열등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오히려 그 약함을 자랑하십시오. 약함 속에 임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기대하십시오. 그 약함 속에 다가오시는 주님의 영광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약한 자도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다시한번 기억하면서 약한 나를 강하게 하시는 주님을 날마다 찬양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다같이 찬양드립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
♬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나는 누구인가
고전 1:30-31 / 조용기목사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나는 누구인가?” 이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한국 농촌 총각의 40%가 동북, 동남아 외국 여성들과 결혼을 합니다. 많은 중국 교포들 또 월남 처녀들 혹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처녀들이 한국의 농촌 총각들에게 시집을 옵니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하루속히 한국의 주민등록증을 얻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한국에 시집을 왔는데 이제 자기 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중간에 떠버려서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이 불안합니다. 정체불명한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한 것입니다. 하루속히 주민증을 받으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가 확실하게 되므로 뿌리가 내리고 마음에 안심을 하고 살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제가 파리 근교에서 성회를 인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릴 때 불란서로 입양되어 그곳에 고등학교까지 공부하고, 대학은 영국에 가서 공부하고, 졸업한 이후 영국에서 직장을 얻어 사는 한 한국의 자그마한 아가씨가 제게 신앙상담을 원했습니다. 하루 조찬에 저와 함께 신앙상담을 했는데 그가 대뜸 제게 묻는 말은 “목사님, 나는 누구입니까? 나의 뿌리를 찾아 주십시오. 나는 불란서에서 자라서 불란서 말을 합니다. 영국에서 공부를 해서 영어를 합니다. 영국에서 직장을 얻고 살지만 불란서인도 아니고 영국인도 아닙니다. 한국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한국말도 못하고 한국에 부모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항상 마음이 불안합니다. 나는 부모님이 나를 버렸기 때문에 부모님을 특별히 사랑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내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서 부모를 찾습니다. 과연 내가 한국인인가? 이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는 정체불명의 여자가 되어서 언제나 마음이 불안합니다. 내 정체를 찾아 주십시오.” 간절히 호소하는 호소를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국민일보를 통해서 그 부모를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항상 뿌리가 없는 나무처럼 바람에 날리며 불안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우리에게 분명합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정처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우연히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죽는 존재도 아닌 것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처럼 아메바에서 성장하고 장성하고 변화되어서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 분명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셔서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해주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의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 거룩한 사람, 구속받은 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정체불명의 사람이 되지 않고 내 신변이 신분이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본론>
1. 지혜로 사는 존재
첫째로,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므로 지혜로운 사람, 깨달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혜라는 것은 깨닫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종교는 해탈을 주장합니다. 해탈이라는 것은 깨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힌두교도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고행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히말라야 산에 올라가서 금식하고 육체에 수많은 고통을 가하면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합니다. 불교신앙도 깨달음의 신앙을 얻기 위해서 무수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위대한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류대학을 안 나와도 유학을 갔다 오지 않아도 특별히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모시자마자 우리는 깨달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깨닫습니까?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주가 우연히 생겼다고 말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인 것입니다. 어떻게 우주가 우연히 생깁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인간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우연히 왔다가 우연히 살다가 우연히 가버리고 만다면 인간은 너무나 처절한 절망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기면서 살다가 육신의 장막 집 무너지면 하나님이 예비한 영원한 천국으로 간다는 확실한 깨달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밝고 맑고 환하게 되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요한복음 14: 6~ 7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라고 말했으며
골로새서 1:15~16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 2은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이요, 영광의 광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깨닫게 되고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아버지의 품에 영원히 살도록 지음을 받은 것을 깨닫게 되므로 우리의 신분이 분명해지고 정체성이 확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으로 인생의 생사문제뿐 아니라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시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죽는 것도 멸망이 아니라 육신의 장막집 벗어 버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방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를 모르는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모든 것은 안개구름같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말인 것입니다. 사람은 죽으나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생사문제가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함께 부활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앉았으니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누릴 후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도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살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을 예비해 놓은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해 놓은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더라. 그러나 성령이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깨달음을 얻어 우리 인생을 살 때 어느 길로 가는 것이 바른길이며,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해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어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통해서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9:10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는 예수님을 앎으로 얻고 하나님을 섬김으로 명철하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삶은 그리스도를 알아서 내가 지혜의 근본을 모시고 깨달음을 얻고 사물을 잘 분별하는 명철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세상에 학력이 이런 지혜와 명철을 주지 않습니다. 해외유학 간다고 이런 지혜와 명철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지혜와 명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것입니다.
잠언 3: 6에는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골로새서 2:3에도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지혜가 있고 지식의 보화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속에 모시면 우리는 지혜로운 자, 지식 있는 자가 되고 깨닫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무신론적 유물론에서는 인본주의가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중심의 지혜로써 인생을 산다고 말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로써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지혜 경쟁을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참말인 것입니다. 인생은 지혜의 경쟁인 것입니다. 지혜는 사물을 깨닫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데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면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더 성장하고 발전하고 향상하는 삶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을 구하지 말고, 은을 구하지 말고, 지혜를 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그리스도를 모시므로 지혜의 근본을 마음속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를 통하여 우리는 명철하게 사물을 깨달아 알면서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이 인본주의적으로 인생을 산다고 자랑하지만 그것은 다 깨닫지 못하고 캄캄한 흑암 가운데 방황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국 남부를 농경사회에서 농업 산업사회로 전환시킨 농업과학자 조지 워싱턴 카버는 위대한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목화밭의 흑인노예 후손으로 어릴 때부터 “오늘도 새로운 지혜를 주시옵소서.”라며 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해충 피해가 갈수록 심해져 목화밭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목화밭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가난하게 되었을 때 그는 땅콩을 대신으로 심게 했습니다. 그리고 땅콩으로 만들 수 있는 무려 300가지 제품을 발명해 냈습니다. 그리고 고구마와 포도의 산업적 가치를 발견해서 남부에 농업혁명을 일으켜 헐벗고 굶주린 남부사람들을 다 잘살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가 국회에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하고 국회의원들이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 놀라운 과학적인 발명과 발견을 했습니까?” 하니까 그는 성경을 들고 “이속에서 다 얻었습니다.”
“성경에 어디 그렇게 과학적인 것이 있습니까?” 하니까 “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나는 아버지를 알게 되고 아버지께 기도하므로 아버지가 내게 모든 과학적인 발명과 발견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은 예수를 구주로 모시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지혜가 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지혜로운 아버지, 지혜로운 어머니, 주부, 자녀들, 사회인, 국가 경영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고 인생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생문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짓누르기 때문에 이것을 해탈해 나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고 그 하나님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므로 해탈함을 받아서 지혜를 받은 사람이요, 깨달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을 삶으로 모든 일에 문제해답을 얻고 성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소독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조지프 리스토는 인체 수술이 시작된 19세기에 수술환자의 90% 이상이 죽는 것을 보고 세균 감염이 그 원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세균을 몰랐기 때문에 수술 칼을 소독 안하고 사용해서 세균이 감염되어서 수술을 받고도 90%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조지 리스토는 기도하는 중에 이것이 세균으로 말미암아 온다는 것을 깨닫고 수술을 방법을 개선했습니다. 수술도구를 불에 소독하고 수술한 결과 90%의 사망률이 80%의 생존율로 바뀌었습니다. 훗날 조지프 리스트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 덕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주셔서 많은 사람을 부요와 생명으로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들에게 지혜가 되셨습니다.여러분은 예수를 구주로 모셨으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면 지혜를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인 것입니다. 목매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두움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광명한 빛을 받고 깨달음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혜안에 거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지혜로써 인생을 사십시오. 문제를 해결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세계를 지배했던 21개의 문명 가운데 19개의 문명이 자멸했는데, 그 이유는 무신론과 물질주의 문명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21개의 역사적인 문명이 19개의 문명이 파멸당한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그리고 인본주의에 섰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기독교 심리학자는 무신론자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기 안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님 의식을 지워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본주의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파멸을 재촉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예수님 안에 있고 그 예수님의 지혜로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어떠한 역경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2. 의를 덧입은 존재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에게 의로움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심으로 우리는 의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타락한 아담이 하나님의 영광을 잃고 벌거벗었을 때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시고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입힌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원래 하나님의 영광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서로 쳐다보아도 부끄럽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고 영광이 떠나자 순식간에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서로 부끄럽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설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무 뒤에 숨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엮어 입었으나 햇빛이 나니 말라서 쪼글쪼글하고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도, 만들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은 불쌍히 여겨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하시고 가죽을 벗겨 영구한 옷을 입혀서 내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죄의 양심이 벗겨져서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여 피를 흘리시고 의로운 옷을 벗겨서 우리에게 입혀 주실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짐승이 죽임을 당하고 피를 흘린 것처럼 예수님은 너희 죄, 나의 죄,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가를 지불하시고 당신의 의로운 옷을 벗어서 우리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부끄러움의 수치를 가득히 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 지식을 가지고 부끄러움을 일시적으로 잊어버리고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때 이 모든 옷은 다 필요가 없습니다. 벌거벗은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지옥으로 자기 스스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장마가 진 이후에 해가 번쩍 났을 때 마당에 나가서 거적 대기를 들춰 보십시오. 밑에서 많은 벌레들이 기가 막히게 빨리 어두운 곳을 찾아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 벌레들은 어두움의 산물입니다. 어둠속에 있다가 햇빛이 비취니까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어두움을 향해서 줄달음질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죄인들이 지옥 가는 것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죄의 부끄러움이 얼마나 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수가 없어서 지옥의 어두움으로 줄달음쳐 도망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끄러움의 수치를 오직 가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과 그 의로운 옷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써 나서 우리에게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과거의 죄가 용서를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운 옷을 입음으로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믿고는 죽음을 겁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옷으로 화려하게 옷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고 하나님과 손을 잡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요한일서 2: 2에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고 하셨으며, 고린도후서 5:21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하나님처럼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원래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그 죄 대신에 짐승이 죽고 피를 흘리고 가죽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 인류의 생각 속에 다 박혀 있습니다. 인류는 아담, 하와 이후로 노아홍수 이후로 온 세계 퍼져 살았지만 피 흘림이 없이는 죄가 사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족속들도 다 신 앞에 나갈 때는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그것을 집행했던 것입니다.
멕시코는 유행병이나 재난이 오면 흠 없고 잘 생긴 청년을 골라서 여러 가지 색을 칠합니다. 그 젊은이가 큰 소리로 “내 죄를 가져가시오!”라고 여러 번 외치면 그를 죽여 피를 뿌렸습니다. 아테네는 도시에 질병이 만연하면 가난한 사람을 돈 주고 샀습니다. 도시의 군중들이 그 사람을 향해 자신들의 죄를 고백한 후 돌로 쳐서 피를 흘려 죽게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사람의 심장을 찔러 피를 뿌리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심장에서 나온 피를 병에 담아 신의 노여움을 풀려고 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해마다 궁중에서 거위나 닭, 소 같은 짐승의 목을 찔러 피를 뿌렸고, 우리나라도 무당이 푸닥거리를 할 때는 돼지 목에 피를 내고 열십자를 긋고 그 가운데 칼을 콱 박는 습관이 있습니다.
기독교 인간학자 알렉산더 그리골리아(Alexander Grigolia) 박사는 “세계 인구의 95%가 피로써 신께 제사를 드렸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또한 “사람이 신께 죄를 짓거나 악을 행했을 때에 어떤 종류든지 꼭 피를 의지해서만 속죄 받는다고 믿는 것이 원래부터 타고난 인간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이 하나님의 영광을 잃고 벌거벗었을 때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시고 그 가죽을 벗겨 옷을 입힌 것처럼 인생이 타락해서 멸망당하는 사람은 짐승의 피로써는 안 됩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위해서 피를 흘려서 죄 없는 자가 우리의 죄를 대신 청산하시고 그 의로운 옷을 벗겨 우리에게 입혀 주시므로 우리의 예수 믿고 얻은 옷은 너무나 의롭고 영광스러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과거가 한번도 죄를 안 지은 것처럼 맑혀지고 그 피로 의로운 옷을 입은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로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3. 거룩하게 하신 존재
셋째로, 예수는 하나님께로써 나서 우리에게 거룩함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세속적인 사람이요, 마귀의 종입니다. 세속이란 더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패하고 오염되고 썩어진 것이 세상인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오고 죽음은 썩고 썩으면 온갖 벌레가 그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영혼이 죄를 짓고 죽었으므로 그 죽은 가운데 모든 더러운 벌레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불의, 추악, 저주, 절망, 음란, 방탕, 시기, 분노, 질투 온갖 더러운 것이 다 영의 죽음에서 꿈틀거리고 나와서 인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오염이 공기, 물, 음식, 생활, 환경을 부패시켜 병과 죽음을 가져오는 것처럼 영혼이 죽어서 그 속에 오염을 통해서 수많은 사망의 더러운 것이 나와서 인류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26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했으며, 출애굽기 23:25에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은 오염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했었으며, 로마서 5:12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사망을 누가 제할 수 있습니까? 사망으로 말미암아 다가온 죽음을 누가 철폐하고 죽음에서 기어 나온 이 더러운 모든 벌레들을 누가 제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지식과 총명, 제도와 노력으로써는 이 사망을 철폐할 수 없고 부패를 철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보혈이 죄를 없게 하고 그 보혈로 말미암아 다가온 성령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오염을 제하시고 성령께서 사망을 제하시고 거룩함과 신령한 생명을 주시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 1~ 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방된 사람인 것입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수천 년을 고난당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했습니다. 죄가 사라지자 사망이 청산되고 거기에서 나온 모든 썩어짐의 더러운 것들이 다 제하여지고 우리는 그리스도 앞에서 깨끗해지고 거룩하고 성령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중국에는 “종록자 불견산”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뜻은 ‘사슴을 잡으러 뛰어 가다가 자기가 나중에는 깊은 산속 늪 속에 들어와서 빠져나갈 길을 잃어버리고 사슴도 잡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리고 늪에 빠져 죽는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탐욕이라는 사슴을 쫓아서 깊고 깊은 죄악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사이 신문과 라디오, TV에 보면 계속해서 범법자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특별한 커미션을 받았다. 비자금을 만들었다. 부패를 했다. 부정을 했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서 늘 그 소리를 듣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탐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탐욕이란 노루를 잡으려고 따라가다가 보니 너무 깊이, 깊이 들어와서 그만 나무숲을 모르고 늪을 모르고 숲에 걸리고 늪에 빠져 좌절과 절망에 처한 것입니다. 마귀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탐욕으로 우리는 끌어가는 것입니다. 탐욕만 쳐다보고 끌어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장자크 루소는 인간에 대해, “열 살 때에는 과자에 따라가고, 이십 대에는 연인에게 따라가고, 삼십 대에는 쾌락에 따라가고, 사십 대에는 야심에 따라가고 오십 대는 탐욕을 따라간다. 그러나 이렇게 무엇엔가 끌리고 있는 동안 인간은 허수아비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자기가 사는 것 같지만 실제는 자기가 아니라 탐욕이 주인이 되어서 탐욕이 끄는 대로 천방지축으로 따라가다가 나중에 좌절과 절망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탐욕이라는 것이 바로 죄의 썩어짐의 산물인 것입니다. 죄에 빠져서 썩어진 곳에서 탐욕이 넘쳐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섬기고 내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되면 탐욕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죄의 오염을 제하시고 성령께서 사망을 제하시고 거룩함과 신령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4. 구속 받은 존재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 나서 우리에게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구속함이란 값을 주고 종을 사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종으로 팔려서 옴짝달싹 못하고 도저히 해방될 수 없는 사람을 값을 주고 사주어서 종 문서를 찢어 버리고 해방과 자유를 선포하는 것을 구원. 즉, 구속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의 종, 질병의 종, 저주의 종, 죽음의 멸망의 종이 되어서 헤어나 올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값 주고 하나님 앞에 사서 해방과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 6에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 할 것이라”고 말했으며, 히브리서 9:12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 5에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말씀하시고, 요한복음 1:12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시고, 요한계시록 5: 9~10에는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셔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우리 공짜로 구원받은 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엄정한 값을 지불했습니다. 당신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살을 찢어서 그 값으로 지불하고 생명을 쏟아서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종에서 사서 하나님 앞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값비싼 산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귀하고 귀한 것은 너무나 고가의 대가를 주고 우리를 샀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물 중에서 가장 귀한 소유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병의 종살이에서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영의 병, 마음의 병, 육신의 병, 가정의 병, 생활의 병, 병이 들었습니다. 병이란 비상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건강이 허물어지면 병들지요. 정상적인 마음이 아니면 병든 마음이지요.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은 병든 가정이지요. 정상적이 아닌 사회는 병든 사회지요. 주님은 병을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시편 103: 3에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24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은 비정상적인 것에 오셔서 정상적으로 만듭니다. 마음을 정상적인 마음으로, 육체를 정상적인 건강으로, 사회, 국가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치료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비정상적인 곳에 예수를 모시고 기도하면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정상적인 삶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저주의 종살이에서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인생들은 저주받은 사람이 되어서 저주받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찔리고 상처투성이로 인생을 살았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저주에서 구속하여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 대신하여 저주를 받아서 저주를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14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 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으며, 고린도후서 9: 8절에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저주에서 몸부림치기를 원치 않습니다. 가시에 찔리고 상처투성이가 되고 헐벗고 굶주리고 남에게 구걸하고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은 저주의 종이 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와서 대신 저주를 다 청산하시므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과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옆에 계신 분들에게 “당신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세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잠자리에 들어갈 때 나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크게 외치고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저주에서 해방이 되고 그 대가를 주님이 지불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죽음의 멸망에서 구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죽잖아요.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이 절망이요, 마지막이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은 하나의 커튼을 펼치고 저 건너편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저 강 건너 언덕 편에 아름다운 땅이 있도다. 믿음으로만 그곳에 가겠네. 우리는 믿음으로 저 건너편에 가서 아름다운 하나님의 예비한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죽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망의 장막을 무찌르시고 부활과 영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죽음의 어두운 길은 예수의 부활로 광명한 대로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5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고 우리는 살지 죽지 않습니다. 주를 모르는 사람은 죽음에 처하면 멸망당할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사는 우리들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15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55~58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율법을 다 철폐하시고 사망을 철폐하시고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천국에 광명을 이미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1847년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목회한 라이트 목사(Henry Francis Lyte)가 스코틀랜드의 항구에서 출발해 프랑스의 리비에라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첫 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여관에 묵었습니다. 그런데 여관주인이 보니까 이 손님이 나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안 나가서 문을 두드려서 소리가 없기에 열어보니 세상을 떴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뜨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책상에 엎드려서 시를 적었습니다. 그 시 한 편을 적어 놓고 책상에 엎드린 채 세상을 떴는데 그 시가 바로 오늘날 전 세계인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 531장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인 것입니다.
때 저물어 날 이미 어두니 / 구주여 나와 함께 하소서 / 내 친구 나를 위로 못할 때 / 날 돕는 주여 함께 하소서
내 사는 날이 속히 지나고 / 이 세상 영광 빨리 지나네 / 이 천지 만물 모두 변하나 / 변찮는 주여 함께 하소서
주 홀로 마귀 물리치시니 / 언제나 나와 함께 하소서 / 주같이 누가 보호하리까 / 사랑의 주여 함께 하소서
이 육신 쇠해 눈을 감을 때 / 십자가 밝히 보여 주소서 / 내 모든 슬픔을 위로하시고 / 생명의 주여 함께 하소서
마지막 그는 숨이 넘어가면서 이 아름다운 찬송에 놀라운 희망으로 가득히 채워서 적어 놓고 세상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죽음의 사망에서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숨지는 순간에도 승리의 찬송을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네 가지 감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소속감입니다. 내가 어디에, 누구에게 소속되어 행복할 수 있는가를 본능처럼 알고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 주셨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우리의 소속감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단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단지 여의도순복음교회 소속한 교인이 아닙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해주신 것입니다. 소속감이 분명합니다. 둘째는 한계성입니다. 나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 있으며, 그 한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계를 압니다. 우리는 다 죽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계를 알기 때문에 저 건너편에서 손을 내미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 지혜나 총명이나 모략이나 재능이나 지식이 모자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이 있는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총명과 모략과 재능을 얻어 인생을 성공하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아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유일성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피조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은 스스로를 존중하며 살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독특한 사람입니다. 제가 2부 예배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내 방에 들어가는데 제 집사님이 옷을 갈아 입혀 주면서 “왜 자꾸 코를 훌쩍이느냐? 코를 훌쩍이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이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유일한 조용기다. 이 우주 가운데 나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미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코를 훌쩍이든 무슨 상관이냐?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 한 사람밖에 안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같은 사람 이 우주 속에 한분밖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례적 사건입니다. 과거를 다 들춰 보아도 여러분같이 생긴 사람은 없어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유일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해요. 여러분이 두 개, 세 개 있으면 덜 사랑할지 모릅니다만 여러분은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기쁘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오. 폄하하지 마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자기의 개성을 기쁘게 생각하십시오. 넷째는 정체성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의 감각을 바르게 가질 때 값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정체성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지혜 있는 사람이 되어 깨닫게 되고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죄를 벗어나고 영광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사람이 되며 나는 세상의 죄와 부패를 벗어나고 거룩한 사람이 되었으며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값주고 사서 이제는 종의 멍에를 벗어 버리고 자유인, 해방인이 되어 영원히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사람이 되었다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나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는 새로운 사람,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신분, 새로운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있으므로 요동치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결론>
내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예정이 있어 태어나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받은 당당한 신분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태어나서 덧없이 살다가 죽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정이 있어 태어나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주님의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받은 당당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고등동물이 아닙니다. 정체가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늘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정체성 상실의 위기에 처해있지 않습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부평초 같은 인생도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우리는 지혜를 얻어 깨달은 사람이 되어서 해탈을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속받아 해방과 자유를 얻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체성이 확실하고 신분이 뚜렷합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고전 1:26-31 / 박덕기목사(광주송정교회)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절정이어서, 결코 미련한 것일 리 없지만, 다만 멸망할 인생들에게는 그것이 미련한 듯 보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 미련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이고, 전하는 방법이 미련하게 보이는데, 다음에는 그 도를 전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미련하게 보이는 듯한 사람들인가를, 본문은 잘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러한 현상들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섭리를 역설합니다.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이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이 아니하도다.”고 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불러서 예수 믿게 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1.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았습니다.
“육체를 따라”라는 말은, 세상적인 입장에서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헬라의 철인들처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지혜와 웅변에 뛰어난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제외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의 미천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 만민을 제자로 삼도록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세상에 전파할 그릇이었습니다. 학문과 지혜를 뽐내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2. 능한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능한 자란, 정치적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권세 있는 정치인들이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어떤 새로운 계획이나 제도를 창시할 때는, 그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의 복음은 결코 위대한 왕이나 정치가의 후원하에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박해하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힘없는 서민들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3.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문벌 좋은 자란, 왕족이나 혹은 명문 귀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상류계급 출신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그 때의 그리스도인 중 대다수가, 육체적으로 우수한 조건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준은, 외모나 학식, 재능, 물질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즉 학식이나 재산, 출신 성분 등은, 세상적인 지혜에 의한 가치 판단의 기준일 뿐, 인간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초대 교회에 안에, 세상적으로 내세울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행 17장에 나오는 ‘디오누시오’는 관원이었고, 행 13장에 나오는 ‘서기오 바울’은 그레데의 총독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지방에서는,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주님께 돌아왔고, 에라스도는 고린도의 지방의 재무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극소수이고,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빈곤하고 천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주후 178년 경 ‘셀서스’라는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던 사람인데, 그는 기독교의 입장이 이런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교양이 있는 분, 지혜 있는 분, 양식 있는 분들은 가까이 오지 마시오. 우리는 교양이나 지혜나 양식을 악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지한 인간, 양식이나 교양이 없는 사람, 바보와 같은 인간이라면, 아무 염려 말고 어서 오십시오.” 물론 이것은 셀서스가 기독교를 비난하고 조소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저들의 집에 가보라. 양털 깎기, 제화공, 세탁업자와 같은 비천한 사람들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박쥐와 같은 무리, 혹은 집에서 기어 나온 개미, 늪 둘레에서 토론회를 벌이고 있는 개구리, 시궁창 한 모퉁이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있는 벌레와 같은 것들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편이야말로 오히려 기독교의 영광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제국 안에는 6천만 명의 노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노예들은 살아있는 도구이며, 물건이지 인간일 수 없었습니다. 주인은 늙은 노예를 필요 없게 된 호미나 괭이와 같이 언제든지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노예들을 고문하며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마음대로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의 자식들도 주인의 것이었습니다. 마치 어린양이 어미 양의 것이 아니라, 양치기의 것인 것과 같았습니다. 이와 같이 한낱 물건에 불과한 노예들을, 기독교는 참된 인격자로서의 남자나 여자로 만든 것입니다. 아니 그 이상의 것, 즉 하나님의 아들, 딸로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가 인류에게 끼친 위대한 영향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천히 여기는 자에게 자존심을 주었으며, 생명이 없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습니다. 비록 사람들로부터는 무시당하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는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고,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는 무가치한 존재로 보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그들을 위해서 죽으리만큼, 귀중한 존재임을 기독교는 가르쳐 주었습니다. 전 인류 역사에서 기독교만큼, 인간의 가치를 높여준 종교가 결코 없는 것입니다.
27, 28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없는 것들’ 무디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네 가지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지혜, 권세, 부귀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그것을 흠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 자나, 권세 자나, 상류층을 즐겨 택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시려 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거기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러하십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들은 이러한 세상적인 지혜와 권세와 부귀영화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력으로 성도들을 유혹해, 믿음을 거두어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웃으시고 꺾어버리십니다. 그것도 세상의 미련하고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물론 기독교의 복음은 부유층이나, 권력층의 사람들을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권세 있고, 돈이 많으면, 그러한 것들 때문에 교만해 가지고, 예수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시골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한 여집사님이 같은 동네의 여인에게 전도했더니, “내가 뭣이 아쉬워서 예수 믿어요?”하며 거절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기와집에 논 몇 마지기 가지고도, 이렇게 거드름을 피우는 것입니다. 또 제가 광동 교회를 시무할 때, 아파트와 연립주택 건축하는 것을 보고, 15층짜리 맨션이나 들어섰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여전도사님이 말하기를 “목사님 맨션에 살면 그 사람들 예수 안 믿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신안동 주변에는 한 집에 4. 5세대씩 들어 사는데, 그러한 서민들이 복음을 훨씬 더 잘 받아들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말이 맞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부교역자로 있던 한 분이 개척을 하게 되어서, 교회에서 그를 도와주며 여러 가지로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충고를 외면하고 부자 동네의 지하층을 빌려 개척을 했는데, 몇 년 동안이나 교역자 가족끼리 예배를 드리다가, 결국은 실패하고 문을 닫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능하고 문벌 좋은 자보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없는 것들을 즐겨 택하여 쓰실까요? 빛은 밝은데서 보다 어두운데서 더욱 잘 드러납니다. 밝은 태양빛 아래서는, 형광등도 빛을 잃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사람들에게 뚜렷이 나타나려면, 본래 지혜 있고, 능하고, 강한 것보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없는 것들이어야, 더욱 밝히 드러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29절의 말씀처럼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일에 있어서, 누구든지 자기의 힘을 믿거나 자랑하는 자는, 주님의 보혈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자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타락이, 인간의 교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너무도 잘 압니다. 하나님처럼 되어 보리라던 인간의 교만은, 온 인류에게 저주를 가져왔고, 하나님께 가까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한없이 멀어지는 타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 가운데서 역사 하실 때, 그 첫 효과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이렇게 자기의 약함과 무지와 무능과 무력함을 알 때, 역설적으로 가장 강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 가운데,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이들이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 안에 들어 온 후에는, 미련한 것들이 지혜 있게 되고, 약한 것들이 강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일들은 2천년의 기독교회사에서 너무 너무 많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을 들라고 하면 D. L Moody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본래 양화점 직공이었습니다. 그가 회심하고 주일학교 교사를 그렇게 하고 싶어 했으나, 처음에는 반을 맡겨주지 않았습니다. 정 하고 싶으면 아직 교회에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데려다,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회심할 당시의 무디는,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 너무도 약한 형편이었지만, 그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고, 성령의 권능을 받아 사역하게 되었을 때, 생전에 백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세기적인 대부흥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강하고 능한 자가 되었습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 앞에서, 세상적으로 지혜 있고, 능하고, 문벌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부끄러움을 당했겠습니까?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중생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말은, 성도들은 법적으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를 말하고, 또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그를 의뢰하고, 그 속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나아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1)그리스도는 우리의 지혜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만이, 인생의 정도를 걸을 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리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의’ 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것은 항상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의 힘이나 행위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이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3)그리스도는 우리의 거룩함이 되셨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성령님의 성결하게 하시고 성화 시키시는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합니다.
4)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함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시고, 사망과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구원해주시는 구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 것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천하에 있는 것은 다 주님의 것이고, 내게 있는 것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우리가 무슨 일을 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바는,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안에서 자랑하라 함은, 주님만 자랑하라는 뜻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분은, 대개 낮고 천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신분을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결코 그들을 얕잡아보거나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 한 것은, 자신들의 분수를 모르고 인간의 지혜와 자랑으로 인한 당파 싸움을 경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의 출신성분을 적나라하게 상기시켜줌으로써,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동시에 그토록 미천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영화롭게 되었는가를 깨우쳐주고 격려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으로 대우받지도 못하고, 인간미, 교양미, 지식, 양식 따위를 갖추지도 못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고귀한 백성,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변화를 가져온 것은, 결코 그들의 신분이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기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그들의 신분을 변화시켰으며,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고린도 교인들만이 받은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일진대 1)겸손할 것이며 2) 감사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학식과 재산, 직책을 자랑하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외적인 조건을 자랑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곳임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미련한 것, 약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이러한 형편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좋은 바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연약한 처지에 대하여 절대로 좌절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 약한 것 때문에 주님을 더욱 의지하여 강하게 되고, 지혜롭게 되고, 그래서 더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약 4:14절에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고, 벧전 1:24절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했습니다. 고로 세상의 지혜 자나, 권세 자나, 부자들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현재의 부귀영화를 자랑하지만, 영원에 견주어보면 그것은 모두 순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약 1:9-10절에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낮은 형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높고, 고귀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자랑하되, 그렇게 높여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사시기 바랍니다. ♪약한 나로 강하게/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주 내게 행하셨네./호산나 호산나 죽임당한 어린양/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내가 건너야 할 강/거기서 내 죄 씻겼네./이제 주의 사랑이/나를 향해 흐르네./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구원의 노래 부르리/예수 자유 주셨네.♪ 부한 형제들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면, 그 하잘 것 없는 것들이나 의지하고 자랑하며 교만하게 살다가, 영원히 멸망할 번했는데, 예수 믿고 겸손하게 살게 되었음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알고,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고전 1:26-29 / 최성규목사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제일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쓰실까요? 세상은 능력 있는 사람을 쓰지만, 하나님은 ‘택하신 사람’을 쓰십니다. 엘리트냐, 집안이 좋으냐를 보지 않으십니다. 성경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은 인물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더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시자, 그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위대하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을 살펴봄으로,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집시다.
첫째, 실수 많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실수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친척인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가고, 그곳에 거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근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반복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쓰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쓰시고, 복의 근원으로 쓰시고, 열국의 아비로 쓰셨습니다. 백세에 아들을 낳는 기적의 주인공으로 쓰셨습니다. 예수님 족보에 첫번째로 이름이 나오게 하셨습니다(마 1:1). 하나님이 들어쓰시자, 아브라함의 일생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실수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에도, 행동에도, 신앙생활에도 실수가 많습니다. 우리 인생은 실수투성이입니다. 그때 악한 마귀는 실수를 자꾸 되새기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우리는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소유한 자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인 우리가 나누어주고 베풀어주는 일에 쓰임 받읍시다. 복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더 큰 영광입니다.
둘째, 사기꾼 야곱
야곱은 당황스러운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 같은 사람을 쓰셨지?”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야곱은 그 이름에 담긴 뜻처럼 거짓말쟁이, 사기꾼입니다. 가족을 상대로 사기를 친 비열한 사기꾼입니다. 팥죽 한 그릇에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 축복기도를 가로챘습니다. 챙길 것을 다 챙기자 도망을 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도 형 에서가 사백 인을 이끌고 온다고 하자, 자기 살 길부터 찾았습니다. 가족들을 앞세우고, 자신은 뒤에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이스라엘’로 쓰십니다. 야곱 대에 와서 이스라엘 민족의 초석이 놓여집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초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야곱을 믿음의 인물로 내세우십니다. 믿음의 전당인 히브리서 11장에 야곱의 이름이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답지 않은 성도가 있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그 사람만 없으면 우리 공동체가 잘될 것 같습니다. 그 사람만 없으면 구역이 부흥할 것 같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야곱’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까지 쓰십니다. 그런 사람을 통해서 부흥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됩니다. ‘야곱’같은 사람을 멀리하거나, 미워하지 맙시다. 누구에게나 얍복 강이 있습니다. 얍복 강에서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가 됩니다. 얍복 강에서 기도의 씨름을 거치면, 큰 일꾼이 됩니다. 우리 모두 야곱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기다려주고, 기대해줍시다.
셋째, 못하겠다고 주저한 모세
젊은 날 모세는 ‘하겠다’의 사람이었습니다. 궁에서 왕자 대우를 받으며 문무를 다 겸비했습니다. 아마 세상이라면, 이때 모세를 일꾼으로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젊고 힘 있을 때의 모세를 부르지 않으시고, 나이 80의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때의 모세는 “못하겠다”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라고 명하시자, 뭐라고 대답합니까? 그는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가라고 하니 말주변이 없다고 합니다(4:10). 나중에는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4:13)라고 간청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쓰셨습니다.
모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교회에서 일을 맡기면 못한다는 말부터 합니다. 못할 이유부터 찾습니다. 이는 사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거부하고 복을 걷어차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자, 바로와의 대결에서 이기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모세오경까지 기록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것은 기적을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자격과 능력을 따지면, 쓰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그때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에 자원하는 일꾼이 됩시다. 우리 인생이 출애굽하여 젖과 꿀이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넷째, 안 하겠다고 도망친 요나
인간이기에 하기 싫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지자라고 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지가 요나는 하기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도망을 쳤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했습니다(욘 1:3). 어떻게 선지자가 이럴 수 있는지 황당합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그런 요나를 찾아오시고, 다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도 많은데 굳이 도망간 선지자를 다시 쓰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서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욘 3:5).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요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요나에게 회복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에게 “함께 일하자”고 하시며 손을 잡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손 내미십니다. 혹시 봉사를 쉬거나, 구역장의 사명을 내려놓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나 멀리 갈래, 조용히 예배만 드릴래” 하며 숨어서 신앙생활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그런 성도에게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욘 3:2)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실 때, “아멘” 하고 갑시다. 당당히 맞서서 사명을 완수합시다. 그리할 때, 세상도 변하고 나도 변합니다. 요나처럼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됩니다(욜 4:10,11).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나와 더불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 부족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잘못했다 하더라도 회개하는 자를 들어 쓰십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고전 1:27-29). 어떤 일을 만나건, 어떠한 일을 하건, 포기하지 맙시다. 어떤 자리에 있건, 어떤 직분을 가졌건,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는 교회
고전 1:26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에 앞서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흔히 가질 수 있는 사고와 기대에 정반대되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즉 자기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그들의 믿음과 사고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교리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주장일 뿐이겠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를 믿게 하시며 그를 믿는 모든 이들을 그들의 지혜나 행실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이야말로 복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앞에서 인간의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니며 따라서 그 누구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26절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복음과 믿음과 구원에로 부르실 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교인들 가운데 육체를 따라, 곧 세상적 안목에서 보면, 지혜로운 자도 많지 않고 능력이 뛰어난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도 많지 않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들을 “형제들”이라 한 것은 그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 같은 존재일 뿐이며 스스로를 자랑하거나 누구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 백성을 택하신다면 지혜롭고 능력 있으며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만을 기가 막히게 골라 뽑으셔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 하나님께서 과연 지혜로우시다 할 수 있을 텐데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에는 그런 사람들을 많지 않게 하신 뜻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사도 바울은 가르칩니다. 본문 27-29절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본문 30절은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 앞서 쓴 글 속에 담긴 복음의 진리를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라는 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재확인합니다.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셨다는 말은 많은 사실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그의 지혜도 그의 권능도 그의 말씀도 그의 의지도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가 베푸시는 십자가의 은혜도 그의 사랑도 그의 구원과 영생의 약속도 모두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와의 화목한 관계를 회복시키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가운데 보내주신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신 것입니다. “의로움”은 죄인인 우리가 죄가 없는 것으로 인정받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를 죄에 물들게 하는 세상과 결별하고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용납됨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죄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고 정죄로부터 자유로워짐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어떻게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이 지혜의 열매가 우리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이루 다 이해할 수 없는 지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우리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 결과로 우리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전에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것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달리 우리가 구원을 주실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30절에서 먼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라고 한 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녀들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을 얻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의 은혜로 인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라는 우리 개신교 신앙의 핵심을 뒷받침해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그가 곧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행4:8) 외친 대로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행4:12).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모두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가 베푸시는 사죄와 구원과 부활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그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유일하시고 참되신 구원자로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가 가르치신 대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메고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를 깨닫게 해주시고 믿게 해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따라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을 누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새삼 깨닫게 해주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럼으로 이 복음 아래 있는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으며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고 자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뿐인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로 하여금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이며 능력이라고 사도 바울은 역설한 것입니다. 본문 30-31절을 다시 한 번 봅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의 요지를 우리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을 누리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나 능력이나 신분의 귀천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본문 29절). 자랑하려면 오직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본문 31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 육체도” 즉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면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고린도교회의 교인 모두가 각자의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것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러 당파로 나뉘어 서로 분쟁하고 있던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며 그래서 스스로 자랑할 것도 없고 남을 무시할 일도 없음을 상기하게 함으로써 분쟁을 가라앉히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자랑하지 않으며 남을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다 같이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한없는 은혜로 인해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에서는 그 어떤 이유에서든 당파를 지어 분쟁해서는 안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시며 개개인의 지혜의 고하나 능력의 유무나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으시고 그 구성원을 삼으신 것은 참으로 은혜로운 일입니다. 사회에 나가서는 참으로 대단한 이들도 교회 안에서는 다 같이 한 형제자매가 되고 꼭 같이 섬기며 살 수 있다는 것은 곧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교우가 오직 주 안에서만 자랑하는 교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 교회 만들어가기 위해 다함께 힘쓰는 우리가 되어야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
고전 1:26-31 / 이필재목사
세상의 역사를 보면 선택을 잘해야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일주일 후면 또다시 국가를 책임질 국민의 대표를 선택하는 일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계속 언론기관에서 여론조사를 해서 많은 민중의 여론 반영을 퍼센트로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출마자들은 밤낮으로 자신을 선택해 달라고 목 메인 소리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투표 문화는 매우 다양해졌습니다. 옛날에는 이때가 되면 제일 많이 돌아다닌 게 고무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발 없는 사람은 괜찮게 한 켤레씩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선거 운동은 아주 옛날과 판이하게 달라졌는데 요즘 선거 문화는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다양해져서 대통령에 출마한 사람도 음악에 맞춰서 춤을 추더라고요. 근래 나타난 하나의 선거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점점 더 나빠지는 선거 문화가 있습니다. 지난 3월 22일자 동아일보에 발표한 것을 보면 “금년에 우리나라의 정당은 40개가 될 것이다.”라는 예상을 했습니다. 지금 신청하고 있는 정당이 40개가 된다는 것입니다. 선진국은 100년이 가도 정당이 2개뿐인데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많이 생기는지, 이름도 신문에 난 것이 다양합니다. 천국의 황제당, 새마을당, 문화 예술당, 경제통일당, 국민실향안보당, 친박연대, 평화통일가정당…. 저도 심심한데 “갈보리십자가당”을 하나 만들까요? 지금은 지혜로운 생각이 국민 전체에 주어져 이런 때에 국가를 위해 어떤 방향의 일꾼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생각해야 될 그런 시간입니다.
대통령이 국무위원을 선택할 때 기준을 보니까 대략 이렇습니다. 코드에 맞는 사람! 자기와 같이 일할 사람은 이것이 첫째입니다. 전문 분야에 능력이 있는 사람! 그 사람이 국민 정서상 협조가 나타날 수 있는 국민의 신망을 얻을 수 있는 사람! 그 다음에 지금까지 자기가 대통령 되는 과정에 공로가 있는 사람! 이런 네 가지 카테고리 안에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일 때 사원들을 뽑잖아요? 누굴 뽑습니까? 능력 있는 사람! 능력이란 곧 이 분야의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 이런 분야에 과거 경력이 있는 사람, 그래서 우리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그런 사람을 선택합니다. 신랑감, 신붓감 선택할 때도 많은 조건이 있습니다. 대략 이런 것 같습니다. 경제능력, 외모, 성격, 그 다음에 우리 교회 다니는 사람은 종교, 가정배경, 요즘에는 인종, 그 다음에 젊은 세대가 제일 큰 점수를 주는 것이 매너, 그리고 재미있는 사람, 사실 자기 행복을 평생 마련해야 되니까 사람 선택의 기준이 다양합니다. 저희 가족이 가끔 모일 때가 있습니다. 저희 집 아들은 매너가 어떠냐 하면 성인군자입니다. 하루 종일 있어도 말이 없습니다. 생긴 것도 근엄하게 생겨서 조용히 명상을 합니다. 우리 아들이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있어도 저에게 뭐라고 말을 걸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답변할 게 없잖아요? 그런데 그 아들의 어머니는 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얻었더니 며느리도 똑같이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네 식구가 어쩌다가 모이면 항상 묵상 기도 분위기입니다. 사람 선택은 참 중요합니다. 교회가 목사를 선택하는 기준도 교회 신문에 나옵니다. “이런 조건에서 교회 목사님을 선택한다.” 보면 이렇습니다. 신학 배경! 어느 신학교를 나왔나? 특히, ‘외국에서 박사학위 소지자 우대’ 이렇게 나옵니다. 교파! 감리교, 장로교 하는 것은 당연하고 같은 장로교단 안에서도 갈래가 많으니까 통합측, 합동측, 고신측 어디냐? 그 줄기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목회 경력! 목사 안수 받은 지 5~10년 된 사람을 찾습니다. 나이! 미국에서는 나이 말했다가는 법에 걸립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막 나오더라고요. ‘45~50세 미만’이 최고 인기더라고요. 설교 테이프 보낼 것! 그리고 목회철학에 대한 소견서! 어떻게 목회를 할 것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인물! ‘반드시 최근 3개월에 찍은 명함판 사진 제출’ 이것은 다 인물을 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족사진 첨부! 이것은 식구가 몇 식구인지를 보려는 겁니다. 요즘에는 항목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당신이 제일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지 쓰라고 합니다. 이렇게 많습니다. 이런 기준에서 거의 다 교회들이 목사님을 선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사람을 선택하셨나? 이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고린도는 당대 최고의 철학의 도시라서 수사학과 변증학이 발달했습니다. 사변적 사고로 인한 합리성의 논리가 아니면 절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교육과 철학의 도시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지금 바울 사도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미련한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우리 고린도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해서 따르라고 하느냐?” 이런 반응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가 섰잖아요?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생겼잖아요? 그래서 고린도전후서가 생긴 것 아닙니까? 그러면 고린도에 누가 들어왔나? 그 지역에서 바울이 밝히는 것이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이것은 당시에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이 고린도에서 교인이 되었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는 겁니다. 지식 많은 사람은 교회에 안 왔습니다. 낮은 수준의 사람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사람들이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는 진리는 무식한 대중이나 믿는 것이지 지식인들은 믿을 수가 없는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모자라는 사람, 바보 같은 사람들이 교회 들어왔다고 바울이 인정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기독교 초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부터 우리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초기에서부터 나타난 현상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대중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 것을 놓고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평가한 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나 있습니다. “본래 학문 없는 어민으로 알았더니” “공부도 못한 사람 아니야?” 이것이 베드로에 대한 객관적 평가입니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해?” 이렇게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기독교는 아예 초기부터 무식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고린도교회도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우리 중에는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잖느냐? 다 평가를 받지 못하는 수준의 사람들만 교회에 모여 있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예수님 다음으로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추대한 것입니다. 그러한 기독교의 최고, 최초의 인물이 학문이 전혀 없는 무식자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다른 나라는 고사하고 우리 한반도의 복음의 확산! 두 종류의 사람들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는 학문 배경이 낮은 사람들, 또 하나는 뭐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 기준으로 예수님 때부터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합니까? 이 세상과는 정 반대의 선택 기준을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귀족출신, 양반가문, 권세 있는 자, 혹은 부자 이런 계층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제 기독교 문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요즘에는 무슨 행사를 하거나 하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이 오히려 소외될 만큼 기독교 문화는 확산되었습니다. 대통령만 봐도 이승만 대통령, 윤보선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 이번의 이명박 대통령 모두 기독교입니다. 국가 조찬 기도회를 가보세요. 국회의원 가운데 기독교인이 제일 많습니다. 불교 신자는 10분의 1도 안됩니다. 기독교 신자가 제일 많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어땠느냐? 시골에 어쩌다 그 동네 이장님께서 한번 교회 나오시면 이장님이 간판스타입니다. “이장님이 우리 교회 다 나오셨다!” 어쩌다 파출소 순경 한 사람이 시골 교회 나오면 그 교회는 얼마나 목에 힘을 주고 전도를 하는지 “순경이 우리 교회 나온단 말이야!”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문벌, 학벌 아주 낮은 수준의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처음에 예수를 믿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가문이 좋을수록 학문이 높을수록 예수 안 믿었습니다. 이것은 통계로 어느 나라나 똑같습니다.
그 다음에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다.” 이 능한 자란 능력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면으로든지 능력 있는 사람은 교회를 멀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는 초창기 교인들을 보면 다 무식하고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시원하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도 그렇다고 바울이 자기가 세운 교회를 놓고 객관성 있는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 초기 역사를 볼 때 1940년대가 생각나시는 교인들이 계실 것입니다. 1940년대 우리 한국교회는 구호물자와 관계가 깊었습니다. 외국 선교사들이 가끔씩 가져다주는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 옷 보따리를 풀어서 교인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많이 얻어 입었습니다. 그 옷도 새 옷이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도 헌옷들을 보내지만 백화점에 가서 새로 사다가 보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입던 것을 깨끗하게 세탁해서 보낼 뿐이잖아요? 그때 다 그렇게 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그날이면 시골 교회는 아주 잔칫날입니다. 쫙 펴놓고 1번에서 100번까지 번호를 다 매겨놓고 번호를 써서 뽑는데 좋은 것 뽑힌 사람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런데 이 옷이 잘 맞느냐 하면 안 맞습니다. 우리보다 몸들이 다 크잖아요? 그래서 그때 많은 전도사님들이 입고 다니는 옷은 거의 소매가 미국 사람들처럼 길게 나와서 지저분하게 입고 다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옷 입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전도사님 아니면 교인들이었습니다. 구호물자를 얻어 입었습니다. 또, 중학교 못간 학생들이 많았잖아요? 교회가 한 것이 있습니다. 권세열 박사께서 우리나라에서 열심히 한 것이 “성경구락부”라고 해서 중학교 입학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서 교회에서 중학교 과정을 거의 무료로 가르쳐준 학교 그것이 “성경구락부”였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교회 나오는 아이들은 다 거기 가서 그것도 거의 야간에 초라한 예배당 안에서 중학 과정을 공부한 아이들이 시골에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느 동네나 최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교인이 형성된 것이 사실입니다. 반드시 무식하고 가문이 좋지 못한 것이 예수를 믿는 조건은 아니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들이 복음을 거절하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던 역사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철학의 도시 고린도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지금 일어났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세 가지가 본문에 나타났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는가?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잠언 9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헬라의 지혜가 헬레니즘의 멸망을 가져왔습니다. 고차원의 높은 지식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내용이 바로 헬라를 멸망시킨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참된 진리는 언제나 감추어져 있는 것인데 그 감추어져있는 진리를 밝혀내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며 아울러 복음도 감추어진 영적 비밀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인간의 지혜로 절대로 밝혀내지 못한다. 하나님이 계시로 밝혀주실 때에만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에게 이것을 감추시고 미련한 자들에게 하늘 계시의 문을 열어서 오히려 지혜 있는 자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적인 세계 비밀을 계시적으로 알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축복을 얻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희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틀림없이 과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이 지금 가고 있는 신학과 과학의 만남의 길이라고 생각을 해서 성경 다음으로 과학 서적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처음부터 살펴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객관성 있게 평가하면 뭐지요? 사형수입니다. 끌려가서 두들겨 맞고 피 흘려 죽었습니다. 이것이 시작입니다. 우리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다 봤잖아요? 멜깁슨이 감독했지만 그 영화는 너무 때렸습니다. 정신적 고뇌에 더 초점을 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체적 고난에 초점을 너무 많이 맞추었습니다. 어쨌든 예수는 그렇게 끌려가서 매 맞으며 피 흘려 사형수로 죽고 말았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성 있는 평가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약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하나도 없어서 로마를 이길 만한 힘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권력과 손을 잡았을 때 망했습니다. 이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순교자가 수없이 나올 때는 교회가 살고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권력에 붙어서 재미를 볼 때는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그것이 중세기 역사입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정부도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대통령 마음에 안 든다고 파면시켜버렸습니다. 권력을 교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한때 서울에서 목사들에게 권한을 준 것이 있습니다. “사회정의를 위한 행정적 권한을 목사들에게 주어야겠다. 난폭 운전하는 사람들 골라내서 고발하는 것을 목사들이 해라!” 그래서 목사들이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운전수들이 ‘목사’라는 마패만 내어놓으면 벌벌 떨었습니다. “너 왜 이렇게 난폭 운전해?” 교통순경이 이상으로 떨었습니다. 요즘에 신문에 보니까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한국의 많은 정당 가운데 기독교 정당이 있습니다. “기독교 정당의 대표를 장경동 목사로 했다가 취소했다.” 잘못하면 기독교가 웃음거리가 됩니다. 누가 아이디어를 내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반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 53장에 이미 나와 있습니다. 얼마나 약한가?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다.” 교회가 권세를 가지면 안 됩니다. 목사들이 권력을 가지면 안 됩니다. 망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집어던져 버린바 된 그 버림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패러독스의 영적 진리! 이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이요 영적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면 교회가 큰 문제가 됩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세요. 모세가 얼마나 약해요?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났잖아요? 다 죽이니까 갈대상자에 실려 운명적으로 나일강에 떠내려갔습니다. 뒤집어져서 죽을지 모르잖아요? 그런 약한 사람입니다. 그랬는데 그가 어떻게 됐습니까? 인류 역사의 국민 지도자 능력으로 모세와 같은 사람은 역사에 한명도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80세 고령에 지도자가 됐다는 것, 그 다음에 가장 강한 애굽 군대의 저항을 받았다는 것, 가장 열악한 사막에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 가장 긴 시간인 40년이 걸렸다는 것, 그의 나이가 120세가 되었다는 것, 이런 조건의 지도자는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과는 가장 훌륭하게 해냈다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성경에 보세요. “모세와 함께 하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이 말이 계속해서 나오잖아요? 라합은 기생이었는데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사실 여인 직업으로서 기생은 마지막에 선택하는 천한 직업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예수의 족보상 조상이 되었습니다. 약한 것을 택해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때요? 기생 직업보다 더한 간음한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다음에는 세상의 모든 여인들이 존경할 수 있는 자리의 마리아로 변했잖아요? 기생 라합은 유다 지파의 귀인인 살몬의 아내가 되고 그의 후손에서 보아스, 다윗이 나오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그 줄기에서 이루어졌다고 마태복음 1장에 계속해서 나왔잖아요? 일본에서 어떤 사람이 술집에 열심히 다니다가 그곳에서 일하는 기생과 바람을 피워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바람피운 아버지가 그 아기를 책임질 리가 없습니다. 아기 엄마는 화가 나서 그 아기를 그 아버지 집에다 갖다 버렸습니다. “네가 책임지든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그랬더니 그 집의 본처는 “이게 뭐야?” 이 아기를 길바닥에 집어던졌습니다. 그는 호적이 없는 아기가 되었습니다. 온갖 세상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빈민굴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그를 선택했습니다. 이 사람은 일본뿐 아니라 특별히 미국 사람들에게, 전 세계에 일본이 낳은 가장 훌륭한 정신적 지도자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본 사람들이 일본 역사의 정신적 지도자 가운데 최고 존경 받는 지도자! 바로 가가와 도요이꼬 목사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세상과 다릅니다. 그래서 멸시받고 약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택해서 “나와 함께 일하자.” 나중에는 가장 거룩한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선택 기준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여! 아느냐? 낙심하지 말라! 절망하지 말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목표와 목적이 준비되어 있음에 대한 믿음을 가져라.”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선택 기준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이 비 내리는 날 저희들이 옛날 고린도 교회에 조명되어 있는 하나님의 인간 선택 기준에 대한 말씀을 저희들이 상상하였사오니 나를 택하신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 세상의 평가받지 못하는 사람을 더 기뻐 선택하시고 마침내 그들의 손을 잡고 가장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이루심을 저희들이 믿사오니 이렇게 선택받은 아버지의 자녀의 기쁨과 행복을 가지고 늘 감사하면서 주신 사역에 충실한 청지기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교회는 약함과 조화와 사랑을 추구하는 곳
고전 1:26-31 / 김명혁목사
오늘 아침에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분쟁적인 교회였던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보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예루살렘 교회와 같은 모범적인 교회들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고린도 교회처럼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분쟁적인 교회를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라고 승천하신 주님께서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분부하셨는데, 오늘 아침 우리들이 열린 마음과 귀를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과 몸의 자세를 단정히 하고 다른 생각들을 다 접어두고 주님만을 바라보시면서 말씀을 경청하여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선교여행 때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1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후에 바울이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일년 육 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행18:1-5,11). 고린도는 본래 세속적인 상업 도시였고, 스포츠와 오락의 도시였고, 우상과 향락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사람들은 예수를 믿은 다음에도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분쟁적인 요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복음을 받아드리는 지역 사람들의 마음 밭의 성격에 따라서 교회의 성격과 모습이 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고린도 교회가 지녔던 세 가지 부끄러운 특징들과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에게 지니라고 분부하신 세 가지 특징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부족한 사람의 설교를 우리 주님께서 축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고린도 교회는 자랑과 교만을 지녔는데 약함을 지니라고 분부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약점 중의 하나는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를 드러내며 자랑하는 교만인데,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와 같은 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를 드러내며 자랑하는 교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속이 상해서 다음과 같이 책망 섞인 질문을 쏟아 부었습니다. “너희 중에 잘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너희 중에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너희 중에 능한 자가 어디 있느냐? 너희 중에 문벌 좋은 자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왜 잘난 척 하면서 자랑하느냐?”(고전1:26-29). “너희 가운에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너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아볼로 박사를 따르면서 아볼로 박사의 제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따르면서 바울의 제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어떤 사람들은 게바를 따르면서 게바의 제자들이라고 자랑하니 도대체 아볼로가 무슨 물건이며 바울이 무슨 물건이며 게바가 무슨 물건이냐? 사실 아볼로도 바울도 게바도 아무것도 아니니라. 우리는 모두 주님께 속한 주님의 물건들이니라”(고전3:3-7).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 다 그리스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3:22,23). 사도 바울은 저들의 자랑과 교만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4:7).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뿐 아니라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고전4:18-21). 고린도 교회는 자랑과 교만과 분쟁을 부끄러운 특징들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부끄러움이 많은 고린도 교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약해져서 약함을 지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너무 강해도 안되고 너무 유식해도 안되고 너무 유창해도 안되고 너무 화려해도 안되고 약해져서 약함을 지녀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과 2장에서 첫째로 십자가의 복음 자체가 약한 것이고, 둘째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약해져야 되고, 셋째로 복음을 받는 사람들도 약해져야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3,25).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 하며 심히 떨었노라 ”(고전2:1,3).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7,29). 사도 바울은 교회가 약해져야 한다는 만고에 불변하는 역설적인 진리를 설파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고린도서 편지만큼 약함을 극도로 예찬한 성경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약함을 극도로 예찬하는 약함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약함을 극도로 예찬한 약함의 사도인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 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후12:5).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리라”(고후13:4).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약함을 귀하게 여기며 약함을 추구하고 약함을 지녀야 하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약함을 지닐 때 약함의 원조가 되시는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높임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배타성과 불화를 지녔는데 포용성과 조화를 지니라고 분부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약점중의 또 하나는 자기가 처한 삶의 처지를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받아드리지 않는 배타성과 불화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미국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절대화하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무시하며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은 경상도성을 절대화하고 전라도성과 평안도성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보수적인 사람은 보수성을 절대화하고 진보성을 배척할 수도 있고 진보적인 사람은 진보성을 절대화하고 보수성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인 사람은 자본주의성을 절대화하고 사회주의성을 배척할 수도 있습고 사회주의적인 사람은 사회주의성을 절대화하고 자본주의성을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인 배타성과 불화가 고린도 교회 안에 들어와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한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유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자랑하고 어떤 사람은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도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처녀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배타적인 생각으로 고린도 교회는 사회적인 혼란과 불화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고전7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다양성과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고전7장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장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에게는 이런 처지에서 살게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처지에서 살게 하신다고 말씀하면서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다양성과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나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7:7-9).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처녀에 대하여는 내 생각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그러나 장가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 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니라”(고전7:17-28).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 보내는 자도 잘 하거니와 시집 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 하는 것이니라”(고전7:38).
사실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들이 처한 사회적이고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면서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처한 삶의 처지와 방식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아파트의 평수와 자동차의 배기량으로 사람들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그런 경향이 극심하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삶의 처지와 방식을 절대화하는 것을 금했고 그것을 상대화하고 다양화했습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혼자 살 수도 있고 결혼해서 살 수도 있다고 지적했고, 부자로 살 수도 있고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중요하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삶의 지위나 처지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지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의 말씀은 삶의 처지와 방식에 대한 다양성과 상대성과 조화를 가르치는 매우 값진 말씀입니다. 삶에 대한 폭 넓은 지혜를 가르치는 신약의 잠언과 같은 보배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20).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24).
우리 신자들이 지니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자기가 받은 영적인 은혜와 은사를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혜와 은사들을 무시하는 배타성과 불화를 지니는 것입니다. 요사이 한국교회 안에도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나는데 그것들을 지나치게 중요시하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이 자기들이 받은 영적인 은사들을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들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배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책망하며 은사의 다양성과 조화를 강조했습니다. 한 몸에 다양한 지체들이 있는 것처럼 주님의 몸인 교회 안에도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몸에 붙은 지체들이 다른 지체들을 싫어하거나 부정하면 몸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은사들을 서로 부정하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찌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고전12:14-77).
그리고 구체적으로 은사들의 다양성과 조화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8,19).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14:26).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14:31-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전14:39-40). 여기서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것은 은사들은 다양한데 자기가 받은 은사만 강조하고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들을 무시하지 말고 모두 존중하면서 질서 있게 조화 있게 은사들을 사용하므로 덕을 세우고 화평을 도모하라고 분부했습니다. 교회는 은사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그리고 덕을 세우고 화평을 도모하면서 조화 있고 균형 있게 주님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셋째, 이기적인 인색함을 지녔는데 이타적인 사랑을 지니라고 분부했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약점중의 또 하나는 이기적인 인색함인데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와 같은 약점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 스스로 인생을 ‘이기적인 존재’라고 정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 자신을 살펴볼 때 저 자신이 이기적인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조금씩 그 약점을 벗으려고 애를 썼고 조금은 벗었지만 저는 아직도 여전히 이기적인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는 이기적인 인색함이 두드러지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마 무역에 종사하는 상업도시 시민들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스포츠와 오락을 즐기는 엔조이 형 시민들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고린고 교회 신자들은 돈과 관련해서 너무 인색했고 헌금과 관련해서 아주 인색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밭을 팔아서 바치는 바나바와 같은 착한 신자는 한 명도 없었고, 집을 내어 놓는 루디아와 같은 너그러운 신자는 한 명도 없었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돈이 생기면 사업을 하든지, 스포츠 구경을 가든지, 오락을 즐기든지, 여행을 떠나든지 했고 감사헌금이나 구제헌금이나 선교헌금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극단적인 인색함으로 아무런 사례도 받지 못하고 의식주 때문에 손으로 일하면서 어렵게 목회를 했습니다. 구제 사역은 전혀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때를 회상하면서 고전 9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실 저들의 인색함과 부끄러움을 지적하는 글이었습니다.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고전9:6-15). 고린도 교회 신자들의 부끄러운 인색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편지였습니다.
고린도 후서에서는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극도로 인색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까지 지적했습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함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고후11:9). 아마 사도 바울은 그들과 헌금 이야기는 물론 마음대로 농담도 못했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그들이 시험에 들까 봐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을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연보를 풍성하게 했던 마게도냐 교회들의 예를 들면서 저들도 연보 생활에 힘쓰라고 권면을 한 것이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후8:1-5). 그리고 연보 생활을 힘쓰라고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저희로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만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의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를 인하여 넘쳤느니라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저희와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를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의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고후9:6-14). 풍성한 연보를 하는 것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그치지 않고 저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고 헌금하는 자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이기적인 인색함에 사로잡혀 있는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자기 자신의 삶의 최고의 모토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들도 그렇게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최고의 모토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삶이고 그것은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고 그리고 그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삶의 원리에 붙잡혀 사는 헌신적인 삶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삶의 모토요 선언이었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10: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방언의 은사를 받아서 날뛰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예언의 은사와 믿음의 은사를 받아서 날뛰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2). 구제의 은사를 받아서 나팔을 불며 자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사도 바울의 마지막 고백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인색한 고린도 교회 신자들을 위하는 길이라면 사도 바울 자신의 재물과 몸과 생명을 허비하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저들을 향한 책망이 희생적인 사랑으로 마무리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사도 바울과 같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눈물과 희생과 사랑이 가득한 목회자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과 교만에 사로잡혀 살던 고린도 교회와 배타성과 불화에 사로잡혀 살던 고린도 교회와 이기적인 인색함에 사로잡혀 살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자기 자신의 삶의 모토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이 보다 더 높고 더 위대한 삶의 모토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이 삶의 모토를 저의 삶의 모토로 삼기를 소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삶!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면서 살아가는 삶! 결국 사랑이라는 삶의 원리에 붙잡혀 재물과 자기 자신을 허비하면서 살아가는 삶! 이 보다 더 높고 더 위대한 삶의 모토는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아마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 교회의 신자들도 고린도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자기가 잘났다고 자기를 드러내며 자랑하는 교만을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약함이란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너무 강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자기가 처한 삶의 처지를 절대화하고 다른 사람들이 처한 삶의 처지를 무시하고 받아드리지 않는 배타성과 불화를 몸에 지니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포용성과 조화란 찾아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교회가 너무 배타적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이기적인 인색함을 지니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타적인 사랑과 희생이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회와 이웃에 대해 너무 인색해지고 너무 무정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 고린도 교회에 하시는 세 가지 말씀을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함을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포용성과 조화를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타적인 사랑과 희생을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모토와 권면을 다시 한번 읽으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라.”
잘나서 구원받은 사람 없다
고전 1:26-31 / 이정선목사
근대 시민사회를 태동케 한 사건은 프랑스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프랑스혁명은 근대 시민혁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프랑스혁명이 시민혁명의 교과서와 같은 지위를 차지하는 이유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그 이념 때문입니다. 근대 이전의 사회체제는 계급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는데,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 인간 없다’는 만인평등의 사상은 계급사회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동양에서도 계급에 근거한 체제에 대하여 하층민이나 노예계급의 저항이 종종 있었는데, 그들의 구호는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만인평등의 근대적 이념을 주창했다기보다는 체제전복을 통한 신분의 변화를 꾀했다는 점에서 시민혁명이라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계급의 타파나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시민의식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시민의식이 고취되고 실현된 결과 오늘날에는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계급사회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근대국가의 법이념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구현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지만, 회사에서 사장님과 종업원이 평등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심지어는 아파트 평수에 따라 그룹이 나누어지는 현실이잖습니까? 개인의 능력이나 또는 가진 소유의 차이에 따라 우리는 불평등한 세상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돈 많고 유식한 사람들 앞에서 굽실거려야 하고, 힘 있는 사람의 눈에 나서 고생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진 사람이 대우받고 능력 있는 사람이 인정을 받습니다.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이 합격하고, 얼굴이 예뻐야 인기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야 그렇다지만 천국에서도 그렇다면 어떨까요?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여부가 세상에서의 성공에 의해 좌우된다면, 세상에서 실패했거나 힘없이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예를 들어 달리기 시합을 해서 선착순으로 천국에 간다거나 하나님께서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만 구원하신다면 우리처럼 달리기 잘 못하고 공부도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우리 주님이 맨 처음 선포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사역을 시작하실 때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읽으심으로써 자신의 사역의 성격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는 말을 보세요. ‘형제들아, 너희 부르심을 보라.’ 여기서 부르심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효과적인 구원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향한 공개적인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믿고 구원얻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듣지 않고 자기 가던 멸망으로 향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효과적인 부르심이란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구원에 이르게까지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렇게 고린도 교인들을 구원으로 부르신 것을 보니까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혜 있고 좋은 가문의 사람들만 부르셨다면 대부분의 고린도 교인들은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실 때 무엇을 보고 부르십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구원으로 부르실 때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돈도 아니고 미모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뿐이지요. 그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우리가 잘났든지 못났든지, 우리가 영어를 잘하든 못하든 하나님은 상관하지 않으세요. 그것 가지고 구원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지 않아요. 오직 우리에게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만 있습니까? 노래 잘하는 사람만 뽑아서 구원하신다면 노래 못하는 사람들은 데모라도 해야겠지요. 얼마나 공평하신 하나님입니까?
그런데요,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매우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공평하심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어떤 사람들에게 불리하겠습니까? 똑똑한 사람들, 잘난 사람들에게 불리하단 말이지요.
사실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것은 영적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서 불이익이 되는 수가 많습니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하나님을 믿느니 내 주먹을 믿겠다는 사람들, 몸이 건강하고 힘이 있으니까 그런 소리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소리 못해요.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을 더 찾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못 배우고 무식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믿음은 아주 단순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대로 믿고 구원을 얻는 거예요. 그러나 복잡하고 정교한 학문을 마스터한 사람은 자기 학문세계만 알 뿐, 그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언급하신 적이 있는데,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세상에서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연약하고 미련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는 더 유리한 조건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어요. 영생을 얻고자 하는 열정도 있었어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재산이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 부르심에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이 원양어선을 가지고 있었다면 배를 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많이 못 배우고 재능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 되신다는 것을 믿고 신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복음의 진리를 비웃는 위대한 철학자보다 훨씬 더 지혜롭지 않습니까? 최후의 심판이 있은 후에 그 지혜롭다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통탄하게 될 것입니다. 권력을 최고로 알고 돈의 능력으로 큰소리치는 사람들보다 가진 것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훨씬 강하지 않습니까? 물 한 방울을 간절히 사모하게 된 지옥의 부자가 아브라함 품속의 거지 나사로를 얼마나 부러워했습니까?
때로는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지난 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한 선수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이처럼 유명한 사람들이 다 기독교인이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려고 할 테니까요.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유명한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도매금으로 비난을 당하는 경우를 많이 보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힘은 없지만 자기 서 있는 자리에서 성실하고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그 모습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시험을 봐서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들을 뽑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식하고 투박한 사람들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변혁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전혀 다른 시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 어떤 것이고 정말 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과 약한 것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것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해서일까요? 똑똑하고 돈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대접을 충분히 받았으니까 이번에는 고생을 좀 시키기 위해서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만약 얼굴 예쁜 사람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콧대가 높아지겠어요? 구원받은 이유는 전적으로 자기가 잘났기 때문이거든요. 구원받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다운 자신의 미모를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에는 구원받는 사람의 공로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자랑하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식하고 가난해서 구원받았으니까 무식하고 가난한 것을 자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연약함과 미련한 것을 택하여 주신 것을 감사해야지,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요.
우리는 구원받아 의인이 된 것이지 의인이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자신의 의로 구원받은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착각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은 행위로 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쓸데없는 법들을 만들어놓고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다 지켰으니까 자기들은 의롭다고 목에 힘을 주고 다녔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책망하시고 못 마땅해 하시던 것이 바로 그들의 거짓된 의로움과 교만 아니었습니까?
결국 우리의 의로움은 전혀 없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로움이 덧입혀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성도, 즉 거룩한 무리가 되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구속함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특징짓는 한 가지 요소는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이 없는 삶이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과 호환될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9장 23-24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삶이 참으로 하나님만 자랑하는 모습으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욕망과 교만함이 자리를 비켜주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거룩하심이 우리의 삶에서 빛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그래서 새로운 방법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갈 수 있도록, 진정으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영광스러운 직분들
고전 1:29-31 / 이종윤목사
서론:
여러분들은 이런 말들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회사(office)가 있어.!” “난 이미 구제를 했어(I gave at the office).” “난 개인은 비판해도(예를 들어 대통령, 목사님, 선생님) 그의 위치(office)는 존경해.”
여러분들이 비판하는 그 사람은 직분(office)에 있어서 존경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대부분은 사무실(office)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office”라는 단어는 사무실 공간과 또는 어떤 사람의 직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직무(office)”는 특정한 장소와 그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사무실(office)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있는데 그가 대통령 직무(office)에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직분이 있습니다. 사실 복수로 “직분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소요리문답 23번부터 26번까지의 질문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질문에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세 가지의 직분,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23번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 무슨 직분을 행하시는가?”입니다. 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행하시되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두 지위에서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24번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시는가?”입니다. 답은 “그리스도께서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시는 것은 우리를 구원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이다.”입니다.
25번 질문은 좀 더 깊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시는가?”그 답은“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시는 것은 단번에 자기를 제물로 드려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하게 하며 우리를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항상 간구 하시는 것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26번 질문은 최고조에 이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왕의 직분을 행하시는가?” 이 질문의 답은 “그리스도께서 왕의 직분을 행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고 우리를 다스리시며 보호 하시고 자기와 우리의 모든 원수를 막아 이기시는 것이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소요리문답에 나타난 전통적인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에 집중하기 보다는 사도 바울과 요한 칼빈이 해석한 고린도전서 1장 29절~31절까지의 말씀으로 가지고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본문은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제목들을 중심으로 본문을 연구해 보기로 합니다.
I. “직분(office)”의 영광
II.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
III.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과 우리의 구원
IV.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을 통해 오는 주님의 영광
I. 직분의 영광
이 세상의 직분(office)의 영광은 그것의 크기, 위치, 그리고 값비싼 가구들에 있습니다. 하지만 위치적 직분의 영광은 그것의 권위에 있습니다. 권위가 더욱 커질수록 직분은 더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미국 대법원장의 권위가 워싱톤 D. C.의 개잡는 부서장의 권위보다 더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같은 도시에 위치해 있고 판결을 내려야 하는 비슷한 직무가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러 직분들이 겸해서 주어진다면 그 사람은 더욱 영광스러워질 것입니다. 흔치 않은 일이긴 하겠지만 어떤 사람이 대법원장, 대통령, 국회의장의 직분을 동시에 가졌다면 긍정적인 말로는 전권을 가졌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독재자, 혹은 폭군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힘과 절대적인 선을 동시에 소유하실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메시야,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며 동시에 세 가지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소요리문답에 나타난 것처럼 그리스도는 선지자이시고, 제사장이시며, 또한 왕이십니다. 이 삼중직은 메시아적 직분들입니다. “메시야”란 히브리 단어의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직분을 받는 자들에게 기름을 부어 세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9절~31절을 근거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에 대해 설명하며 “이 본문처럼 그리스도의 직분에 관해서 명백하게 설명한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II.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소요리문답이 정의하는 대로 전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이 작성되기 거의 백 년 전에 칼빈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직분의 관계에 대해서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칼빈이 규명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직분들은 문자적인 선지자, 제사장, 왕이 아닙니다. 칼빈은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그리스도의 직분들을 “의, 거룩, 지혜, 그리고 구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처럼 그리스도의 직분에 관해서 명백하게 설명한 것은 없다.”는 칼빈의 말은 그리스도의 직분들은 그저 타이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성취에 있어서 그의 유일한 영광스러운 역할을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덧붙인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국 여기에 열거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열망해야할 복들은 절반 혹은 한 부분이 아니라 ‘완전한 전체’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들이 우리가 채워 넣어야 할, 혹은 의, 거룩, 지혜, 그리고 구원을 잡아 늘려서 얻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 된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칼빈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네 가지의 영광스러운 직분을 묘사하며, 그분의 탁월함의 전체를 가지고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복들을 열거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구원자 그리스도
바울의 사중직과 소요리문답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 사이의 연관성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소요리문답의 질문 23번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직분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로 무슨 직분을 행하시는가?” 주님은 우리의 구속자로서 삼중직을 실행하시는 것입니다. 칼빈이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제시하는 네 번째 직분은 “구속”입니다.
지혜의 선지자
그리스도의 선지자와 제사장 직분의 관계를 살펴 보겠습니다.
바울은 “네 번째 영광스러운 타이틀”로서 “지혜”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그리스도의 ‘전체적 탁월성’을 제시합니다. 선지자의 메시지는 신적 지혜의 소통수단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지혜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마치 주님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하게 계시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알기 원치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성경말씀이 골로새서 2장 3절의 말씀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의와 거룩의 제사장
바울의 “의로움과 거룩함”이란 단어는 제사장의 역할을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칼빈에게 그리스도는 그의 희생을 통해서 의로움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칼빈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부를 때 그는‘우리 안에는 죄밖에 없다’는 고백을 함께 하였습니다.
둘째로, 칼빈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고 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드려진바 된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주께서 그분의 죽음과 순종으로 우리를 속죄하시고 우리의 의로움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의는 죄의 용서와 용납하시는 자비로움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역할은 그의 거룩함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칼빈은 주님을 우리의 ‘성화(sanctific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거룩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고 오직 그의 영으로 거룩함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입니다.
영광의 왕
그리스도는 왕의 직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본문 말씀 31절에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명하고 있는데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주님께만 모든 찬송을 드려야합니다.
이런 독보적인 영광은 왕의 왕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문에 칼빈은 종교개혁의 좌우명인 “Soli Deo Gloria” “오직 주께만 영광”을 선포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구속적 직분들은 구원자로서 그의 독특한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아로서 구원적 직분들을 소유하고 있음을 살펴봤습니다. 다음은 이런 사실이 우리의 구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III.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과 우리의 구원
칼빈의 그리스도의 사중직에 관한 해석은 주님의 구원 사역의 영광과 유일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칼빈이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말했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 표현들이 있을 수 있지만 한 마디로 우리 안에는 죄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사중직을 언급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탁월성과 그런 분으로부터 받는 모든 복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의로움과 구원
우리가 칼빈을 연구하면서 칼빈이 다른 모든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루터가 주창한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칼빈이 강조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사중직은 우리의 구원을 얻는 믿음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본문과 같은 그리스도의 직분들에 관한 흔치 않은 말씀을 접하면서 믿음의 본질과 효능에 관해서도 매우 명료하게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를 배우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통해 어떤 복을 주시는지도 함께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구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얻는 의로움과 함께 우리는 칼빈의 신학에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의로움과 거룩함, 또는 칭의와 성화의 불가분성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직분은 그의 “성화”의 직분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칼빈이 표현하고 있는 ‘duplex gratiae’ 혹은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새언약, 즉 ‘곱절 은혜(double graces)’입니다.
루터의 모토는 “오직 믿음으로 인한 칭의”입니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이것에 동의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의롭게 만드는 믿음은 혼자가 아니라 항상 구원을 주는 은혜(graces)과 함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는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그럼으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도구인데 우리는 그 믿음을 그리스도와 그의 의로움으로부터 받고 안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얻은 한 사람의 믿음은 다른 모든 구원을 주는 은혜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11장 2절)
그럼으로 칼빈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성화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칼빈은 바울의 그리스도의 의롭게 하시는 직분과 거룩하게 하시는 직분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은혜의 열매들은 다 분해될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누군가가 이런 것들을 떼어 놓으려고 시도 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기 위한 자들은 성화의 삶을 동시에 살지 않으면 그 믿음이 지속될 수 없음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순전함과 순결함의 삶으로 갱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칼빈의 주장에 대해서 로마 가톨릭은 개혁자들의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칭의 교리가 ·선한 일을 행함은 중요치 않게 본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중상모략 하는 자들이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설교하면서 선한 일들을 버린다고 하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이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다릅니다.
이 두 가지 그리스도의 직분들의 관계는 같지 않습니다. 이것을 결코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칼빈은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이 두 가지 직분은 매우 견고하게 결속되어 있습니다만 또한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울도 이것을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기에 우리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칼빈이 주장한 대로 칭의와 성화는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별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구원자의 독보적인 구원 사역
지혜, 의로움, 거룩함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직분들은 구원자로서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칼빈은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오신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주께서 스스로 우리의 몸값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에게 구원이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가 얻는 처음이며 또한 마지막 축복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 주신 바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의 선하심으로 우리는 단번에 죄의 사실에서 풀려난 것이고 죄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저주로부터 자유케 된 것입니다. 그럼으로 구원이란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처음 선물이고 또한 그 선물을 완성시키시는 사역입니다.
신학자들은 구원의 성격에 관해서 “이미 그리고 아직(already and not yet)”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칼빈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벗어난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부활의 마지막 날까지 구원을 갈망함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롬. 8:23)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는 모든 영광스러운 직분들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럼으로 오직 주님만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개혁자들의 모토이며 칼빈의 통찰력인 Soli Deo Gloria, 즉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란 고백을 따라가 봅시다.
IV.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은 주님께 더 큰 영광이 됩니다.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29절~30절을 주해하면서 ‘그리스도의 모든 직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사중직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황으로 봤을 때, 바울과 칼빈은 우리가 “모든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직분들”이란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칼빈은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중직에 관해서 29절과 31절 사이에 30절을 마치 샌드위치처럼 끼워 넣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29절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 “그 누구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영광을 얻을 만한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모든 인류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모든 육체는 하나님 앞에서 잠잠할 지어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칭찬을 받을 만한 모든 것들은 오직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30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없는 것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롬. 4:17)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창조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의 의로움이 되신 그리스도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부른 이유입니다. 우리 안에서는 죄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직분들로 인해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축복들은 너무도 귀한 것입니다.
칼빈은 31절에 클라이맥스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독보적인 구속의 역사로 인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아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허락하신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고 모든 찬송은 주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벌거벗긴 채로 두지 않으시고 결국 우리를 그분의 영광으로 옷 입혀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자랑하려면 예수님 없이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은 존중될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선한 것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스스로 자랑하려는 헛된 노력을 버리고 모든 초점과 노력을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지혜, 의로움, 거룩함, 그리고 구원으로 아는 것은 오직 주님만 찬송을 받으실 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통찰력은 우리의 예배를 진정한 예배로 만드는 요소가 되지 않을까요? 만약 예배가 예배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다는 목적에 사로잡힌다면 우리의 예배는 어떻게 변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예배 가운데 그리스도의 독점적인 영광이 사장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슬프게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예배실 가운데 성도들의 낮은 직분이 왕 중의 왕이요, 만유의 주시오,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요,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신 분의 영광을 사라지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은 “오직 나의 입맛에 맞춰라”로 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결 론
모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은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직분과 고린도전서 1장 29절~31절까지와 연관이 있음을 공부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종교개혁의 모토들과의 연계성도 볼 수 있었습니다. Sola Fide(오직 믿음)의 뜻은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우리는 또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이 진리만 단독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은 그리스도의 모든 다른 영광스러운 직분들과의 연계성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도 칼빈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로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지혜, 의로움, 거룩함을 주시는데 이것들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과 연합 한다는 것은 구원 받은 성도 안에서 칭의와 성화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직분들과 그것들이 성도들에게 주는 축복들은 바울의 가르침과 같이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직분들’에 관한 칼빈의 이해는 모든 영광은 주께 속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직분들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은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임을 각인시켜 줍니다.
칼빈은 바울의 말씀을 연구하면서 바울과 일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우리의 책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1장 31절 말씀이 예레미야 9장 23절과 24절, 즉 Soli Deo Gloria을 인용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간증으로 인용하고 있는 선지서의 상황에서 보면 이것은 더욱 더 명료해 집니다. 인간의 능력, 지혜, 부요함의 모든 자랑은 사라져야 하며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만 자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렘. 9:23-24) 이 길이 주님의 심판과 의로움과 자비가 어떤 것인가 잘 알 수 있는 길입니다. 주님의 직분에 관한 지식은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자부심과 또한 두려움을 동시에 만들어 줍니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높이려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다면, 또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안식과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온전한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야 말로 “주 안에서 자랑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칼빈의 글을 통해 우리에게 있는 또 다른 직분의 책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직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독보적인 영광과 우리 구원에서의 주 되심은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소요리문답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의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의 직분들과 우리의 지혜, 의로우심, 거룩함, 그리고 구원하심을 높이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그분을 믿기를 소원하며 온 인생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갈망할 때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직분들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을 오늘도 또한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 나타난 예레미야와 칼빈과 동의하며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오직 주 안에서 자랑할 것이라.”
오직 하나님께 영광 Soli Deo Gloria!!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자를 좋아하신다
고전 1:26-31 / 민경설목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것을 지배하시지만 이 세상 것에 의하여 영향 받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더 크고, 높고, 많이 소유한다 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행8:20)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 하나님의 뜻에 맞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행13:22) 그래서 하나님이 부족한 자를 좋아하신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족한 자가 낮아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외적인 크기와 상관없이 스스로 주관적으로 부족함을 깨달아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자를 하나님은 좋아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그런 부족함을 깨닫는 자를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할 때 주로 어부, 세리, 목동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오늘 본문도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말하길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를 들어 쓰신다는 말씀을 합니다. 그 당시 고린도 교인들은 은혜는 많이 받고 은사도 많이 받았지만 스스로 나타내려고 분쟁이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복된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 하나님께서는 왜 부족한 자를 좋아하십니까?
첫 번째,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8-29) 부족하다는 것은 꼭 가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가져도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은혜를 은혜로 아는 자,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잘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깨달았으면 하나님을 나타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전1::31) 주님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하나님이 축복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 번째, 승리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잘난 사람이 이기면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승리한 줄 압니다. 그러나 부족한 사람이 이기면 하나님의 것으로 이긴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참 승리를 하게 됩니다.
네 번째, 천국을 소망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잘난 사람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만 부족한 사람은 천국에 소망을 둡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큰 것을 가져도 다 지나갑니다. 우리의 소망은 천국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1서 2:15-17) 이 세상 다 가져도 천국 소망만 못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자를 좋아하십니다.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만 있어야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함을 깨달아 영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광진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택한 사람
고전 1:28-29 / 최낙중목사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매일매일 경험하면서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온전한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가 됩니다. 하나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정확히 알고 믿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하신 일들이 너무나도 신묘막측해서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믿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 다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보니 나중에 알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새의 아들 가운데 한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라”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너희 아들들 가운데서 왕이 될만한 자를 내 앞에 세우라”하니, 이새는 막내 다윗만 들에서 양을 지키게 하고 첫째 아들부터 일곱째 아들까지 차례로 그 앞에 내세웁니다. 맨 먼저 장남 엘리압을 세웁니다. 엘리압이 왕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한 것은 엘리압의 용모와 신장이 다른 형제들보다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의 머리위에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려옵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하셨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 아비나답을 사무엘 앞에 세웠으나 역시 그도 아니라 하였고, 셋째 시므아도 아니라 하고, 일곱 번째 아들까지 다 그리하였습니다. 또 아들이 없느냐고 묻고 들에서 양을 먹이고 있는 막내를 오라하고 그 앞에 세우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기를 “이가 그니 그를 왕으로 세우라”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으니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되었고, 40년 동안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면서 강성대국을 이루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 선택하는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집사중 한 분 스데반집사를 돌로 쳐서 죽이는 데 앞장섰던 유대교에 열심인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울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박해를 피해 저 멀리 다메섹으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오기 위해 행동대원들과 함께 다메섹으로 갑니다. 바로 그날 정오쯤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큰빛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고 말하자, 사울이 “누구십니까?”하고 물었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니 그는 크게 질려 쓰러집니다. 밝은 빛이 비쳐올 때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삼일동안 눈을 뜨지 못했습니다. 그는 삼일동안 음식을 전폐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그때에 다메섹 성안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던 아나니아라 하는 성도에게 찾아가 예수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 이르기를 “너는 지금 일어나 사울을 찾아가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하시니 아나니아가 대답합니다.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들에게 듣기로는 저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고 또 여기서도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러 왔다 하더이다”하고 말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위하여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나의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같은 일은 사람들이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며 사람을 죽이는 데 앞장 선 사람을 형벌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그같은 죄인을 신실한 일군으로 선택해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위대한 교회역사을 그로 이루게 합니다. 신학자 중에 신학자요, 선교사 중에 선교사요,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14권을 그로 하여금 쓰게 했으니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열심히 공부 많이 하고 경험 많은 사람들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무식한 사람도 들어 쓰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은 사람은 공부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 공부 열심히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도자가 됩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에서 전도 많이 했던 분들이 양의사였던 장길여박사님, 장로님이였습니다. 한의사였던 박관여장로님, 또 조만식장로님 모두 전도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 의대생들이 앞으로 의사가 되면 전도 많이 하길 기대하고, 또 사법고시를 준비해서 합격을 해서 판검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면 전도 많이 하길 기대해봅니다. 그러나 D.L 무디와 같은 사람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생에 100만명을 전도했다면 이거 또한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신기한 일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식인이냐, 무식한 사람이냐 하는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의 사람이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붙들려 사는 사람인가, 또 사명감에 붙들려 사는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췄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 믿음을 보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머리를 의지하고, 지식을 의지하고, 경험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갖지 못한 사람일수록 무릎을 꿇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다 보면 능력도 받고 은사도 받고 신령한 세계속으로 들어가기도 합니다. 물론 지식이 많음이 있으면 경건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 그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충만하고, 세상적인 지식도 차고 넘치고, 거기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면 더 큰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멸시받고 천대받고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택하셔서 능력을 부어주시고 권세를 부어주시고 은사를 주시고 믿음과 지혜와 말씀을 부어주셔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을 도리어 부끄럽게 하시는 것은 “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붙드시면 그는 위대한 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가? 그것은 주님의 손에 붙들리게만 되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 등 여러 당파가 있었고, 서로들 잘났다고 떠들고 싸우고 교회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우는 사람들을 주의하여 보라 형제들아 너희들을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무엇을 깨달을? 하나님은 때마다 일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자를 원하십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 자랑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
고전 1:26-31 / 지용수목사
회사에서 신입 사원이나 경력 사원을 채용할 때는 그 사원들을 향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또 부모가 자녀를 기를 때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오늘도 한 집사님이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을 보니 저도 기뻤습니다. 부모에게는 아들딸을 향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딸이 그 기대에 이르면 너무 좋습니다. 또 회사의 경영주는 채용한 사원이 기대감에 맞게 일을 하면 기뻐하고 그를 각별히 사랑하고 또 밀어주게 됩니다. 하지만 기대에 어긋나면 '저 사람을 어떻게 할까?'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십자가의 말씀으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깨달은 사람은 벌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의 도를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는데는 그 기대하심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까? 오늘 나는 무엇을 할까?' 하면 바보입니다. '하나님, 오늘 저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바로 살지요?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지요?' 하고 하나님께 여쭈면서 언제나 하나님의 기대에 나를 맞추도록 해야 합니다.
설교하는 목사도 '오늘 무슨 말씀을 전해야 교우들이 은혜를 받을까?' 하는 목사는 바보입니다. '하나님, 오늘 무슨 말씀을 전해야 됩니까?' 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은혜 받고 못 받고가 우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목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대는 무엇입니까?
부모는 자녀들이 꺾이지 않고 유혹에 빠지지 않고 다 잘 되고 빛나게 되기를 원하고, 회사의 경영주는 사원들이 일을 잘 해서 회사를 빛내는 능력 있는 사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여러분과 제가 마귀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서 망하거나 넘어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은혜 가운데 자라며 성공하고 승리하는 생활을 함으로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아들딸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가 교통 사고로 꺾이고 병으로 죽고 깡패한테 맞고 실패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잘 되기를 바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제가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확실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초라하게 사는 것을, 실패의 잔을 마시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오늘 본문에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항상 겸손한 자세를 지니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만 붙잡아 주시고 은혜를 주시지, 교만한 자는 도와주실 수가 없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만 은혜를 주시고 축복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교만한 자는 버리십니다. 그러면 그를 마귀가 잡아서 쓰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잘 되다가도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그 때부터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세상적으로 보아서, 인간적인 측면으로 보아서 지혜로운 사람이 많지 아니하다.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다.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자를 택하사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를 택하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자, 멸시받는 자, 없는 자를 택하사 있는 자를 폐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에 지혜로운 사람, 문벌 좋은 사람, 세력 있는 사람, 존귀한 사람이 많았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아리마대 요셉 같은 부자도 부르시고 니고데모 같은 국회의원도 부르시고, 또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헬라의 허다한 귀부인들과 귀한 남자들, 귀족들도 부르시고 왕도 부르시고 대통령도 부르셔서 쓰시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미련하고 약한 사람, 천대받는 사람을 부르셔서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겸손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할렐루야!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루어도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제 아들이 오늘 제 책상에 있는 오래 전의 우리 교회 사진을 보고, "아빠, 이게 우리 양곡교회였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럼, 그래도 이건 1987년도 사진이야. 82년도에는 더 형편없었지. 거름터가 앞에 있었고 큰길에서 한참 떨어진 조그마한 교회였어. 이 때는 그래도 손님이 오시면 자꾸 자랑을 했던 때의 교회 사진이야. 비가 오면 우산을 펼 수 있는 공간도 없어서 한 1m 정도 되는 처마를 만들고 그 위에 기왓장을 30장 덮었는데 그것이 마치 청와대같이 보여서 손님이 오면 자랑을 하곤 했지. 그리고 몹시 좋아하며 사진으로 찍어 두었는데, 이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야."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한 20평, 30평 되는 교회에 있다가 비록 무허가 건물이지만 100평 교회를 짓고 지붕에 스레트를 얹었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것을 보니 얼마나 초라한지, 지금의 교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우리 교인이 5만 명 10만 명이 되고, 큰 교회가 되었을 때 혹시나 교만해질까 봐 겸손하게 살려고 책상 유리 깔판 밑에 이 사진을 두었단다."
오늘 본문이 제게 꼭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저를 잘 알지 않습니까?
'세상의 미련한 자를 택하셔서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자를 택하셔서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천한 자, 능하지 않은 자, 없는 자, 그런 자를 택하셔서 있는 자를 꺾는다.'
이 지용수는 미련하지요, 약하지요, 천하지요, 아무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일을 시키시니 교만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 하나님께서 하시는구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에 10만 명이 모여도 우리는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제가 저를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 교만할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럴 때 끝까지 쓰실 줄로 믿습니다.
만약 지혜로운 사람, 권위 있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존귀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큰 일을 하면, '저 사람은 그릇이 훌륭해서 큰 일을 하는구나.'해서 그 사람이 인사 받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뺨을 치십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난 체하고 자기가 인사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을, 그 기대를 아시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 말씀하십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신데 땅에 내려오셔서 겸손하게 죽기까지 복종하시니 하나님께서 좋아하셔서 그를 높이시어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할수록 세워 주시고 겸손할수록 은혜를 주시고 겸손할수록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실 때도 귀족의 아들이 아니라, 밭 가는 농부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왕이 되어도 교만하지 말라고 농부를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뜻을 모르고 왕이 된 다음에 스스로 자기 기념비를 세우며 교만을 부리다가 하나님께 버림받고 마귀에게 끌려가 고생했습니다. 그러다 전장에서 그의 아들과 함께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었고 그의 아버지 이새도 이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며 멸시했습니다. 아버지가 대단했으면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멸시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택하셔서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왕 중에 왕 같은 최고 왕이 되어도 하나님 앞에서 아기처럼 겸손하고 아기처럼 찬송했습니다. 그 다윗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세워 주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조금 잘 된다고, 내 사업이 조금 잘 된다고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꺾으셔서 못 되게 하십니다. 내 아들이 조금 잘 된다고 교만하면 아들을 치셔서 겸손하게 만드십니다. 남보다 조금 나은 것이 하나 있다고 교만하면 난처하게 됩니다.
사무엘상 1장을 보면 브닌나라는 여자가 아기를 못 낳는 한나를 구박합니다. 여자 값도 못하는 여자라고 구박하니 한나가 마음이 격동되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왕 같은 아들 사무엘을 주시고, 3남 2녀를 더 주셨습니다. 사무엘은 자라서 나라의 왕, 제사장, 선지자 역할을 다하는 최고의 아들이 되는데, 브닌나의 아들들은 거기에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브닌나는 일생 한나 앞에서 난처했을 것입니다. 한 집에서 사니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 한나를 볼 때마다 얼굴이 얼마나 발개졌겠습니까?
그래서 한나가 사무엘상 2:3에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라고 말씀했습니다.
겸손하면 계속 존귀하고 평안하지만 교만하면 난처하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교만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성가 대장은 성가 대원보다 더 겸손해야 됩니다. 교회 학교 부장은 교사보다 더 겸손해야 됩니다. 장로님은 집사님보다 더 겸손해야 됩니다. '내가 장로인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뺨을 맞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은 망하게 하십니다. 더 겸손할 때 하나님께서 예뻐하시고 세워 주시고 축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양곡교회가 남달리 이렇게 은혜를 받는 것은 우리 장로님들이 다른 교회 장로님들보다 더 겸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목에 힘을 주는 교회는 은혜가 떠나가게 됩니다. 그런 교회는 불행합니다.
저부터 시작하여 우리 모두 겸손의 챔피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을 알면 교만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 나셔서 우리의 의가 되시고 우리의 지혜가 되시고 우리의 거룩함이 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고, 구속함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지혜롭게 사는 것도 예수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조금 의로운 것도 내 의는 없습니다.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뭐가 거룩합니까? 그런데 우리가 거룩한 성도라 불림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는데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른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니 우리가 이렇게 구속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만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꿈에도 겸손한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련한 가운데서, 약한 가운데서 부르신 것입니다. 혹 존귀한 가운데서 문벌이 아주 좋은 가운데서 부름 받아도 겸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학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래도 혹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까봐 하나님께서 그에게 병을 주었습니다. 눈에는 눈곱이 항상 흐르고 설교하다가 간질병으로 쓰러지기도 하니 바울이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 이것을 좀 제거해 주세요."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너의 손수건만 갖다 두어도 귀신이 떠나가고 너의 앞치마만 갖다 두어도 사람들의 병이 떠나는데 네가 건강하면 교만해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과 저는 겸손의 챔피언으로 끝까지 달려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할 때 마귀가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미련하고 지혜가 없으니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하고, 약하고 힘이 없으니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골리앗과 비슷한 체격으로 골리앗과 비슷한 실력을 가졌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골리앗과 한번 붙어보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왜소한 어린 소년이고 골리앗은 백전의 노장이고 명장이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 하나님!"하며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와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약한 것을 알면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교회에 승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하려면 하나님께서 '잘 해 봐라.' 하시며 해주지 않으십니다.
전에도 한 번 말씀 드렸지만, 제가 처음으로 보스톤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얼마나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보스톤에 있는 그 한인교회에는 대학 교수와 하버드 대학생, 보스톤 대학생, MIT 학생 등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족하고 미련한 내가 그 똑똑한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할고?'하고 덜덜덜 떨며 비행기 안에서도 기도하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강단에 서니 제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영으로 꽉 잡아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이 보였습니다. 말씀을 던지니 사람들이 "아멘. 아멘."하고, 카페트에 내려와서 기도하고, 첫날 밤에 천국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야! 이번 집회는 굉장하구나. 첫시간부터 은혜가 임하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 집회를 인도하러 나갔더니, 첫시간의 80% 정도의 사람들이 출석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설교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사람, 조는 사람 등 지겨워서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많았스니다.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설교를 하는 저도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제 어깨를 꽉 잡아 주시는 것 같은 든든함이 있었는데, 그날은 혼자 덜덜덜 떨며 고생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이제까지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그런 일은 처음이라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왜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야, 네가 오늘 새벽에 도와 달라고 언제 내게 의지했느냐? 기도했느냐?' 너 혼자 잘 하더라. 계속 혼자 잘 해 보아라.'하시며 막 비꼬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찔했습니다. 전날 밤에는 비행기를 타면서도 내리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말씀을 위해서 계속 '주여! 주여!' 했는데, 그 날 새벽에는 전날 잘 되었으니 그 날도 잘 될 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냥 편안히 나왔더니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지하는 자를 좋아하십니다.
여러분, 전도할 때뿐 아니라, 교회 일을 할 때뿐 아니라, 공부할 때도 손들고 "하나님, 제게 지혜를 주세요. 기억력을 주세요. 사고력을 주세요. 창의력을 주세요. 공부하는 것이 꿀맛처럼 좋게 해 주세요."하고 간절히 의지하며 기도하고 공부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구멍가게의 문을 열기 전에도 "하나님, 가게 문을 엽니다. 오늘도 손님들이 우리 집으로 계속 모여와서 물건을 사가게 하시고 사기꾼이 오지 않게 하시고 …."하고 기도하면 때가 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병원을 하시는 분도 "하나님, 환자들이 우리 병원으로 오게 하시고 우리 병원에 오면 다 치료 받게 해 주세요."하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그 병원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총리입니다. 목회자가 아니라 총리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니 80년 가까이 한 번의 실책도 없이 성공했습니다. 할렐루야! 다니엘도 하나님을 의지하니 빛나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의지하니 성공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정 주부의 일이든 아버지의 일이든 남편의 일이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예레미야 17장 7절에서 8절에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주님, 주님.'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했습니다. 그의 부귀가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성공하는 비결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똑똑하고 권세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을 불러서 쓰시면 그 사람이 자기 능력, 자기 지혜로 할까 봐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은 쓰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어도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하는 사람을 쓰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똑똑해도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랑을 해도 예수님 안에서 자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랑거리가 많으면 행복합니다. 어디에 가도 자랑하고 싶은 것이 많으면 행복합니다.
30년 전쯤에는 피아노 있는 집이 드물었는데, 그때 저희 집에 피아노를 있었습니다. 제 딸 경이가 철이 들 무렵부터 손님만 오면 방에 들어가서 피아노를 두드렸습니다. 피아노를 칠 줄도 모르는 아이가 '딩동딩동' 하며 피아노를 두드렸습니다. '우리 집에 피아노가 있다. 봐라.'하는 소리였습니다. 밖에서 놀다가도 누가 오면 괜히 방에 들어가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습니다. '우리 집에는 너희 집에 없는 피아노가 있다.'하는 자랑거리가 그 아이의 작은 행복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집안에도 자랑거리가 많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랑해도 주 안에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자랑해야 합니다. 내 자랑하고 나면, 내 아들 자랑하고 나면 씁쓸하고 마음이 쓰리고 후회스럽습니다. 나중에 부끄럽고 뒷맛이 쓰고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아들을 자랑하고 내 교회를 자랑하고 무슨 자랑을 해도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나님을 높이는 자랑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계속 잘 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바하는 1,100곡의 대곡을 남겼습니다. 보통 음악가는 평생에 한 곡도 창작 못하는 작품을 1,100곡이나 만들었습니다. 바하의 음악을 들으면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그 1,100곡의 악보 위에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가 음악을 작곡하는 목적은 '내가 잘 해서 대 음악가가 되어야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작곡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 바하를 하나님께서 크게 쓰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자는 마귀에게 쓰이지 않고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아 함정에 빠지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께서 끝까지 들어 쓰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 정확하게 잘 아십니다. 우리의 머리카락도 세시고, 우리가 하루에 몇 번 일어났다 앉는지도 다 아시고, 어디에 누웠는지도 아시고, 우리의 걸음걸이도 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거지를 다 아십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일천 명의 귀인들을 초청해 놓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는 금, 은 그릇으로 술을 퍼 마십니다. 그때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손만 나타나서 벽에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씁니다. 그것을 보고 벨사살 왕이 무서워서 사지가 녹는 것같이 벌벌 떱니다. 그 글을 해석하기 위해 다니엘이 불려옵니다. 다니엘이 그것을 해석해 줍니다.
"왕이여, 왕은 하나님의 저울에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교만한 것을 보시고 오늘 밤에 당신을 끝내시려는 것입니다."
그날 밤에 벨사살 왕이 죽고 다리오가 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일, 백성의 일을 다 보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다 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겸손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서 망하지 않고 계속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교만하면 넘어집니다. 교만하면 마귀가 씁니다.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계속 세워 주십니다.
개인, 가정, 우리 교회,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이 모두 겸손해서 주님께 영원히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고전 1:27-28 / 김경호목사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성장은 세계 기독교사에 비슷한 유형을 찾기 힘들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이었습니다. 불과 100여년 사이에 인구 천만이상, 전국민의 1/4이상이 신자가 될 정도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기독교 초기인 1893년에 선교사협의회의 선교정책 10개조를 살펴보면 우선 노동자계급을 상대하여 전도하고 후에 상류계급에로, 남자들보다는 부녀자들에게, 그리고 도시보다는 지방에서부터라는 선교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러기에 오랫동안 유교적 신분제 사회 속에서 평생 사람대접 못받고 가난과 박해에 신음하던 민중이 교회에 몰려들었습니다. 불과 20년 만인 1905년에 그리스도인의 통계가 25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초기 상황에서 놀라운 발전이었습니다. 이들은 일제 강점과 더불어 기독교가 우리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기독교로 몰려와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만주지방 등에는 교회당에 십자가 대신 태극기를 붙여 놓고 예배가 끝나면 온 교우들이 예배당 밖에서 무술을 익히면서 일제의 침략에 대해 나라를 지키려는 꿈을 가꾸었습니다.
이런 것이 일본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고 일본은 선교사들과 합작해서 기독교 신앙을 타계적, 초월적, 비역사적인 신앙으로 변질시키기 위한 치밀한 작업들을 하게됩니다. 그중 하나가 1907년에 전국적으로 일어난 대부흥운동이었고 이것은 오늘의 부흥회의 원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삼일운동 때만 해도 기독교인이 총출동되었는데 이것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완전히 상반된 결과였습니다. 3.1운동 당시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글을 보면 기독교가 반란 선동의 소굴이라고 지정된 감을 주는 것은 선교사로서 선교상 다대한 이해관계가 있다.....우리는 교회 역원 및 교사에게 권세에 복종함을 가르치고 교회는 정치 운동에 간여함을 허락치 않았다.... 고 하고 있습니다. 일제와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교회의 건강한 신앙관과 역사관은 점차 변질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925년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이 세워졌고, 신사가 전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동방요배란 의식이 확정되고, 우리말 금지, 창씨개명등의 모욕적 조치들이 내려졌습니다. 그해에 이런 것들에 반대해 조선공산당도 창건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일제의 행태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때 만약 우리가 깨어 민중 편에서 민족적 위기에 앞장 설 각오를 했더라면 이런 일들이 정지되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위기 의식도 없고 제 구실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통에 이 시기 교인의 수가 1/4로 격감되었고 민족 지도위치에 있는 여운형, 이동휘 같은 인물들이 교회에 실망하여 사회주의 진영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한편 이 무렵 안창호 등을 비롯한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기독교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1935년 숭실전문학교장 맥큔과 숭의여학교장 스눅이 신사 앞에서 절할 것을 거부함으로 추방 되었는데 그때 기독교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방관만 했습니다. 드디어는 1938년 평양에서 27회 장로교총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총대 5인의 한사람 꼴로 비밀경찰이 배석한 가운데, 각본대로 어용 제안자의 동의제청만 있을 뿐, 가를 물을 때 예하는 소리 한마디도 들리지 않고 부는 묻지도 않은 채 신사참배에 참여할 것을 가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회는 무엇했습니까? 주기철 목사등 몇몇 분이 항거하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담임목사가 투옥되고 교회가 폐문되었는데 그 이후 해방되기까지 교회가 제직회 한번 모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교회입니까? 얼마나 비 공동체적이고 얼마나 민중과 유리되어 있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의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비역사성, 비민중성은 더욱 심화되었고 편하게 앉아서 제 복이나 비는 기복신앙과 우상의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내 배를 채우고 내게 복을 준다는 데에야 어느 누구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신사가 되었던, 무슨 산신령이 되었던 십자가가 되었던 내 상관 할 바가 아니다. 복만 주면 되지!
그럼 한국교회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제 몸집 불리기 -그것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대형화된 교회는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교회하면 누구나 그 구성원이 서로 이름을 알고 지낼 정도의 크기를 가지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100대 교회 중에 한국교회가 50개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커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이고 성령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물량주의 환상은 목회자들의 개인적 욕심을 위장한 채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되고 욕심은 욕심을 낳고 점점더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60만의 교인을 가진 ㅅ 교회는 각 지역에 지교회를 두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그리고 일본과 미주지역까지...이것은 교회라고 부르지 않고 지역성전이라고 부릅니다. 각각의 지성전에 담임목회자가 있지만 주일 날 그가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대상 뒤에는 대형화면이 있고 케이블을 통해 직배되는 영상과 우람한 사운드가 회중을 압도합니다. 예배 후에는 각성전의 헌금이 밀봉되어 모교회로 집결되고 연말이 되면 모든 성전의 목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습니다. 이 기도회에서 장원급제 방 붙듯이 각 성전의 목사들이 명에 의해 전격교체 됩니다. 1년에 한번씩 이렇게 임지를 바꾸는 것은 그들이 교구의 교인들과 친해서서 따로 독립할 까봐, 교인이 줄 까봐 그렇습니다.
오늘 대부분의 목사들은 이러한 대교회의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큰 교회 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모두가 이 큰 교회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전도전략이니 전도특공대, 전도작전.... 마치 전쟁터나 람보 영화를 방불하는 이야기들이 목회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내 교회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작전아닌 작전이 진행 중입니다.
작으면 작은 교회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작은 교회는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큰 교회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발빠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점을 살려 간다면, 목회자를 비롯한 교회 구성원들이 개인의 욕심만 배재한다면 훨씬 더 몸 가볍게 할 일이 많습니다. 저는 전도하자는 말이 썩 잘 안나옵니다. 사실 전도 해야되지요. 벼룩이 잡을라고 초가삼간 다 태울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모든 교회들이 자기 교인 만들기에, 제 몸집 불리기, 개교회 이기주의에 이 전도의 방법을 있는 대로 다 써먹었기에 전도라는 말조차 꺼내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디히트리히 본훼퍼는 양은 공간을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고 질은 서로의 결함을 채워준다 고 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 숫자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한없이 제 몸집 불리고 교회당이나 확대해 가려는 욕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이지만, 그것이 썩으면 엄청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한톨도 땅에 심지 않고, 조금도 자기 양보와 희생없이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만 탐한다면 한국기 독교는 함께 죽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하면 생명을 얻을 것이다 는 말씀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한 곳에 머무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초막이나 장막으로 어느 곳이든 아픔이 있고 억압이 있고 긴장이 있는 곳으로 옮겨다니며 그들을 해방하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으려 할 때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너는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집을 네가 지으려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늘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다니며 지냈다. 내가 이스라엘 온 자손과 함께 옮겨다닌 모든 곳에서 ,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명한 이스라엘 그 어느 지파에게도, 나에게 백향목집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을 두고 말한 적이 있느냐? (삼하 7:4-7)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놓고 봉헌식을 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훼께서는 몸소 캄캄한데 계시겠다고 했습니다. 영원히 여기에서 사십시오. 제가 주님을 위해 이 전을 세웠습니다. 이집은 주님께서 영원히 계실 곳입니다. (공동번역, 왕상 8,12)라고합니다. 어쩐지 하나님을 가두고 유배시키는 것 같은 뉴앙스 아닙니까? 집 하나를 지어서 그 안에 하나님을 정착시킴으로 하나님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자기의 소유물처럼 여기게 될 때 하나님은 일을 못하게 방해를 받으십니다. 기성교회는 목사와 장로가 서로 주도권 다툼을 하느라 정신없고 그러면서도 평신도의 참여는 철저히 배재합니다. 개척교회는 개척하고 공을 세운 목사가 은퇴할 때까지 머무르며 자신의 권위를 높여가고 제왕처럼 군림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전세계를 선교하며 다녔지만 제일 오래 머문 곳이 2년 반 정도였습니다. 나머지는 1년, 1년 반정도 였습니다. 교회가 형성되고 시작될 만하면 또 다른 임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 당시 바울이 떠나면 교회가 망할 것 같았지만 어느 교회하나 망한 교회가 없습니다. 지금 유럽을 가면 바울이 세운 교회들이 모두 그 지방의 중심의 선교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의 모든 교회들이 교회사에 큰 그루터기가 되는 결과를 가져 왔습니다. 다소 시련이 있기는 했으나 어느 교회 하나 망해서 없어진 교회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바울의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라는 제목은 본훼퍼의 말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가문 가정형편, 성장과정 모두가 훌륭한 상류사회 최고의 엘리트 였습니다. 2차세계 대전 이후 대학세계는 특수계층의 집단입니다. 거기서 본훼퍼는 누구보다 빨리 박사 20대 초반에 가장 어려운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감옥에 들어가서 수많은 죄수, 범부들과 접하게 됩니다. 거기서 그는 강단(신학)이 얼마나 상아탑의 독백인가 하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학교나 교회에서 선포되는 내용들은 보통사람들의 세계와는 아무 상관없는 논리의 세계 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례받고, 교회에 등록하고, 열심히 헌금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신 부재의 삶이라는 것을 본훼퍼는 발견합니다. 그들의 용어는 가히 감탄이 나올 정도로 경건하고 엄숙하고 예의 바르고, 그 일거수일투족은 거룩이 몸에 밴듯한 격식을 따르지만 그러한 형식을 빼면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살인, 절도, 잡범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그가 전에 상상했던 것처럼 질 적으로 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나름의 성실성, 존엄성, 그리고 남을 위하는 인간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조금 자기 양보나 희생을 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들은 빵 한 조각을 위해 살인을 하기도 하 지만(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사회라면 그것은 사회의 책임입니다) 또한 어떤 일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이라도 아낌없이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당시 힛틀러에 가담해 유태인 학살을 부추기는 거룩한 교회들 보다 훨씬 더 도덕적인 하나님의 사람들-민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본훼퍼는 감옥에서 민중을 발견, 그 민중, 예수님이 좋아서 밤낮으로 함께했던 그 민중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들을 배제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품에 품으신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 뜻에서 그들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에 쌓아놓은 담장을 돌 위에 돌하나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부수는 혁명이며 동시에 교회를 세속의 한가운데 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택하셨으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고전 1:27-28)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교회가 적고 큰 것을 문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을 목표로 삼지도 마십시오. 교회의 건물이 있고 없고를 문제 삼지 마십시오. 그것을 목표로 삼지도 마십시오. 오직 참되게 예수의 길을 가는 교회가 되게 하십시오. 오직 참되게 예수의 얼굴을 닮는 교회가 되게 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가 한마음이 되어 깊은 병에 빠져있는 한국교회를 치유할 수 있는 한알의 밀알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