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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
내 생각과 경험을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는 것이 과연 하늘의 뜻에 합당한 일일까 망설이다가 몇 년의 세월이 또 흘러갔다.
나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악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는 않을까...하는 잡다한 생각들이 순간순간 발목을 잡곤 했다.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수도에만 전념하는 분들 中에는(캐톨릭이나 佛敎 등의) 내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到達한 분들이 있고, 그 분들도 함구하고 있는데, 내 주제에 뭔가 안다고 떠드는 것이 참으로 송구스런 일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주제넘기도 하고...
그래서 더더욱 망설였고 늦어졌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결국 나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者의 몫이기 때문에 부족함을 알면서도 필을 들었다.
사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너무 많고, 깨우치지 못한 것이 태산과도 같다.
인간이 완성되기까지 일만 가지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면, 필자의 것은 하나도 채 못된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필을 들지 않을 수 없는 구실을 준 것은, 시중에서 쉽사리 구할 수 있는 책들 중에 유체이탈(遺體離脫)에 관하여 올바르게 씌어진 것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간혹 언급이 되어 있는 것들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이 대부분이었고, 외국의 서적에서 인용하거나 베껴 쓴 외국인들의 이야기였다.
그러한 것들은 공연한 호기심만 자극할 뿐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들이었다.
바른 길을 찾는 이들에게는 도움도 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필자는 이십 여년 전에 우연히 유체이탈을 경험하였고, 십 여년 전부터는 스스로 이탈을 해왔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조금씩 생(生)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내부에서 발생하는 의문들이 하나씩 껍질을 벗게 되었다.
이 세상에는 필자가 겪었던 의문과 고통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그들을 위한 것이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었다. 그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고, 시행 착오도 많았다.
먼길을 빙빙 돌다가 제자리로 돌아간 적도 많았고, 두려움과 고통, 스스로의 확신이 의심스러워 많은 시간을 낭비하기도 하였다. 필자와 비슷한 경로를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하거나 엉뚱한 길로 빠지는 사람들이 부디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철저하게 필자가 겪은 경험의 산물이다.
과장하거나, 거짓을 사실인 양 포장하지 않았다.
남의 경험이나 이야기를 도용하지도 않았다.
또, 나를 자랑하고자 쓴 것도 아니니 절대 필자를 과대평가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山길을 가다가 우연히 또 하나의 길을 발견한 사람이 그 산을 찾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안내문을 한 장 써놓고 지나갔다고 생각해 주었으면 족하다.
바른 길을 찾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한가지 정말 죄송스러운 것은 필자가 문필가가 아니기 때문에 문장이 거칠고 매끄럽지 못하여 읽는데 불편함이다.
제1장. 유체이탈 이란 무엇인가?
국어 사전에 보면 遺體(유체)란 “부모님이 물려준 몸”이라는 뜻이다.
유체이탈이란 그 몸에서 빠져나가는 행위를 말한다. 즉, 죽은 사람이 아닌 자(산 자)가 임의로 육신을 이탈하는 행위다. 육신을 두고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통상,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르니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방법에 따라서 양신이탈과 음신이탈로 분류한다.
양신이탈이란 무엇인가? 선도(仙道)에서 수행이 최고조에 이르면 자신의 내부에 응집되어 있는 양기를 뽑아내어 사람의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 양신이다.
완성된 양신으로 스스로 옮겨가고 육신은 태워 없앤다.
그것이 양신이탈이다. 다른 말로는“우화등선”이라고도 한다.
神仙으로 화한 것이다.
즉, 양신이탈이 가능하다는 말은 이미 신선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이 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아무나 가능한 일이 아니다. 한 두 번의 삶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이다.
누구누구는 신선이 되었다더라...하는 이야기만 전설처럼 들려올 뿐이다.
그러면 음신이탈이란 무엇인가?
필자와 같은 보통 사람이 육신이란 옷을 벗어놓고 잠깐동안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말한다. 일부 선도인들 중에는 음신이탈을 매우 위험한 행위로 생각하여 금기시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혹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아니었다. 영혼이 이탈했다가 자신의 육체를 찾아가지 못 한다거나 이탈 중에 다른 놈이 자신의 육신을 차지하고 비켜주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이탈을 實行하면서 얻은 결론이다. 음신이탈을 위험한 장난으로 말하는 사람은 실제로 行하여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올바른 마음으로 실행한 사람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필자는 안다. 음신이탈은 인간이 가야할 길을 올바르게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종교에서의 가르침을 바르게 깨닫게 하며 神의 뜻을 바르게 감지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노라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 안에서 더욱 더 확실하고 올바른 믿음을 갖게되고, 기독교나 불교를 표방한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현혹 당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다. 음신이탈도 공(功)이 깊으면 팔백 겁(怯)을 환생하지 않고 천상에 머무를 수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음신이탈이 위험하거나 나쁜 행위는 분명히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환생, 전생 이야기만 나오면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왜? 삶이란 단 한 번뿐이며 그 삶을 끝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분류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고 배워 왔다.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틀에서 벗어나면 이단으로 취급받는 풍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마음을 열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아도 윤회한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성직자들도 더러 있다.
현재의 기독교에서는 왜 윤회를 부정할까?
그것을 알고 싶으면 敎會의 역사부터 먼저 알아야 한다.
간단한 역사적인 사실 몇 가지만 알아도 그러한 의문은 쉽게 해결된다.
중요한 것은 윤회의 법칙을 배제하면 성서(신약부분 )조차 해석이 올바르게 되지 않거나 왜곡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올바른 마음으로 유체 이탈을 실행한다면 필자가 헛소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당신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그것은 당신의 깨달음이다.
앞으로 필자의 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을 믿어 주기만 해도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히 천국에 머무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쉬운 일인가?
천국에 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헛수고다. 사상누각(砂上樓閣)에 불과한 것이다.
제2장 유체이탈의 목적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육신이 있고 그 육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마음, 즉 精神(정신)이다. 정신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정신은 영혼으로부터 출발하여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조금씩 가다듬어 나간다. 정신이 바로 영혼이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어떤 사람의 정신 상태를 보면 영혼의 상태도 짐작할 수 있지만, 필설로 영혼을 표현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탈을 실행하면서 알게 되겠지만 보통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포함된 것이다. 지식, 학식, 교양, 재산, 지위, 경력, 경험, 외모 등이 포함된 것이다. 사람에 따라 기준의 차이가 있고, 타인을 평가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하게 된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가면서 얻은 것들을 모두 잃게 된다.
지식이나 학식 등과 같이 기억 속에 있던 것조차 모두 사라진다. 이탈을 하면 어떤 상태인가? 죽은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다시 말하면 이탈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 죽은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얻은 것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 새겨진 지식이나 학식 따위들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은 후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자 노력한 흔적만 남는다. 흔히들 공(功)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조차 헛것이 많다.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 어떤 직위에 있었느냐를 중요시 하지만 저쪽 세상에서는 어떻게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똑같은 일도 공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어떤 부자(富者)가 살아있을 때에나 죽은 후에 칭송을 받기 위해서 수 십, 수 백 억의 재산을 헌납하여 교회나 사찰을 짓는 행위가 가난한 어떤 사람이 자신보다 더 불쌍한 사람의 배고픔이 가여워서 밥 한 그릇 양보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없을 수도 있다. 이쪽에서는 神과 거래를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막상 저쪽에 가보면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
흔히들 교회에서의 봉사활동이나 불도들의 방생하는 행위도 생각과는 다르다. 그러면 재산을 나누어주고 봉사하는 행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런 얘기가 아니다. 그런 행위에 자의든 타의든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물이 많이 쌓였으니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고, 수 십, 수 백 억을 떼내어 주어도 내가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으니 다행이고, 그런 행위가 가능한 형편이기 때문에 할 뿐이지 남에게 칭송 받기 위해서, 神 앞에서 당당하기 위하여 하는 짓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에게 가르쳐야 한다.
현실적으로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르치면 점차로 가능해 진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왼손이 하는 일을 바른 손이 알지 못하게 하라”했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모두 헛일이 되거나, 오히려 사이비들에게 현혹되어 재산을 헛되이 버리고 영혼까지 타락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왼손”은 누구요 “바른손”은 누구인가? 왼손은 자신이요 바른손은 타인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왼손과 바른손이 모두 한 몸에 붙어있듯이 왼손도 자신이요 바른손도 자신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할 수 있는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다. 헛소리하실 분이 아닌데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그만한 이유도 있고, 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낌이 잡힐 것이다. 혹시 뭔지 모르는 사람은 알아내려고 노력해야한다. 왜? 노력하는 동안 다른 것도 저절로 풀리는 덤을 얻을 테니까. 그분은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다.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하였을까? 다른 말로 바꾸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라고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왜? 아무나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철저하게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우리 주위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모두들 부러워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을까? 넓고 호화로운 집, 소리 없이 굴러가는 -서민들의 집보다 몇 배나 비싼 자동차, 골프 회원권, 조용한 호숫가의 별장...이런 것들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탈법, 불법을 하지 않고도 과연 가능할까? 권모술수없이, 남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가로채지 않고도 큰 기업을 이룰 수 있을까?
자신들은 결백한 척 떠들어대는 사람들- 그들 대부분이 사후에는 비슷한 대접을 받거나 오히려 그 이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렇게 뻔뻔스러울 수가 없을 텐데...자의든, 타의든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일이다. 그것은 자신밖에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후(死後)에 그대로 드러난다.
이 세상에서는 적당히 감출 수도 있고 거짓으로 참회 할 수도 있지만, 사후에는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일이다. 재물욕이나 권력욕 모두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재물욕이 없는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는가?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 권좌에 오를 수 있는가? 그렇게되기 위해서는 온갖 치사하고 더러운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그만한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허전해진다. 그래서 사회 사업에도 적당히 참여하고, 절에 나가 불공도 드리고 큰돈을 헌납하여 절도 짓고 불상도 세운다. 어떤 이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그런 일을 한다. 교회에서는 대환영이다. 칭송도 대단하다. 어떤 작자들은 그런 행위가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고 꼬드겨 더 많이 우려내려 하고, 甘言利說(감언이설)에 속은 자는 마치 천국행 티켓이라도 예약된 것처럼 거들먹거린다.
부자들은 가진 게 돈밖에 없으니 돈으로 천국을 사려 할 수밖에 없고, 일부 宗敎人들은 그 점을 잘 이용한다. 그들이 天國에 갈 수 있다고? 그것이 가능하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부할 사람이 엄청나게 생겨날 것이다. 나중에 돈으로 때우면 되니까. 그래서 “예수”께서 이미 이 천년 전에 경고한 것이다.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그렇다면 부자, 권력자와 적당히 야합하거나 그들을 이용한 종교인들은 어떻게 될까? 여러분의 상상과 판단에 맡긴다. 필자는 확실히 알고 있다.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있게 여러 사람에게 말할 수 있고, 또 이렇게 하는 것이 내 소임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필자의 말을 쉽게 믿을 것이요, 어떤 이는 반신반의하겠고 어떤 이는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러나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필자의 말을 믿어 달라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니까.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괜찮다 싶은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휴거 된다는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시킨 장본인들은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말을 무작정 믿고 따르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댓가를 톡톡히 치렀다. 앞으로도 댓가를 치루어야 하고 잘못하면 죽어서까지도 그 댓가를 치루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 여러분 중에서 필자의 말에 공감하는 분들은 반드시 필자를 의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본인 스스로 확인하고자 할테니까.
확인 하고자 하는 과정이 유체이탈이다.
그리고 올바른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필자의 주장에 동조하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씩 바로 자신에게 증명하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다. 그러는 과정 중에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는 것과 깨달음의 차이는 말할 필요도 없다. 안다는 것은 지식의 수준이요 거품과 같은 것이다.
깨달음은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 자신의 영혼에 각인되는 것이다. 지식에는 스승이 있지만 깨달음에는 스승이 없다. 깨달음의 스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따라서 필자의 말에 공감하고, 그 말을 믿고 실천에 옮겨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 있을 때, 그 공은 모두 자신의 것인 것이다. 필자에게 공을 돌리거나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모두 자신이 스스로 행한 일이다. 神에게 고마움을 표시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아첨에 불과하다. 잘되었든 못되었든 모든 것이 내 탓이다. 사이비 종교인에게 현혹되어 자신을 망친 사람이나 사교에 포섭되어 영혼을 더럽힌 사람도, 모두 자기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다. 물론 타인들을 감언이설로 끌어들인 자들도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반드시 치루게 된다. 저승과 이승의 법칙이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조금 다른 점은 이쪽에서는 속임수가 일시적으로 통하나 저쪽에선 불가능하다.
이쪽에서는 법률을 통해서 양심의 법을 피해 나가기도 하고 합법적으로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저쪽에선 그런 짓이 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자면, 전두환씨는 구국의 결단으로 광주사태를 진압했었다고 하며,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도 그 당위성을 주장하겠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책임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들은 양심의 법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 밑에서 그들이 시킨 이상으로 과잉 진압하여 공(?)을 세운 장교, 사병들은 책임이 없는가?
이쪽에서는 그들을 용서한다. 그러나 저쪽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들의 죄를 씻을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을 알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해당자들은) 그 방법을 알아내면 이미 반 이상 갚은 것이나 다름없다. 어릴 때 읽은 책에서 어떤 부분이 생각난다. 전쟁 도중 어느 병사가 적국의 한 병사를 사살했다. 소지품을 뒤져보니 그는 외아들이었고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랑하는 노모가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병사는 자신이 사살했던 병사의 어머니를 찾아간다. 그는 전쟁터에서 있었던 사실을 털어놓고 자신이 죽인 병사를 대신한다는 그런 이야기이다.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을 보면 당시에 어린 필자도 제법 감동을 받았나보다. 양심의 법을 따르면 이승에서의 죄-그 무거운 짐을 벗어 날 수 있다.
그러한 것을 알면서도 외면한다면 그 화가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까지 미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삶이 단 한 번뿐이라면, 그 한번의 삶을 끝으로 무(無)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生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필자는 일백 네 번째의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기에 아직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려고 한다. 다음 생에서도 지금의 정신 상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내가 죽어 볼 수 없어도 나의 후손들이 살아갈 것은 자명한 일이다.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 前生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
어떤 모양,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존재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그것을 바로 나 자신이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神이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다. 우주의 법칙아래 내가 결정하고, 내가 만들고, 내가 맺고, 내가 푼다. 그래서 神은 참으로 공평한 분이시다. 아첨한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지도 않으며 당신을 부정했던 사람들에게도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 자신을 무지의 수렁으로 몰고 간 책임을 스스로 질 뿐이다.
어제는 텔레비전에서 학원 폭력에 관한 프로그램 방영이 있었다. 중학생, 고등학교 학생들 중 상당수가 폭력써클에 가담하고 있었다. 매스컴에서 針小棒大(침소봉대) 했는지 모르지만 필자가 지나온 시절보다 훨씬 더 심하고 행태도 고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불과 몇 년 후 모두들 후회하게 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일, 남의 돈을 빼앗아 유흥장에서 낭비한 일, 용기를 자랑하느라고 자신의 몸에 칼자국을 만들고 담배로 지진 것들, 그 모든 행위가 뼈아프게 후회할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자신을 더럽힌 것, 자신의 몸에 흉터를 남긴 대가를 스스로 치러야만 한다. 우리들의 인생도 그와 똑 같은 법칙을 벗어날 수가 없다. 성인이 되어 처자식을 거느리게 되면 자신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대가를 가족에게까지 물려준다. 우리 주변에서 부모의 잘못으로 자식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영혼의 타락-양심의 법을 저버리는 일은 자손에게까지 영향을 준다. 권력욕 때문에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과, 그들에게 이용당한 사람들 모두 자신의 무게만큼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예외는 없다. 어린아이들의 조그마한 폭력집단이나 구국(?)의 결단으로 폭력을 행사한 그들이나 똑같은 법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남의 과오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 惡用한 사람도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 하늘의 法이요, 우주의 法則이요, 양심의 法이다.
이 법칙을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깊이 깨닫고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유체이탈의 목적이다. 하늘의 법은 국가도, 종교도, 종파도 뛰어넘는다. 이승과 저승, 지구를 포함한 모든 별들이 하늘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들도 아집을 버려야한다. 특히, 종교인들이 대오 각성해야만 한다. 왜? 하늘의 뜻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르게 전할 수 없고, 자신들만이 선택된 사람들이란 에고이즘이 자신뿐만 아니라 순진한 많은 사람들을 엉뚱한 길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폭풍전야 같던 80년도初.
서울의 한 복판에 있는 어느 고급호텔에서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고, 성실한(?) 방송매체 덕분에 이름 없는 필자까지도 알게 되었다. 이름하여 “전두환 장군과 구국을 위한 조찬 기도회”.
종교인들이 알아서 했는지, 깡패들이 겁을 주어 시켰는지 알 수가 없지만 여러 번 그런 일들이 보도되었던 일이 있다. 화려한 호텔에서 밥상 받아놓고 기도하던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처자식이 보고 있는데, 자신이 속한 교회의 신도들이 모두들 보고 있는데, 그들은 용감하게 그런 짓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하느님을 싸잡아 욕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의 비싼 기도가 통했는지, 그들의 하나님은 고급 호텔을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이 빌어준 전두환 장군은 광주사태를 구국의 결단으로 진압하고 최고의 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이 하늘의 법칙을 알았더라면 그와 같은 어리석은 짓을 결단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주의 법칙이 얼마나 준엄한지 모르는 엉터리 목자들의 가르침을 받는 이들은 불쌍하다. 神의 섭리가 얼마나 공평한지 모르는 자들이 神의 뜻을 가르친단다. 소가 웃을 일이다. 선민 의식에 사로잡힌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 천년동안 싸우고 죽인다. 그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도 그렇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은 형제인데도 말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원주민을 학살하고 미개한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 하늘의 뜻일까?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들을 노예로 삼아 짐승처럼 부리던 자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던가? 노예 해방을 반대하여 전쟁하던 이들도 기독교도적인 사상이 밑바탕에 있었다.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박정희, 전두환씨와 그를 맹종하던 인물들...
그들 대부분이 불교나 기독교인들이었다고 알고 있다. 불교가 타락했나 기도교가 타락한 것인가? 아니다. 자신들의 영혼이 타락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이 종교적인 양심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력욕, 재물욕이 양심의 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법- 즉 하늘의 법칙을 외면한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의 그 과오가 두고두고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들도 그 길을 택하지 않았으리라.
이미 죽은 자들은 살았을 때의 고통은 별 게 아니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을 것이다. 아직 살아남은 자들도 곧 알게된다. 머지않아 모두 죽을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의 후회는 너무 늦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를 스스로 찾아내어 치러야 한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전시적인 종교행사나 치르지 말고, 처절하리 만큼 자기반성을 해야한다. 그러노라면 길이 보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은 진심의 반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네가 뭔데 주제넘은 소릴 하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죽은 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고 그들이 어떤 경로를 가게 되는지 보고 듣고 했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하는 소리다. 필자의 말을 믿든 말든 당신의 자유다. 필자는 내 말을 믿어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필자의 경험을 토대로 당신이 직접 알아보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싫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우리들 인간은 모두 죽는다. 육신이 수명을 다 하거나, 병으로 죽거나,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영혼은 육신과 분리된다. 영혼이 머무를 집이 사라진 것이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머물러온 자기의 육신-- 바로 그것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음이란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다. 우리가 죽은 자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얘기를 나눌 수도 없는 것처럼 죽은 자들도 산 자를 볼 수 없다.
이탈은 육신으로부터 탈출이기 때문에, 이탈 후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요 건물과 물건들도 죽은 자들의 세계에 속한 것들이다. 이탈을 하여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들을 보거나,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유체이탈에 관하여 조금씩 언급이 되어있는 책들이 엉터리였고 영화나 소설 속의 얘기를 사실인 것처럼 책임 없이 써먹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필자가 제시하는 방법으로 이탈을 시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마음만 바르게 갖는다면 틀림없이 모두 성공할 것이다. 여러 사람이 증명해 보일 터인데 어떻게 필자가 허튼 소리를 하겠는가? 단언하건대, 이탈이 되는 순간부터 당신은 죽은 자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절대 이 세상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거나 남들을 훔쳐보거나 간섭할 수도 없다. 이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유체이탈이 아닌 어떤 사술(邪術)로는 가능한지 모르지만 유체이탈로써는 불가능한 일이다.
만일, 유체이탈을 하여 세계 각국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보고들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착각이나 환각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속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단 말인가? 그렇다. 그러면 유체이탈이 왜 필요한 것일까? 이탈이 가능하다고 해서 초능력자 행세를 할 수 없다.
이탈의 과정을 타인에게 보여줄 방법도 없다. 염력으로 애꿎은 숟가락을 구부리고 절단할 수 있거나 염사(念寫;염력으로 사진 찍는 것)정도는 할 수 있어야 방송에 출연해서 돈도 벌고, 유명해져 초능력자 행세를 할 수 있을 텐데 유체이탈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른바 초능력이란 것은 눈곱만큼도 얻을 수 없다. 잡신 붙은 사람들 같이 용한 점쟁이 노릇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뿐이다.
한가지 더 할 수 있다면, 죽어서 제 갈길 몰라 헤매고 있는 떠돌이 영혼을 도와주는 일이다. 그 중에는 자신의 가족 일원이었던 이도 있을 수 있고 생면부지의 사람도 있다. 죽어서 제 갈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람을 아무리 많이 구제해 주어도 생색이 나지 않는다. 新聞에도 나지 않고, 상도 받을 수 없고, 존경받는 인물이 될 수도 없다. 모두들 산 자에게만 관심이 있다. 단, 한 사람만 구해도 영웅이 된다. 구제된 사람도 영웅이 된다.
삼풍백화점 붕괴시 모두들 보지 않았는가? 안타깝게 죽어간 사람들은 외면 당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은 재물도 생기고 위로도 받고 상도 받는다. 매스컴이나 정치인들은 속성상 그럴 수도 있다고 보아주지만 종교인들까지 한자리 끼려고 하는 것을 보면 역겹다. 유명해진 어떤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작업의 여파로 소리 없이 죽어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불쌍한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죽은 자는 불쌍하다.
가족들조차 도와줄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까지도 산 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밖에 없다. 왜? 죽은 자에겐 대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백만 명을 여의도에 모아놓고 멋진 설교로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도 방법을 모르면 죽어서 갈길 몰라 헤매는 단 한 사람을 구해줄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 수 천, 수 만 명도 구할 수 있다. 그 따위 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 않는다고 죄가 되는 것도 아니요, 벌받을 일이 아니니까. 한다고 해서 神(신)으로부터 償(상) 받을 일도 아니다. 그저 길을 가다 만난 사람이 길을 물었을 때 아무 조건 없이 가리켜 주는 것처럼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行(행)하면 되는 것이다. 왜? 옳은 일이니까. 필자는 그런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갈길 몰라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억울한 죽음을 많이 기억하고 있다. 6.25 전쟁을 전후해서 벌어진 이데올로기의 싸움에서 숱한 양민이 억울하게 죽었고, 몰지각한 일부 군인들의 권력욕 때문에 광주에서도 억울한 죽음이 많았다. 관계자들의 관리 소흘, 정비 불량 때문에 교통사고, 건물의 붕괴사고, 가스폭발 등 졸지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다.
그들의 대부분은 한참동안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도 限으로 뭉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가야할 길을 가기를 거부한다. 그런 사람들도 조금만 도와주면 바른 길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바른 마음으로 이탈을 하면 많은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3년 전쯤에 어떤 여인이 필자를 찾아왔다.
하얀 소복에 젊고 예쁜 여인이었다. 무턱대고 도와 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400여년 전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단다. 죽은 자의 길을 가르쳐주고 가라 했더니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가 없단다. 왜냐고 물었다. 자신은 어느 양반집 처녀였는데 이웃에 있는 어느 흉악한 형제들에게 끌려가 윤간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결을 하였고 피맺힌 한을 품게 되었다. 그녀는 죽은 후 그들 형제에게 복수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들 4형제의 후손들이 태어나는 족족 병신이 되게 하거나 비명 횡사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아비들이 죽은 후 그녀가 복수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 때문에 4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따라다니며 괴롭히고 있다고 하소연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죽은 자의 길을 가라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녀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자신은 죽어서 산 사람에게 해꼬지를 했으니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가 없단다. 내가 직접 데리고 가겠다고 했더니 그래도 안 될 거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때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깜짝 놀라 그놈들이 쫓아 왔다고 하면서 내 곁을 떠나갔다. 그러자 곧이어 험악하게 생긴 장년의 남자 네 명이 들이 닥쳤다.
사방을 둘러보곤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나는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가 불쌍하기는 했지만 나로선 방도가 없었고, 죽은 사람이 산사람을 해코지 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녀는 그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도 생겨났다. 그 의문은 얼마 후에 풀렸지만 어쨌든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다. 그래서 높은 곳으로 찾아 올라갔다.
자초지종을 얘기했더니 당신이 해결해 주겠다 하시면서 이제 되었으니 걱정 말고 돌아가라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일은 결말이 났고 그녀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어찌되었는지 확인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으나 확인할 방법도 없다. 저승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생전에 살았던 곳과 이름까지 알고 있어야 가능한데 나는 그녀의 이름도 살았던 곳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 같은 프로에나 나올만한 이 이야기는 결코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에게 얘기했더니 “아빠, 혹시 지어낸 이야기 아니에요?”했다. 혹자들의 비웃음을 살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 얘기를 하는 이유를 독자들께서는 잘 아실 것이다. 당신들도 유사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필자의 경우를 참고하라고 썼지만, 일부러 그런 일을 찾아다니거나 원하지도 말기를 바란다. 그러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러한 일들이 많이 있기를 원한다면 당신이 해결하기 힘들 정도로 몰려들 가능성도 있다. 당신이 그것을 감당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잘못하면 당신의 현실 생활에 지장이 있을 수도 있다.
필자는 이 일로 인해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들 산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벌할 수 없듯이 죽은 자도 산 자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러나 예외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限)이다. 한으로 맺힌 자는 그 한을 풀려고 한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恨)에만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염(念力)은 엄청나게 강하다. 강한 염은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다. 우리는 주변에서 그러한 사례를 많이 접할 수 있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꾸민 얘기들도 있지만 전혀 사실 무근인 경우는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서도 이런 짓을 한다. 그 때문에 흉측한 사건들로 세상이 시끄럽기도 하고 감옥은 언제나 만원이다. 우리가 이승에서 올바르게 살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에게 못된 짓을 해서 한이 맺히게 해서는 안 된다. 살아서 갚지 못하면 죽어서까지라도 갚아야하고 자신이 못 갚으면 후손에게까지 물려 주어야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서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많다. 권력 때문에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者, 재물을 위해서 남들을 울린 者, 남의 아내를 탐내어 남의 가정을 파탄시킨 者, 모두 자신이 저지른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불교에서 사람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 그저 해본 말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법칙(法則)이다. 우주의 법칙이고 양심의 법이다. 이것을 외면한 자들- 우선은 권좌에도 앉아보고 재물도 뿌리지만 그것은 잠시 뿐이다. 역대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의 말로를 보면 필자의 얘기가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옛말에 삼대 부자가 없고 삼대 가난뱅이도 없다고 했다. 없는 사람을 위로하려고 그냥 해본 말이 아닌 것이다.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나 지존파나 막가파의 젊은이들도 모두 이 법칙을 외면한 대가를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탈 후 당신은 여러 가지의 형태로 전혀 다른 모습의 인간을 만날 수가 있다. 모두 죽은 사람이지만... 많은 사람을 구제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에서 그러한 일들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잘못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한 행위를 빙자하여 돈을 받는다거나, 기존의 종교 단체 안에서 새로운 파벌을 만들거나 이상한 언행을 하는 자들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올바른 마음으로 행하지 않을 경우에 그런 방향으로 타락할 가능성도 있으니 이 글을 읽는 이들은 그런 사람에게 속지말기 바란다. 당신이 이탈 후에 만나는 사람은 모두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처음 이탈했을 때에는 착각을 하기 쉽기 때문이다. 필자도 제법 오랫동안 착각을 하곤 했다. 얼마 전 동네친구를 만났었는데 나이도 엇비슷해서 평소에 말을 터놓고 지내던 사이였다. 몇달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다른 사람을 통해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아내가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는데, 결국 이혼하고 얼마 후 새 장가를 들었다. 그의 전처가 아니더라도 종교엔 관심이 없었는데 전처 덕분에 종교라면 무조건 싫어했다.
이탈 후에 우연히 만난 것이다. 다른 남자 한 명과 같이 어떤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아가고 있었는데 필자가 불러 세우자 다른 사람들은 가고 이 친구만 마지못해 섰다. “야! 이 사람 ○○ 아니야? 참으로 오랜만일세. 그건 그렇고 정말 미안하게 되었네.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사개월이나 지난 후에 들었다네. 그래서 장례에도 참석을 하지 못했으니 너무 섭섭히 생각하지 말게. 그런데 자네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여보게 여기는 이승이 아니야.
자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단 말이야. 사람이 죽으면 제 갈 길로 가야지 왜 헤매고 다니는가? 길을 몰라서 그러면 내가 데려다 주겠네.“ 필자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난 그냥 여기서 살 거야” 그는 가던 길을 가려고 했다. 여자들을 따라 가고 싶은 것이다. “잠깐만 내 말을 더 듣고 가게. 지금은 아니겠지만 조금만 더 있으면 이곳이 싫어질 거야. 그때에는 내 말대로 하게나.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여기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네. 그러면 가까운 산으로 올라가 보게. 산 중턱쯤 올라가면 작은 집이 한 채 있을 거야. 죽은 사람을 거두어 주는 곳이지.
그곳까지 가면 자네의 일은 다한 것이지. 다음의 일은 그 집에서 일하는 이들이 다 알아서 해 줄 거야. 찾기 힘들면 사람에게 물어 보게나. 가르쳐 주는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일세. 그리고 한가지 더 알아 둘 일은 죽은 사람을 받아주는 집은 모두 예수의 관할 아래 있네. 자네는 살았을 때 예수쟁이를 싫어했지만, 그것은 예수쟁이들이 잘못하는 것이 많아서 그랬고 자네 잘못은 아니니 아무 염려 말고 찾아가게나. 살아서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거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욕했다거나 해서 불이익을 주지는 않는다네. 그분은 어느 누구든지 당신을 찾아오기를 바라고, 또 아무리 나쁜 죄를 지은 사람도 흔쾌히 용서하여 받아주지.
자네도 그분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네. 그분을 만나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게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 잊지 말게.“ 필자가 다짐을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사라졌다. 여러분들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친구도 만날 수 있고, 먼저간 가족을 만날 수도 있다. 여러분들도 그들을 설득하기 바란다. 이탈을 한 후에 집안을 훓터보면 낯선 사람도 들어와 있다.
처음에는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나를 더 무서워한다. 무작정 내쫒지말고 잘 설득해서 그들이 죽은 자의 길을 가도록 설득해 주기 바란다. 지금도 필자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처음 시작했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용감해졌다.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점점 강인해 졌고 강해지는 방법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점점 강인해져 시시한 귀신 따위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탈 후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라는 것을 앞서도 설명을 했다. 그들 중에는 아주 악질적인 종류도 있다. 산 사람들 중에도 그런 부류가 있지만...
90년도에 필자는 동대문 종합 시장에 있었던 적이 있다. 어느 날 민방위 훈련을 한다고 했고 공습경보를 하고 있는 동안 이탈을 해보기로 작정을 하고 경보 10분전에 준비에 들어갔다.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소등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탈을 시작했다. 이런 곳(시장)에는 어떤 종류의 망자들이 있나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이탈된 후 가게에서 나가지 않고 통로를 내다보니 열 여섯이나 일 곱살쯤 된 여자가 걸어서 내 앞을 지나갔다. 막 지나는 순간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너는 누군데 죽어서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이런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고 있니?“ 필자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댔다. “아저씨는 누군데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야?”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대드는 것이 여간 악종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은 설득해도 안되고, 또 설득이 되지도 않는다.
말을 더 붙였다가는 필자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지경이었다. “알았다. 간섭하지 않을 테니 네 갈 길로 그냥 가거라.” 필자가 그렇게 말을 하니 그녀는 사나운 눈을 흘기며 멀어져 갔다. 좀 넓은 통로에 나서니 산 자들만큼이나 죽은 자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말을 해보려는 순간 불이 켜지고 사이렌이 울려 이탈은 중지되었다. 그날밤 집에서 이탈을 한 후에 시장으로 다시 갔다. 큰 통로에 가보니 제법 많이들 몰려 있었다.
거기서 일장 연설을 하니 많이들 필자를 따라 나섰다. 스물댓명 정도 되었는데, 원해서 가는 이도 있고 남들이 가니 덩달아 따라 나선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남아 있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필자를 따라 나섰던 이들은 지금쯤 많이 좋아졌을 것이다. 어떤 이는 죄값을 다 치르고 이미 환생하였는지도 모른다.
87년 5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께서 먼저 떠난 후 이십 년을 외롭게 살다가 떠났다. 세상 떠난 어머니를 나쁘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으리요만, 나의 어머니는 참으로 마음씨 착한 여인이었다. 어머니 시신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머니, 못난 자식들 모두 용서하시고 마음 편히 가시오. 아들 여섯, 딸 하나 어느 누구 하나라도 당신을 아프게 하지 않은 이 없고 지금도 당신께 걱정을 드리고 있지만, 모두 잊고 떠나시오. 어머니는 세상에서 할 일을 다 했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아름답게 살다가 부디 윤회에서 벗어나 천국에 드십시오. 잘 가요, 어머니. “그렇게 떠나보낸 어머니가 몇 달이 지난 후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삼일동안 이탈을 해 보았지만 만날 길이 없었다.
나흘째 되던 날 열 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복스럽게 예쁜 처녀가 찾아왔다.
“너는 누구냐?”
“당신이 어머니를 애타게 찾기에 인도하려고 왔습니다.”
“그러면 너는 천사인가?”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요”
“내가 보기에는 사람 같은데?”
“그래요.”
“죽은지 얼마나 되었나?”
“3년 되었어요.”
“어쩌다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는가?”
“고등학교 3학년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안됐구나, 인생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사고로 죽다니...그래서 이런 일을 하는구나. 이런 일은 누가 시키는가?“
“위에서 시키는 일이지요.”
“그래...내 어머니가 계신 곳은 어디냐? 나를 그곳까지 인도해다오.“
“어머니는 지금 파림촌에 머물고 계세요.”
“파림촌? 어서 가자. ”
어둡고 음산한 산야를 지나 어느 곳에 당도하니 네거리가 나오고 그곳은 따스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여기가 파림촌이라는 곳인가?”
한쪽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한참 들어가면 파림촌이예요. 그곳에 가시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여기서 더이상 갈 수 없게 되어 있답니다.“
“왜 너는 갈 수가 없지?”
“그건 말씀 드릴 수 없고 저는 이제 그만 갑니다.”
“잠깐, 너를 다시 불러야 할 때는 어떻게 하면 되는가?”
“글쎄요, 이런 일은 없었기 때문에 모르겠어요.”
“살았을 때 너의 성이 무엇이었나?”
“진(陳)이었어요.”
“그러면 진양이라고 부르면 되겠군. 이제 그만 가 보게.”
그녀는 떠나고 필자는 그녀가 가르켜준 방향으로 갔다. 거의 다다랐을 무렵 이탈의 시간이 끝나고 육신으로 저절로 복귀하고 말았다. 재차 이탈을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이탈을 하려면 상단전에 氣가 충만해 있어야 하는데, 다 소비하고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한 두 시간의 이탈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삼십 분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다. 그녀와의 대화에 너무 많이 시간을 허비해 버린 결과였다. 다음날 단단히 준비를 하고 이탈을 했다. 지붕 위에 올라가서 “진양”을 외쳐댔다. 그러나 기다리던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검은 양복의 사나이 두 명이 나타났다.
“당신들은 누구인가?”
“당신을 어머니께 데려다 주려고 왔습니다.”
“진양은 왜 오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다른 일이 있어서 그리로 갔습니다. 자! 우리들을 따라 오십시오.“
그들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멈추었다.
“우리들은 여기서 기다릴 테니 가서 어머니를 만나고 오십시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작은 돌다리가 나왔고 그 끝에 한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데 분명 어머니였다. 어머니를 외치며 달려가 부둥켜안았다.
엉엉 울다보니 반응이 없었다. 놀라서 얼굴을 쳐다보니 분명히 어머니이긴 한데 모습이 변해져 있었다. 집에 있던 낡은 처녀 시절의 사진, 바로 그 모습이었다.
칠십 세의 노인이 죽었는데 처녀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니...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시집도 가지 않은 열 일곱 처녀를 마흔이 다된 중년의 사내가 끌어안았으니 그럴 수밖에...
놀란 마음으로 인도자들에게로 돌아갔다.
“어찌된 일입니까? 노인이 처녀로 변하다니요.”
“사람이 죽으면 시간이 감에 따라 연령이 퇴행합니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다시 환생하게 되지요.“
“아버지는 작고한지 이십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모습이 돌아가실 때와 거의 변함이 없는데, 어째서 어머니는 돌아 가신지 삼개월밖에 되지 않았는데 처녀처럼 변했습니까?“
“그것은 살았을 때에 공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환생할 기회를 빨리 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살았을 때에 인자하고 존경 받을만한 인품을 지녔었는데도 별로 변함이 없고, 어머니는 착하기만 했지 별다른 공을 쌓은 것이 없는데요...“
“여자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보다 공이 크답니다. 아이를 낳고 열심히 잘 키우고 자식과 남편을 위해서 많은 것을 희생하고 참아냅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공(功)이 되지요.“
“곧 다시 태어난다니 어디서 어떻게 태어납니까?”
“그것은 알아서 무엇하려고 합니까? 당신을 알아보지도 못할텐데...“
“지금 우리들의 대화,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것이 환상이나 착각이 아닌 사실이란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까?”
“제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려 드리지요. 그녀는 미국 땅에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0000부인입니다.”
“부인이라니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누구의 부인이 된다는 것까지 정해져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그녀를 볼 수 있을까요?”
“볼 수 있습니다.”
“언제쯤 소식을 알 수 있을까요?”
“당신이 육십 오세되면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됩니다.”
위의 이야기를 읽고
“이 사람 정신병자로군”하는 사람도 있고 “이 친구 소설 쓰고 있네” 하는 반응을 보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필자의 경험 중 하나다.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것이다. 필자의 얘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비웃음으로 회피하거나...
필자는 어머니를 만나보고 나서 숙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부부, 부모, 자식...이 관계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정해졌다는 것이다. 특히 부부로 맺어지는 관계는 서로의 선택에 의해서 맺어지는 것 같지만, 외견상 그럴 뿐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 지방에서 저 지방으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숙명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제짝을 찾기 위한 행로라고 할 수가 있다. 돌이켜 곰곰이 생각해보면 필자의 말에 공감할 것이다.
그러면 이미 부부로 맺어진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왜 부부로 맺어졌을까? 그것은 업을 해소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자명해진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이해하고 용서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한다. 저절로 그냥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많이 노력해야만 한다.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면 파탄이 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한으로 남게 마련이다. 한은 또 다시 업으로 남는다.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이 그 안에서 다시 잘못을 저질러 형량이 늘어나는 것과 닮은꼴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
그것은 오로지 당신 자신에게 달려있다. 세상의 부부들이여! 이 점을 잊지 마시라.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 이탈을 한 후에 맞게 되는 죽은 자의 세계, 즉 구천을 벗어난 곳은 자신의 염이 상당히 강해야만 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인물을 만나거나 어떤 특정한 장소에 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가치 기준으로 인간들의 사후상태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승에서 그럴 듯해 보이던 사람도 사후에는 우리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학식과 신망이 두터워 존경받던 인물이나, 신앙심이 대단해 보이거나,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던 종교 지도자였거나, 그러했던 인물들이 의외로 낮은 곳에서 고생하고 있거나, 전혀 다른 세계에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50년대에서부터 꽤나 유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하가 되거나, 그를 신처럼 떠받들었던 인물이 있다. P씨는 아주 색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종파를 부흥시키고 교세를 확장했다. 한때에는 엄청난 재물과 기업과 사람들을 거느린 대단한 인물이었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송두리째 바치고 스스로 그의 교도가 되어 자신과 가족의 장래를 망쳐버렸다. 그러나 세월은 흘러 그는 죽었고, 그의 교회도 서서히 무너져 지금은 그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이탈 중 우연히 그를 보았다. 기독교적 논리로는 그는 죽어 천국에 가 있거나,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다. 그를 끝까지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사후에는 하느님 옆자리쯤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그에게 사기 당했다는 것을 알아채고 뛰쳐나온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져 유황불에 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본 사실은 둘 다 아니었다.
그는 애초부터 사실을 왜곡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파견된 인물이었거나, 어떤 연유로 그 쪽의 세력과 결탁한 사람이었다. 그는 죽어서도 생전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곳에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이승이나 저승이나 나쁜 길로 빠져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또 하나 눈치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모두 같은 방법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둠의 세력에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타고난 악인, 구제불능의 악인으로 출생한 사람도 있지만, 그런 고정된 시각으로 인간을 보려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그만한 분별력이 없으며, 선이든 악이든 힘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 힘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필자가 어떤 이(?)에게 물었다.
“저는 天使입니까? 아니면 惡魔입니까?”
“너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천사와 악마의 능력을 반반씩 가지고 태어났다. 네가 천사의 능력을 갖거나 악마로 되는 것은 오직 너 자신에게 달려있다.“
천사나 악마가 영화나 소설 속의 그것처럼 인간에게 간섭하지도 않으며, 또 그러한 존재는 없다는 얘기다. 순전히 내 선택에 의해서 나 자신이 순간순간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한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당신의 선택으로 당신 스스로 천사도 될 수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
그도 저도 아닌 멍청이가 될 수가 있고...
필자가 처음 투표를 해 본 것이 70년인가 다음해이던가 대통령 선거 때였다.
김대중씨가 아깝게 지고 박정희씨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고 그후에는 대통령을 뽑을 기회를 오랫동안 박탈당했다. 각자 이유가 다르겠지만 식자층에서는 야당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의 이유는 모르지만 필자도 역시 열심히 야당에 표를 던진 사람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야당이 정권 잡기를 바래서? 아니다. 군부 독재가 싫어서? 싫긴 하지만 내 표 한 장이 바꿀 수는 없다.
야당 후보가 좋았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줄기차게 야당에 표를 던졌을까? 그것은 균형 때문이었다. 집권당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꼭 이긴다.
정치 선진국에서도 집권당이 바뀌는 예가 거의 없는데, 우리의 경우에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것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을 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호남사람들이다. 필자가 사는 동네는 저소득층이 많다. 서울의 달동네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호남 사람들이 많다. 보통 때는 그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에 전혀 불편하지가 않다.
출신 도를 따질 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 때가 되면 양상이 달라진다. 호남 사람들의 바람이 거세어지고 타도인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된다. 거친 사람 앞에서는 함부로 말도 하기 힘들다. 김대중씨라고 호칭했다가는 봉변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면서도“ 김대중 선생을 부탁합니다” 하고 머리를 숙인다. 누가 그들에게 호의를 갖겠는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우리라고...
왜? 여러 사람이 나서면 나설수록 그 욕은 바로 김대중씨에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이 글을 쓴 필자도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다) 그들이 뭉치면 뭉칠수록 여당에서 요리(?)하기가 쉽다는 것을 안다면 그러지 않을텐데... 아주 절친한 호남 출신 친구에게 필자의 의견을 얘기했더니 처음엔 펄쩍 뛰다가 결국은 승복을 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을 김대중씨나 집권당에서 알까? 모를까?” 라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모르겠지... 자신을 위해서 앞장서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사서 도리어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알면서 어떻게 시키겠나? 아마 모르고 있을 거야.“
“이 순진한 친구야, 자네는 어찌 산전수전 다 겪은 그 양반이 그 정도도 모르리라고 생각하나? 그 양반 이미 환갑이 넘었고, 두뇌 회전이 빠르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또 그 주변에 서울대학교 출신의 수재들이 즐비하네. 이들이 모두 자네만큼도 생각이 못한 돌머리라고 생각하나?“
“....................”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경상도 출신이네. 우리 형수 네 분 중에서 두 분이 전라도 출신이지. 그분들이 낳은 아이들이 여섯 명이지. 그놈들은 모두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 애들은 경상도 사람인가, 전라도 사람인가, 아니면 서울 사람인가?“
“..................”
“나라꼴이 바로 되려면 우리 백성들이 정치인들의 장난에 속아서는 안 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나는 생각하네.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어주니까 가지고 놀지. 지역감정 부추기는 놈들은 여, 야를 막론하고 찍어주지 말아야 해. 그들이 하는 장난을 가만히 조용히 쳐다보고 있으면, 스스로 부끄러워 그런 짓을 못하게 돼. 그건 그렇고, 내가 얘기 하고자 하는 것은 정치 이야기가 아닐세.
자네는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고 또 직책도 있지.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떠들고 다니라고 하나?“
“그러지, 그것을 노방 전도라고 하는데 성서에도 있다네.”
“상가나 거리에서 전철 안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어찌 생각하는가?”
“지나치게 떠드는 것이 싫을 때도 있지만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또 성서에 있는 말이기도 해서...“
“그래서 옳은 일이다. 좋은 일이다. 그런 말인가?”
“그렇다네.”
“노방 전도는 누구에게 하는 것인가?”
“물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대상이지.”
“복잡한 전철 안에서 다른 사람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떠들어대며, 시끄럽다고 제지하는 사람을 마치 사탄같이 대하고, 그렇게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과연 교회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는가?”
“...............................”
“자신의 행위가 도리어 반감을 가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과연 예수를 위한 일일까? 그 반대일까?”
“그런 생각은 해 본 일이 없네.”
“지금부터라도 생각해 보게. 어떤가?”
“글쎄, 그런 생각은 해본 일이 없어서....어쨌든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김대중 선생을 지지합시다 하면서 외치고 다니면서 오히려 반감을 사서 역효과를 내는 행위가 김대중씨를 도와주기는커녕 방해가 된다는 사실에는 동의하지?“
“그렇다네.”
“예수를 믿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고통에서 신음하고 만다는 그 외침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면, 그래도 그 행위가 옳다는 말인가?“
“........................ 그래도 성서에...”
“성서에 전도하려면 떠들어대라고 써 있는가?”
“그렇지.”
“누가 누구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러면 전철에서 떠드는 사람들은 예수의 직접 명령을 받았을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 사람은 예수의 제자인가?”
“....................................”
“예수 흉내를 내어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듯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네. 예수는 바로 신이다 그 점은 인정하나?“
“당연하지.”
“그렇다면 예수가 제자를 선택 하였을 때 처자식을 버리고 자기를 따르라고 했었지?“
“그래”
“왜 그랬을까?”
“자신의 뜻을 널리 펴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제자가 필요했기 때문이겠지.”
“물론이네. 그런데 처자식을 무책임하게 버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죄가 된다. 물론 그 죄는 버린 당사자의 것이고.... 그런데 예수는 자신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인륜을 저버리는 죄를 짓게 했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정도의 희생은 도리어 영광이 아닐까?”
“그런 얘기는 자네 같은 예수쟁이의 변명이지. 예수는 사람이면서 신이네. 당신 스스로 밝혔듯이...그 양반(예수)은 자신의 선택 때문에 죄를 짓게 할 리가 없네. 남겨진 처자식이 고생하면서 아버지나 예수를 원망하게 두지 않을 능력과 자격이 있다는 말이지. 예수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고, 자신이 바로 신이기 때문에 그럴 자격이 있네.“
“...................................”
“ 그런데, 목사나 전도사들은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는가? 그들이 예수의 화신인가? 그들이 신인가? 아니면 그러한 권한을 신에게 부여받았는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처자식을 버리고 교회일에 미친 사람을 만들고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가출하여 교회 사업에 미친 사람들이 적지 않네. 그들이 그런 길을 선택하도록 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
“교회를 위해서 가족을 버리거나 등한시하는 그들은 누구의 부름을 받았는가? 버림을 받은 이들과 그런 일들을 보는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은
교회나 예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래서 교회도 욕먹고 예수도 외면하는 이들이 적지 않네. 그렇다면 하느님을 위해서 예수와 교회를 위한다는 그들이 하는 꼴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전도의 목적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불러내서 바른길을 가르쳐줌이 아니던가? 전도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비기독교인들 이나 무종교인들에게 참뜻을 전하기는커녕 오히려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한다면, 예수를 위한 일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
“칭찬이 도리어 욕이 되고 존경심을 떠벌리고 다니는 것이 모욕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잘 생각해 보게나. 과연 내 말이 틀렸는가를...”
“........................................”
“오래 전에 방송에서 어떤 목사가 청량리에서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게 밥을 해주는 것을 잠깐 본 일이 있지.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일은 여기저기서 하고 있는 이들도 많고 대개는 어떤 목적을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중에는 변질이 되더라도 그것은 당사자의 책임이 되겠지만 우선, 배고픈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겠나.
그런데 며칠 전에 우연히 라디오를 들었는데 어떤 프로그램인지 생각이 나지는 않지만 바로 그 목사가 초대되어 몇 마디 얘기를 하더군. 목소리를 들으니 여느 목사나 전도사들에게서 듣던 그 가식적인 뼈가 없더군. 그래서 ‘아, 이 사람은 그래도 된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하더구만. 자신은 나중에라도 교회를 짓지 않겠다고...
목사나 전도사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 매스컴을 탔으니 많은 후원자가 생길 것이고, 돈도 많이 생기겠지. 그런 후에도 변질이 되지 않는 다면 그 사람은 뭔가를 제대로 아는 양반이지. 나는 그 사람이 끝까지 변치 않고 돈이 생기는 대로 밥을 지어 더 많은 불행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네.
그것은 여의도에 백만 명의 신도를 모아놓고 신을 찬양하고 신도들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하는 그런 행위보다 훨씬 더 고귀한 일이네. 그런 일이야말로 기독교를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그런 일이 예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나?”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세. 미안하지만 예수쟁이적인, 상투적인 말투, 예수님,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둥의 표현을 나는 아주 싫어하네. 왜냐하면 예수나 하느님, 즉 神은 인간이 자기 마음에 드는 짓을 한다고 해서 간사한 우리 인간들처럼 해해거리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화를 내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지“.
“좀전에 자네가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그 말은 뭔가?“
“잘 들어두게, 이 예수쟁이야. 그런 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수 십 동안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으니...예수는 누구인가? 대답해봐.“
“....................................”
“이 사람 갑자기 벙어리가 되었나. 예수는 바로 神이 아닌가? 맞어 안맞어?“
“맞아. 바로 神이시지.”
“그러면 그 양반이 뭣하러 인두겁을 쓰고 인간 세상에 태어났을꼬?”
“인간을 구원하려고...”
“맞았네, 아따 그 눔 참 신통하다. 고런 것도 다 아네 그랴. 그런데 그 말은 자네 같은 예수쟁이들이 하는 말이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러 온 것이지 직접 끌고 가려고 온 것은 아니지?“
“그렇지.”
“자네 같은 예수쟁이들이 항시 들먹이는 성경에서 보세. 예수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천국에 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러 왔고 또 그랬고 자신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까지 두었다. 맞는가?“
“그래”
“왜 교회에 짜잔-하고 나타나지 않았을까? 교회에 나타나서 기적과 위엄을 보여주고 그들을 굴복시킨 다음에 잘못된 교회부터 바로 잡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이고 그들에게 교회에 쌓여있는 재물로 배불리 먹여주고 했으면 잘못된 교회도 바로 세울 수 있었을 테고 자신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 장수무대에 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이봐, 예수 믿는 자네가 말해보게. 생각할 여유를 줄 테니까...“
“에- 그것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은 인간이 감히 헤아릴 수도 없고, 또.........“
“됐네 이 친구야.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무슨 영광은 무슨 얼어죽을......
그 양반이 그렇게 하지 않은 절대적인 이유가 있지. 그것은 바로 神은 절대로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세.
인간이 천국에 가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철저하게 자신을 깎고 다듬어야 하는 것은 물론, 인간들의 결정에 따라 가족 사회, 국가, 이 세상을 이루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네. 그 방법은 이미 오래 전에 세상에 알려져 있네. 인간들이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속성 때문에 어지럽고 시끄럽고 괴로울 뿐이지. 그 양반은 새삼스럽게 그 법칙을 깨우쳐 준 것일세.“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의 짐작이지만, 중국이나 인도, 한국 같은 곳에서는 이미 인간이 윤회를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향으로 살아가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굳이 와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을 거야. 신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적 속성과 국제 정세 때문일 것이네.
그 분이 이스라엘에 태어나서 올바른 가르침을 펼치면 정치가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결탁해서 로마로 하여금 당신을 죽이게 할 것과 그 때문에 많은 로마인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고 그것을 핑계로 많이 죽이고 죽고 하는 과정을 겪은 후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하게 되고 로마로부터 유럽을 비롯해서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전파되고...
따라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을 알게 되고 아이고 숨차라. 즉, 국제 정세의 흐름이 당신의 정신을 널리 퍼지게 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태어났다는 것이지. 예수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나라에 태어나서 똑같은 가르침을 펼칠 수 있었겠는가? 다른 나라에 태어났어도 그 가르침이 지금처럼 널리 퍼질 수 있었을까?
“.....................................................”
“이렇게 가정을 해보세. 만일 예수께서 일본이나 중국, 아니면 우리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게나. ”
“..........................................................”
“그래서 예수쟁이들의 말투들-특히 예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는 따위의 표현이 옳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싫어하네. 그러한 표현은 神을 인간 급으로 격하시키는 말이 된다네. 알겠는가?”
“.....................................................................”
“동의할 수가 없는 모양이군. 지금은 그럴 걸세.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지금까지 헛소리 같은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자네 스스로 알게 될 걸세.
神은 神이다.
人間이 아니다.
몇몇의 인간들이 부추긴다고 높아질 존재가 아니며 몇몇의 인간들이 모욕한다고 격하될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신을 대하는가? 인간과도 같은 성향을 지닌 조잡한 존재로 대한다. 누가 그렇게 대하는가? 신을 믿는 사람들이다. 이글을 보면 일부 기독교인들이 펄쩍 뛸 것이다.
필자를 두들겨 패고 싶은 자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나역시 기독교인이다. 이단자로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아니다. 우리는 참된 마음으로 반성해 보아야한다. 신을 믿는다면서 신을 저질로 표현하고 있다.
신이 가장 위대한 조물주라고 하면서 조잡한 인간에 빗대어 비교한다. 신이 불편 부당한 존재라고 하면서도 변덕쟁이로, 편협하기 짝이 없는 졸장부 정도로 평가 절하하고 있다. 누가? 바로 우리들-기독교인들이 그러고 다닌다.
어떤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 둘을 두었는데 큰놈은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해서 학교도 잘 다녔고 아버지의 소망대로 의사가 되어 돈도 잘 벌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위치에 이르러 흡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제멋대로였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제하고 싶은 일만 하고 다녔다.
가라는 법대는 가지 않고 자동차 정비에만 매달렸다. 형은 의사가 되었는데, 동생은 기름에 절은 정비공이 되었다. 아버지는 남 보기에 창피스럽고 분해서 자식으로 인정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있는 재산 다 털어서 큰아들에게 병원을 지어주고 고생하고있는 작은 아들에게는 땡전 한푼 주지 않았다.
큰아들은 외견상 불편한 것이 없었다. 일류 대학 나와 유능한 의사가 되고 부모의 힘으로 젊은 나이에 자신의 건물에 개업도 하고 부모도 모시고 있고 아버지의 주선으로 돈 많고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진로를 선택 강요하여 하고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했으며 결혼까지 당신 마음대로 정해버려 사랑하는 사람과 결별하고 말았다.
그는 이 세상에 혼자 밖에 없었다. 동생까지 집에 오지도 못하게 아버지가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들 용기가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거역했다가는 동생처럼 쫓겨나 좋은 집과 고급승용차, 골프채를 잃기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럽기도 했다. 동생의 몫까지 자기 차지가 되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자기만을 사랑해 주었고 자신의 갈 길을 일일이 정해 주었고 전 재산을 물려준 아버지가 그에게는 존경의 대상은 아니었다. 단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작은 아들도 아버지를 존경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편협하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했고 불쌍해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늘어 병들고 힘이 없어지자 큰 아들내외의 불화 때문에 그 집에 살수가 없었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양로원에 돈과 함께 맡겼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진로를 자신이 선택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모셔다가 임종 때까지 봉양하였다.
또 다른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평생 노동일을 했다. 자식을 입곱이나 두었는데, 어떤 놈은 악착같이 공부해서 선생도 되고 어떤 놈은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하고 공업학교를 나와서 취직해서 살림을 도왔고 또 다른 놈은 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집 배달원이 되었다가 후에 주방장이 되었고, 또 다른 놈은 어려서 가출하여 감방을 제집 드나들 듯 하였다. 아버지는 늘 마음이 아팠다.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아이들에게 해 준 것이라고는 세끼 밥먹여준 것 외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식들을 무척 사랑하였고 특히 일찌감치 비뚤어진 길을 가고있는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호소하였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결국 사랑의 힘으로 다시 태어났다. 훗날 그는 장사로 성공하여 큰 점포를 운영하고 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내가 아는 이 두 가지 얘기를 읽고 나서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첫 번째 얘기의 아버지는 재산이 많지만 자식을 편애하여 미워하는 놈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두 번째 아버지는 물질적으로는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사랑으로 아이들을 길렀다. 자식을 편애 하는 것은 부모로써 가장 못할 짓이다. 그것은 사랑 받는 자식과 미움을 받는 자식, 그리고 당사자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 사람은 어느 누구에게도 존경받지 못한다.
주위에서는 손가락질한다. 충고해 주는 이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남의 충고 따위는 듣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하나님을 이런 정도의 인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엄청난 착각이다. 왜 이런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지금도 그러하지만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왔을 때에도 전교의 대상이 모두 가난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고 억울하고 병들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은 나약하고 무엇엔가 미지의 힘에 의존하여 자신의 처지가 개선되거나 반전되기를 희망한다. 현재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대를 용서하고 그렇게 살면서 자신을 깨끗하게 다스리면 죽어서 천당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기엔 너무나 막연하고 서글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고자 조금씩 변형해서 가르친 것이 지금에 와서는 형편없이 왜곡된 기복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물질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들은 점점 참된 인성을 상실해 간다. 사이비 종교나 사교들은 애초에 기복신앙을 미끼로 사람들을 모으고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무지의 수렁으로 몰아 넣는 악마 같은 자들이 하는 짓이지만 기독교나 불교에서조차 기복 신앙으로 신도들을 몰아가는 것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매스컴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개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교 집단은 오래 버티기도 힘들고 신도들을 모으는 것이 점점 힘들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 기독교나 불교의 탈을 쓰는 사이비 종교인이 많이 생겨났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는 종교인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일신의 부귀 영달을 위하여 그런 짓을 하는 종교인들이 들끓고 있으니 천국의 문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사이비 종교인들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첫째, 그들은 반드시 기복 신앙을 조장한다.
둘째, 성서(성경)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성서를 이리저리 꿰어 맞추어 자신의 의지대로 해석하거나 흐름을 왜곡시키기 위해서 한 구절만 떼어내서 아무 데나 갖다 붙인다. 특히, 신 구약을 섞어 적당히 뜯어 맞추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들의 재산을 우려내는 방법을 총동원한다. 기독교의 탈을 쓴 사이비들은 대개가 그렇다. 성서를 가지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자면 한이 없다. 살인, 강도, 강간, 불륜 행위조차까지 합리화 시킬 수 있다. 제발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속지 말기를 바라지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 불교의 탈을 쓴 자들은 어떤가? 그들도 비슷하다. 특히 “나는 언제 득도했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림없이 사이비라고 보면 된다. 어째서 그런가?
得道라는 경지를 잘은 모르지만 진실로 득도한 사람은 그것을 자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득도를 했노라고 자랑하며 신도를 모으고, 그러한 것을 기화로 치부 하는 자들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필자를 아는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도 권유를 했다. 어떤 단체를 만들거나 새로운 종파를 설립하거나...그렇게 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텐데...그때 필자는 그에게 “그러한 발상이 사이비로 빠지는 지름길입니다. 잘만하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하는지 아는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유체이탈의 목적을 설명하다보니 장황하고 어지럽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께서는 목적이 어떤 것인지 집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제3장. 그밖에 하고 싶은 얘기들.
유체 이탈의 본격적인 설명을 앞두고 알아서 손해 볼일이 없는 얘기들.
<귀신은 있는가?>
여러 사람이 필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때마다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 였다. “요즈음 같은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다 지어낸 이야기지...”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인정하든 말든 이 세상에 존재할 것은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우겨도 없게 마련이지. 귀신이 별건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지.
나도 귀신으로 변할 것이고, 당신도 마찬가지야. 다만, 소설이나 영화 속의 그런 귀신은 없지.”
“귀신이 있다면 어디 데려와 보슈. 그러면 내 믿겠소.”
“자네가 믿든 말든 나와 상관이 없고, 내가 무엇이 안타까워서 자네에게 강요를 한단 말인가? 자네가 굳이 알고 싶다면 만나는 방법은 가르쳐 줄 수는 있네.”
“어디 설명해보소. 내 그 귀신을 만나보리다.”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설명을 듣고 그대로 실천에 옮기게. 내 말대로 실행한다면 오늘밤에라도 틀림없이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유체이탈 방법을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부르르 떨더니 무섭다고 하면서 자리를 피해버렸다. 왜 우리는 귀신을 볼 수 없을까? 그것은 너무나 당연히 귀신은 육신이 없기 때문이다. 귀신이 남의 육신을 빌려 나타났다고 치자. 우리 눈에 귀신으로 보이겠는가? 보통 사람처럼 보이겠는가?
당연히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귀신을 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귀신을 볼 수 있을까? 내가 육신을 버려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도 鬼神이 되어야만 그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이승과 분리되어 저승에 편입하게 된다. 저승은 어디인가?
죽은 자들 세계를 통틀어 저승이라 하자. 이승처럼 천차만별의 세상이 그쪽에도 존재한다. 천국, 또는 천당이라 하는 곳은 제일 좋은 곳이다.
윤회의 업을 벗어난 사람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선도에서는 이곳을 동천복지라고 하며 세분하여 36동천 72복지라고 부른다. 우리들이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도 그렇게 많은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 아래 여러 단계의 여러 층이 존재하고 있다. 필자가 어떤 이에게 물었더니(저쪽 세상에서) 크게 일곱으로 나눈다고 했다.
확인할 바는 없지만 필자가 돌아다니며 본 것은 이 세상만큼이나 다양하고 많은 곳이 있다는 것밖에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공존하고있는 죽은 자의 세상이 있다. 이 세상이 물질의 세계요, 陽의 세계라면 여기는 음의 세계요, 비물질의 세계다. 이 세상과 똑같은 모양으로 존재하고 있다. 집도 같고 가구도 같다. 인간이 만든 것은 그쪽에서도 등장한다. 그러나 에너지가 없다. 인간들이 만든 전기는 순간적으로 발생하고 순간에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을 켜도 작동을 않고 등도 켜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밤은 무척 어둡다. 낮에는 어떨까? 낮에는 그쪽도 밝다. 태양 에너지는 지속적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죽은 자의 세상도 밝혀준다. 그 때문인지 죽은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세월이 지나면 알게되지만 급사한 사람들은 대부분 모른다.
87년도에 필자가 처음으로 임의로 유체이탈이 가능했을 때 길가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그에게 물었다.
“왜 이 밤중에 길가에 나와 앉아 있습니까?”
"글쎄, 자다가 더워서 길가에 나왔는데 집을 찾을 수가 없어요. 분명히 이 근처인데.....”
그는 자다가 죽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집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머지않아 자신이 죽은 줄 알게 되겠지만 얼마나 헤맬지 모를 일이다. 철들지 않은 어린애들은 더 심할 것이다. 언젠가 이탈해서 방안을 둘러보니 여자아이들이 셋이 자고 있었다. 제일 큰 놈은 초등학교 5,6학년쯤 되어 보이고 둘째놈은 2,3학년, 작은 놈은 대여섯살쯤 되어 보였다.
“얘들아 너희들 누군데 남의 집에 들어와 자고있니? 너희들 형제니?”
아이들이 겁을 먹고 경계를 했다.
“괜찮아. 아저씨한테 얘기해봐.”
제일 큰놈이 입을 열었다.
“얘들은 제 동생들인데, 막내가 물에 빠져서 건지려고 하다가 함께 빠져 죽었어요.”
“저런, 불쌍한 녀석들 같으니라고...그래, 언제 죽었는데 이렇게 헤매고 다니나?”
“5년쯤 되었을 거예요.”
“5년씩이나 갈 길 못 찾고 헤매다니...불쌍한 놈들 같으니....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 하늘나라에 가면 다시 인간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단다. 아저씨가 데려다 줄 테니 따라가겠니?”
큰 놈이 고개를 끄덕였고 둘째도 별 반항 없이 따라 나서는데 막내는 앙탈을 부렸다. 제가 잘못해서 그런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혼날까봐 겁이나서 그랬는지,
죽은 자의 세상에서 헤매는 혼미하고 저질인 어른들이 괴롭혀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겁을 내고 앙탈이 심했다. 제일 큰 놈과 필자가 양쪽에서 손을 잡고 겨우 데려다 주었는데, 필자의 손을 물어뜯고 발버둥치고 대단히 힘들게 처리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은 이미 환생해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잘 자라고 있을 것이다. 필자의 바램이지만.... 그 녀석들 다시 태어났으면 물을 대단히 무서워할게 틀림이 없다. 부모가 일찌감치 수영교실에 보내서 가르치면 물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겠지만.
여관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급한 볼일 때문에 외출을 해야한다고 잠시만 봐달라고 하기에 그런 곳에는 어떤 종류의 사람이 있나 나가 보았다. 요즈음 여관이란 곳이 여행자는 별로 없고 잠깐동안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그래선지 방마다 색정관계로 한이 맺힌 자들이 뒤엉켜 있었다. 죽은 자의 세상에는 이승 같은 부부관계도 없고 연인 사이도 없다.
윤리, 도덕도 없고 법도 없다. 그래서 무질서하고 엉망이다. 난잡하다. 방마다 모두 그랬다. 어느 방문을 열어보니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처녀가 혼자 누워있었다. 필자를 보더니 몹시도 부끄러워했다.
“얘야, 너는 어찌해서 이런 곳에서 혼자 누워있니?”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배시시 웃으며 수줍어하며 이불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리려고만 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난잡한 처녀는 아닌 것 같았다.
“얘야,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된단다.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이런데 있으면 못된 놈들만 만나게 돼. 잘못이 있었으면 대가를 치르고 다시 태어나야지. 다시 태어나면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도 하고 아기도 낳아서 예쁘게 기르고 싶지 않니? 그러자면 이곳을 떠나야해. 내가 데려다 줄 테니 나를 따라올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고 필자를 따라 나섰다. 심성이 착한 처녀 같았으니 이미 환생했을지도 모른다.
87년이나 88년쯤의 얘기다.
어느 날 집밖에 나섰더니 군화발 소리가 요란했다. 일개 소대쯤 되어 보이는 군인들이 열을 지어 구보하고 있었다. 그들의 행색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쓰고 있었다. 맨 앞의 인솔자를 불러 세웠다. “여보시오. 당신들 이 밤중에 왜 이렇게 떼를 지어 다니고 있소?”
“우리는 전쟁 중에 우리 진지에 포탄이 떨어져 소대 전원이 함께 죽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그냥 이렇게 다니고 있어요.”
수십 명의 소대원들이 필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피로에 지친 모습이었다. 그저 소대장 뒤만 졸졸 따라 다니고 있었다.
“여보시오 소대장, 전쟁이 끝난 지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여태껏 갈 곳을 못 찾고 헤맨단 말이요? 참으로 한심한 일이군. 저쪽에 山이 보이시오?”
“예!”
“그리로 올라가시오. 중간쯤 오라가면 작은 집이 하나 나타날 거요. 그 집은 죽은 사람을 받아주는 곳인데 그리로 가시오. 그러면 당신의 임무는 끝이요.”
그는 거수 경례를 하고 나서 부하들을 이끌고 사라져 갔다.
<전생과 윤회 그리고 업>
요즈음 전생여행이란 책이 유행이다. 전생이란 과연 있는 것일까?
TV프로 제목 같다. 물론 윤회하기 때문에 前生도 있고 전전생도 있고, 다음생도 존재한다. 믿거나 말거나 있는 것은 있다. 유체 이탈을 실행에 옮겨보는 사람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게 된다. 前生을 알 필요가 있을까?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필자도 오래 전부터 전생에 대해 궁금해 왔다. 그것은 현실에서의 고통이 전생과 연관이 있지 않나 해서였다. 다시 말하면 전생에서 내가 죄를 지어서 현실에서 고통을 받나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고 전생의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찾아내 어떻게 하든 그 갚음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84년인지 그 다음해던가 단편적으로 전생을 구경했다. 구경이 아니라 당시로 돌아가 그 체험을 다시 했다. 죽기 바로 직전의 경험이었다.
당시에 나는 중국인이었다. 필자의 나이 스무살 전후였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한 죄로 팔 다리를 모두 잘린 채로 서서히 죽어갔다. 그 때문에 숨이 넘어갈 때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고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 기억이 아니라 당시로 돌아가 다시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베는 순간 아프지는 않았지만 시큼거렸다. 팔, 다리가 다 잘린 몸뚱아리는 시체더미 위로 던져졌으나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뺨이 땅바닥에 닿았고, 다른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와 썩은 물이 뺨을 적셨다. 썩는 냄새가 코를 진동했고 의식이 가물가물 멀어져 갔다. 그리고...죽었다. 그리고 날았다. 푸른 하늘을, 멀리 아래로는 바다가 보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단편적인 전생 구경은 별 의미가 없었다. 전체를 다 알고 싶었다. 어느 나라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가족은....등등 모든 사실을 기억해 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현실에서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미련한 짓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금생에서의 일들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전생을 알려고 애를 쓰다니....
금생에서의 일을 생각해보자. 10년 전에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크게 충격 받거나 심각했다거나 하는 중요한 사실들만 대충 떠오르고 세세한 기억은 없었다. 필자가 걸음마를 하다가 화로에 걸터앉아 엉덩이를 덴 적이 있었다. 그 당시의 방안 풍경이 어렴풋이 보이고 내 앞에 몇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누구인지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가 언제쯤인지 몰랐다. 서너 살쯤은 되었겠지 하고 생각하다 언젠가 어머니께 물었더니 첫 돌을 조금 지나서란다. 사실 그런 정도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필자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워낙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댓살쯤 되었을 때 형들을 쫓아다니며 부서진 탱크를 놀이터로 알고 들락거리던 일들도 단편적으로 기억이 날 뿐이다. 그래서 자기최면으로 기억을 더듬어 올라 가보기로 작정을 했다.
어느 날 조용할 때 시도했다. 먼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으로 몰입하였다. 맑은 마음으로 들어가자 기억을 스스로 퇴행하기 시작하였다. 시간을 거슬러 조금씩 과거로 돌아가면서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렇게 해서 아주 어린 아이 시절까지 내 의지로 돌이켜 보았다. 다음 단계는 전생이었다.
전생으로 가자고 마음먹었을 때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힘에 끌려 들어갔고, 소리도 지를 수 없는 끔직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멈출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그냥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엄청난 고통이었다. 필설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의......굳이 설명을 하자면 산채로 배를 가르고 내장을 토막토막 잘라내는 것 같기도 하고, 다리나 팔을 톱으로 잘라내는 것 같기도 하고....
사금파리로 뼈를 갉아내는듯한 느낌, 그런 것이었다. 한참동안 지속되던 고통이 끝나자 검은 양복에 금발의 젊은 사내가 다가왔다. 자기를 따라오란다. 따라갔더니 별로 크지 않은 집으로 들어갔는데 사무실 같아 보였다.
“조금전의 그 엄청난 고통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지옥이나 연옥의 고통이 그렇습니까? 지옥이나 연옥의 고통이 그토록 엄청난 것이라면 살아서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참기 힘든 엄청난 고통이었습니다.”
필자가 물었다. 그는 명함크기의 하얀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TxxxxxAooooo"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당신이 가지고 태어날 이름이었습니다.”
“아니? 내 이름은 김 아무개이지 이것은 아닌데요.”
“당신은 원래 그 이름으로 스웨덴에 태어나기로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어째서 한국 땅에 태어났지요?”
“그쪽에서 거부당했기 때문입니다.”
“거부 당하다니요?”
“낙태 당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그 엄청난 고통은....?”
“당신이 시간을 거슬러 왔기 때문에 낙태 당시의 고통이 되살아난 거지요.”
“세상에! 그렇게 낙태의 고통이 그렇게 지독하다니....”
필자는 그런 고통을 누구에겐가 준 것을 뼈아프게 후회했다.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고 속죄했다. 모르고 한 짓이지만 잘못은 잘못이요, 죄는 죄다. 이 부끄러운 얘기를 하는 것은 나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줄어들기 바라는 마음에서다. 카톨릭에서는 낙태를 준엄하게 금지했었다. 세월에 따라 약간 변질된 점이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살인이다. 아니, 천명을 거스르는 행위인 것이다.
제2부. 유체이탈의 실행 방법
1부에서의 온갖 잡소리를 읽으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만큼 유체이탈이란 것이 장난으로 하거나 호기심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필자의 얘기에 공감하는 분도 있겠고 헛소리로 생각할 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탐구 하고자 하는 본인의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실행 방법 편을 따로 만들어 꼭 필요한 분께만 드리려고 합니다.
저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걸음씩, 한가지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기 바랍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얄팍한 생각도 드러나 보일 것입니다.
정치 행태나 정치인들의 속임수도 보입니다.
당신의 직관력은 한층 더 발전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점점 온화로운 성격으로 변해 갑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흘리는 눈물은 당신의 영혼을 닦아주는 생명수가 되어 조금씩 조금씩 당신의 영혼을 밝고 깨끗하게 닦아줄 것입니다.
격정이나 욕망에서 헤어나게 될 것입니다.
참사랑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어가리라 믿습니다.
타인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참으로 겸손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윤회와 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의 숙명을 깨닫게 되면 가족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부모, 형제, 처, 자녀...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고 사랑의 눈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 하지 말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당연하게 행할 수 있을 때 당신은 이미 어제의 당신이 아닙니다. 이미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실행>
첫째 조건,
방해받지 않을 장소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들락거리거나 시끄러운 곳에서 유체이탈은 불가능하다. 전화벨 소리가 갑자기 울려도 안 되고 야채나 생선 장사의 트럭이 갑자기 떠들어대도 곤란하다.
이탈이 되었더라도 즉시 복귀하기 때문에 조용하게 방해 받지 않을 장소를 택한다.
그것이 불가능할 때에는 시간을 잘 선택한다.
둘째 조건,
음한 장소는 피해야한다.
엄한 장소는 어딘가?
여관 같은 곳이다.
색정 관계로 한 맺힌 망자들이 득실거린다.
잘못하면 당신도 그들에게 빠져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귀신이 나온다는 곳도 피해야할 장소다.
왜? 공포심이 배가될 것이다.
공포심은 괴로움을 수반하게 된다.
지박령이(터귀신이라고도 함) 있는 곳에서는 조용히 있으면 소리가 난다.
집안에 지박령이 있으면 가끔씩 가구 등이 깨지는 소리를 낸다.
명상이나 기도를 할라치면 방해를 잘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놈은 뱀이 기어가는 소리를 내기도하고 어떤 집에서는 한 밤중에 옥상에서 사람이 뛰어 다니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
초보자가 그런 곳에서 이탈하기란 쉽지 않다.
공포심이 그것을 매우 힘들게 만든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는 자신의 집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생각했던 분들이 있을 것이다.
기온의 변화가 별로 없는데도 집안의 어떤 기물에서 소리가 난다면 십중팔구 지박령의 짓이다.
기분이 언짢을 때에는 안식향을 태운다.
안식향은 경동시장의 한약재상에서 쉽고 싸게 구입할 수 있다.
7,8년 전에 한 근에 3,000원에 사서 필요한 여러 사람에게 조금씩 나누어주고 방법을 가르쳐 주었더니 대부분이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말을 했다.
이 방법은 동의보감에 나와있는 것이다.
동의보감에 보면 “안식향을 태우면 鬼神을 쫓고 神을 부른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몽중귀교(夢中鬼交)”에도 처방되는 약재다.
몽중귀교란 무엇인가?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꿈속에서 귀신과 교접하는 행위를 말한다.
꿈속에서는 남매간의 통정도 있을 수 있고 그보다 더 망측한 꿈을 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꿈이라서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허준 선생은 몽중귀교를 병으로 분류해서 치료하라 했을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꿈으로 알고) 귀신과 교접을 한다.
귀신과의 교접과 꿈과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어떻게 구별해야하나?
필자가 주위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거의 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마다 바르게 가르쳐 주었지만 제대로 알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단순한 꿈은 자신이 제 삼자로 보인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귀신과의 교접은 실제로 자신이 行하고 있기 때문에 제삼자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꿈에서와는 달리 그 느낌이 생시와 똑같다.
입술이 닿는 느낌, 피부의 감촉...등등
그리고 또 한가지 특징은 잠이 막 들 무렵에 겪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깨어있는 상태에서 잠이 깊이 들 때 틈이 있기 때문이다.
그 틈은 우리가 죽은 자의 세계를 잠깐 인식하는 순간이다.(대부분이 저승과의 접촉은 모른다.)
몸의 상태에 따라서 그 시간이 조금 길 때가 있다.
그 순간에 자신이 평소에 원했다면 이성이 다가온다.
그 이성은 물론 색정에 한 맺힌 망령이다.
그러나 상대와의 교접이 시작되면 금방 의식이 돌아온다.
몸이 같은 반응을 하기 때문이다.
즉 잠이 깨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바로 잠이 들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을 꿈으로 생각하기 쉽다.
필자가 아는 어떤 여인은 얼마전 남편이 죽었다.
처음에 몹시 슬퍼했던 그녀는 곧 다시 생기를 찾았다.
가까운 사람이 물어 보았더니 “저는 남편이 살아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마치 살아서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아요“하더란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그이는 밤마다 저를 찾아와요. 사랑도 나누는 걸요”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더라고 필자에게 전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녀가 그것을 즐기면 오래지않아 그녀는 발병하거나 쇠약해지고 만다.
그 귀신의 정체는 남편이 아닐 가능성이 많으며, 남편이라 해도 거부해야한다.
그래야만 죽은 자의 길을 갈 수가 있을 테니까.
어째서 남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은 둘 다 독실한 기독교도다.
예외도 있겠지만 기독교인들은 평소에 교육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혼탁한 죽은 자의 세상에서 헤매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여인이있다.
이 여자도 남편을 잃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이 밤마다 찾아와 자기를 위로해 준단다. 예수님과 사랑을 나누고 있으니 그녀는 천국행 티켓이라도 예약된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몇해 전 신문에서 읽은 것인데 서양에서 조사한 것에 의하면 사랑했던 부부는 한쪽이 사망한 후에도 50% 정도는 만나고 사랑도 나누고 한다는 그런 얘기였다. 모두 몽중귀교의 대표적인 사례다.
당신은 어떤가?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은 없는가?
아마 대부분이 비슷한 경험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귀신과의 교접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유체 이탈은 자신의 의식이 잠으로 빠져 들어가는 순간에-그 찰나에 온힘을 다하여 뛰쳐나가는 것이다.
누구나 가위눌리는 무서움을 겪어 보았겠지만 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끔 그랬다.
입대하던 해인 1972년에는 몹시도 시달렸다.
잠을 자기가 무서웠다.
잠을 자려고만 하면 창문으로 시커먼 놈이 들어와 가슴에 올라타고 목을 졸라댔다.
불을 켜고 자도 소용이 없었고 기도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달포를 시달리다보니 갑자기 척추가 마비되었다.
이십 여일 만에 회복이 되었지만 참으로 무서운 기억이었다.
군에서도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우리가 자던 막사터가 6.25 때 시체를 매장했던 자리였다는 것이었다.
社會人이 되고 일들이 몹시도 어렵게 진행되었다.
어렵게 구한 직장도 파산되기 일쑤고, 작은 사업을 해 보고 싶어도 자금 조달할 능력이 없었다.
주위에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많았지만 도움 받을만한 사람은 없었다.
수재 소리를 듣던 내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사회생활도 공부처럼 쉬울 줄 알았던 자만심이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점점 자라나도 어려움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숱한 밤을 기도로 새워 보았고, 명상으로 원인을 찾아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 보았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러던 중 뭔가 보이지 않는 것이 주위에서 맴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그러자 가위눌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옛날에는 그것 때문에 죽는 사람도 있었단다.
그래서 어느 날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의 잘못 때문에 내 주위에 이런 것들이 넘실거리고
그것들의 방해로 내 삶이 이리도 힘들고, 그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들고 어렵게 만든다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자.
내가 하려는 이 행위가 神의 노여움을 사서 설사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내 아이들에게 나의 고통이 전가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버리겠노라고.
그래서 며칠 밤을 준비했다.
기도하고, 명상을 하고, 신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두려움, 공포와 함께 맞서 싸우고 , 같이 죽으려고 그 세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잠이 들 무렵에 나를 향해 다가와 괴롭히던 그 형상을 향해 마주쳐 나갔다. “너 나하고 같이 지옥으로 가자! 내가 너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져 괴로움을 같이 당해보자. 내 아이들이 너희들 같은 더러운 놈들에게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이 목숨이 아까울 게 없다!“
그러자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허상이었다.
모든 것이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공포심의 산물이었다.
당신이 이탈을 하기 직전에 느끼는 공포, 이상한 소리들은 모두 당신 속에 숨어있는 공포심에서 나온 것이다.
이탈의 횟수가 거듭되어도 이상한 소리 , 낄낄거리는 웃음, 말소리 등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미처 이탈되지 않았을 때에는 몹시 두렵다.
이때에는 이렇게 말하라 아주 강하고 독하게.
“너 누군지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일어나서 혼내줄 것이다.”
더 심하고 원색적인 말도 좋다.
그럴수록 자신이 점점 강인해 지니까...
그 정도면 약한 놈은 대부분이 도망가고 없다.
이탈이 되었으면 방안을 샅샅이 훓터 보아야 한다.
낯선 사람이 있으면 겁먹지 말고 필자가 해온 것처럼 해보면 된다.
설득해 보고 안되면 쫒아버려야 한다. 아주 강경하게...
몸이 둥실 뜨는 듯하면 마음을 가다듬고 바로 잡을 수 있다.
전기 스위치가 있으면 켜보자.
딸각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자. 실제처럼 느껴진다.
이번에는 방문을 열지 않은 채로 그냥 통과해 보자.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가능하다.
그런데 벽 통과는 쉽지 않다.
이탈이 되면 자꾸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그 욕망을 억제하도록 해야한다.
당신의 평소 생각과는 다른 행위를 할 수도 있다.
실망하지 말기 바란다.
이탈한 당신의 영은 본능만으로 움직이기 쉽다.
스스로 달래고 일깨우고...
천방지축으로 뛰어가려는 어린아이처럼 분별력이 없다.
스스로 가르치고, 억제하고....
그러노라면 점점 이성이 살아나 성숙해 질 것이다.
물론 단 시일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러 번 한 얘기지만 그 상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며 그들은 혼미하기 짝이 없는 저질 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이탈을 실행해 봅시다.
바른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환상으로 갈 수도 있으니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으로 시작합시다.
(실행)
유체이탈이 가능한 시간은 상단전에 氣가 얼마나 차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필자도 처음에는 5분에서 20 분 정도 였으나 요즈음은 두시간이나 경과 한 적도 있다.
단전호흡을 해본 사람은 약간의 준비만으로도 충분하다.
필자는 16초간의 호흡으로 준비를 했다.
단전호흡처럼 길게 호흡하면 오히려 방해 될 수도 있으니 4초나 8초 정도로 쉽게 하는 것이 좋다.
초침 소리에 따라서 하나, 둘 해도 좋고 다른 방법을 써도 괜찮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종교에서 사용하는 주문 같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귀신 부르는 주문 같은 것은 절대 사용하지 말기 바란다.
필자는 “精神一到何事不成”(정신일도하사불성)을 사용했다.
8초씩 16초간의 호흡을 했다.
단전호흡처럼 의식을 하단전에 두고 깊게 호흡하지 말고 상단전(미간)에 두고 배를 불룩이지 말고 편하게 하면 좋다.
그러면 5-10분이면 누구나 氣를 느낄 것이다.
氣의 가느다란 줄기가 머리 위에서 뚫고 들어와 미간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몸을 약간씩 흔들어 댈 것이다.
심한 경우는 몸이 심하게 요동 칠 것이다.
놀라거나 좋아할 일이 아니다.
단순히 기의 움직임에 몸이 동조할 뿐이다.
한참을 그러다 잠잠해지면 된다.
그러한 과정이 없어도 미간이 그저 묵직해 지면 준비는 된 것이다.
눈을 감고 준비 하는 동안 눈앞에 무서운 형상이나 기괴한 모습이 자꾸 나타나면 중지하고 일어나서 화장실에 다녀와서 잠자기 바란다.
이때 억지로 행하면 공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호흡을 하며 준비하는 중에 눈앞에 녹색의 빛이나 청색의 빛이 보이면 충분히 준비 된 것이다.
이제 편하게 눕는다.
베개는 너무 높지 않게 목뒤에 받치고 팔 다리를 편히 뻗고 힘을 뺀다.
눈을 감고 의식을 상단전에 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자.
“하늘에서 기운이 내려온다. 내 두 눈 사이로 들어온다.”
이미 준비가 된 상태이기 때문에 두 눈 사이로 서늘한 기운이 들어올 것이다.
정신은 맑아지고 심신은 피로해져 잠이 온다.
이때 이렇게 암시하라.
“자! 이제 잠이 온다. 잠이 온다. 내 육신은 잠을 자고 나는 일어난다.”
이렇게 몇 번 되뇌면 잠이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귀에서 -앵- 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때 다시 “일어난다. 일어난다”하고 강하게 외쳐라. 물론 소리는 내지 않지만...
그러면 순간적으로 이탈이 될 것이다.
처음 시도하더라도 십중팔구 이탈에 성공할 것이다.
이탈에 한 번 성공하면 당신은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서 이탈이 가능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를 만날 수도 있다.
불교인이라면 “석가”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적이 불확실하면 안 된다.
“내가 하느님이다" 하고 길을 막는 놈이 있으면 모두 가짜라고 보면 된다. 예수를 만나고 싶은 사람 앞에 나타나 “내가 예수다”하는 인물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 어떻게 진짜를 판별할 수 있는가? 만나 보면 알게된다.
당신은 유체이탈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헛소리를 하거나 환상이나 환각, 환청을 사실로 착각하고 있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자의 갈 길을 거부하고 구천을 떠도는지 알 수 있다.
유체이탈이 어려운 것은 절대 아니다.
유체이탈의 본질을 이해하기가 힘들뿐이었다.
당신은 이제 사물을 바로 보고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문 앞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자그마한 나룻배로 먼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마음먹기에 따라 큰 바다로 가볼 수도 있고 바다만큼이나 넓은 호수를 가 볼 수도 있다.
연못에서 맴돌다 그칠 수도 있고, 물 빠진 개펄에 얹혀진 채로 무의미하게 앉아 있다 돌아올 수도 있다.
내가 육신을 비워놓고 없는 동안 딴 놈이 차지하고 비켜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영은 자기의 육신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공통된 의문이 있어서 몇 자 더 적습니다.
상단전에 氣가 잘 모이지 않는다는 분이 계셨는데, 초심자는 이해하기 어려웠나 봅니다.
다시 설명 드리지요.
두 눈이 코끝을 바라본 채로 눈을 감습니다.
그 상태로 4초나 8초간의 호흡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초심자의 경우에는 두 눈이 자꾸 풀릴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바로 잡고 계속하면 됩니다.
이탈을 하기 위해서 엄청난 기의 양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양미간이 묵직할 정도면 됩니다.
단전호흡을 해본 사람은 5분 이내에 가능할 것입니다.
초심자라도 30분은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드러누운 상태에서 이탈하기 직전에 아주 강한 신념으로 “내 육신은 잠을 자고 나는 자지 않고 일어난다” 하고 자신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의 후배에게 몇 년 전에 가르쳐준 적이 있는데 전혀 준비 없이 실행 해보았는데 상체만 겨우 일으켰다고 하더군요.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니 편한 마음으로 시도하십시오.
그리고 또 한가지, 이탈 중에 딴 놈이 육신을 점거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먼저 언급한 바도 있지만 절대 그런 일은 발생할 수 없습니다.
제 경험으론 그렇습니다.
주위에 그런 분이 있으면 그것은 십중팔구 “업” 때문입니다.
추 신
제가 쓴 글에 여러분이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유체이탈이 무슨 초능력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1부에서의 설명대로 절대 장난이나 호기심으로 행할 일이 아닙니다.
이 실행은 공포를 수반합니다.
그것을 강한 의지로 깨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와 뚜렷한 목표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공포를 견디지 못하거나 환상이나 환각을 사실로 오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특히, 학생들은 관심을 버려주었으면 합니다.
생의 괴로움을 모르는 어린 사람이나 성인이라도 생의 고통을 절감한 사람이 아닌 분들은 시도하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얻는 것도 없을뿐더러 잘못하면 혼란만 가중시킬 수도 있습니다.
빵상~ 이런단어 쓰려는 분들은 서로 기분상하지 않게 뒤로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읽어보았는데 단순하게 유체이탈 실행법이 아니라 깨닫은게 많으실것이라고 예상되어 올립니다.
첫댓글 유체이탈 한번 경험해보고 싶긔 ㅜㅜ
한줄요약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