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북한에는 조선노동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당 대회가 개최된다.
북한 사회주의헌법 제11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로동당의 령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고 명시하여 조선노동당이 북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상하고 국가기관을 지도한다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따라서 1980년 제6차 대회에 이어 36년 만에 열리는 제7차 당 대회는 북한의 향후 방향에 대한 중요한 논의와 결정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NK투데이에서는 북한 제7차 당 대회를 맞이하여 조선노동당의 역사와 구조, 당 대회의 의미, 제7차 대회의 전망 등을 구체적으로 파헤쳐보고자 한다.
그리고 '시리즈 ⑷ 조선노동당, 이것이 궁금하다!' 에서 조선노동당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려 한다.
북한의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NKtoday21@gmail.com 로 보내주시길 부탁드린다.
<조선노동당 집중 분석>
⑴ 조선노동당의 창건과정과 그 의미
① ㅌ.ㄷ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까지
② 조선신민당의 출현과 양당 합당
③ 합당의 배경과 의미
⑵ 조선노동당의 구조
⑶ 조선노동당의 역대 당대회
⑷ 조선노동당, 이것이 궁금하다!
⑸ 조선노동당 제7차 당대회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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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동당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부터"
⑴ 조선노동당의 창건과정과 그 의미
① ㅌ.ㄷ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까지
조선노동당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조선노동당은 1945년 10월 10일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북한은 작년(2015년) 당창건 70돌 기념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기도 했다.
조선노동당은 1945년에 창건했지만, 북한은 당의 뿌리와 씨앗, 모체(조직의 전신, 前身)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조직들로 인식하고 있다.
북한이 조선노동당의 뿌리와 씨앗, 모체로 바라보는 조직은 무엇이며 왜 그렇게 바라보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ㅌ.ㄷ와 건설동지사
2013년 10월 8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북한은 조선노동당의 뿌리를 'ㅌ.ㄷ'(트.드라고 읽음)로, 조선노동당의 모체를 '건설동지사'로 보고 있다.
우선, 'ㅌ.ㄷ'는 '타도제국주의동맹'의 약칭으로 1926년 중국 만주 독립군양성학교였던 화성의숙에서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반일공산주의자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룩하며 나아가서 조선에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만든 단체다.
북한은 'ㅌ.ㄷ'의 강령이 조선노동당 강령의 기초로, 'ㅌ.ㄷ'가 내세운 자주의 원칙이 당건설과 활동의 원칙으로, 'ㅌ.ㄷ'가 키워내기 시작한 성원들이 당 창건의 골간으로 되었기 때문에 'ㅌ.ㄷ'가 조선노동당의 뿌리라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건설동지사'는 1930년 7월 장춘(長春) 카륜에서 김일성 주석이 반일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만들었다는 당 조직이다.
당시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1국 1당의 원칙에 따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당 승인 경쟁이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은 다른 공산주의자와는 달리 당의 중앙(지도부 등)을 먼저 선포하는 형태가 아니라 함께 하는 동지들을 묶어 기층(하층) 당 조직부터 구성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름도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고 '건설동지사'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조선노동당의 지도사상은 주체사상이다.
북한은 ‘건설동지사’가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하는 첫 번째 당 조직이었으며 이후 지역 곳곳에 당 조직들을 만드는 데 있어 모체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건설동지사'를 조선노동당의 '씨앗', '모체'로 보고 있다.
당 조직인 ‘건설동지사’ 창건된 후 3개월이 지난 1930년 10월 1일 함경북도 온성군 두루봉에서 국내 첫 조직이 구성되었다.
이후 짧은 시일 안에 두만강 인근과 국경 지역, 동만주 지역에 수많은 당 조직들이 구성되었다고 북한은 주장한다.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반일공산주의자들은 1932년 4월 25일 항일무장투쟁조직인 반일인민유격대를 결성하고 이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발전시킨다.
북한은 1930년대 중반부터 반일공산주의자들이 이 조선인민혁명군 내에 당 위원회를 구성하여 전체 당 조직들을 지도하고 당 사업을 전반 추진했다고 주장한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선인들과 중국인들이 함께 꾸린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인들과의 사업을 진행할 때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명칭을 이용했다고 당시 동북항일연군 주보중 군장의 회고록에 나온다.
북한은 수십 년간 항일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축성된 당 창건, 운영 경험과 성과들이 향후 조선노동당이 창건되고 운영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에 ‘ㅌ.ㄷ’, ‘건설동지사’를 각각 조선노동당의 뿌리, 씨앗, 모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당
조선노동당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해방 전 조선인민혁명군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 조선인들과 중국인들, 그리고 소련군은 함께 88여단을 구성하게 된다.
여기 소속된 조선인들은 대부분 항일빨치산(무장투쟁활동가)들로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을 종지부 찍기 위해 일제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되고 88여단은 만주지역과 한반도에 진격하여 일본군과의 전투를 치르게 된다.
이때, 동북항일연군 소속 조선인들과 소련군은 한반도를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해 들어왔는데 전쟁 이틀 후인 11일에 웅기, 나진, 13일에는 청진까지 들어왔다.
북한은 소련군과 88여단이 빠르게 한반도 북부지역의 일본군들을 무장해제시킬 수 있었던 비결을 조국광복회와 조선공작단 등 항일빨치산의 한반도 내부 활동으로 꼽고 있다.
1945년 7월 결성된 조선공작단의 경우 국내 정보활동, 국내 침투계획 수립, 조국광복회와의 연계, 국내 유격대 군사훈련 지원, 해방준비사업 등을 진행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최후해방전투에 참가한 88여단 소속 조선인들, 조선공작단이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는 사업에서 주도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바로 북한 건국, 건군, 건당에 앞장선 김일성 주석, 김책 부수상, 안길 보안간부훈련대대부 참모장, 최현 조선인민군 제2사단장, 강건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김일 민족보위성 부상 등이다.
당시 한반도가 분단된 조건이었으므로 이들은 우선 88여단이 진입한 한반도 이북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북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을 하나로 묶어 세울 수 있는 당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는 1945년 8월 해방 직후 박헌영 위원장 등에 의해 조선공산당이 이미 발 빠르게 재건된 상태였다.
1928년 일제에 해산당한 조선공산당이 1945년 공식적으로 재건된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이북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은 분단으로 인한 남북의 독자적 현실에 맞게 조선공산당 서울 중앙을 인정하면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따로 건설하게 된다.
1945년 10월 10일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조선공산당 서북 5도 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를 개최하였다.
북한은 이 날짜를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두고 있다.
서북 5도란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북도, 함경남도, 황해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노선은 당시 채택한 '정치노선확립 조직확대 강화에 관한 결정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결정서에서는 현 단계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자본가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봉건 제도를 타파하여 자본주의적인 정치, 경제 체제를 확립하는 사회 혁명)으로 보고 토지문제를 기본과업으로 설정하였으며 친일세력을 제외한 국내 전체 인민전선의 통일이 주장되었다.
당의 과업으로는 공장, 광산, 기업소, 농장 등 기층 생산단위에서의 당세포(당의 말단 조직)의 구성과 각계각층에서의 당의 외곽대중단체 결성이 강조되었다.
이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5월 말부터 6월 초 사이에 북조선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서울 중앙과의 형식적 소속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한반도 이북지역에서 활동해나간다.
3.7제 투쟁과 대중단체 건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해방 후 어떤 활동을 수행했을까?
해방 직전까지 인구의 절반에 달했던 소작농들은 지주들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었으며 소작농, 자작농들 모두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의해 기아와 빈궁에 허덕이고 있었다.
북한의 경우 1943년 말 총경지 면적 198만 2,342정보 중 지주의 소유지가 115만 4,838정보로 전 경지의 58.2%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지주는 4만 6,134호로 총 농가호수의 4%에 불과했다.
더욱이 대부분의 소작인은 수확량의 50~70%를 소작료로 내고 있어 빈곤을 면치 못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토지개혁에 앞서 우선 1945년 가을에 소작료 3.7제 투쟁을 주도한다.
3.7제 투쟁이란 1944년까지 소작료를 70%까지 내던 것을 30%만 내고 70%를 농사지은 농민이 갖자는 운동을 의미한다.
해방 직후 소작농민들 가운데에는 소작료 감면 요구를 넘어서 토지의 즉각 몰수분배를 요구하는 움직임도 나타났지만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아직 봉건제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농민들이 많다는 것을 고려하여 우선 소작료 3·7제 실시운동을 통해 토지개혁을 하기 위한 소작농민들의 자주의식과 계급의식을 높이고자 하였다.
즉, 3.7제 투쟁과정에서 소작농민들은 지주계급과의 이해대립을 의식하고 점차 명확한 형태로 토지분배를 요구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북지역의 중앙주권기관을 결성(1946년 2월 8일)하고 1946년 3월 초 토지개혁사업에 전체 당의 노력을 투입하게 된다.
다음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건국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노동자, 여성, 청년, 농민들을 규합할 수 있는 대중단체를 건설한다.
조선공산당은 노동자들의 결집을 위해 각 공장, 기업에서의 노동조합을 묶어 세워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조선총국(현 조선직업총동맹)을 결성(45.11.30)하였다.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여성부문 외곽조직으로 북조선여성동맹(현 조선민주여성동맹)을 결성(45.11.18)하였다.
청년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기존에 건설된 공산주의 청년단체들인 공산주의청년동맹을 해체하고 더욱 광범한 청년들을 묶을 수 있는 조선민주주의청년동맹 북조선위원회(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결성(46.1.17)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대중적 농민조직으로서 전조선농민조합총연맹 북조선연맹(현 농업근로자동맹)을 결성(46.1.31)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민주주의 국가 건설에 함께 나설 민족주의자들과의 연계를 중요하게 가져갔다.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위해 조선공산당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민족주의자들, 기독교계 세력이 건설한 조선민주당과 조만식 당수와의 유대를 견지하고자 노력해간다.
첫댓글 2!!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말씀에 공감되고, 기록은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한광복군정부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록도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의 기록이 있는데, 기억에 남는 사건을 시간이 지난 후 단편적으로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일들도 잘 기록되었으면 합니다.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해방후의 대치가 우리를 있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그걸 제대로 알아야 우리가 나갈 길을 찾지 않을까합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듯 합니다. 박헌영의 남로당의 행적이 객관적으로 연구되었면 하는 아쉬움이 아직도 많이있네요.
우리 민초들이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네요
하나 더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비록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하나하나 공부하며
좋은 글을 올리는데 같이 합시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