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여러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학습하던 시절..ㅋ 운동권의 역사에 대해서도 알아보던게 기억나는데. 통 관심이 그땐 없었는지라 잘 안보았는데. 보수진영에서 아주 재밌게 정리를 했군요 ㅎㅎ 한번 읽어보세요...
우리가 알던 많은 사람들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습니다. 시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서울대가 망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군요.. 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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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기획] 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
전경웅 (코나스 칼럼니스트, 군사평론가)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부에는 소위 운동권 출신들이 대거 포진되어있다.
70~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각종 시위를 주도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청와대, 정부기관, 각종위원회소속 공직자로서 국가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권력자로 탈바꿈해 있다.
일반적으로 ‘운동권’ 하면 ‘친북’, ‘반미’, ‘좌익’으로 이미지가 각인되어있다. 대충은 맞는 지적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들 중에는 국제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친북주의자, 주체사상을 재해석한 비친북주체사상파, 반 제국주의자 등으로 다양하게 분파되어있다. 또 최근 발족한 ‘자유주의연대’처럼 과거 운동권 시절을 반성하고 뉴라이트 운동으로 방향을 선회한 486(40대에 접어든 386세태)들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학생시절 그대로 주사파로 남아있는 부류들도 있다.
<코나스>는 권력의 요직에 진입한 운동권들이 과거에 어떤 사건을 주도했으며 사건 관련자들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를 특집기획으로 다루고자 한다. “운동권의 실체를 밝힌다”라는 주제로 코나스 컬럼니스트인 군사평론가 전경웅씨가 10회에 걸쳐 시리즈로 집필할 계획이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 드린다.(편집자 주)
[1편] 들어가기 전에
지금 대한민국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386 운동권이라는 단어다. 이들은 그 참신한 이미지와 젊음이라는 무기로 현 정치권에 파란을 몰고 왔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의 혁명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의 핵심 인재들로써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반면, 지금도 과거의 혁명 사상과 전투적 행동 방식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을 우리는 左派, 혹은 親北 세력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정체성은 그렇게 쉽게 판단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운동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현실은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 조차도 보통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의미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진보라는 단어는 발전한다는 사전적인 개념이 아니라,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사회주의로의 발전을 향한 전진이라는 의미이며, 개혁이라는 것은 사회 구조의 혁명이라는 뜻이다. 또한, 운동권에 대한 정확한 노선 발전의 모습, 구성원들 간의 내부적 갈등과 헤게모니 쟁탈전, 관련 활동 등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다. 그렇기에 이들을 살펴보는 첫 출발점으로 최근 사회적으로 중요한 화두가 되는 386 운동권들과 관련된 핵심적 사건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의 현재 모습을 통해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운동권들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만 현재의 행동들 또한 이해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과거의 주요 사건들과 관련자들의 현재를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써 이해를 돕고자 한다.
사회주의 운동권(이하 운동권)의 역사는 엄밀히 말하면 독립운동 당시였던 1920년대, 사회주의적 단체 조직과 활동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이후, 해방과 더불어 각종 사회주의 단체들이 합쳐 남조선 노동당을 결성하고, 이후의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한국 내에서 이들은 대부분 지하 세력화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전쟁 이후에는 강력한 반공 정책으로 인하여 사회주의 추종 세력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민중당 등을 통해 서서히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전체 좌익 활동 단체를 어우르게 된 전국연합에서 명예 의장을 맡고 있는 자들이나 기타의 각종 연대 고문을 맡고 있는 자들이 바로 이런 민중당 계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자들이라는 점은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추종 세력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이후에는 유신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자극과 조직적인 활동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것과 동시에 서서히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0 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각종 운동권 단체들에 영향력을 끼치지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운동권들은 전체 국민의 정서와 사회적 분위기 등을 감안하여 공개적으로 북한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표현하거나 반미 감정을 가지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5.18을 계기로 하여 점점 바뀌기 시작했고, 1980년대 중반, 북한 통일 전선부에서 운영하는 대남 방송인 “한국민주주의민족전선”의 방송으로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그 이전의 주류 세력들과는 다른 학습 방법과 투쟁 방법을 제시한 세력들이 나타나면서, 전국 학생 운동권을 단번에 장악했던 것이다. 이들이 지금까지도 학생 운동권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권에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체사상파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운동권 내 자료들에서는 1980년 ~ 1983 년을 이념의 성장기, 1984년 ~ 1985년을 이념의 실천 방안 모색과 조직화를 통한 확립기, 1986년 ~ 1987년을 대중투쟁 극대화와 학생조직 활성화, 1988년 ~ 1993 년을 전투적 운동의 쇠멸과 대중혁명역량 강화기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운동권들은 그 조직력, 자금력, 이론적 토대를 강화하게 되었고, 1970년대의 운동권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운동권 역사를 전체적으로 설명하고 정확한 자료를 찾는 것은 필자에게도 솔직히 무리였다. 때문에, 우선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사건들 중에서 일부를 추려내어 해당 사건의 내용과 과정, 관련자들의 당시와 현재 등을 설명하면서 여러분들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려 한다.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자료는 각종 운동권 단체의 세미나 자료 및 강연 자료, 민주화기념사업회, 성공회대 NGO 자료실, 공안자료, 언론보도, 운동권 내부의 학생운동사 관련 글, 각 해당 인물들의 동정 및 홈페이지다.
그리고, 먼저 이 글을 읽기 전에 여러분들께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운동권에는 親北 세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反김정일로써 북한 체제에는 극렬하게 반대하여 외부에서 볼 때에는 반공주의이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민중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세력 또한 상당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사회 곳곳에서 민중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실현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 (konas)
이념의 성장기 : 1980년 ~ 1983년, 上編
이 시기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어진 12.12 사태, “서울역 회군”사건, 5.18 사건 이후, 학생 운동권 뿐만 아니라. 기존의 국민들도 미국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시기이다. 그 이전까지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은 미국이 자국을 제쳐두고서 라도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의 강력한 동맹국이기는 하나, 미국 또한 엄연히 한 국가로써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과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사회의 변화, 국제사회의 냉혹함을 깨닫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때 운동권들은 자신들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환상이 깨진 것을 미국의 탓으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운동권들이 본격적인 반미,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그 기초가 되는 사회주의 학습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1980년 12월 11일 서울大 '반파쇼학우투쟁선언' 배포 사건(일명 霧林 사건)
1980년 5월 서울역 회군 사건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는 기존의 운동권 지도세력에 대한 비판과 이념 투쟁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운동권 지하 조직인 “한국사회연구회”라는 지도세력은 민중역량의 부족을 혁명의 실패 원인으로 꼽은 반면, 반대하는 학생들은 전면적인 사회혁명을 통해 투쟁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노선 차이로 인해 양자 간의 노선 투쟁이 심해졌다. 이 시기에 서울大 교내 학생식당과 도서관 계단에「반파쇼 학우 투쟁」,「반파쇼 투쟁」등의 구호가 적인 유인물을 뿌려져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검거된 김명인이 수사 과정에서 운동권을 지도하는 지하조직이 있다고 진술하면서 대대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경찰은 최초로 조직적인 학생 운동권 활동을 접하게 되었고, 이들이 김명인의 자백 이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으며, 그 수사 과정에서도 전체를 수사하는데 있어 안개와 같이 실체를 알 수 없는 조직이라는 의미로 霧林 사건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사건으로 서울대 교내 이념써클들이 조사를 받고 78명이 연행 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명인(국문 4), 박용훈(동양사 4), 현무환(국문 4), 허헌중(정치 4), 고세현(국사 졸), 남충희(철학 4), 남명수(언어 4), 김희경(교육 4), 윤형기(토목 4), 최영선(사회 4) 등이 구속되었다.
현재 김명인은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고세현은 창작과 비평 사장, 현무환은 웅진 미디어 사장, 최영선은 한겨레신문 교육사업단장, 허헌중은 농어촌사회연구소 부소장, 윤형기는 사설 학원가의 인기 수학강사다. 이 사건은 386 운동권 지하조직이 처음 공개된 사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81년 7월 23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국민주학생연맹 사건(일명 學林 사건)
위의 霧林 사건에서 나타나듯, “서울역 회군”에 반대한 일부 운동권들은 기존의 학생 운동권 지도부의 노선이 너무도 무력하고 현실에 타협한다고 판단, 새로운 노선의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이선근은 흥사단 아카데미의 선배인 이태복과 새로운 종류의 학생운동권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81년 2월 27일 전국민주학생연맹이 탄생했고, 노동운동의 일환으로 전국민주노동자연맹이 결성되었다. 이 조직은 하부 조직이 상부 조직과 중앙 위원회를 알 수 없도록 점 조직 형식을 통해 비밀리에 유지되었으며, 그 근간은 이선근과 이태복이 활동했던 흥사단 아카데미의 전국적 연합인 연합서클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조직화됐다. 그 결과 3 개월 동안에 무려 8 차례의 시위가 일어났고, 조직원이던 김태훈이 서울大 시위 중 투신자살하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한편, 경찰은 이전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의 사회운동세력 조사 보고서를 기초로 이미 내사 하던 중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이태복, 이선근 등이 이 사건들과 연계되었을 것으로 보고 이들을 검거하였고 결국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학생들의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學林 사건으로 불린다. 이후,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부림사건, 아람회 사건, 금강회 사건 등이 발생하는데 이들은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당시 사건 관련 구속자들은 다음과 같다.
이태복(무기징역), 양승조(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신철영(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김철수(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유해우(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김병구(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박태연(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송병춘(징역, 자격정지 2년), 송영인(징역, 자격정지 2년), 노숙영(징역,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4년), 최규엽(징역, 자격정지 2년), 엄주웅(징역, 자격정지 2년), 오상석(징역, 자격정지 2년), 정경연(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선근(징역, 자격정지 7년), 박문식(징역, 자격정지 5년), 박성현(형집행 면제, 소취하), 이덕희(징역, 자격정지 3년), 홍영희(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윤성구(징역, 자격정지 2년), 민병두(징역, 자격정지 2년), 김창기(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최경환(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김진철(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손형민(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이종구(징역 10월)
이들 중 李泰馥(이태복)은 1988년 10월 가석방되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全民聯) 편집실장을 거쳐 DJ 정부 시절 청와대 노동복지수석비서관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현재 국민大와 한서大 초빙 교수를 맡고 있다. 閔丙梪(민병두)는 이 사건 이후에도 1986년 공개 운동 조직인 民民鬪를 지도하던 제헌의회(CA)그룹을 조직하여,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징역 5년을 구형 받았다. 그는 全民聯을 끝으로 운동권 생활을 일단 마무리하고 1991년 문화일보에 입사, 워싱턴 특파원과 문화일보 정치부장을 지냈다. 현재 열린당 기획위원장으로 소위 개혁 입법에 대한 전반적 기획조정을 맡고 있다. 지난 17代 총선 당시 열린당의 전체적인 선거 전략을 이끈 바 있다. 이선근은 이후에도 위장 취업 등을 통해 노동 운동을 했으며, 현재는 민주노동당 경제민주화운동본부장으로 민노당의 부동산 정책을 맡고 있다. 한 편, 박성현은 벤처 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박문식은 공인회계사로 활동 중이다.
1981년 7월 7일 양서협동조합 독서 토론회 사건(일명 釜林 사건)
전국민주학생연맹·전국민주노동연맹 사건(일명 學林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운동권들이 주로 모이던 양서협동조합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여「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제3세계와 종속이론」등을 읽고 토론한 것이 적발됐다. 경찰은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양서협동조합이라는 조직 자체가 사회주의를 동경하며, 반국가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 국가보안법, 집시법, 보안법 위반으로 7월 7일부터 9월 7일 사이에 21명을 구속했다. 이 사건에서 구속된 사람들이 주로 부산大 졸업생과 재학생이어서 釜山의 學林이라는 의미로 「釜林 사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 편, 이 사건과 관련하여 김광일 변호사의 소개로 무료변론을 맡게 된 노무현 대통령이 이호철의 변호인을 맡은 것이 인연이 되어 운동권 변호사가 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관련자는 송병곤(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3년), 이상록(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6년), 고호석(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6년), 노재열(부산大생, 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진걸(부산大생, 징역, 자격정지 1년6월), 전중근(공원, 징역, 자격정지 1년6월), 김재규(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6월), 장상훈(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 박영옥(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 송세경(서울大 졸, 징역, 자격정지 3년), 설동일(서울大, 징역, 자격정지 2년 6월), 이상경(부산大, 징역, 자격정지 2년), 최준영(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2년6월), 윤연희(부산大 졸, 불구속 기소), 주정민(부산大 졸, 징역, 자격정지 2년6월) 이 외에 정귀순(징역 8월, 집유 2년), 오흥민(기소유예), 이호철(징역1년), 설경혜(선고유예), 허진수 등이 있다.
이들 중 김재규는 현재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을 맡고 있고, 노재열은 민노총 산하 금속노조연맹 정책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호철은 배재 여행사를 경영하다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지냈다. 이진걸은 釜山노동단체협의회에서 10 여년간 활동하다 현재는 자영업을 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현재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일부는 노사모 등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konas)
이념의 성장기: 1980년 ~ 1983년, 下編
5.18 이후에도 이어진 운동권 지도부 간의 사상투쟁 등 무기력한 행태에 대해 불만을 느끼던 문부식은 5.18의 책임은 美國에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경고성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5.18 관련으로 수배 중이던 김현장을 원주에서 만나 1980년 12월에 있었던 光州 美 문화원 방화 사건에 대해 듣게 되었다. 문부식은 美國에게는 이와 같은 방식의 경고가 필요하다고 생각, 여자친구 김은숙, 후배 등과 함께 모의, 1982년 3월 18일 釜山 美문화원 건물을 방화하고 유나 백화점 등 도심에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1층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하던 동아大 장덕술이 중화상을 입어 사망하고 김미숙 등 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김현장(무직, 사형), 문부식(고신大 3 제적, 사형), 김은숙(고신大 3 제적, 징역 10년 자격정지 7년), 유승열(부산大 공대 3, 징역 자격정지 7년), 박원식(고신大 의예과 2, 징자 7년), 최충언(고신大 의예과 2, 장7년 단5년 자7년), 이미옥(고신大 의예 2, 징10년 자7년), 최인순(부산大 약대 3, 징10년 자7년), 김지희(釜山여대 3, 징10년 자7년), 박정미(釜山여대 3, 징자 3년 집유 4년), 최기식(신부, 징 3년, 자 2년), 문길환(원주교구 성당관리인, 징자 3년 집유 4년), 김영애(치악산 서점 경영, 징자 3년, 집유 4년), 허진수(기장청년회부회장, 징2년), 김화석(부산大 공대 제적, 징3년), 이창복(교회사회선교협 회계, 징자 1년 집유 2년) 가 검거되었다.
현재 이 사건 관련자들은 대부분 평범한 사회 생활을 하고 있다. 사건의 핵심인 문부식은 당대비평의 주간 겸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이 사건에 대한 후회와 함께 죄책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밝혀 운동권들에게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최충언, 이미옥은 의사가 되었고, 최인순은 약사가 돼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회장을 맡고 있다. 김은숙은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고, 김지희와 박정미는 평범한 가정 주부로 생활하고 있다. 김영애와 김현장은 1984년 결혼해 光州에서 케터링 사업을 하며 살고 있고, 박원석은 개인 사업을, 류승열은 무역업으로 하며 생활하고 있다. 또한, 최기식 신부와 문길환은 원주에서 천주교사회복지재단에서 사회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허진수는 경남도의원을 지냈고,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 관련자들 대부분은 민주화를 지향한다면서, 방화로 무고한 사람의 인명을 빼앗은 점 등으로 인해 당시의 사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1983년 10월 29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民靑聯)-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統聯)사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하 民靑聯)은 1983년 9월 30일 7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되었다. 民靑聯은 기관지 「민주화의 길」,「민중신문」 등의 간행물을 발행하며 선전 활동을 했다. 1984년 6월말 民靑聯을 비롯한 운동권 단체들은「민중민주운동협의회(民民協)」를 결성했다. 民民協은 이후 민주·통일국민회의와 통합하여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民統聯)'을 창립하게 되었다. 1985년 5월 9일 종로2가에서 民靑聯은 청년단체, 전국학생총연합(의장 김민석, 서울大 총학생회장)과 함께 「光州학살정권퇴진을 위한 국민대회」를 주최했다. 이에 당국은 民靑聯을 학생운동과 민추위사건(「깃발)사건)의 배후로 지목하여 간부들을 구속▪수사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로는 김근태(民靑聯 전의장), 이을호(民靑聯 상임위부위원장), 김희상(民靑聯 대변인), 김종복(民靑聯 청년부장), 최민화(民靑聯 부의장), 권형택(民靑聯 사회부장), 연성수(民靑聯 상임위 부위원장), 한경남(民靑聯 의장), 김희택(民靑聯 부의장), 천영초(民靑聯 상임위 위원장), 이범영(民靑聯 집행국장), 박우섭(民靑聯 운영위원장), 윤여연(民靑聯 사무국장), 서원기(民靑聯 집행국장) 등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구속된 김근태 전 의장에 대한 고문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고 이로 인해 민주화 실천가족 운동협의회(민가협)이 생겨나게 된다. 사건의 관련자 중 金槿泰(김근태. 58) 보건복지부 장관은 출소 후 1990년 全民聯 정책기획실장 및 집행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자당 창당반대 시위 주도, 全民聯 결성선언문 작성으로 다시 한 번 국가 보안법, 집회 및 시위 관련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정계에 입문한 후, 새정치 국민회의 부총재, 새천년 민주당 지도위원, 열린당 원내대표를 지냈다. 入閣 前 국가 보안법 폐지운동을 주도했고, 韓總聯 합법화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라크 파병반대에도 서명했다.
2003년 10월에는 『宋斗律(송두율)에 대한 공격은 舊시대적 매카시즘』이라며,『본인의 소원대로 조국에서 후학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金 장관의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숙부 등이 월북했다. 崔圭成(최규성) 열린당 의원도 1986년 서울 民統聯 부의장 시절, 국가 보안법 상 범죄은닉 혐의로 구속,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서울민족민주운동 협의회 공동의장, 全民聯 상임집행위원, 全國聯合 제도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새정치 국민회의 창당 발기인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열린당 사무처장, 국민정치연구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국가 보안법 폐지를 지지하고 있다.
그 이외의 사람들은 민청련이 사라진 현재, 민청련 동지회를 통해 꾸준히 교류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 민청련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는 張永達(장영달) 열우당 의원도 있는데, 장 의원은 국민대 행정학과 출신으로 1974 년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활동 시절, 民靑學聯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 조치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7 년을, 1975 년 긴급 조치법 9 호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부의장 및 상임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民統聯 총무국 국장, 사무국 차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인천 5.3 사건 관련 국가 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평민당 13 대 총선대책본부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평민당 부대변인, 신민당 대회협력위원회 부위원장, 민주당 통일국제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거쳐 국민회의 국회의원, 환경운동연합 국정정책위원회 위원 및 간사, 국민회의 원내 수속부총무, 국민회의 안보특별위원회 위원장, 새천년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 21 세기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의원,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현재 한-일 의원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다. 작년 6월, 북한의 NLL 침범과 관련, “꽃게철 만이라도 NLL 부근에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자.”는 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 이외에도 이해찬 국무총리, 이회창 총재 20만달러 수수설로 구속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은 설훈 前 의원, 김대중 정부에서 청와대 대변인을 한 박선숙, 청와대 춘추관장을 지냈던 최경환,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장준영, 민주평통 사무처장으로 발탁된 김희택, 송두율 초청으로 조사를 받았던 나병식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부이사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조성우 민화협 대표 등이 이 민청련 회원 출신들이다. (konas)
이념의 실천 방안 모색과 조직화를 통한 확립기 : 1984년 ~ 1985년, 上
1984년 9월 17일 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 사건
1984년 9월 17일 서울大 복학생들은 9월 17일 교내에서 80여명의 회원과 50여명의 재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복학생협의회 창립 대회를 열고, 78학번 유시민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후 일련의 민간인 감금고문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감금 기간)
① 임신현 사건(9.17∼18): 평소에 서울大를 선망하던 임신현은 서울大에 재학중인 친구를 만나러 갔으나 친구는 만나지못하고 복학생협의회의 술자리에 우연히 어울리게 된 후, 자신을 '78학번 공법학과 출신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유시민 등이 78학번에는 공법학과가 없었다며 기관 정보원으로 의심, 학생회 사무실로 끌고가 다음날 오후 8시까지 기관 정보원임을 자백하라며 감금▪폭행한 사건이다. 임신현은 학교 직원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형이 고소하겠다고 하자 26시간만에 풀려났다.
② 손형구 사건(9.21∼26): 손형구는 학력고사성적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나 성당 교우들에게 서울大 법대에 입학했다고 속였다가 돌이키지 못하고 가짜 서울大생 행세를 했다. 이후 40여 차례나 서울大에 출입했고 사건당일에도 법대 앞에서 배회했다 손형구는 9월21일 오후 1시쯤 법대 사무실 앞 의자에 앉아 있다가 김진욱 등 2~3명으로부터 신분을 조사 당하고 서울大 학생이 아님이 드러나자 학도호국단 사무실로 끌려가 감금당했다. 유시민, 백태웅, 백기영, 윤오중, 오재영, 김도인 등으로부터 기관 정보원 추궁 받았다. 손형구가 기관 정보원이라는 명확한 물증이 발견되지 않자, 유시민, 백태웅 등은 신림동 소재 여관으로 자리를 옮겨 손형구를 감금했다가 다시 총학생회장실에 감금하는 등 약 5일 동안 불법 감금했다. 결국, 학교 직원의 연락을 받고 어머니와 삼촌이 왔으나, 석방해 달라는 요청이 거절당했다. 이에 가족들은 학생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구출해 냈다. 이후 손형구는 강박증세로 인한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③ 전기동 사건(9.26-27): 전기동은 1982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서울법대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한 후 방송통신大에 입학했다. 그 해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위해, 도움을 받던 교수로부터 고시공부에 필요한 참고도서를 추천 받고자 서울大에 가끔 출입해오고 있었다. 전기동은 26일 오후 4시30분쯤 독도 문제와 관련된 국제법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서울大에 잠시 들어갔다가 『잠깐 볼 일 있다』는 학생 7~8명에 의해 학생회관 3층 총학생회장실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유시민, 백태웅, 윤오중 군등이 전氏의 소지품을 뒤져 주민등록증과 방송통신大학증을 확인했다. 학생들은 『너 소속이 어디냐, 기관원이지』하며 추궁했고, 전氏가 계속 『방송통신大학생이다, 왜그러냐?』고 하자 『안되겠다』 면서 오후 5시쯤 총학생회장실과 같은 층에 있는 서클 연합회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이곳에서 4~6명의 학생이 플래카드로 사용했던 나일론천을 찢어 전氏의 눈을 가리고 의자에 앉혀 양손을 의자 뒤로 묶은 다음 구타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전氏가 자백을 완강히 거부하자 학생들은 다시 전氏를 화장실로 끌고 가 자갈과 숟가락으로 입을 벌려 주전자로 입과 코에 물을 퍼붓고 세면대 물통에 얼굴을 쳐박아 숨을 못 쉬게 하는 등 고문을 계속하였다. 그래도 자백을 하지 않자 복도로 끌어내어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힌 뒤 양 무릎 안쪽에 각목을 끼워놓고 위에서 밟는 등 고문을 계속했다. 다음 날인 27일 밤 10시까지 29시간 반 동안 이 같은 감금 폭행을 해 전氏가 실신상태에 빠지자 학생들은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학교직원들에게 연락, 직원3명이 들것으로 전氏를 앰뷸런스에 실어 관악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 측은 혈변 증세로 전氏의 상태가 악화되자 28일 오후 서울大병원으로 옮겼다.
④ 정용범 사건(9.26-27): 정용범은 7급행정직 공무원시험준비를 위해 서울大에 출입하면서 공기 좋고 조용한 연못 앞에서 수험공부를 했으며, 지난7월부터 3차례정도 서울大에 출입했다. 9월26일 오후 3시 30분쯤 정氏가 서울大 연못 앞 벤치에서 수험서를 보고 있는데 학생2명이 다가와 『여기 어떻게 왔느냐, 잠깐 좀 가자』면서 학생회관 3층에 있는 복학생협의회 사무실로 끌고 갔다. 서울大 학생이 아님을 안 유시민, 백태웅 등 학생 5~6명은 광목천으로 눈을 가리고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벗기고 기관 정보원이 아니냐고 추궁했다. 학생들은 다시 정용범에게 학생훈련복을 입혀 손을 뒤로 묶어 사무실 바닥에 꿇어 앉히고 자백하라며 주먹과 발길질로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가슴 등 다리를 구타하였다. 유시민 등은 이곳에서 폭행을 지시한 후 27일 오전 5시30분쯤 철야 조사한 것을 확인하는 등 감금폭행을 주도했으나 정보원이라는 사실이 끝내 확인되지 않자 27일 낮 12시30분쯤 정氏를 버스정류장까지 안내해 풀어주게 했다.
이 사건으로 유시민(경제 4, 복학생협의회장, 징역 1년 6월), 백태웅(공법 4, 학도호국단장, 징역 1년 6월), 윤호중(철학 4, 징역 1년 6월), 오재영(인류 4, 징역 2년), 신윤남(인문계 1년 복학생, 유치장에서 정신이상으로 국립정신병원으로 이감) 등이 폭력 혐의로 구속되었고, 단순 참가자들은 대부분 공소 외 혐의로 훈방되었다.
이 사건의 관련자인 尹昊重(윤호중)은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사건 이후, 평화민주당 기획조정실 기획위원, 한광옥 의원 비서관 등을 거쳐 국민회의 부대변인, 대통령비서실 민정국장, 대통령 비서실 정책기획국장을 지냈다. 또한, 柳時敏(유시민)도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졸업 후「창작과 비평」誌에 소설 『달』로 데뷔했으며, 李海瓚(이해찬) 의원 보좌관, 한겨레신문 독일통신원, 성공회大 교양학부 겸임교수, MBC 100 분 토론 진행자,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개혁국민정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현재 열우당 제4정책 조정 위원장을 맡고 있다. 현재 그의 친누나인 유시춘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또 다른 관련자인 백태웅은 이후에도 社勞盟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었으나, 1999년 사면복권되어 유학,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조교수를 하다가, 현재는 국제 변호사로 국내에서도 활동 중이다. 한 편, 이 사건의 피해자들 중 전기동을 제외하고는 대인기피증 등 극심한 후유증을 보이고 있다. 사건 피해자 중 전기동은 유시민, 윤호중 두 의원의 총선 자료집 중에서 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 사건을 서울大 프락치 사건이라 부르고 민주화 운동이라고 거짓말 한 것을 고소했고, 이에 검찰은 유시민 의원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기소, 벌금 100 만원을 구형하고, 재판을 진행 중이다.
1985년 5월 23일 서울美문화원점거농성사건
▲ 1982년 3월18일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부산 미 문화원에서 소방대원들이 불을 끄고 있다. 성조기가 건물 위 오른쪽 화염 속에서 펄럭이는 모습이 보인다. 80년대 전국의 미 문화원에서는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추궁하는 재야와 운동권 학생들의 반미 시위가 잇따랐다.
운동권은 원래 美國이 자신들의 행위를 무조건 지지할 것이라고 기대하다 1980년 5.18 이후 美國이 적극적인 개입이나 지원을 하지 않자, 美國은 군사정권을 지원하는 세력이자, 민주화의 적대 세력이라고 단정, 反美 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1980년 12월 9일 光州 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3월 18일 釜山美문화원 방화사건, 1982년 4월 22일 강원대생들의 성조기소각사건, 1983년 9월 22일 대구美문화원앞 폭발사건, 1985년 4월 9일 釜山 美영사관투석사건과 같은 일련의 反美활동으로 이어지고, 그 맥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全學聯의 결성 이후, 1985년 5월 23일 서울大, 고려大생 등 대학생 73명이 서울 중구 소재 美國문화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3일간 철야농성을 벌인 사건으로 19명이 구속기소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全學聯과 그 지하지도조직인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이른바「三民鬪(삼민투)」라는 학생운동조직이 여론에 관심거리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함운경(서울大 三民鬪위원장) 등 25명이 구속되고 43명이 구류 처분을 받았으며, 5명은 훈방조치됐다.
이후 사건의 주동자인 함운경은 全國聯合 중앙위원 및 정치위원,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기획이사 등을 지냈으며, 1995년 부여간첩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지난 17代 총선 당시 군산 지역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했고, 현재는 열우당 산하 재단인 열린정책연구원 교육연수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許仁會(허인회)는 총선 낙선 이후 열우당 청년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鄭泰根(정태근)은 민가협 간사 등을 거쳐 한나라당 성북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고 있다. 高鎭和(고진화) 한나라당 의원은 全民聯 기획위원, 민주연합청년회 회장 활동을 하다 민주당 기획조정실 전문위원, 민주당 중앙위원, 李富榮(이부영) 민주당 최고위원 보좌관을 거쳐 17代 총선에서 당선, 한나라당 院內 副대표까지 맡았다가 탈당, 현재 열우당 의장으로 있다. 신정훈 現 나주 시장도 三民鬪 위원 출신이다. 그 외 장영승은 벤처기업 레츠 사장으로 지내고 있으며, 이강백은 시민단체「아름다운 가게」의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한편, 삼민투와 관련해서는, 姜琪正(강기정) 열우당 의원도 1985 년 6 월, 전남大 민중-민주-민족 투쟁위원회(이하 三民鬪) 위원장으로 4ㆍ19 기념 시위 관련, 폭력 시위와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7 년, 자격정지 5 년을 선고 받았었다. 이후, 빛고을 새날청년회 회장, 북한동포돕기 범시민 운동본부 사무처장, 민주개혁 국민연합 광주본부 사무국장, 5ㆍ18 시민봉사단 「오월의 빛」단장, 아파트 공동체 연구센터 소장, 「바른 정치와 통일을 여는 시민의 힘」대표를 거쳤다. 17代 총선에서 열우당으로 光州 북구 甲에서 당선되었다. (konas)
이념의 실천 방안 모색과 조직화를 통한 확립기: 1984년 ~ 1985년, 下
1985년 6월 1일 구로지역 연대 파업 투쟁
1980년대 중반 구로지역은 대부분 수출을 위한 경공업제품을 생산하던 곳이다.
이 지역 기업들의 대부분은 당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관리직과의 차별 대우 등이 존재하였다.
이에 대해 정부는 월 10만원 미만의 저임금 해소를 위해 부당한 대우를 하는 기업에 대해 강력한 단속을 펴겠다고 밝혔지만, 이들 사업장의 급여 수준은 정상 근무 시 월 10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환경이 사회혁명에 필요한 노동자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좋은 환경임을 인식한 운동권 지도부는 노동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소위 위장취업을 통해 운동권 출신들이 노동자로 들어가 노조 결성을 시도했다.
참고로 현 정치권에는 이목희 열우당 의원, 노영민 열우당 의원, 백원우 열우당 의원, 송영길 열우당 의원, 신계륜 열우당 의원, 우원식 열우당 의원, 이화영 열우당 의원, 심상정 민노당 의원, 노회찬 민노당 의원, 조승수 민노당 의원 등이 직업으로써의 노동이 아닌 사회운동으로써의 노동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을 개선할 의사도 노력도 없었던, 구시대적 기업정신을 지닌 기업들이 노조 활동을 거부하고,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적 사고를 주입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불만은 급속히 증가하였고, 동시다발적으로 노조가 결성되는데 그 대표적인 시기가 84년 여름이다. 이들은 비슷한 근로조건과 노조결성 시기, 노동운동이 유행하면서 유입된 학생출신의 위장취업자 증가 등으로 인해 노조 결성은 물론, 노조 간의 교류와 연대를 강화해 왔으며 85년에 임금인상을 위한다는 핑계로 최초의 연대 파업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1985년 6월 22일 오전 11시 경찰은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 김준용, 사무국장 강명자, 여성부장 추재숙을 임금인상 투쟁 때 파업농성을 주도하며 노동쟁의조정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하고 조합간부 8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함께 연대했던 노조들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위원장 연행 소식을 전해 듣고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즉각 작업을 중단한 후 1백 여 명이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 취소를 요구하는 농성을 전개하였다. 다음 날인 6월 23일 대우어패럴 외에 가리봉전자, 효성물산, 선일섬유, 청계피복 노조 위원장들이 모여 24일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6월 24일 오전 8시 경 대우어패럴 노동자 350여명이 파업을 시작한 것을 신호로 오후 2시 효성물산 노조원 4백 여명이 파업에 동참하였고 같은 시간 가리봉 전자 노조원 5백 여명, 선일섬유 노조원 70여 명 등도 파업에 돌입하였다. 6월 25일에는 남성전기 조합원 3백 여명이 오후에 농성을 벌이고 세진 전자 노조원 250여 명, 룸코리아 1백 여명이 지지 철야농성을 하는 등 연대투쟁은 7개 업체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학생 및 재야의 지지도 이어졌다.
즉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등 22개 운동권 단체에서 지지 농성이 있었고 6월 26일 오후에는 서울대생 2명이 '구속노동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우어패럴 맞은 편 협동봉제 공장에 올라가 지지 구호를 외치는 것을 비롯해 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이어진 것이다.
6월 28일에는 부흥사노조원 120여명이 연대파업에 돌입했으나 강제해산됐다. 한편 6월 28일에는 대학생 18명이 농성장에 합류하는 등 농성에 대한 지원이 거듭되자 마침내 6월 29일 회사와 경찰이 대우어패럴 농성장에 투입되어 농성을 강제해산시킴으로써 사건은 막을 내렸다.
당시 이 사건으로 김준용 등 노동자 다수와 노철호 등 학생 다수가 구속되었다. 한 편, 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現 민노당 의원인 沈相貞(심상정)이다. 심 의원은 서울대 역사교육과 출신으로 서울대 여학생회 결성을 주도했다.
1980년부터 구로 공단에 취업, 노조 결성 및 쟁의 혐의로 수배를 받았으며, 1985년구로동맹 파업과 관련하여 쟁의조정법위반, 제3자금지법위반, 사문서위조, 방화, 폭력, 집단방화, 집단폭력사주, 집시법위반, 국가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후, 서울노동운동연합중앙위원장, 전국노조협의회 쟁의국장 및 조직국장, 민주금속연맹 사무처장을 거쳐 민주노동당 당대회 부의장, 민주노동당 대의원 겸 중앙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현재 민주노동당 의원단 수석 부대표를 맡고 있으며 주로 당의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있다.
1985년 7월 20일 서울大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깃발사건)
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민추위) 사건은 1985년 10월 29일 검찰이 서울大 학생운동의 비공개 지도조직인 민추위를 이적단체로 규정,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3명을 불구속 입건, 17명을 수배한 사건으로 「깃발」 사건으로 불린다.
「깃발」은 운동권 내부의 운동 노선에 대한 평가와 반대파 운동권들과의 이념 논쟁을 위한 홍보책자였다. 「깃발」은 학생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에 따라 당국은 「깃발」수사전담반을 설치하는 한편 서울 美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이 발생하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깃발 전담반이 설치된 후 10개월 만에 주요간부가 체포되고 다시 한달 반쯤 후에 지도선이 체포되었다.
민추위는 노동문제투쟁의원회, 민주화투쟁위원회, 홍보위원회, 대학간연락책등 4개의 산하 기구를 두고 각 대학의 三民鬪委 결성, 서울美문화원 점거농성등을 주도하는 한편,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대우어패럴 동조시위 등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검찰로부터「자생적 사회주의자」들로 규정된 이 조직은 한국사회변혁에 대한 사회구성체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박문식(철학4), 문용식(국사 3휴), 안병룡(국사4휴), 황인상(무역졸), 이종원(지리4), 민관홍(인류4), 윤성주(동양사 3년), 이종원(지리4휴학), 조경애(의류과 졸), 이홍균(인류4년), 성명섭(공법과졸), 김태룡(경영4년), 민병렬(사회4), 윤성주(동양사3), 이홍구(공법3), 김희갑(동양사2), 김재광(영어교육4), 박충렬(법학졸), 장혜경(중문4), 김찬(국사3 제적) 김신훤((정치4), 유경완(무역4), 김형섭(농대졸), 석미주(종교3 제적), 황경희(경북대 불문과 졸) 등이 구속되었고, 김근태 전民靑聯 의장이 문용식에게 민족민주혁명 이념교양을 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 중 박문식은 공인회계사와 21세기 프론티어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황인상은 변호사로, 문용식은 나우콤의 사장과 김근태 계열과 관련있는 한반도 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1985년 11월 20일 제헌의회(Constituent Assembly: CA)그룹사건
1986년 5월을 전후하여 제헌의회 그룹(CA : Constituent Assembly)은 「파쇼하의 개헌반대,혁명으로 제헌의회」라는 표어를 내걸고 그 모습을 드러냈다. CA 그룹은 「헌법제정민중의회」소집투쟁을 주장하면서, 산하 학생조직으로 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이하 民民鬪)계열을 지도했다.
民民鬪계열은 1986년 5월 전국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투쟁위원회(全民學聯)을 결성하여 1986년 여름 방학을 전후하여 신민당사농성투쟁, 성남공단지역 선전작업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CA그룹은 한국 사회를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간접통치방식 사회로 간주했고, 종속성을 특수성으로 하면서 자본주의의 압축적 발전의 길을 걸어온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규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최민(서울大 78, 징역 7년), 윤성구(서울大 78, 징역 6년), 민병두(성균관大 78, 징역 5년), 김철수(서울大 75, 징역 5년), 김성식(서울大77, 징역 5년), 유강근(서울大79, 징역 4년), 이선희(서울大 79, 징역 3년), 강석령(서울大79, 징역 5년), 김현호(성균관大79, 징역 7년), 김찬(성균관大77, 징역 2년), 한승권(서울大81, 징역 1년 6월), 이호균(서울大 78, 징역 2년), 차호정(서울大 79, 징역 1년 6월), 김옥수(한국한국外大 81, 집행유예), 하윤숙(서울大 79, 집행유예) 등이 구속되었다. 이들 중 CA 그룹의 핵심이론가라는 최민은 현재 열린당 중앙위원이며 장애인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민병두는 열린당 의원이자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學林 사건 참조) (konas)
대중투쟁 극대화와 학생조직 활성화 시기: 1986년 ~ 1987년
1986년 4월 民民鬪, 自民鬪 사건
民民鬪는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1985년 全學聯, 三民鬪사건으로 학생운동 조직이 붕괴된 후 1986년 3월 서울大 인문대를 중심으로 결성되기 시작하여 성균관大, 연세大 등 다수의 대학으로 파급되었다.
독재타도와 비타협 원칙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自民鬪와 차이점이 있다. 급진적 사회주의 계열 노선이다. 「민족민주선언」을 기관지로 발간하였다.
自民鬪는 反美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의 약칭으로 民民鬪와 거의 동시에 표면화된 학생운동조직이다.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노선(NLPDR), 즉, 主體思想을 받아들인 점이 民民鬪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기관지「해방선언」을 발간했다, 1986년 4월 10일 서울大 사회대에서 결성식을 시발로 각 대학으로 확산되었으며, 처음에는 야당을 배격했지만 「5.3인천사태」이후, 개헌투쟁으로 급선회했다.
이후 학생운동에서 自民鬪는 공식적으로는 없어졌지만 이들의 추종 세력이 현재까지 운동권의 주류로 자리잡고있다. 특히, 自民鬪는 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받아 들였다는 점에서 운동권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소위 말하는 主思派 계열(일명 NL 계열)인 것이다. 이 사건의 관련자는 안상종(연대 民民鬪위원장)등 상당수로 1986년도 학생 운동권 구속자의 대부분이 自民鬪, 民民鬪와 연관되어 있다고 보면 맞다.
1986년 5월 3일 5.3 인천사태
▲ 1986년 5월 3일 야당인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추진위 경기, 인천지부 결성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재야인사, 학생,노동자다ㅡ의 격렬한 시위와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무산됐다. 사진은 민통련이 이날 신민당의 행사장소인 인천시민회과 앞에서 '민주화촉진 인천시민대회'를 열고 있는 모습
1986년 5월 3일 신민당의 개헌추진위 인천·경기지부 결성균관大회를 계기로 인천 주안동 시민회관 앞에 학생과 재야단체, 노동자 등 운동권 1만5천여명이 집회를 열고 시위를 벌인 사건. 이들은 '미제축출 파쇼타도'를 내걸고 개헌을 위한 여야간의 타협에 반대했다.
이 사건으로 제성민(연대 3제적, 징역 1년), 우제구(民統聯회원, 징역 1년), 윤영민(民統聯회원, 징역 1년), 서동석(民佛聯 회원, 징역 1년), 이종태(교원대조교, 징역 1년 6월) , 김희란(국민大3, 징역 1년 6월), 송대헌(民統聯회원, 징역 1년 6월), 이재영(인천대3, 징역 1년 6월), 한의석(서울大2, 징역 1년 6월), 민춘기(인하大2, 징역 1년 6월), 강경문(서울大4, 징역 1년 6월), 박병무(이천전기해고근로자, 징역 1년 6월), 김동범(성균관大4제적, 징역 1년 6월), 이병철(무직, 징역 1년 6월), 이헌필(성균관大제적,民靑聯회원, 징역 1년), 김경숙(무직, 징역 1년), 조은옥(서울신학大3자퇴, 징역 1년), 주성종(명지大4, 징역 1년), 국승보(운전사, 징역 1년), 이용주(인하大 무역3제적, 징역 1년), 이상명(인하大 철학3 휴학, 징역 1년), 이수영(연세大법학4 휴학, 징역 1년), 김창식(무직, 징역 1년), 김윤기(국민大 무역4, 징역 1년), 박종문(인하大영문4, 징역 1년), 이승민(서울大의대1휴학, 징역 1년), 심영찬(징역 1년), 강권구(동양피스톤해고, 징역 1년), 이상명(인하大4, 징역 1년), 윤택구(연세大3 제적, 징역 1년), 오희숙(연세大교육학4, 징역 1년), 김천석(연세大화공4, 징역 1년), 이건준(서울大경영3, 징역 1년) 등이 구속됐다.
한 편, 金敎興(김교흥) 열우당 의원도 당시 인천大 총학생 회장으로써 5ㆍ3 인천사태에 참여,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 년, 집행유예 2 년을 선고 받고 풀려났다. 졸업 이후에는 한국여론정치연구소, 제일리서치연구소 등 정치 컨설팅 활동과 국회의원 보좌관 생활을 하다가 산업자원부 장관의 추천으로 중소기업연구원장을 지냈다.
1997년 국민회의에 入黨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수배를 받았던 李光喆(이광철)열우당 의원은 이 사건 이전에도 1980년 5월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 회의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82년에는 반정부 유인물을 배포하다 체포되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3 년을 선고 받았다. 1985년 졸업 후, 民統聯 지역운동협의회대표, 전북민족민주운동연합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5ㆍ18 관련 강연회에 주로 참석했다. 전주 시민회 대표, 시민행동21 공동대표, 5ㆍ18 기념재단 이사 등을 지냈다.
2002년 개혁국민정당 전북추진위 실행위원장을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하였다. 현재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열우당 전북 본부장, 전북발전 시민포럼 대표 등을 맡고 있다. 張永達(장영달) 열우당 의원도 民統聯 총무국장 시절, 이 사건으로 국가 보안법 및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張의원은 그 이외에도 1974 년 한국기독학생회 총연맹 활동 시절, 民靑學聯 사건에 연루되어 긴급 조치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7 년을, 1975 년 긴급 조치법 9 호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추가 선고 받았었다.
출소 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民靑聯) 부의장 및 상임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평민당 13 대 총선대책본부 기획조정실 실장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국민회의 원내 수속부총무,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한-일 의원연맹 부회장을 맡고 있다.
작년 6월, 북한의 NLL 침범 당시, 『꽃게철 만이라도 NLL 부근에 공동어로수역을 설정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 韓總聯 합법화를 지지하는 서명,『미국의 對北강경발언이 남북화해 방해』성명서에 서명했다.
李浩雄(이호웅) 열우당 의원 또한, 民統聯 상임 집행위원,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의장을 하면서 5ㆍ3 인천 시위 주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 받았다. 그 후 民統聯 상임 집행위원, 인천지역 민족민주운동연합 의장, 全民聯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91년 민주당 정무위원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다. 야권통합추진위 실무협상대표, 인천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국민회의 당무위원, 새천년 민주당 총재특보 등을 지냈다. 현재 열우당 중앙위원을 맡고 있다.
1986년 7월 1일 고려大 애국학생회
애국학생회는 1986년에 고려大 학생들이 결성한 主體思想 계열의 지하학생운동단체이다. 당시 운동권은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심각한 대립과 갈등을 빚었다. 이러한 대립을 중단하고 단일 지하 조직을 만든 것이 애국학생회였다. 그리고 이 조직을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 反美청년회이다. 고려大는 애국학생회, 서울大는 구국학생연맹(救學聯), 연세大는 반제학생동맹 등이 결성됐으며 산하에는 무력투쟁을 위한 인민 무력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 단체는 1986년 애국학생투쟁총연합회의 건국大 발대식 사건을 배후조종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1987년 5월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의해 26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혁(고려大 82), 이종민(고려大 83), 박정호(고려大 83), 서민석(고려大 83), 안희정(고려大 83)등이 구속됐다. 이 중 조혁은 수배 중인 상황에서도 反美청년회를 결성하고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KAL 858기 폭파 사건이 안기부에 의한 조작이라는 說 을 퍼뜨리기도 했다.
현재는 主體思想 을 비판하며, 北韓탈북자지원 사업등 北韓민주화네트워크를 통해 활동하고 있다. 한편, 안희정은 1987년에도 反美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며,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을 지내다 노무현 대선캠프에 합류,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불법대선자금 수사에서 뇌물알선수재 혐의로 징역 1년이 선고되어 올해 12월 출소 예정이다.
안희정은 2003년 2월 17일의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主體思想은 인간이 되라는 이론적 장점이 있다』며 主體思想과의 공식적 결별을 밝히지 않고 있다.
1986년 9월 17일 구국학생연맹(救學聯) 사건
구국학생연맹(이하 救學聯)은 「단재사상연구회(이하 단사그룹)」에서 시작되었다. 단사그룹은 최초로 이념투쟁을 표방하였으며, 서울大 학생운동의 기본틀인 이념써클체계의 즉각적 해체, 종파주의의 척결, 학번제의 철폐 및 운동조직에 있어 권위주의적 잔재의 해소를 주장하면서 이에 대안으로 통일된 학생운동조직의 건설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1986년 3월 29일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했다.
救學聯의 활동은 1986년 4월 10일 自民鬪가 발족되면서 본격화되었다. 救學聯은 主體思想에 기초하여 투쟁의 영역을 反美자주화투쟁, 반파쇼민주화투쟁, 조국통일촉진투쟁으로 나누고, 전국적인 이념서클의 조직화를 위해 학생운동연합체를 만들었으며, 10월 28일 건국大에서 벌어진 「전국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이하 愛學鬪련)」발대식에서 당국의 진압·검거로 救學聯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 사건의 관련자들이 그 유명한 김영환, 정대화, 하영옥 등이다. 김영환은 강철 서신이라는 글로 6개월 만에 운동권을 모두 장악했으며, 主體思想을 운동권의 핵심 이념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김영환은 이후 민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후 자신의 조직원들과 함께 전향하여 현재는 계간지 시대정신을 통해 北韓민주화와 탈북자 지원활동을 펴고 있다. 한 편, 김영환의 전향을 변절이라며 폄하했던 하영옥은 민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현재 복역 중이다.
1986년 10월 28일 건국大점거농성사건(일명 건국大 愛學鬪聯 사건)
1986년 10월 28일 서울大, 고려大, 연세大, 등 전국 26개 대학교 학생 2천여명이 건국大에 모여 전국 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愛學鬪)발대식을 벌이다 교내로 진입한 3천여명의 경찰에 밀려 본관, 사회과학관 등 5개 건물을 점거하고 4일 동안 철야농성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천5백25명이 연행되고 이들중 1천2백87명이 구속되었으며 연세대 반제학생연맹, 서울대 구국학생연맹, 고려대 애국학생회 등도 함께 일망타진된다. 그러나, 愛學鬪는 한국 사회를 미제식민지반봉건사회로 보는 主體思想을 그대로 차용하여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폭력적 방식의 투쟁으로 인해 운동권이 대중적 지지를 잃는 시초가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에 全大協 등과 같은 전국적 조직의 시초가 됐다. (konas)
전투적 운동의 쇠멸과 대중혁명역량 강화기: 1988년 ~ 1993 년, 上
1988년 10월 1일 反美청년회 사건
1987년 6월 이후 1987년 8월 충남大에서 전국적 총학생회의 협의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이하 全大協)이 전국 95개 대학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탄생하게 된다.
全大協은 대표자 협의체 조직이라고 선전했으나, 그 내부에는 主體思想을 신봉하는 정치적 노선과 흐름이 존재했는데 이를 주도한 것이 反美청년회였다. 反美청년회의 전신은 「전국사상운동추진위원회」로 1986년 10월부터 전국적인 학생운동 통일적인 지도부를 형성하기 위하여 활동을 하였으며, 全大協 결성을 조종한 조직이다.
反美청년회는 1986년 ~ 1987년까지는 직선제, 민주헌법개정, 美國의 光州학살에 대한 책임규명등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88년 이후에는 통일운동을 벌였다. 反美 청년회는 1988년 3월 조혁(고려大 82, 노문과), 장원섭(고려大 농대 84), 양홍관(동국大 81), 안희정(고려大 철학 83), 안내상(연대 84), 이철우(시립대 83), 김철(연대 법대 83), 서민석(고려大 83), 한기원(연대 84), 김태원(고려大 법학 83)등 12명이 체포되고 1990년 2월에 해산됐다.
당시 사건 연루자였던 김기식은 현재 참여연대의 사무총장으로써 실질적인 참여연대의 수장 역할을 맡으면서 국가보안법 전면철폐, 주한미군 즉각 철수 등의 이슈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으며, 안희정은 고려大 애국학생회와도 연관이 있고(고려大 애국학생회 사건 참조) 李哲禹(이철우)는 1992년에도 민족해방혁명 노선을 추종하는 민족해방 애국전선(일명 남조선 노동당 사건)활동을 한 것이 적발되어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포천문인협회 사무국장, 한탄강 네트워크 사무처장, 북부비전 21 공동대표, 민주개혁국민연합 운영위원 등 시민단체 활동과 행정 자치부 지방분권위원회 자문위원,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거쳐 현재 열우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250 만원을 구형 받았다. 반면, 의장이었던 조혁은 현재는 北韓민주화네트워크에서 다른 주체사상파 출신들과 함께 北韓민주화와 탈북자 지원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9년 5월 3일 釜山 동의大 참사
1989년 5월 1일 동의大에서는 전날 집회의 원천봉쇄에 대한 항의로 가야파출소로 몰려가 화염병 투척을 했고, 가야파출소에서는 여기에 맞서 공포탄을 발사했다. 학생들은 이에 항의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항의 농성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경찰과 학생의 충돌 과정에서 경찰이 학생들에게 인질로 잡히게 되었다.
5월 3일 연행된 학생과 경찰의 교환협상이 결렬되고 나서 새벽 5시경 경찰은 도서관을 포위하고 최루탄을 쏘며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에 학생들이 옥상으로 대피하면서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 이 사고로 경찰 7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이후 학생측은 아침 7시경 인질이 된 경찰들을 경찰에게 넘기고 자진 연행됨으로써 동의大 농성은 일단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의大생 71명이 살인▪방화치사상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31명은 방화치사상 혐의로 징역 2년에서 무기징역에 이르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그 외 40명은 집행유예 또는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관련 학생 81명이 제적됐다. 한 편, 화염병을 던진 윤창호(무기징역), 오태봉(총학생회 기획부장, 징역 15년) 등은 이후 사면복권되었으며, 2002년 4월 30일에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의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돼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89년 7월 1일 임수경, 문규현 密入北 사건
1989년 6월 30일 全大協 대표 林琇卿(임수경, 한국外大 불어과 4)이 密入北하여, 평양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뒤 8월 15일 돌아온 사건이다. 정부는 원래 평양축전 참가를 허용하려 했으나, 文益煥(문익환)목사의 密入北사건을 계기로 참가봉쇄 쪽으로 태도를 바꾸었고, 이에 全大協은 한양大학교에서 「평양축전 참관을 위한 판문점돌파출정식」을 거행하고 林琇卿을 대표로 뽑아 독일을 경유해 평양에 파견했다. 林琇卿은 「통일의 꽃」으로 北韓의 환영을 받으며 北韓학생위원회위원장과 남북청년학생공동선언문을 발표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했다.
축전이 끝난 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파견한 文奎鉉(문규현) 신부와 함께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다. 林琇卿과 文奎鉉 신부는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92년 성탄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당시 全大協 의장이었던 任鍾晳(임종석)은 이 사건으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 소장, 全大協 동우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1999년 새천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했다.
새천년 민주당 당무위원, 同 청년 위원장, 대표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盧武鉉 후보 선대委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盧武鉉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 民和協 회장,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본부장, 同 공동 대변인, 원내 부대표 등을 맡고 있다. 宋斗律(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 위원으로 宋斗律 입국을 위해 활동했다. 韓總聯 합법화 성명서 서명, 이라크 파병반대, 『美國의 對北강경발언이 남북화해방해하고 있다』는 성명서 등에 서명했다.
여중생 사망 사건 때에는 부시 美 대통령에게 사과 요구를 하기도 했다. 한편, 林琇卿은 한국외大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을 마치고, 어린이를 위한 통일 관련 서적을 내기도 했다.
1990년 11월 19일 ~ 현재, 凡民聯, 凡靑學聯 관련 통일운동 구속사건
凡民聯은 1988년 남한의 운동권 인사의 제의와 北韓조국통일위원회의 화답으로 北韓, 남한, 해외동포로 구성되는 통합단체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北韓의 대남사업에 활용되는 전위조직에 불과하다. 이들은 1989년 문익환, 임수경, 문규현의 密入北으로 고무되어 1990년 8월 15일 판문점에서 남측 대표로 황석영(소설가)이 참가한 가운데 첫 출범식을 가졌다.
이들은 1990년대 들어 운동권의 투쟁 노선이 민주화에서 통일 운동으로 변화함에 따라 맞춰진 조직이며, 이런 이유로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자가 대단히 많다. 한편, 凡靑學聯은 凡民聯의 청년단체로 남측 대표는 韓總聯이 맡고 있다. 이 단체와 관련되어 구속된 사람은 다음과 같다.
조용술(목사, 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공동본부장),
이해학(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조성우(범민족대회 사무처장),
이창복(凡民聯실행위원장, 全民聯 공동의장, 全國聯合 상임의장),
김희택(凡民聯 준비위원, 全民聯 사무처장),
권형택(凡民聯 사무처 차장),
김희선(서울민협 의장),
김종식(全大協의장, 한양大 총학생회장),
한철수(全大協산하 학추위 위원장, 경희大 총학생회장),
허동준(중앙大, 全大協 대변인),
하태경(서울大, 서총련 조통위 연대사업담당),
손성표(고려大 서총련 사무국계열부문 담당),
김시몽(목포대 전 총학생회장)
신현욱(한양大全大協의장 수행비서),
박순경(목원대 명예교수, 凡民聯 남측본부 결성준비위 부의원장),
전창일(凡民聯 남측본부 조직위원),
홍근수(향린교회 목사),
김재용(한양大 총학생회장, 韓總聯 의장),
김병삼(韓總聯 조국통일위원장, 연세大 총학생회장),
황석영(소설가),
허현준(凡靑學聯 부의장, 전북大 회계4),
김세원(凡民聯 남측본부 光州전남연합 창립준비위원장),
오병윤(민주주의 민족통일 光州전남연합 사무처장),
김양무(凡民聯 중앙정책실장),
강희남(凡民聯 의장),
이종린(凡民聯 부의장),
전창일(凡民聯 부의장),
강순정(凡民聯 부의장),
안희만(凡民聯 간사),
황인성(凡民聯 집행위원장, 全國聯合 상임집행위원),
조성우(민족회의 정책위원장),
강재우 (凡民聯 남측본부 의장),
신창균(凡民聯 남측본부 상임고문),
유근삼(凡民聯 남측본부 대구경북연합의장),
정민주(凡靑學聯 남측대표, 인천대 건축3),
이혜정(凡靑學聯 남측대표, 가톨릭대 회계2),
박용모(법명 진관, 불교인권위원회 공동의장),
민경우(凡民聯 남측본부 사무처장),
이종린(凡民聯 남측본부 의장),
이천재(凡民聯 상임부의장) 등이다.
이들은 지금도 주로 운동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민주주의민족통일 全國聯合(약칭 全國聯合), 통일연대, 민족문제연구소, 凡民聯 등의 단체에서 그 이름을 볼 수 있다. 한 편, 소위 원로라 일컬어지는 의장단들은 모두 1960년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출신들이다.
이들 이외의 세력들은 대부분 운동권 출신들이다. 이들 중 조성우는 현재 열우당 중앙위원으로 동북아발전연구소장과 미래전략연구소장을 맡고 있으며, 이창복은 새천년 민주당에서부터 정치활동을 시작, 열우당 16代 국회의원을 거쳐 현재 열우당 강원도 지부장이다.
金希宣(김희선)은 열우당 의원으로 1995 년부터 국민회의에 入黨,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대표로 국가보안법 폐지, 친일파 진상규명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7월, 北韓 경비정의 NLL 침범 당시 우리 군의 대응 및 보고 논란과 관련, 군 장성들의 리더쉽에 대해 『5ㆍ6 공 당시 초급장교로 리더십을 키웠던 사람이다』라는 발언, 조병옥 박사 親日派 의혹 제기, 본인의 가족사 문제 등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김시몽은 金在洪(김재홍) 열우당 의원의 비서관을 맡고 있고, 黃寅成(황인성)은 현재 청와대 비서실 시민사회 비서관에 재직 중이다.
한 편, 이 사건 관련자들 중 상당수가 모여 지난 8월 「올바른 과거청산을 위한 범국민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최근에는 이 단체들과 全國聯合, 全大協, 韓總聯 관련자들이 사회 각계에서 큰 소리를 내고 있다. (konas)
전투적 운동의 쇠멸과 대중혁명역량 강화기 : 1988년 ~ 1993 년, 下
1987년 11월 ~ 현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회 관련 사건
1980년부터 1986년 10월의 건국大 愛學鬪 사건에 이르기까지 운동권은 전국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결성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全大協)는 이후 학생운동권의 핵심적 역할을 했고, 1993년 민선 대통령 선출 이후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韓總聯)으로 변신하여 학생 운동권의 주류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1987년 결성 이후 지금까지 수 많은 공안 사건들과 관련되었으며, 凡民聯, 凡靑學聯과 같은 사회 운동권 단체들과도 연계하는 것은 물론, 지하조직을 통한 이념 지도 또한 계속했다. 全大協 ▪ 韓總聯 관련 사건으로 구속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전문환(前 서강大 총학생회장), 홍순철(서총련 서부지구정책위원장, 연세大 국문과졸), 송갑석(全大協 前 의장), 김종식(한양大 총학생회장, 全大協 의장), 임헌태(연세大 총학생회장), 표홍철(서강大), 이동균(대책회의 정책기획국장), 한상열(대책회의 상임대표), 정원택(한국外大 총학생회장), 강희남(목사, 全民聯 고문), 배다지(釜山 민련의장), 문정현(신부, 정의구현사제단), 한철수(全大協 조국통일위원장), 성용승(全大協 축전대표, 건국大 행정 4), 박성희(全大協 축전대표, 경희大 작곡 4), 한철수(학추위 위원장, 경희大 총학생회장), 허동준(중앙大 全大協 대변인), 하태경(서울大 서총련 조통위 연대사업담당), 손성표(고려大 서총련 사무국계열부문 담당), 김시몽(목포대 前 총학생회장), 신현욱(한양大 全大協의장 수행비서), 정미연(全大協 축전예비대표, 전남大 회계 4), 이관복(凡民聯 남측본부), 김쾌상(凡民聯 남측본부), 송규봉(全大協 정책위의장, 경희大 국문 4), 최정봉(前 서강大 총학생회장, 경영학과 4 휴학), 손종국(全大協 의장 경호원, 전남大), 박종렬(前 全大協 정책실장, 연세大 경제 4 제적), 신동호(全大協 문화국장, 한양大 국문과 졸), 태재준(全大協의장, 서울大 총학생회장), 김영하(全大協 조국통일위원장, 중앙大 총학생회장), 이상현(건국大 총학생회장), 김호상(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이명석(조선大 정외 2), 송진환(남총련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우상호(범민족대회 추진본부 간부), 김정기(한양大 총학생회장), 김재용(韓總聯 의장, 한양大 총학생회장), 김병삼(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연세大 총학생회장), 김현준(韓總聯의장, 부산大 총학생회장), 양동훈(조통위 위원장, 조선大 총학생회장), 김연식(교지 민주조선 前편집위원, 조선大 환경공학 3), 이현화(조선大 생물 3), 태광호(전북大 화학 졸), 서일석(조선大 前기공학 4), 이종욱(서총련 의장, 한양大 사학 4), 설충석(韓總聯 대변인, 중앙大 체육교육 4), 진재영(전남大 총학생회장), 선세규(건국大 총학생회 간부), 이준형(광주大 조통위원장), 정태흥(韓總聯 의장), 배정기(韓總聯 조통위 부의장), 이원구(서총련 의장), 정민주(全大協 축전대표, 인천大 건축 3 제적), 이혜정(全大協 축전대표, 가톨릭대 회계 2), 정명기(韓總聯 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박병언(韓總聯 대변인, 연세大 총학생회장), 유병문(韓總聯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동국大 총학생회장), 홍성규(서울大 도시공학 4), 박진빈(단국大 투쟁국장), 강위원(韓總聯 의장, 전남大 총학생회장), 박현정(전남大 여학생회장), 김창학(서총련 투쟁국장), 설증호(충청총련의장), 이태환(韓總聯 조직국장), 정기찬(남총련 임시의장, 조선大 총학생회장), 정영훈(韓總聯 대변인, 한양大 총학생회장), 박휴상(韓總聯 사무처장 박휴상), 오경만(韓總聯 의장정책비서), 김광수(서총련 중집위 선전국원), 유병서(凡靑學聯 전술담당), 최진수(금오공대 총학생회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 장정숙(韓總聯 대의원), 정병도(서울大 총학생회장 당선자), 배병화(서울大 부학생회장 당선자), 이준구(韓總聯 조국통일위원장, 前 건국大 총학생회장) 등 수 백 명 이상에 달한다.
이들 중 특히 의장단들은 현재 국회의원, 정당원, 보좌관 등 정치권으로 진출한 사람이 많다. 全大協 1기 의장이었던 李仁榮(이인영)은 열우당 의원으로 1987년 이한열 장례식에서의 시위로 집회 및 시위 관련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집행 유예 시기에 다시 집회 및 시위 관련법,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되어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치 2 년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全民聯 정책실 간사 및 부장, 全國聯合 조직국장을 지냈다. 새천년 민주당 창당과 함께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동북아 경제중심추진위원회 자문위원, 열우당 중앙위원, 한반도재단 내 동북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全大協 2기 의장이었던 吳泳食(오영식) 또한 열우당 의원으로 1988년 고려大 총 학생회장 겸 全大協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主體思想 노선에 따라「反美청년회」를 결성한 혐의로 국가 보안법, 특수공무집행방해, 공용물건손상, 집회 및 시위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대학졸업 후 노점상 등을 하다 1995 년 국민회의 청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경선 당시 盧武鉉 후보 선대위 청년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全大協 동우회 회장, 열우당 청년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全大協 3기 의장이었던 任鍾晳(임종석) 도 열우당 의원이다. 1989 년 全大協 3 기 의장 당시 林琇卿(임수경) 密入北을 추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3년 6월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청년정보문화센터 부소장, 소장, 全大協 동우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다 1999년 새천년 민주당 창당에 가담했다. 새천년 민주당 당무위원, 同 청년 위원장, 대표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200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盧武鉉 후보 선대委 국민참여운동본부 사무총장으로 盧武鉉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 民和協 회장,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본부장, 同 공동 대변인, 원내 부대표 등을 맡고 있다. 宋斗律(송두율) 교수 귀국추진위원회 위원으로 宋斗律 입국을 위해 활동했다. 韓總聯 합법화 성명서 서명, 이라크 파병반대, 『美國의 對北강경발언이 남북화해방해하고 있다』는 성명서 등에 서명했다. 여중생 사망 사건 때에는 부시 美 대통령에게 사과 요구를 하기도 했다.「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입법 추진 모임」간사이다.
全大協 1기 부의장이었던 禹相虎(우상호)도 열우당 의원으로 1987 년 이한열 장례식 중 시위 주도로 국가모독,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 년을, 1988 년 집회 및 시위 관련 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全國聯合 부대변인, 月刊 말誌 기획위원으로 在野 활동을 했다. 1998 년 高健 서울시장 선거대책본부에 합류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민주당 부대변인 등을 거쳐 현재 열우당 원내 부대표를 맡고 있다. 이들 全大協 의장단 이외에 凡民聯, 凡靑學聯으로 全大協과 관련있는 사람들 중 배다지는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부이사장과 민주국민연합 대표를 맡고 있으며, 문규현 신부는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와 민주노동당 후원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편, 4기 의장이었던 송갑석은 2000년 16代 총선에서 군산 지역에서 낙선한 이후, NGO 활동과 사업에 전념하고 있으며, 5기 의장이었던 김종식은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全大協 6 기 의장이었던 태재준은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다 현재 美國 유학 중이다. 의장단 출신 이외에 全大協 연대사업국장으로 활동하던 白元宇(백원우)도 현재 열우당 의원이다. 1986 년 특수공무집행 방해로 징역 1 년을, 1989 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 년, 자격정지 1 년을 선고 받았다. 한 때 노동운동을 했다. 대학 졸업 후 통합 민주당을 거쳐 盧武鉉 대통령의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李光宰(이광재), 徐甲原(서갑원), 李華永(이화영) 등과 친분을 맺었다. 盧武鉉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에는 비서관을, 現정권 출범 이후에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을 지냈다. 宋永吉(송영길) 열우당 의원은 연세大 총학생회장 겸 全大協 대변인이었으며, 1985년 집시법 위반 및 절도, 공문서 위조 혐의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 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대우자동차, 선퍼니처 가구, 까치마을 장갑공장, 대진 산업 등에서 노동 운동을 했다. 1994 년 사법 고시에 합격했다. 전국민주택시노련, 인천개인택시사업조합, 한국통신노조, 대우자동차 노조 사무노조위원회 등의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성균관大 총학생회장, 全大協 수원의장으로 활동하던 李基宇(이기우)도 열우당 의원이다. 1990년 특수공무집행방해와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 관련 법률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全民聯-全國聯合 경기 남부 조직부장, 수원시민광장 사무국장으로 활동했다. 1998년 국민회의 소속으로 경기도 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8년 全大協 조국통일 특별위원장이었던 鄭淸來(정청래)도 현재 열우당 의원이다. 당시 집회 및 시위법,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으며, 1989년 全大協 결사대 駐韓 美 대사관 점거농성으로 집회 및 시위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 받았다. 2001년 평양 민족통일 대축전 청년대표, 금강산 민족 대토론회 청년대표로 참가했다. 현재 열우당 국민참여운동본부 부본부장, 열우당 언론발전특위 간사를 맡고 있다. 노사모의 후신인 생활정치네트워크 국민의 힘 초대대표를 지냈다. 최근 노사모 대표를 지낸 明桂男 씨가 대표로 있는 「라디오 21」의 이사를 맡았다.
崔宰誠(최재성) 열우당 의원도 1988년, 동국大 총학생회장,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회(이하 서총련) 중앙상임위원 겸 남부지구 대표, 全大協 학원자주화 투쟁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집회 및 시위법, 폭력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출소 후, 한국정책연구소장, 남양주시 시정 기획단 상임 부단장으로 활동하다, 2002 년 민주당 내 盧武鉉 후보 선대위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韓秉道(한병도) 열우당 의원도 1989 년 원광大 총학생 회장, 全大協 전북지역 조국통일위원장 활동 시절 집회 및 시위법, 폭력관련법 위반으로 구속,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졸업 후 원광 보건대에서 근무하다 2003년부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현재「진보적 종교인들의 모임」이라고 주장하는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운영위원 등도 맡고 있다.
金晩洙(김만수) 청와대 비서실 상근 부대변인도 전대협 출신으로 1987년 연세大 총학생회 부회장 시절 국가 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법 위반으로 구속돼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 받았다. 元惠榮(원혜영) 의원 보좌관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연구원으로 盧武鉉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경기도 부천시 의원을 거쳐 2002년 새천년민주당 盧武鉉 후보경선캠프 공보팀장,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부대변인, 청와대 홍보 수석실 보도지원비서관 겸 부대변인을 거쳤다.
1992년 4월 29일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社勞盟)사건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 (이하 社勞盟) 은 1988년 4월 1일 백태웅, 박노해를 비롯한 약 200여 명이 준비위를 만든 것에서 시작하여, 1989년 11월 12일 정식으로 출범했다. 이 조직은 자생적 비합법사회주의조직으로 남北韓 정권을 모두 비판하는 노선을 채택하고 있다. 社勞盟은 1991년 3월10일 박노해가 구속되고 다음해인 1992년 4월 29일에 백태웅을 비롯한 중앙위원과 주요간부 전부가 국가 안전기획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社勞盟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박노해(본명 박기평), 김진주, 현정덕, 백태웅(서울大 민간인 감금고문사건 참조), 남진현, 은수미, 정명섭, 이은경, 김기수, 박홍순, 차익종 등 무려 300여 명으로 해방이후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평가된다. 社勞盟 사건 관련자들은 1999년 3월 1일자로 잔형면제의 특별 사면 및 복권 조치를 받았다. 이들 중 백태웅은 현재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대학 조교수로 재직하다 국내 모 법무법인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 중이며, 박노해는 시인으로 활동 중이다. 한편, 2004년 7월에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중 社勞盟 사건 관련 출신자가 현직 장성과 기무부대를 조사했다고 해서 논란이 된 적도 있다.
1992년 10월 6일 남한조선노동당(민족해방애국전선·애국동맹)사건
1992년 10월 6일 안기부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며 권력서열 22위인 이선실 간첩망 사건을 발표했다. 이에 운동권들은 실체가 없는 사람을 내세워 운동권을 탄압하려는 용공조작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北韓 노동당 이선실은 1979년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위원 선출, 1982년 4월 김일성의 70회 생일에 김일성훈장 수훈. 19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 임명.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기념연회에서 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참석했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는 등 北韓의 대남공작사업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이선실은 사건 당시 월북했으며, 2000년 8월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사건의 관련자는 민영완, 최진섭, 최종만, 이형두, 노중선, 정경수, 정경진, 최호경, 황인오, 양홍관, 심금섭, 함정희, 김현찬, 은재형, 임명규, 황인욱, 마윤종, 임인출, 이철우, 김경태, 손민영, 우민성, 이경섭, 윤정환, 신동욱, 이근희, 손병선, 김낙중, 변의숙, 이강훈, 김표무, 장창호, 심상득, 조덕원, 이철, 진용근, 김동훈, 장기표, 김선태, 고한석, 김옥기, 양진우, 이승미, 한경임, 조일준, 이원배, 신선아, 이영지, 박미옥, 최상, 이규성, 이성구, 정인미, 최지영, 주병화, 전재순, 송혜숙, 전달수, 전송임, 윤임현, 김부겸, 조무하, 양견웅, 손병구, 임종호 등이다.
이 중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이철우는 열우당 의원(反美 청년회 사건 참조)이고, 사북탄광사태의 관련자이기도 했던 황인오는 석방 후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편, 1991년 김일성 훈장을 받기도 했던 김낙중은 현재 평화운동가라는 직함으로 현재도 파병반대, 주한미군 철수, 통일연대 활동 등의 운동권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철우 등의 경우, 대부분 하부 조직원으로 그들 스스로도 자신이 북한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몰랐다는 점이이다. 즉, 당국에 적발 시 북한과의 연계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북한을 보호하고, 가입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민족해방애국전선, 애국동맹 등의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노동당은 이철우와 같은 하부 조직원은 당원으로 입당시키지 않는다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 노동당은 아무나 당원으로 가입시키지 않는다. 결국, 이철우와 같은 하부 조직원은 상부조직원과 북한에 이용당한 것 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사상을 신봉했으며, 충성맹세를 했음은 이미 판결문 등을 통해 인정된 사실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konas)
운동권의 합법 활동기 : 1993년 이후 ~ 현재
운동권들은 1993년 민간인 출신 대통령인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운동권과 좌익 세력들은 과거의 지하 활동뿐만 아니라, 합법적 활동도 동시에 개시한다. 좌익들은 기존의 다양한 단체들을 양성화하여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이라는 거대단체를 결성하고, 이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특히, 1998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시민단체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들이 초기 주로 내세운 이슈는 통일, 환경, 인권, 여성, 빈민, 노동 문제 등이지만, 그 내부의 주장은 대부분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연계되어 있다. 즉, 이들의 전술은 사회적 이슈를 내세움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고 이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 지지 세력을 넓히는 것이었다. 반면, 기존의 보수계층은 승리감에 젖어 그 맥이 점점 사라지고 다음 세대를 키우지 않고, 타성에 젖어 살고 있던 시기이다. 이 시기를 시작으로 대학교의 수가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나면서 각 대학교에 좌익 성향의 교수들이 포진하게 되고, 변호사, 언론인, 시민단체 관계자 등이 엄청나게 늘어난다. 심지어는 대학 자체가 좌익 성향인 경우도 나타나는데 대부분 이 시기에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거나 설립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현재 시민들이 질려하는, 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이슈를 연결짓는, 자칭 시민단체의 약 70% 이상이 1998년 이후에 설립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94년 6월 2일 김일성 조문 파동
1994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되기 시작하던 시기에 김일성이 돌연 사망했다. 이에 운동권들은 김일성에게 국가차원의 조문 사절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조문을 위해 密入北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학내에 빈소를 설치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정부는 이에 대대적인 主體思想 관련 조직들을 검거했다. 관련 사건으로 구속된 사람들은 김세원(凡民聯 남측본부 광주전남연합 창립준비위원장), 오병윤(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사무처장), 김양무(凡民聯중앙정책실장), 이종욱(서총련 의장), 설충석(韓總聯 대변인), 김종백(서총련 조통위원장), 최종민(서총련 동부지구 의장, 건국大 총학생회장), 이석준(고려大 동양사 2), 강희남(凡民聯 의장), 이종린(凡民聯 부의장), 전창일(凡民聯 부의장), 강순정(凡民聯 부의장), 안희만(凡民聯 간사), 신광수(법명 법탁, 평불협 상임부회장), 이지범(평불협 前 총무부장), 이영규(전남大 법대 학생회장), 문정우(전남大 부총학생회장), 정연철(고려大 총학생회 학생복지위원장), 이광훈(고려大 경제2), 전창근(고려大 경제3), 김준일(고려大 경제3), 최윤규(고려大 경제3), 남창유(고려大 경제3), 이창복(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공동본부장, 全國聯合 상임의장), 황인성(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집행위원장, 全國聯合
첫댓글 아잉~ 더럽게 기네, 나중에 별도로 시간내서 읽어봐야 겠군 된장
머,,,그런데 이미 대부분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