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밤을 데리고 온다 밤은 오레오 맛, 혹은 담배 냄새가 난다 유리창 너머에서 도시가 비의 부식(腐蝕)을 견딘다 유리창을 응시하면 얼굴이 흘러내린다 손바닥으로 거듭 지워도 본능은 거기 있다 나는 외면하면서 나의 이면과 마주한다 백지와 마주할 때 나는 역광을, 광배(光背)를 얻는다 어떤 섬광이 흰 벽에 흘러내리는 새장을 그렸다가 지운다 지우개가 작업한다 내가 쓴 시의 암호들이 하나씩 지워져간다 나는 지우개로 쓴 편지를 접어 그림자 새에게 맡긴다 새를 따라 당신에게로 간다 꿈의 비옥한 범람 속으로, 도살장으로, 두께 없는 무간(無間)으로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3.09.21. -
- 계간〈문학과창작〉2023 여름호 -
밤은 사람의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상상력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세계로 이끌기 때문에 많은 예술가들이 밤에 창작하는 걸 좋아합니다. 시인에게도 밤은 “오레오” 쿠키처럼 진하고 달콤하지만 동시에 “담배”처럼 쓴맛을 깊이 맛봐야 하는 창작의 시간입니다. 책상에 앉아 “백지”를 마주하고 있는 시인. 마치 “흰 벽”이라는 “새장”에 갇히기라도 한 듯 시상(詩想)은 도무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비 내리는 창에 어리는 그리운 “얼굴”은 지워도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고, 생각은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가지를 뻗으려 합니다. 결국, 그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무력하게 “꿈의 비옥한 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