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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고전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 설 교 >
내 힘으로 안 됩니다
고전 2:1-5 / 박용규목사
어떤 목사님이 집회 중에 열심히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데, 그 집회 가운데 많은 성도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중 어떤 한 분이 설교를 듣는 중에 배꼽을 잡고 자지러지게 웃고 있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대부분 성도가 진지하게 말씀을 듣고 있는데 ‘저분은 왜 저렇게 웃고 있을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집회를 다 마치고 그 분에게 가서 "성도님! 설교 중에 왜 그렇게 배를 잡고 웃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 성도가 "아! 목사님, 왜 그러시는데요? 제가 뭐 잘못했습니까?"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보니 강사 목사님이 설교 중에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됩니다" 라고 했는데, 이 성도님은 "맨 입으로는 안 됩니다"라고 강사 목사님의 말을 잘못 말로 알아듣고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중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도록 말씀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6절에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라고 말씀하시며, 누가복음 19장 10절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the Son of Man)"는 예수님 자신을 스스로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는 강력한 선포가 우리에게 강렬한 도전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대부분의 성도들은 전도에 대한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에 대해서 교회의 행사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전도에 은사가 없는데, 나는 성경을 잘 모르는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기도하는 것과 예배를 드리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교회의 본질적인 것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대부분 성도의 공통적인 반응은 "전도는 어렵다" 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는 전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국제 대학생 선교회(C.C.C)를 창설한 빌 브라이트 박사는 그의 책, "담대히 전하라"에서 "담대하고 강하게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는 성도만 하나님이 찾으시고 사용하시는 성도"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싸구려 물건을 강매하는 세일즈맨이 아닙니다. 생명을 나눠주고 지옥 갈 인생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사람들입니다. 최고의 상품을 조건 없이, 공짜로 나누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 시대 최고의 지성인, 영적 엘리트였습니다. 그의 스펙은 화려했습니다. 학문이나 지식, 종교적 배경, 율법 준수의 삶은 누가 뭐라 해도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고백은 사도바울을 너무나 연약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단순한 육체의 연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에 비교해보니까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발견하고 나서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복음 전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은혜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1-2)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말 성경에는 ‘왜냐하면(γὰρ, for)’이라는 접속사가 빠져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들어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뛰어난 말과 지혜를 전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당시 고린도는 헬라의 철학, 웅변술, 수사학, 드라마 같은 것들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웃기기도 하는 웅변술로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말을 잘하는 재주꾼들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시어 무엇을 하셨는가를 전한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제물로 삼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구원을 얻는 방법이 인간의 노력, 능력, 실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다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구원에 대해서 말할 때,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라고 합니다(엡 2:4-5).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이 값싼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치르고 주신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의 은혜와 영광이 우리에게 있다면 복음의 진리가 담겨 있는 십자가의 능력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나서 그 십자가의 능력 앞에 겸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 큰 실패를 경험했었습니다. 아덴은 오늘의 그리스 아테네입니다. 아덴은 철학과 학문의 도시로 바울이 학문적으로 논쟁할 때, 대상자들이 많았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과 바울이 논쟁할 때,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들은 이방신들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핀잔을 받았습니다(행 17:18).
사도 바울이 학문과 지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러한 아픈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의 능력이 가려질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의 지식과 지혜를 다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시고 마게도냐로 부르셔서 유럽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바울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땅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밀어 넣으신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의 분쟁이 왜 일어났겠습니까?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이성으로 설명해서 도(道)를 깨우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윤리적인 정신을 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착하게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복음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십자가의 복음에 붙들리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왜 두려워했겠습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 자신의 설득력 있는 말과 설교 때문에 성령의 나타남, 능력이 약화될까 두려워한 것입니다. 전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일하시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초대교회 베드로 사도가 지성과 실력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치던 자 아닙니까? 갈릴리의 어부 출신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가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담대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졌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들었던 말씀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29-32절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6월 11일을 행복나눔축제로 준비하면서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 된 것이 내 인생의 최고의 기쁨, 영광, 축복이심을 인정하신다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전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나라입니다. 또한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무관심함으로 영적 저출산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60~90년대까지 한국교회 부흥을 주도했던 세대들이 이제 점점 노령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있지 않아서 유럽교회처럼 교회가 술집, 체육관, 무슬림 사원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가 사람의 노력, 이론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임을 믿고 마음에 작정하고 기도하며 나아갈 때, 성령께서 역사하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한 명령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4-15절은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이지만 십자가의 능력을 믿고 나아가 복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라(4-5절)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능력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했을 때, 그 배후에 누가 역사했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전해준 ‘복음의 내용과 그 복음이 어떻게 전달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고린도 교회에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 능력이라고 하면 초자연적인 기적, 신비로운 기적을 생각합니다. 능력이 나타나면 무릎 꿇고 ‘내가 예수를 믿겠습니다! 하고 엎드릴텐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도지 한번 전달해보십시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습니까? 손사래를 칩니다. 기적, 초자연적인 역사가 나타났다고 해서 예수를 믿고 영접하겠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 수많은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바다를 잔잔케 하고 오천 명이 먹는 기적, 눈먼 자, 38년 된 병자,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음에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 9-11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주인이 오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 가지 증거, 기적을 통해서 드러내셨지만 그들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내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우리가 기도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은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은 외적인 능력 이전에 내 안에 일어나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십자가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성령의 능력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기적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정한 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는 것은 사람의 의지, 힘으로 할 수 없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의 믿음의 기도와 뿌리가 어디에 세워져 있는가를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선택하고 납득해서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면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모두가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공동체에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차별화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십자가의 능력을 우습게 여깁니다.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앞서 있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섬기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이 치료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 성령 하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30세의 나이에 아프리카의 밀림 선교에 투신해서 60세 생일에 숨을 거둘 때까지 한 영혼 구원하는 삶을 살았던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은 영국 글래스고 대학에서 마지막 연설을 할 때, "언어가 통하지 않고 수많은 맹수의 위협 속에서도 아프리카 밀림선교 속에서 누가 나를 돌보아 주셨는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다름 아니라 마태복음 끝절 말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는 이 말씀은 밀림의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나를 붙들어 주셨으며, 주께서는 한번도 이 언약의 말씀을 어긴 일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아무리 설득력 있는 말을 전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와 보라"라고 하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수많은 기적과 능력을 경험했지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는데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할 때, 복음이 깨달아지고 들었던 말씀들이 믿어져서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전 세계 곳곳의 선교 현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지역과 도시가 변화되는 수많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직업을 갖고 있든지 그 직업과 소명이 일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그 소명, 복음을 위해서 직업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자신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주신 삶의 현장임을 인정하고 살아갈 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왜 예수를 믿는지 주일마다 교회에 나오는지 그 이유를 잊지 마십시오. 교회는 복 받기 위해서, 병 고치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관심에 우리의 관심을 둘 때,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지 않는 것도 채워주실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잃어버린 영혼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고전 2:1-5 / 이대성목사(광성교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어제 저희 교회에서는 축제 한 마당이 벌어졌습니다. 창립1주년 기념으로 풍동지역 어르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벌인 것입니다.
창립 1주년 기념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진정 뜻 깊을까 교우들이 함께 의논한 결과 경로잔치를 하기로 결정은 했는데 아무 것도 준비된 것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어찌 하오리까?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바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저는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게 한 사람, 두 사람 붙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각 아파트 단지 내 경로당을 방문해서 그야말로 하나님 빽만 믿고 어르신들을 경로잔치에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한 분 두 분 오시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이 전이 꽉 차서 더 이상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연하는 분들은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시는지, 감사 또 감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노인 분들로 구성된 갈렙 선교단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함께 모였던 어르신들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믿는 분, 믿지 않는 분 모두 다 함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분명,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목도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일을 행하신 분은 진정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돌립니다.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 수많은 위인, 영웅들이 있었고 성경이나 기독교 역사에도 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위인들과 성경의 위인들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의 위인들은 모두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인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낸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잘난 사람을 불러서 '야, 그 사람 참 잘났다.' 이런 감탄의 역사가 결단코 아닙니다.
못난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은 저런 사람을 통해서도 엄청난 일을 하시는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한 번도 제가 잘나서 목사가 되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목사라도 시켜 놓아야 믿음생활 제대로 할 것 같으니까 하나님께서 목사를 시키셨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에서 29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여 쓰실 때에 능력 순이 아니라 못난 순서대로 부르신다고 말하면서 자기 자신이 잘나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도 못나서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드러내는 시청각 자료들이 참 많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2장 이전에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는지 전혀 기록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드러낼 것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설사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 없는 일들 뿐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계보를 이어갑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는 왜 야곱 같은 인간을 선택하셨는지 모르겠다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 같은 인간도 부르셨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바로 나 같은 사람을 부르시기 위해서입니다." 야곱 같은 인간을 부르셨다면 나 같은 인간도 하나님은 부르실 수 있다는 시청각 자료로써 야곱을 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을 보십시오. 그 미련한 제자들을 불러 당대에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힘과 헬라철학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묶인 죄수의 몸으로써 로마의 네로 황제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많이 배워 지혜로운 사람을 씁니다. 튼튼하고 건강한 사람을 씁니다. 훌륭하고 잘생긴 사람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병든 자를 부르러 오셨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린도전서 1:26절 말씀입니다.
성경의 위인들을 보면 대단한 것 같지만, 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약하여 넘어지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근심하고 때로는 공포에 떠는 서글픈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대단한 사람에게만 신경 쓰는 분이 아니십니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 약하여 넘어지는 사람, 두려워 떠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런 우리들을 불러 쓰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든 인간은 그가 아무리 훌륭할지라도 그들 역시 구원을 필요로 하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문제는 똑같이 기도하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받고 복을 받는데 왜 어떤 사람은 실패합니까?
똑같이 예배드리고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능력 있는 삶, 영향력 있는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늘 넘어지고 무력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일까요? 똑같이 목회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당당하게 자신만만하고 행복한 목회를 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낙망하면서 불행한 목회를 하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이는 지식이 모자라서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아는 것이 많으면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경험이 부족해서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이나 환경 때문에 자신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환경이 너무 어려워서, 가족들이 도와주지 않아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돈이 힘인데 돈이 없어서 자신은 아무 일도 못한다고 미리 포기해 버리기도 합니다.
아닙니다. 지식이나, 돈이나, 경험이나 넉넉한 환경 따위는 신앙생활의 승리, 능력 있는 삶, 성공적인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없으면 불편할 수 있습니다. 불편의 문제와 불행의 문제는 다른 것입니다. 불편하다고 불행하지는 않습니다. 더구나 행복한 신앙생활,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환경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 자신의 신학이나 환경을 의지하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더구나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조건은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입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파워로 하는 것이지, 세상적인 조건을 가지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나 전도는 영적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을 보십시다. 오늘 본문 3절에 이해하기 어려운 한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여러분? 무엇이 사도 바울을 이토록 두렵게 하고 약하게 만들었단 말입니까?
늘 바울을 괴롭히던 육신의 질병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외모적 콤플렉스 때문이었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말이 어눌해서 미리 겁을 먹은 것이라고도 추측합니다. 핍박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돕는 교인들이 모자라 고독감에 빠졌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혹 고린도 도시의 위용에 주눅이 들었을 것이라고도 추측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 다 쓸데없는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는 모두 그리스도인의 능력과 당당함이 어디서 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대답일 뿐입니다.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헬라의 수도 아덴에서의 전도경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덴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의 거장들이 활동하던 헬라 철학의 본거지입니다. 바울이 이곳에 도착해서 그 동안 숨기고 있었던 바울의 철학적 끼가 발동한 것입니다. 그는 히브리 종교뿐만 아니라 로마시민권을 가진 자로써 헬라 철학에도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더라도 이들에겐 철학적 방법으로 전도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 철학적으로 논쟁을 하기도 하고, 변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말싸움에서 보기 좋게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제대로 전도를 할 수 없었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다른 곳에서처럼 모진 핍박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전도에 실패한 것입니다. 철학적 말싸움을 하는 사이에 예수 십자가를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지식, 철학, 경험을 의지하는 사이에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실패의 원인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실패 원인도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삶,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도 분명해졌습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진정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버려야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버려야 할 것은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덴의 실패를 통하여 큰 것을 깨닫고 큰 결단을 하게 됩니다. 신앙의 신비, 전도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다같이 1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시작)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사도 바울은 다시는 아덴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고린도에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진정 중요한 말은 "아름다움"이란 단어입니다. 말의 아름다움, 지혜의 아름다움이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란 것들이 결단코 불신자를 전도할 수 없었습니다.
논쟁에서 이겼다고 그들이 승복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이 없는 말은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여러분? 불신자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절에 이어 본문 4절에서도 똑같은 결심을 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그렇습니다. 전도에서는 물론이요, 모든 신앙생활에서 내 것 들어내고 나를 자랑하면 실패합니다. 은혜가 안됩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의는 무익합니다. 내 재주, 내 경험 그 무엇도 절대적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웃에게 해가 될 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 결단하십시다. 사도 바울처럼 포기하기로! 배설물로 여기기로! 다 버리기로! 오늘 이 시간, 내가 먼저 버려야할 것은 다 버리겠노라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오직 예수 십자가만을 전해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오직 예수 십자가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결단, 그리스도인의 능력, 복음전도의 가장 탁월한 아니, 유일한 무기가 무엇입니까?
본문 2절 말씀 다같이 함께 읽습니다. (시작)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러분? 여기에서 "작정하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크리네인"으로써 이 말의 뜻은 대법원에서 내리는 최종적인 결정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전도에서 달변이나 설득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 다 포기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겠노라 최종적인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통해 복 받겠다고 처음엔 예수님께 왔지만 이젠 오직 예수님만 믿겠노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병 낫겠다고 예수님께 왔지만 이젠 그것이 아니더라도 예수님만 붙들겠노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엔 평안을 얻겠다고 예수님께 왔지만 이제는 예수님과 함께 거룩한 수고를 하더라도 예수님만 의지하겠노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신학은 이제 깨끗이 그만두겠노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피 묻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했더니 거기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굳은 심령이 부서집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교회가 세워집니다.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드디어 도시가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십자가만 전하겠노라."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 안에 의롭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우리가 의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성결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 승리케 하는 능력이 있어서 오늘도 우리는 사탄 마귀와의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철학이 아니요 능력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여러분?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학입니다.
바울은 기독교를 파는 외판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사"였습니다. 물건을 파는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상대방이 그 물건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사도록 여러 가지 달콤한 말로, 멋있는 말로, 그럴듯한 표현을 해가며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외판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대사였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전하지 않았습니다(갈6:14).
그렇습니다. 모든 신앙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 사도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가 닮아야 할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예수 십자가만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또 다른 그리스도인의 능력, 복음전도의 원동력, 성도의 파워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같이 4절과 5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과 지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영원히 형벌 받게 될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바로 당신 때문이란 것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의 유일한 구세주,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 진리를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분은 죽었으나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게 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살아오던 모든 인생의 가치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무릎 꿇어 경배하도록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
누가, 무슨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이었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저절로 믿어집니다. 안 믿고 싶어도 저절로 믿어집니다. 그 순간부터 지옥 가기는 영 글러 먹었습니다.
단순하게 복음을 전했는데, 별것 아닌 설교 같았는데 눈물이 핑돌고 가슴이 찡하더니 예수가 믿어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때로는 강퍅한 심령을 무너뜨리시기 위해서 성령님이 나타나십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표적이 나타나고 기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은 "성령의 나타나심"이라고 표현합니다. 흔히들 성령의 구원의 능력은 믿는데 성령의 나타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성령의 나타나심"만을 따라 다니는 자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치우친 신앙들입니다. 예수 안에는 성령의 능력도 있고 성령의 나타나심도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5절 말씀입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잘난 사람만 잘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비범한 역사를 이룹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적 사역의 원리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모두의 믿음이 있고 배짱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까요? 오직 십자가의 능력, 오직 성령의 능력과 나타나심에 의해서 가능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 목회의 첫사랑, 처녀 목회지는 바로 이 곳 풍동입니다.
제가 왜 이 곳 풍동지역에 처녀 목회지를 정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제일 처음 거룩한빛 광성교회 정성진 목사님께서 개척해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소개해 주신 곳은 이 곳 풍동지역이 아닌, 파주 지역 도로 변에 위치한 지상 위에 이미 세워져 있는 아담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저에게 이야기 합디다. 왜? 그 곳을 택하지 않고서 이렇게 교회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풍동지역을 택해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그것도 상가 건물을 택했느냐고 말입니다. 제 대답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곳 미르상가를 계약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주변에 있는 교회들이 하나 둘씩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한마디로 풍동지역은 성지였습니다. 웬 교회들이 그렇게 많은지.... 건물마다 옵션사항으로 교회가 하나씩 들어가 있었구요? 큰 교회들 또한 이 풍동지역을 온통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제 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제가 이 곳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곳을 택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렇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풍동지역에 큰빛광성교회를 허락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전이 진정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하나님의 전일찐대 하나님께서 이 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 또한 반드시 나타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제가 이 곳에 큰빛광성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매일 새벽마다 빠지지 않고 기도했던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것처럼 동역자들을 붙여 주옵소서. 기도의 동역자, 전도의 동역자, 찬양의 동역자들을 붙여 주옵소서.
지난 주일 창립 1주년 감사예배를 드린 후 축하하러 오셨던 목사님이신 아버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목사, 이렇게 활기찬 교회는 처음이야! 더욱이 남자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분명, 하나님께서 이 전을 통해서 성령의 행하심과 능력을 나타내 주실꺼야!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어!”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난 1년 간 큰빛광성교회에 기도의 동역자, 전도의 동역자, 찬양의 동역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 요소 요소 마다 꼭 필요한 분들을 붙여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이 모든 것이 성령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이라고 확신합니다.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바로 이 곳에서 십자가와 성령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회복과 치유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부흥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역사를 이루는 복음의 신비를 보았습니다.
이것이 진정 우리 큰빛광성교회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 분의 증인이 되면 됩니다.
여러분? 증거하는 것은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담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나머지는 성령하나님께서 행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평범한 당신을 통해 비범한 신앙 역사를 이루고 싶어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선 먼저 버릴 것은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십자가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저와 여러분과 큰빛광성교회 위에 성령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능력이 늘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바울의 교훈 – 사역의 모범
고전 2:1-5 / 박봉수 목사
사회심리학자 반두라(A. Bandura)는 ‘관찰학습’에 관한 실험을 한 일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서 각각 다른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한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큰 인형을 발로 차는 폭력적인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룹의 아이들에게는 같은 인형을 어루만지고 말을 걸고 소중히 다루는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후에 실제로 아이들을 그 인형이 있는 방에서 놀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인형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관찰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여러분들이 상상하는 그대로입니다. 폭력적인 영상을 보았던 아이들은 인형을 발로차고 거칠게 다루었고, 인형을 소중히 다루는 영상을 보았던 아이들은 인형을 쓰다듬고 소중히 다루었습니다.
반두라는 이런 실험결과를 모델인 대상을 보고 배운다는 뜻으로 ‘모델링’(Modeling)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모델링을 기초로 교육이론을 세웠는데, 그것을 사회학습이론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배울 때 가장 손쉽고 또 확실하게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모델링입니다. 누군가 모델이 되는 사람을 보고 따라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학에서는 이 모델링을 가장 원초적인 교육이라고 부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배우려면 모델링 방법을 따르는 일이 효과적입니다. 나름대로 모델을 정하고 보고 따라할 때, 가장 손쉽고 또 확실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빌 3:17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고전 11:1에서도 바울은 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같은 권면을 빌립보교회와 고린도교회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도하고 양육해 온 빌립보교인들과 고린도교인들에게 자신을 모델로 해서 보고 배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모델링 교육방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신앙양육을 해왔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자기가 모델 즉 본이 되려고 했고, 실제로 삶으로 본을 보이며 신앙을 양육해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울은 신앙생활의 최고의 모델 즉 본이 됩니다. 워낙 훌륭한 신앙의 모범이기도 하지만, 본을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본으로서 바울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고, 각자 나름대로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회심의 본으로서 바울에 대해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오늘은 사역의 본으로 바울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부르심
바울의 사역은 부르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바울은 사울이던 시절 철저하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자가 된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돌변하게 된 것일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바로 부르심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의 사역은 마지막까지 이 부르심을 기억하고,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고전 1:1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쓴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자신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뿐이 아닙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그리고 자기를 소개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고린도교인들은 자기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또 반복해서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만큼 바울은 자신이 지금 사역하고 있는 이유가 부르심 때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르심을 잊지 않으려 하고, 또 지금 자신이 하는 모든 사역이 다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 되게 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노회 목사안수식이 있었습니다. 우리교회 전부민 목사님이 안수를 받으셨기 때문에 저도 참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식이 끝난 뒤에 잘 아는 신학교 교수님이 참석하셨다가 반갑게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설교와 권면의 말씀이 다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목사안수 받은 지 30년이나 됐습니다. 그런데 안수식에 참여해서 말씀을 들으며 새삼스럽게 자신이 안수 받을 당시가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 때 부르심에 감격하고 헌신하기로 다짐하며 흘린 눈물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그 부르심에 대한 감격을 잊고 살아왔다는 점을 깨닫고, 다시 결단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에 따라 저마다 맡겨주신 주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가면서 부르심을 잊어버리고, 그저 일로서 사역을 대할 때가 참 많습니다. 내 일을 내가 한다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할 일을 내가 결정하고, 그 일을 내가 계획하고, 그리고 내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사역을 대할 때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 대했습니다. 그 일은 주의 일이고, 자신은 단지 그 일을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힘썼습니다. 그래서 늘 주님께 묻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사역을 결정하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주님 주시는 능력을 덧입고, 그 사역들을 감당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부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늘 그 부르심을 생각하며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역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부르심은 주를 위해 특별한 일을 할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전 7:24를 보면,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저마다 각각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앞부분을 보면,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교회에서 저마다 맡은 직분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그리고 일터에서 맡은 역할도 다 각각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부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 응답해야 합니다.
헌신
바울의 사역은 한 마디로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의 사역은 자신을 부르신 주님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 9:19-20을 보면,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르심을 받은 직후, 바로 사역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행 13장부터 바울의 선교여행 이야기가 28장까지 길게 기록되어있습니다. 크게 3차 전도여행과 마지막 로마로의 여행 이야기입니다. 그 여행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1차 전도여행은 기간은 대략 주후 47에서 49년까지 약 2년 정도가 걸렸고, 이동한 거리는 약 2,240킬로미터 정도나 됐습니다.
2차 전도여행은 기간은 대략 주후 49년에서 52년까지 약 3년 정도가 걸렸고, 이동한 거리는 약 5,000킬로미터 정도나 됐습니다.
3차 전도여행은 기간은 대략 주후 53년부터 58년까지 약 6년 정도가 걸렸고, 이동한 거리는 약 5,000킬로미터나 됐습니다.
그리고 로마로의 여행은 여러 해 동안 옥에 갇히고, 배타고 여행하는 도중 지중해의 태풍이 유라굴로 광풍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바울은 그야말로 주만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를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바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마지막 생명마저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던 그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전국 언론인 클럽에서 연설을 한 일이 있습니다. 이 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인근 목장으로 젖소를 사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에 드는 젖소 한 마리를 고른 후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젖소의 혈통은 좋습니까? 유지방 성분은 어떻습니까? 매일 얼마의 젖을 냅니까?” 젖소 주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런 건 잘 모릅니다. 제가 아는 것은 송아지 때부터 제가 키운 이 젖소는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 젖소는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나에게 다 주었습니다. 이 젖소는 틀림없이 당신에게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한 후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연설을 마무리했습니다. "존경하는 언론인 여러분, 저는 늙은 젖소와 같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가진 모든 것을 국민 여러분과 미국을 위해 다 바치겠습니다." 이 연설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야말로 젖소처럼 주님께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직후부터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끝으로 자신의 생명까지 주님께 다 드렸습니다. 그야말로 젖소처럼 다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바울처럼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 다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 무엇이라도 드리며 살고 있습니까?
저는 늘 찬송가 311장 가사를 생각하게 됩니다. 1절을 보면 가사가 이렇습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너무도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받을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가 바울처럼 무엇인가를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더욱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연약함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의 뜻밖의 고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자신이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바울이라고 하면 담대하고 강인한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러 차례 박해를 당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담대하게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디고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고린도에 오기 직전 바울은 아덴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모처럼 박해 없이 전력을 다해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덴은 철학의 도시여서 곳곳에서 토론과 논쟁의 장이 펼쳐졌습니다. 특히 아레오바고라는 곳은 가장 대표적인 곳입니다. 바울이 이곳에서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복음을 설명하고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변변한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다른 곳에서는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할 때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아덴에서는 별로 박해도 없었고 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열매가 없었고,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크게 좌절했습니다.
패배감과 좌절 때문에 더 이상 아덴에서 사역을 할 수가 없어서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사역할 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정말 깊이 자신의 연약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면 사역을 중단하거나 포기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사역을 계속한다고 해도 열매도 없고 큰 실패를 겪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고린도 사역은 그 어느 곳의 사역보다도 큰 열매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됐고, 교회도 크게 부흥하게 됐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4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린도에서는 아덴에서와 다르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아덴에서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을 내려놓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붙잡고 사역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특히 아덴에서의 사역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가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 사역을 해서는 안 되고 철저하게 성령의 능력으로 해야 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연약함이 오히려 자신에게 큰 약이 됐다는 점을 감사했습니다.
고후 12:5를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10절을 보면 “내가 약한 그 때 강함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밤하늘을 쳐다보면 어두워질수록 별이 잘 보입니다. 해질녘이나 해 뜰 때 별들이 희미합니다. 그러다 한 밤중이 돼서 이 땅에 빛이 다 사라지고 나면, 별 빛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강하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가 약하면 그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고백합니다. 건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던 사람이 질병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사업이 잘돼서 승승장구할 때는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던 사람이 사업이 망해서 절망할 때 하나님을 깊이 체험합니다.
성경을 보면 광야는 역설적인 땅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땅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땅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역설의 시간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때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바쁘게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고난을 즐거워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난 자체가 즐거운 것이 아니고, 우리 속의 연약함이 드러나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가시를 은혜라고 말씀했습니다. 육체의 고통 자체가 은혜가 아니고, 우리의 시간이 멈추고 하나님의 시간이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 드십니까? 견디기 힘든 질병의 고통에 힘 드십니까? 삶의 무게를 견디기 힘 드십니까? 여러분의 연약함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느껴보십시오. 오히려 감사하게 되실 것입니다.
십자가
시 22:1-4, 고전 2:1-8, 막 15:13-25 / 장윤재목사
예수님께서 겸손히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자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나서, 결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에 의해 체포되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 사형 언도를 받습니다.
십자가는 인류가 고안한 사형방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틀입니다.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최대한 느리게 만들어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느끼다 죽게 만든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로마제국이 그들의 식민지 지배를 위협하는 정치범들에게만 내리던 사형제도였습니다. 십자가의 세로형틀(pole)은 높이가 2미터를 넘지 않았습니다. 중세의 성화들을 보면 예수님이 아주 높은 십자가에 달린 그림이 많은데 이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앙심 때문이고 실제의 십자가는 높이가 매우 낮았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해진 장소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해골이라는 곳,' 히브리어로는 '골고다'입니다(요한 19:17). 라틴어로는 '갈보리'(Calvary)입니다. 그런데 왜 처형장에 해골이 많았을까요. 나중에 들짐승들이 시신을 뜯어먹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로마는 그렇게 자신을 반대하는 정치범들의 시신은 거두지도 못하게 하면서 극도의 모욕과 멸시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그의 시신을 장사지낼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십자가의 가로형틀(transverse bar)만 지고 골고다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에 도착하면 옷을 다 벗긴 후 그 가로형틀에 죄인을 누이고 손목이나 어깨를 끈으로 단단히 묶거나 혹은 손에 못을 쳐서 고정시킨 다음에, 파티불룸(Patibulum)이라는 일종의 기중기로 사형수와 가로형틀을 들어 올려 세로형틀에 고정시킵니다. 세로형틀에 발판은 없고 중간쯤에 쐐기 못이 하나 있어 사형수의 엉덩이가 걸쳐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형수의 발을 끈으로 단단히 묶거나 혹은 아래로 꺾어 못을 치면 끝납니다.
그 상태로 사형수들은 몇날 며칠을 십자가에 달려 서서히 죽어갑니다. 종종 몰약(沒藥, myrrh)이나 신포도주를 사형수의 입에 찍어줍니다. 목 마를까봐 배려해서가 아니라 사형수의 의식이 혼미해져 고통을 못 느낄까봐 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보면 예수님은 "몰약을 탄 신포도주를 주었으나 받지 아니하"셨다고 했습니다(마가 15:23).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십자가 위에 달려 계셨습니다. 보통 장정들은 2~3일을 견디지만 예수님은 이미 심한 채찍질로 매를 맞아 몸이 많이 약해지셨던 것 같습니다. 의학적으로 십자가 위에서의 사망원인은 '점진적 질식사'(gradual asphyxiation)입니다. 어깨가 단단히 묶여있고 손과 발에 못이 쳐있는 상태에서, 물 한 방울 먹을 수 없는 인간은 서서히 숨이 막혀 죽어갑니다. 그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밑바닥 최악의 고통 속에서 운명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고통을 당하시는가?' 이 질문은 초대교회에서 논쟁이 됐던 질문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고통을 호소하셨습니다. '하나님도 고통을 당하시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지주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절대 고통을 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영지주의(靈智主義, Gnosticism) 기독교란 주후 1~3세기에 지중해 일대에 번창했던 기독교 최초의 이단종파로, 플라톤의 영육이원론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영인 신은 결코 악인 물질, 즉 육신을 입고 올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영지주의의 일파인 에비온주의자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처음 내려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시기 직전에 떠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이 고통을 당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육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을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즉 하나님이 성육신 하신 것을 부정하는 영을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분별하라"고 경고했습니다(요한 1서 4:1-3).
사람들은 보통 신을 영적이고 비물질적 존재로, 그래서 보이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무한한, 특히 전혀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전능한 존재라고 상상합니다. 하지만 그런 신은 성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독일의 안네 프랑크와 동갑내기로 『안네의 일기』를 읽고 자기 민족의 죄악에 눈을 뜬 독일의 여성신학자 도로테 죌레(Dorothee Soelle)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을 고민하며 『고난』(Suffering)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책에서 하나님의 전능과 고난의 문제를 깊이 사색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는 악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고 또한 전능하시다면 세상에는 악도 고통도 없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선하지 않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시지만, 전능하지 않아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또한 선하신데 어떻게 세상에 악과 고통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먼저 죌레는 '모든' 고난을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신학을 반대했습니다. 이런 신학은 언뜻 신앙심이 좋은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600만 명이나 학살당한 아우슈비츠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 600만 명 안에는 무고한 어린이들과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일제의 식민지배와 심지어 세월호의 침몰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서는 단 한 번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의 노예살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고난과 억울한 피해사실을 하나님의 벌 혹은 시험, 사랑의 연단이라고 말하는 것을 죌레는 기독교인의 '자기학대'(masochism)라 불렀습니다. 자기학대, 즉 '마조히즘'이란 복종함에서 기쁨을 느끼는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종종 불의한 것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죌레는 이런 식의 자기학대가 하나님을 '가학하는 하나님,' 즉 '사디스트'(sadist) 하나님으로 만든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학대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분인 것처럼 만든다고 경계합니다. 이런 하나님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죌레는 "만약 당신이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구체적으로 알면 결코 고문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신 그는 "악은 주소를 가지고 있고 전화번호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죌레는 이 말을 하면서 "Cyclone Beta"나 "IG-Farben Company"와 같은 회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이 회사들은 아우슈비츠에서 사용된 독가스를 생산하던 회사입니다. 죌레는 고난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모든 고난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결단코 반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죌레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했다고 말하는 신학을 반대합니다. 이런 신학은 언뜻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칫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기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희생을 계획하거나 방치한 '아동학대의 범죄자'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다고 우려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사이의 관계를 고심하던 죌레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기록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1986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의 생환기록 『흑야』(The Night)입니다. 지난 2월 18일 주일에 소개했던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소개합니다.
하루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SS 대원들이 강제노동을 막 끝내고 돌아온 유대인 포로 전원을 광장에 집합시킵니다. 규율을 어긴 세 남자를 공개처형 하기 위해서입니다. 빵을 훔쳐 먹은 죄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수 천 개의 눈동자가 그 아이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꽉 깨문 채였습니다. SS에 협조하던 유대인 간수도 차마 그 아이의 목에는 밧줄을 걸지 못했습니다. 세 명의 SS대원이 그 일을 대신했습니다. 그 때 엘리 위젤의 뒤에 서 있던 어떤 사람이 나직이 묻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시지? 그가 어디 있냐고!' 상관의 지시가 떨어지자 세 개의 의자가 굴러 떨어집니다. 순간 모든 사람의 숨이 멎습니다. 이미 쇠약해져 있던 두 성인 남자는 금새 몸이 축 늘어졌습니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 밧줄은 아직도 꿈틀거립니다. 아이의 몸이 너무 가벼워 아직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소년은 거기에 그렇게 매달려 30분 이상이나 죽음과 삶 사이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위젤의 뒤에서 다시 같은 사람이 더욱 격앙된 목소리로 나직이 묻습니다. '신이 어디에 있는 거야? 하나님이 지금 어디 있냐고!' 그 때 위젤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려 나오는 이런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지금 여기 있잖아. 바로 여기 교수대 위에 달려 있잖아!'
실제 아우슈비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의 연기로 사라질 때마다 위젤은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물었습니다. 아무 응답도 주지 않는 '신의 침묵' 앞에서 그는 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교수대에 달린 그 어린아이에게서 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저 멀리 우주 밖에서 인간들에게 일방적으로 시험과 고난을 내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교수대 위에서 그 아이와 함께 매달린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죌레도 위젤을 따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 않고 십자가에 달려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십자가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랑은 십자가로 귀결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 세상의 응답이었다고 죌레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고통을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불의와의 대결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됐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요한 2:17, 새번역)이 그를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의 열정(passion)이 결국 그의 수난(The Passion)의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신에게 바쳐진 희생제물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무고한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사건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Rene Girard)입니다. 돈키호테와 같은 유명 소설 속의 인물을 탐구하던 그는 무엇이 되고자 혹은 무엇을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자율적이 아니라 타율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자발적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매개를 통해 일어나는 '비자발적 욕망'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어떤 비싼 제품을 욕망한다고 할 때 그것은 나 혼자 만들어낸 욕망이 아니라 타인이 가진 것을 보거나 광고를 통해 가지게 된 타율적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모방 욕망'이라는 유명한 테제를 지라르가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욕망하게 만든 그 타자 혹은 중개자가 욕망의 유발자임과 동시에 경쟁자, 나아가 방해자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폭력이 시작됩니다. 그것이 인간 사회 모든 폭력의 씨앗이자 '본질적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사회는 폭력의 악순환으로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는 어떻게 사회를 유지해 왔을까요? 지라르는 어느 사회에나 모방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존재함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고대사회의 희생제사가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라르는 인류의 모든 희생제사는 폭력으로 폭력을 이겨내는 사회유지 장치임을 발견했습니다. 한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위기의 책임자로 한 사람을 지목하여 그 사회의 상호폭력을 그에게로 집중시킴으로써 다시 평화를 회복하는 메커니즘입니다. 지라르는 이러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성서에도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도 깊은 반목과 갈등 그리고 폭력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8:14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지라르는 인류사회의 모든 신화에서의 희생제사와 성서의 희생제사가 결정적으로 구분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모든 신화에서 집단폭력의 희생제물은 '죄인'입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희생양은 오히려 '무고한 존재'입니다. 신화는 박해를 가한 자에게는 죄가 없고 오히려 희생된 자에게 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으로써 폭력으로 폭력을 감추고 있다는 진실을 숨깁니다. 하지만 성서는 진실을 드러냅니다. 성서는 십자가 사건에서 희생된 그리스도가 무죄일 뿐만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 고난당하는 모든 희생양들이 무죄라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사회의 모든 폭력의 악순환을 근원적으로 종식시키고, 이 땅의 모든 무고한 자들의 희생을 중지시키는 사건이고 상징인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모방 욕망과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평생의 연구를 통해 르네 지라르가 얻은 결론은, 기독교는 한물 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얻을 가치가 있는 최고의 진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라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악의 뿌리, 즉 사탄이 어떤 존재임을 우리에게 환기시킵니다. 인간사회의 모든 폭력의 근원, 모든 악의 뿌리, 즉 성서가 말하는 '사탄'은 다름 아닌 우리의 욕망, 정확히는 우리의 '모방 욕망'이라고 그는 결론지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유혹자, 비난자, 이 세상의 통치자, 어둠의 왕자, 태초의 살인자인 사탄은 저 밖에 있는 어떤 유령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는 모방 욕망입니다. 거기에서 모방 폭력이 일어납니다. 빌라도의 법정에 모인 군중은 흥분해서 너도나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오늘도 빌라도의 법정에서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는 군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는 우리의 욕망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자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서 가장 뭉클한 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손과 발에 못 박는 사람을 향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누가 23:34)라고 말씀하는 장면일 겁니다. 우리말에 '숭고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한자로 숭고(崇高 / 독일어 das Erhabena, 영어 the Sublime)는 높을 '숭'에, 높을 '고'입니다. 그러니까 높고 높은 것이 숭고입니다.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 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니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이렇게 어머니의 사랑처럼 높고 높은 게 숭고입니다. 십자가는 아름답지 않습니다. 십자가,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로마제국의 형틀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추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는 숭고함이 있습니다. 인간의 통속을 뛰어넘는 숭고함이 있습니다.
순진한 믿음
고전 2:1-5 / 조학환목사(하강교회)
1. 순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언젠가 어떤 유명한 배우가 ‘나는 개그맨들을 정말 존경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뭐냐고 했더니 자기들은 남이 다 써 준 각본대로 연기만 하면 되는데 개그맨들은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머리를 쥐어짜서 뭔가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고 그 아이템을 가지고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하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매 회마다 색다른 소재를 발견한다는 게 너무너무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며 자기는 그렇게 못할 것 같다고 하며 그래서 개그맨들을 존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그 말을 듣고 보니까 개그맨들이 다시 보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게 뭐냐하면 시키는대로 하는 것은 쉽고,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하여 물질적인 것이나 지식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미 전부터 있었던 것, 남이 다하는 것,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 연구해놓아 지금까지 해 왔던 것들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하지 않았던 것, 아직 표준화 되지 않고 매뉴얼이 없고 스스로 뭔가 개발하며 표준화시키고 매뉴얼을 만들고 하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하다 못해 간단한 장난감을 하나 만드는 것도 뭔가 완전히 새로운 것을 혼자 연구해서 만들려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은 인생은 더욱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한 길이기 때문에 혼자 생각하고 연구하고 경험하여 개척하며 가려면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많은 오류와 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너무나 고차원적이고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인생의 문제를 온전하게 풀어낼 방정식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들은 목사님, 왜 불가능합니까? 왜 혼자 연구하고 혼자 생각하는 길입니까? 우리 선인들이 오랜 세월의 경험을 통해 생각하고 연구해서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닙니다. 우리 선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그들이 알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길을 나름대로 연구해 만든 매뉴얼이기 때문에 물론 그 중에 옳은 것도 많지만 그러나 왜곡되고 잘못된 것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은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대하여 말씀하신 성경 말씀뿐입니다. 오직 거기에 우리 인생이 무엇인지, 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궁극적인 목적지가 어디인지 완벽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매뉴얼인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길만이 유일하게 완전히 안전한 길이고 가장 쉬운 길이고 완전하게 옳은 길이고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는 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은 인간 자체가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한 매뉴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한번도 가보지도 않은 길이고 알지도 못하는 길인데 자꾸 혼자 이리저리 연구하며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너무나 큰 시행착오와 낭패를 경험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영원한 고통 속으로 갈 수밖에 없는 그런 딱한 처지에 이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아니 도대체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어떻게 인생의 완벽한 매뉴얼을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매뉴얼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마다하고 자꾸 알지도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일에 대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실패를 경험하고 고통을 맛보고 생명의 기쁨은커녕 멸망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니 이미 하나님께서 다 가르쳐 주신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이, 목사님. 하나님이 정해주신 매뉴얼대로 사는 게 어떻게 쉽습니까?’하실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게 쉽지 않으면 무엇이 쉽습니까? 알지도 못하는 길을 혼자 개척하며 연구하며 가는 게 쉽습니까? 혼자서 온갖 유혹과 어둠의 세력과 상황과 환경과 세상의 거센 풍파와 맞서 싸우며 사는 게 쉽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미 정해 놓으신 길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능력과 지혜로 모든 어둠의 세력들과 약한 것과 도전과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가는 길이 쉽습니까? 전혀 모르는 길을 혼자 찾아가는 게 쉽습니까? 안내자를 따라 가는 게 쉽습니까?
여러분, 신30:11절과 14절 말씀 보십시오. 11절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보세요. 이 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 저 미국이나 러시아라도 가야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우리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따라가는데 억만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피땀 흘리며 뼈 빠지게 일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머리 싸매고 골머리를 앓으며 연구해야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농사짓는 게 쉽습니까? 하나님 믿는 게 쉽습니까? 세가 빠지게 일하는 게 쉽습니까?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게 쉽습니까? 아니 얼마나 쉽고 평안하고 좋습니까? 그냥 교회에 와서 평안히 앉아서 말씀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얼마나 쉽습니까? 하나님이 그렇다 그러면 네, 하나님 알겠습니다. 그러고 그냥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명 하나님께서 생명의 기쁨과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놀라운 은총가운데 살게 하십니다. 세상에 이 쉽고 이 좋은 것을 왜 안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자신이 알지도 가보지도 못한 길을 자꾸 혼자서 자기 마음대로 어렵게 가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길, 예수님이 우리의 인도자가 되셔서 이끌고 가시는 그 길을 그냥 예수님만 졸졸 따라 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완전한 매뉴얼인 성경을 따라 삶을 영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가운데 생명의 길, 복의 길로 잘 달려가 생명의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자기 지혜를 의지하면 실패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되는데요,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정말 자신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던 사람 바울이 한 때 실패를 경험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며 그 실패를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또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보지는 않았지만 3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여러분, 보세요. 바울이 약하고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누굽니까? 그는 빌립보에서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하고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귀신을 쫓아내고, 그의 몸에서 앞치마나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자 기도하여 살게 한 사람입니다.
이런 천하의 바울이 약하고 두려하고 심히 떨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아덴에서의 실패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서 자신의 지식과 지혜로 사람들을 설복시키려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아테네는 헬라제국의 수도로서 당시 철학, 문화, 학문, 종교,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으나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도 있을 만큼 우상이 득실거리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울은 의분이 일어나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생각하는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겠다면서 그게 바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라고 역설하며 철학적 지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설복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덴 사람들은 그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말쟁이인가보다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게 낙담하여 그곳을 포기하고 고린도로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했던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이성과 지혜를 의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2절에 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즉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바울은 아테네에서 자기 이성과 지혜를 의지했다가 철저히 실패하고 그곳을 떠나 고린도로 오면서 다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절대로 내 꼴 난 지혜를 의지하지 않으리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증거하리라. 그리고 고린도에서는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부활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처럼 오직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결국 고린도에서 성공적으로 교회를 세우고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구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참된 지식이나 능력은 결코 인간의 지식과 지혜와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의 그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이성과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그 도를 따라 살아갈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진정한 지혜와 능력 가운데 생명의 길로 달려가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이기고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진정한 능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세상이 아무리 외적으로 좋아진다해도 인생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여러분, 보세요. 오늘날 세상은 불과 10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습니다. 과학이나 문화나 교육이나 소득 수준이나 모두 백배 천배는 올라갔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물론 가난과 질병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해결된 문제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백배 천배 많습니다. 못먹고 못살던 옛날이나 잘먹고 잘사는 지금이나 병들고 늙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죄악은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빼앗고 사기치고 강도짓하고 간음하고 살인하고 성폭력을 저지르로 하는 일들은 더욱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면 좀 감사하며 살만도 한데 힘들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극심한 이기주의와 물질주의로 말미암아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툭하면 싸우려고 대들고 폭언과 독설을 퍼붓고 투쟁을 하곤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아무리 과학과 문화와 지식이 발달하여 혹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좀더 풍요로워진다해도 그런 걸 가지고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도리어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더욱 죄의 길로 달려감으로 말미암아 더욱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지식과 지혜와 과학과 물질문명에 내 인생을 맡기면 안 됩니다. 세상의 지식과 과학과 물질문명이 좀 발전했다고 그것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살아간다면 세상에서도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결국 영원한 멸망길로 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게 참된 능력이요 지혜요, 그런 사람들이 여기서도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누리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인생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5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믿음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꼴난 인간의 이성과 지혜와 경험으로 요리조리 백날 생각해봐야 참 생명의 도는 알 수 없다. 그저 우리의 약함과 무지와 부족함과 허물과 죄를 인정하고, 그저 순진한 아이처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의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그러면 영광의 나라를 알게 되고 그럴 때 생명의 능력이 넘쳐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별 것 아닌 지식과 이성과 경험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런 거 내려놓으십시오. 죄와 무지와 한계 속에 있는 인생이 백날 연구하고 따져보고 해봤자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맨날 거기가 거깁니다. 알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고 이해하면 그게 이상한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죄와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는 것뿐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 예수님 안에 영광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그냥 어린애처럼 받아들이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확실히 믿게 하십니다. 그러면 생명의 능력과 은혜가 넘쳐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삶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순종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복음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고 따라가면 복음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에 분명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4절을 보십시오.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인간의 이성이나 능력이나 지혜나 이런 다 집어 치우고 그냥 단순무식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에 성령께서 역사하셨고, 성령이 역사하시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 앞에 순진한 사람이 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분명 은혜의 사람,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지식을 신뢰하고 그걸 따라가는 사람은 너 잘났으니 네 맘대로 해봐라 하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생명의 은총을 누리는 길은 요원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진정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며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순진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험한 풍랑 일어나는 바다위로 걸어오라고 하자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물위를 걸어서 주님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니까, 주님이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물위로 뛰어내렸고 그리고 실제로 물위를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가다가 험한 풍랑 일어나는 바다를 보자 그만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러나 인간적으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고 그러자 능력을 잃어버리고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어땠습니까? 하인이 병이 들자 예수님을 찾아가자 예수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자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주님이 수고스럽게 저희 집까지 가실 일이 뭐있습니까? 그냥 말씀 한마디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이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하시자 그 즉시 하인의 병이 낫지 않았습니까?
열두 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대어도 낫겠다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졌을 때 병이 나았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침으로 진흙을 이겨 눈에 바른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지시를 받고 그대로 하자 눈이 떠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니까 순진하게 드리자 하나님께서 이삭도 살려주시고 복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순진하게 골리앗을 향해 돌진하여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나아만장군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을 듣고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까 문둥병이 떠났습니다.
여러분, 믿음에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가 정말 우리 자신을 안다면 모든 면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안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본다고 하는 순간 아무것도 못 보는 진짜 소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고 하십니다. 그들은 성경과 천국과 하나님에 대하여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못 보는 소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차라리 부족하고 연약하고 미련함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더라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참된 생명과 진리를 알게 되련마는 그 꼴난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여 결국은 영원한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소경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순진하게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내 지혜나 이성이나 감정이나 경험을 일단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뭐가 어떠니 저떠니 이야기하지 말고 그저 겸손하게 엎드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을 믿고 저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겸손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예배드리고 설교 듣고 찬양하고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성령의 능력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더욱 은혜와 능력과 기쁨이 충만한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의 전도
고전 2:1-5 / 박덕기목사(송정중앙교회)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지혜의 절정이어서, 결코 미련한 것일 리가 없지만, 다만 멸망하는 인생들에게는 그것이 미련하게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받는 사람들의 약함을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이 말은 하나님께서 불러서 예수 믿게 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첫째,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육체를 따라”라는 말은, 세상적인 입장에서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는, 헬라의 철인들처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많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지혜와 웅변에 뛰어난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데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제외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출신의 미천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 만민을 제자로 삼도록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세상에 전파할 그릇이었습니다. 학문과 지혜를 뽐내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히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둘째, 능한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능한 자란, 정치적으로 권력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권세 있는 정치인들이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어떤 새로운 계획이나 제도를 창시할 때는, 그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의 복음은, 결코 위대한 왕이나 정치가의 후원 하에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기독교와 그리스도인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박해하였습니다. 기독교 복음은 힘없는 서민에 의해 전파되었습니다.
셋째,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문벌 좋은 자란, 왕족이나 혹은 명문 귀족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은, 상류계급 출신이 많지 않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들은 그 때의 그리스도인 중 대다수가, 육체적으로 우수한 조건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밝혀줍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기준은, 외모나 학식, 재능, 물질과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즉 학식이나 재산, 출신 성분 등은, 세상적인 지혜에 의한 가치 판단의 기준일 뿐, 인간의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분명히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 ‘천한 것들’ ‘없는 것들’-무디는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네 가지 군대라고 하였습니다. 지혜, 권세, 부귀는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들은 모두 그것을 흠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혜 자나, 권세 자나, 상류층을 즐겨 택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시려 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거기에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러하십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들은 이러한 세상적인 지혜와 권세와 부귀영화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력으로 성도들을 유혹해, 믿음을 거두어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웃으시고 꺾어버리십니다. 그것도 세상의 미련하고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능하고 문벌 좋은 자보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없는 것들을 즐겨 택하여 쓰실까요? 빛은 밝은데서 보다 어두운데서 더욱 잘 드러나는 법입니다. 밝은 태양빛 아래서는, 밝은 전등도 무의미하게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사람들에게 뚜렷하게 나타나려면, 본래 지혜 있고, 능하고, 강한 자보다,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없는 사람들이어야, 더욱 밝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또한 이러한 사람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29절의 말씀처럼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얻는 일에 있어서, 누구든지 자기의 힘을 믿거나 자랑하는 자는, 주님의 보혈을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자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도,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2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어떠한 방법으로 전했는가? 그의 실제 체험을 통한 간증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 들려, 그곳에서 1년 반 동안 전도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헬라의 웅변이나 철학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웅변조나 철학적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수사학에 능한 아볼로를 좋아한 아볼로 파는, 사도 바울의 말이 시원치 않다고 흠을 잡기도 한 모양입니다. 사도 바울은 훌륭한 연사나, 유명한 철학자인체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청중의 환심을 사려고 유창한 웅변이나, 깊은 철학적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표현과 고상한 생각으로, 청중의 마음을 즐겁게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전도자였지, 수사학자나 철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것들을 다 배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만일 사도 바울이 하려고만 했더라면, 당대의 그 누구보다 깊고 심오한, 철학적인 연설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위싱턴 D. C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사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이 나가는 교회의 설교자들은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설교를 굉장히 유식하고 고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순수한 설교를 듣기 위해, 근교에 있는 시골 교회로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명한 정치인임이 알려지면, 시골 교회 역시 다음 주일부터 또 목사의 설교가 세계정세니, 경제니 하면서 순수성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가들의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목사님,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주십시오.”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당시 헬라 철학이 왕성하여, 지혜와 웅변이 환영받던 고린도에서, 복음을 인위적으로 수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 소극적인 면에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고, 적극적인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했다고 했습니다. 2절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간 유일한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전할 때, 예수님을 한 사람의 선생으로, 또는 모본할만한 사람으로, 인류의 어떤 새로운 지도자로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한 말 중에는, 사도 바울이 다른 많은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모든 것들을 마치 알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빌 3:7-8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관한 지식을, 모든 지식의 구심점과 정수로 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지혜의 정점에 오르는 유일한 지식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하잘 것 없는 지식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곧 피의 복음, 구원의 복음, 생명의 복음만을 단순하게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엄청난 대주제를 전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3절에 “내가 너희 가운데에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말을, 신중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안전을 두려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용기나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백절불굴의 강직하고 담대한 위인이었습니다. 이 같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라는 주제가 너무나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며, 그것을 감당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느끼는, 겸손함에서 오는 떨림이었습니다. 진정한 전도자는 이렇듯 두렵고 떨림을 느끼면서,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믿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엉터리 전도사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의 친구에게 편지하기를, 목회처럼 쉬운 것이 없다고 하면서, 서점에 가면 설교집이 많이 있으므로 그것을 사서 읽어주기만 하면 되니, 너도 목회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엉터리 전도사가 가는 교회에서마다, 처녀 교인을 꼬여서 줄행랑을 치곤했습니다. 한 번은 도망쳐버린 처녀의 어머니가, 그 전도사의 고향으로 그를 찾으러 온 것을 제가 직접 만나본 적도 있습니다. 목회처럼 쉬운 것이 없다고요? 그러나 목회처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까요? 설교처럼 쉬운 것이 없다고요? 그러나 설교처럼 어려운 일이 있을까요? 김선도 목사님은 “교인들은 항상 목사에게 야구선수의 홈런 같은 설교를 원한다. 그러나 홈런 같은 설교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라고 실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 앞에서 말씀드린 철딱서니 없는 전도사처럼, 그 사역을 쉽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호언장담하지도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감당했습니다. 4-5절에 “내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만고의 전도의 모본을 배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로 유혹하는 말, 근사한 말, 아름다운 말, 공교한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했습니다. 살전 1:5절에도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한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같은 바울의 전도는, 아름다운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전도는 성령의 능력 있는 증거로, 많은 열매와 커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어떤 방탕한 술주정꾼이 예수님께 붙들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이 사람에게 신앙을 버리게 하려고 “자네와 같은 양식 있는 사람은, 성경에 있는 기적을 믿을 수 없을 걸세. 예를 들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것 같은 기적 말이야”라고 선동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는지 아직 나는 잘 모르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집에서는 예수가 맥주를 가구로 변화시키는 것은 사실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술 취할 때마다 가구를 때려 부수어 성한 것이 없었는데, 예수를 믿은 후에는 술을 끊어버리게 되니, 그 술값으로 값비싼 가구를 많이 장만할 수 있었다는 간증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사가 나옵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된 것인가? 꼬치 고치 캐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맹인에게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맹인은 말하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다시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맹인은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고 하면서, 힘주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은 이렇게 방탕한 술주정꾼을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도 하고,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뜨게도 하는 체험의 종교, 능력의 종교, 생명력이 약동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기독교회의 역사는 전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온 세상에 이처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알려진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헌신적인 전도활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여, 모진 핍박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오늘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받게 된 성도는, 마땅히 복음전파에 열심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는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이기도 합니다. 죄악에 빠져 멸망의 길로 치닫는 사람들을, 돌이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기쁨과 환희, 그로 인하여 영광 받으실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에게 준비하신 상급 등은, 전도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같이 소중한 의무요 특권인 전도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1.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뛰어난 스승이나 어떤 완전한 모범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 곧 우리의 죄를 대속키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우리들도 사도 바울을 본받아, 오직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2. 전적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전도할 만한 말주변이 없다, 지식이 없다, 혹은 용기가 없다는 식으로, 전도를 포기하거나 기피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전도할 말주변이 없다거나, 지식이 없다거나, 시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노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민이, 사도 바울 자신에게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열심과, 죽어가는 영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 어디서나 전도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반드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170여명 제자대학 졸업생 및 재학생 여러분, 꿈에도 소원은 재생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몇 년 몇 월까지 12명의 제자를 삼겠다고, 각자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것이 있는데, 그 약속을 꼭 지키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사도 바울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무더운 여름철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기를 위하여 항상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신 4:34-35, 고전 2:1-2 / 이성희목사
서론
일본의 어느 대학자가 나룻배로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넓은 강이므로 건너는 시간이 길어지자 무료해진 학자가 사공에게 말을 건냈습니다. “사공양반, 철학자 플라톤을 아시오?” 사공은 “제가 그런 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학자는 “당신은 철학을 모르기 때문에 인생의 절반을 잃은거요. 그럼 프랑스가 어디 있는지 아시오?” 라고 했습니다. 사공은 “웬걸요. 저 같은 사람이 그런 것을 알 수 있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쯧쯧, 당신은 인생의 4분의 1을 잃어버렸소. 프랑스는 유럽에 있는 나라이며, 예술의 나라요. 그럼 시(詩)에 대하여 좀 알고 있소?” 학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어른, 전 그런 거 다 모릅니다.” 사공은 여전히 모른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학자는 불쌍하다는 듯 사공을 쳐다보았습니다. 강어귀에 가까이 왔을 때에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 배가 뒤집혔습니다. 물에 빠진 사공은 허우적거리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학자에게 물었습니다. “학자님, 수영할 줄 아십니까?” “난 수영 못해요.” 그 때 사공은 “그렇다면 학자님은 목숨을 잃은 겁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학문에는 뛰어나지만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여 사는 법을 모르는 학자입니다. 세상에는 영원히 사는 법을 모르는 이런 똑똑한 바보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철학과 예술과 문학이 아니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모든 학문과 아름다움을 얻어도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흔히 하는 말처럼 “다 살자고 하는 일인데” 죽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다른 거 없어도 이것만은 있어야 합니다. 다른 거 다 잃어도 이것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생명입니다.
최근에 ‘브리티시 오픈’이란 골프 대회가 끝이 났습니다. 필 미켈슨이란 선수가 우승하였습니다. ‘브리티시 오픈’은 세계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픈대회입니다. 그래서 많은 경기가 있고, 많은 오픈대회도 있지만 유일한 오픈이란 뜻으로 ‘디 오픈’(The Open)이라고 합니다.
종교를 사전적 의미에서는 ‘삶의 근본 목적을 찾는 문화 체계’ 혹은 ‘모든 민족에게서 보이는 문화 현상’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문화 활동입니까? 우리 기독교가 문화 체계입니까?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종교가 문화라면 기독교는 생명이다”. “모든 종교가 종교가 아니라면 기독교는 종교이다”.
기독교는 생명을 공급하고, 영생을 보장하는 유일한 종교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유일한 종교가 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아니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덕이나 윤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사도행전 18:1-17에 기록된 2차 전도여행 때에 고린도에서 증거한 내용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제법 긴 시간인 1년 6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잘 압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고린도의 철학이나, 문학이나, 이방종교와의 논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왜 바울이 알고 전하고자 했던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입니까? 바울에게 이것 외에 어떤 것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유일한 가치가 우리의 가치가 되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알고 전파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알고 전하는 것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1에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라고 합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은 헬라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들입니다.
말은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말의 힘’이라고 합니다. ‘말의 힘’이란 제목의 책도 있습니다. 말은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합니다. 용기를 주기도 하고, 실망을 주기도 합니다. 말은 죽을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산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브리다’라는 그의 소설에서 “말은 그 어떤 의식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 사람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도 합니다.
“큰 사람은 사상 이야기를 하고, 보통 사람은 시사 이야기를 하고, 작은 사람은 남의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작은 사람들이 하는 말 때문에 남을 아프게 하고, 상하게 하고, 죽게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인터넷의 얼굴 없는 말이 연예인들과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최근 정치권의 막말 파문은 나라를 혼란에 빠트립니다.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는 옛 사회에서는 아주 엄하게 벌을 내렸습니다. 옛날 아덴에서는 이런 사람의 시민권을 박탈하였습니다. 로마에서는 이런 사람을 낭떠러지에서 밀어 떨어트렸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코를 잘랐습니다. 왜 그렇게 엄한 벌을 내렸습니까? 말은 사람을 죽게 하는 독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은 그 자체가 감동하는 힘이 있고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말은 사람을 “들었다 놨다”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복음이 전파되지는 않습니다. 복음은 말의 힘에 의하여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와 처칠은 똑같이 연설의 달인이었습니다. 히틀러는 연설로 게르만족을 흥분시켰고 분노와 적개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그의 말로 게르만족에게 힘을 주어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 줄 알았지만 결국 패배하였습니다. 처칠은 영감 있는 웅변과 바르고 선하고 인격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영국인에게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동력이 되었습니다. 말은 곧 힘입니다. 말은 국력입니다.
그러나 말을 잘한다고 전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지혜가 풍성하다고 전도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이 전도에 방해가 되며 세상 지혜가 전도를 막을 때도 있습니다. 전도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게 하실 때 말을 잘못하는 모세를 앞세우셨습니다. 출애굽기 4:10에는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14절에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하십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 아론을 보내는 것이 훨씬 유리했습니다. 아론은 모세보다 세 살이나 많은 형이었고, 모세는 동생이었습니다. 아론은 애급에 머물고 있었고,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있었습니다. 아론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고, 모세는 말을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이 아니라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셨고, 아론이 동생인 모세를 돕게 하셨습니다. 구원이 사람의 말에 있는 것도, 사람의 나이에 있는 것도, 사람의 권위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부흥사인 무디가 어느 대학교에서 설교하였습니다. 그 대학교의 문학과 교수 한 분이 “목사님, 설교는 너무 좋았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문법적으로 틀린 부분이 50여 군데나 되는군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무디는 “충고는 감사합니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문법도 안 맞는 언어로 수천 명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 정확한 언어로 몇 사람이나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습니까?” 무디는 평소에도 문법적으로 틀리는 말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심지어 한 번 설교에 1,500번 정도의 언어의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거창한 웅변이나, 정확한 언어 구사나,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사람을 구원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극진한 마음이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목소리와 문법과 단어 하나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설교를 시작하면 말에 빠져 내용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설교이지만 오히려 아름다운 말과 지혜가 복음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어느 기관에서 한국교회 여러 목사님들의 목소리로 ‘듣는 성경’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성우들이나 배우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부드럽고 듣기가 좋습니까? 목사님들이 아무리 잘 해도 그들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거친 목소리, 어색한 억양으로 낭독한 성경이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연세가 높으신 103세이신 방지일목사님도 한 부분을 하셨고, 저도 한 부분을 녹음을 해 놓았습니다. 목소리가 좋은 것도 장점이지만 은혜는 목소리에 비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을 암송하고 잘 알면 뭘 하겠습니까?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다른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을 잘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이기에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일서 3:18에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이 말과 지혜가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생활신앙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과 지혜로 전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으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뿐입니다.
고린도전서 2:2에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유일한 지식, 관심, 전파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바울의 관심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식적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5:34에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고 합니다. 가말리엘은 당대의 위대한 랍비였습니다. 랍비 가운데 선택된 7인을 ‘라반’이라고 하는데 가말리엘이 라반이었고, 그의 아버지 시므온이 라반이었고, 그의 조부는 위대한 랍비 힐렐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3에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라고 합니다. 바울은 유대 최고의 명문 율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율법이나, 철학이나, 문학에 조예가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식이나, 말이나, 철학을 알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때문입니다.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많은 지식을 배설물같이 여겼습니다. 웬 배설물입니까?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비교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예수님의 천국 비유 가운데는 ‘감추인 보화의 비유’와 ‘진주장사의 비유’가 있습니다. 두 비유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모든 것을 팔아서 하나를 산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천국이란 유일한 관심입니다. 많은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것입니다. ‘진주장사의 비유’에서는 값진 진주 ‘하나’를 샀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 하나를 살 수 있는 유일한 가치가 진주입니다. 많은 것 가운데 선택이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음(No choice)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천국이며 이것이 천국에 들어갈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B(birth)와 D(death) 사이에는 C(choice)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인생에서 모든 선택이 탁월한 선택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탁월한 선택이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만은 탁월한 선택이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와 십자가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만 선택하라면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할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만 가질 수 있다면 된다고 하는 한 가지가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이것 하나만 붙들고 살았고, 이것 하나만 전하기를 그렇게 바랐습니다.
“내가 평생에 가장 잘 한 일은 당신을 만난 일이다”라고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정말 남편과 아내가 서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을 보지 않아도 성공적 인생입니다. 이 말이 아부로 하는 말이 아니고,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라면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모든 지식, 모든 재물, 모든 시간과 모든 열정을 다 바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알고, 전하고, 최상의 가치라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바울의 이 신념이 우리의 신념이기를 바랍니다.
미국 프로 야구에 칼 립켄 주니어라는 전설적 선수가 있습니다. 이 분은 철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서 2,632게임 연속출장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기록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 관리도 잘 해야 하고, 실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는 21년 동안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구단에서 한 번도 다른 구단으로 이적하지 않고 은퇴하였습니다. 어느 글에 보니 그의 성공은 단순성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눈부신 성장의 원인을 일찍부터 한 우물만을 판 단순성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어릴 때 동네 다른 아이들은 모든 스포츠에 만능이 되려고 하였지만 그는 야구에만 몰두하였습니다. 그에게 운동이란 야구 하나뿐이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은 야구뿐이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가장 강력한 삶은 단순한 삶입니다. 우리 신앙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는 만능 믿음이 아니라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아는 단순한 믿음이 가장 강력한 믿음입니다.
위대한 영성가 토마스 머턴은 “당신의 삶을 단순화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갈망을 단순화하라. 당신의 삶을 영성화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갈망을 영성화하라”고 하였습니다. 단순성이란 영성훈련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십자가 하나에 믿음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믿음이며, 순수한 믿음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3만 명가량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인물은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필요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과 지식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주체이며, 신앙의 핵심이며, 지식의 유일한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확실하게 믿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찬송 415장 3절에는 “십자가 그늘에서 나 길이 살겠네 나 사모하는 광채는 주 얼굴뿐이라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 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고 합니다. 우리 찬양의 내용은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만이 가치입니다. 십자가만이 영광의 내용입니다.
결 론
톨스토이의 민화에 ‘세 명의 수도사’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러시아의 아주 먼 섬에 세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아주 외딴 섬이기에 아무도 가본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주교는 큰마음을 먹고 그 섬에 가서 수도사들을 보기로 작정하고 떠났습니다. 그 섬에 도착하여 수도사들을 보니 주기도문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교는 최선을 다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고 자신의 한 일에 만족하며 그 섬을 떠나 돌아왔습니다. 배가 바다 한 가운데쯤 왔을 때 바다 위에 세 수도사가 물위를 걸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에 와서 말합니다. “주교님,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잊어버렸습니다.” 주교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기도하였습니까?” “우리는 그냥 이렇게 아뢰지요. 사랑하는 하나님, 하나님도 세분이시고 저희도 셋이니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교는 그들의 거룩함과 단순성에 탄복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의 땅으로 돌아가 평안히 거하시오”. 신앙이란 단순함에서 최고의 가치를 품어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을 단순화합시다. 수많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유일한 목적이며 핵심입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더 가치 있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만을 알고 전하는 십자가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최대의 관심사
고전 2:1-2 / 조용기목사
할렐루야~ 여러분 사람들에게는 마음속에 제 육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매년마다 새해 기도를 드리면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육감을 받는데 금년도만큼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육감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가슴이 벅차고 무언가 좋은 일이 우리 민족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이 복 주실 때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잘 섬기는 우리들이 되십시다. 두고 보십시오. 좋은 일이 자꾸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입니다.
<서론>
오늘 저는 “최대의 관심사”라는 제목으로 여러분과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2007년 한 취업 사이트에서 일주일 동안 대학생과 직장인 56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20대 이상 성인남녀가 인생의 최우선 순위로 꼽은 것을 보면, 남성들의 경우는 부모가 최우선 순위였고 그 다음으로 연인과 배우자, 일과 직장 등의 순위였습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연인과 배우자를 최우선으로 꼽았고 그 다음으로 일과 직장, 부모 등의 순서로 꼽았습니다. 그러니 딸 낳은 사람은 손해 많아요. 엠파스 인터넷 신문에서는 3,361명을 대상으로 한 해 소망 중 가장 큰 것이 무엇인가를 설문조사 했습니다. 그 결과, 1위가 “돈 벼락을 맞고 싶다.”로 72%였습니다. 2위는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 좋겠다.”로 9%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간단히 우리가 말할 수가 없는 것은 우리 삶 중 최대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나오시는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의 관심사가 무엇이 제일 큽니까? 우리는 항상 그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최대 관심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간단히 말하면 십자가를 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도 모시고 하나님의 의도 모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의 최대관심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땅을 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가슴 속을 봐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그러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늘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막연하게 바라볼 것입니까? 땅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바라볼 때 막연하게 바라봅니까? 마음 속에 예수님 막연하게 바라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대죄의 대속물이 되신 것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언제나 느낍니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은 내 죄를 대신해서 매달린 것입니다.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고난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하고 예수님과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요, 감격하고 감사하기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은 우리 모든 세속과 더러움을 청산해 주시고 우리 병의 대속물이 되시고 우리 저주의 대속물이 되시고 우리의 죽음과 멸망의 대속물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완전히 희생제물이 되시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에 여러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로 6절에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십자가에서 허물과 죄악과 평화와 나음을 가져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변화가 안다가올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 마음이 생각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으로, 좌절감에서 희망으로,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세상에서 하늘나라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달라져야 하나님과 교통이 되는 것입니다.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대속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서 우리가 마음에 새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이후에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로 15절에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이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구약성서의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을 다 청산해 버리시고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마귀와 귀신들을 무력화하여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겨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마귀의 정사와 권세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율법은 여러분의 행동을 요구합니다. 율법하에 사는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일점일획도 놓침이 없이 다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여러분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은 사랑의 행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의 증거로써 사랑을 나타내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틀립니까? 신약시대에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할 때 의롭다함을 입고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실천하므로 의롭다함을 입습니다. 의롭다함을 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에는 율법 일점일획이라도 어기면 하나님 앞에 못서요.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사랑을 실천하므로 하나님의 영접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것이 신약에는 의롭게 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대속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빅톨 위고가 쓴 유명한 소설 「나인티 쓰리」라는 책에는 아주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란서 혁명 직후에 숲을 지나가던 병사들이 우연히 배고픔에 지친 어린 아이 셋을 데리고 있는 어머니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사들 중에 한 상사가 빵 한 덩이를 끄집어 내어서 그 어머니에게 주자, 어머니는 지체할 시간도 없이 그 빵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서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에게 나눠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상사와 같이 그 광경을 보던 한 젊은 병사가 빵을 주던 상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여자는 배가 전혀 안고픈가 봅니다. 빵을 받자마자 아들 셋에게만 나누어주는 것 보니까요.” 그러자 상사는 어깨를 탁 치면서 “야 이 사람아 그게 아니야, 어머니가 왜 배가 안 고프겠어? 그러나 어머니의 배고픔보다 그 속에 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이 더 강했기 때문에 배고픔을 억제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사랑을 따라서 빵을 나누어 준 것이다.” 그 말 참말이에요. 어머니라고 빵 안 먹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사랑 때문에 자기는 굶어도 자식들은 먹여야 되겠다고 빵을 나누어 준 것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류를 살리기 위해 우리의 죄와 더러움, 병, 저주, 죽음과 멸망의 대속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온 몸이 물과 피를 쏟기까지 고통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어느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당하고 죽고 싶겠습니까? 예수님도 살고 싶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시기를 “하나님이여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예수님도 그 고통을 면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걸머진 것은 그 고통이 괴로운 것보다도 여러분과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더 컸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고통 당하면 수많은 영혼을 살릴 수가 있다. 그들의 죄와 질병, 저주와 절망, 죽음을 청산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죽고 저들을 살리자.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지 우리가 마음에 저리도록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진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도 지치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슬프고 기쁘고 똑같았습니다. 정말 예수님 십자가 걸머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싫어했습니다. 그래도 걸머졌습니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기 때문에 그 사랑에 끌려서 십자가에 걸머지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2. 하나님 창조의 근본으로 돌아감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면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영혼이 죽음에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우리에게 비극인 것처럼 영혼의 죽음은 더 큰 비극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4절로 6절에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를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면 여러분의 허물과 죄가 사해지고 살아났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실제로 지금 여러분이 어디 앉아 있느냐. 하나님 보좌 옆에 앉아 있습니다. 영적으로 그런 상태입니다. 육체가 죽으면 여러분 영혼은 순식간에 아버지 보좌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 용서를 받고 정결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하루는 심신이 몹시 지치고 고통스러워서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데 갑자기 마귀가 나타났습니다. 마귀가 나타나서 큰 두루마리를 펴서 보면서 허허허 웃으면서 “읽어봐! 읽어봐!”합니다. 거기 보니까 마틴 루터의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가 소소난간으로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기록을 보자 마틴 루터의 마음이 짓눌리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야~ 이 마귀가 내 죄를 다 아는구나.’ 그러면 마귀가 웃으면서 “네가 무슨 종교개혁을 하느냐? 너는 지옥가기에 딱 적당한 사람이다.” 마음이 떨리고 두려워졌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루터의 마음에 번개같이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로 마귀를 향해 외쳤습니다. “마귀야! 네가 잊은 것이 하나 있다. 내 일생을 다 적을 때 마지막 한 사건을 적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 보혈로 모든 죄가 다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너는 적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는 이미 모든 죄에서 깨끗해 졌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참소하던 마귀가 순식간에 얼굴이 샛노래지더니만 도망을 치고 두루마리도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다시 성케하기도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리스도의 보혈로 이긴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지고, 아무리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리시고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죄로 인해 영혼이 죽은데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에서 해방이 되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저주 받아 가시와 엉겅퀴가 무성한 땅에 다시 축복이 회복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6.25사변 났을 때 얼마나 황폐하게 되었는지 그때를 지나지 않은 사람은 상상을 못합니다. 저는 부산 부두에 서서 그때는 중학생이었으니까 우리나라의 형편을 살펴보고 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나라의 희망은 다시 없다. 모두 다 거지고 모두 다 헐벗고 굶주리고 모두 다 배우지 못하고 모든 교육시설은 파괴되고 우리에게 희망이 어디 있느냐? 그 다음에 제가 신학 공부하기 위해서 서울에 왔을 때 서울에 종로 네거리에 나가면 다 무너진 건물 밖에 없습니다. 서울 어느 곳에나 사람 사는 도시 같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손을 대어서 도시를 건설하고 삶을 재건할지 알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정말 가슴이 아파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에 살 희망이 없으니 나도 잘 사는 나라에 가서 살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몸서리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그 한 5,60년 세월 짧은 세월에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이렇게 부강한 나라가 될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세계에서 배, 조선 제일 조선왕국이요, 철강도 제일이요, 자동차는 다섯째인가 여섯째나 가고, IT제품은 세계를 석권했고, 이제 원자로조차 블란서를 누르고 이기고 아랍에미리트에 들어가고 앞으로 좋은 일이 또 잔뜩 생길거에요. 그 무엇보다도 제일 늦게 받아들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오늘날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고 미국 다음으로 많은 선교사를 세계로 보냈고 미국 다음으로 온 세계 선교사를 많이 보내요. 그러니 하나님이 이 한국에 얼마나 큰 축복을 주셨습니까? 성경 그대로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영혼이 그렇게 잘되니까 하나님이 웃으시고 범사에 잘되라 그리고 강건하라.
저가 네 모든 죄를 사하시며 내 모든 병을 고치시며 내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내 소원을 만족케 하사 내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는도다.
정말로 하나님이 놀라운 은총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저주를 다 청산하시고 그 청산한 은혜가 지금 한국에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것 깨달아야 돼요. 나는 못한다. 안된다. 나는 저주 받았다. 나는 실패자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망해요. 마음에 소재를 해야 돼요. 저주를 다 청산해 버려야 돼요. 성경에 주님께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 무슨 말입니까? 입에 들어가는 것은 밥, 음식입니다. 음식은 들어갔다가 변으로 나와 버리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속에서 나오는 것은 원망, 불평, 탄식, 미움, 좌절, 도적질, 음란, 간음 온갖 더러운 것이 속에서 나옵니다. 이 속이 청산 안되고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는데 이 여러분의 속을 무엇으로 청산합니까? 십자가로 청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여러분의 속사람을 깨끗이 청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에 죄도 청산해 버리고 불의도 청산해 버리고 저주도 청산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부자 미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생각하기를 부자가 되면 지옥 간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지요.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면 그러나 돈을 벌어서 하나님 사랑하는데 쓰면 천국에 가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하늘나라를 위해서 일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우리로 부요케 하려 함이라. 우리 부자 만들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그렇게 가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미국 연방수사국 FBI에서 가장 잔혹한 유아살해범들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난 것이 교회에 가 본 적이 없고, 폭력적인 게임이나 TV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12년 간 조사한 은행 강도들의 공통점도 교회에 가본 적이 없이 도박과 마약에 빠져 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결국 죄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마귀의 종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1915년부터 2005년까지 90년 간 물리, 화학, 의학 등 자연과학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 모두 400명인데 그들 종교 분석 해보면 기독교가 65%, 유대교가 22%, 천주교가 11%, 불교는 0.9%, 메호메트교는 0.1%였습니다. 400여명의 노벨상을 탄 사람 수의 65%는 예수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주교도 11%니까 합치면 76%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너희가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으리라. 그 말이 참말인 것입니다.
미국의 아동심리학자이며 하버드 의대 정신의학과 교수인 로버트 콜스 박사는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 정치인, 사업가, 학자 등 3천 명을 조사하여 이들의 공통적인 성공 요인을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의 성공에 공통요인으로 첫째, 성경을 많이 읽었고, 둘째, 예배에 잘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예배에 많이 참석한 사람이 미국에서 다 성공했다. 여러분 지금 예배 참석하고 있는 것이 성공의 틀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만나를 집에 사다가 책상 위에 얹어 놓고 구경하고 안 읽거든요. 읽어야 돼요. 성경 구경만 하고 안 읽으면 소용이 없지요. 오늘의 만나는 하루의 양식을 주도록 적당히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읽습니다. 그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해야 됩니다. 왜냐, 저도 각오를 하고 결심을 해야 읽습니다. 나중에는 시간이 없어서 자꾸 미루다가 잠들기 전에 꾸벅꾸벅 졸면서라도 읽고 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저주 가운데 있으면 결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청산하시고 아브라함의 복을 가져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을 때, 우리는 축복과 형통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병들어 죽어 흙이 되어서 치료 받고 살고 영생하는 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주님께로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한 심리학자가 정신병원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그 원인을 연구해 보았는데 그 결과 정신병자의 75%가 죄책감으로 고민하다가 자학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정신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정신적인 자책 때문에...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욕타임즈”는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교회 안 다니고 술집 다니는 사람보다 장수한다는 연구결과를 실었습니다.
영국의 “더 타임스”일간지에서도 교회 주일 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보다 7년 이상 장수한다고 보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생명에 7년을 더 보태십시오. 물론 7년보다 더 오래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은..
미국 전국의 의과대학에서는 종교와 질병과의 관계를 연구하면서 환자를 진료할 때 종교와 신앙을 접목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의 희극작가인 죠지 쿨만은 “모든 의사를 찾아가도 고치지 못한 병이 있으면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가지고 나아오라. 그대의 병은 완전히 고침을 받으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굳게 믿으면 우리는 병들고 죽어 흙이 되어 가는데서도 치료받아 살고, 영생하는 복이 회복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창조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 성령과 함께 사는 삶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고 성령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성령이 오신 것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프뉴마토스라는 것은 성령이라고도 말하고 바람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바람은 곁에 있어도 안 느낍니다.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숨 쉬어도 있는 줄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와 같습니다. 너와 함께 있을 것이요, 너희 속에 계실 것이라.
십자가의 은혜로 성령을 하나님이 보내주셨는데 디도서 3장 5절로 7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구약에 의로움은 율법을 행해야 된다고 했지 않습니까? 신약의 의로움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신약에는 예수님이 이런 법을 지켜라. 십계명 같은 것 주지 않았습니다. 구약에는 야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십계명을 꼭 지켜라. 꼭 지켜라. 일점일획도 틀리면 지옥이다. 지옥. 그러나 신약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그리고 난 다음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의 법은 성경에 적어놓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온 성령이 우리의 법인 것입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심이라. 여러분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면 성령이 여러분의 생각과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면 기도만 할 것 아니라 기다리면 내 생각을 통해서 내 양심을 통해서 성령의 음성이 들어옵니다. 성령의 생각이 우리 생각과 양심을 통해서 오면 그것을 따라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또 보혜사라고 하지요. 보혜사라는 것은 우리를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와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7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영원이..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오신 성령은 영원히 여러분과 같이 계신 것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새해가 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저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서도 성령 보혜사시여 조용기 목사 설교를 깨닫게 해주시옵소서. 마음에 그렇게 부탁을 하면 여러분 내 설교가 귀에 쏙쏙 들어올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잠시 율법주의자가 되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힘쓰고 애쓰고 일해야 뭔가 자격이 주어진다고 생각하고 내가 열심히 일을 안하면 밥 먹고 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늘 생각하기를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가을해까지 피땀 흘려 일해서 농사를 지어 겨울에 먹고 사는데 나는 주일에 설교 한번하고 심방만 하면서 어떻게 밥을 먹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입맛이 떨어져서 밥을 먹는 것을 그쳤습니다. 물을 마시고 굶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도 아 내 마음속에 ‘너는 밥 먹을 자격이 없다. 농부들처럼 저렇게 힘든 일을 하고 노동자처럼 힘든 일한 결과로 밥을 먹을 자격이 있지 너같이 설교 한번 하고 심방하고 밥 얻어먹으면 그것은 도둑놈이다.’ 그래서 고민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텔레비전을 열어보니까 개그맨들이 말도 되지는 않는 소리 헛소리를 하는데 사람들이 보고 막 웃고 해요. 그런데 신문을 보니까 그들 월급이 엄청나게 많더라구. 그때 내가 그때 무릎을 탁 쳤습니다. “개그맨도 밥 먹는데 나는 밥 못먹을 턱이 있느냐.” 그래서 “하나님! 남의 쓸데없는 이야기 되도 않는 이야기를 가지고서 웃기는 저분들도 굉장한 수입을 올리고 밥을 먹는데 나는 천당가는 진리를 말하고 참말을 말하는데 밥 못 먹을 턱이 있겠습니까? 나 밥 먹겠습니다.” 그때 마음속에 성령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바보 같은 놈아, 모든 사람이 일을 하든 안 하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농부도 하나님의 은혜로, 공장 노동자도 하나님의 은혜로, 개그맨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이 은혜를 거두면 다 죽고 하나님이 은혜로 사는 것인데 너도 하나님 은혜로 사는 것이지 무슨 일을 많이 해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이니 잘났든 못났든 감사하며 받아먹고 살아라.” “아~ 인생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구나.” 그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다시 그런 생각 안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인생을 살도록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도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보혜사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면 성령이 우리 손을 잡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은혜로 들어가서 축복을 받고 살게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성령을 의지하면 성령은 여러 가지 은사를 주어서 여러분 유익하게 말해 주지요. 지혜 말씀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방언, 방언 통역의 은사, 예언의 은사, 기적의 은사, 병 고침의 은사 이런 은사들을 나누어 주어서 여러분을 돕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은사 받은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청지기같이 봉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열매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같은 아름다운 열매도 성령이 맺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미즈노 겐죠라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뇌성소아마비가 되어서 얼굴을 제외하고 몸 전체가 꼼짝도 못하는 장애자가 된 일본 학생이 있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마야오 목사님을 통해 복음을 들었습니다. 차츰 마음 문을 연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미즈노 겐죠는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 말씀을 읽고 성령이 마음에 뜨겁게 감동했습니다. 그는 말씀에 용기를 얻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의 인생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내가 눈만 움직일 수 있는 이런 병신이 되었는데 내 할 일이 뭡니까?” 그러니까 그 맘속에 “시를 적어라. 시를!” 말도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벽면에 시력 검사판처럼 일본 히라가나를 붙여 놓고 엄마가 그것을 가르키면 눈을 깜짝깜짝 하면 그것을 쓰고 또 이러면 안쓰고 그래 가지고서 시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쓴 그의 시를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선정하여 시집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시집은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 중에 “내 마음속에”라는 시는 저도 읽고 굉장히 감동을 느꼈습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이것 한줄 쓰는데 하루 걸립니다. 엄마가 기억을 가르키면 그것 맞으면 눈 깜짝깜짝하고 아니면 눈을 이렇게 해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희망이 있다 / 그건 그리스도가 부어 주신 것 / 고뇌할 때도 변하지 않아 / 보이지 않는 것 기다리는 희망이
내 마음속에 기쁨이 있다 / 그건 그리스도가 부어 주신 것 /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아 / 이 세상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이
내 마음속에 나가야 할 길이 있다 / 그건 그리스도가 열어 주신 것 / 빛이 없어도 어둡지 않아 / 그 나라에는 즐거운 길이”
완전히 식물인간 같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고 난 다음 마음에 기쁨이 있으니까 시를 지은 것입니다. 우리도 전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 때 우리의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성령은 우리에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희망을 주기 때문에 기쁨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같이 사지가 멀쩡한 사람이 슬퍼하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이고 절망적이 되면 참 부끄러운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풍성한 열매를 맺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이란 것은 신인동체의 삶이지요. 예수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은 인간 혼자 살지만 여러분은 혼자 못삽니다. 하나님과 함께 삽니다.
고린도후서 1장 21절로 22절에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굳건하게 하시고 하나님 성령의 우리 속에 계십니다.
요한복음 15장 7절 한번 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할 수 있으니까 주님이 우리와 같이 있어야 안에 거하지 도망쳐 버리는데 어디 안에 들어갑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이루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결론>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시계가 하나인 사람은 시간을 정확히 알지만, 시계가 두 개인 사람은 결코 확실한 시간을 알지 못한다.” 어느 시계가 진짜인지 모르니까...
오늘날 우리는 바쁘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목표를 설정해도 목표에서 벗어나가는 경우도 많고 때로는 초심에서 벗어나 인생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신앙인들에게 존경 받는 인물인 도저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삶의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삐뚫은 길로 가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어떻게 살까요? 하늘을 쳐다보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땅을 쳐다보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묵상하며 그 십자가 중심으로 사는 삶이 있으면 우리는 다른 삶의 도움이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주님의 생명이 여러분의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삶이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큰 영광스러운 삶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아 알아야 돼요. 마음이 달라져야 돼요. 여기에 썩고 더러운 것을 다 쫓아내고 십자가로 씻어 버리고 우리 이 마음이 십자가를 통하여 달라지면 오중복음이 넘쳐나고 삼중축복이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해지고 일어서고 앉는 곳마다 하늘나라가 임하여 역사할 것입니다. 그런 새해를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고전 2: ・최영기목사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저는 지난주에 가졌던 강영우 박사님의 집회를 통하여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이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이 말씀을 알고 설교했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강 박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떠나자만 않고 그에게만 매달려 있으면 어떠한 역경도 문제도 복으로 변하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또 제가 종종 인용하는 구절이 고후 12:9입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자신의 약점이나 약함을 수용하는 것으로 만족했지 이것을 진정한 자랑거리로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완전하여진다면 진정으로 자랑거리가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에도 알고 믿었던 말씀이 어떻게 이처럼 확신으로 마음에 와 박힐 수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강 박사님의 삶이 그러한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에서 우러나온 진리와 삶에서 경험된 진리의 차이라 이렇구나 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강 박사님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 대하여 너무 자랑을 한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었던 것을 압니다. 그러나 강 박사님의 취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에 약하디 약한 자신을 얼마나 높여 주셨나 를 예를 들어서 설명하다보니 그렇게 들렸던 것입니다. 강 박사님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 상고한 고린도 전서 1:31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라고 말을 맺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랑을 합니까? 자신의 약함을 자랑함으로 주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영광을 돌립니까?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정직하게 노출시킬 때에 그 삶에서 나오는 능력은 본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에게 명예가 돌아가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약함을 자랑하여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오늘 본문인 고린도 전서 2장에서 우리는 두 가지 길을 발견합니다.
Ⅰ. 복음을 단순하게 믿고 전한다
바울은 1-5절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을 설득시키려면 자신만만하게 보여야하는데 바울은 약하고 두려워했고 떨었습니다(3절). 약하다는 것은 신체적인 질환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두려워하고 떨었다는 것은 고린도를 복음화해야 한다는 사명 앞에서 자신의 부족과 모자람을 의식하며 두려워하고 떨었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또 희랍 문명의 중심부에 있는 고린도 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이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논리와 수사학에 의존해야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1절).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는 믿음에 거침돌이 되고 희랍 사람들에게는 말이 되지 않는 십자가와 그리스도만 전하였습니다(3절).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4절). 신비한 능력도 있었겠지만 타락한 도시에서 타락한 생활을 했었을 고린도 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고린도 교회가 형성된 것이 가장 큰 능력의 역사입니다.
1. 세상의 논리와 방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에는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리도록 하기 위하여 논리나 철학에 의존하지 말고 투박하고 단순하게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단순하게 전해야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바울도 설교할 때에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혜에 근거한 믿음은 그 지혜보다 더 큰 지혜가 등장하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5절). 우리의 주위에 보아도 철학이나 신학책을 많이 읽고 논리에 근거한 설득에 의하여 예수를 믿게 된 분들은 그 믿음이 항상 위태위태한 것을 느낍니다. 이제는 잘 믿는가보다 생각하면 엉뚱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교회에 사소한 문제점이 발견되어도 실망해서 나자빠집니다. 거기에 비하여 배웠다는 분들이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비판하는, 단순하고 우직하게 믿는 사람들을 보면 생활도 변하고 기도 응답도 많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2. 복음을 전할 때에 학위와 지위에 위축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자면 단순하게 믿어야하고 단순하게 전해야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에 학문을 많이 닦은 사람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분들에게는 그들의 수준에 맞고 비위에 거슬리지 않을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위축이 될 수가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하게 믿는 예수님을 전하면 됩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게 고모부님이 계셨습니다. 머리가 비상한 분이셨습니다. ivy league에 속한 명문 대학 수학과에서 가르치셨고 대한민국에서 교육 부문에서 훈장까지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안타깝게도 예수를 믿지를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고모는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어떨 때에는 집에서 구역 모임을 가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고모부도 참석을 하셨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질문을 던지니까 목사님도 토론을 벌이다가는 쩔쩔 매고 물러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분이 학회 인도 차 한국 방문중에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더니 위암 말기라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치료받기에는 너무 늦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에 한 흑인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단도 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Brother, are you saved? (형제여, 당신 구원받았소?)" 대학 교수라는 지위 때문에 위축되어서 한인 목사님들이 묻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단순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고모부님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후 약 1달 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저희 고모는 그 한 달이 결혼 생활한 중에서 가장 행복한 1달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단순한 데에 있습니다. 단순한 것에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지혜와 논리에 위축되지 말고 단순하게 전해서 복음의 능력을 증명하고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Ⅱ. 자신을 말고 성령님을 의지한다
어떻게 하면 약함을 자랑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립니까?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을 의지합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에게 의지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는다
이러한 삶을 살자면 우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서 합니다. 어떤 분은 복음을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는 결정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성령님의 조명이 없이는 복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과 이러한 방법의 지혜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7-9절). 이것은 성령님이 조명에 의하여서만 가능합니다(10절)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자연적이신 존재이시고 복음은 초자연적인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음을 자연적인 방법과 지혜, 논리로 이해하려 하는 것은 칠흑같이 깜깜한 전쟁터에서 참호 안에서 보초를 서면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적들을 눈으로 감지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살펴도 달빛 없는 그믐밤이면 아무 것도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적외선 안경을 쓰면 갑자기 눈 앞에 밝아지며 살금살금 기어오는 적군들도 분명히 눈에 들어옵니다. 몸에서 열이 방출되는 데 눈으로는 감지가 안 됩니다. 그러나 적외선 안경은 감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바로 이러한 적외선 안경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믿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을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사건이라든지, 예수님이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그대로 성취하셨다는 것이라든지, 아니며 주위에 예수 믿고 놀라운 변화를 보인 사람들의 간증이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 근거에 의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여서 성령을 받으면 복음이 이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해하고 믿는 것이 아니고 믿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정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성령을 받게 되고 그때에 비로소 복음이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2. 성령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좇는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여서 성령을 받으면 복음이 이해될 뿐만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계셔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십니다. 강아지 마음은 강아지들만이 알고 고양이 마음은 고양이만이 알고 사람 마음은 사람만이 알 듯이 성부 하나님의 마음은 성령 하나님만이 아십니다(11절).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잘되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행복하게 살수 있는 지혜는 성령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12-13절).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지혜를 간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성령님에게만 의존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 갖고 있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보다는 혼동이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 적어서 남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딤후 3:16). 성경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자녀들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소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은 우리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입니다(14절). 그러나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곳에 능력이 있습니다.
요즈음 남녀는 다를 것이 없이 똑같다는 사상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 기문 목사님은 어떤 식당에를 갖다가 어떤 여인이 들어오려고 해서 문을 열어주었더니 싸늘하게 쳐다보며 "I can handle myself! (내 일은 내가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더랍니다. 남녀가 동등인데 남성이 문을 열어주는 것이 자신을 깔본 것이라고 느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남녀가 과연 똑같습니까? 아닙니다. 극단적인 여권 운동권자들은 남녀가 똑같고 자랄 때에 교육을 다르게 받았기 때문에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요즈음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보면 남녀는 신체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느끼는 것도 일을 처리하는 방법도 선천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녀가 똑같다는 세상적인 사상 때문에 여성의 남성화와 남성의 여성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Terminator나 Matrix 같은 영화를 보면 여성 주인공은 남자와 똑같이 힘을 쓰고 언행을 합니다. 그러나 한편 남성 배우를 보면 다들 여자같습니다. 남녀가 똑같다는 사상은 가정을 깹니다. 일도 같이 하고 가사도 반반씩 돌보고 서로 순종해야한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이혼을 해서 가정을 깨고 자녀들 마음에 못을 박아줍니다.
하나님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아십니다. 그래서 아내는 순종하고 (엡 5:22) 남편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엡 5:25). 우리 주위에 행복한 가정을 보면 부부가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아내는 남편의 리더십을 인정하고 존중해주고 남편은 아내의 약함을 이해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해주는 가정인 것을 발견합니다. 세상의 지혜로써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에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말고 성경의 지혜를 좇아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3.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예상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을 이해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을 이해 못합니다(15-16절). 여기에서 신령한 사람은 크리스천 중에서 특별히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고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판단이나 비판은 부정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살려면 세상 가치관에 매여서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각오를 해야합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의 지혜보다 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 보일 책임이 있습니다. 다니엘 서에 보면 흥미 있는 사건이 적혀져있습니다. 다니엘은 소년 때에 바빌론의 느붓가네살 왕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똘똘한 친구 세 명과 궁중에서 섬기게 되었습니다. 3년을 훈련받고 섬기게 되었는데 그 동안 왕으로부터 공급되는 음식을 먹으면 자신이 더렵혀진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을 거부하고 채식만 하기를 원했는데 교육을 책임진 사람 쪽으로는 난처합니다. 채소만 먹으면 건강이 온전치 못할 것이고 건강이 안 좋으면 자신이 왕으로부터 문책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다니엘은 자신의 방법과 왕의 방법을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단 1:12-13). 결과적으로 다니엘의 방법이 더 옳았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음료를 먹고 마시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단 1:15).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지혜에 비추어볼 때에 어리석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받을 수도 있고 조롱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에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 보일 책임이 있습니다.저는 우리 교인들도 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업을 하여서 큰 사업을 일구는 사람들이 생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직장 생활을 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사람들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교육하여서 강영우 박사님같이 미 주류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나오기를 원합니다. 큰 사업이 중요하거나 사회에서 출세하는 것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했을 때에 되더라는 것을 증명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