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스토리]
르누아르와 퐁데자르 Renoir and Pont des Arts
그림 1 ㅣ 르누아르 <파리 퐁데자르> 1867년, 캔버스에 유채, 61 x 100 cm, 로스엔젤레스 노턴사이먼미술관
선착장에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다. 웅장한 건물들이 이루는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선착장 뒤에 서있는 검은 철골 아치 다리가 퐁데자르다. 그 앙상한 아치는 아래로 살짝 보이는 두툼한 퐁뇌프와 대조를 이룬다. 다리 위로 사람들이 거닐고 있다. 다리의 오른편에 보이는 돔이 있는 건물은 프랑스 학사원이다. 그림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철골 아치교를 왼편으로 건너면 바로 루브르 미술관으로 이어진다.
르누아르는 1867년 파리의 도시 풍경을 파노라마처럼 담아냈는데 이 그림은 당시로선 상당한 파격이었다. 그때는 낭만주의 화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때였으므로 도시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1867년의 파리는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을 때였다. 유럽의 문화 중심으로 새롭게 떠오른 파리의 아름다움과 현대성을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다.그래서 당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새롭게 태어나는 도시에 집중했다.
유럽의 문화 중심으로 도약하다
“우리에게는 광대한 미개척지를 철거하고, 도로를 개통하고, 항구를 준설해야 하고, 강에 배가 다닐 수 있도 록 만들고, 운하와 철도를 완성해야 할 과제가 있다.”[1]
1852년 10월 프랑스 제 2제정이 시작되기 직전 루이 나폴레옹은 선언했다. 그리고 파리는 칙칙한 중세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산뜻한 근대도시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황제로 즉위한 루이 나폴레옹은 이듬해 오스망 남작을 파리 “센 강지사”로 임명하고 파리 도시재개발을 위임한다.
“새 도로를 개통하고, 환기가 되지 않고 해가 들지 않는 서민 지역을 열어젖혀, 진리의 빛이 우리의 심장을 밝 혀주듯이 도시 성벽 안의 어디에나 햇빛이 뚫고 들어가도록 할 것이다.” [2]
오스망은 노동자와 도시빈민이 거주하던 열악한 주거지역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넓은 도로와 광장을 조성하고 구역을 정비했다. 상수도와 하수도 시설도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케케묵고 불결한 것을 현대적이고 우아한 것으로 대체했다. 오스망의 도시 개조는 변화를 갈구했던 파리지엥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유화정책이기도 했다. 우리가 오늘날 바라보는 파리의 풍경은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19세기 중엽 센 강의 풍경이다. 르누아르의 그림과 시점이 흡사하다. 도로에서 부두로 내려오는 램프의 난간을 보면 르누아르는 이 사진보다 약간 왼편에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사진의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부두의 공사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아 오스망의 재개발 계획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면서 만국박람회 준비로 부산하던 1860년대 중반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르누아르는 부두의 정비가 완료된 직후에 그림을 그린 듯 하다. 앞서의 르누아르 그림은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르누아르의 그림들과는 딴판이다. 부드럽고 화사하게 행복한 순간을 포착한 그의 대표적인 그림들과는 달리 이 그림은 이지적이고 각진 느낌을 준다. 왜 그럴까?
이 그림이 그의 초기작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인상주의”의 물이 들기 전인 25세에 그린 것으로 주류 화단의 고전적 화풍을 닮아있다.
그림 2 ㅣ 19세기 중엽의 센 강과 퐁데자르
그림이 예쁘면 안되나?
르누아르 Auguste Renoir (1841-1919)는 도자기로 유명한 프랑스 리모주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파리로 이주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했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평생 화가의 길을 걷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림 3 ㅣ 르누아르 <학사원, 말라케 부두> 1875년경, 캔버스에 유채, 46 x 56 cm, 개인소장
르누아르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루브르 미술관을 드나들었으며, 이곳에서 부셰와 와토 등 로코코 시대의 프랑스 화가들 작품에서 감명을 받는다. 루브르를 드나들던 르누아르는 이때 퐁데자르를 수도 없이 건너 다녔을 것이다.
1861년, 스무 살이 된 르누아르는 스위스 태생의 글레이르 Gleyre 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정식으로 미술을 배우게 되는데, 그곳에서 바지유, 모네, 시슬레 등을 알게 되고 인상주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듬해에는 보자르 미술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1863년 살롱에 그림을 출품했으나 낙선한다. 그 다음해에 재도전하여 살롱에 작품을 전시하게 되고 미술계에 이름을 올리지만 물감을 살 돈이 없을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린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갈 뿐이었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것을 계기로 2, 3회 인상파전에도 연이어 작품을 출품하여 인상파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왼쪽의 그림은 이 무렵 학사원과 퐁데자르 주변의 거리풍경을 그린 작품이다. 오른쪽 건물이 프랑스 학사원의 끝자락이다. 학사원의 돔은 이 건물 뒤편에 있다. 앞서의 그림과는 확연히 달라진 화풍을 볼 수 있다.색조도 단순해지고 건물의 윤곽도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1881년부터 이탈리아, 알제리 등을 여행하면서 라파엘로의 작품과 폼페이 벽화에서 강한 영감을 얻은 그의 화풍은 또다시 전기를 맞게 된다. 윤곽선을 강조하고 담백한 색조를 사용하여 다시 고전적인 경향을 띤 그림을 그린다. 르누아르는 결국 인상주의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만들게 된다. 중산층의 일상을 주제로 삼아 풍부한 색채 표현을 통해 부드럽고 관능적인 뉘앙스를 담아내면서 빛나는 색채주의자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예쁜” 그림을 그려 대중에게 가장 사랑 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왜 그림이 예쁘면 안되나? 세상은 불쾌한 것으로 가득차있는데.”
그림 4 ㅣ 1867년의 루브르궁과 퐁데자르: 호프바우어의 석판화 (출처: 브라운 대학 도서관)
그림 5 ㅣ 퐁데자르 위에서 길거리 화가가 고객과 흥정하고 있다 (필자 사진 2013)
그림 6 ㅣ
예술의 다리
퐁데자르 Pont des Arts 또는 “예술의 다리”는 파리 도심의 센 강에서 즉 프랑스 학사원 Institut de France 과 루브르 미술관을 연결하는 보행자 전용다리다. 이 다리는 나폴레옹이 제1통령이던 시절인 1802-1804년에 건설되었다. 아홉 개의 철골 아치로 구성된 다리였다. 영국 세번 강에 세계 최초의 금속다리인 “철 다리 Iron Bridge”가 건설된 지 3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센 강에 파격적인 금속다리가 건설된 것이다.
다리를 설계한 드세사르 Louis-Alexandre de Cessart는 공중에 매달린 정원의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다. “예술의 다리”라는 이름은 루브르 미술관의 예전 이름인 “예술의 궁전 Palais des Arts” 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의 석판화는 르누아르가 앞서의 그림 <파리 퐁데자르>를 그릴 당시 루브르 궁의 모습이다.
프랑스 바로크 스타일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궁전의 남쪽 정문에서 직선으로 연결된 금속 아치다리가 당시 얼마나 파격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그림 7 ㅣ 카르티에-브르송 <퐁데자르에 서있는 사르트르> 1946년
그러나 눈엔 설어도 신기술이 신기했을까? 다리가 개통되던 날 무려 6만5천명의 시민들이 통행료를 내고 다리 를 건넜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이 다리는 파리에서 가장 낭만적인 다리가 되어 수많은 시인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다리는 두 번의 세계 대전 중의 폭격과 선박과의 잦은 충돌로 인한 손상으로 1977년 폐쇄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9년에는 바지선이 충돌하여 다리의 반 가량이 붕괴되어버린다.
현재의 다리는 1981년부터 1984년 사이에 이전의 다리와 “그대로인” 모습으로 재건된 다리다. 단, 바로 옆에 있는 퐁네프와의 조화를 위해 원래 아홉 개였던 아치를 일곱 개로 줄였다.
“더 변할수록 더 그대로인” 낭만의 다리
강은 생명의 상징이고 다리는 변화의 상징이라던가? 센강에 놓인 다리들은 파리의 삶을 대변한다.
“많은 것이 변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파리에서 한가지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다. 퐁데자르에 서서 퐁뇌프와 파리 역사의 중심 시테 섬을 바라보며 갖는 낭만적인 느낌만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곱 개의 아치 위를 지나는 이 목재 보행로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영역이다.
유혹적인 파리의 하늘과 센 강과 그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 센 강의 부두와 유람선들, 강변의 보도에 늘어선 녹색의 헌책방들, 다리 난간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랑의 자물쇠들, 그리고 멀리 서쪽 하늘의 에펠 탑…
이 다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학사원 뒤쪽 생-제르맹가의 구석에는 유서 깊은 ‘레되마고 Les Deux Magots’ 카페가 아직도 있다.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가 앉아 몇 시간이고 토론하던 곳. 파리는 그렇게 시간을 초월한다.
왼쪽의 사진은 프랑스 풀신의 세계적인 사진작가 카르티에-브레송 Henri Cartier-Bresson 이 1946년에 찍은 사르트르의 모습이다. 파이프를 물고 자못 심각하게 뭔가를 응시하는 사르트르 뒤로 퐁데자르의 난간이 보이고 그 너머에 프랑스 학사원의 실루엣이 신기루처럼 서있다.
문명의 다리
“나는 파리의 퐁데자르 위에 서있다. 강 한편에는 1670년에 대학으로 세운 프랑스 학사원이 서있고 강 건너편에는 중세로부터 19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증축된 루브르 미술관이 서있어 화려하고 웅장한 고전적 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상류 쪽으로는 가장 사랑스러운 성당은 아닐지 모르지만 모든 고딕 양식을 통틀어 가장 엄격하게 지적인 외관을 가진 노트르담 성당이 살짝 보인다.”[3]
예술사가 클라크 Kenneth Clark (1903-1983) 는 그가 쓰고 출연한 BBC TV 프로그램과 그를 바탕으로 출판한 저서 <문명 Civilization> (1969) 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쪽은 프랑스 한림원 Acad?mie Fran?aise 을 비롯한 5개의 한림원과 천 개에 가까운 재단을 거느리고 있는 지식의 보고다. 다른 한 쪽은 인류의 문화 유산을 가득 담고 있는 루브르 미술관이 아닌가. 또 멀리 끝이 살짝 보이는 노트르담은 종교의 성지다.
건축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건축물이 담고 있는 “문명”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문명이란 무엇인가? 나는 모르겠다. 추상적인 어휘로 정의할 수 없다. 아직은. 그러나 그것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것을 보고 있다!”
프랑스 속담처럼 “더 변할수록, 더 그대로인 plus ?a change, plus c’est la m?me chose”
파리는 그렇게 있다. 그리고 퐁데자르는 그 한 가운데에 더 변할수록 더 그대로인 채로 서있다.
미주 [1]데이비드 하비, <파리: 모더니티> 김병화 옮김, 생각의 나무, 2005. 161쪽 [2]같은 책, 159쪽 [3] http://en.wikipedia.org/wiki/Pont_des_Arts 에서 인용된 것을 옮김
글쓴이 :: 이 종 세 Jong-Seh Lee ㅣ 한양대학교 건설환경공학과 교수, 우리학회 공공인프라디자인 위원장
이종세 교수는 미국 프린스톤대에서 구조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미국 클락슨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종신교수를 취득했으며, 1995년에 귀국한 이래 한양대학교 건설환경공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파동역학, 구조물의 다물리학적 상호작용, 지진공학 등이며, 공공시설물의 미학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우리 학회 공공인프라디지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제62권 제3호 2014년 3월
Harpsichord Concerto No.5 in F minor BWV 1056 Arioso
Ensemble Plane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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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림과 역사를 보고 있노라니 옛날 빠리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군요.
언제 다시 한 번 가 볼 수 있을까?
옛날 추억이 떠오르시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골목골목 다 떠올라요.
생미쉘 거리 뒷골목까지. 기억이 새록새록.
언제든 가시믄되죠.
건강 회복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