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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삶을 지배해야 하는 단 하나의 법칙은 사랑이다”
톨스토이가 생의 끝자락에서 외치는 마지막 호소
『폭력의 법칙 사랑의 법칙』은 바다출판사가 펴내고 있는 ‘톨스토이 사상 선집’의 아홉 번째 책이자 톨스토이의 비폭력주의와 반전평화 주제의 글들을 모은 3부작의 마지막 권이다. 전작 『죽이지 마라』와 『비폭력에 대하여』에서 전쟁과 국가 폭력의 부조리함을 고발했던 톨스토이는 생의 마지막 3여 년의 기록인 이 작품에서 한층 더 깊어진 사색과 넓어진 시각으로 폭력의 문화적 뿌리를 밝히고 참다운 기독교 정신의 회복을 촉구한다. 끊임없이 정부의 감시를 받고 정교에서 파문당하고 혁명가들에게 조롱받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톨스토이는,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폭력과 살육의 법칙을 기독교의 사랑과 형제애의 법칙으로 대체하라고 간절히 호소한다.
👨🏫 저자 소개
톨스토이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곧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문학지 [동시대인]에 처녀작인 자전소설 중편 「유년 시절」를 발표하여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53년에는 『소년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크림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인 야스나야 뽈랴나에 농민 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농민학교를 세웠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볼가 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으며,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크로이체르 소나타』『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등의 작품이 쓰인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를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해서 저술하고 활동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고,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이처 소나타』(1889)를 통해 깊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제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땅이 많이 필요한가?』, 『세 가지 질문』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현재 톨스토이 역이 되어 있는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기를 거부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귀족의 아들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인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고귀한 인생 성찰을 통해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수많은 걸작을 남겨 지금까지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 그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의 철학을 남긴 사상가였다. 톨스토이의 작품만이 지닌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 보아도 여전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이며,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 목차
폭력의 법칙 사랑의 법칙
누구도 죽이지 마라
나는 침묵할 수 없다
사형과 기독교
스톡홀름 평화회의를 위해 준비한 발표문
구셰프 체포에 대한 탄원서
평화회의에 보내는 발표문에 덧붙이는 글
폴란드 여성에게 보내는 답변
유효한 수단
옮긴이 해설__전쟁과 혁명의 시대 한복판에서 비폭력주의를 외치다
레프 톨스토이 연보
🖋 출판사 서평
비폭력주의에 관한 생의 마지막 호소
1880년경 50대 초의 톨스토이는 정신적 위기와 종교적 회심의 시기를 거치며 소설가 톨스토이에서 사상가 톨스토이로 거듭난다. 사상가 톨스토이가 여러 논설과 에세이를 통해 일관되게 주장한 것 중 하나는 폭력과 살인에 대한 절대적 거부, 설사 악에도 폭력으로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비폭력주의였다. 어떠한 폭력도 진정한 기독교 정신과 양립하지 않는다는 ‘기독교 평화주의’와 권력과 결탁한 교회와 국가(폭력)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 아나키즘’이 결합된 그의 독특한 비폭력주의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작 《죽이지 마라》(1896~1901)와 《비폭력에 대하여》(1904~1905)가 전쟁과 국가 폭력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를 옹호하며 사형제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면, 톨스토이가 타계하기 전 마지막 3여 년(1907~1910)의 글들을 모은 《폭력의 법칙 사랑의 법칙》은 훨씬 더 깊어진 사색과 넓어진 시각으로 폭력의 문명사적 뿌리를 밝히고 참다운 기독교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스스로를 “생의 마지막 날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죽음의 관 어귀에 선 자” “매 순간 죽음을 기다리는 여든의 노인”이라 칭하는 톨스토이의 비폭력주의에 대한 감동적인 마지막 호소에 귀 기울여보자.
왜 세상에 폭력이 만연하게 되었나?
1905년 러일전쟁의 패전과 러시아혁명의 실패 이후 제정 러시아의 사회불안은 가중되었다. 농민과 지주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혁명사상이 고취되면서 폭동과 총파업, 테러와 암살 등 반정부 운동이 빈발했고, 이에 전제 정부는 투옥과 추방, 사형이라는 탄압으로 일관했다. 세계 전체로도 서구의 식민지 쟁탈전이 고조되는 가운데 제국주의의 억압에 맞선 피지배 민족의 무장투쟁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톨스토이는 “혁명가들은 정부에 반대하고 정부는 혁명가들에게 반대하며, 노예화된 민족들은 압제자들에 반대한다. 국가 간의 투쟁이 벌어지고 동과 서가 투쟁을” 벌이는 이러한 상황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고 말한다.
세계가 이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날 방법은 신앙 즉 참된 의미의 기독교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만, 현대인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 다수인 노동인민은 그저 습관상·관습상 낡은 교회 신앙을 따를 뿐이고, 소수인 교양계급은 사실은 아무것도 믿지 않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교회 기독교를 믿는 척할 뿐이다. “인민의 무의식적인 불신앙과 소위 교양 계층의 의식적인 신앙 부정”의 결과, 삶의 의미를 찾는 데에 어떤 신앙도, 신앙에 따른 어떤 행위 지침도 필요치 않으며, “인간 삶의 유일한 기본 법칙은 생존을 위한 발전과 생존 투쟁의 법칙”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기 구제의 수단으로 폭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현존 질서가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국가 활동이라는 폭력을 동원해 현존 질서를 지키려 하고, 다른 이들은 혁명 활동이라는 똑같은 폭력으로 현존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다 더 나은 다른 체제를 확립하려 한다.” 그 결과 폭력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폭력이 인간 사회에 불가피하고 심지어 유익하다는 거짓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더욱이 기술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 없이 살인을 가능케 하는 살상 무기들이 속속 개발되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폭력의 법칙에서 사랑의 법칙으로
그러나 폭력은 문제를 심화시킬 뿐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사람들을 갈라놓을 뿐 통합할 수 없다. “폭력으로 사람들을 통합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고, 삶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에서 나온 법칙만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통합시킬 수 있다.” 부패한 교회는 진정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은폐하였으나 그 가르침은 지극히 간단하니, “삶을 지배해야 하는 최고의 법칙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참된 의미의 기독교 가르침은 사랑의 율법을 최고의 것으로” 여기고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으며, 그에 따라 “온갖 폭력을 없애고, 따라서 폭력에 기초한 세상의 온갖 질서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는 병역을 거부하는 어느 젊은이의 군사재판을 소설의 한 토막처럼 재구성하기도 하고, 병역 거부자와 사형집행인의 내면세계를 대비하기도 하고, 군역을 거부했던 초기 교부들의 목록을 죽 나열하기도 한다. 기독교와 폭력은 양립할 수 없는 만큼, 기독교도는 언제든 명령이 내려오면 누구든 죽이는 군인이 될 수 없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살인할 태세를 갖추라는 국가법(폭력의 법칙)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기초한 종교·도덕법(사랑의 법칙)을 따르도록 권하고, 그렇게 너도나도 폭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할 때 폭력이 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구원은 오직 기독교 정신으로 폭력의 법칙을 사랑의 법칙으로 대체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대해서도 절대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다른 사람이 그대를 대하기를 바라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라”라는 황금률을 따르라고 말한다. 성서에서 이르듯이, “너에게 저질러진 폭력이 네 쪽에서 가하는 폭력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폭력을 정당화하는 온갖 미신에서 해방되어 생명을 중심에 놓고 바라본다면, “폭력으로 악에 저항할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 사실은 “복수, 사욕, 시기, 야망, 권세욕, 교만, 비겁, 악의 같은 습관적이고 일상화된 악덕의 정당화에 불과하다는 게 분명해질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1909년 어느 늦은 밤, 톨스토이는 집으로 불쑥 찾아온 경찰들이 자신의 조수를 혁명 서적을 유포했다는 혐의로 체포해가는 것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사실 조수가 우체국을 통해 부친 책들은 모두 톨스토이 자신의 것이었다. 그가 줄기차게 전하는 죽이지 말라는 설교와 토지 소유가 불법이라는 주장 등이 많은 인민과 심지어 군인들의 마음까지 흔들자 차르 정부는 톨스토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진즉 재판하여 가두고 싶었지만 국제적으로 명망 높은 그를 어찌할 수 없자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괴롭힘으로써 간접적으로 침묵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 그렇게 체르트코프는 추방당하고 구셰프는 유형에 보내졌다. 톨스토이는 “사상과 그 사상을 전하는 자에게 행해지는 폭력은 그 영향력을 약화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강화한다”며, “나의 사상의 확산과 나의 활동에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어떤 폭력적인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면 더 이상 친구들이 아니라 유일한 주범인 자신에게 해주기를 요구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책들은 결코 혁명에 관한 책이 아니며, 오히려 모든 혁명 활동을 부정하는 내용이며, 그래서 모든 혁명가들에게 항상 비난과 조롱을 받는다고 말한다. 톨스토이에게 정부나 혁명가는 매한가지이며, 혁명가는 정부의 충실한 학생이다.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서라는 그들은 폭력은 결코 악을 소멸시키지도 감소시키지도 못했다. 러시아인들이 “혁명기에 쏟은 노력, 흘린 모든 피가 가난을 없애지도 못했고, 부자와 권력가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도 막지 못했으며, 전쟁에서 타국의 영토를 점령하는 데 민중의 힘이 소비되는 것을 멈추지 못했고, 소수의 권력에서 민중을 해방시키지”도 못했다는 사실, 폭력에 맞선 폭력투쟁은 모두 헛수고일 뿐임을 깨달아야 한다.
전쟁과 혁명의 혼란기, 지식인과 혁명가들이 삶의 의미를 밝혀줄 신앙과 그 행동 지침을 잃어버린 채 무신론과 니힐니즘에 빠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톨스토이는 폭력을 사랑으로 교체하라는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를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결국 막연할지라도 언제나 각자에게 인식되고 있는 영원한 진리 즉 인간에게는 폭력, 위협, 살인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진리를 인식하고 난 후에는 이 진리에 맞춰 자신의 활동을 바꾸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역할이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진실을 말함으로써 모두의 최면을 깼던 아이와 같다고 여긴다. 우리가 이 어리석음과 잔인과 위선의 행진에서 “조국에 대한 봉사, 전쟁의 영웅, 군의 명예, 애국심을 보기를 멈춘다면…… 살인이라는 적나라한 범죄행위를 보게 될” 것이다. “모두가 알지만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 사람들이 살인을 어떻게 부를지라도, 살인은 언제나 살인일 뿐이고 부끄러운 범죄일 뿐이라는 것, 우리는 그것을 말해야만” 한다.
결국 톨스토이가 이 책에서 답하려는 물음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군대 없이, 전쟁 없이, 폭력 없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답은 물론 ‘사랑으로’이지만, 이때의 사랑은 자신의 아내나 아이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그런 사랑은 동물도 한다. 인간적 사랑이란 모든 인간을 형제처럼 사랑하고, 어떠한 폭력에도 가담하지 않는 것이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를 그렇게 사랑하는가?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당신을 사랑하는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여든의 톨스토이가 이야기하지 않고 죽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 여긴 단순한 진리는 바로 “폭력 그 자체와 폭력에 대한 어떠한 가담도 허용하지 않는 사랑의 법칙을 삶의 가장 높은 법칙으로 인정하는” 데 우리의 구원이 달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