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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고전 2:1-5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1-5 /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가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어려운 말이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위에서 맞은 그분의 죽음 외에는 말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3)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심약하고 떨리는 심정이었습니다. 4) 그리고 웅변적이지도 못하고 인간적인 지혜를 사용하지도 않은 매우 단순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나는 오직 성령의 능력이 듣는 사람들에게 전해져서 그 설교가 하나님께서 직접 이르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5) 나는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바탕을 두고 견고히 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세상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성령을 통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1-2) 바울은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증거를 전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을 내용으로 삼은 증거 곧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계시의 중심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의 내용은 그리스도이신 십자가의 도를 전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의 스승 가말리엘에게 배운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신학과 헬라의 철학적 지식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 하기로 작정하였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빌 3:8). 바울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제 바울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도 외에는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고린도 교회에 나아갈 때 나누어 준 것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3-5) 가장 고상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우는 것에 실패하고 고린도에서는 약하고 두렵고 떨리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이에 자신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하여 복음 전파를 시도합니다. 아덴에서의 실패는 자신의 설득력 있는 말과 지혜로 했기 때문이라고 자평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헬라 철학과 수사학적인 말로 그리스도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적인 지혜로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말은 지혜로운 것 같으나 미련하고 강한 것 같으나 약합니다(고전 1:25-28). 특히 복음 전파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해야 합니다. 바울의 신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사람의 지혜의 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이해시키고 설득해서 하려고 하지만 성령의 인도와 능력으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만을 증거하여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증거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의 도를 성령의 인도와 능력에 의하여 증거하지 않고 세상적인 지혜의 말로 증거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화이트 헤드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담임목사는 너무도 놀라서 철학책을 찾아 설교를 준비하였습니다. 세 번이나 참석한 화이트헤드를 보며 목사님은 기뻐했습니다. “이제 내 실력에 감탄해서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한 목사인줄 알고 교회에 등록하겠지?”라며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목사님 면회하기를 청한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나는 예수를 알기 원합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어느 할머니가 얼굴에 홍조를 띠고 ‘예수를 왜 모르십니까? 나는 죽으면 천국 가고 살면 주님의 일을 하며 사니 기쁘고 즐겁습니다.’라는 그 말에 내가 예수를 알려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 설 교 >
예수에 관한 신앙에서 예수신앙으로
고전 2:2 / 이정익목사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것이 이제 15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까지 150여 년 동안 우리의 신앙이 많이 발전했고 성숙해졌습니다. 연륜 깊어지고 이제는 세계적인 수준이 되었습니다. 양이나 전통이 오래되면 동시에 참신했던 신앙이 굳어지기도 하고 오류도 발생하여 바로잡아야 할 부분도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9번에 걸쳐서 그동안 우리 신앙을 바로잡아야 할 내용들을 설교해 왔습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예수에 관한 신앙에서 예수신앙으로“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의 신앙풍토는 참 뜨겁고 열심이었습니다. 한국은의 심성은 부드럽고 강렬하고 감정이 풍부하기 때문에 열심 있고 뜨겁고 기도도 많이 하는 신앙풍토를 일구었습니다. 그래서 양적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역사가 오래되고 연륜 쌓이다 보니까 예수에게서 신앙의 초점이 멀어지고 흐려져서 마침내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을 하는 풍토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문제가 발생하였고 생활과 신앙사이에 갭이 생겼고 삶이 이원화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은 마침내 신학적으로 문제를 야기했고 신앙이 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되지 못하는 신앙 따로 생활 따로 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부분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새 교회로 부임을 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부임하자 가정심방부터 시작했습니다. 첫 가정을 심방 가서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예수를 믿어왔습니다, 할아버지가 장로였고 아버지도 장로였고 저는 권사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교회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고요, 모두 잘 믿고 있습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정색을 하면서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권사님, 이 집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렇게 묻자 이 권사님이 갑자기 얼굴이 상기되면서 “나는 권사인데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권사님, 권사님의 가정에 예수님이 계십니까”. 그렇게 재삼 물으니까 그 권사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질문은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집에,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에 지금 예수께서 계십니까”. 이 질문은 우리들이 가끔 나를 향해서 물어보아야 하는 질문입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는 사이에 우리의 신앙이 “예수신앙에서 예수에 관한 신앙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해왔지만 사실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믿었고 교리를 믿었고 전통을 믿었고 그것들을 중시해 왔습니다. 그래서 건듯하면 교회에서 전통 때문에 논쟁을 벌였고 교리 때문에 다투고 갈라지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한국교회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는 나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장과 기장이 서로 싸웠습니다. 기성과 예성이 싸웠습니다. 외국인들이 비아냥댈만합니다. 한국교회는 한때 교리 때문에 많이 싸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그것이 성경의 진리인데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신앙인데 사람들은 교리라는 것을 만들어서 예수는 옆에 두고 교리 때문에 머리 터지게 싸웠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싸우는 동안 자신은 열심 있는 신앙인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예수에 관한 신앙”입니다. 거기 어디에 예수가 있습니까. 마치 바울이 예수를 모를 때 열심히 그리스도인을 핍박한 것과 같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이 가장 의롭고 열심 있는 신앙인줄 알았던 것과 똑같은 경우입니다.
또 교회마다 제도니 규정이니 하는 규약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규약에는 새신자가 들어오면 3년 안에는 교사도 찬양대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직분도 가질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들어놓고 새신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약을 시켰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스스로 법을 만들어놓고 나중에는 그 법 때문에 예수를 죽인 꼴과 같습니다. 그 법이 누굴 위한 무엇을 위한 법입니까. 모든 법은 예수를 더 잘 믿도록 도와주는 법이어야 하는데 그렇게 만든 법이 나중에는 예수를 믿는데 방해되는 법으로 작용했습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에 관한 신앙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예수 주변만 연구하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주 예민하게 한번 이 부분을 놓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는 뒤로 밀쳐놓고 예수의 주변을 중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에서 자랐다더라,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더라, 기적을 행했다더라, 부활했다더라 하고 말했습니다. 꼭 남의 말 하듯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주변이야기를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부모 이름은 누구냐, 태어난 고향은 어디냐, 선물을 들고 온 사람들은 누구냐, 예수와 요한과는 무슨 사이냐, 예수님 아버지 직업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들을 암기시켰습니다. 모두 예수의 주변이야기들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기적이 없고 감동이 없고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더라, 예수가 승천했다더라, 병자들을 고쳤다더라 하는 것들은 이미 있었던 일이고 지식으로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런 예수의 주변이야기들을 암기하는 신앙으로는 내가 구체적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힘도 없고 감격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화나 신앙이 주는 힘과 감격은 예수께서 내게 임하시고 내안에 내주하시고 내 주님이 되시고 내 하나님이 되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동안 우리는 그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그 예수에 관한 것들을 중시하는 신앙생활을 해 왔기 때문에 그런 경험이나 체험이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학교에서는 그렇게 신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는 나의 구주시고 목자시고 생명의 주로 가르치기 이전에 예수는 나사렛에서 태어나고 3일 만에 부활하고 지금은 하늘나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하시고 지금 내안에 계시고 나의 앉고 일어섬을 지켜보시는 생명의 주로 가르치지를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변화나 감동이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직분에 대해서 집착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신앙생활을 말할 때 신앙의 뼈대를 자랑합니다. 나는 모태신앙이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몇 년 동안 교사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리고 나는 교회에서 이런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모두 예수에 관한 신앙입니다. 그 직분들은 신앙생활에서 아주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모두 조건들입니다. 모든 직분은 먼저 들어온 신앙인들이 늦게 들어온 새신자들을 돌보고 안내하고 양육하게 하기 위해서 주어진 직분들일 뿐입니다. 결코 자랑할 갓도 명예도 아닌 봉사직분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분들은 대부분 그런 직분들에 지대한 관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런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샘이 있습니다. 샘의 생명은 물입니다. 그런데 그 샘의 물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고 샘 주위를 어떻게 꾸미느냐, 무슨 돌로 주위를 만드느냐, 샘의 넓이와 깊이와 크기가 얼마냐 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샘을 누가 팠으며 돌은 누가 깔았으며 그 샘을 관리하는데 누가 열심이냐를 따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 샘의 물이 말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구원 얻는 방법을 성경이 제시해 주었는데도 거기에 또 다른 방법을 가미해 놓고 자꾸만 엉뚱한 방법으로 나아갑니다. 그냥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했는데도 사람들은 더 고행의 과정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래서 새벽에 얼음을 깨고 찬물에 들어가 목욕 재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또 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더 철저하게 믿어야 한다고 율법을 만들어 놓고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고 하루 3시 기도하고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만들어 놓은 법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너무 쉬우니까 스스로 법을 만들어 힘들게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고되겠습니까. 그렇게 힘들게 신앙의 부수적인 것들을 지키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믿었는지 그 신앙과 믿음의 허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는 그 좋던 믿음은 간데없고 절망과 허탈감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내가 무엇을 믿었고 누구를 믿었단 말인가 하는 자조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은 내가 지금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예수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날마다 그분과 상의하고 있는가, 나는 날마다 그분에게 묻고 의논하고 상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그분 때문에 살고 그 예수님과 지금 동행하고 함께 하고 내가 그에게 날마다 의지하고 그 때문에 새 인생을 살아가는 삶, 그것이 신앙의 삶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예수를 그렇게 믿고 그분이 지금 내안에 와 계시고 나는 지금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면 우리의 삶은 건전하고 건강하고 신선하고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또 정신도 건전하고 긍정적이고 전향적일 것이고 신앙도 뜨거워질 것이며 이웃과의 관계도 따뜻해지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베푸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고 세상에서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이루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지금 예수를 믿고 알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것을 믿고 살아가니까 온갖 문제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왜 갈등이 발생합니까. 왜 탐욕, 욕망, 사치, 싸움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왜 신앙 연조가 오래되었음에도 내가 변화가 안 되고 신앙이 더 깊어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왜 내가 예수를 믿은 것이 수년이나 되었는데 세상의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조그만 문제 앞에서 넘어지고 조그만 이익 앞에서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신앙이 예수를 믿는 신앙이 아니고 예수에 관한 신앙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직장에서 나를 자신 있게 들어내 놓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엊그제 보건복지부를 방문했었습니다. 어느 간부가 독실한 그리스도인인데 부내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좀처럼 자신을 공개하고 나타내지를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교회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동안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신 있게 사람들 앞에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하고 나설만한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마음속에 진정 주께서 살아계셔서 지금도 내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다면 그렇게 숨어 있겠습니까.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신앙이 열심 있고 오히려 요란할 정도로 큰소리치며 기도도 잘하는데 유사시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순간 조용해지고 침묵하고 후퇴하고 눈감고 핑계하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의 신앙을 깊이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신앙이 정말 “예수를 믿는 신앙인인가” 아니면 나는 지금 “예수에 관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에 관한 신앙생활하는 분들은 평소에는 요란합니다. 너무 열심입니다. 아주 뜨겁습니다. 그런데 예수에 관해서 신앙생활했던 분들은 유사시가 되면 곧바로 침묵합니다. 후퇴합니다. 숨습니다. 도마가 그랬고 유다가 그랬고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도마, 유다, 베드로 모두 예수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에 모두 넘어졌습니다. 유사시에 일어날만한 내적 힘과 동기와 이유와 근거가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나와 있는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 보십시오. 그들은 한결같이 평소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조용하고 침묵하고 숨어있었고 구지 나타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인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유사시가 되니까 모두 도망하고 숨어있는데 그들은 사람들 앞에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나타나 예수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들은 평소 숨어있었지만 유사시가 되니까 자신을 들어내고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예수의 숨은 제자로서의 정신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정신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마음속에 진정 예수가 있었고 그 예수는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던 그 예수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신앙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예수를 믿는 일에는 예수 이외의 것은 조건에 불과합니다. 예수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며칠 만에 부활했는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직분자인가, 몇 년 믿었는가, 내 아버지가 장로요 내 어머니는 권사다 그런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왕이면 좋은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조건이고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문제는 예수는 누구인가, 내가 과연 그를 만났는가, 나는 지금 그분과 함께 하고 살고 있는가. 나는 지금 순간마다 그분과 상의하고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그 분에게 순종하고 헌신하고 나를 복종시키고 나를 부정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삶이 예수를 믿는 신앙입니다.
그 때 비로소 신앙다운 신앙의 고백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그 입에서 그런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그동안 자신이 준비해 놓은 조건들을 얼마나 자랑했습니까. 그런데 그가 예수를 만나서 깊이 알고 난 후에는 그것들을 미련 없이 버려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노라”고 고백합니다. 이 믿음이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나의 신앙을 한번 깊이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진정한 예수의 제자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예수는 지금 나의 마음속에서 나를 지배하시고 나는 그분에게 순종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나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으면 이제라도 신앙의 궤도를 수정하면 내 마음속에서 신앙의 샘물이 터져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십자가로 승리하라
고전 2:2 / 이영훈목사
여러분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옆에 계신 분하고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 안에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약해있던 우리들이 강해지고, 슬픔에 처해있던 우리들이 기쁨을 얻고, 질병에 처해있던 우리들이 건강을 얻고, 문제에 처해있던 우리들이 응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014년 예수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한 해입니다. 할렐루야.
(복음성가 ‘약한 나로 강하게’)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예수 자유 주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 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올 한 해 예수님만 바라보고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위해서, 오직 믿음으로 전진해나가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 또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 위해서, 또 우리 대한민국에 주의 복음이 온 지역에 전파되어서 모든 문제와 갈등이 해결되고 통일시대를 열어가는 귀한 역사가 있도록, 북녘 동포들에게도 복음의 역사가 임할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주여. 주여.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모든 감사 찬송 존귀 영광을 우리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저희들을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신 뜻을 따라 택하여 주시고 하나님 자녀로 삼아주셔서 문제 많고 어려움 많은 세상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게 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일생이 감사의 일생이 되게 하시고 찬양의 일생 되게 하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일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원망과 불평하고 뒤로 물러가는 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하여 주옵소서. 영광을 주님께 돌리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이 아침에 고린도전서 2장 2절 말씀 가지고 “십자가로 승리하라”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함께 따라하시겠습니까? “십자가로 승리하라” “십자가로 승리하라”
십자가 신앙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역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기초를 십자가 신앙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이나 또 우리가 갖고 있는 직분에 신앙의 기초를 두면 흔들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우리 신앙의 기초를 두면 절대로 요동하지 않습니다.
한국에 자꾸 이단들이 많이 생겨나는데 이단들의 모임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철저히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해서 첫째도 하나님께 영광, 둘째도 하나님께 영광, 마지막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여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여 주셔서 십자가 신앙으로 무장하여 날마다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동행하며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아름답게 쓰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꿈을 하나둘씩 이뤄나가는 복된 한 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기적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축복은 다가오는 것입니다.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위대한 능력이 있어요.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화해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 됨의 역사를 이루어야 됩니다.
1. 주 안에서 하나 되라
주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야 됩니다. “주여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해서 주 안에서 하나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열되고 나뉘어진 것을 다시 싸매고 합치고 그래서 화해케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죄로 인해 나뉘어졌던 것을 죄의 담을 허물고 하나 되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창조한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죄짓고 불의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였는데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죄의 벽이 세워져서 그 누구도 죄의 벽을 넘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담을 허물어뜨리시고 한손을 뻗어 하나님을 붙잡으시고 한손을 뻗어 우리 인간을 붙잡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케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여, 우리가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게 하여 주옵소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그 다음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써요. 무슨 말을 들어도 그렇게 신경을 쓰고 누가 자기를 위아래 쳐다만 봐도 신경을 쓰는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때때로 소홀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비춰진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고 화목한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하나로 묶는 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유대인과 이방인은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로 살았습니다. 이방인과의 교제는 부정하고 치욕적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늘 본인들은 우월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다. 너희들은 우리와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보다 한 급이 낮은 짐승 같은 그런 계급에 있는, 낮은 계급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관계의 담을 허물어뜨리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 14절은 설명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우리를 하나 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할 때 성전 안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쫙 갈라져 내려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이제는 다 화목의 관계로 변화가 되었고 나가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모든 원수된 것을 다 소멸하고 사랑으로 하나 되는 귀한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인 것입니다. “주여, 이제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했사오니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담을 허물게 하여 주옵소서.”
죄송하게도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는데 굉장히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자기가 늘, 자기 혼자만의 편익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굉장히 자기에 대한 집착이 많고 고집이 또 셉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요, 내가 깨어지고 낮아져야 은혜가 임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의 고백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이것이 믿음 있는 사람들의 고백이에요. 예수 믿고 나서도 자꾸 자기주장만 하고 사람들과 다투고 언성이 높아지면 주님 앞에서 우린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주님, 우린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옵소서.”
예수를 믿고 나서 우리가 이 잘못된 담들을 다 허물어야 합니다. 교만의 담도 허물고, 고집불통 담도 허물고, 우리 대한민국에 허물어야 될 것 너무나 많아요. 이 쪼끄만 땅덩어리에 무슨 좌가 있고 우고 있고 그래가지고 어느 지역이냐? 지역의 담을 허물기를 바랍니다. 남북으로 지금 나눠져 있는 것도 그런데 나눠진 것도 남쪽을 또 나눠가지고.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좀 책임이 있어요. 표를 얻으려고 하다보니까 그런 일이 생겼어요.
“하나님 아버지, 지역감정의 담을 허물게 하여 주옵소서. 노사 간의 담을 허물게 하여 주옵소서. 가진 자는 좀 더 내놓고, 없는 자는 좀 더 노력하고 해서 잘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옵소서. 좌우 이념의 담도 허물게 하여 주옵소서. 서로가 서로에게 조화를 이루어서 좋은 점을 배우고 잘못된 것은 고치는 그러한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남북 간의 갈등과 대립의 높은 담도 허물어서 평화통일 시대가 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는 구별이 없습니다. 차별이 없어요. 보세요.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종은 노예지요)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할렐루야. 우린 하나입니다. 오늘 이곳에 우리 함께 예배드리고 있고 또 위성을 통하여 전국에 약 650여개 처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거기서 예배를 드리는 분이나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분이나 우린 다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할렐루야. 절대로 하나인 우리가 다투고 나뉘고 싸우면 안 됩니다.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 되지 못하고 나뉘면, 주님의 몸에 상처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걸 보고 우리에게 손가락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서 우리가 손의 손잡고 믿음의 전진해 나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을 이루신 장소가 십자가입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래서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님은 구원의 특징이 화목이라 했습니다.
“구원의 특징은 ‘평화’ 혹은 ‘화목’이다. 즉, ‘하나님과의 평화’, ‘사람들과의 평화’, ‘내적인 평화’이다.”
할렐루야. 우린 화평케 하는 그런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가서 기쁨을 나눠주고, 문제가 있는 곳에 문제 해결의 답을 가져다주고,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고, 할렐루야. 그래서 화목하고 하나 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열케 하는 그런 어떤 모습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꾸 이간질하고 나쁜 얘기해서 갈라놓고 싸움 붙이고.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절대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은 마귀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분해야 해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교회 안에서 이간질하고 다투고 나뉘고 싸우는 일이 없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대로 결심해야 되요. “주님, 평생 동안 주님을 섬길 때 주의 성령 안에서 십자가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 되게 하여 주옵소서.”
2.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라
하나가 될 때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다 이루었다 하신 그때에 모든 악의 세력은 멸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멸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에,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여러분, 예수 믿은 그 순간 승리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과 더불어 승리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예수 믿고 패배의식을 갖고 살면 안돼요. “난 버림받은 인생이다. 뭘 해도 되는 것이 없다. 나는 부모를 잘못 만나서 이렇게 어릴 때부터 방황하며 살았다.” 이거 아니에요. 예수 믿은 것이 가장 큰 축복이고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당당히 가슴을 펴고 믿음으로 전진해 나가는 그러한 복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대상은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싸울 대상은 악한 영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어떡하든지 그것들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무당이 되는 사람들을 보면 신이 내린다고 그래가지고 어느 날 갑자기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는데요. 귀신역사죠. 어릴 때부터 이 김여은 자매는 악한 영들이 자꾸 보여서 자기 병을 고치려고 유명한 무당집은 다 찾아 갔는데 무당들이 깜짝 놀라면서 “네 안에 나보다 더 센 영이 있다”고. 그래서 결국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이 됐어요.
무당이 됐는데. 어느 날 조상신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입에서 아멘 하는 소리가 나온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인가? 계속 입에서 아멘, 아멘 그치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어린 시절에 교회를 다녔던 기억이 나면서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야 내가 무당 생활에서 벗어나야 되겠다.”
근데 무당 생활에서 벗어나면 악한 영들이 가족을 죽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어와서 교회 와서 목사님께 상담하니까 목사님이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승리하셨고 너를 악한 자에게서 건져주고 지켜주신다.” 그날 회개하고 눈물로 콧물로 통곡하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니까 자유함을 받았는데 어느 날 악한 영들이 떼거지로 몰려왔어요. 그래서 “예수의 피, 예수의 보혈로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런데 안 나가는 거예요. 너무나 많이 와가지고. “아이고, 난 내 힘으로 못 싸우겠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니까 대신 싸워주옵소서.”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나를 좀 도와주세요! 그러자 갑자기 입에서 이상한 말이 튀어나오며 악령들을 꾸짖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순간 마음에 평안이 임했고, 악령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악령과의 싸움은 예수님 십자가를 붙들 때 해결되고, 오직 복음만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한 사람입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변화된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옛사람 속에 있던 모든 저주가 떠나간 것입니다. 부정적인 모습이 떠나간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과거에서 놓여남을 받지 못하고 늘 고통을 당하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 이전 것은 지나간 것입니다.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기사로도 나왔습니다마는 붕어빵을 팔면서 8년째 이웃을 돕는 장발장 목사님, 민학근 목사님 회심의 삶에 대한 보도가 나온 적 있죠. 한때 사형을 구형 받은 죄수였지만 지금은 붕어빵을 팔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장발장 목사입니다. 왜 장발장 목사냐? 빵을 훔치다 붙잡혀 가지고 감옥에 가게 된 계기가 되었거든요.
2세 때 어머니를 여의인 그는 계모와의 갈등으로 13세 때 집을 나와 가지고요. 3일간 굶고 방황했다가 너무 배고파 빵을 훔쳤다가 잡혀서 소년원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서 그때로부터 14년 8개월 동안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전국에 16개 교도소를 옮겨 다녔습니다.
그리고 1989년에 크게 보도된 조직폭력배 두목 살인사건에 주범이 돼서 그가 다시 감옥에 들어갔는데 전과 9범, 11년은 독방에서 혼자 있어야 되었습니다. 수차례 자살을 시도했는데 하나님이 그 영혼을 버리지 않으셨어요. 담안선교회 임석근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감옥에 와서 늘 말씀을 전하시는 담안선교회 임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통곡하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때로부터 9년 동안 교도소 안에서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치르고 그 다음에 2004년 9월 모범수로 출소한 다음에 예장 합동중앙 총회신학교와 신대원을 졸업하고 2008년에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지하실에 교회를 세우고 불우이웃돕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그리고나서 결혼 한 다음 부인은 식당을 경영하고 자신은 노점상에서 붕어빵을 팔면서 그 번 돈으로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을 돕고 또 장애인들 집에 가서 목욕봉사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 위해서 늘 영치금과 옷가지를 넣어주고 후배 출소자들이 감옥에서 나오면 자기가 붕어빵을 잘 하고 있던 그 자리를 물려주고 또 다른데 차려주고 또 차려주고. 30여 차례나 좋은 목을 물려 줬대요.
어릴 때 빵 한 조각을 훔쳐서 잘못된 길로 들어가 감옥에 갔지만 예수 믿고 나서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변화 받은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사형을 구형 받으며 죽음을 앞둔 사람의 고통을 맛보게 됐습니다. 절망 가운데 살려 달라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하나님은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건져 주셨습니다. 그때 목사가 돼 불우이웃을 돌보겠노라고 결심했습니다. 한 때는 세상을 원망하며 빵 한 조각을 훔쳐 어두운 길에 들어선 삶을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 죄 짐을 풀고 새로운 희망으로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께 모든 영광 돌립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의 능력을 소유한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의 능력이 있습니다. 화해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와 축복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3. 십자가를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으라
그러므로 셋째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십자가의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주여, 십자가를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까지는 내 자랑이 너무 많았습니다. 나의 학력, 나의 배경, 나의 가진 것, 이런 자랑이 너무 많았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선 이게 자랑거리가 아무런 자랑거리가 아니에요.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주여, 내가 예수 믿고 난 다음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내게 남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만을 자랑하기 원합니다. 십자가만을 높이기 원합니다. “주여, 내가 한평생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고집과 교만과 불순종 때문에 늘 깨어지고 얻어맞고 문제 가운데 사는 삶이 아니라 십자가만 높이고 십자가만 자랑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드러내는 그러한 인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참으로 놀라운 것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위해서 다 내려놓으면,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면 주님이 높여주시는데, 주님이 높여주시면 낮출 사람이 없어요.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여러분을 세워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랑거리가 많았잖아요. 좋은 가문, 좋은 혈통, 좋은 학벌, 집이 또 부유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만 자랑하고,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일생동안 은혜가 임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체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어떤 절망에서도 건져줍니다. 결국,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고 오래 믿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십자가를 붙들고 사느냐 붙들고 살지 않느냐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야 돼요. 십자가만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입니다.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이기는 능력입니다. 일생 살아가는 동안 십자가를 붙잡고 승리하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십자가를 붙들고 귀신을 쫒아내고, 십자가를 붙들고 병을 고치고, 십자가를 붙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세상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서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치는 주님의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찬송을 불렀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주님, 이 찬송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무엇 때문에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까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갇혀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의롭기 때문에 늘 부딪힙니다. 늘 상처를 받습니다. 늘 괴롭습니다. 왜? 내가 모든 걸 다 해결하려고 하니까. 못합니다.
제가 제 힘으로 교회의 무슨 일을 해결하려고 했더라면 제가 여기 서있지도 못할 것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다 맡기세요. 여러분이 걱정할 게 없어요. 주님께 다 맡기세요. 걱정할 시간에 기도하고 감사하고 찬양하십시오. 주님이 다 이루었다 하셨는데 우리가 또 무엇을 이루려고 합니까? 저는 하나님께 받은 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해 우리 교회를 얼마나 축복하시고 얼마나 많은 복을 주실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만 붙들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 붙들면 안 됩니다. 십자가만 붙들면 이전에 보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과 기적이 부흥이 우리 교회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자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참 믿음의 삶을 산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최정석 선교사님은 일본에 가서 정말 12년 째 불쌍하고 가난한 일본 사람과 노숙인을 섬기는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어요. 일본 오사카에 가마가사키 마을이 있는데요, 거기는 노숙인과 일용직 노동자가 2만 명이 모여 산답니다. 2만 명. 1960년대 이후 형성된 일본 최대의 노숙자 마을인데 그 노숙자를 섬기기로 유명했던 마더 테레사 수녀가 몇 차례 방문하기도 했던 곳이라고도 합니다. 매년 300여명 정도가 길거리에서 그냥 생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그 마을 한 가운데 사각공원 옆에 약 7평 규모의 낡은 이코이 식당, 창고 같은 이곳에서 우리 최선교사님이 매 주 4차례 1,200명의 무료 급식 주먹밥을 만들고, 매주 화요일, 수요일에는 이발 봉사, 또 헌 물품 바자회가 열리고, 저녁 순찰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을 또 모은다고 합니다. 30대 전도사 시절에 우연히 이 식당에 무료급식 봉사활동을 하고 있던 가나이 아이메이 목사님을 만났고 그 목사님이 정식으로 이 분이 먼저 이 일을 시작했어요. 초청을 해서 그때부터 주님께서 나를 그곳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면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향하는 걸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말을 주님 음성으로 듣고 그곳에 가서 12년 동안 섬기고 있는데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마세요. 내 사역의 성과를 드러내려고 하지도 마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어요. 주먹밥을 먹기 위해 두세 시간씩 기다리고 있는 긴 줄, 그 줄의 맨 끝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걸 잊지 마세요.”
지금까지 우리는 사람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했습니다. 양복 잘 입고 좋은 옷 입고 다니면 ‘아, 저 사람 괜찮은 사람이다.’ 옷을 남루하게 입고 좀 초췌한 모습이 있으면 ‘저 사람 좀 문제 있고 어려운 사람이다.’하고 생각하는 그런 인간적인 편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편견이 없는 것입니다.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입니다.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있는 자나 없는 자, 높은 자나 낮은 자, 나이 많이 들었나 나이 적게 들었나 우리는 모두 다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사랑해야 됩니다. 특별히 가진 자의 사명이, 의무가 더 큽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과감하게 나눠야 합니다. 미국이 아직도 세계의 최강대국으로 유지되는 이유는 기부문화 때문입니다. 기부문화.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 나누자.” 빌 게이츠, 워렌 버핏이 전개하고 있는 “부자들이 재산 절반을 먼저 사회에 내놓자.” 전 세계를 다니며 부자들에게 설득을 합니다. “이것 다 당신이 당신 노력으로 벌은 것 아니지 않소. 절반을 내놓읍시다.” 우리나라의 재벌이 이것만 받아들이면요, 뭐 반값 등록금, 뭐 복지 문제 다 해결돼요. 하루아침에. 이 얘기가 꼭 들려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을 함께 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이 삶이 바로 십자가 신앙의 삶입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목사님이 『나를 버려야 예수가 산다』는 책에서 말씀합니다. “자아가 깨어진 사람은 자기의 무능력을 깨닫고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나는 전적으로 무력하다. 모든 생명의 호흡과 힘이 내 주 예수님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할렐루야. 여러분! 세상적인 욕심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으세요.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모든 문제의 원인이 바로 이 탐욕 아닙니까. 탐욕. 십자가에 못 박아야 돼요. 철저히 못 박아야 돼요. 이것이 사라지면 대한민국이 아주 지금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복 받은 나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되어서 더 이상 옛사람의 모습에 매어 살지 말고 이제는 주님 안에서 변화된 십자가의 군사로서 오직 예수님 제일주의의 신앙으로 예수님만 높이고, 예수님만 닮아가고, 예수님만 증거 함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로
고전 2:1-9 / 이수영목사
고린도는 기원전 146년 로마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꼭 한 세기 쯤 후 율리우스 시저의 명에 의해 재건된 도시입니다. 기원전 27년 아가야 주의 로마총독 주재지가 되었고 그리스 최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다양성, 문화, 교역, 이교주의, 물질적 부 그리고 도덕적 부패로 유명한 번창하는 항구도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웠지만 그가 떠난 후 이 교회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까지도 도전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는 고전1:18-25에서 사도 바울은 대단히 단순하면서 공격적인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 여기는 자들은 멸망할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차피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지혜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단순한 일조차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저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그 그리스도, 그 십자가, 그 믿음이 곧 사람의 유일한 참 지혜이고 능력이다. 우리가 전할 것은 그것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간단명료한 입장을 취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가 고린도에 올 때 어디서 왔는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왔습니다(행18:1). 아덴에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고린도로 떠나기 직전에 그가 한 일이 아덴의 바위 언덕인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17:22-31). 그 연설은 철학과 수사학의 도시 아덴 사람들을 상대로 한 연설답게 대단히 논리적이고 변증적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그 연설을 들은 아덴 사람들 가운데 믿게 된 사람도 몇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냉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조롱한 사람도 있고 “다시 듣겠다.”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실망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다른 데서처럼 계속해서 전도하려 하지 않고 곧바로 아덴을 떠나버린 것입니다(행17:3233).
바울이 아덴에서의 전도를 포기하고 떠나버린 이유의 하나로 우리는 그의 어눌한 말솜씨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당대의 아덴은 철학의 중심지였고 수사학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천하에 지혜가 많다 하고 말 잘 한다는 궤변가들과 웅변가들은 다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지식과 글 솜씨로는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인정하듯이 말이 시원치 않았던 것입니다(고후10:10, 11:6). 고린도후서에서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고후10:10) 한다고 썼으며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후11:6) 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수사학이 발달한 아덴에서 역시 자기의 어눌한 말 가지고는 그곳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확실한 사실을 참담하다 할 정도로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의 말을 더 들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덴을 도망치듯 영영 떠나게 한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눌한 말솜씨만이 그의 전도가 아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덴에서의 그의 연설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변증적인 훌륭한 연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연설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음을 주목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대단히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아덴 사람들의 사고에 맞추려고 한 것이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그의 연설의 실패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의 실패는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보다 분명하고 담대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 자신이 뒤늦게 처절히 깨달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아덴을 떠나서 간 곳이 바로 아덴에서 서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고린도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의 바울의 심정을 잘 드러내 준 대목이 오늘 본문의 1-5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아덴으로부터 고린도에 올 때 바울이 천명한 이 결심은 뒤집어 보면 그가 아덴에서는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려 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빼놓고 말했으며, 그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전도하려 했고, 사람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에 있게 하려 했음을 자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덴에서의 실패의 원인임을 그가 뼈저리게 깨달았음을 실토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는 인간의 지혜로, 논리적 접근으로 전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의 지혜에 대해 더 이상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로 맞서기로 결심했음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는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참된 지혜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들에게만 이 비밀한 진리를 알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만 만세 전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이 세상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최고 통치자들과 최고로 지혜 있다 하는 자들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과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본문 6-9절). 그것은 이미 이사야 같은 예언자를 통해서 알려졌고 성경에 기록된 바라는 것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만 보이게 하시는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고전2;10).
오늘날 현대인들은 옛날 아덴 사람들 이상으로 매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합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문제까지 그렇게 하다가는 복음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의 사역을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역사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역하기를 주저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담대한 전도자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사용하시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만드실 것임을 믿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복음 그대로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에 부딪치고, 그래서 조롱을 당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복음을 믿는 우리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는 부활주일에 다시 믿지 않는 이들을 교회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들에게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를 알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아덴 사람들을 상대로 별로 성공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의 실패 이후 세상의 말과 지혜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로만 전하기로 작정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고 전하면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차피 보지 못하던 이가 보게 되고 듣지 못하던 이가 듣게 되며 깨닫지 못하던 이들이 깨닫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다 같이 동참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성공적인 전도 방법
고전 2:1-5 / 김윤기목사
언젠가 저는 이런 이웃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사를 왔다고 해서 전도하러 그 집에 들렀는데 여러 모로 부족함이 없는 주인댁이 약간은 교만한 태도로 저를 대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흔히 만나는 핍박의 자세가 아닌, 교만한 자세의 이웃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성령께서 제 마음을 다스려 주셨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겸손하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유미(가명) 엄마는 모 무역회사의 경리과장이었습니다 일 처리가 깔끔하고 야무진 덕에 재택 근무 3일에 나머지 3일만 출근하는 직장 여성이었지요. 저는 일단 막 이사를 온 이웃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는 어린아이가 있었습니다 직장에 나간다는 말에 "당장 아기 봐줄 사람이 없을테니 제가 아이를 봐드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유미 엄마가 저를 위아래로 흩어보더니 "그럼, 내일 내가 일 나가 있는 동안 아이 좀 봐줄래요?"라 고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선뜻 대답했습니다. 이웃을 대접한다는 뜻에서 흔쾌히 돕겠다고 나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유미 엄마의 시선에서 다른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돈을 주고 사람을 부리는 듯한 거만한 태도였습니다. 저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통해 주님께서 그 분 마음에 복음이 들어가도록 인도하시기만을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새벽기도를 다녀온 뒤 아이들이 등교하고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저는 부리나케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아이는 유미와 유미의 동생 유진이란 아이인데 유진이가 어찌나 울어대는지, 하루 종일 아이를 업고 지내야 했습니다. 낯이 설어서 그런가, 무엇이 못 마땅한지 등에서 내려놓기만 하면 울었습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하루를 그렇게 온 종일 업고 지내야 했습니다 집안 일도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빨래며 청소는 전도대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했습니다 점심은 겨우 자장면을 시켜먹어야 할 정도로 아이는 제 등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녁 6시쯤 되자 유미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미안해서 어떡하죠?" 저는 도리어 상냥하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예요. 괜찬아요. 천천히 오세요." 저는 기왕 봉사하는 거, 생색내지 말고 끝까지 잘 감당하게 해달라 고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녁 7시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유미 엄마가 돌아왔습니다 저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반갑게 유미 엄마를 맞았습니다 유미 엄마는 저에게 "수고했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투는 마치 '네가 수고한 만큼 돈주면 되는 거지?' 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미안하다거나 고마워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집으로 돌아가며 물었습니다. "저, 내일은 몇 시까지 올까요?" "아, 내일은 우리 유미 전학을 시켜야 되니까, 아침 9시까지 와주 세요," "네,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제 걸음은 곧장 예배당을 향했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서 자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한시가 더 급했습니다. 예배당에 올라가서 무릎을 꿇으니 자꾸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하나님, 유미 엄마가 하나님 만나서 이 교만이 꺾이게 해주세요. "기도를 드리는데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토록 교만했던 제가 교만한 유미 엄마를 놓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유미 엄마를 품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했습니다. 다음 날 9시 , 다시 유미네로 갔습니다. 학교 갈 준비를 하느라 부산한 유미 엄마를 보자 문득 어느 학교로 아이를 전학시킬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어느 학교로 전학시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본동초등학교로 전학시킬 거라고 했습니다 굳이 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 교만이 좀 꺾여야 예수님도 들어가시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본동초등학교요? 그러면 혹시 학교에 가서 전학수속 밟으시다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제 얘기를 하세요." "아니 왜요?" "그냥 선영이 엄마랑 이웃이라고 하면 혹시 어떨까 싶어서요." 말꼬리를 흐리는 저를 보면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미 엄마는 서둘러 학교로 갔습니다 오후 3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유진이를 보느라 땀을 뻘뻘 홀리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났습니다. "누구세요?" "저예요. 유미 엄마." 벌써 목소리부터 달라져 있었습니다.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던 목소리가 아니라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였습니다. 문을 열자 유미 엄마는 황송한 표정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몰라 봬서 너무너무 죄송하다고, 선영이 엄마가 전교 어린이회장 엄마인 줄 몰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유미 엄마 눈에는 전도하고 아기 봐주는 제 모습이 하찮게 보였나봅니다. 당장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을 보고 저를 평가하다보니 전교회장의 엄마라는 조건을 보고 또 지나치게 높여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찌 됐든 저로서는 일단 유미 엄마의 교만이 꺾였다는 게 다행이었습니다. 코가 땅에 닿도록 죄송하다고 그러는 유미 엄마를 보면서 갑자기 사랑의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괜찮아요, 유미 엄마 저는 주님 안에서 이미 그런거 버린지 오래 예요." 유미 엄마는 급히 방에 들어가서 하얀 봉투 하나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아이를 봐준 것에 대한 사례금이었습니다. 저는 그 봉투를 뿌리치며 말했습니다. "저는 이 돈 필요 없어요. 유미 엄마, 대신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 주세요." 그러자 유미 엄마도 감을 잡았는지 먼저 말을 꺼내놓았습니다. "집사님, 사실 저도 한때는 청년부 부회장까지 했던 사람이에요. 제 어머니는 권사님이시고요." 알고 보니 이 분은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한 뒤 신앙생활을 접은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겠어요. 예수님을 믿을 거예요." 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유미 엄마는 스스로 결단하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새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접한 후 그 분의 변화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옛날 제가 노량진교회로 돌아왔을 때 그 변화를 보고 목사님들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정말 놀랍다고 했던 것처럼, 유미 엄마의 변화는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습니다. 겸손하게 달라진 유미 엄마의 모습을 보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분이심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전도자가 받게 되는 유혹들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설명하면서 성공적인 전도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바울의 전도 원칙 역시 인간적으로 볼 때는 미련한 방법이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방법입니다.
1.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의 유혹을 배제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도자에게 실패를 안겨다 주는 최대의 유혹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지방에서 설교를 시작했을 때(행 18:1-17) 당시의 웅변가나 철학자들처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증거"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행하신 구원의 사실에 대한 증언을 말합니다. 또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인간적인 웅변이나 철학적인 미사여구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전할 때에 웅변적인 말과 인간적인 심오한 철학적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전도자가 그러한 것에 사로잡혀서 전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는 붙잡히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전도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도자가 될 수 없고 단지 웅변가나 철학자에 불과합니다. 자꾸 인간적인 웅변과 지혜를 사용하게 되면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올바른 진리를 전하지 못하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는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보다는 사람의 웅변과 사람의 지혜에 더 관심을 갖게 되어 천국과는 거리가 멀게 됩니다. 인간적인 것에 의존하는 전도자는 결국 하나님의 순수한 복음과는 거리가 먼 현대주의 신학자와 같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웅변과 인간 철학의 심오한 지식을 가지고서 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전도 방법은 우리에게 굉장한 격려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웅변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헬라 철학에도 박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도할 때에는 그러한 것들을 바탕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의 우리도 비록 인간적으로 뛰어난 지식과 언변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복음은 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한 말을 상기합시다(행26:28-29). 말이 적으나 많으나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기와 같이 믿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나중까지 순수하게 하나님의 지혜로써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덕있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한 곳에 융통성 없이 목회하는 교역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안 믿는 동민을 보고 지옥 갈 사람들이라고 하여 대화는 물론, 마을이 협동하여 하는 일을 비난하다가 난처한 입장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경 진리대로 보면 불신자가 지옥가게 되어 있고,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고 하였으니 잘못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바른 말이 덕을 이루지 못하여 전도의 문을 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죄는 밉더라도 죄인은 불쌍히 여기고 사랑으로 인도하여야 하는데도, 율법주의자들처럼 정죄하고 절교까지 하였으니,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세상은 신자와 이교도와 불신자가 함께 사는 곳입니다. 불신자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전도가 안 됩니다. 전도의 문을 막았다면 교역자도, 교인도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또 한 곳에 이웃에서 제사를 지낸 떡을 받아 가지고는 그가 보는 앞에서 "교인은 우상의 제물은 더럽다고 안 먹어요" 하고는 구정물에 부어버린 여전도사가 있었습니다. 그 이웃 사람이 얼마나 당황하고 분개하겠는가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신앙 양심상 안 먹은 것을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른 말이 덕을 이루지 못하여 이웃과 대화가 끊어졌으니, 전도의 문을 막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0월 전도의 달에, 오늘 우리는 전도하러 나가서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려는 유혹을 받지 말고 순수한 복음을 전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열매를 맺는 역사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역사를 전하는 외에는 어떤 세상적인 것도 전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많은 일을 알고 있으면서 그러한 것을 알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도만 전하는 자세를 우리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깨달아져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우리는 사람의 이성에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양심에다가 전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전도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성령님이 역사할 때 전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 이성적으로는 부정을 할지라도 양심이 긍정적으로 나오면 복음 증거가 됩니다. 이러므로 복음을 인간의 웅변이나 철학적인 지식으로 변장을 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오직 복음만을 단순히 전도의 방법으로 전해야 합니다. 인간 편에서 볼 때에는 전도가 어리석게만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전도의 방법을 통해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1:21). 이 말씀에 힘입어 우리는 모두 전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전도자가 될 수 없다는 그런 두려움을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면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것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다면 복음 증거 할 때에 지식을 내세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대사도요, 성경의 1/3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했는가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웅변을 못하고 무식하므로 전도하지 못한다는 소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세상 지식이나 지혜는 모자랄지 모르지만 그것보다 훨씬 좋은 하나님의 지혜요 지식이 되시는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지식 중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보다 더 유식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헛된 철학이나 공교한 말로 사람을 설복시키는 전도방법은 전혀 효과가 없습니다. 파울은 이를 가장 멸시하였습니다(골 2:8).
심지어 신학이나 성경교리로써 사람을 굴복시키고자 해서도 안됩니다. 단순하게, 그리고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었다가 살아나신 것을 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계시는가? 선악과는 왜 지었나? 선택의 교리는 모순이 아닌가? 등등에 대한 이론전개, 토론 등은 전도에 효과가 없습니다.
전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만 전하게 될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한국에서 어떤 목사님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총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죽이기 전에 "너는 위대한 그리스도인 설교자다. 죽기 전에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를 한 번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반 농담조로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45분간설교를 하였습니다. 설교가 끝나자 공산주의 병사들은 다 가버리고 그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풀려났습니다. 그는 후에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를 말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도였고 그리스도교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나병 같은 무서운 피부병에 걸려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 그리스도인 부인이 그녀의 집에 와서 "예수님이 당신 집에 찾아 오셔서 당신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당신 병을 치료해 주시고 그리고 당신을 하늘나라로 인도하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 말을 하고 기겁을 하여 그 집을 도망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 말에 관하여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아들에게 이 부인에게 가서 좀 더 말을 해달라고 부탁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부인은 왔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드디어 회심하였습니다. 그녀가 그리스도인이 된지 3일만에 피부병이 나았고 5일만에 눈이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자기 어머니에게 일어난 일에 감동되어서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 후 목사가 되어 이 자리에 서게되었습니다. 이 목사의 설교에 사로잡았던 공산주의자들이 그를 놓아주었습니다. 지금 그는 그의 사랑스러운 유능한 아내는 약 2백 명의 농아들이 있는 농아학교를 한국 대구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전도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복음을 전함으로 좋은 결실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의 나타남과 그 능력으로 하여야 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3절).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때의 상태를 고백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고후 6:4-8).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을 때에는 약해졌습니다. 그 마음 속에 대단히 무력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자신이 복음을 증거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로 하지 못할까 하는 그런 두려움이 끊임없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는데 있어서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법에 박식한 사람입니다. 또 헬라 철학에도 박식하고 유대교에도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할 때에는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가 무력한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 증거하려고 할 때 약해지고 두려워지고 떨릴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라고 말한 것처럼, 사도 바울은 복음 증거할 때 인간적으로는 약하고 두렵고 떨렸기 때문에 인간적인 웅변과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전했다는 말입니다.
오직 복음 전도는 성령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나타남과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만 두렵지 않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기도할 때에 기도가 잘 되고 생수가 강같이 넘쳐 나옵니다. 그 때에 말씀을 증거하면 말씀에 은혜가 있고 능력이 나타납니다. 곧 말씀이 살아서 움직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전도자의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면 본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성령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성령을 의지 할 때 이 능력은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나타납니다. 이 능력은 죄인을 회개시키고, 성도가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귀신이 고함치며 나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병든 자가 낫게 되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느 목회자가 그가 처음 부임한 교회에서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28세 때 무자격 전도사가 한 교회로 갔는데 그가 간 지 반년만에 부득이 담임목사가 다른 곳으로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이 전도사는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학교 문턱을 넘어보지도 못한 것은 물론 변변한 참고도서마저 없었기에 설교 준비를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경험 많은 노인장로들이 "살림과 심방은 우리들이 다 맡아하겠으니 전도사님은 아무 걱정 마시고 설교 준비만 하시오" 라고 했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설교가 난관으로 부딪혀왔습니다. 코너에 몰려 다급해졌을 때, 그는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처럼 강단 앞에 나아가 엎드렸습니다. 처음은 10분도 앉아있기가 힘들더니 차츰 그 자리는 떠날 수 없는 자리로 변했습니다. 영하 20여 도의 혹한인데도 눈물로 마룻바닥을 흥건하게 적셔서 얼어붙었으며 물의 열기는 냉기를 능가했습니다. 이렇게 하루 세시간 이상의 기도를 계속하기를 3개월 정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때 그는 성령충만이라는 무엇인지 체험했습니다. 우찌무라 선생이 "성령의 충만을 잠깐 맛보기 위해 10년간 기도해도 아깝지 않겠더라"고 말한 것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부터 전도나 설교나 오직 성령님만 의지하고 나갈 때에 승리의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순수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불신자는 구원의 길을 발견하는 역사가 불같이 일어나 많은 열매가 맺을 줄 믿습니다.
제2의 결단
고전 2:1-5 / 안양준목사
몹시 날씨가 흐린 어느날 아침에 우찌무라 간조의 두 아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현관에서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유는 “날씨가 흐리니 우산을 가지고 가야 하느냐? 안 가지고 가도 되느냐?”하는 것입니다. 한 아이는 “오늘 비가 반드시 올 테니까 우산을 가지고 가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또 한 아이는 “오늘 비가 오지 않을 것이니 가지고 가지 않아도 된다”고 서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만일 우산을 가지고 갔다가 비가 안오면 좀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안 가져 갔다가 비가 오게 되면 그야말로 더 큰 낭패가 아니겠니? 너희들은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 불편하지만 안전한 편을 택하겠니? 아니면 편하지만 모험적인 편을 택하겠느냐?”
우리들은 항상 선택과 결단이 필요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할때 “오늘 무슨 옷을 입을까? 오늘은 어떤 넥타이를 매고 갈까?”하고 거울 앞에 망설입니다. 또 가정주부들은 “오늘은 무슨 반찬을 할까?” “칼치를 살까? 꽁치를 살까?”하고 주저합니다.
그 중 한 가지를 선택하고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이처럼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이 항상 우리에게 요구되지만 가끔 이런 선택의 자유를 부담스러워하고 심지어는 포기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떤 여학생이 상담을 하는데 약혼자가 남자답지 않아서 결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여학생이 하는 말이 “어느 식당에 가서 무엇을 먹읍시다”하고 자기를 데리고 갔으면 좋겠는데 “어디로 가실까요? 무엇을 드실까요? 무엇을 할까요?”라고 일일이 물어보는데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어느 때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 자신이 가진 자유를 포기하는 결단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자유를 포기하는 결단, 그러나 그것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고 결단하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최고의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자기 백성에게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했고, 엘리야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너희는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외칩니다.
언제까지 머뭇거리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로 바뀌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울의 제2의 결단이 나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제1의 결단은 예수를 믿기로 하고 예수에게 우리의 삶의 목표를 두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과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항상 마음 속으로 “나는 내 아내를 깊이 살아하며 또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그 마음은 전혀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남편이 자기 방식대로 자기 나름의 습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때 아내는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의심하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후 예수님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사람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옛모습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제2의 결단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 17:에 바울은 아테네로 전도여행을 갑니다. 그는 당시 이름난 율법교사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고 또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 그는 헬라 철학의 본산지인 아테네를 항상 동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철학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의 전도자로 아테네를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아테네에 들어서자 많은 우상이 있는 것에 격분합니다. 그래서 광장에 매일 나가서 거기 모인 많은 철학자들과 옛날 자신의 철학적 지식을 가지고 대결을 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보기에 매우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예배하는 대상 중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을 보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알지 못하는 신’을 알게 해주겠습니다.” 그러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예수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설명을 하고 ‘이름 모르는 신’을 잘 알고 섬겨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다시 생각해 보면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테네 사람들이 ‘이름 모르는 신’이라 칭하고 있는 신이 결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본에는 ‘야오요로즈노오가미’라고 하는 8백만이나 되는 신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귀신을 만들다 보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아마도 우리가 모르고 빠뜨린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이름이 빠진 귀신이 있다면 그 귀신이 그냥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신’(Unknown God)이라고 써 붙인 다음 “인생이 미련해서 이름을 다 못붙였어도 용서하시고 이 제물을 받으시고 진노를 푸십시오”하며 섬긴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름 모르는 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너희가 모르고 섬기는 신이 곧 하나님이다”라고 외치고 있으니, 이것은 하나의 궤변이지 절대로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의 강연은 멋진 것 같지만 전혀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결국 바울은 그가 전도하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지만 아테네에서 만은 교회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는 낙심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 내가 실패했던가?” 그는 고민합니다.
그후 고린도에 가서도 전도하기를 망설이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닷가에 나가 천막치는 업으로 돈을 벌어 생활하며 일년 육개월 동안 그 곳에서 살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바울아, 두려워말고 말하라. 이 성에 구원 얻을 내 백성이 많다. 왜 잠잠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잠잠했습니까? 그는 고린도에 있는 동안 마음이 약해져서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다. 핍박이 있어서가 아니라 두렵고 자신이 없어서였습니다. 왜 그렇게 두렵고 자신이 없었던가? 그는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말을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제2의 결단을 내립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건강이 있으면 건강에 의지하며, 돈있으면 돈을, 또한 지식이 있으면 지식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것에 의지하다가 그것이 사라지면 낙심하고 절망에 빠져 연약해질 뿐입니다.
그러면 제2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십자가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고전 1:에서 “유대 사람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구하나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만 의지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고 무능력한 것이지만 우리들에게 십자가가 모든 능력의 근원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워싱턴시에는 많은 정치가들이 모여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많은 정치인들이 주일이면 여러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워싱턴시에 있는 교회 목사님들은 세계적으로 이름난 정치가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 때문에 유식하고 매우 고상한 설교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설교가 은혜로울리 없습니다. 이 정치가들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과 오직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십자가의 복음만을 듣고 싶어 차를 몰고 시골 교회를 찾아 갑니다. 그러면 이런 결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것은 시골 교회에서 그 사람이 워싱턴시에서 온 아무개라고 소개가 되면 그 다음 주부터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유식한 설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이 정치가들은 “목사님, 저희들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설교를 들으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메마른 심령에 힘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온 것이니 예전처럼 설교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한 것이 사도 바울의 제2의 결단입니다. 우리는 이제 귀중한 결단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해야 하겠습니다.
설교 잘하는 목사보다 중요한 것
고전 2:1-5 / 이정선목사
기독교에서는 고대로부터 변증학이 매우 중요한 분야로 여겨졌습니다. 변증학이란 어떤 사실이나 진리에 대하여 변론하고 증명하는 학문입니다. 즉 기독교의 진리를 이교도들에게 전파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는 변증학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던 것입니다. 특히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이단에 대처하는 일은 변증학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뛰어난 변증가는 스데반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집트와 아시아 여러 지역의 회당에서 온 사람들이 스데반과 변론을 했는데 아무도 스데반을 이기지 못했어요. 바울 역시 뛰어난 변증가였습니다. 아테네에서 스토아 철학자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변론할 때 사람들이 바울을 말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말을 조리있게 잘 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아주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4세기 경에 활동했던 크리소스톰이라는 설교자가 있었는데, 얼마나 뛰어난 언변을 구사했던지,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졌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스펄전이라는 탁월한 설교자가 있었지요? 미국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드가 설교하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회심하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설교 잘하는 목사님이 인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못하면 쫓겨날 수도 있어요. 반면에 설교 잘하는 목사님이 있는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기독교 변증학, 또는 설교를 잘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말로 담아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은 설교를 잘해야 된다는 것과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말을 잘하고 설교를 잘하는 것이 장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화려한 껍데기는 본질이 되는 알맹이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아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말주변이 복음을 전하는 데 장애요소가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다 담아서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지요. 스데반이 뛰어난 변증가였습니다. 각국에서 온 내로라하는 말장이들이 스데반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데반의 말에 설득되어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했던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스토아 철학자, 에피쿠로스 철학자들과 변론했습니다. 바울이 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 철학자들이 바울에게 설득되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말을 조리있게 잘하고 설득력이 있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를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는 사람이에요. 말하자면 증인입니다. 증인은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말하기만 하면 돼요. 거기다 설명을 첨가하고 아주 세련된 문장으로 그것을 말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오히려 증거를 왜곡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증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너희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그의 임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는지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그가 고린도에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상당히 의외적인 표현이지요? 바울이 어디 다니면서 두려워 떨었다고 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는 데 있어서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그는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하는 걸까요? 그가 육체적인 두려움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두려워했고 왜 그랬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고, 또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나서 그리스로 건너와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인데, 그리스에서 가는 도시마다 그는 배척을 당하고 쫓겨나야 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혀 매를 맞았고, 데살로니가에서는 대규모 군중집회까지 열릴 정도로 바울에 대한 대적감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베레아로 갔는데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거기까지 쫓아와서 또 도망을 쳤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멀리 아테네로 갔는데, 거기서 바울이 철학자들과 변론을 벌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고린도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가는 곳마다 발을 붙이지 못하고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괴롭고 힘들겠어요? 그나마 이 고린도가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요. 바울이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상태를 표현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복음이 배척당하는 것을 보는 것만큼 두렵고 떨리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바울은 복음 전하는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상대방이 철학자이면 나도 철학자가 되어 복음을 변론하던 아테네에서의 방법이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거기서 바울이 깨달은 것은 복음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의 유창한 말솜씨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전도란 말 그대로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설득해서 굴복시키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하려고 하니 힘들어서 못하지요.
전도는 하나님의 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지혜인데, 우리 인간의 지혜로 그것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즉 우리의 말솜씨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을 증언하는 것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말 한 마디만 툭 던져놓고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식으로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요.
물론 말주변이 좋아서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옳지 않다고 바울은 여기서 말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 대단히 중요한 말 아닙니까?
만약 바울이 유창한 언변과 해박한 지식으로 전하는 것을 듣고 믿은 사람이 있다면, 그의 믿음은 바울의 지혜에 근거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인기있는 설교자들이 가지고 있는 위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능력있는 설교자를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같은 얘기를 해도 다른 설교자가 전하는 말씀은 은혜가 되지 않고, 그 능력있는 설교자가 말하면 은혜가 돼요.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는 설교는 설교자가 자기가 하는 설교 속에서 스스로 작아지고 어리석은 자가 되려고 하는 설교입니다.”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 영광을 얻게 되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몫이 없습니다. 설교에서 설교자의 능력이 나타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자리가 없지요.
뭐 그렇다고 설교 잘하는 인기있는 목사님들이 잘못되었다거나 설교를 잘하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은 했지만, 바울의 설교는 능력있고 많은 사람들의 심장을 녹였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능력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언어와 행동에서 하나님이 증거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드러나고 내가 존중되고 내가 칭찬을 받는 곳에 하나님이 서 계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귀하고 복되신 하나님의 모습을 증거하며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의 전도
고전 2:1-5 / 김태복목사
고린도 교회가 분열의 기운이 가득한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마디로 분석한다면, 하나님 중심으로 운영되지 않고 인간들의 생각 중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들끼리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일 수이고 생각이 같은 사람끼리 당을 지어 행동함으로 교회의 분열이 심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에 와서 하나님 중심으로 전도했으며 하나님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했음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어떻게 하나님 중심으로 전도했습니까? 그 전도 방법을 배워서 우리도 2006년도에는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만 전하였습니다.
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열심히 전도하기는 했지만, 인간적인 말솜씨나 인간적인 지혜 등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만 전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헬라 철학에 능통함에도 그런 지식을 하나도 동원하지 않고 십자가만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를 행17:16-34에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에 바울은 아덴이라는 도시, 지금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전도 활동을 했습니다. 그곳은 과거 소크라테스, 풀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유명한 철학자들이 활동하던 곳이어서 내 노라 하는 철학자들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전도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던 철학적인 지식으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열심히 열변을 토하면서 그들과 철학적인 논쟁을 벌이었으나 그 결과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웠으나 가장 큰 도시에서는 교회를 세우지 못하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은 왜 그런 결과를 가져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조용한 시간에 기도하면서 자기가 복음은 전하지 않고 철학적으로 기독교를 전한 결과요,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해도 인간의 말이나 지식으로는 사람을 전도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이제부터는 오직 복음만 전하리라.’고 결심한 줄 압니다.
많은 성도들이 생각하기를, 전도는 지식이 많고 배운 것이 많고 말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일 수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결코 사람의 영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전도할 때 너무 많이 아는 척하면, 교만함이 느껴져서 듣는 이의 기분이 언짢아집니다.
특히 논쟁을 벌여서 지고나면 불쾌해짐으로 오히려 전도의 문을 막게 됩니다. 사람은 진심으로 자기를 위해서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번 미식축구 슈퍼볼에서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안은 하인스 워드의 이야기요, 그 어머니 김영희 씨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어제 밤에 KBS 텔레비전을 통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여러 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의 어머니 김영희 씨는 흑인과 결혼한 후 미국에 가서 한달 만에 남편이 가출함으로 불행의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김영희 씨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하루 세 가지 잡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새벽 4시에 직장에 나가면서도 한국식으로 아들의 식사를 반드시 해놓음으로 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하인스 워드가 오늘 미식축구의 영웅이 된 것도 감동적이지만, 오늘 미국인들이 그에게 매료되는 것은 운동은 물론, 공부도 잘 했고, 또 인격도 얼마나 반듯한지 운동장에서 넘어졌다가 일어나도 언제나 웃는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모든 것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합니다. 워드는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엄마는 나의 전부입니다. 이 세상 전부와도 못 바꾼다고 말하고 싶어요. 엄마가 나에게 베풀어 준 모든 것을 평생 되돌려 드릴 수 없을 거예요. 내가 풋볼을 열심히 하는 것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퍼볼에서 승리한 것은 나와 어머니가 함께 이긴 겁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하나의 영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늘 내게 동기를 부여했고, 포기라는 것을 몰랐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 어머니는 대단한 분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아들의 자존심을 살리기 위해서 정부지원도 거절하였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아들을 억만 장자가 되었음에도 지금도 어머니는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매일 일을 하고 있습니다.
김영희 씨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탓인지, 자녀 교육의 방법은 철저한 희생으로 아이를 키우면서 “1등이 되기보다 겸손하고 감사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때로 아들이 잘못할 때는 매를 때리기도 했지만, 진심으로 자기를 위해주는 어머니 사랑 앞에 아이는 상처 받지 않고 그렇게 성공했고 모든 영광을 어머니께 돌리고 있을 정도로 효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미국 사회에서 한국 어머니들의 희생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미국 사회에 살고 있는 한국인 엄마들과 자녀들에게 큰 용기를 줄 것이요, 세계적으로 한국 엄마들에 대해 높은 점수를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자기들을 진심으로 위하는 모습을 보일 때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심으로 자기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전도할 때 감동을 받는 것이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식이 많은 사람만 전도할 수 있다면 베드로나 요한 같은 사람은 전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디 같은 분은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무디를 통해서 많은 전도가 이루어진 것은 죄인들을 위해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는 믿음을 가졌을 뿐 아니라 영혼 구원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전도할 때에 정말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심으로 전도의 놀라운 열매를 맺는 한 해 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바울은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전도하였습니다.
3-5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약 1년 6개월가량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고 전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거기 머물러 있는 통안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바울은 두렵고 떨리게 만들었습니까? 바울은 본래 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어려운 일을 모면할 수 있는 로마 시민권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복음을 위하여,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만큼 순교까지 각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두려워하며 떨었을까요?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을 때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자인가를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때는 모든 환경도 두렵고 사람도 두렵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였을 때는 물 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도를 바라보고 두려워하였을 때는 물 속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둘째 이유는, 고린도 전도를 위해서 자신을 그만큼 낮추고 겸손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지역은 죄악이 관영하고 사람들은 거칠고 난폭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가장 낮아졌고 겸손하여서 그들을 섬기고 높였습니다. 그러한 바울을 처음에는 우습게 여겼지만 그러나 계속되는 그의 겸손한 모습 속에서 한 명씩 한 명씩 마음에 감동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고린도에는 지금도 사도 바울 기념 교회가 깨끗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 기념 교회 정면 벽에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의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곧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을 기념하여 교회를 세우면서 그가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겸손한 마음이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겸손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신의 능력을 의지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 즉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사람의 방법으로 어느 사람을 교회까지는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 구원만은 우리 힘으로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연약함을 아는 자라야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함을 아는 자라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서도 싫어하시지만 사람들도 싫어합니다. 누가 교만한 모습으로 전도하는 말은 듣고 싶겠습니까?
자기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는 겸손의 사람은 말솜씨가 뛰어나지 못해도 성령의 능력이 나타남으로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생각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한 사람이 전도를 잘 할 수 있습니다.
전도할 때에 결코 ‘전도를 몇 명했다.’는 자기 과시나 구역 목표 달성을 위해서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만으로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지만, 전도 받은 사람도 상처를 받기가 쉽습니다. 전도하실 때에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십시오. 특히 전도할 때에 진정 영혼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그 때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한 젊은 목사님이 나이가 연노하신 목사님을 찾아가 묻기를 “목사님, 설교를 잘 해야 되는 데, 잘 안 됩니다. 어떻게 설교를 잘 할 수 있습니까?”라고 자문을 구했습니다. “자네, 얼마나 목회를 했나?” “한 10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힘들고 제가 보기에도 교인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정말 설교를 잘 하고 싶은가?” “예, 그렇습니다.” “그러면 하나 물어보겠네. 자네가 설교할 때에 ‘설교 잘 한다,’하는 평을 받고 싶은가?” “아, 그럼요.” “그러면 틀렸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떻게 하면 저들을 구원할까, 어떻게 하면 저들에게 은혜를 줄까, 이런 생각만 해야 하네.”
“그렇지 않고 설교를 잘 한다 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는 순간에 이미 설교는 죽 쑨 것이 되네.”라고 하더랍니다. 이는 비단, 설교 뿐 아니라, 전도나 충성, 구제나 봉사를 하는데도 대단히 교훈이 되는 말입니다. 자기 자랑이나 자기의 능력으로 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면서 진정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자세로 해야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는 자세로 복음을 담대히 전하면서 늘 낮아지는 겸손의 자세를 잊지 마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전도했습니다.
6-9절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혜’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혜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 지혜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온 복음의 지혜를 말합니다. 이 복음의 지혜는 7절 말씀대로 수 천년 세월 비밀히 감추어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장 귀한 지혜를 나타내셨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의 지혜입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심으로 모든 죄와 사망에서 구원 받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 아니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는 복음의 지혜입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지혜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았다면 8절 말씀대로 이 세상의 관원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관원’이란 예수님 당시의 정치가나 권력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못 박을 때에 정치나 종교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총독 빌라도와 대제사장 가야바입니다. 빌라도가 하나님의 지혜인 복음을 깨달았다면 어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살렸을 것입니다. 역사상 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구절이 있다면 요11:49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자는 이야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공회에서 큰 소리 치기를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편하다면 그를 죽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지혜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피 혁명을 일으킬 때도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 사건 때 특전사들을 투입하여 총칼로 진압할 때도 자기들 딴에는 뛰어난 정치적인 지혜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가야바의 주장이 과연 옳았습니까? 자기 지혜대로 행함으로 과연 온 백성들이 편하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2천년동안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모든 나라에서 추방, 학살당하는 끔직한 참상을 겪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공산혁명과 광주 시민들을 총칼로 제압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비참한 결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교만하게 되면 어리석어집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 박사들임에도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짐으로, 성경에 그렇게 많이 예언되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음에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 서는 천추의 대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왜 그런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율법으로만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를 만세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여 주신 후에 감추었던 비밀인 복음의 지혜를 나타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 감격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의 어떠한 고등 교육도 하나님의 깊은 비밀스런 계획과 섭리를 능히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본문 10절 말씀처럼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사정을 잘 아시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지혜의 선물인 복음을 통해서 모두가 구원 받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복된 영생의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우리만이 이런 복음의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되지 마시고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우리 식구들과 친척,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에 듣는 이들의 영안이 열리고 영적 귀가 열림으로 저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성령께 충분히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리 전하는 사람이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말이 어눌할지라도 하나님의 강한 역사가 나타나 저들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바울은 아름다운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의 지혜로운 말로 전도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오직 복음을 전하기에만 힘쓸 때 전도의 문이 열리고는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매를 실컷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빌립보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일입니다.
갑자기 성령 충만하면서 입으로 찬송이 터집니다. 그러자 감옥 터가 흔들리고 매인 사슬이 풀리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간수가 놀라서 외치기를 “형제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합니다. 그 때 바울이 전하는 말씀은 간단합니다.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간단한 말씀에도 성령 충만한 가운데 외치니까 즉시 회개하고 온 가정이 세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과거 한국교회 안에 기이한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본 최봉석 목사님, 일명 최권능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은 신학교 다닐 때도 밤에는 밤새도록 기도하고 낮에는 틈만 나면 전도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세 번이나 낙제를 하여 졸업을 못한 분이십니다. 그 분은 평양 거리를 다니면서 전도할 때에 처음에는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간단하게 줄여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쳤습니다. 새벽이고 밤중이고 닥치는 대로 소리침으로 사람들이 눈살을 찌프릴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방앗간 앞을 지나가는데, 주인이 당나귀를 이용해 연자방아를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최봉석 목사님은 그 큰 목소리로 벽력같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당나귀가 놀라 벌떡 뛰는 바람에 방아가 엎어져 난리가 났습니다. 주인은 너무나 화가 나서 최 목사님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쳤습니다. 그런 식으로 전도하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오히려 교회에 대한 반감만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밤새도록 기도하고 성령 충만한 가운데 전도한 탓인지, 그 방앗간 주인이 회개하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전도 받는 다음부터 계속 귀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이 들리므로 결국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금년도에 믿지 않는 우리 식구와 친척, 이웃을 전도하기 위해, 오직 예수님만 전합시다. 오직 겸손하게 성령의 능력만 의지하고 전합시다.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바울의 전도방법
고전 2:1-5 / 지용수목사
이 시간에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만나주시고, 한 분 한 분을 능력 있게 하시고, 또 몸과 인격을 치료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 예배가 영원히 잊지 못할 예배가 되게 하나님께서 은총 내려 주시기를 원합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한 병사가 탈영을 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청년이 결혼을 하여 아기를 둘 낳고 살면서 이렇게 저렇게 군 입대를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자 다른 사람들보다 칠팔 년 입대를 늦게 했습니다. 훈련을 잘 받고 9주 교육도 잘 받아서 저희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얼마 뒤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이 군에 있는 사이에 가정 경제가 어렵고 시어머니 모시기가 힘드니 아기를 두고 가출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 병사의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신청했는데 허락이 되지 않으니 탈영을 했습니다. 탈영하여 집으로 가다가 생각하니, 집으로 가 보았자 헌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를 잡아 갈 것이 뻔하니 아기도 보지 않고 어머니 얼굴도 보지 않고 다시 부산으로 와서 부대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술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 다 죽여버리고 내 인생을 끝낼 거다!"하면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때 술집 주인이 경찰이나 헌병대에 신고했으면 그 병사의 인생은 구겨졌을 텐데, 그 주인이 군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라 부대에 신고를 했습니다. 그때 우리 부대장은 별이 한 개인 준장이었는데, 소장 진급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한 때 부대에 탈영병이 생기면 일이 심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2차적으로 체포하기로 하고, 1차적으로는 그 탈영병을 설득하여 귀대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탈영병에게 누가 가겠습니까? 눈이 뒤집혀 다 죽이고 말겠다는 탈영병, 더구나 술집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탈영병에게 말입니다.
그런데 부대에서 그 일을 제게 맡겼습니다. 제가 평소에 온유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니, 제가 접근하면 그 병사가 죽이지 못할 것을 알고 저를 보낸 것입니다. 사실, 제가 얼마나 가기 싫었는지 아십니까? 하지만 장군의 명령이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도하고 갔더니, 자기 주위에 쌓아 놓은 돌을 집어 들며 가까이 오면 죽인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행히 총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병사가 저를 잘 알기 때문에 제게는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10미터 가까이로 접근하니 정말 돌을 던질 것 같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스릴 있게 하려면 2시간 동안 해도 모자랄 테니, 줄여서 말하겠습니다. 제가 그 병사에게 말했습니다.
"네 인생은 끝난 게 아니야. 나도 끝나면 안 되고 너도 끝나면 안 돼."
"아니야! 내 인생은 끝났어!"
그래도 제가 접근했더니, 금방 던지려 할 것 같던 돌을 놓고 저를 붙들고 막 울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서 제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 가슴에 분노가 꽉 차 있었습니다. 아내는 가출했고 어머니와 아기는 굶고 있는데 휴가도 보내주지 않는 이 나라의 군대가 더럽다고 했습니다. 제가 장군의 약속을 전했습니다.
"이 사람아, 지금 탈영으로 끝내면 아기는 어떻게 되고, 어머니는 어떻게 되나? 자네가 죽는다고 다 끝나는 거야? 부대로 돌아가면 바로 휴가를 보내준다고 장군님께서 약속하셨다. 장군님께서 자네를 돕겠다고 약속하셨어."
"거짓말이에요. 내가 돌아가면 바로 영창에 보낼 거예요!"
"아니야, 만일 영창에 보내면 나도 같이 가겠다."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그 병사는 제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 병사를 데리고 부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장군님이 의리가 있어서 바로 그 이튿날 그 병사에게 아마 21일 간이라고 기억되는데, 휴가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대시켜 주었습니다. 그 병사는 제대 후에 아내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보람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 덕에 저도 한 주간 포상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탈영한 그 병사를 설득하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일등병이 저를 알고 장군님을 알고, 또 장군이 허락하면 휴가갈 수 있는 것도 알고, 장군이 자기를 도우면 도움이 될 것도 알았습니다. 상식으로 알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니 제가 설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생판 모르는 고린도에 가서 전한 약속,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만 믿으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이 약속은 그들을 설득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약속은 사람의 약속이 아니라 하늘의 약속,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하나님의 약속, 그것도 땅에서 잘 된다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잘 되지만 신들처럼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이 약속이 이해하기도 어렵고 믿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생판 모르는 그들에게 이것을 어떻게 설득시키겠습니까?
더더구나 사도 바울은 바로 직전에 아덴에서 그들을 설득하다가 실패했습니다. 아덴은 헬라의 수도요, 정치 교육 문화에 센터요, 지혜의 본고장이요, 헬라의 눈이라 일컬음 받는 곳이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향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에피큐루스, 제너의 활동 무대로 그 당시 세계 지성의 도시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학자이니 거기에 가서 자기의 철학과 지혜를 다 짜내어 화려한 말로 그들을 설득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사건이 사도행전 17장 16절에서 34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깨끗이 실패했습니다.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지식을 다 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라는 것을 설득시키려 했는데,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몇 사람만 믿었을 뿐 사도 바울은 오히려 조롱을 받았습니다.
고린도도 아덴 버금가는 지성의 도시이고, 또 한쪽은 방탕한 도시어서 사람들이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쾌락의 접시를 핥는데 정신이 팔려 인간이기를 포기한 그런 도시입니다. 한쪽은 지성이 대단한 고고의 실력과 지식이 있고, 한쪽은 짐승같이 사는 도시, 그리고 부유해서 옷도 화려하게 입고 정말 잘 사는 그 도시에 가서 사도 바울이 무슨 말씀으로 그들을 어떻게 설득시키겠습니까?
더구나 바울은 키도 1m 155cm 정도밖에 안 되고, 매부리코에 머리카락은 거의 없고 발은 굽었고 눈에는 눈곱이 있고 말도 시원치 않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바울의 말이 시원치 않습니다. 그런 바울이 고린도 사람을 보니 자신이 더 왜소하고 초라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니 고민을 합니다.
'내가 이 도시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선교하러 오기는 왔는데 그 상황을 보니 두려워서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아, 잠잠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외쳐라. 이 성에 내 백성이 많으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그리고 이런 감동을 주셨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지혜로운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식으로 설득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전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나타나 그들을 구원하리라.'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도의 방법을 정립했습니다.
'그래, 아덴에서처럼 전하지 않아야겠다. 이들이 믿든 믿지 않든,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예수님께, 성령님께 맡기고 나는 십자가 복음만 전하겠다.'
고린도에서 그렇게 전하니, 아덴에서는 실패했는데 고린도에서는 성공했습니다. 너도나도 방탕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철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부자도 가난한 자도 예수님을 믿어서 1년 반 동안 전했을 때, 큰 고린도 교회가 서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때 그는 다시금 전도 방법을 확립합니다.
'전도 방법은 내 말에, 지혜로운 설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때까지 공부한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만 증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감히 이 말을 합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모든 목사님들이 모든 책을 던져 버리고, 성경을 읽고, 성경대로만 전하면 한국 교회에 불이 붙을 줄로 저는 확신합니다."
일본의 많은 목사님들이 지성인이고 지식이 뛰어나지만 일본 교회가 잘 안 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웅변술로도 전하지 못합니다.
바울은 말이 시원치 않아도, 그리고 모든 웅변술을 다 버리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구세주라고만 전해도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입니까? 성령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 결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words but of power.)』
양곡교회도 목사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있는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난 주에 작년 한 해의 전도 보고를 우리 교회 직원에게 받고 감사했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전도하셔서 큰 교회를 이룰 만한 사람이 우리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았는데, 더더욱 감사한 것은 장로님들이 모두 열심히 전도하신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30명, 20명, 몇십 명씩 전도를 하셨습니다. 전도 챔피언은 여 집사님이었지만, 금상도 장로님, 은상은 권사님, 동상도 장로님, 장려상도 장로님이 타셔서 기뻤습니다.
그 다음에 감사한 것은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해서 계속 나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우리 교회는 한 번이라도 나오기만 하면 다 등록을 시키지 않습니까? 네 주 이상 출석해야 등록을 받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만 등록을 받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교회에 나오지 않으려는 친구를 억지로 끌고 나와서 그분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등록을 시켜버리는 분들도 계시는데, 정착율이 73.9%입니다. 100명이 등록했으면 74명이 계속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이 지용수의 설득으로 예수님을 믿었겠습니까? 말로 설득했는데, 어떻게 주일마다 교회에 시간을 바치고, 헌금을 바치고, 땀을 바치겠습니까? 그것은 성령님께서 그분을 만나 주시고 역사하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철학자도 아니요, 박사도 아닙니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경력도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인데도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다른 설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구주가 되게 하셨다."하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형제여,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지요?"하고 물었습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라. 그러면 성령을 받을 것이라."
이 말에 3000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 말의 능력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입니다.
전도는 쉬운 것입니다. 나는 초라하고 상대방은 찬란해도, 나는 머슴이고 상대방은 오만 명을 거느린 사장이라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면 그는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힘, 내 말의 실력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 전, 경북 북부 지역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참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그 교회를 설립한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후,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니 얼마나 기쁜지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가슴이 끓어올랐지만, 다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는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다리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네가 다리를 만들어라."
"하나님, 어떻게요?"
"네가 만들어라."
"무엇으로요?"
"나무로 만들어라."
그는 큰 나무 두 개를 준비해 놓고 기도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미켈란젤로가 조각하듯이, 자기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홈을 파서 다리를 묶은 다음에 목발 두 개를 잡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간증은, 그 마을 앞에 강보다는 작고 내보다는 큰 하천이 있어서 그것을 건너야 다른 여러 마을들로 갈 수 있는데, 그, 하천을 건너면서 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초겨울이 되면 다른 사람들은 하천을 건널 때마다 발이 시려워 고생을 했는데, 그분은 나무 다리라 편안하게 건너면서 "하나님, 제 다리가 나무 다리인 것을 감사합니다."하고 감사를 드렸답니다. 얼음이 꽁꽁 얼어붙은 겨울에는 자기 나무 다리와 목발 두 개로 조심조심 건너다니면서 전도했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전도해서 열 일곱 개 교회를 세웠답니다. 많이 배우신 분도 아니요, 부자도 아닌 평범한 장로님이 더구나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열 일곱 개 교회를 세우셨답니다. 그 지역의 거의 모든 교회를 그 장로님이 세우셨답니다.
그 일을 그 장로님이 다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장로님은 다니기만 하셨고, 성령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사도행전 강해를 했는데, 또 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불붙고 있습니다. 바울, 베드로, 요한 등 사도들이 전도 여행할 때 나타난 기적, 또 전도 열매를 쓴 것이 사도행전인데, 엄밀히 말하면 사도행전이 아니라 성령행전입니다. 바울이 지나가고, 베드로가 지나가고, 요한이 지나간 곳에 그들만 지나갔다면 무슨 열매가 있었겠습니까?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니 교회가 서고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행전은 계속 되고 있습니다. 로마에, 독일에, 영국에, 미국에, 네팔에, 한국에 지금도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팔은 지금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두 달이 아니라 2년 간 감옥에 가야 하는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감옥에 들어가서 오히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능력을 받은 다음에 나와서 또 전도하여 다른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왜입니까? 감옥에는 가도 지옥에는 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2년 간 감옥에 가야 되는데도 똑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 아니고 성령의 능력인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참 신비롭습니다.
여러분, 안수는 함부로 받으면 안 됩니다. 안수를 잘못 받으면 마귀의 영도 받게 됩니다. 제가 대전에서 안수 기도를 하는데, 한 부인이 제 손을 거부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방언을 하고 은사를 받는데, 그 부인은 탁 거절했습니다. 귀신의 영을 받으면 성령을 거절합니다. 귀한 머리를 아무에게나 내밀며 안수해 달라고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머리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릴 때 목사님들에게 안수 기도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많은 안수 기도 중에 두 분 목사님의 안수 기도는 제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 분은 지금 서울에서 목회하시는 김 모 목사님이신데, 은퇴할 연세가 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신 후에 안수 기도를 하실 때 제가 눈을 뜨고 보았습니다. 저는 목사가 될 사람이니 배워 두어야 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목사님이 손을 머리에 얹기도 하셨고, 등에 얹기도 하셨는데, 오래 기도하지 않으시고 "주여! 주여!"하시면서 지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저를 안수하실 때는 "주여!"하고 그냥 지나가지 않으시고 제 등에 손을 얹고 계속 계셨습니다.
'이상하다. 다른 분들에게 안수 기도하실 때는 1초도 안 계시더니, 왜 내 등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손을 얹고 계시나?'
너무 오래 계셔서 뒤를 돌아보니 목사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놀라서 목사님을 찾았더니 저 뒤에서 안수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제 등에는 목사님의 손이 계속 얹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느낌이 3일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제 체험입니다. 또 손이 등에 얹혀 있는 느낌이 들 때 제 가슴도 뜨끈뜨끈했고,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제 얼굴도 발갛고 추운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좋던지 "할렐루야! 할렐루야!" 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저도 모르게 "할렐루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한 목사님은 경찰서장을 하시다가 그만 두시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님이 되신 분입니다. 그 목사님에게 친구와 같이 안수 기도를 받았는데, 기도를 받을 때 제 가슴에 난롯불이 활활 타는 것 같았습니다. 그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경찰서장으로 계실 때 한 아주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어쩐 일입니까?"
"귀한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무슨 소식입니까?"
"서장님,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
그 아주머니가 다음 날 또 왔습니다.
"아주머니, 왜 오셨습니까?"
"귀한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어제 전했잖아요?"
"서장님이 교회에 오실 때까지 제가 올 것입니다."
"알았으니 돌아가세요."
다음 날 또 왔습니다. 시장이나 길에 거적을 깔아 놓고 옷을 파는 부인인데, 얼마나 배짱이 좋은지, 경찰서에 들어와서는 서장을 만나러 왔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부인이 서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보통 경찰들이 서장을 상대하는 부인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서장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장님…."
"아니,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또 온 거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한 번만 더 오면 그냥 두지 않을 거요. 당장 나가시오."
그리고 쫓아내었는데 또 왔습니다. 화가 난 서장이 화분을 가지고 와서는 그 부인에게 던지려다가 부인 바로 앞에 탁 던지며 말했습니다.
"다시 오면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고 말 거야."
그런데 그 부인이 또 왔습니다. 너무 너무 화가 난 서장이 일본 칼을 쫙 뽑아들었습니다.
"한 번만 더 오면 정말 죽여!"
다음 날 부인이 또 왔습니다. 서장은 너무 화가 났지만 그 부인을 죽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서장님이 지금 몰라서 그래요. 예수님을 몰라서 그래요. 예수님을 알면 제게 감사하게 될 거예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해요."
"알았으니 돌아가시오. 돌아가시오."
그런데 그날 밤에 그분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를 줄이겠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잠을 자기 못하다가 교회에 가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 정말 귀한 예수님께서 계시구나.'
그분이 경찰서장 자리를 그만두고 신학교 가서 공부하여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가 어떻게 경찰서장을 전도하겠습니까? 성령님께서 전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전도는 아주 쉬운 것이다. 아주 단순한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할 만한 주변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교회로 인도만 하면 됩니다.
왜입니까? 교회에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뉴저지의 듀르 대학에 필리핀의 한 학생이 유학을 와서 기숙사에 짐을 풀었습니다. 다음 날이 주일이었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한 중년 신사가 우산 두 개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학생, 나는 이 대학의 ○○○ 교수요. 이 마을에 훌륭한 교회가 있는데 나랑 같이 가 보지 않겠소? 나랑 같이 교회에 갑시다."하며 우산을 내밀었습니다.
그 대학에 처음 입학했는데, 그 대학의 교수가 교회에 같이 가자며 우산까지 내미니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교회가 무언지 모르지만, "예, 교수님. 오늘은 가 보겠습니다."하고 우산을 받아들고 교회로 따라갔습니다. 하루만 가보려고 했는데 교회에 가니 왠지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그래서 4년 동안 교회에 나갔습니다. 결국 은혜를 받고 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진로를 바꾸어 3년 동안 다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목회자가 되어서 필리핀으로 돌아가 큰 역사를 일으키고 얼마 전에는 필리핀 전국 교회 대표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취임식을 할 때 설교 주제가 '우산 두 개'였습니다. 자기 학교 교수가 우산 두 개를 갖고 와서 하나를 내밀 때, 그때 그의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교수님은 십자가를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교회로 인도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친구, 여러분의 이웃을 한 번만 데리고 나와도 구원받을 자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꼭 입으로 전도해서가 아니라 내 얼굴도 전도지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 얼굴을 볼 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기쁠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항상 기쁠까?'하게 되어도 전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네덜란드의 한 마을에 얼굴이 아주 험상궂은 노인이 있었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그 노인을 싫어하고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한 소녀만은 얼굴이 흉한 그 노인을 늘 웃음으로 대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하고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 노인의 지병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노인은 4만 불(6억 원)의 재산을 자기에게 늘 미소를 보내어 준 그 소녀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웃으면 복도 오고 돈도 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웃으면 영혼도 달라붙게 됩니다. 여러분의 얼굴이 저녁을 굶은 시어머니처럼 샐쭉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도 도망을 가게 됩니다.
여러분 얼굴이 전도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격도 전도지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드리기가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매일 이런 일기를 씁니다.
'하나님, 제가 강단에서 하는 설교도 설교가 되게 하시고, 제 생활도 설교가 되게 하시고, 제 인격도 설교가 되게 해 주세요.'
그래도 늘 부족해서 회개할 것뿐입니다만, 우리의 모든 것이 복음 전도가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의 한 학생이 서울의 좋은 대학을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어서 아주 기쁩니다. 학생이 공부할 때도 '내가 우리 학교에서 일등을 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전도를 해도 더 많은 친구들이 믿겠지.'하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공부하면 성령님께서 공부도 도와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회사의 부장이든 이사든 사장이든 그 누구든 간에 '내가 성공하고 귀하게 되면, 나로 인해 복음이 더 많이 증거될 수 있겠지. 내가 록펠러처럼, 요셉처럼 성공하면 나 때문에 더 많은 영혼이 예수님을 믿겠지.'하는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도와 주실 것입니다. 병원의 의사들도 '내 병원이 잘 되면 직원들에게도 환자들에게도 복음을 더 잘 전할 수 있겠지.'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면 성령님께서 도와 주실 것입니다. !
카터 대통령은 목사님이 아니지만, 수십 명의 목사님보다 더 큰 전도를 했습니다. 부시 대통령도 목사님이 아니지만, 미국 전체를 교회 분위기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고, 기도하고 회의하고, 테러로 부수어져도 울며 기도하니 국민들도 기도하게 되고 교회가 부흥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마다 성경이 동날 정도라고 합니다. 이번에 미국 시민들의 여론을 조사한 결과 미국 시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부시 대통령이었답니다.
부시 대통령은 목사가 아니지만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김영삼 대통령께서도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장로니 전도를 해야 되는데, 제가 예수에 대한 말을 하면 다른 종교인들의 반발이 하도 심하고 항의가 많아서 우리 나라에서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공산권 나라에 갈 때는 큰 가방에 성경을 가득 넣어 가지고 갑니다…."
대통령의 가방은 조사를 하지 않고, 또 성경을 나누어 주어도 국빈으로 온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누어 주면 막지를 못하니 김영삼 대통령께서 해외에 나가실 때마다 성경을 한 가방 가지고 가서 나누어 주셨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서울의 한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 그 교회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참 감사한 일입니다."
"뭐가 감사합니까?"
그 목사님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그 교회에는 시골에서 오신 분들이 많답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시골에 가서 장례식을 할 때가 많은데, 여러 번 어려움을 당했답니다. 그 마을의 어른들이 나와서 "우리 마을에서는 교회식으로 장례식을 할 수 없어!"하며 장례식을 막는 바람에 어려움을 당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답니다. 그런데 김영삼 장로님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분위기가 싹 바뀌어 있더랍니다. 전에 어려움을 당했던 마을 중의 한 마을을 다시 가게 되어서 전처럼 또 어려움을 당하면 어떻게 할까 걱정하며 갔는데, 마을 어른들이 마중을 나와 있더랍니다.
"아이고, 목사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네들, 이번에도 교회식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야지요. 나라님이 장로님인데 교회식으로 해야지요."
우리 시에도 시민의 날 행사에 우상 종교의 행사는 있었지만 기독교의 행사는 끼어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대통령이 되니 그 해 시민의 날 행사 순서에 기독교 행사가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큰 회사의 사장이 되고, 군대의 사령관이 되고, 큰 병원의 원장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국회의장이 되면 전도를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복음 전도이면 성령님께서 도와 주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운동할 때 '예수'라는 글이 쓰여 있는 모자를 씁니다. 때로는 다른 모자를 쓰기도 하지만, 시간이 있으면 꼭 그 모자를 챙깁니다. 모자에 '예수'가 붙어 있으니 '예수님처럼 운동해야 할 텐데…'하는 부담은 있습니다. 또 운동이 잘 안 될 때는 예수님께서 "야, 내가 그렇게 못하겠니?"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움직이면서도 예수님을 알리고 싶어서 그 모자를 쓰는 것입니다.
박세리 선수는 삼성 마크를 달고 다닙니다. 그러니 박세리 선수가 승리하면 삼성이 막 올라갑니다. 삼성 물건이 막 팔립니다. 박세리 선수가 삼성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박 선수가 챔피언이 되면 자기도 상을 받지만, 삼성의 물건도 잘 팔리고 삼성도 올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고 성령의 표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각 분야에서 잘 되면 교회가 높아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빛나게 됩니다. 복음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잘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 교회의 영광을 위하여 각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왜 잘 되게 하셨는가를 알고, 우리 주님께 이익이 많이 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에 미스 아메리카 선발 대회 때, 밴 다이크라는 미녀가 아메리카 최고 미인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여왕의 관을 받으러 나오는 그 예쁜 아가씨가 손에 성경을 들고 나왔습니다. 사회자가 당황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까지 여러 미인을 만났지만, 성경을 장식용으로 활용하는 미인은 처음 봅니다."
그때 미스 아메리카인 밴 다이크 양이 말했습니다.
"저는 성경을 장식용으로 갖고 온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갖고 나왔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미스 아메리카가 되었어도 올라와서 상만 받고 내려가면 하나님께 득이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을 갖고 올라왔다가 내려가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아, 미국의 최고 미인이 예수의 아가씨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그가 성경을 갖고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7절, 8절 말씀하십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금년 한 해를 주의 것으로서 복음을 위해 열심히 살면, 성령님께서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도와주셔서 큰 진보가 있는 한 해가 될 줄 믿습니다.
전도의 능력
고전 2:1-5 / 이규왕목사
사람은 누구나 실수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인정하기 보다는 변명을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 좋은 예가 남이 아닌 부부 사이에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보다는 억지를 쓰면서 정당화 하거나 합리화 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히려 관계가 더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라면 하물며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 살아온 죄를 마음으로 깨닫고 입으로 시인하고 눈물을 쏟으며 회개하고 조상 대대로 아니면 평생 믿어오던 종교를 포기하고 새로운 종교로 바꾼다고 하는 일이 인간의 말이나 힘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 변화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적선종교를 믿어온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선하게 살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과 다시 사신 부활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자가 되었다면 과연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변화시키는데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렵다면 과연 무엇으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답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1. 사도 바울의 변화
오늘 성경 말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과거에 어느 누구보다 유대교를 철저하게 신봉했던 골수분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기독교로 개종할 가능성은 추호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기독교인들을 소탕하기 위해 가는 길목에 부활하신 몸으로 밝은 빛 가운데서 나타나셔서 친히 이름을 부르시면서 자기를 비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후일에 사도 바울은 과거 자기와 같이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종종 그 같은 체험을 자주 간증한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행 22: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갈 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세상에 이미 예수님을 잘 믿는 제자들도 많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자기와 같이 반기독교적인 핍박 자를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삼으시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은혜를 체험한 바울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선을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의사는 환자에게 필요한 것처럼, 구세주는 선을 행할 능력이 없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 죄인들에게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까닭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까닭도, 의인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 9: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비로소 바울은 비로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조상 대대로 섬기던 종교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을 하게 되어지는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평생 신조로 삼고 살아왔던 가치관과 종교와 습관들을 헌신짝처럼 미련 없이 모두 다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연 그러한 깨달음과, 뉘우치는 마음과, 새롭게 살겠다는 결단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원동력이 인간의 힘이나 말재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을 많은 선교 사역을 통해서 더욱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이요, 율법학자요, 철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행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그 같은 배경을 가진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매우 조리가 있었고 설득력이 그의 말을 듣던 헬라 철학자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행 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여기서 ‘쟁론할 새’ 라는 말은 깊이 생각하다, 의논하다, 싸우다 는 뜻을 가진 미완료 동사입니다. 이는 지혜자로 자처하는 헬라 철학자들과 말에 있어서 뒤지지 않는 맞수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후일에 바리새인들이 그를 죽이려고 말 잘하기로 소문난 변호사 더둘로를 통해서 대제사장에게 고소하였으나, 바울의 변론을 당해내지 못하여 바울을 풀어줄 정도의 실력자였습니다.
(행 24:23)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2. 고린도에서의 전도
바울은 아덴의 철학자들에게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도하였으나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받아드리는 대신에 무시하여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 와같이 자신들의 지혜만을 앞세우고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는 아덴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변호하는 방법으로 논리적인 전도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행17:24-25)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에서 복음 전도의 성과는 다른 곳에 비해 미미하였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마치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과 철학을 혼합한 말과 지혜로 아덴 사람들에게 전도한 것을 실패로 판단 할 정도였습니다.
(행17: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아덴을 떠난 바울이 우상과 무신론 철학과 죄악이 가득한 고린도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도하려고 할 때 에 평소 바울답지 않은 연약한 면을 오늘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고전 2: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여기서 ‘약하고’라는 말은 아무 무력하고 힘이 없는 상태로 소심하고 마음이 약해진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또 ‘두려워하고’라는 말은 공포심과 놀람으로 경악할 정도의 심정을 뜻이고 ‘심히 떨었노라’라는 말은 두려움으로 인해 전율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며 바울은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하였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도한 방법은 아덴에서 와는 사뭇 달랐음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1) 말과 지혜로 아니하고
(고전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여기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는 말은 아덴에서처럼 헬라 철학자들이 좋아하는 철학적인 깊이가 있고, 화려한 문학적인 수식어를 동원하여 듣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전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오늘의 설교자들도 바울과 같은 시험을 당하기가 쉽습니다. 좀 더 자신을 실력 있는 사람으로 내 비취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실력 있는 사람을 알리고 싶어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설교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것이 복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과일을 달리게 하는 가지와 과일을 잘 익게 만드는 나뭇잎 새에 불과한 것입니다.
2) 오직 십자가만 전하기로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는 세상에 세 가지 종류의 전도자와 설교자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의 설교로 십자가가 빠진 보편적인 설교로 흔히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 주제입니다.
두 번째는 아덴에서 바울처럼 십자가와 더불어 철학적인 논리를 통해서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의 회복을 논하는 혼합적인 설교입니다. 지성인들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전도 방법처럼 생각됩니다.
세 번째는 오로지 십자가 복음만을 증거 하는 전통적인 설교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너무나 재미가 없는 전도 방법이기 때문에 일단 사람들로부터 식상해 하고 외면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를 갖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신조는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천하에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신 분은 오직 예수님이 뿐입니다. 그러므로 천하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름이나 종교나 철학이 없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뿐 이라는 것입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2) 인간의 생각으로는 복음이 너무나 단순하기 때문에 세상에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우습게 생각되기 때문에 비웃고 조롱하고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음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가는 곳마다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그 비결은 바울의 말재주가 아니라 배후의 성령의 역사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고전 2: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3. 이 시대의 전도자와 성령
세상이 갈수록 인간의 심성이 바위처럼 무감각하게 굳어져가고 있는 세상에서 무엇으로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과연 무엇으로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것이 교육의 힘이거나 인간의 말재주로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지혜 자들이 볼 때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과연 사람에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의문 사항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바울이 지혜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어리석게 생각하는 십자가의 도를 전파할 때마다 일어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게 되면 지난 날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왜 똑같은 복음인데 누구에게는 그런 역사가 나타나고 누구에게는 그런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에서는 아덴에서와 달리 설교를 하거나 전도를 할 때에 사람의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만을 사모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자나 설교자가 복음을 전할 때에 그것을 사람들이 듣는 다고 다 이해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배후에서 성령께서 사람들의 지혜와 감정과 의지를 변화시키실 때 깨달음과 감동과 변화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교회가 바로 데살로니가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들의 강력한 핍박으로 삼주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바울이 떠난 후 데살로니가 교회는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력하신 역사로 인해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 전국으로 그 소문이 퍼지고 여러 교회에 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이 전도자나 설교자로부터 복음을 들을 때 육신의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열어 듣게 하시고 깨우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이 시대에도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전도자와 말씀을 듣는 회중이 모두 성령의 역사를 사모해야만 합니다.
1) 전도자의 자세
그것은 전하는 자가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증명할 때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여야 합니다.
2) 회중의 자세
그것만이 아닙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헬라의 지혜 자들처럼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복음 전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하나님께서 친히 전하여 주시는 말씀으로 겸손한 자세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와 같은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살전 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 이유는 복음은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의 약함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보여 주신 분이 나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함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강퍅하여져서 복음을 듣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하나님의 깊으신 것을 다 아시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복음을 각 사람에 맞도록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이끄시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을 능히 믿게 하실 수 있습니다.
(고전 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어떻게 하면 그와 같은 사람들이 복음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이 바로 사도 바울이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믿고, 믿지 않는 것은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고전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귀로 들려지는 소리로는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삼년이나 가르치시고 난 후에 세상 땅 끝으로 보내시기에 앞서 먼저 성령을 받으라고 명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며, 오순절 마가에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신 것은 제자들이 복음을 땅끝까지 능히 증거 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꽃피우셨지만 누군가 꿀벌처럼 사람들에게 전하여 주어야 사람들이 듣고 믿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말재주가 없고 이 시대 사람들이 강퍅할지라도 우리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복음을 증명할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말과 지혜로 안됩니다
고전 2:1-5 / 조상호목사
한국에서 활동하는 신동엽이라는 개그맨을 아시죠? 그가 처음 개그맨에 데뷔할 때, 유명한 말을 하나 히트시켰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안녕하시렵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는 어느 누구를 만나도 “안녕하시렵니까?”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안녕하십니까?”라든지, “안녕하세요.”라든지, 아니면 “그 동안 안녕하셨어요.“라는 말은 얼른 이해가 되지만, “안녕하시렵니까?”라는 말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신동엽이라는 개그맨은 “안녕하시렵니까?”라는 인사를 시도 때도 없이 계속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도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그 말에는 핵심이 들어있지 않고 횡설수설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이 유행어와 연기로 말미암아 많은 인기를 얻었고, 그가 개그맨으로써 이름을 알릴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정해 보겠습니다. 만약 그가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되어 데스크에 앉아 채널 ONE의 6시 뉴스 시그널이 떨어질 때마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시렵니까?”라고 인사를 하고, 말도 안 되는 말을 계속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방송국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또 가정해서 그가 만약 목사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교회에서도 당장 쫓겨났을 것입니다. 좀 더 심하면 그는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그 개그맨과 같지는 않다 할지라도, 명확한 주제도 없이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서 들어도 상대방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이 무엇인지 찾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주제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짧지만 핵심을 분명히 잘 전달하는 사람이 말 잘 잘하는 사람입니다.
핵심을 잘 잡아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핵심을 잘 잡아야 합니다. 핵심을 잘 잡는 사람이 공부를 잘 하는 학생입니다. 모 대학 사학과 홈페이지에 세계문화유적에 대한 레포트를 쓸 때의 유의사항 3가지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와 두 번째 유의사항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유의사항: 1) 세계문화유산에 한정해 생각할 것. 2) 핵심을 놓치지 말라. 무조건 길게 쓴다고 좋은 게 아니다. 이는 모른다는 것을 감추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핵심을 빠뜨린 채 길게 쓴 경우는 감점 요소가 됨.” 여러분, 공부 못하는 학생은 Assignment나 Essay를 쓸 때,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선생님이 원하는 핵심은 빠트린 채 페이지 수만 많습니다. 그러나 공부 잘 하는 학생은 페이지 수는 많지 않지만 선생님이 원하는 핵심을 정확하게 적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오랫동안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응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를 하지 않고 횡설수설, 중언부언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됩니다. 침을 튀겨가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도 전도의 열매가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복음을 전했음에도 전도의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많은 말을 했지만 복음의 핵심이 빠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핵심이 빠져 버리면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위대한 사도인 바울의 삶을 보면, 그도 한때 그러한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이후에 등장한 어떤 사람들보다 가장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사도였지만, 그가 2차 선교여행 중,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는 복음의 핵심을 놓치는 실수를 했습니다. 아덴은 오늘날 그리스의 아테네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아덴은 헬라의 수도로서, 정치, 종교, 문화의 중심이요, 지혜의 본고장으로써 철학의 눈이라 불리우던 곳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에피큐르스, 제너의 활동무대로 그 당시 세계지성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1절에서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아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든 시간과 정열을 새로운 철학과 사상을 연구하는데 집중했습니다. 거기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간 것입니다. 그가 처음 아덴에 들어갈 때 이러한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나도 과거 한 때 위대한 스승이신 가말리엘 선생님 밑에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다. 아덴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한 번 보자. 학문으로 비교한다면 나도 꿀릴게 없지” 물론 이 말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사도행전 17장 16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추측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행17:16~18상) 사도 바울은 아덴에 있는 사람들이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자신이 과거에 배운 학문과 지식을 동원해서 아덴에 있는 사람들과 토론을 한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토론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17장 18절 하반절을 보면 “혹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 이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은 학문적인 토론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도 전했습니다. 그러나 아덴에서의 바울의 복음증거 스타일은 매우 논리적이고 학문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 32절 이하를 보면 바울의 설교를 들은 대부분의 아덴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그들은 오히려 바울을 비웃고 조롱까지 했습니다.
제가 한국대학생선교회(CCC)라는 단체에서 활동할 때, 1981년 여름에 거지순례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원래 충청북도 옥천이라는 곳에서 4박5일(?) 동안 수련회를 통해 훈련을 받은 후,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20여 명씩 팀을 짜서 7박8일 동안 전도하며 목적지인 OO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엽서를 구입한다든지, 본부와의 연락을 위해 팀장만 소액의 돈을 소지했을 뿐, 나머지 전도팀원들은 10원 한 장 가지지 못한 채 전도를 했습니다. 낮에는 시골동네에 들어가서 사영리라는 소책자를 들고 전도를 하다가 방문한 집이나 만나는 사람들이 밥이나 국수를 삶아주면 그 음식들을 먹고, 아무 것도 주지 않으면 굶었습니다. 저녁에는 시골에 있는 교회나 마을회관에 모여 낮에 있었던 전도 결과를 이야기하며 기도회를 가진 후, 그 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목적지를 향하여 걸어서, 혹은 지나가는 트럭, 등을 세워 히치 하이킹하듯이 그렇게 하루하루 정해진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을 하며 전도를 했습니다. 저는 처음 5일 동안 11명을 만났는데, 놀랍게도 만난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저녁에 모여 낮에 있었던 전도 결과를 이야기 할 때보면, 대부분의 팀원들은 자신들이 만난 사람들을 영접하게 한 비율이 50% 정도이고, 높아야 6~70% 정도인데, 저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100% 영접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6일째부터 문제에 빠졌습니다. 12번째 만나는 사람부터는 아무리 해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영리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 후, 제가 예수님을 영접시키려고 “저의 영접기도를 따라서 하시겠습니까?”라고 권유하면, 바쁘다고 도망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또 제가 “저는 OO 대학의 OOO입니다.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라고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예수쟁이구만. 요즘 대학생들이 그렇게 할 일이 없남? 부모네 들이 뼈 빠지게 벌어다 준 등록금 가지고 공부하는 놈들이 지금 뭐하는 짓이야”라고 소리치며 더 이상을 말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 동네는 대대로 부처님 믿는 동네인데, 어디에 들어와서 예수 전하는 거야.”라고 하며 핍박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제가 만난 사람 중 단 한 사람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팀원들은 처음과 달리(저녁에 모여 Sharing 할 때 들어보면), 만나는 사람들마다 영접시켰다고 하는데, 거꾸로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한 사람도 영접시키지 못한 채 실패를 거듭하게 되어, 저녁 미팅에서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7일째 저녁 기도회 때, 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11명을 영접시킬 때까지는 겸손하게 성령님만을 의지했는데 12명부터는 교만하게 내 힘을 앞세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전에는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했는데, 12명부터는 복음보다는 제 생각과 제가 아는 지식을 더 많이 강조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 제가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아덴에서의 사도 바울은 24년 전 저와 같은 실수를 하였습니다. 결국 아덴에서 그는 복음증거에 실패했습니다. 날마다 만나는 사람과 변론하며 전한 복음이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조롱을 당했습니다. 아덴에서 실패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아덴에서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 그리고 4절과 5절을 보면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아덴에서의 바울과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5절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은 날마다 철학자들과 변론하며 토론하던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변론하며 토론하는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물론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모든 상황이 평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6절 상반절에서 “저희가 대적하여 훼방하거늘” 이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고린도에 있는 유대인들의 방해와 핍박이 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굴하지 않고 그곳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사도행전 18장 8절에 보면,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성공적인 복음 증거를 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실패가 오히려 유익
아덴에서의 실패가 바울에게 오히려 유익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실패가 오히려 우리를 더욱 복된 길로 이끄는 줄로 믿습니다. 이처럼 실패는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고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때가 있습니다.
1916년 덴마크에서 어떤 사람이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잘 되던 목공소가 경제대공항으로 큰 타격을 받자, 장난감을 만드는 공장으로 업종을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 공장마저 불에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연속적인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일어섰습니다. 나무토막 대신 플라스틱을 사용하여 장난감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계적인 브랜드로써, 수많은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레고>라는 장난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우상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실패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여 재수를 한 번만 해도 재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실패를 통한 유익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실패를 통해 우리의 거친 성품이 다듬어지고,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아덴에서의 실패를 통해 사람의 학문이나 언변으로서는 영혼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모든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경험했습니다.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체험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년 6개월 동안의 고린도 사역을 마무리하고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그 후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에서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 아덴과 고린도에 방문하여 복음을 증거했던 경험을 생각하며 오늘 본문 1절부터 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전에 고린도에서 복음을 증거 할 때, 유창한 말과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도선교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은 윌리엄 케리에 대해서 들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는 영국에서 편안하게 목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떠나 인도에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도에 도착한지 얼마 있지 않아 5살짜리 아들이 죽고, 아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아내가 정신병에 걸려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등, 여러 가지 시련이 있었습니다. 또한 7년 동안 단 한 사람도 주님 앞으로 인도하지 못할 만큼 사역에 열매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집에서는 날마다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사실 인도는 언어가 하나가 아니라 부족마다, 지역마다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성경번역 사역은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성경을 번역하여 그의 말년에는 44개 언어와 방언으로 성경을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도의 12개 지역에 선교회 지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미안마(버마)에 이어 아시아 선교의 문을 활짝 연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케리의 생애를 연구하는 사람들마다, ’어떻게 그가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는가?’ 놀랍니다. 그는 말년에 열병의 후유증으로 더 이상 걷지 못하고, 휠체어를 타야만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동료 선교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그들에게 유명한 고백을 남겼습니다. “여보게들, 나의 잔은 가득 차다 못해 넘치고 있다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네.” 그는 그의 인생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선교사가, 윌리엄 케리가 남긴 놀라운 업적을 들며 ‘선교사님, 정말 수고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라고 계속해서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이 칭찬을 듣고 있던 케리는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 대해서,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제가 죽거든 저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저를 구원하신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만 남겨 주십시요. 제가 죽거든 저에 대한 말은 그만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시지 바랍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잠을 자듯, 평안하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숨을 거둔 그의 한손에는, 그가 친히 번역한 벵갈어 신약성경이 들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죽거든 저에 대한 말은 그만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주시지 바랍니다.’라고 고백한 윌리엄 케리의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학벌이나 이름이나 업적이 아닌, 구세주이신,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기를 소원합니다. 아덴에서의 실패를 경험한 이후,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태도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혜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만이 증거디기를 원햇습니다. 바울이 변한 것은 이 뿐만 아닙니다. 3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그가 아덴에서의 실패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의기소침했을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매우 지쳐버렸습니다. 그 이후 고린도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가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4절과 5절을 보겠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다만 성령의 능력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지혜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힘썼습니다.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능력만을 의지했습니다. 그 결과 복음증거의 현장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며 구원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로 하여금 위대한 복음 증거자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스펄전 목사님이 초창기 사역을 시작했을 때의 그의 설교는 자신이 생각해도 세련되지 못했습니다. 설교 도중 말을 더듬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도 모른 사이에 허둥대는 바람에, 완전히 죽을 쑤는 설교를 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설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설교를 마칠 때마다 ‘자신이 설교를 못한다.’는 심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하루는 너무도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께 기도를 한 후, 마음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 내내 기도했습니다. 1주일 동안 끊임없이 설교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1주일이 지난 후 설교를 했는데, 예배가 끝나자마자 성도들이 그에게 몰려와 그의 설교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흐뭇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날 밤만큼은 어린아이처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 가운데 의문이 들었습니다. ‘두 설교의 결과는 과연 무엇이었는가?’ 사실 그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세련되지 못한 지난 주의 설교를 통해서 41명의 회심자를 낸 반면, 많은 사람들이 칭찬한 이번 주의 설교를 통해서는 단 한 형제의 영혼도 구원 못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러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 형편없었던 설교는 들어 쓰셨으나 그 훌륭한 설교는 버리셨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저도 종종 경험하는 일이지만, 똑같은 설교라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설교하는 것과 인간의 지식과 열심만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성령님께서 기름 부으신 설교는 듣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며,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설교는 아무리 설교가 잘 만들어졌다 할지라도, 은혜가 없고 듣는 사람에게 괴로움만 주게 됩니다.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를 할 때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듣는 사람이 콧방귀도 꾸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설프게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면 사름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나중에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없이는 결코 한 영혼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결코 마귀의 세력에 사로잡힌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가 한꺼번에 수천 명을 변화시켰던 설교의 핵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2장 36절부터 39절을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 되자 그들은 가슴을 치며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성령의 능력으로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 줄 믿습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면 아무리 딱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에서 지난 7년 동안 중고등부에서 <시와 찬양의 밤>을 통해, 청년선교회에서 <새벽이슬의 소리>를 통해, 그리고 전 교회적으로 <홈컴밍데이>를 통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7년 동안 성령께서 역사하셨을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준비한 행사에 참석하였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았을 때에는 엄청난 비용을 들인 행사임에도 전도의 열매가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복음의 능력은 전도자의 웅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웅변에 있다면 전도는 사람이 믿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전도자의 학식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전도는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 입안의 침샘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혀가 다 닳아 없어져 버릴 때까지 증거한다 할지라도,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은 말 가지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전도는 말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과 역사를 사모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우리교회 창립12주년을 맞이하여 계획하고 <홈컴밍데이>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중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저는 내일 새벽부터 여러분들이 기도하며 적어낸 태신자 작정카드를 들고 거기에 올라와 있는 태신자들을 품고 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훈련, 샘지기모임, 사역훈련, 샘모임, 등의 모든 모임 시간마다 더불어 함께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크게 역사하셔서 태신자들의 마음이 감동되어 <홈컴밍데이>에 참석하고, 첨석한 영혼들이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내 힘과 내 지식과 내 언변으로는 할 수 없지만 성령님의 능력이 임하면 이러한 귀한 일들이 가능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번 <홈컴밍데이>를 통해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살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 분도 이 일에 구경꾼이나 방관자가 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창립12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창립12주년 기념주일이 그저 우리가 먹고 마시며 즐기는 자리가 아닌,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 구원의 축제가 되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성경본문|
고전02장 01절 ~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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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제|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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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조상호목사
>비 고|
>첨부파일|
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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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있던 '광수생각'이라는 만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석‘이라는 청년이 편의점에 취직했습니다. 드디어 영석이가 첫 출근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첫 출근한 영석이에게 주인이 말합니다. “자네가 오늘 할 일은 매장 안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야!” 그때 영석이가 말합니다. “예? 저보고 청소를 하라구요? 저는 대학출신인데요?” 그때 주인이 잠깐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래? 미안, 내가 그걸 깜박했군! 빗자루를 이리 주게. 내가 비질하는 법을 가르쳐 줄테니.“ 영석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광수는 이렇게 만화를 그린 후 다음과 같은 해설을 달았습니다. <대학에도 식당이 있지만 대학이 밥 먹여 주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이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만화는 지식은 갈수록 쌓이는데, 생활은 따르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대해 꼬집은 내용입니다. 사실 사람은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배운 만큼 생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렵게 취득한 지식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변화는 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최고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동안 살면서 얻은 경험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며 그 경험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동안 자기가 습득한 지식과 차이가 나면 아무리 설득을 해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경험의 우상화> 혹은, <지식의 우상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경고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렘9:23) 우리는 이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와 용기와 부함을 자랑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의 경험과 지식을 최고로 여기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아덴 사람들입니다. 아덴은 작년에 올림픽을 치렀던 지금의 그리스의 아테네입니다. 옛날부터 아덴은 철학과 문학과 정치와 종교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덴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제논, 아리스토 텔레스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이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각종 우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아덴에는 크고 작은 우상이 많을 때는 무려 3만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도 아덴 사람들은 매우 철학적이었는데, 그곳에는 대표적인 두 학파가 있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이 두 학파가 아덴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전도여행 중에 이곳 아덴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아덴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로부터 18절에서 “바울이 아덴에서 저희를 기다리다가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저자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은 이 두 부류의 철학자들과 더불어 아덴의 거리에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물론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18절 하반절에서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전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전도할 때와 달리, 아덴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는 아덴 사람들이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과 날마다 회당과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을 하고,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사람들과 심한 논쟁을 벌이곤 했습니다.
아덴에서 실패한 사도 바울
그런데 바울은 아덴에서 복음의 결실을 크게 거두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아덴 사람들 가운데 복음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도행전 17장 32절부터 34절까지를 읽겠습니다. “저희가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혹은 기롱도 하고 혹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이에 바울이 저희 가운데서 떠나매 몇 사람이 그를 친하여 믿으니 그 중 아레오바고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사도 바울의 아덴에서의 전도는 그다지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철학적으로 전하니까 사람들이 별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관원인 디오누시오와 다마라고 하는 한 여자와 또 다른 몇 사람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뿐, 아덴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울을 비웃으며 조롱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의 사역에 실패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를 경험한 바울이 얼마나 실망이 되겠습니까?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목숨 걸고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결실을 거두지 못했을 때, 그 마음에 얼마나 낙심이 되겠습니까? 저는 과거 평신도 때나 부교역자로 사역할 때 사도행전 18장 1절의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라는 말씀을 읽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으니 사도 바울은 아덴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로 가겠지‘라고 단순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덴에서 실패한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을 하고 설교 사역을 하다보니 바울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 목회자에게 가장 실망이 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목회자가 언제 실망하는 줄 아십니까? 돈이 없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가 아닙니다. 건강에 적신호가 와서 몸이 아플 때가 아닙니다. 뒤에서 수군거리고 욕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아닙니다. 다른 사역자들은 모르겠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실망이 될 때는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입니다. 분명히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이 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을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능력 있는 말씀을 오랫동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을 때, 실망이 됩니다. 오랫동안 말씀으로 훈련받았음에도 여전히 믿음이 성장하지 않고 성숙하지 않을 때, 실망이 됩니다. 또 예배를 마치고 ’오늘 설교 죽쒔다’는 느낌이 들 때, 스스로 실망이 됩니다. 그 때에는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아마 아덴에서 전도에 실패한 바울도 이러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비통하고 참담한 마음을 가지고 아덴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실패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덴에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았습니다. 그는 실패를 딛고 일어섰습니다.
1940년대 초,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라는 청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했습니다. 그는 내려오는 길에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나의 장비도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1953년 5월29일, 그는 네팔출신 셀파와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처음 시도에서 실패한 엔드먼드 힐러리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여 결국에는 세계 최고봉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더 많습니다. 여러분, 실패하셨습니까? 사업에, 직장생활에 실패하셨습니까? 학업에, 인간관계에 실패하셨습니까? 말씀대로 살려고 했지만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지난 한 주 동안 믿음생활에 실패하셨습니까?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실패는 오히려 성공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도 아덴에서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덴에서의 실패를 거울로 삼았습니다. 고린도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 이하를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행18:1,4~5) 우리는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바울의 사역 스타일이 달라진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절의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는 구절로부터 사도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는 철학자들과 함께 토론을 했었지만, 고린도에 와서는 논쟁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아덴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논쟁을 했었지만, 고린도에 와서는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성공한 사도 바울
그 결과 많은 전도의 열매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7절 이하를 보면 고린도에서의 사도 바울의 사역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이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 일년 육개월을 유하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행18:7~8, 11)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쳤는데, 많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라는 사람과 온 가족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목격한 바울은 훗날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분명하게 밝힌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날마다 토론하던 아덴에서와 달리, 고린도에서는 말과 지혜로운 것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하고, 오직 십자가만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곳에 영혼이 구원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사람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을지 몰라도 십자가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지만, 복음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3년 11월 4일 81세의 나이에 성철 스님이라는 분이 불교에서 말하는 입적, 세상적으로 말하면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결혼을 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처자를 버리고 출가하여 스님이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만나지를 않았습니다. 기거하는 곳에 철조망을 쳐놓고 10년 동안 아무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16년 동안 솔잎 가루와 쌀가루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8년 동안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잠을 자는 ‘장좌불와’를 수행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렸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 분은 수십 년 동안 수행을 하고 도를 닦았어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수십 년 동안의 고행이 죄인을 의인되게 하지 못합니다. 그 분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말한 것처럼, 아무리 고행을 해도 죄인은 죄인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많이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하얀 사람이나 검은 사람이나 노란 사람이나, 빈부귀천, 남여노소, 피부색깔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에는 인간의 내면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고, 삶을 바꾸고, 운명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의 입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라졌다면, 우리의 입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다시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있다면 다시금 복음의 능력을 신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벤트도 좋고, 프로그램도 좋고, 세미나도 좋고, 회의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십자가의 복음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복음
십자가의 복음이야말로 우리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것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우리는 연합됩니다. 그러나 비본질적인 것에 우리가 관심을 갖고 그것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면, 우리는 약해지고 문제에 빠지고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큰 문제 때문에 교회에서 갈등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주 시시한 문제가지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 교회는 예배 후 국에다 밥 말아먹을 먹을 것인가, 커피에다 비스켓을 먹을 것인가를 가지고 언쟁을 하다가 둘로 쪼개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밥이면 어떻고 커피면 어떻습니까? 교회당 카펫트 색깔이 빨강색이면 어떻고 갈색이면 어떻습니까? 창문에 커튼을 하면 어떻고 블라인드를 하면 어떻습니까? 그러한 것들은 신앙생활의 핵심도 아니고, 교회의 핵심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핵심입니다. 우리는 항상 핵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복음입니다. 우리 교회의 핵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핵심인 복음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이나 양보를 해서는 안 되지만, 핵심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교회 안에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회복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아이작 왓츠(Isaac Watts)는 난쟁이를 겨우 면할 정도인 150센티미터의 신장에 불과한 작은 키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눈까지 작았습니다. 그리고 환한 피부색깔을 띠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의 피부는 창백한 잿빛 색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벌레 같은 존재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살 찢기시고 피 흘려주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은혜와 그 사랑에 감격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나 십자가 대할 때에 그 일이 고마워, 내 얼굴 감히 못 들고 눈물 흘리도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바로 찬송가 141장에 올라와 있는 가사를 그가 쓴 것입니다. 저는 아이삭 와츠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이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설교의 황태자라는 별명이 붙은 스펄젼목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습니다. 어느 날 스펄젼목사님이 울고 있는 것을 목사님 사모님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 왜 울고 있어요?"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늘은 말이야, 내가 십자가를 생각해 봐도 감동이 없어. 그래서 내가 울어" 혹시 이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에 감동이 없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몸 찢기시고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없이 맹숭맹숭하게 앉아 있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타성에 젖고, 매너리즘에 빠져 십자가의 사랑을 찬양하면서도 그저 입술로만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시간 주님의 찢기신 몸을 드시면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마시면서 다시 한번 저와 여러분 안에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동이 회복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운명의 변화
고전 2:1-2, 갈 6:14 / 김명혁목사
오늘부터 주일 아침마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십자가를 싫어하고 십자가를 조소합니다. 십자가는 나의 실패와 죄를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난과 희생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이해하기 힘든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십자가를 싫어했습니다. "주여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것이 솔직한 베드로의 소원이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싫어했습니다.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인들도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십자가가 현대인의 체면을 손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나의 실패와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성경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에는 물론 중요하고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산상 설교와 같은 예수님의 고귀한 가르침도 있고, 고전 13장과 같은 고상한 사랑의 윤리도 있고, 아모스의 부르짖음 같은 철저한 사회정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은 엄격히 말해서 고귀한 가르침도 아니고, 사랑의 윤리도 아니고, 사회정의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가 무슨 일을 합니까?
첫째, 십자가는 나의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한편 강도는 십자가를 외면했기 때문에 영원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강도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를 붙들었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울의 운명도 십자가로 인해서 바뀌어졌습니다. 사울은 본래 십자가를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멸시하고 십자가를 반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십자가, 십자가" 하면서 설교할 때 그를 돌로 처 죽인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 무식한 놈들은 처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그들을 잡아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행8:1).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행22:4). 그러던 사울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4,5)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을 때 사울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십자가 사건으로 사울의 운명이 변화되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이 죽고 자기가 죽는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독일의 부유한 귀족의 집에서 태어난 진젤돌프 백작도 십자가 때문에 그의 운명이 바뀌어졌습니다. 그가 19살 청년이었을 때 백작으로서의 공직을 수행하기 위해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젤돌프 백작이 어느날 미술 전시회에 들러 미술품을 관람하던 중 그의 인생이 바뀌어지는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받고 있는 성화를 바라보다가 그만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미술품 전시관의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진젠돌프는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십자가 그림 앞에서 진젠돌프의 삶의 방향이 바뀌어졌습니다. 1719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백작의 삶에서 위대한 선교 지도자의 삶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인생의 운명과 가치를 바꾸어 놓는 천국의 열쇠가 되고 하늘의 문이 됩니다. 용서와 사랑의 마당이 되고 무대가 됩니다. 십자가를 얼마나 중요시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십자가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의의와 가치가 결정됩니다. 여러분들의 삶도 십자가 앞에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 앞에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높이 매 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여러분들의 운명이 변화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의 운명과 삶이 십자가 앞에서 변화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십자가는 나의 말과 설교를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자기에 대한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의 지식, 자기의 경험, 자기의 성공담, 자기의 군대 생활, 자기의 가정생활, 자기의 학문, 자기의 여행담 등등 자기에 대한 말을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나의 말과 나의 설교의 내용을 바꾸어 놓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경험한 이후부터 설교할 때 많이 배운 지식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말, 유창한 웅변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적이나 체험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만을 핵심적으로 말하고 설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었습니다. 고전 2:1-2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1:22-23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 바울이 소아시아 안디옥에 가서 설교한 첫 설교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었습니다.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저를 살리신지라"(행 13:29-30). 유럽의 데살로니가에 가서 설교한 첫 설교의 핵심도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행 17:2-3). 사도 바울의 대표적인 저술인 로마서와 고린도서의 중심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을 설교했고 십자가만을 전파했고 십자가에 대해서만 글을 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식하다는 비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같은 비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십자가만을 말하고 십자가만을 전파했습니다. 십자가가 여러분의 말을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십자가가 여러분들의 설교의 내용을 바꾸어 놓기를 바랍니다. 오직 내 입술이 십자가를 말하고 내 영혼이 십자가를 노래하고 내 몸이 십자가를 증거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입술과 영혼과 몸을 지으신 목적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말과 설교를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셋째, 십자가는 나의 자랑을 변화시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의 가문과 자기의 지식과 자기의 미모와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의 이름 석자를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전철역에 가 보면 도지사들의 사진과 이름들이 멋지게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에는 자기의 가문과 자기의 학문과 자기의 종교적 열심을 자랑했습니다. 나중에는 낙원에 이끌려 올라갔던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체험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자기에 관한 자랑들을 모두 포기했습니다. 그와 같은 것들이 이제는 모두 똥과 같이 보인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3:8). 갈 6:14에서 표현한 대로 사도 바울은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랑한 나머지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손자 손녀들을 자랑하고 싶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자 손녀들을 안고 다니거나 업고 다니거나 짊어지고 다니는 것처럼,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몸에 짊어지고 다녔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 4:10).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겁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기도 합니다.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무겁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귀찮기도 합니다. 그러나 좋아하고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무거워도 힘들어도 짊어지고 다닙니다. 바울은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 6:1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바울이야 말로 십자가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강변교회 성도 여러분들,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귀찮아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십자가를 좋아서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돈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붙잡혀서 누군가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죄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기질일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일 수도 있고 염세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자유를 누리고 싶지만 그것들에 얽매어서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아마 여러분들을 사로잡고 있는 가장 큰 원수는 자기 자신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못된 기질일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것들에 붙잡혀서 사는 노예 생활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운명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길만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체험하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붙잡는 길입니다.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길입니다. 어거스틴도 한 동안은 정욕과 출세욕에 얽매여 살았고 마태와 삭개오도 한 동안은 물욕과 출세욕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세상이 죽고 자기가 죽는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행복을 체험했습니다. 이와 같은 운명의 변화가 십자가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대신 심판과 저주를 받으신 십자가를 바라볼 때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늘 영광 떠나서 이 세상에 섬기러 오신 주님, 하늘의 별을 만드신 그 손과 발에 상처를 입으시고 죽으신 주님을 바라볼 때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변화가 바울 자신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루디아의 마음 속에도, 빌립보 간수의 마음 속에도 이와 같은 운명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문둥병에 걸렸던 벤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멀리 서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문둥병에서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십자가 밑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죄와 질병과 우울증과 절망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구원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십자가와 나" 나는 지금 십자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십자가를 무시하고 싫어합니까? 십자가를 사랑하고 자랑합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 대신 심판과 저주를 받으신 곳입니다. 십자가는 어떠한 무서운 죄를 범한 죄인도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두 팔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도 붙잡아야만 하는 유일한 의요 유일한 공로입니다. 진젠돌프 백작처럼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편 강도처럼 그저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처럼 한 평생 십자가만을 말하고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십자가만을 짊어지고 다니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과 동역하는 교회
고전 2:1-16 / 오정호목사
하나님의 교회는 건물이나 사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의존할 때에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께 순복하고 성령의 역사를 사모함으로 교회의 본질을 유지할수 있습니다. 성령에 이끌림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통장의 잔고나 지력, 체력을 의존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학력이 높을수록, 소유가 많아질수록 더욱 겸손히 성령님을 의지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최근 1907년 이래 90년만의 가뭄이 한반도를 강타하였습니다. 가뭄현상이 극심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구름 속에 드라이아이스를 뿌려 비를 내리게 하는 인공강우 실험을 했는데 겨우 1미리정도 비를 오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단비를 내리시기로 작정하신다면 단번에 가뭄이 해결됩니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것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은 이처럼 차이가 납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하면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성령과 더불어 동역할 때에 어떤 영적인 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임하게 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믿음이 충만해집니다(4-5절).
사도바울은 사람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을 대조시킵니다(5절). 십자가의 능력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셔야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자원과 은혜는 무한합니다. 이 무한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성도는 성령의 지혜와 권능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이 견고해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철저히 의존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엄청난 복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9절).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지혜를 초월하기에 세상의 어떤 지식으로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계획과 우리에게 주신 복을 알 수 있고 또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10절).
성령의 은혜가 있을 때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성령의 능력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 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겉으로는 웃음을 짓지만 마음속으로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부유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속 사정을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을 의존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교통할 수 있습니다(11절).
우리는 신앙고백을 통하여 성령이며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확신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성령과 동역하면 믿음이 더욱 충만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십시오. 다락방을 통하여, 평신도 성장프로그램을 통하여 공부하십시오. 동시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공부하십시오.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때 말씀을 깨닫게 되고 믿음이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2. 삶과 인격의 실제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12절).
우리는 성령을 받고 성령을 깨닫게 하심을 따라 점점 십자가의 사랑을 점점 깊이 체험합니다. 이전에는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폭포수처럼 부어집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혈기를 다스리지 못했지만 성령의 은혜를 깨달은 뒤에는 넉넉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용납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혔으나 이제는 여호와이레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령의 은혜가 마음을 점점 더 충만하게 할 때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하나님의 신기한 은혜를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지성을 중시하는 그리스도인이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신앙은 항상 불안정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고 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배움이 적다 할지라도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면 자신의 삶과 인격이 새롭게 변화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면 반드시 변화의 역사가 발생합니다.
3. 더 깊은 은혜로 나아가게 됩니다(13절).
성령님은 가르치는 교사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의 가르치심을 통해 말씀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믿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과 개인이 성령의 은혜를 계속 의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능력 받고 열매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권능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행1:8). 경제적인 어려움과 더워지는 날씨로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계절에 우리에게 끊임없이 솟아나는 성령의 은혜의 샘물이 필요합니다. 능력 받아서 역동적으로 주의 사역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속에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내 지력과 체력과 사회적 지위를 의존하여 일했다면 이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께서 주시는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읍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과 동역할 수 있습니까?
첫째, 회개해야 합니다(행2:38).
성령님과 동역하는 첫째 원리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 자신을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하는 영적인 작업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죄사함입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임재하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합니다. 고백은 성도들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은혜의 통로입니다.(요일1:9)
둘째, 성령께 순종해야 합니다(행5:32).
주님은 순종하는 자를 기뻐 사용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순종해야하는 결정적인 순종의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순종할 때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주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성심으로 성령께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십시오. 주님께 쓰임받는 기쁨을 누릴것입니다.
셋째,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눅11:13).
사랑하는 여러분, 무한한 성령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성령의 은사를 구하십시오. 성령을 체험하십시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상황가운데에서도 찬송과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으로 인도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성령을 무시하거나, 성령의 능력을 제한했다면 성령에 대해서 새롭게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성령과 막힘없이 교제하는 교통에 대해서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성령의 은혜가 단비처럼 내리기를 사모하십시오. 우리 새로남 교회가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교회라는 아름답고 축복된 이름을 얻게 합시다.
오 진리의 성령이시여! 내 마음속에 오시사, 거룩한 질서를 회복시켜 주소서
오 능력의 성령이시여! 내 삶에 오시사, 주님의 능력으로 충만케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만
고전 2:1-9 / 이종철목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뜨거운 여름, 설교 제목도 뜨겁습니다. 2절의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외에는”은 소위 은혜파 목사님이나 경건한 신앙인들이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기독교가 곧 그리스도교이고, 칼 바르트라는 대 신학자도 하나님 말씀은 곧 그리스도라 하였으니 뭐 더 할 말 있겠습니까? 정말 하루 종일, 예수,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충만해집니다.
그 그리스도의 인격이나 사역을 대표하는 핵심어가 바로 이 ‘십자가에 못박힌’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용서받는 대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죄와 운명의 짐을 지고 사는 인생들에게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예수님은 공감과 연민을 일으킵니다. 십자가는 또한 이 세상의 정욕이나 가치나 세계관을 끊고 하늘나라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런데 자칫 십자가에 대한 강조가 신자들을 1) 반지성적으로 만들거나, 2) 대화와 설득보다는 일방적 선포와 권위적 경향으로 만들거나, 3) 세상에 대해서 고립적, 배타적으로 가는 경향을 만들기도 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외에는’ 이 슬로건을 처음으로 외친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의 신학은 항상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본문의 문맥을 보면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면 십자가가 무엇인지 뚜렷이 보입니다.
첫째,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말의 지혜는 고상한 말재주나 교묘한 말솜씨를 말합니다. 고대 방랑 철학자들이나 소피스트들은 화려한 언변을 중시했습니다. 현란한 수사학과 함께 말의 톤과 제스처로 사람들을 현혹했습니다. 이들을 비판했던 수사학자 퀸틸리안의 글을 다시 인용합니다. “어떤 이들은 거의 모든 경우에 고함을 지르고 손을 높이 들고서 목소리를 깔며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숨을 헐떡이거나 격한 몸짓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여기에 넋을 잃고 광분한다.”
이들의 목적은 결국 자기 자랑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은 왜 이 사람들처럼 화려하게 복음을 전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여기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인간적 자랑만 있고, 결국 이 때문에 분열까지 갔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와 저주의 상징입니다.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을 논리적으로 추론하고, 설득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지혜라 합니다. 한 마디로 반(反)철학이고, 반(反)지혜입니다. 세상 철학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화려한 수사학에는 생명이 없고, 패배와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생명이 있습니다.
바울은 인간의 교만을 꺾고, 허영이나 헛된 자랑을 못하도록 십자가를 강조합니다. 지혜나 지식에 대한 반대가 아닙니다. 교만과 자랑의 도구로 사용되는 지혜에 대한 반대입니다.
둘째,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4절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바울이 십자가를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의 말로 설득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길 바랬기 때문입니다. 세상 철학이나 달변으로는 하나님이 잘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눌하면 옆 사람이 답답해서 달려들 듯 하나님이 달려듭니다. 바울은 사람이 논리로 설득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강권해서 그 마음을 바꾸어야 사람이 바뀝니다. 바울은 전도 과정에서 얼마든지 논리 싸움도 할 수 있었지만, 그러다가는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사람은 얻지 못할 수 있습니다. 논리 싸움에서 이기면 기분은 좋은데 열매는 형편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조심했습니다. 3절의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말합니다. 자기감정이나 지식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신 복음이 드러나고, 그래서 선교의 열매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습니다. 죽 쒔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은혜받는 성도가 있습니다. 설교를 마구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고, 설교자는 항상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며 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성령이 깨달음을 주셔야 우리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새롭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1절의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는 사본상의 문제가 있는 번역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전할 때에”로 새번역이나 영어성경들은 번역하는데 저는 이 사본 읽기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7절에서도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은밀하다, 감추어졌다, 미리 정하셨다는 모두 ‘하나님의 신비’를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신비, ‘뮈스테리온’은 미스테리 곧 비밀을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표현합니까? 사도 바울이 보기에 십자가의 은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이고, 그 선물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달리게 할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십자가 때문에 부활이 일어나고, 예수님이 영광의 주로서 높혀졌습니다. 결국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와 천국을 가져다준 것은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인간의 논리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 선물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하나님의 신비요, 비밀이라 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 좋은 선물이 나에게 주어질 수 있었나? 바로 내 곁에 보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는 알아보고 다른 이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성령이나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 아니고는 스스로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하늘에서 빛처럼 내리치는 것이지 자각이나 각성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간의 지혜가 차단된 곳에서, 어리석은 십자가를 통해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십자가는 그래서 불교의 화두와 같습니다. 모순덩어리 앞에서 인간의 모든 지혜를 내려놓고 겸손히 두 손 들고 하나님의 은혜만 바랍니다.
셋째, 통치자의 지혜가 아니다
십자가 반대편에 통치자의 지혜가 있습니다. 6절입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8절입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통치자가 누구입니까? 세상의 왕이나 황제 권력입니다. 실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은 빌라도요, 대제사장 권력입니다.
바울 서신서에서 가장 노골적인 권력비판입니다. 예수를 죽인 것은 세상 권력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그 정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닐 엘리엇이라는 학자는 바울이 십자가를 ‘악의 현실태요 집결체인 세상 권력에 대항한 예수의 해방 전쟁의 정점’으로 이해했다고 분석합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666 짐승으로 낙인찍힌 자는 바로 로마황제 권력입니다. 바울과 사도들에게 고난을 가져오는 것도 결국 로마 정부, 지방 정부, 유대 권력 등 모든 권력층들이었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세상 권력과 긴장 관계를 가집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한 선한 권력이면 협조하고 평화와 복을 기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악한 권력이라면 비판하고 적대적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힘이 약할 때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로마서 13장의 국가에 세금을 바치라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힘이 없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지혜롭게 처신하는 것이지, 악을 간과하는 것은 아닙니다.
통치자로 번역된 ‘아르콘’은 영적 권세자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천사나 마귀나 어떤 영적 세력들을 뜻했습니다. 악이 악인 것은 그 인격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행위와 지향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추구하는 것은 권력과 폭력과 승리입니다. 십자가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섬김과 희생과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그 핵심이 담겼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10:44) 권력과 폭력에 대항하여 섬김과 희생으로 싸웠던 결국이 십자가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은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가치를 신뢰하고 실천하는 삶을 뜻합니다. 기독교가 이 가치를 놓치는 순간 십자가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이 가치를 제대로 심어주었다면 한국 기독교는 역사적 기여를 했다 할 것인데 불행히도 권력과 맘본, 영광과 승리주의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춘추전국시대 묵자(墨子)의 운동은 기독교가 본받을 만합니다. 공자님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묵자는 아마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새기는 묵형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일파는 검은 노동복을 입고 다녔으며, 전쟁을 반대하고 비폭력을 주장하였습니다. 극단적인 절제된 생활과 근면한 삶을 살았고, 스스로 무장하고 준비하면서, 철저히 그들의 주장을 실천했습니다. 맹자는 이들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묵가는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여 정수리에서 무릎까지 닳아 없어진다 하여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행동에 옮기는 사람들”
이들의 주장은 겸애, 사랑, 반전, 비폭력입니다. 겸애는 “세상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사랑한다.”는 평등주의와 박애주의를 말합니다. 이들은 “사회의 혼란은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아서 동방박사가 이들 묵자 출신 아니냐는 풍설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 겸애와 사랑을 실제 실천하고 그런 세계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묵자는 “비단 실만 물드는 것이 아니라 나라도 물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문화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 인간이나 나라도 그렇게 물든다는 말입니다. 사랑으로 물들이면 사랑의 세계가 될 것이요, 분노와 폭력으로 물들이면 또 세계는 그렇게 물들 것입니다. 한국기독교는 이 물들이는 데 실패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삶을 가장 피폐하게 하는 것은 전쟁이라 보고 어떻게든 전쟁을 막으려 하였습니다. 서로 공존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하면서도 스스로는 훈련된 군사조직과 방성 기구를 갖춰 감히 침략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목숨 걸고 직접 가서 설득하고, 모의 전쟁을 통해 성공할 수 없음을 밝혀서 막았습니다. 전쟁을 막고 가다 비가 내려 송나라의 여각에 피하려 하지만 문지기가 박대하는 일을 당하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조용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의 공로는 알아주지 않고 드러내 놓고 싸우는 사람은 알아준다.” 사도 바울의 마음 같습니다. 바울은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복음 전도자의 길을 갔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막고 안정화시켰습니다.
우리는 바울 시대보다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과, 또 그런 실천이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섬김과 희생과 사랑의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해 갔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