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보고 안심했다(1)
-통일 전 동베를린을 다녀온 이야기-
올해 광복절도 참 어수선하게 지나갔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에 초점이 맞춰져야할 경사스러운 날이 국치(國恥)의 사후 처리 문제를 두고 서로 세력 자랑하듯(?) 으르렁댔습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부끄러운 과거 돌아보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북한이 우리 국가 재산을 돌더미로 만든 개성공단을 마치 과거의 동서베를린 관계처럼 이야기 하는데는 경악했습니다.
독일(동서독)은 미국을 상대로 맞장을 뜨다가 처참하게 부서졌습니다. 그 뒤 분단 되었을 때나, 통일 후에도 전쟁 패배, 분단 과오, 나치 과거 등을 깨끗하게 정리(승복)하고 오로지 '국민의 자유 보장'을 위해 전진했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서독)통치자들은 분명하게 현재와 과거를 분리해 다루면서도 '자유와 안보' 원칙을 흩뜨리거나 잊지 않았습니다. 오롯이 독일 '국민의 이익'을 우선했습니다.
1980년대 초반 서독에서 공부할 때 이야기입니다. 겨울 학기 중 대학이 서독정부의 지원을 받아 외국 학생들을 서베를린으로 데려가 분단의 현장을 경험케 하는 프로그램에 참석했습니다. 비용은 개인 여행비의 10분의 1정도로 쌌고, 호텔에서 재웠고 식사는 물론 모든 관광비용까지 포함했습니다.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모자라는 비용은 서독 정부가 지원했습니다.
떠나는 날. 학생들은 여행에 들떠, 언제나 그렇듯 소란스러웠습니다. 안내인은 동독 땅을 거쳐 서베를린까지의 긴 버스 여정을 설명했습니다. 단 한 차례만 휴게소에 들른다며 그때까지는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다며 준비하라 일렀습니다.
또 동독을 지나는 동안 서독 간행물은 물론 서방 모든 국가의 잡지, 서적 사진 등도 가져갈 수 없다며 지금 버리거나 파기하라고 강조했습니다. 학생들은 “자유”라며 당시 동독 방송이 내보내던 공익광고의 한 구절을 우스꽝스럽게 흉내를 내며 비웃었습니다.
서독 검문소를 지날 때 안내인에게 탑승객 수와 여행 목적을 묻고는 통과시켰습니다. 100m도 안되는 동독 땅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확연하게 달랐습니다. 보기엔 군인 복장(군인이 아니라 제복이었음)의 여성 관리가 올라와 여권을 다 걷어갔습니다. 여권 확인이 1시간가량 소요되었고, 모든 학생들은 차안에 갇혀 있어야 했습니다. 안내인도 “내릴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너무한다”며 “코미디”라고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휴게소에는 주변에 감시탑이 즐비했고, 군견을 동반한 군인들이 눈을 번뜩였습니다. 매장에는 서독의 풍요로움에 익숙한 학생들이 구입할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고속도로는 표지판도, 안전시설도, 노면도 모든 것이 참 엉성했습니다. 멋있는 것은 속도위반을 잡을 순찰대 요원과 순찰차였고, 속도위반 자동측정 시설은 그중 첨단이었습니다. 아우토반의 속도 무제한에 익숙한 서독인으로부터 과속에 따른 범칙금을 더 걷기 위한 것이었지요.
첫날은 서베를린을 단체로 버스 타고 관광을 했습니다. 박물관, 널리 알려진 동물원, 쿠담 거리, 서베를린자유대학 등을 주마간산했습니다. 다음 날 오전은 서베를린에서 보는 분단의 상징인 장벽과 철조망이었습니다. 장벽은 한 치도 빈틈없이 낙서로 덮였습니다. “새들은 쿠담(서베를린)에서 운터덴 린덴(동베를린)으로 자유롭게 오간다.”는 구절이 가슴을 찡하게 울렸습니다.
소총을 메고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병사의 사진도 붙어 있었습니다. 철조망 위에는 손으로 잡고 넘을 수 없도록 둥근 원통이 놓여있었지요. 안내인은 “동독의 악랄한 수법”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전망대에서 본 동베를린은 참 조용했습니다. 다니는 시민도 눈에 띄지 않았고, 건물은 대부분 장벽에서 200m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가끔 병사들이 군견을 앞세우고 장벽 너머에서 순찰을 돌았습니다.
오후에는 널리 알려졌던 체크포인트 찰리를 지나 동베를린으로 갔습니다. 동독으로 들어올 때보다 더 삼엄한 경비 속에 인원 점검과 여권 심사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사진과 대조했고, 여권의 위조 여부도 감식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안내도 동독 관리가 직접 맡았습니다. 도중에는 그림엽서와 우표 등을 판매했습니다.
자유진영의 인쇄물은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겠다던 그녀가 인심 쓰듯 서독 마르크화로 지불해도 좋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종의 외화벌이였습니다. 동서독 간 거래 공식 환율은 1대1이었지만 암시장에서는 8배 이상으로 서독 마르크화가 강세였습니다. 서독 마르크화로 구입하면 동독에 8배 이상의 이익을 주었습니다. 서독이 동독을 지원하기 위해 채택한 불공정, 불평등한 환율제도였습니다.
관리는 웃었지만 행동에는 전혀 성의가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질문에 제대로 답도 안 했고, 답변이 곤란한 체제 관련 질문은 아예 입도 떼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날 남는 것은 모두가 큰 소리로 웃었던 “모든 것이 자유”라는 말이었습니다. 제복의 윗도리는 당시 서울에서도 잘 입지 않던 하얀 무명으로 지었습니다. 아래는 동독 군인들의 제복과 같은 미색이었습니다.
다음 날은 동베를린 자유여행이었습니다. 자유여행을 앞두고 참 많이 망설였습니다. 서울에서 여권 발급 전 의무사항이었던 보안교육 때 공산국가 방문을 불허한다는 것과 북한의 납북 사례를 수차례 들었기 때문입니다.(계속)
-통일 전 동베를린을 다녀온 이야기-
동베를린을 자유 여행하는 날 아침 불현듯 전날 운터 덴 린덴에서 보았던 동독 주재 북한 대사관의 인공기와 많은 유학생들이 연루되었던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이제 말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방해 때문에 혹시나 돌아 나올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동독(공산국가)의 겉모습이나마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같이 공부하던 일본 학생 다나까에게 걱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흔쾌히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며 나를 응원했습니다. 용기를 얻었고, 우리는 체크 포인트 찰리까지 데려다주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아침 9시경인데도 많은 이들이 비자를 받기 위해 길게 줄 서 있었습니다. 다나까는 15분 만에 여권에 비자(자정까지 체류)를 받았습니다. 필자는 다른 이들보다 1시간 가량을 더 길게 기다려 별도의 백지에 찍은 비자(오후 5시까지 체류)를 손에 쥐었습니다. 우린 국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자 발급비 5마르크 지불, 동독 방문객의 의무였던 동독 화폐 25마르크를 환전했습니다. 동독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고, 서독에게는 동독을 포용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동시에 동독에게 어떤 경우에도 공짜 지원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서독의 정책이었습니다.
다나까와 함께 간 장벽 동쪽은 서베를린과 딴판이었습니다. 경비병이 우리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낙서가 전혀 없었고, 탈주자 방지용 모래가 깔려 있었고, 총을 멘 경비병들이 수색견을 몰고 순찰을 돌았습니다. 두께 50㎝ 정도의 벽으로 갈린 양쪽이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문은 동서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차이가 없었는데, 마음으로 느꼈던 괴리감은 지금까지도 가슴 아픕니다. 서쪽은 한없는 자유, 동쪽은 입에 발린 자유란 이름의 통제. 정말 으스스했습니다.
우리는 11시 반경 그곳에서 헤어져 그때부터 각각 시간을 보냈습니다. 훔볼트 대학 박물관 방명록에 ‘한국에서 온 신현덕’이라 썼더니 직원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쳐다봤습니다. “한국 학생은 처음”이라면서 “괜찮겠느냐?”고 필자의 안위를 걱정했습니다. 그가 한국과 북한의 관계,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독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여러 차례 보았답니다. TV탑 전망대에서 15마르크를 주고 100% 은으로 만든 기념 숟가락을 샀습니다. 지금도 필자의 거실 함지박에 들어있습니다. 녹슬어 닦을 때마다 사라진 동독 정권을 떠올립니다. 당시 한국보다 국민 소득 수준이 더 높았던 동독이 무너진 원인을 생각해 봅니다. 철조망 너머로 조금씩 스며든 자유와 서독의 마르크화(경제)였습니다.
동베를린을 벗어나던 짧은 시간은 지금도 진저리가 쳐질 만큼 아찔했습니다. U-Bahn(전철)을 타고 서베를린으로 가려고 지하의 출국장에 갔지요. 비자를 보더니 반드시 체크 포인트 찰리로 나가야 한다며 여권을 돌려줬습니다. 오후 4시 40분경이었을 겁니다. 5시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 겁이 덜컹 났습니다. 지도를 보며 무작정 뛰었습니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숨이 턱에 닿아 가까스로 시간 안에 도착하니 동서독 관리 모두가 “안심하라” 말했지만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동베를린을 벗어나 찰리 검문소 앞에서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한참 후 터덜터덜 호텔로 걸었습니다. 우리나라 총영사관을 지나며 태극기를 보자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이 고마웠습니다.(일부 내용은 졸저 '독일은 서독보다 더 크다'와 중복됨)
최근의 형세가 가슴을 무겁게 짓누릅니다. 문재인 정부는 대한민국을 적으로 삼았던 인사를 과거 일본에 항거했다는 이유만으로 애국지사로 추앙하는 행사를 몇 년째 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멸망시키려던 중화인민공화국(抗美援朝)과 북한(6・25)은 시도 때도 없이 온갖 몽니를 다 부립니다.
우리 정부는 이들과 얽힌 외교 문제가 발생하면 비루 오른 강아지 범 복장거리 시키듯 합니다. 대한민국 등에 칼을 꽂았던 중국과 북한을 향해 일본에게 악다구니질 하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당차게 나서면 좋겠습니다. 북한 김여정과 김영철 등의 추악하고 험한 말, 중국 외교부장 왕이의 결례에 한마디도 못하는 외교를 언제까지 보아야 합니까. 6・25 전장에서 병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지켜 낸 태극기가 자랑스럽지도 않습니까?
사진설명 : 보병 제5사단이 6・25전쟁 중 소양강, 인제지구 전투에서 적을 추격하는 중이다. 적은 태극기를 든 병사를 표적으로 삼아 집중 사격을 가해 거꾸러뜨리곤 했다. 하지만 일제 때 나라 없는 설움을 당했던 병사들은 앞다퉈 깃대를 잡았고, 절대로 태극기를 놓지 않았다.(종군작가 신의균 씨 촬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