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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2019년 3월 24일 주일오전
렉시오나리 : 사55:1-9; 눅13:1-9
본문 : 창28:10-22; 마6:5-18
제목 : “베이트 엘(2)”
주일오전찬송
경배찬송 - 시98편 1,2,3
십계명 낭독 후 찬송 - 시37편 11,16
사죄선언 후 감사찬송 - 시16편 3,4,5
렉시오나리 후의 찬송 - 시117편(고정)
아멘찬송 - 시71편 1,2,3,8,9
성찬식 찬송 - 시65편 3,5
폐회찬송 - 시91편 1,5
베이트 엘(2)
첫째 : 하늘에 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창세기와 골로새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 곧 “하늘”과 “땅”이라는 두 영역을 지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곧 이어서 2절에서는 “땅이”라고 시작함으로써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하늘”과 “땅” 두 영역 중에서 “땅”에 대한 이야기이지, 여기에 “하늘”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지지하는 중요한 사실로서, 창세기 1장은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을 “하늘”과는 다른 용어인 “궁창”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8절은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은 창세기 1장에서는 “궁창”이라고 명해졌는데, 이 궁창을 부르기를 “하늘이라고 부르겠다” 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보는 하늘은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보이지 않는 하늘은 아니고, 그 보이지 않는 하늘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궁창” 영역을 “하늘”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세기의 이야기를 보면서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은 궁창이다. 즉 1장 1절의 “하늘”은 아니다.
2) 1장 1절의 하늘은 골로새서를 따라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하늘”, 곧 계시록 등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다. 이 하늘은 감각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우주 저편에 있다는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3) 그리고 이 땅의 궁창이 “하늘”이라고 칭해진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형상들을 이 궁창에다 투영하시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늘”을 직접 보거나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통해서 모형적으로 하늘을 경험하게 하신 것이다.
둘째 : 하늘과 땅의 우선성
그 다음 여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점은 “그렇다면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과 땅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선성을 갖느냐”라는 점입니다.
하늘이든 땅이든 모두 “피조물”입니다. 둘 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하늘이 더 높거나 땅이 더 낮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 본질적으로 그런 것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더 숭상하는 것은 우리의 종교심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지으셨다는 점에서는 둘 다 똑같기 때문에, 하늘이나 땅이나 그 존재에 있어서 우월은 없습니다. 둘 다 평등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린 질문, “어느 것이 더 우선성을 갖느냐”라는 문제는 어떻게 답할 수가 있으며, 이것은 왜 물은 것입니까? 그것은 주기도문에서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늘이 땅에 대해서 존재론적으로 더 우월한 것은 아닙니다. 둘 다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세계가 우월하고, 육적 세계는 열등하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 세계를 지으실 때 하나님은 어떤 원리를 만드셨습니다. 그 원리가 무엇인가 하면, 주기도문의 주님의 말씀에 따르자면 “하나님의 본의가 하늘에서는 완전하게 구현되게 하셨고, 땅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 죄 때문일 수가 있는데(무죄 상태에서도 그러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서는 “하늘이 땅에 구현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땅이 하늘에 구현되도록 기도하라”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이 땅에 구현되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선성, 순서는 명백해집니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는 비록 하늘과 땅이 동등하게 지어졌다 할지라도, 이후에는 (아마도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은 하늘에서만 나타나고 땅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온전해지기를 바라고 소망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이트 엘
설교의 서론에서 “하늘과 땅” 이야기를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베이트 엘의 주제가 이런 사실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야곱이 어떻게 여기를 찾아오게 되었고, 또 이 곳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로서 야곱이 벧엘을 찾아오게 된 것은 어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며, 또 거기서 나타나 주신 하나님, 곧 벧엘의 하나님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야곱은 환난 중에, 환난 중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찾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가나안 첫 예배 처소였던 벧엘을 찾아왔고, 여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갈 바를 알지 못했던”,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과 함께 있는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었던” 야곱에게 오셔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 그에게도 여전히 함께함을” 말씀하시고 알려주심으로써 야곱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오늘 우리가 살피려는 것은 이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꿈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찾아온 야곱에게 꿈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꿈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닥다리, 곧 지구라트(히브리어 ‘술람’은 ‘사다리’보다는 ‘계단’ 쪽이다)였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장면이 당시의 야곱에게 아무 메시지를 주지 않는다면 이만큼 말이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분명 메시지를 주시기 위하여 이 꿈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 즉 그 꿈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벨과 벧엘
야곱이 본 하늘로 연결된 지구라트가 그 형태에 있어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제가 2013년 성탄 설교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내용이 기초가 되기 때문에 간단히 요약하겠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바벨”이라는 말은 수메르어 “카딩길라”를 바빌로니아어로 번역한 것으로서 “밥 일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밥 일리”라는 말의 뜻은 “신의 문”입니다. 즉 사람들이 창세기 11장에서 시도했던 것은 “단순한 건축물을 짓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거기에서 말했던 대로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 특히 지구라트가 계단식 구조물인 것을 생각하면 “하늘에 닿는 통로”를 만들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꿈을 꾼 후에 그곳을 “벧엘”이라고 이름을 짓게 되는 이유를 17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야곱이 이 장면에서 “하늘의 문”을 말한 이유는 명백하게 “바벨”을 의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방금 말한 대로 “바벨”이란 그 의미가 지금 야곱이 말하고 있는 “하늘의 문”입니다. 즉 야곱은 벧엘에서 “이곳이 바로 바벨이구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벧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의 바벨은 “사람 편에서 하나님에게로 올라가려고 시도했던” 거짓 하늘의 문, 거짓 바벨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진짜 바벨, 진짜 하늘의 문을 야곱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사람에게로 내려오는 것을 통해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늘의 문입니다. 벧엘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연결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앞서 질문했던 내용, 즉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때 야곱에게 이 참 바벨을 보여주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 보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참 바벨을 보여주시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려 하셨던 것입니까?
우리는 지난 주일에 창세기 28장에서의 야곱의 상황은 “환난의 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때가 그에게 환난의 때가 되었던 이유는 다른 어떤 환경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금 약속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데 여전히 약속을 붙들고 있어야 할 것인지의 위기 상황, 어려움의 순간에 봉착했기 때문입니다. 바벨에 대한 꿈은 바로 이런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전이었던 셈입니다.
여러분은 바벨, 곧 하늘과 땅의 연결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에는 가끔 창세기 28장의 상황과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만났던 가시떨기나무의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여시고 이 땅에 강림하시게 될 때! 그 때 이 땅에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라고 이런 말씀은 알려주고 있습니까?
“이 땅은 거룩하니 신을 벗어라!”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하늘이 땅에 내려오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임하게 되면, 그 땅은 거룩한 땅이 됩니다. 하늘이 땅처럼 변화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본 지구라트가 야곱에게 알려주는 사실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늘과 땅이 계단(지구라트)으로 연결이 되고, 거기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야곱에게, 야곱이 있던 그 땅은 분명 “땅의 곳”인데, 하늘의 문으로 인해서 그 땅이 “하늘의 곳”이 되는 것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일을 통해 일어나는 일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땅이 하늘처럼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꿈을 통하여 말씀해 주십니다. 하늘의 문을 통해 하늘과 땅이 닿고, 이제 네가 밟고 있는 이 땅이 하늘처럼 변화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석가는 창세기 28장의 이 내용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땅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자원에 의지하여 사는 곳이 아니요, 하늘도 멀리 떨어져 있는 신들의 닫혀진 거주지가 아니다. 하늘은 땅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땅은 하늘의 자원들에 의존하고자 한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사실은, 이제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이 하늘의 삶의 방식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설교의 서두에 들은 것처럼, 땅이 하늘처럼 변화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닙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은 사람의 힘으로 하늘에 닿으려고 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저지하셨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하늘을 땅에 구축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시도를 좌초되게 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하늘에 닿을 수 없고, 하늘이 내려오도록, 하늘의 원리가 땅에 임하도록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참으로 하늘을 내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을 생각하십시오! 야곱은 어떤 상황 중에 있었습니까? 야곱에게는 무엇이 필요했나요? 야곱에게는 “약속에 대한 신뢰”가 필요했습니다. 그는 약속으로부터 멀어져 가면서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약속이 정말 그러한 것인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꿈에 바벨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땅의 원리를 따라서 살아가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조상 아브라함의 예배 처소를 찾아와 “여호와는 환난 때에 도움이시다”라는 사실을 의지한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늘을 땅에 내리셔서, 땅이 하늘로 변케 만드신다”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참으로, 하늘이 열리고 임하게 될 때, 땅은 하늘처럼 됩니다.
그리고 야곱에게는 이 사실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기도
그렇다면 이제 야곱에게 보이셨던 이 하늘과 땅의 원리가 우리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하는지를 신약성경을 통해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설교의 서론에서 잠깐 언급했던 마태복음 6장으로 가도록 합시다. 우리는 “주기도문”에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진리를 통해서 야곱의 벧엘 사건의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9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서 곧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조금 다르게 말해 볼까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어떤 의미가 됩니까? 네! 그렇습니다. “땅이 하늘처럼 변화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하늘과 같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님의 요구를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읽어본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실은 “바벨”을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사실을 가르쳐주고 계시느냐? “기도라는 것이 사실은 바벨의 도구, 즉 하늘을 열어서 하늘을 땅과 연결시키고, 나아가서 땅에 하늘을 구현시키는 방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기도문을 배우고, 그래서 이 주기도문을 따라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주기도문은 마치 신령한 주문처럼, 이것을 그대로 따라서 기도하기만 하면 신비한 일이 일어나는 그런 주술적인 도구입니까?
주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서 알려주시는 중요한 사실은 기도야말로 “땅을 하늘로 변화시키는 방편”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야말로 “바벨, 즉 하늘의 문을” 열어젖힐 수 있는 도구이며, 따라서 기도란 땅에 붙어 있는 우리가 땅을 하늘로 변화시킬 수 있는 도구라는 사실입니다.
기도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 : 하늘의 원리와 땅의 원리
마태복음 6장의 내용을 잘 보시면, 마태복음 6장에서 주기도문이 위치하는 곳은 조금 더 넓은 문맥의 한 부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은 18절까지의 내용까지만 보더라도, 거기 세 가지의 주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2절부터 4절까지는 “구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5절부터 15절까지는 “기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 안에 주기도문이 나옵니다. 그리고 16절부터 18절까지는 “금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즉 주기도문을 알려주시는 내용은 이 세 가지 주제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그러면 이 세 주제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아멘!
1절 말씀은 뒤에 나오는 세 가지 주제들이 모두 무엇에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제, 기도, 금식은 모두 어떤 예로 언급된 것입니까?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하는 의”의 예들인 것입니다. 즉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주제들이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입니다.
그리고 이 1절 말씀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는 5장 마지막 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도 같이 한 번 읽어보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아멘!
마태복음 5장 48절과 6장 1절 말씀을 붙여서 읽어보면, 이 부분에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려고 하는 주제는 매우 선명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고, 이렇게 온전해지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의”의 예들로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기도의 내용에서 “너희는 하늘이 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라!”라고 가르치신 것은 그 의미가 매우 명확합니다. 기도란 하늘이 땅에 임하게 하는 방편이므로, 이 기도를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눈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기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도는 세상의 방식과 거슬러 살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골방에서 홀로 무언가를 중얼거린다고 해서 내 삶에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듯이,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만나면 돈을 향해 뛰어야 하고, 질병에 대해서는 의사와 병원을, 가족이나 관계에서 위기가 생긴다면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일을 통해서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어느 것도 골방에서 중얼거리는 기도를 통해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문제 해결의 근원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봅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하늘이 땅에 닿아, 땅이 하늘로 변화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으로 문제에 대한 답을 내지 않습니다.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은 기도가, 진실로 자신의 삶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기도야말로 땅에서 하늘을 불러 일으키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 것입니다.
지키는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벧엘의 꿈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보십시오.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아멘!
1)
바벨과 벧엘은 똑같은 것을 똑같은 방식으로 보여주는 두 형태입니다.
그런데 “바벨”에서 하나님은 “강림”하셨습니다. 제각 간혹 말씀드렸는데 창세기 11장은 교차대조 구조가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는 본문 중 하나이고, 여기에서 중심에 오는 절은 5절입니다. 5절 말씀은 이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강림하셨다!”
저나 여러분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강림”은 기쁜 일입니다. 성경에서 여기 “강림하다”에 사용된 단어(히. 야라드)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출19:18), 성막에서 구름 기둥 가운데 나타나실 때(출40:34이하), 모세의 짐을 덜어주시기 위하 장로들 사이에 내려오실 때(민11:7),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불로 임하셨을 때(대하7:1) 사용된 말씀입니다. 더욱 감동적인 말씀은 출애굽기 3장 8절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고역 가운데 신음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려오셨다는 것! 그래서 “그들 중에 계시다는 것!” 이것은 정말 큰 기쁨이요 큰 복, 은혜입니다.
그러나 바벨에서 여호와의 강림이 그들에게는 어떤 결과를 빚었습니까? “혼란”이죠! “흩으심”입니다! 의도하였던 모든 성과 대를 쌓던 일을 그치고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혼란입니다! 여호와께서 내려오셨는데!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는데! 땅에서 하늘에 닿으려 했던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임하심이 심판이요 저주였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야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여기 똑같은 두 구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벨과 벧엘이 똑같이 “하늘의 문”을 가리키고 있고, 여기 둘 모두에 똑같이 “하나님이 내려오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하지만 바벨에서는 혼란과 심판, 흩으심과 좌초를 낳으셨던 하나님께서, “땅에서부터 하늘로”가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땅으로”가 될 때에는 “솨마르!” 지키심을 낳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려오셔서 함께 하심으로서 임하게 되는 “여호와의 지키심!”
따라서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 양식을 따라 사는 것! 사람의 눈을 의지하고, 사람의 생각을 의지하고, 사람의 방식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때로 지름길처럼 보일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땅으로부터 하늘로 쌓아가는 방식에는 여호와의 임하심이 두려움과 좌초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방식을 좇아, 겸손히 무릎 꿇어 기도하는 방법을 통해, 세상과 다른 길을 걷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참된 임마누엘, 함께하심과, 또 그로 인한 “지키심”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매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강복을 통해 약속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아멘!
야곱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