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쾰른이라는 도시 이름은 ‘식민지’라는 뜻을 지닌 ‘콜로니아(Colonia)’에서 비롯되었다.
쾰른 구시가지에 있는 로마-게르만 박물관에 가면
‘콜로니아’라는 옛 이름이 새겨진
고대 로마인들의 유물을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유럽 옛 도시들이 그렇듯
쾰른 역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그 사이에는 마치 경계선처럼 라인강이 흐르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호엔촐레른 다리와 도이치 다리에 의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
신시가지는 두 차례의 큰 전쟁,
즉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발전된 시가지다.
따라서 중세풍의 고전미가 흐르는 구시가지에 비해
다소 여행지로서의 매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라인강을 사이에 두고 예스러운 멋과 현대적인 멋이
서로 조화를 이뤄 여행자들의 마음을 한결 푸근하게 한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면 쾰른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아무래도 중세 시대가 아닌가 싶다.
그 당시 쾰른에는 무려 150여 개에 이르는 교회가 있었으며
1300년대 후반에는 유서 깊은 쾰른대학이 세워졌다.
중세의 화려했던 옛 영화를 대변하듯 구시가지 곳곳에는
성 안드레아스 교회, 성 게오르규 교회, 성 마리아 교회,
성 코른바 교회 등이 산재해 있다.
고딕건축의 상징, 쾰른대성당 문화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쾰른의 중세 시대.
그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건축물은
쾰른 대성당이다.
쾰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독일의 다른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 조차 자부심을 심어주는
이 건축물은 명실상부한 쾰른의 상징물이다.
세계 각국에서 이 훌륭한 건축물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또는 유람선을 타고서 쾰른을 찾아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관광명소다.
쾰른에서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곳은 쾰른 대성당과 호에 거리다. 보행자 전용도로인 호에 거리 곳곳에는 기념품 가게와 음식점, 노천카페 등이 늘어서 있다.
쾰른은 향수의 명산지로도 유명하다.
‘오데콜롱’이라는 프랑스어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오 드 콜로뉴’는 쾰른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
‘오 드 콜로뉴’가 만들어지게 된 것은
독특한 냄새가 나는 쾰른의 물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무렵 쾰른 사람들은 쾰른 지방의 물에 기분이 상쾌해지는 특별한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급기야 쾰른의 물은 18세기에 이르러 ‘기적의 물’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유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세기 초에 쾰른의 물을 의학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면서 ‘기적의 물’은 화장수(향수)로 탈바꿈했다.
그 당시 글로겐 거리 4711번지에 위치한 빌헬름 물헨스의 공장에서는 대량으로 ‘오 드 콜로뉴’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마침내 1875년 ‘4711’이 상표로 정식 등록되면서
오늘날 ‘오 드 콜로뉴’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입지를 굳혔다.
독일 곳곳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크게 궁전, 중세의 구시가지, 산업유산, 교회, 자연유산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총 33곳으로 이는 세계 4위에 해당된다.
그 가운데서도 독일을 대표하는 최고의 관광명소인 쾰른과 그 주변에서는 모두 세 곳의 세계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쾰른에서 전차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브륄에는 아우구스부르크 궁전이 있으며 쾰른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아헨에는 아헨 대성당이 있다.
쾰른의 얼굴과도 같은 쾰른대성당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인류의 창조적 재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 쾰른대성당은 고딕식 건축물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외부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거니와
그 규모 또한 웅장해서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길이 144m, 너비 86m에 이르는 이 거대한 건축물은 멀리서 보면 마치 견고하게 쌓은 성을 연상케 한다.
쾰른 대성당은 유럽의 수많은 건축물 가운데
공사기간이 가장 길었던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공사기간만 무려 632년.
1248년에 건축가 게르하르트에 의해 공사가 시작된 이후
1880년에 이르러 157m 높이의 쌍둥이 철탑이 완공되면서
이 위대한 건축물이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그동안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해
건축물의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거의 완벽하게 복구됐다.
쾰른 대성당은 겉으로 보기에도 분명 거대한 건축물인 동시에 값진 문화유산이지만 진정한 가치는 성당 내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제단을 장식하는 훌륭한 그림과 기둥의 정교한 조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쾰른 대성당의 가장 큰 구경거리는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래스다. 화려하면서도 오묘한 색깔이 만들어내는 빛의 조화는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품’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스테인드 글래스에 담겨진 내용은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18개의 이야기들이다.
쾰른 대성당에서는 스테인드 글래스 말고도 기적을 일으키는
성모마리아상이 있는 성모마리아 예배당,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십자가인 게로의 십자가,
1265년에 건축된 세 동방 박사의 예배당,
쾰른 대성당을 건축하게 된 계기를 만든 세 동방 박사의 유골함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1164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가져온
세 동방 박사의 유골함이 가장 소중한 유물로 손꼽힌다.
쾰른 대성당은 훌륭한 전망대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첨탑에 오르면 쾰른 시내 전경과 라인강 물줄기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509개에 이르는 계단을 하나씩 오르다 보면 그 무게가 무려 24톤에 이르는 커다란 종(피터 벨)을 볼 수도 있다.
시간의 빛깔이 켜켜이 쌓인 쾰른, 옛 도시의 예술 로마 게르만 박물관은 쾰른의 오랜 역사를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명소다. 이 박물관에서는 1~5세기 무렵의 로마 시대 유적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특히 2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디오니소스 모자이크’가 가장 유명하다. 이 유물은 로마시대 당시 건축물의 일부를 장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6년에 문을 연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에서는
14~16세기 무렵에 활동했던 화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많은 작품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네덜란드 화가인 렘브란트가 그린 ‘웃는 자화상’이다.
웃는 것 같으면서도 얼핏 보기에는 우는 것처럼 보이는 이 자화상은 렘브란트의 말년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숨은 그림을 찾는 것도 재미있다.
자화상 왼쪽에 또 한사람의 얼굴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
이 얼굴의 주인공은 “웃다가 질식해 죽었다”는 전설 속의 화가 제우크시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쾰른 대성당은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많은 예술역사학자들은 이 대성당을
후기 중세 고딕 건축물의 완전 품이자 보석이라고 표현하였다.
쾰른 대성당이 13세기 중세시대에 착공되어
19세기가 되어서야 완공되었다는 사실로
왜 그러한 극찬이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성당은 개성 있는 거대한 두 개의 탑 때문에
거대한 외양을 갖추고 있는데,
원래 이 두 개의 탑은 1814년에 설계가 변경되어
네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것으로,
19세기 산업 혁명으로 발명된 증기기관의 힘으로
지어질 수 있었다.
쾰른 대성당은 1996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두 개의 탑을 포함한 서쪽 전면의 거대한 면적은 무려 약 7,100m²에 도달한다. 1880년부터 워싱턴 기념비가 세워진 1884년까지
1165년 7월 23일 쾰른의 대주교 라이날드 폰 다셀은 밀라노로부터 동방 박사[13] 동방 박사 유골함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봉헌 물로, 그가 이탈리아[6] 동방 박사 유골함으로 유럽 전 지역으로부터 순례객을 끌어모았으며 1248년 8월 15일에 대주교 콘라트 폰 호흐슈타덴에 의해 대성당이자 순례성당으로서의 명성에 적합한 성당을 신축하기로 결정되었다.당시 공사 총 책임자로 게르하르트 폰 릴레가 임명되어 당시 흔하던 독일의 로마네스크 식 건축양식이 아닌 북프랑스의 아미엥 대성당쾰른이 있는 라인란트 지역은 단단한 암반이 없었기에 라인 강을 따라 본 이남에 있는 드라헨펠스에서 조면암
축제에 참여한 수많은 쾰른 시민들은 환영식을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 건축할 당시 설치되었던 임시 구조물의 철거는 1881년 상반기에 시작되어 1883년에 완료되었다. 완공 당시 성당 석재의 색은 밝은 하얀색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보수
성당 건축을 위하여 사용된 석재들은 성질과 지어진 연도에 따라 풍화에 대한 저항력이 달랐다. 특히 성당 건축에 가장 많이 사용된 조면암은 암석의 경도가 약했는데, 결국 1904년부터 사암의 붕괴를 막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1904년부터 1939년까지 성당 건축 조합은 성당 내진의 버팀목을 교체하였다.
오늘날 성당은 산성비 탓인 암석의 부식과 매연으로 말미암은 변색 등 모든 환경오염 앞에 노출되어 있다. 성당 건축 조합은 성당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수십 년 동안 보수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종교의 관용
1960년대 독일은 노동력의 확보를 위하여 이주 노동자들을 받기 시작하였다. 특히 많은 터키 이주 노동자들이 독일에 이민을 왔는데 당시 독일에는 무슬림이였던 그들을 위한 이슬람1965년라마단의 마지막 날에는 400여 명의 이슬람 신도가 쾰른 대성당 내부에 양탄자를 깔고 라마단
서쪽 현관의 오른쪽 ‘베드로 현관’은 1370년에서 1380년 사이에 지어진 중세시대부터 사용된 원래의 현관이다.
현관의 양옆에 있는 석상 중 왼쪽의 3개와 오른쪽의 2개만이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형상이다.
19세기에 제작된 석상과 중세시대에 제작된 석상은
색상뿐만 아니라 질도 명확히 차이가 난다.
왼쪽 현관은 ‘동방 박사 현관’으로 1872년에서 1880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중앙 현관은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다.
남쪽 현관
왼쪽 현관부터 오른쪽 현관까지 각각 ‘우르술라 현관',‘수난의 현관’, ‘게레온 현관’이라 불린다. 석상들은 1847년 루트비히 슈반탈러네오 고딕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에발트 마타레 우르술라와 게레온은 쾰른과 깊은 관련이 있는 성녀와 성인이며 각각 쾰른에 있는 성당들의 명칭이기도 하다.
북쪽 현관
왼쪽 현관부터 오른쪽 현관까지 각각 ‘보니파티우스 현관’,
‘미하엘 현관’, ‘마터누스 현관’이라 불린다.
북쪽 전면부의 모습은 초대 교황인 베드로의 서제 사품 인도식으로 시작되는 쾰른 대성당의 역사와 관련되어 설계되었다.
마터누스 현관은 쾰른의 대주교 관할구의 기원을 재현하였다.
마터누스는 쾰른 최초의 신학생이자 최초의 주교가 된 사람으로, "쾰른 주교좌에 앉은 사도의 가르침"으로 비유되었다.
그러한 연유로 현관의 이름은 마터누스로 명명되었다.
교차랑 탑
제2차 세계 대전의 폭격으로 교차랑 상부에 있던 원레의 네오 고딕 양식의 탑은 파괴되어,1959년부터 1962년 사이에 아르 데코
2008년 10월부터 컴퓨터로 자동 조정되는 내부 및 외부 조명이 가동되었다. 80개의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기능을 통하여 다양한 조명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1000여개에 달하는 조명 기구로 밤을 밝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밝기를 통하여 여러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다. 성당 건설 조합은 약 1,200,000 유로에 달하는 유지비를 조명 운영에 사용하고 있다.
법적 소유주
현재 대성당 건물은 법적으로 공영 법인인
‘Hohe Domkirche zu Köln’(호에 돔키르헤 추 쾰른)의 소유이다. 따로 대표 기관을 소유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주교좌 성당 참사회를 맡고 있다.
주교좌 성당 참사회는 Hohe Domkirche zu Köln를 대리하며
교회 법을 대표한다. 주교좌 성당 참사회는 16명의 주교좌 성당 참사 회원과 교구장, 주교좌 성당의 주임 신부 2명의 지도자로 구성된다.
1년에 약 천만 유로에 달하는 특히 그중 3분의 2는 보수 및 유지 활동에 사용되는 쾰른 대성당의 유지비의 대부분은 성당 복권
통계
1881년에 촬영된 북쪽 탑의 첨점
총 길이
144.58 m
총 폭
86.25 m
신랑 전면부의 폭
39.95 m
주랑 내부의 폭
45.19 m
서쪽 전면부의 폭
61.54 m
북쪽 탑의 높이
157.38 m
남쪽 탑의 높이
157.32 m
탑 꼭대기까지 계단의 개수
533 개
알려진 종의 개수
11 개
가장 큰 종
Ø 3.22 m, 24.000 t
신랑 전면부의 높이
69.95 m
지붕의 높이
109.00 m
지붕 마루의 높이
61.10 m
신랑의 높이
43.35 m
측랑의 높이
19.80 m
성당 상부 구조의 총 넓이
7,914 m²
성당 스테인드글라스의 총 넓이
10,000 m²
성당 지붕의 총 넓이
12,000 m²
서쪽 전면부의 총 넓이
7,000 m²
성당 건축에 사용된 석재의
총 무게
300,000 t
좌석 개수
약 1200 개
입석 개수
약 2800 개
연간 유지 비용
10,000,000 € (127억 7,860만 원)
성당 주변
대성당은 독일의 국가와 민족적 문화유산으로서 완성되었으며
그 건축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더욱 독보적으로 빛내기 위하여
19세기에 주변의 낡은 건물은 모두 철거되어 광장과 녹지가 조성되었다. 성당 주변은 오늘날까지 발굴과 교통, 중앙역 주변의 상황으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새로운 건설 계획의 계기가 되고 있다.
과거 대성당의 안뜰이 있던 남쪽은 1824년에 호텔과 함께 줄지어 있던 집들이 철거되었고 광장과 새 호텔이 들어서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서쪽 정면부의 앞은 남쪽보단 규모가 작은 광장과 새로운 거리가 조성되었다. 대성당의 북부 대지는 로마 제국의 성벽이 서있던 자리로, 4.5m 정도 더 낮았기 때문에 남쪽과 동쪽의 구시가지와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