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 진솔과 아들, 한솔에게 이 편지를 쓴다.
아빠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조부모님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뵐 수 없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내 부모님이자 너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셨던 '현무행 장로님'과 '옥영주 권사님'도 모두 소천하신 상태라 우리 가문의 뿌리에 대해 더 늦기 전에 나의 버전으로 한 번은 정리를 해두고 싶었다.
그래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정리된 족보의 얼개를 너희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개괄적이고 단편적인 서술에 불과할지라도 이미 서른 살을 넘긴 장성한 너희들에게 가문의 역사와 맥을 글로써 짚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2023년 세밑에 이 글을 쓴다.
우리의 관향(본향)은 '연주'다.
족보에선 통상 '관향'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주현씨'다.
'연주'는 지금 북한의 '평안북도'에 있는데 김소월 선생님의 유명한 시, '진달래꽃'에도 나오는 고장이다.
시문을 보면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란 문구가 나온다.
바로 그 '영변'이 과거의 '연주'였다.
지금은 '평안북도 영변군'이지만 과거엔 연주성이 있었던,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위치나 거리상으로 보면 현재의 '평양'과 '신의주'의 중간 정도에 있는 지역으로서 전략적으로 가치가 큰 땅이었다.
그런 연유로 현씨는 북한에 약 70%, 남한에 약 30% 정도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의 자료를 구할 수도 없고, 기대하기도 어려운 형국이라 추정만 하고 있다.
2015년도 인구 총조사 통계청 데이터에 따르면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현씨'는 총 88,800여 명 정도였다.
고려 19대 왕, '명종'은 1170년에 즉위하여 1197년까지 28년간 재위했었다.
그 '명종' 시대에 문과 무를 두루 겸비한 걸출한 장수가 있었으니, 그 장군의 이름이 '현담윤'이었다.
그 분의 출생지가 바로 '연주'였다.
그 장군은 세 아들 중 큰 아들인 '현덕수'와 함께 '조위총의 난'을 평정하였고, '연주성'을 끝까지 지켜내 고려왕조의 평안을 도모했으며 사직을 보위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명종'으로부터 '문하시랑 평장사'라는 매우 높은 직위를 제수받았다.
고려시대엔 내각을 통괄하는 관직이 '문하시중'이었는데 그 '문하시중'의 바로 아랫직책이었으니 매우 높은 반열이었다.
아들이었던 '현덕수'는 '병부상서'에 올랐다.
그 '현담윤' 할아버지가 '연주현씨'의 시조며 태두가 된 것이었다.
우리 가문의 2대는 아까 언급한 대로 '현담윤'의 장자였고 '병부상서'를 지냈던 '현덕수'였다.
(글의 군더더기를 없애기 위해 각 이름 뒤에 할아버지란 단어를 넣지 않겠다)
'현덕수'는 외아들을 두었다.
그 외아들도 고려의 장수였고 이름은 '현원열'(3대)이었다.
'현원열'도 독자를 얻었다.
손이 귀했다.
이름은 '현경여'(4대)였고 '전객령'을 지내셨다.
그의 아들 '현흠(5대)'도 독자였다.
이 분은 '좌찬성'에 올랐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들을 여러명 두었다.
그중 장자였던 '현치용'이 6대였고 '도검의사사'가 되었다.
'현치용'의 장자였던 7대 '현옥량'은 '예의판서'를 역임했다.
8대도 큰아들이었는데 이름은 '현용무'였으며 문과에 급제하고 훗날 '사재감부령'을 지냈다.
'현용무'는 다시 외아들을 낳았고, 이름은 '현규(9대)'였으며 '고비군수'를 역임했다.
'현규'의 아들 중 3남, '현득리(10대)'가 '전주판관'이 되셨는데 우리 '종파'의 시조가 바로 이 분이시다.
여기까지가 우리 가문의 초창기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11대부터는 조금 더 짧고 간결하게 기술하겠다.
11대는 현분(독자), 12대는 현윤무(3남), 13대는 현기(4남), 14대 현덕민(차남), 15대 현손(독자), 16대 현상구(장자), 17대 현복원(장자), 18대 현언규(독자), 19대 현희진(독자)이었다.
19대에 이르러 비로소 남쪽으로 내려오셨고 충남 '천안 풍세'에 자리를 잡으셨다.
그래서 지금도 풍세에 우리 가문의 묘역과 족보편찬 본부 등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가까지가 우리 가문의 역사에서 중심부에 해당하는 세대였다.
20대부터 너희들 세대인 29대까지는 최근의 역사이니 출생연도까지 함께 기록하겠다.
20대 현재건(장자,1736년생), 21대 현진택(차남,1757년생), 22대 현영달(독자, 1806년생)이었다.
22대에서 한 줄을 덧붙이고 가자.
바로 이 분이 '천안 풍세'를 떠나 전북 옥구군 '나포면'(현재는 군산시 '나포면')에 터를 잡으셨다.
그리하여 23대부터 28대인 아빠(현기욱)까지 나포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었다.
23대 현흥동(독자,1850년생), 24대 현광옥(독자, 1870년생, 아빠의 고조부), 25대 현학주(독자, 1885년생, 아빠의 증조부)였다.
25대는 좀 더 상세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또한 가까운 '가문의 역사'이므로 간결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마.
왜냐하면 현재 아빠의 주된 친척들이 25대 '현학주' 증조 할아버지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학주 할아버지'는 석진, 석봉, 석철(26대), 석태, 석필, 이렇게 아들 다섯을 두셨다.
우리는 3남이셨던 '현석철'(3남, 1893년생)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이 분이 너희들의 '증조부'시다.
실제 함자는 '현자 태자 철자'였지만 족보엔 '현석철'로 등재되어 있다.
'항렬' 때문이었다.
'현태철 할아버지'는 딸 셋에 아들 둘을 낳으셨는데 '현양수'(28대, 1939년생)와 '현봉수'였다.
족보엔 '항렬'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문중에서 족보를 편찬할 때 각 세대별로 표기하는 '돌림자'를 지정하는데, 그것은 세대간의 상하관계와 서열을 나타내는 매우 중요한 '작명원리'였고 족보의 '등재원칙'이었다.
할아버지의 실제 성함은 '현무행'이지만 족보엔 '현양수'로 기록되어 있다.
27대의 항렬은 모두 '수'자였으니까.
예컨대 동수, 용수, 양수(현무행), 봉수, 익수, 명수, 영수, 중수, 병수, 성수, 한수 등이었고 이 분들이 아빠의 5촌이셨다.
'현무행 할아버지'는 3남2녀를 낳으셨다.
기석, 기욱(28대, 1964년생), 기환이었고 너희들 고모 두 분은 족보에 오르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혈족과 씨성을 중심으로 가문의 구성원을 기록했던 족보엔 결혼 후에 '시댁귀신'이 되어야만 했던 여성들은 등재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자 관례였다.
지금은 족보의 존재론적 가치가 많이 퇴색되었고 그 의미도 날이갈수록 사라지고 있는 형국이니 여성들의 등재여부에 너무 의미를 두지 말고, 다만 너희들의 뿌리와 가문의 뼈대만 잊지 않으면 된다.
28대 '현기욱'은 '현진솔'(29대, 1992년생), '현한솔'(29대, 1993년생)을 낳았고 현재 우리 가문의 '대동보'에는 29대인 너희들까지 기록되어 있다.
28대는 모두 '기'자 돌림이었다.
29대는 항렬이 '엽'자여서 재엽, 승엽, 일엽(현한솔), 창엽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제 너희들이 결혼하여 자식을 얻으면 걔네들이 우리 가문의 30대 손이 된다.
30대 손이라고 생각하니 내 가슴이 다 뭉클하구나.
우리 가문의 '대동보'에 역사적인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조상을 모른다고 해서 사는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잘 숙지하고 있거라.
자신의 뿌리를 잘 알고 있고 그 가문의 전통과 가풍을 잘 유지하면서 각자의 삶을 뜨겁게 엮어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신 부모님과 그 부모의 부모님, 즉 조상님들에 대한 후손으로서의 기본 예의이자 책무라고 믿는다.
아빠의 생각이 너무 고리타분한 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흔들림 없이 그런 생각을 품은 채 살아왔고, 앞으로도 내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그런 삶의 원칙엔 결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조상이 안 계셨으면 우리도 없었다.
'현담윤 할아버지'를 시조로 모시는 '연주현씨', '전주 판관공파' 29대 손인 '현진솔', '현한솔'.
너희들의 앞길에 조상님들의 음덕과 가호가 늘 함께 할 것을 믿는다.
젊다는 건 도전하는 것이다.
각자의 삶을 열정적으로 개척하기 바란다.
사랑한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