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행
이른 아침, 산 아랫마을에서 들려오는 개 짓는 소리에 잠을 깼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상큼한 공기가 얼굴에 와락 끼쳐 들며,
그나마 눈꺼풀에 매달려 있던 선잠마저 달아나 버렸다.
공기만 잘 마셔도 장수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듯한데,
지리산 자락을 끼고 있는
이곳 일성콘도에서의 공기는 최상급의 맛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갑자기 콘도 앞의 조그만 개울을 흐르는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어젯밤에는 미처 듣지 못했던 물소리를 이른 아침에 듣는 기분은,
맑은 공기와 함께 전원(田園)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혜였다.
갈수기임에도 제법 물소리를 내며 돌 틈을 비집고 흐르는 것을 보면,
지금 내가 머무는 곳이 골 깊은 지리산 자락임을 새삼 느끼게 해 주었다.
개울 건너 계단식 논밭이 이어진 곳에는 전형적인 시골집들이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골안개인지 밥 짓는 연기인지 모르겠지만,
마을 집집이 지붕위로 엷은 구름 띠를 두르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관광버스 한대가 서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것을 보면 무슨 나들이 행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그래서 이른 아침부터 개가 짖어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젯밤에는 비록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지만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느때 같으면 요즈음의 놀이 문화가
그러하듯 밤새 술을 마시거나 ‘고스톱’을 치거나 할 터인데,
우리 일행은 오늘 지리산 단풍놀이를 위해
일찍 일어나기로 약속을 했던 것이다.
이번 공무원 사회복지사 모임은
지리산 일성콘도에서 갖기로 오래전에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어떤 분은 서울에서 구경하기 힘든
‘호박떡’이며, ‘배’, ‘복분자 술’을 가져오시고,
또 다른 분은 ‘인삼주’에다 ‘홍삼 엑기스’까지 챙겨 오셨다.
또, ‘캔맥주’, ‘산사춘’, ‘치즈케익’... 등등.
처제의 결혼식 피로연에 빠지면서까지 참석하신 분도 계시고,...
아무튼 책임감 하나는 모두들 공무원다웠다.
아니,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기꺼이 먹 거리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마음들이 ‘진짜 사회복지사’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알뜰하고 부지런한 학우님 덕분에 전혀 생각지도 않게
콘도에서 아침을 지어먹고(당초에는 매식 할 예정이었음)
지리산 노고단을 향해 출발했다.
노고단을 향해 가는 길은 환상의 드라이브코스였다.
꾸불꾸불한 산길을 따라 오를 때마다,
탄성이 저절로 나올 만큼 이 가을은 지리산을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수놓고 있었다.
아마도 어느 ‘달력속의 가을 사진’이거나,
‘영화 속의 가을 풍경’이련만, 잠시 쉴 틈 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량 행렬인지라 사진에
담지 못함이 못내 아쉬웠다.
차량은 노고단 휴게소를 눈앞에 두고,
늘어난 행락차량들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우리 일행은 노고단 전망대에 들를 생각을 접은채
다음 목적지인 ‘화엄사’로 향했다.
사실 서울에서 지리산으로 떠날 때,
‘화엄사’를 들려 보라는 직장 동료의 권유가 있었던
터라 내심 화엄사 구경이 먼저였던 것이다.
어제는 저녁시간이 좀 이르게 도착하여
콘도 인근에 있는 실상사에 다녀왔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작고 산속이 아닌
마을 인근의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된 석조물과 이끼 낀 기왓장은
고찰의 풍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는데,
단청을 하지 않아 왠지 낡고 쇠락해 보이는
그 사찰이 고풍스런 옛 맛을 느끼기에는 손색이 없었다.
실상사는 서기 828년 신라 흥덕왕때
창건한 대표적인 호국사찰이라고 한다.
또, 보광전 법당에 있는 범종에는 일본 열도가
그려져 있는데 종을 칠 때는 입본 동경을 쳐
일본의 야욕을 저지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부흥을 기원한다고 하는 호국 사찰이며,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폐하고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안내지는 적고 있었다.
지리산 ‘화엄사’는 실상사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규모도 엄청나게 클 뿐만 아니라,
단풍과 어우러진 지리산 속의 사찰은
그 아름다움과 고풍스러움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감탄과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화엄사는 544년(백제 성왕)에 창건했는데 사찰이름은
화엄경(華嚴經)의 화엄 두 글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역시 사찰은 옛 모습을 그대로 지녀야 제대로
우러나는 멋스러움이 있다.
화려하게 뜯어고치고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몇몇 유명사찰을 보며 안타까워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화엄사는 나름대로 옛것을 많이 지켜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부터 절 입구까지는
사찰 앞을 흐르는 개울가의 바위를 징검다리 삼아 건너갔다.
각황전, 대웅전, 만월당...이라거나 곳곳의 석등과 석탑은
여느 절이면 늘 보던 것들이라 그렇다 손치더라도,
사천왕문을 지나 종루의 벽을 타고 넝쿨진 담쟁이덩굴,
구층각 가는 길에 만났던 대나무 숲길,
천불전 앞의 푸르딩딩한 모과를 주렁주렁 달고 섰던 모과나무,
4사자석등 앞의 늙은 소나무, 하얀 뼈대를 드러낸채 서있던 나목,
정오를 알리는 범종소리, 날렵한 사찰 지붕 처마 끝으로
바라보던 청명한 가을 하늘,
산사를 에워 싼 지리산 자락의 불타는 단풍....
나는 필름 한통이 다 소진되도록 카메라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지리산 화엄사에서 오랜만에 가을 정취에 흠뻑 취했었다.
귀경길 남원 가는 길목에서 ‘우리밀 수제비’로 점심을 먹었다.
우리 일행은 이 자리에서 다음번 모임을 논의 했는데,
내년 4월 넷째 주(토요일)에 서울 잠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아무래도 교통이 편리할뿐더러, 인근에 사시는 학우님이
‘롯데월드 관광’이라든지, ‘올림픽 공원의 산책’,
‘신장개업한 대형 찜질방’ 얘기가 주효한 탓인지로 모를 일이다.
어쩌면 스쳐 갈 수도 있는 우리의 만남이,
서로에게 좋은 의미를 주고 또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누가 나를 즐겁게 해주길 바라기 전에,
나 스스로 즐거움을 찾을 줄 아는
삶의 여유와 풍류를 아는 생(生)이 되었으면...
그런 의미에서 이번 지리산 가을 여행은
귀한 시간만큼이나 아주 진하고 즐거웠다.
내년 이맘때쯤 나는 다시금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취하리라
마음먹으며 만추(晩秋)의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소운>041025
이상은 소운님의 글이었습니다.
첫댓글 머리구님 카페 방문해주셔서 감사하구요 우리 언제 만나서 오해는 풀자구요... 글고 나 사실 팬이 넘 많아. 오해하지마~~~
가지 못한 회원을 위해 상세히 기행기를 올려주셔서 넘넘 감사드려요 음악도 가을분위기에 딱 맞는거 같구요~~~
머라구님 반갑구요 다음에 소주 두잔이상 먹을 수 있을때 한잡합시다.요즘 좀 사정이 있어서
오늘 한잔하고 카페에 들렀는데 노래소리는 좋은데 글이 너무 길어서 다음에 다시한번 차분히 읽어볼랍니다
화엄사랑 청학동에 신비한 가을의 풍경들이 주절이주절이 열려 있는 모습~~~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데.... 반가워요
머라구님! 에이반 삐반 통합해서 모임을 가져도 될텐데 너무 당초교육때부터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기회가 없던것이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