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서 두 그릇
吳 岐 煥
바람마저 숨을 멈춘 듯 무더운 여름날 오후였다. 덕수궁미술관에서는 ‘아시아 리얼리즘’전이 개최되고 있었다. ⟨아시아 리얼리즘⟩전을 통해, 아시아 여러 나라 작가들이 19세기 말부터 1980년대에 걸친 서구열강의 침략에 의해 혼돈과 희생으로 얼룩졌던 뼈아픈 근대화과정을 미술로 표현하고 있었다. 공감이가는 전시였다. 좀 무거운 마음을 이끌고 덕수궁 미술관을 나와서 식당으로 갔다.
그 자리에서 40여 년 동안이나 영업을 하고 있다는 삼계탕 집이다.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집을 가끔 찾는 것은 음식 맛도 일품이지만 1인용 탁자가 준비되어 있어서 혼자 들르기 편한 집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집은 중병아리 정도의 국내산 닭을 사용해서 맛이 뛰어나다는 입소문을 타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집이라고 한다.
식사를 막 시작하는데 문이 열리면서 젊은 여인이 아이 둘을 앞세우고 들어왔다. 내가 앉은 탁자 건너편에 앉았다.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엄마는 5살쯤 돼 보이는 딸아이와 같이 앉고, 건너편 의자에는 8살쯤 돼 보이는 아들아이를 앉혔다. 젊은 엄마는 시체 여인들처럼 요란스러운 차림도 아니었다. 성형한 얼굴도 아니었다. 수수했다. 아이들도 엄마처럼 수수하고 편한 차림으로 얼굴이 해맑아보였다. 그늘진 곳이 없었다. 녀석들 손에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신의 손, 로댕⟩전 팸플릿이 들려 있었다. 방학 중에 두 아이에게 자주 볼 수 없는 로댕 전을 보여주고 늦은 점신을 먹으러 온 것 같았다. 파스타나 햄버거 집을 고집하지 않고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이 신통해 보였다.
식사를 반쯤 했을 무렵, 그들 세 식구 식탁에 식사가 놓여졌다. 엄마 쪽에 한 그릇 그리고 건너편 아들 쪽에 한 그릇, 모두 두 그릇이었다. 사내아이는 뜨거운 음식을 열심히 먹고 있었다. 엄마는 작은 그릇에다가 한 마리래야 큰 닭 반 마리도 채 안 되는 것을 둘로 나눠서 딸 앞에 놓아주었다. 딸아이도 제 오빠처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하기야 오후 2시가 다 되었으니 시장하기도 할 시간이었다. 눈길이 또 그쪽으로 갔다. 엄마는 닭다리를 딸아이 그릇에 얼른 놓아주었다. 딸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집어 들었다. 닭다리 두 개를 딸아이가 다 먹는 셈이었다.
문득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라는 수필이 떠오른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 없는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 일이다.’그 수필은 이렇게 시작된다.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어머니가 고깃국을 먹자고 한다.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먹으면 귀에서 고름이나오는 어머니가 “더울 때 일수록 고기를 먹어야한다”며 고깃국을 먹자고 한다. 아들을 위함이다. 설렁탕을 시켜놓고 고기 건더기는 아들 투가리에다 건져 넣는다. 그러다가 주인아저씨를 불러 소금을 많이 넣어 짜서 그러니 국물을 더 달라고 한다. 추가로 가져온 국물을 아들 그릇에 부어준다. 아들은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며 ⟨눈물은 왜 짠가⟩라고 중얼거린다.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 마음은 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또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엄마는 살코기를 또 딸아이 그릇에 슬쩍 넣어준다. 5살짜리보다 덩치로 보나 나이로 보나 몇 배는 더 먹어야할 엄마가 슬쩍슬쩍 알게 모르게 딸아이 그릇에 넣어준다. 다 넣어준다. 함민복의 어머니처럼. 절약하며 쪼개고 또 쪼개 쓰면서 미래를 예비하는 어미의 몸짓이었다.
일본작가 구리 료헤이가 쓴 동화⟨우동 한 그릇⟩이 또 떠오른다.
섣달 그믐날 늦은 밤에 6살과 10살쯤 돼 보이는 사내아이들을 앞세우고 식당에 들어섰다. 아주머니는 머뭇머뭇 말했다. “저…우동…일인 분 만 주문해도 돼요?”라고. 우동이 한 그릇이 식탁에 놓이자 세모자는 맛있게 먹었다. 어머니는 막내에게 큰애는 어머니에게 양보하다가 아까운 국수를 흘리면서. 다음 해에도 그 다음 다음해에도 그들은 식당에 와서 우동 한 그릇을 나누어 먹고 갔다. 한해를 보내는 송년회식 이었다. 그 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주인은 기다렸다. 식당을 수리하면서도 그들이 앉았던 식탁은 바꾸지 않고 그날이오면 ‘예약석’ 표지판을 놓고 기다렸다.
그들이 다녀간 지 이십여 년이 다돼가는 섣달 그믐날 밤 식당 문을 닫을 즈음, 키가 훤칠한 청년 둘이 노모를 앞세우고 들어섰다. 실내를 두리번거리다가 낡은 식탁에 앉으면서 우동 세 그릇을 주문했다. 청년이 주인 앞으로 가서 인사를 드린 뒤, 자기들이 우동 한 그릇을 시켜서 셋이 먹던 바로 그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지금은 저와 동생이 의사가 되었다고 소개했다. 그때 우동 한 그릇을 시키면 하나를 더 삶아서 넣어 주시는 것을 저희들은 다 알고 있었다면서 우동 한 그릇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나도 그랬다. 어머니는 밥상을 마주하면 늘 배가 아파서 식사를 거르는 분으로 알았다. 어머니는 생선살보다 머리를 더 좋아하는 분으로만 알았다. 어머니는 자기 입에 들어갈 음식을 자식 입에 넣어주는 분으로만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머니란 자식 입에 밥 넘어가고, 머릿속에 글 들어가고, 쑥쑥 크는 것을 먹고사는 사람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젊은 엄마와 어린 아이 둘이 삼계탕 두 그릇을 나누어 먹으면서, 자신의 몫을 딸아이 밥그릇에 넣어주는 것을 힐금힐금 바라보며 함민복 시인을, 구리 료헤이의 동화를, 내 어머니를 떠올려 본다. 어머니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건너편에 앉아 식사중인 그들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 주면서 식당을 나오다가 뒤돌아본다. 갑자기 손자 녀석들이 보고 싶어진다. 길가 의자에 앉아 손 전화를 꺼내 문자를 보낸다. “잘 들 지내지. 주말에 만나자 … ” 라고.
2010.8.11. (14.4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