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 준비.
나는 그동안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여행지조차 둘러보지 못했다는 핑계를 들어 오로지 국내여행을 고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학을 맞아 막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해외여행을 떠나기로 의견을 모았다. 때문에 여행일정이나 경비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검색한 결과, 방학을 전후로 가격이 30% 정도 상승한 것을 알고 망설였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학교를 결석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므로 다소의 부담이 있더라도 여행을 떠나기로 과감하게 결정했다.
다음은 어느 여행사를 선택할 것인가로 고심을 하던 중, 비슷비슷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국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올려놓은 후기 글을 참고로 가격대비 만족도를 조사하던 중에, 노란 풍선이라는 중견 여행사가 가장 우선순위에 꼽혔다. 여권을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군 지역에서는 대략 열흘정도가 소요되었다. 가격은 일인 오만원정도인 것을, 시간이 급박한 관계로 3인 20만원에 여행사에 일임하였다.
처음에는 가격이 비교적 저렴한 북경을 2박 3일 일정으로 3인 75만원에 예약을 했다. 하지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곳 기온이 영하 20도를 오르내린 다는 것을 알고, 추위를 끔찍이 싫어하는 나로서는 북경을 포기하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 나섰다. 다시 여러 곳을 검색하는 중에 2~3년 전부터 급부상한 중국 해남도가 눈에 띠었다. 해남도는 중국에서 유일한 열대성 지역으로 현재 기온 영상 22도, 한낮에는 해변에서 수영을 즐길 수 있으며, 밤이면 야자수 그늘에 설치한 흔들의자에 몸을 뉘고 하늘에 가득한 별빛을 감상할 수 있다. 때문에 얼음이 꽁꽁 어는 국내 날씨에 비하면 천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박 5일, 일정으로 3인 140만원에 계약을 하였으며, 이때 필수 옵션으로 가이드, 운전기사, 팁을 포함 ‘닥터 피시.’를 한다는 조건으로 3인 22만원이 추가 되었다. 군위서 동대구까지 버스와 택시를 이용, 그 다음은 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 국제공항에 도착을 하니 시간이 4시간 30분이나 소요되었다. 뿐만 아니라, 3인 경비가 20만원이나 들었으니 완전히 계산 착오였다. 때문에 돌아오는 길은 인천 공항에서 곧바로 리무진 버스에 타고 구미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군위에 도착하니 여행 시간이 세 시간으로 단축될 뿐만 아니라 비용도 십 만원 안쪽으로 크게 절감 되었다.
저녁 6시30분, 여행사 관계자를 만나 함께 가는 일행이 우리까지 11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치고 저녁9시에 해남도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고도 11000미터, 시속 750킬로라는 엄청난 속도로 4시간 50분을 비행하여, 한국과 그곳은 한 시간의 시차가 발생하기 때문에 새벽 한시에 도착한다고 하였다. 막내와 나는 하루 종일 차에 시달렸음에도 피곤한 줄 모르고 기내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데, 아내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해남도에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자 비행기 안은 점차 더워지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갑작스레 고도를 낮추는 바람에, 미처 적응을 못해 고막이 터져나갈 것처럼 아팠다. 다행히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안도하는데 마중 나온 가이드가 반소매 차림에 환하게 웃음 지으며 반겨주었다. 우리는 그때까지도 겨울옷을 입었던 것을 깨닫고 얼른 코트를 벗어 가방에 챙겨 넣고 일행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우리가 묵을 숙소까지는 불과 오 분 거리였지만 야자수 가로수가 즐비한 이국적인 풍경 때문인지 가슴속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숙소는 호텔이 아닌 리조트였다. 호텔은 내부 시설이 화려한 반면 리조트는 풀장을 갖춘 정원이며, 닥터피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물고기가 다가와 몸에 붙은 각질을 제거해준다.>를 비롯하여 아기자기 하게 꾸며 놓은 것이 이색적이었다. 물론 야자수 나무에 메달아 놓은 흔들의자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아침 식사는 7시부터 9시까지인데 뷔페식이라 이곳이 전혀 중국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맛도 괜찮았다. 오전 11시 가이드를 따라 본격적으로 여행길에 나섰다.
2. 여행 첫째 날,
해남도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처럼 자유경제 특구로 지정 된지 10년 가까이 된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지지부진 하다가 본격적으로 개발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한 5년 전부터라고 한다. 때문에 이곳은 굳이 중국화폐나 달러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가계서 한국 돈을 사용할 수 있으며 해남도를 찾는 관광객중 절반 가까이가 한국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워가 막강했다.
도로는 7~80년대 한국을 돌아보는 것처럼 어수선하면서도 한가로웠다. 달리던 자동차가 심심찮게 속도를 줄이는 이유는 다름 아닌 길을 가로막고 서있는 소떼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의 소들은 풀어놓고 방목을 하는데 거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밤이 되면 스스로 집을 찾아온다고 하였다. 여유로움도 잠시뿐, 시내로 접어드는 길은 오토바이와 차량들로 뒤엉켜 혼잡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호등이 없다는 것이 신기했다. 우리나라 같으면 차가 뒤엉켜 사고가 날 법도 한데 짜증내는 일없이 여유롭게 잘도 피해 다닌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70년대 말쯤에 사라졌던 세발 자동차가 이곳에서는 아직도 이동수단으로 훌륭하게 쓰인다는 것이다.
도시의 풍경은 한마디로 과거와 현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논에서 모를 심다가 나온 것처럼 다리를 둥둥 걷은 농부와,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걸인에서 부터 양복을 쫙 빼입은 신사까지 제각각이었다. 하늘높이 까마득하게 솟아있는 빌딩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야자수 잎으로 지붕을 덮어 금방이라도 찌그러질 뜻한 낡은 집들이 나타난다. 잘은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발전을 거듭하던 70년대 서울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공부나 놀이에 열중해야할 막내또래의 아이들이 얼굴이 까무잡잡하게 타도록 과일 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1달러를 외치는 모습은 가슴이 아팠다.
가이드의 안내로 해변을 찾은 나는 한 순간, 내 눈을 의심하였다. 이곳이 과연 중국인가 할 정도로 개방적이며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너무나 여유로웠다. 어떤 서양 여인은 부레지어를 벗고 수박만한 가슴을 출렁이며 해변을 뛰어 다녔다. 하지만 누구하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경찰과도 같은 공안들조차 웃음으로 반기며, 곁눈질로 바라볼 뿐이다.
해남도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열대성 기후를 자랑하는 곳이다. 때문에 겨울이면 이웃한 러시아에서 한꺼번에 몇 백 명씩 관광객이 몰려온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오년 전부터 중국여행객들이 심심찮게 보이더니 이제는 이곳 여행객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상황이 좋아 졌다고 한다. 이곳을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조건이 비슷한 제주도를 찾게 만들 수는 없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외환 은행에서 100만원을 중국 돈으로 교환했는데 8600위안을 받았다. 쉽게 생각하면 중국 돈 86원이 우리나라 돈, 1만원과 같다는 뜻이다. 나는 한국에서 우리나라 돈의 가치가 중국 돈보다 열배 이상 간다는 말을 들었는데 해남도에서 사용해보니 2:1 정도 이다. 그만큼 같은 중국이라도 해남도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참고로 귤 4개를 샀는데 중국 돈 15원 <우리나라 돈 1900원정도>을 달라고 하였다. 오히려 마을 슈퍼에서 살 때 보다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다.
때문에 이곳을 찾는 중국인 관광객은 나름대로 생활수준이 중 상위권에 속한다고 보아야겠다. 그 때문인지 중국인들은 타 민족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비록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막내와 물놀이를 즐기는 내 곁에 다가와 친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또한 대부분의 여자들이 눈이 부시게 살결이 부드러웠으며 몸매가 날씬했다. 다만 우리나라에 비해 얼굴이 약간 둥글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서 막내와 함께 보트를 타는데 일인 2만 5천원을 주었다. 내친김에 바나나 보트까지 연이어 탔다. 나는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많은 말을 막내와 함께 나눌 수 있어 좋았다.
해변에서의 즐거움을 뒤로하고 침대와 베개를 생산하는 고무공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고무는 나무에서 채취하는 자연산이라 건강에 아주 좋다고 하였다. 마치 이런 베개를 사용하면 자신처럼 피부 미인이 될 수 있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일정도로 주인인 뜻한 여자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것도 일종의 마케팅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마침 일행 중에 오래전부터 사용했다는 사람이 있어 아내도 베개를 세 개씩이나 샀다. 가격은 우리 돈 22만원, 침대 시트는 무려 64만원이나 한다는 말에 다음을 기약했다.
저녁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이동을 하다가 여유 시간을 활용해 중국 전통 시장을 찾았다. 수많은 인파가 시끌벅적한 가운데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목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TV에서 보았던 이름조차 생소한 과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며 난전이나 노점상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한번은 연세 많으신 노인이 깡통을 내밀었는데 하필이면 아내가 지갑을 가지고 있어 도움을 못 드렸다.
하지만, 나와 함께한 일행은 경험이 많아 미리 1위안, 5위안짜리 잔돈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가 적당한 때마다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 졌다. 시장을 둘러보는 중에 이곳 상품을 한국에 가져와 팔면 벌이가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종류가 다양했으며 가격에 비해 뛰어난 상품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시간을 두고 차근히 살펴보면 좋은 아이템이 떠오를 법도 하건만, 일행들이 기다려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저녁을 먹으러 간곳은 전통 중국식 식당이었다.
중국 식당은 한국 식당과 달리 멋과 공간을 활용해 운치가 있었다. 오래된 목재를 이용해 고풍스런 분위기였으며 꽃 한 송이, 촛불 하나에도 정성을 들여 마음을 안정 시켰다. 식사는 달고 기름진 음식이 대부분 이었으며 여행을 많이 했던 일행이 고추장에 김까지 따로 준비를 하여 즐거웠다. 식사 때마다 항상 차를 따라주는데 향기가 좋았다. 중국인 들은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서도 차를 자주 마셔주기 때문에 비만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늦은 시간에 숙소에 돌아오니 오색 불빛아래 풀장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으로 들끓었다. 우리 가족은 흔들의자에 몸을 뉘어 이름 모를 꽃을 감상하며 하루를 보냈다.
3. 여행 둘째 날.
아침 11시 까지는 전날과 다름없이 자유 시간 이었다. 때문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을 즐겼다. 도로를 나설 때면 오토바이에 사람을 태울 공간을 마련하고 해남도 일주를 권하는 사람들로 즐비하였다. 일종의 무허가 택시인 셈이다. 나는 호기심이 일었지만 만약 사고가 나면 보험이 안 된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던 터라 한참을 망설이다 포기하고 말았다.
점심을 먹고 인근에 위치한 소수민족이 생활하는 마을을 찾았다. 책에서나 TV에서 많이 보았지만 직접 접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마음이 설래인다. 자연을 벗 삼아 한없이 여유로운 사람들이라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도 변화의 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는지 물질문명에 신음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한 예로 여자나 아이들은 전통 복장을 하고 수공예품을 팔기위해 1달러를 외치며 애를 쓰는 반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할 일없이 담배를 피우며 빈둥거리는 모습이었다. 물론 일부의 사람들은 전통 민속춤을 공연하며 자신들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마저도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을 창살 없는 우리 속에 갇혀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앞선다.
다음 코스는 소 동천 이었다. 마치 제주도의 용 바위나 주상절리처럼 해변 가에 위치하며 주변 경관을 세심하게 잘 가꾸어 놓았다. 바닷물이 깨끗할 뿐만 아니라 야자수 가로수가 즐비하여 마치 열대지방을 걷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제주도처럼 곳곳에 선인장 밭이 즐비하여 눈길을 끌었다.
마지막으로 악어 사육장을 찾았는데 악어 입에 머리를 넣는 묘기는 너무나 흔하여 흥미가 없었다. 다음이 호랑이 사육장인데 이 역시 서커서단에서 자주 공연하는 것이라 별로였다. 다만 코끼리 쇼는 관중과 코끼리가 함께 어울릴 수 있어서 좋았다. 해남도는 열대성 기후라 12월부터 2월 말까지 관광객이 들끓고 나머지 기간은 여행객이 별로 없단다. 때문에 이곳서 사육하는 수 백 마리의 호랑이와 코끼리가 굶주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슬펐다.
잠시 시간을 내어 전신 맞사지 하는 곳을 찾았다. 그런데 웬일, ㅎㅎㅎ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이런 황당한 일이······, 남자들은 제쳐두고 여자들끼리만 달랑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어이쿠!! 덕분에 나를 비롯하여 일행 중 남자들은 아이들을 보살피느라 애를 먹었다. 이유는 굳이 설명을 안 해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전에 여자들끼리 남자들을 골탕 먹이기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쓴 웃음을 지었다.
저녁 시간, 내일이면 떠난다는 생각에 밤늦도록 정원에서 즐거이 놀았다. 한편으로 겨울마다 이곳을 찾아, 봄이 올 때까지 살다가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마지막 날,
그동안 장만했던 선물이며 가방을 챙겨들고 리조트를 나섰다. 이른 경우 머무는 동안 청소를 위해 수고한 분을 생각하여 베개 밑에 지폐를 놓아두었다. 아내와 막내가 한참을 웃는다. 나는 함께한 가이드와 동료들을 바라보며 이번 여행은 참으로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 후기를 읽어 보면 가끔 마음 나쁜 가이드 때문에 여행일정을 망치고 돌아오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를 담당했던 윤 봉란, 가이드는 마치 한 가족처럼 자연스럽게 대할 뿐 아니라 혹여 피해라도 입을까봐 온갖 걱정을 다한다. 물건을 살 때면 자신의 일처럼 적극적으로 나서 보다 싼 가격에 흥정을 들었고 여행에 포함된 옵션일 지라도 필요치 않으면 절대로 권하지 않았다. 때문에 여행 초기에 들어간 경비와 개인적으로 구입한 물품 외에는, 억지 구매한 물품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함께 한 일행은 여행에 관해서는 모두가 고수였다. 때문에 다음 여행에 대해서 유익한 정보를 알아 두었다.
점심을 먹으러 간곳은 북한 식당이었다. 북한 전통 한정식과 그 유명한 평양냉면을 맞볼 수 있었다. 때마침 종업원으로 보이는 뜻한 처자가 무대 위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귀에 익은 ‘반갑습니다.’ 노래를 열창한다. 얼마나 음성이 풍부한지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한쪽 벽면에 전시되어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 사진이 특이하게 눈길을 끌었다. 식사가 끝나자 종업원은 기다렸다는 뜻이 먹다 남은 음식을 죄다 모았다. 손님상에 다시 올리지 않는다는 단호한 의지다. 이런 점은 우리 한국에서도 배울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까 음식을 먹고 나니 북한 상품 선전이 있었는데 좀 전의 일로 믿음이 간다는 생각에 10만원을 주고 자연산 상황버섯을 샀다. 우황청심원은 가격이 무려 64만원이나 하였으며 홍삼은 10만 원정도이다. 먹어보니 품질이 뛰어났다. 나는 그동안 남남북녀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곳에서 직접보고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얼마나 피부가 보드랍고 뽀송뽀송한지 아내가 부러워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식사 후에 처음 찾은 곳은 원숭이 섬이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넘는데 경치가 장관이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푸른 바다가 끝없이 일렁이며 그 유명한 수상 가옥들이 즐비하였다. 또한 이곳은 진주의 생산지라 값싸고 질 좋은 진주를 싸게 구입할 수 있다는 말에, 마음이 혹한 아내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함께한 일행이 진주는 여자의 눈물이라는 이유로 지금은 별로 찾는 이가 없다는 말에 이내 포기하였다.
이곳 섬에는 원숭이들이 삼개 조직으로 나뉘어 있는데 일 년에 한 번씩 원숭이 임금을 뽑을 때는 전투가 치열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사람들만 권력에 집착하는 줄 알았더니 동물들도 똑 같다는 말을 듣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은 원숭이 들이 짝짓기 시기라 함부로 쳐다보거나 손가방, 기타 카메라처럼 소지품을 조심 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잘못하다가 원숭이한테 봉변을 당한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말을 들었다,
고놈들 참!!! 원숭이 쇼를 구경하는 중에 입에서는 연방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염소 등에 올라타 외줄을 걸어가는 모습에는 박수가 절로 나왔다. 그것보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원숭이와 이곳 주민이 엮어내는 한편의 퍼포먼스이다. 능청스런 연기에 구경하는 내내 웃음을 자아냈다. 제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인이 챙긴다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상술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숭이 섬을 벗어나 털털거리는 버스에 몸을 실고 필수 옵션으로 정해진 닥터 피시를 받으러 갔다.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어마어마한 규모에 놀라 떡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한꺼번에 몇 천명이서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수영장이며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놓았다. 일행과 함께 수영복을 갈아 입고 커다란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물에 잠수하려던 나는 예상외로 물이 뜨뜻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물고기한테 치료를 받는다더니 잘못 찾아왔나? 이정도 온도면 파만 숭숭 썰어넣어도 저절로 매운탕이 되겠는데.”
하지만, 궁금증도 잠시뿐, 어느새 새카맣게 몰려온 물고기들이 내 몸을 간질이기 시작했다. 원래 열대성 어종이라 어지간히 더운 물에서는 걱정 없다고 하였다. 한편으로 그동안 함께하던 일행과 벗은 몸으로 앉아 있으려니 쑥스러운 마음에 막내와 함께 얼른 수영장으로 달아났다.
“지금부터 돌멩이를 찾아온다. 실시.”
막내는 구령을 복창하고 힘차게 물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살려 달라고 애원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직 수영에 수자도 모르는 놈을 제 키보다 깊은 물에 돌멩이를 던져 놓았으니······,
“얌마, 처음에는 다 그렇게 배우는 거야. 죽기 실으면 팔 다리를 열심히 휘저어.”
막내는 한 열댓 번, 물을 마셔 올챙이처럼 배가 불룩해지자 어느 틈에 물에 뜨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덕분에 조금씩 멀리 돌멩이를 던져놓고서 아리따운 처자들의 벗은 몸매를 마음껏 감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중, 일을 비롯 하여 러시아처자, 미국처자, 쭉쭉 빵빵 흑인미녀까지, 눈앞에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는데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돌아올까 싶은 마음에 바쁘게 눈동자를 굴렸다.
행복한 시간도 갑작스런 아내의 등장으로 마감하고 다음 여행지로 출발하였다. 중국은 오랜 옛날부터 차 문화가 발달한 나라다. 얼마 전 KBS 2TV에서 방송한 ‘차마 고도를 가다,’ 라는 프로를 빼놓지 않고 보았는데 인간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나긴 여정을 카메라에 담아 감동적이었다.
차마 고도란 말 그대로 중국의 차를 가지고 티벳으로 넘어가서 그곳에서 나는 품질 좋은 말들과 바꾸어 온다는 뜻으로 시간이 허락 한다면 꼭 다시 한 번 보았으면 좋겠다. 때문에 아내는 이곳에서 중국에서 생산된 각종 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맛을 음미하며 8년산 보이차를 우리 돈 6만원에 사고 찾잔 한 세트를 따로 구입 하였다.
저녁식사는 일인당 2만 5천 원씩을 개인적으로 부담하여 해남도에서 유명하다는 해산물 식당을 찾았다. 근사한 분위기에 손님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릴 정도로 많아 기대를 많이 하였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생각 외로 가격이 비싸다는 느낌에 실망이 앞섰다.
비행장을 가는 길에 해남도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는 록회도에 올랐다. 도시 근교에 위치한데다 시내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가로등이 이곳에서는 밤늦도록 빛났다. 다정한 연인들이 손을 잡고 길을 걷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많은 청춘남녀가 이곳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이유는 록회도의 전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던 이족의 청년은 사슴을 발견하고 끝까지 쫓아갔다. 이족의 청년을 피해 도망치던 사슴은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음을 깨닫고 때마침 시위를 당기는 이족의 청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사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어여쁜 처녀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고 한다. 둘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많이 낳아서 지금처럼 이족이 번성했다고 전해진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사슴‘록’에 돌아볼 ‘회’자를 써서 록회도라 불렀다고 한다.
“이족은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이 특이하지요. 결혼을 앞둔 처녀총각은 하루해가 저물고 어둠이 밀려오는 때를 기다려 곱게 단장하고 집을 나선답니다. 그런 다음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온 가족에 이야기를 노랫말로 지어 밤늦도록 부르지요. 이때 여자는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시집가서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속설 때문인지, 밤새도록 구슬프게 울음 운다고 하는군요. 그러다 서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면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라는 표현으로 슬그머니 발등을 밟고 지나간답니다.”
“당신, 혹시 이곳에서 나를 만나더라도 내 발등은 절대로 밟으면 안 돼.”
가이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일행은 갑작스런 익살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모두들 킥킥거렸다. 하지만, 나는 아내의 살벌한 눈초리를 의식해 시침을 떼고 앞서 간 막내를 따라 산길을 허겁지겁 뛰어 올랐다.
나는 산등성이에 올라 전설 속에 등장하는 사슴과 이족사냥꾼을 만났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후손이 대대손손 살아가는 해남도를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남도는 지금 개방의 물결에 휩쓸려 삶의 터전이 뿌리째 흔들리는 변혁의 길로 들어섰다. 그것은 비록 영광된 미래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지만 이로 인해 수 천 년, 이어져오던 소중한 자연과 문화유산이 훼손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일이었다.
한편으로 이번 여행이 비록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도성장하는 중국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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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 작가님...
멋진 기행문 잘 보았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구요.
늘 좋은 작품 남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항상 즐겁게 생활하시는 강작가님 끈임없이 글을 쓰시는 모습을 보고 저역시 반성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추위를 못 벗어나 덜고만 있는데 천국도 다녀오고 부럽네요?...ㅎㅎ
이건 2008년에 다녀온 곳입니다.
올해 다녀온 베트남글은 지금 쓰고 있습니다. 작성되면 올려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