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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머리 십자루>
차 례 | |
제1장 범머리 바닷가에서 콧노래만 부를 수 없는 범머리 이길성 선생님의 병문안 病問安 부드러운 입김의 꿈 신앙의 산고 産苦 초등시절 개구쟁이 팔봉감리교회 양길리 잔필 창식 친구 팔봉초교 35회 그리운 친구들 애환이 묻어나는 고향 제2장 범머리 십자루 범머리 십자루의 의미 교육가 정계훈 선생의 첫 제자 A. [소천 召天] B. [회고] C. [추모사] 정계훈 이사장 사랑의 베일 A. 정계훈 이사장님과 김정희 사모님 부부비밀 B. 정계훈 이사장님의 쾌유를 빌며 새 꿈을 주신 정계훈 초대 이사장 팔봉중학교 이사 문영숙 선임 극적인 라디오 Radio와 텔레비전 TV 제3장 그늘막이 된 남산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중. 고 수업시간의 차이 간단한 초. 중. 고. 대학의 공부법 사랑의 우산 단칸방 현해탄 건너 스즈키 미사코 鈴木 美沙子 소도 언덕이 있어야! 제4장 잠언 16:9 욕망 慾望과 소명 召命 군입대 전- 영적 靈的 고향 한얼산 군수기지사령부 웅변대회 제대 직전 충수염 수술 신학에 앞서 청년회장 위한 기도 대림감리교회 청년회 박설봉 협성신학대학 총장 제5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철산교회 현재명 : 행복한교회 신학생 전도사 철산교회 개척 교회 성장의 원동력, 헌신 성전 대지 매입 과정 필리핀 선교와 나락 목사 통역 | 제6장 장로 정금순 나의 어머니 엄마 별 큰 주걱 북두칠성 성지순례를 따라가다 동물인가? 인생인가? 97 노모, 그 친구들 정읍 구절초 사랑의 향기 『새하얀 구절초』 제7장 김영삼 대통령 세계 여행 자유화 아들이 보낸 나라 캐나다 CANADA 저 무덤에서 깨어나라 모세 80세의 부름이... 제8장 홀로 걷는 사유 정원 思惟 庭園 제9장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I Will Be with You. 제10장 |
반달/ 윤극영 작사 작곡 https://youtu.be/0FXYWA1YBk8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리아스식 해안 구도항에 진입하는 은하호 선창 船窓 너머로 왼편에 고개를 내민 범머리 산맥이 시야에 들어온다. 여기서 자란 어린이가 품었던 꿈인 대농 大農이 팔봉 웨슬리구락부에 삽자루를 들고 통학하면서 새 꿈이 자란다. 정계훈 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서울에서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서서히 중학 시절 개척정신이 살아나 시야가 넓어진다. 아내와 함께 새로운 세계 캐나다 이민 생활의 독특한 문화에 푹 빠져 캐나다인으로 살아가기 까지 일상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글이다.
제1장 범머리 바닷가에서
콧노래만 부를 수 없는 범머리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갯마을 깊은 산골 외딴 범머리는 복어 잡이에 나섰다가 울월목에서 배가 빠져나오지 못했거나 복어알 먹었거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상 대결로 비운의 목숨을 잃은 남자들이 많았다. 아줌마들은 고작 굴을 따서 머리에 이고 이웃 마을에 팔러 나갔다가 한 밤중에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외로운 꿀벌 같았다. 왜냐하면 한이 쌓인 여인들이 모여 일제 치하 36년, 3년의 6.25, 어부 남편으로 얼룩진 이야기는 분노와 실망을 안겨주었지만 학교에서 새로운 학문, 그림 그리기 그리고 새 노래를 배우니 꿀맛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웃을 보면 풍랑이는 겨울바다이지만 범머리를 보면 따스한 봄 아지랑이처럼 콧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이길성 선생님의 병문안 病問安
범머리 바닷가에서 「반달」 노래 부르며 뛰어놀고 있다.
갑자기 "종경아~ 박종경~" 웅렬이가 부른다.'
1961년 3월 초등 2학년 반장 웅렬이를 데리고 이길성 선생님께서 병문안 오셨다.
달구지나 오가는 첩첩산중인 좁다란 소로에 활짝 핀 개나리는 호들 짝 반기는데 나는 몸둘 바를 몰랐다.
바위틈 진달래 꿀샘 찾아 나르는 외로운 꿀벌 범머리 꼬마를 찾아 심심 두메산골로 걸어오신 선생님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선생님 오셨어요’하고 달려가 안기고 싶어도 선생님 옷이 더러워질까 봐 나는 주저 주저했다.
선생님을 부러워했던 점은 키도 얼굴도 장군처럼 잘 생기셨기 때문이다. 키 작은 내겐 항상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반장이 어깨를 잡고 '기준' 하라고 할 때 너무 짜증나곤 했다. 평생 나는 '앞으로나란히' 할 때 언제 두 손을 내밀 수 있을까?' 이렇게 실의에 빠진 나를 찾아오시다니...
그런데 범머리가 어디인가. 구도에서도 중말 거쳐 안말까지 통학 길 5.5km. 한 시간 이상 걷는 어린 나에게 얼마나 먼 길인지 몰라. 덕송지 德松池에서 흐르는 20여m 넓은 징검다리 강과 큰 개울 4개와 도랑물 두 개를 건너야 했다. 폭설과 장대비가 쏟아지면 위험해서 구도로 돌아야 했고, 지난달처럼 바닷바람 모진 한파가 몰아치고 함박눈까지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오도 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해. 울음마저 얼어붙어 눈을 뜰 수 없었기에 목도리로 칭칭 감아주던 형들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이처럼 머나 먼 길을 오신 선생님
선생님의 음악 시간이 참으로 즐거웠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이 동요를 풍금 소리에 맞춰 부를 때 우리 마을인 줄 알았다. 가사도 쪽 배는 반달, 계수나무 하나, 토끼 한 마리, 돛대 삿대도 없이 서쪽 나라로 간다고 부르면 '삼면이 서해 바다 아닌가... 범머리 앞을 지나 밀물에 출렁이며 구도 항에 들어가는 만선한 고깃배가 떠오른다. 겨울이면 눈 덮인 새하얀 설산, 소나무 가지마다 수북히 쌓여 발레하듯 쭉 늘어저 이리저리 눈바람에 흔들릴 때 반달도 바다 한가운데 얼어붙어 넋을 잃으니 이런 서해안 절경을 어디에서 다시 볼 수 있겠나. 게다가 매일 저녁 입항하던 칠복호나 명동호, 충남호, 은하호의 뱃고동에 좌현 左舷에서 기다리던 범머리가 어흥~ 거리며 튀어나와 선객 船客을 환영한다. 남쪽 팔봉산을 향하여 호리 항과 나란히 서있는 선남선녀 쌍 섬은 범머리의 대표 수호 사자이다. 특히 세계 5대 갯벌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가로림만 갯벌은 최초 해양 생물 보호구역으로 순천만처럼 국가에서 개발이 예정되어 있다. 종경은 4,000여 평에 갯벌체험장을 만들어 은퇴 후 하려던 관광산업을 미리 확장하고 있다. 앞으로 계수나무 토끼마저 두둥실 구름타고 가로림만으로 은하수를 몰고 오는 날 범머리는 작은 우주 공화국이 될 것 아닌가....
통학거리 (우측) 폭우 폭설 비상도로 (중앙. 호랑이 모습) 범머리 길 안내판 (우측) |
선생님 입김의 꿈
에둘러 아버지 교통사고 소식에 시원한 사이다와 과자 봉지를 들고 오신 게 참으로 믿어지지 않게 작은 눈이 번쩍 거렸다. 알사탕 하나 사과 한쪽 받아 먹는 게 제사나 명절이 되어야 했는데 너무 감사하였다. 이 선생님은 아버지와 대화를 하시다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종경이도 앞으로 범머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차를 마신 후 선생님을 모시고 따스한 봄볕에 진한 향기를 내뿜는 개나리 둑 사잇길 따라 작은 배 서너 척이 정박된 조그마한 호리 항에 내려갔다. 쌍섬 사이로 팔봉산을 바라보시며 “이렇게 멀리서 학교에 다닐수록 저 산처럼 더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하고 건강해야 한다.”라고 당부하시며 손을 꽉 잡아주시는 선생님. 그 넓고 큰 손길이 꼭 하나님의 품 같았다.
그래서 팔봉산 범머리 시골뜨기라도 나는 자상하신 이길성 선생님처럼 닮으려고 굳게 다짐하였다.
유명한 관광 시가지처럼 범머리는 2018년부터 서산시 가로림만 관광 안내소, 펜션,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면내에서 팔봉면사무소 주변보다 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곧 이원과 대산 간 연육교 2.65 km 제2 서해대교도 세워질 예정이다.
<참고> 범머리 호두 虎頭는 산이 호랑이 머리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부머리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공식 마을 명칭은 호리 虎里이다.
세계 5대 갯벌 중 하나 가로림만 갯벌(좌측) 태안 이원과 서산 대산 간 연육교 예정(우측) |
신앙의 산고 産苦
결혼식, 장례식, 명절 차례 같은 동네의 행사는 유교적이고, 개인의 신앙은 불교적 색채를 띠었다. 호리 박씨네나 양길리 순흥 안 씨 집안 역시 다를 바 없었는데 아들을 낳기 위해 어머니는 나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셨던 모양이다. 불공은 물론 둘째 누이를 상길이라는 남자이름으로 지으셨다. 그래서 누이에게 미안함도 있다. 군에 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어머니는 추운 겨울 냉방에서 어렵게 혼자서 아들을 낳았다. 소원이룬 기쁨보다 해산병으로 7~8년 고생하시며 팔봉산 아랫절에서 불공에 열심이었다. 어린 나는 어머니를 따라나서며 절밥과 절떡을 맛나게 먹기도 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병고로 고통 받던 어머니를 이옥현 권사님이 팔봉감리교회로 인도하면서 어느 날 기적같이 치료를 받았다. 그 후 우리 가정만은 유교 문화에서 자유를 얻어 교회에 다녔으며, 큰댁을 설득하여 조상 제사를 예배로 바꾸고 외가 까지 기독교를 심는데 어머니께서 앞장섰다. 여기서 어머니는 질병에 대해 신앙심으로 면역이 되어 막내가 사경을 헤맬 때나 어머니 스스로 작고 큰 질병이 있을 때마다 죽으면 하나님 앞에 가면 된다며 약과 입원을 외면한 채 치료 받기 위해 밤새도록 기도만 하였다.
이렇게 101년 6개월을 지내며 마지막 치료에서 뇌경색 혈관 주사나 항생제보다 더 위험한 독한 처방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산고에서 얻은 강한 면역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예배시간 아멘 권사로 소문나 있었지만 스스로에게 아멘을 생활화한 장로로 일생을 보내고 지난 칠월 십일 금학리 가족공원 아버지 곁에 조용히 누워 계신다.
초등시절 개구쟁이
말썽을 피운다며 7살에 입학하고 일만 하다 보니 나의 꿈이란 나뭇누리와 땅이 전부였다. 하굣길에 방 천 내에서 물장구치며 미역을 감을 때 재곤이와 몇 명은 꼭 팬티를 입은 게 어색해 보였다. 다섯 살 많던 재곤이는 씨름하자며 아저씨처럼 놀아준 게 지금 생각하니 어찌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여름에 비에 젖은 옷을 짜주고, 겨울에 얼어붙은 바지를 말리라고 난롯가에 자리를 마련해 주던 재곤이는 친구가 아닌 형님의 손길이었다.
남직이 송순이 수종이 상근이 함께 뛰놀던 앞자리 친구들, 하모니카로 부러움을 준 창식이. 고추장 반찬에 책보가 붉게 물들어 냄새가 진동하는데 예쁜 가방에서 꺼내놓은 흰 쌀밥에 멸치볶음과 노란 계란말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당시 점심시간이면 홀로 학교 주변을 맴돌다 수업 시간에 태연히 앉아있었다는 허기진 친구의 수기 때문인데 오히려 감사보다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하다.
챙피스럽지만 개구쟁이 짓거리를 좀 보자.
서리 좀 했지. 참외 수박 단감. 겨울이면 성냥골 화투 놀이. 학교 창문 네로 빼다가 썰매 만들고, 트럭에 매달리기, 금지된 나무에 올라 원숭이처럼 버찌를 따 먹고, 어머니와 누이들이 함께 고구마밭 풀 매다 살그머니 도망가고, 도리깨질하다 내팽개치면 대문 잠그고 피한 엄마에게 돌을 던지며 화풀이하던 일. 감나무 밑부분 자귀로 뺑 둘리 깎다가 아버지에게 매 맞던 일. 여동생들에게 죽은 토끼 무덤 만들어 절을 시키던 일, 밤이면 횃불 들고 앞장서서 황발이 능쟁이를 남의 것도 얼른 잡아채기, 망둥이 쪽물 풀어 잡기 등 공부보다 열심히 나무하고 공동묘지 땅 일구며 목적을 두고 집중하는 일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열성이었지만 할 일이 없으면 무척 말썽꾸러기 짓만 골라 하였다.
팔봉감리교회
그렇지만 어릴 적 다닌 교회 생활이 죄를 지적했다. 한번은 기연이 작은 어버지께서 돌려주라는 버스표를 되돌려주지 않았을 때 죄책감이 들어 "잘못했습니다."하고 손님이 없는 밤중에 최준엽 어른을 찾아 버스표를 반납했다.
불안하고 괴로웠던 마음에 창피를 무릅쓰고 죄인으로 슬며시 밤중에 다가갔는데 아저씨는 대수롭다는 듯하였다. '왜 이제 가져왔어.'라고 책망도 없었고, '고맙구나.' 이런 말씀도 없었다. 아마 그분이 형님에게 말씀하지 않아 모르신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가게 앞을 지날 때, 고개 숙이거나 피할 필요가 없어져 내 마음에 평안함이 오고 두려움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부흥회에서 '회개하세요' 하면 어른들이 가슴을 치고 울면서 통곡하며 기도하던 모습이 스쳐 갔다.
이처럼 개구쟁이로 자란 고향 생각에 타향은 어떤 존재인가? 타향은 인생 전체를 살려주기도 하고 땀 흘려 성취욕을 채워주기도 했다. 그래서 타향이 기른 정이라면 고향은 낳은 정이 있다. 죄짓고 살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해 준 거듭나는 산실 産室인 고향 그 자체만으로도 그냥 즐겁다. 연어의 회귀 본능처럼 수만 마일 헤치고 돌아가려는 듯 여전히 영적으로 몸부림친다. 우리 교회 목회자 출신으로 나 뿐 아니라 이의영 이두영 형제, 성봉권, 장동익, 김성철 그리고 이경국 목사님 아들인 감리교회 수장 이철 감독회장이 있다. 지금 말하는 고향은 출생지 서산 팔봉이다.
양길리 잔필 창식 친구
서울에 집이 있다며 고향을 등지고 자주 올라가던 창식 친구가 툇마루에서 하모니카를 부르면 가사보다 하모니카를 다룰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해서 넋을 잃곤 하였다. 더구나 오산중학교에서 김소월의 얼을 받아 잊은 줄 알았던 서산 팔봉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의 시 詩에는 자신의 혼이 가득 실려 있다. 36년 만에 만나 2002년 1월 3일 온유교회 창립예배에서 김선일 교수님을 초청하여 특송으로 축하해주던 잔필 마을 개구쟁이 소꿉친구의 명품 시 <팔봉산 아래 내 고향>, <아! 팔봉산>, <(팔봉산) 감자>, <한강 둔치>, <천겸산에 올라>, 연수보다 더 슬퍼하였는지 물어보고 싶은 <슬픈 연가> 등 다작을 냈는데 그중 늘 즐겨듣는 한편을 꺼내 본다.
<아! 팔봉산>https://youtu.be/c6Pv-W6QeLI
Ten.이정제 <아! 팔봉산>(정창식 시 / 정영택 곡) Pf.장은혜 Vn.허은혜 Vc.원현진
<아 팔봉산> 첫 발표회 및 축하의 글
중간 산등성 양길리 멀리 중앙에 쌍도 雙島 (좌측) 팔봉산에서 양길리 호리(중앙) 팔봉산 여덟봉우리(우측)
팔봉초교 35회 그리운 친구들
130여 명의 동기동창 친구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거의 만나지 못하였다. 직장생활과 목회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동창회가 있었지만 50여 년 만에 연락받았어도 갈 수 없었다. 코로나19 이전에 성봉권 정창식 친구와 함께 서산 동창회에 참석한 후로 옛날이 그리워지기 시작하여 내가 할 일을 찾아보았다. 그중에 60여 명의 주소록을 총무였던 창식 친구로부터 받고 한 명씩 기록해보았다. 중간에 이사한 동기까지 다시 행방을 찾다 보니 하나의 과제가 되어 이제 126명까지 추적하였다. 서로 살아온 길은 다를지라도 모두 귀한 자리에서 진주처럼 고생하면서도 아름다운 백합과 민들레의 향기를 토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1966년 졸업 당시 6년간의 추억으로 다시 돌아가 잊힌 동심의 세계에 푹 빠질 수 있다는 점이 신비로웠다. 팔봉산 배경으로 자란 우리가 이제는 고성학교와 고파도 분교를 아우르는 9개 마을을 품는 경지까지 올랐다. <아! 팔봉산>을 작시한 창식 시인이 선두에서 본보기가 되었고 카톡방을 운영하면서 70여 친구들이 애경사 哀慶事에 한마음이 되고 있어 참으로 반가웠다. 팔봉산의 정기를 받아 훌륭한 자손들과 사업의 발전으로 사회 공헌하기도 하고 귀한 직책으로 국가에 헌신하다가 은퇴한 친구들이 진실로 자랑스럽다.
팔봉초등학교 기독교대한감리회 팔봉교회(우. 박종표 목사 전송) 대표 | 대표 |
애환이 묻어나는 고향 Hometown Full of Joy and Sorrow
(차별의 설움과 횐희의 극복)
충남 서산 팔봉
향수에 젖어들 때
행복감이 치솟는다
개구쟁이라 초등입학 7살에
영리하다고 조기입학 6살에
이제야 그 비밀이
<선무당 가위질>에서
밝혀내는 구나
동갑내기 우리
선천적으로 조카와 아저씨
후천적으로 후배와 선배
인생살이 목사와 교수
허나 성장 배경만은 미스터리
우리 둘은 자고나면 흉보기 전쟁
원숭이라고 얼굴 앞에
두 손으로 3자를 그린다
뒤질세라 넌 뻐드렁이야
드라큘라 손짓을 한다
돌아서면서 웃는 그 모습에
항상 난 열등의식에서
헤어난 적 없지
설상가상이랄까
젊은 날 두 가지
핸디캡에 몹시 시달린다
난 왜 작고 못 생겼을까....
난 하필 주워온 자식인가?
만날 때 마다 각인된 못생김
여자 앞에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결국 결혼 포기에 이른다
겉으로 예수님 바울처럼
독신으로 선교하리라 위장해 본다
또 하나는 영이 엄마의 놀림
뵐 때 마다
방천 밑에서 주워온 아이라 하니
아버지 매 맞을 때 마다
그 설움 자생으로 삼킬 수 없어
아~~~
지워버리고만 싶어지는
어릴 적 깊은 상처들
입대 전
이 모든 영혼의 각질들이 말끔히 벗겨 내린다
‘네 얼굴은 하나님 얼굴이야’
성령체험을 준 한얼산 기도원
영적 고향이라 잊을 수 없다
청평면 큰갈월로 237
젊어서 독수리처럼 창공을 휘휘
먹이감 사냥에 영적 날개 달아주지 않았나
새로운 인생
군 3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몰라
광안리 백사장에서 쓰시마를 바라본다
일본 여대생 鈴木 편지가 군복 주머니에서 닳고 닳는다
연 3회 여섯 번이나 웅변연사로 특명도 받는다
하나님이 비몽사몽간에 목자로 부르신다
일벌레에서 벗어난 자유의 순간들이 정말 아깝기만 하다
하나님과 검증을 위한 한 가지 약속
‘청년회장이 되게 해 주시면 목자로 일하겠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대림감리교회 3명의 청년회장이 되다
1년 만에 22속회 200여 명 청년목자가 되다
81년 신학 결혼 직장 모두 형님 덕분이다
형님의 간곡한 권유에도 건축가의 길을 떠난다
84년 4월 부활절에 신학생 개척 전도사가 되다
92년 교인들과 필리핀에 선교지 두 곳 세우다
95년 캐나다 이민목회와 유학생활이 시작되다
환대를 받으며 쟈넷 Janet 펄 Pearl 두 딸이 더 태어나다
2001년 토론토에서 온가족 캐나다 시민이 되다
얼마나 좋았으면 국적까지 옮길 정도로
스카보로 블러프 공원 Scarborough Bluffer's Park은 정서의 고향이다
아버지 형님 아들
삼대 남자들만 잠들어 있지 않다면
지상낙원이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금학리 산기슭
떠오르는 해님
비석 하나하나 밝게 비춘다
예초기 들고 찾을 때마다
엄니 역시 연어 속성 피해갈 수 없나 보다
아버지 옆에 나도 묻어 주렴...
엄니를 모시고 가끔 여행을 한다
오월엔 울릉도
지난해 고파도행 성주산호에 오른다
감격에 찬 나는 물론 엄니도 처음이겠지
얼마나 좋아하실까 내심 호재라 했는데....
휠체어에 의지한 채 마을 구석구석 살피더니
이곳에 자주 온 적이 있다는 말에
어찌 놀랐는지
가슴이 내려앉는다
60년 전
보따리 장수 아줌마의 모습을 그려 본다
고파도 해수욕장
내 고향산촌 팔봉에도 이리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었는가?
늦가을 백사장에 밀려오는 파도 물결도
뒹구는 낙엽에 묻히는 듯싶다
수 만마일 달려온 연어처럼
고향이기에 잊지 못해
애수에 빠져들게 하지 않는가
정든 땅 내 고향 서산 팔봉
한 줌 흙조차 남기지 못하는 한 마리 연어를 떠올려 본다
이미 난 기증된 시신이기에
April 29th 2018 Andrew
내 고향 고파도 해수욕장- 휠체어 타신 어머니와 함께 거닐다. |
제2장 범머리 십자루
범머리 십자루의 의미
중학교는 더 멀다 보니 하루 왕복 세 시간 이상 걸었다.
비포장도로 10.5km. 지금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왕복 2차선이지만 그때는 범머리길에서 바다 갓길인 호리2길을 쭉 내려오다 미끄러지기도 하고, 덕송 한내길에서 팔봉1길로 들어서면 어송2길과 팔봉2길 끝 삼거리 서산 태안 간 32번 국도 동편에 정계훈 선생님의 얼과 혼을 쏟아부은 팔봉중학교가 있다.
매주 아침 예배 후 수업이 끝나면 삽자루 들고 공동묘지 뽕나무 일구다 집에 오면 쥐가 나서 뒹굴던 증상은 반세기가 지나서야 치료되었다. 금숙이는 거의 매일 치마에 자갈을 나르다 손목이 뼈서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다. 삽자루는 ‘일 회 1번’의 상징일까. 중학교 설립 초창기 학생들에게 삽은 십자가의 의미가 있어 이 글의 제목과 자신을 십자루라고 불러본다.
1회 1번을 누군가는 자랑스럽다 할는지 모르나 여전히 '앞으로나란히' 한번 못하는 제일 쪼그만 놈의 상징이기 때문에 억압을 받는다. 왜 나는 일 년에 5cm 정도도 자라지 않는가? 고작 4mm인가. 남녀공학인데 여자들 앞에서 얼굴을 들지도 못하겠다. 기를 펼 수 없이 작은 키는 생각 할수록 더 서럽기만 하였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일이 생겼다. 1회 1번이 키순으로가 아닌 학교 입학순서라 해서 3년 내내 스트레스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못난 나를 부러워하는 여학생들이 있다는데 놀라웠다. 어느 공휴일 세 살 위 상길이 누이랑 같은 학급이어서 덕송리 바닷가 조개 잡으러 가는데 나도 어울려 함께 따라갔다. 반바지를 입고 엎드려 흐르는 물에서 호미로 열심히 조개를 긁어 올리는데 “애들아, 종경이 좀 봐. 다리가 너무 하얗다!” 여학생은 치마를 입기 때문에 자연 일광욕으로 검불그스름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피부가 검어 더 까무잡잡하기도 해서 바지 대신 반바지에 드러난 하얀 다리 장딴지가 돋보였는지 그렇게 나를 부러웠단다.
교육가 정계훈 선생의 첫 제자
[ 정계훈 초대 이사장 프로필] - 팔봉중학교 50년사 창 학 이 념 : 경천애인 낙토건설 설 립 연 도 : 1966년 4월 1일 중학교인가 : 1971년 1월 25일 출생 : 1936년 1월 15일 충남 연기군 서면 봉암리 435. 부친 정동준 모친 윤정숙 중학교 2년에 영인산 부흥회에서 하나님 음성에 화답 - 교육자 헌신 결단 자녀 : 김정희 사모와 결혼 2남 1녀 학력 : 1962년 강남대학교 신학과 졸업 수상 : 1996년 대통령 표창 2018년 초·중·고. 특대 방과 후 학교 전국 시도 종합 1위 대상 수상 영향 : 송악중학교 설립자이며 교장 허윤 「교육자의 사명」 함석헌 선생 「선생은 가르치는 자요, 본을 보여 줌이요, 감화를 주는 자이다.」 활동 : 1960년 대학생 시절 불우 청소년 고등공민학교 공동 설립과 교육 1962년 서산 명지교회 담임전도사 부임 1963년 고북교회 담임. 심훈 조카 심재역과 상록학원 재건 1965년 서산감리교회 전도사 1966년 팔봉 어송감리교회 담임전도사 사임, 팔봉중학교 창립 초대 이사장 1974년 무감독 고사 실시 |
A. [소천 召天]
정계훈 초대 이사장님-예수님의 향수가 넘쳐흐르는 계훈 학원 설립자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승리자입니다.
눈물이 흐르네요
이사장님의 이름 석 자에 빨간색을 입히다니…
구름이 덮이던 스승의 날
가랑비 보슬보슬 가끔 보신각 타종하듯 오늘은 제법 천둥소리도 세차다.
제자를 아끼시던 정계훈 초대 이사장님의 소천 소식을 뒤늦게 듣는다
선생님 은혜!
정말 주님 사랑 듬뿍 받아 원 없이 나누어 주시며,
척박한 서산 팔봉 어린 청소년들에게 일생을 다 바쳐 꿈을 심어주신 그 은혜 감사를 드린다.
중학원 벽보를 보기 전만 해도 얼마나 생활고에 시달리며 자란 우리 아닌가
공동묘지 곁에 땅 한 평 더 일구는 게 소원이고,
팔봉산 오르내리며 후장나무 한 짐 져 날라 나무누리 만드는 일이 한 해의 꿈인 철없는 소년
배움의 소중함도 모르며 초등학교가 다 인양 진학의 꿈도 잊은 채 자란다.
가르치고 싶어도 마음만 졸이던 부모님들은 어떠하셨을까?
서산중학교 다니던 친구가 그렇게 부럽기만 했는지
중학원 벽보를 보는 순간 필자는 가고픈 맘이 든다.
흔쾌히 부모님의 승낙을 받고 6km 떨어진 어송교회 까지 걷는다
상갑이와 둘이서 먼 줄도 모르고 가벼운 맘으로 사택에 들어선다.
기혁이도 오고 키가 큰 여자 가재송도 만나 4명이 처음으로 원서를 쓴다.
날이 갈수록 학생들이 늘어나자 담임 전도사직을 그만두시고 학원에 전념하시던 초대 이사장님
경천애인
낙토건설
선생님의 좌우명 따라 예배를 드리고, 수업을 마치고, 삽자루를 든다.
먼 길 오가며 일하다 집에 돌아와서 정강이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1966년 가을이니 50년 후 몇 년 전에야 치료받고 나서 생각해 본다.
아, 그 오랜 고통이 1회 졸업생이 받은 최고의 선물인 것 같다
정계훈 이사장님 소천
국화 송이에 둘러싸여 태극기와 교기가 나란히 서 있다
제자들을 두고 먼저 주님 곁으로 가시는 발걸음이 쉬 떨어지지 않으련만
함께 장막으로 그늘이 되어준 하늘이 오늘따라 잿빛으로 병풍을 쳐 눈물을 훔치는구나
엘리야처럼 천사들이 안내하며, 환송하는 사랑하는 이들을 다소나마 위로한다.
병석에서 30년 성역 금배지를 받아들고 흐뭇해하시며
‘잘 보관할게’
제자의 안수 기도에 ‘아멘’
떨리는 큰 손으로 덥석 잡아주시던 이사장님
앞에 故 자를 보니
당당하게 장애인들 앞에서
‘여러분들은 장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누구보다 더 크게 쓰려고 하십니다’
‘보십시요. 내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이 오늘의 나로 만들어 가십니다’
귓가에 간증하시는 우렁찬 음성이 어송 바닷가 갯내음 타고 들려온다.
평소 즐겨 묵상하시던 시 한 구절 우리 함께 불러 보자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O my soul. [Psalm 146: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정든 땅 서산 팔봉
일생을 함께한 팔봉중학교
가을 열매가 된 사랑하는 6,500여명의 님의 제자들
하늘나라에서도 내비게이션을 깔아 주신 그 길에서
우리는 정계훈 이사장님을 위해 합창한다
영원히 빛나거라 팔봉중학교
영원히 사랑해요. 계훈 선생님
영원히 걸어가요 손에 손잡고
영원히 찬양해요. 할렐루야를
영원히 또 뵈어요 주님앞에서
선생님이 거니시던 팔봉중학교 정원
평생 가시밭길을 꽃길로 가꾸어 기르신 후배들을 바라보며
오월의 초록에 둘러싸인 그 교정을 내일 아침 거닐어 보련다
May 16th 2018
정계훈 이사장님의 천국 환송식날에 <1969년1회1번 졸업생 안상원 목사>
B. [회고]
정계훈 이사장님- ‘영원히 빛나거라 팔봉중학교 !
참으로 모교의 사랑 말뿐인가 자책한다
사랑받던 이사장님의 천국 환송식에도 자리하지 못하다니
어제 누이가 전해 준 소식에 다음 날 찾아가게 된 것만도 다행이다.
누이와 난 팔봉중학교 설립년도 1966년 1회로 함께 다니게 된다.
가슴 아픈 일 하나를 소개할까?
누이와 친구인 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필자를 상길이 동생이라 부른다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삼 년 내내 동생 취급받던 일은 억울하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금숙아 명숙아 선화야 재송아, 이렇게 맘껏 부르고 싶어질 뿐이다
이제 28명 동기와 4명의 조기 졸업자 32명 모두 졸업 동기이다
지난 50여 년간 동창회에 참석한 적 없어 연락 두절이 오늘의 참사를 겪게 된다
모두들 지금이라도 통화할 수 있으련만 무관심과 소홀함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이사장님은 전 생애를 바쳐 학생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길러 낸 흔적을 지울 수 없을 터인데...
사재를 정리하고도 빚내어 학교를 세운다
사모님은 남편 사랑에 국수 말기가 힘들 정도로 쪼들린다
가장 성실하고 실력 있는 지인들로 교사를 조직하여 교육열에 심혈을 기울이다.
성직인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면서도 성경과 야학으로 심훈 가족과 함께 계몽에 앞장서다.
어송교회에서 담임을 인계하고 직업 전도사로 평생 출석하면서 계훈 학원에 생애를 바친다
그 중심에 신앙교육을 빠뜨리지 않고 예배 출석을 도모하며 인성 위해 직접 도덕을 가르친다
졸업 후 1969년 인천 선인고 3명, 서울 리라아트고 3명, 서령고 1명의 원서를 손수 챙기신다.
1974년은 이사장님의 눈시울을 뜨겁게 달군 고교 입시 수석합격 낭보이다
인천여상 이영숙, 태안여상 한수용, 공주사대부고 김용희 차례로 날아든 자랑스러운 제자들
이들이 명문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다니 하나님 앞에서 “주여 !” 감사의 눈물을 펑펑 흘린다
『선무당 가위질』 저서를 낸 조춘호 선생님 역시 팔봉초교 제자들이라 더욱 감회를 잊지 못하다
올해로 6,500여 명의 제자들이 이사장님의 넓으신 사랑, 그 따스한 품에 안기게 된다
이렇듯 부모보다 더 사랑을 쏟아 길러냈건만 언제 철이 들까?
이미 이사장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필자는 이사장님이 하늘나라로 편하게 영원히 여행하실 수 있으실까가 방문하면서 궁금해하다
사택은 고속도로 건설로 이전되고, 화초와 수목들로 아늑하게 우거져 식구들이 쉬고 계시다
50여 년 전 세발자전거 타던 지현 씨, 아내와 딸 그리고 손자, 정훈희 선생님을 만나 위로한다
최초 웨슬리 구락부 등록자 4명에게 주려고 팔봉중학교 명예졸업장이 준비되어 있단다
필자가 그중의 한 명이라고 하자 화색을 띠며 수여식이라도 가지려는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곧바로 팔봉중학교 정문에 들어서자 느낀 점은 ‘우리 학교가 살아있구나’ 감탄이 절로 난다.
얼이 담긴 초록빛의 널따란 교정, 초목으로 에워싸인 학교 교비
채플 벽 글자 하나하나 새겨넣은 애송 성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가 시야에 들어오다.
걷게 만든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사랑, 삐뚤어진 영혼을 살려주신 하나님을 잊을 수 없어서...
남자로 국방의무 대신 교육의무를 다하고자 혼신의 땀과 피가 흐르는 교정을 밟아 나가다
친구 성 목사와 둘이서 발길을 뗄 줄 모른 채 남기신 발자취를 서로 카메라에 담기 바쁘다
이사장님과 교정을 거닐며 걱정하시던 때를 추억해 보면서...
지금 돌이켜 보니
그 누구보다 리더의 고민이 얼마나 골이 깊었겠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구도 팔봉분교 폐교를 안타까워하시며 인수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서산교육청과 섭외할 수도 있는데...
필자는 아무 대답을 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움만 남는다
팔봉중학교의 앞날이 어찌 될 것인가 이농현상에 자녀 출산마저 현격히 줄어들건만...
피 말리는 심정을 그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으랴
오직 인생의 목적을 심겨주신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그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 가운데 동창회가 버팀목이 되고 학교 교사들이 사학의 살아남기 몸부림이 꿈틀거린다
오수민 총동창회장이 지갑을 열고 윤승호 교감 선생님과 학생처장님이 2010년 선봉에 서다
방과 후 학교로 명성이 난 부석 가사초교 우종윤 교장 선생님과도 뜻을 모아 손잡게 되다
처음으로 그 학교에서 7명의 벌과 나비들이 날아오는데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
충남 서산과 태안 조그만 시가에 소문의 꼬리가 실바람에도 살랑거리나 보다
흘린 피와 땀방울을 보신 하나님이 두 학급이나 채워주시다니 기적의 동산으로 만들어 가시다
보라!
2018년 1월 9회 방과 후 학교 선정 대상(전국 1위)을 받는 기적의 작품이 유난히 빛을 발한다
팔봉중학교 키워낸 충남교육청 또한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된다
조영선 교장 선생님과 여러 선생님, 재학생들, 동창들의 하나가 된 결과물에 박수를 보낸다
오바마 대통령도 한국교육을 부러워한 점에서 팔봉중학교는 세계적이라 하면 과언일까?
팔봉면 내에서 10여 명도 채울 수 없는 원인을 생각하면 폐교 현상도 무리가 아닐 게다
호리분교가 1999년에, 고성초교가 2008년에 각각 학생 졸업을 끝으로 매각된다
유일한 팔봉초교는 현재 59명 중 6학년이 14명이다
그런데도 우리 중학교는 150명의 재학생이 향학열로 불태우고 있지 않은가
가꾼 꽃봉오리가 만개하지도 않았는데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팔봉중학교
지역을 넘어 국내 SBS 전파를 타고 세계의 시선을 모으는 일이 우연일까 필연일까?
경천애인
낙토건설
우물 파놓고 물이 흘러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어디에도 보이질 아니하다
조화는 아무리 비싸고 호화롭게 장식하더라도 그림일 뿐이다
생화는 벼랑 바위틈 사이에 끼여 외딴곳에 있더라도 외롭지 않아
비록 꽃이 작고 아름답지 아니하더라도 꿀이 있기에 찾는 친구가 있어
심지어 누구라도 값없이 밑바닥을 비우며 퍼가도록 자신까지 내 줄 수 있기에 그러하다
초대 이사장님, 오직 한길 예수님의 이러한 사랑으로 교육의 씨를 뿌리다.
척박한 서산 팔봉의 후 학도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며 학교를 세운다
‘영원히 빛나거라 팔봉중학교~~~’
길고도 머나먼 하늘나라로 이제야 콧노래 부르며 평안히 여행하시리라
자신이 받은 사명을 완성해 나가는 식구들이 열정을 태우고 있어 조용히 결단하지 않으셨나?
평소 묵상하시던 시로 주님을 찬양하면서...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O my soul. [Psalm 146: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May 19th 2018>
정계훈 이사장님 행복 단란한 가족 | 교감 필자 교장 성봉권 목사 교목 | 팔봉중학교 |
C. [추모사]
[그림자 없는 새벽길]
I. 출산의 기쁨
간밤에 하얀 눈이
소리 없이 내린다.
하현달마저 잠든 사이
소복이 쌓인 새벽
미호천 언덕이 백합처럼 아름답다.
함박산 부엉이 울음
새벽 종소리가 은은히 퍼진다.
정월 15일 수요일 아기 울음
봉암리에 탄생을 알린다.
어머 아드님이세요
축하드려요
정계훈 초대 이사장님 출산
II. 고통의 어린 시절
출생의 기쁨도 잠시
동갑내기 한 친구
소아마비 다섯 살에
주님 품에 안기는구나…
외톨이에 길든 나는
한때 텅 빈 운동장의 지킴이었지
어두컴컴한
그림자 없는 새벽길 등교
해가 다 떨어져
그림자 없는 초저녁 하교
등하굣길엔 밟힐 그림자도 전혀 없건만
어디선가 불현듯 나타나는 조롱의 검은 그림자
마치 큰 죄인이나 된 것처럼
고독과 절망으로 휘감아 버린
'죽음의 그림자'
아~~~
언제 그림자 없는 새벽길
친구와 어울려 걸어 보는가?
III. 뼈저린 소망
허윤 송학중 교장 선생님
어느 날
벌목 나르는 친구들 곁에서
벌목 숫자 파악하는 내게 격려 한마디 남긴다.
"계훈아,
너 역시 큰일하고 있는 거야
항상 네가 해야 할 일을 찾거라"
일보다 병 치료가 내겐 급하다
마침 영인산 산상 부흥성회에 올라 매달린다.
“계훈아!
너는 장애인이 아니야!
정신적인 장애인까지 되어서야 하느냐”
어디서 이런 영혼의 깨달음을 맛볼 수 있는가
하나님 음성 몇 번이고 들려온다.
어송교회에 부임한 1966년에 결단한다.
담임 전도사 사임
직업 전도사 선택
평생토록 경천애인
교육으로 낙토건설
IV. 자랑스러운 팔봉중학교
점점 찾아오는 학생들
첫날 사택 마루에서 시작한 4명
안상원 이상갑 문기혁 가재송
다음 날은 성전에서
다음 달은 마을 회관에서
다음 해는 신축 블록 교실에서
삽자루 볏단 들고 6.5 km 걷는다
매일 숙제는 없고 할 일이 쌓여 있다
공동묘지 뽕밭 일구느라 여념이 없다.
난 그때 종아리에 쥐나 50년간 고생한다.
외동딸 박금숙은 치마에 돌을 날랐다.
손목이 삐끗해서 지금까지 고생한다.
초창기 웨슬리 중등구락부 모두 주춧돌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땀방울에 비할 수 있을까
스승님은 피를 토하다 쓰러지기 일쑤였다
춤을 추며 눈물이 범벅이 되시다.
팔봉중학교 인가 認可 1971년 1월 25일
입시제도와 명문 학교 맹위를 떨칠 때
74년 고교 입시 수석합격자들의 낭보
인천여상 이영숙, 태안여상 한수용, 공주사대부고 김용희
감정이 얼마나 북받쳤을까?
춤을 추며 눈물로 범벅이 되다.
꽹과리를 울리며 그 기쁨을 온 동네에 알리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다.
팔봉초교 교사였던 조춘호 경기도 장학관님의 회고이다.
V. 학교 위기의 탈출 이야기
1999년 호리분교,
2008년 고성초교가 각각 폐교
2019년 고파도 분교 신입생 73세 신동재 할머니 나 홀로 입학
2010년 이런 사학의 위기 대처로 미리 팔봉중학교는 서두른다.
당시 교무처장 윤승호 교감님이 선봉장이 되다.
방과 후 학교로 소문난 부석 가사초교
우종윤 교장님과 손을 맞잡는다
오수민 총동창회장이 지갑을 열어 재원을 지원한다.
2011년 오바마 대통령“한국교육은 세계 1위이다”라고 선포한다.
2013년 조영선 교장님이 부임하면서 새 역사를 설계한다.
2015년 정지만 제2대 이사장님 취임하며 힘찬 동력이 생기다.
팔봉면 내에 초등 졸업생이 10명 미만
팔봉중학교는 현 재학생이 167명이 넘는다 (교사 18명)
(본래 150명이 넘는다고 했는데 그날 방문해서 다시 수정하고 박수를 보낸다)
2018년엔 초·중·고. 특대 방과 후 학교 전국 시도 종합 1위 대상 수상
(초등교 중등교 고등교 특수학교 망라하여)
SBS 전파 타고 세계의 자랑거리가 되다.
VI. 아버지 같은 스승님
스승님은“우리 학교 1회1 번이 목사님입니다”라고 자주 말씀하신다.
시험 기간 중 내게 사택에서 숙식을 허락하셨다.
1969년 1월 10일 졸업 후 7명이 고등학교 진학할 때이다
서령고 1명 서울 리라아트고 3명 인천 선인고 3명 총 7명
모든 학교마다 원서를 직접 들고 일일이 챙겨주셨다.
50년 후 목사 장로 초등교사 기술사가 되었다.
틴데일 Tyndale 대학원 M Div, 조훈상은 기술사 박사학위까지
(함께 한 친구 조훈상 불러 인사시키려는데, 없다. 급한 전화로 잠시 밖에….)
2017년 스승의 날
입원하신 단국대 병실에서 성역 30주년 기념 금배지를 드렸다.
성경은<고린도전서 4장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아버지 같은 스승님은 지금도
영원히 빛나거라 팔봉중학교
여러분과 6,500여 제자를 위하여
그림자 없는 새벽길을 언제나 걸어야 한다고 기도하실 줄 믿습니다.
전도사님, 교장 선생님, 초대 이사장님
정계훈 장로님, !
진심으로 사랑하고 추모합니다.」
2019년 5월 13일
1969년 졸업생 1회 대표 1번 안상원(Andrew) <정계훈 초대 이사장님 첫 추모사>
정계훈 이사장 사랑의 베일
A. 정계훈 이사장님과 김정희 사모님 부부비밀 <2018. 08.09. 06:39>
"사랑해서 정계훈 전도사님과 결혼하겠습니다." 성연 명지교회 전도사님으로 사역하실 때 일이다. 놀림받는 장애자가 내 사위라 생각만 해도.... 아니야. 위대한 인생, 승리한 인생,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계훈 전도사님과 김정희 사모님의 아름다운 합작품이 아니었나~~~ |
B. 정계훈 이사장님의 쾌유를 빌며 <2017.07.09 23:55>
정계훈 이사장님의 쾌유를 빌며 정계훈 전 이사장님의 쾌속한 치유를 기도합니다. 경천애인 낙토건설 꿈을 펼치시기 위해 혼신의 피·땀을 쏟아내시며 경천애인 실천가 위대한 목회자 정계훈 담임 전도사님 팔봉산 정기받아 우리 어린 혼들의 불꽃을 1966년 4월1일 최초로 붙여주시며 낙토건설의 역군 청소년교육과 사회봉사의 혁신가 지금까지 6,383 제자를 길러내신 위대한 정계훈 초대 이사장님 그 네 명 안상원 문기혁 가재송 이상갑이 입학등록을 하자 실망치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총32명에게 69년도 고등공민학교 졸업장을 안겨 고등학교 진학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위대한 스승 정계훈 도덕 선생님 기독교대한감리회 남부·충청연회 대표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며 성문 꼭대기 위에서 본을 보여주신 위대한 평신도 지도자 정계훈 장로님 갑작스러운 입원 소식에 천안 단국대 중환자실에서 뵌 정계훈 선생님 "안목사님 오셨어" 항상 코흘리개 제자에게도 손을 잡아주시며 존댓말을 사용하셨는데 이날 역시 건강하신 모습에서 지난 날 처럼 맞아주시니 50년 세월을 무색케 만드시더군요. 학교 뒷동산 공동묘지 일궈 뽕나무 심고 4-H 마을회관 초가지붕 갈아 엮고 현존의 모습 팔봉중학교를 아름답게 세우시느라 빗속 질퍽한 도로에서 바닷바람 몰아치는 눈 속 산비탈에서 벌목하여 운송하는데 고생스러운 길 마다하지않고 일일이 챙기시던 선생님의 열정과 개척정신은 초대 제자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주고 계십니다. 선생님과 달리 사모님은 이름도 빛도 밝히지 않으시고 묵묵히 선생님을 내조하시며 2남 1녀 키우시느라 현모양처의 길만을 걸어오신 분 이러한 믿음과 사랑의 사상이 밑거름 되어 불초한 제자도 올해 경기연회에서 성역30주년 금배지 가슴에 달게 되더군요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선생님과 사모님의 얼과 혼이 복사된 흔적임을 희미하게 지울 수가 없어요. 87년 중부연회 광명지방 철산교회 개척 현 경기 새광명지방 행복한교회 95년 캐나다지방 토론토 한인감리교회 이민목회 2002년 경기 광명지방 온유교회 개척 이때는 이길환 교장 선생님과 함께 참석하셔서 창립예배 축사해 주셨지요 선생님 존경합니다 광명에서 감리사도 경목도 시청선교목사 필리핀선교에도 일했지만 남은 일이라면 후배들을 위해 다하지 못한 점 기회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지나온 중학시절을 회상해 보며 선생님을 몇 번이고 처음으로 부르며 문자로 남겨보니 부끄러움만 앞섭니다. 반가운 소식은 마침 단대 간호사님을 통해 많이 호전이 있어 내일쯤 특별한 일 없으면 일반병실로 옮기실 예정이라 하셔서 안도가 됩니다 우리학교 팔봉중학교 영원히 빛나거라 팔봉중학교~~~~ 정지만 이사장님 정훈희 선생님 교장 선생님과 교직원 임직원 또한 모든 가족과 재학생 149 명의 후배 스승의 날에 우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바라며 다시 정계훈 선생님의 빠른 회복을 기도드립니다. 2017년 5월 15일 안상원 올림 1969년 1회 1번 졸업생 |
새 꿈을 주신 정계훈 초대 이사장
어린 시절
장예 빚에 매년 을씨년스러운 가을을 맞는다.
조그마한 꿈이라면 대농 업자 大農 業者
중학 시절
팔봉에 심훈의 후계자가 나타난다
신앙. 인격. 비전의 소유자 정계훈 선생님
백절불굴의 믿음과 정신력으로
황토 벌거숭이 산을 개발하여 학교 건물이 세워지는 기적을 보며
「불도저는 정말 대단해」 라는 기고문을 쓰셨다.
사실 선생님의 정신이 불도저였기에
불도저 장비가 매일 종일토록 작업할 수 있었다.
왜소한 나에게
정 선생님의 불도저 같은 꿈과 혼이 스며들었다.
청년 전도 폭발의 선봉장이 되었던 대림감리교회 청년회장
신학생 시절 도시에서 철산교회 개척
이러한 전도와 개척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의 원동력은
선생님의 정신적 산물이 아닐 수 없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4명이 일년만에 120명 청년 화요집회로 부흥하고
12명이 시작한 개척교회는 34명 62명 3년만에 120여 명으로 성장하여 156평으로 이전하였다.
이런 점에서 정신적 지주는 정계훈 선생님이며 정신의 고향은 선생님 얼이 담긴 팔봉 중학교이다.
D. Min 과정을 시작할 때 형님께서 교회 건물을 준비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라고 하여 수료하지 못하였다.
아래 도표와 사진은 정계훈 선생님의 웨슬리 구락부 창설이 필자에게 영광스러운 인생 여정의 시작이었다.
<학문의 길을 열어준 영광의 졸업증서> 1966년 팔봉초등학교 1969년 팔봉중학교 (전,고등공민학교) 1972년 리라아트 고등학교 건축과 1981년 협성대학교 신학과 1998년 아세아연합신학원 M.A. in Theology 2000년 Tyndale University Seminary. M. Div 2001년 Fuller University. Doctor of Ministry 미수료 | <2020년 이전까지 고등공민학교 졸업증서는 서산시 교육청에서 발급받았다.> |
팔봉중학교 이사 문영숙 선임
기쁜 소식은 팔봉중학교 운영 이사로 문영숙 후배가 선임되었다. 그동안 중학교 인가 이전의 졸업생들은 많은 고초를 안고 50여 년간 지내왔다. 이러한 사정을 정훈희 교장 선생님께서 간파하시고 2021년에 졸업증서를 직접 학교에서 발급하게 행정의 변화를 이끄셨다. 또한 2022년에 팔봉중학교 운영 이사로 문영숙 선생을 선임하셨다. 문영숙 선생은 2005년 제6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에 앞서 2004년 제2회 푸른 문학상을 받으면서 한국 문학계에 역사 소설 부문 중견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가세로 태안 군수의 후원으로 안면도에서 소나무 문학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팔봉중학교는 물론 전국 초·중·고 학생들에게 문학과 독서 확대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필자가 운영하는 글로벌독서토론회에서 광명시의 지원을 받아 2회에 걸쳐 소설 장·단편 쓰기와 습작 소설을 지도하였다. 특히 독립운동가 최재형 후원 이사장으로 그의 가족들까지 용산 사무실에서 후원사업을 한다. 그리고 『팔봉중학교 50년사』를 집필하는 등 우리 학교를 위해 다방면으로 큰 공로를 하고 있다. Oct. 15th 2022
극적인 라디오 Radio와 텔레비전 TV
어릴 때 극적 Dramatic 한 갑돌이와 갑순이가 라디오 연속극에서 주고받는 사랑하는 말 한마디는 듣는 이마다 색다르게 극치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게 했다. 아날로그가 발전하여 TV에 나타난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의 묘사는 라디오에 미치지 못하였다. 오히려 실망에 가까웠다. 우리 팔봉중학교 후배들과 팔봉중학교의 개척자 고등공민학교 선배들 관계에서 라디오 드라마 주인공처럼 상상의 날개를 힘차게 펴가고 있다. 나아가 잠시 날개를 접고 갑돌이와 갑순이가 TV로 마주 사랑을 고백하여 하나가 되는 최소한 디지털 현대판 드라마를 기대한다.
1969년 1월 10일 졸업생 (남자 17, 여자 15, 계 32 명) 연락처 카톡방: 팔봉중학교, 1969년 1회 졸업생 |
제3장 그늘막이 된 남산
남산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리라아트고등학교는 자매 재단인 리라초등학교, 숭의여자 중. 고등학교와 초창기 KBS 방송국이 인접한 남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 안관순과 건축과에 그리고 조훈상은 전기과에 세 명이 정계훈 교장 선생님의 인솔을 받았다. 6층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서울은 KBS 전파를 탄 듯 청와대, 북한산, 멀리 북악산과 도봉산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말만 듣던 서울역에서 명동을 지나 세종호텔 앞 퇴계로가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대한극장 방향으로 길게 나있다. 당시 1900여 석에 70mm 대형화면으로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영화관인 대한극장에서 단체로 관람한 사운드 오브 뮤직은 뇌리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또한 남산 1호 터널에서 중앙극장을 지나 복개한 청계천 초입의 삼일로는 가장 높은 31층 3.1빌딩으로 유명했다. 그 옆 고가도로 위로 시원한 강물처럼 수많은 승용차가 줄지어 달리는 광경이 아주 신기하였다. 서울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모든 문화와 문명이 제일 먼저 시작되고 변화한다. 1968년 경인 고속도로에 이어 2년 5개월 만에 1970년 고2 때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이것은 6.25로 세계 최하위 경제 빈국이 세계 10위권으로 도약하는 서광이었다. 현재 한국은 선진국이다. 한류 열풍이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방탄 소년단 BTS, 영화, 드라마, 컴퓨터, 건설, 원자력, 인공위성 7위(이스라엘, 이란, 북한은 300kg 이하), 뷰티 산업 K-Beauty도 세계 1위로 한류에 매료된 일본 여성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그래서 영어 박사인 고향 길호 친구가 “남순 형님이 집과 터전을 다 팔아 1974년 서울로 간 결단은 당시에 누가 상상이나 했느냐”며 우리 아버지를 무척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은 누구나 카멜리온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실행할 때 앞설 수 있다. 그러므로 머릿속의 뉴스가 아니라 생활 속의 뉴스를 본다는 점에서 지난날을 반성하며 앞날을 생각할 수 있어 서울에서 산다는 보람을 느꼈다.
성장기에 만남의 축복이라할까. 행사 때나 뵙던 리라학원 설립자이신 권응팔 교장 선생님은 중부 경찰서 형사의 박봉으로 6·25전쟁 피해 고아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재운 일로 참 본보기의 교육가이다. 권응팔 초대 이사장님은 미국 중학 교과서, 한국 초교 4학년 도덕 교과서, 세계 언론에도 소개되었다. 권 이사장님은 높은 교육 수준을 목표로 리라 초등학교, 리라 유치원, 리라아트고등학교에 최고의 시설을 갖추어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의 빈민 교육 사상을 본받아 교육 이념인 사랑으로 학생들을 지원하다가 2015년에 소천하였다. 설립자 권응팔 선생님의 조용한 사랑의 손길과 달리 인생은 결국 싸움이라는 교훈도 1969년 권응찬 교장 선생님에게서 깨달았다. 이 분은 남산공전 시절 권투 레슬링 배구 등 전국 최우수상을 휩쓸며, 응원을 위해 전교 학생들을 동원하기도 하고, 1층 입구 진열장에 상패로 가득 채워 세계적으로도 체육부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당시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매일 아침 계단을 오를 때마다 유리창 속에서 휘날리는 승리의 깃발과 하늘 높이 치켜드는 트로피 세리머니가 뇌리를 가득 메우며 함성이 들려오는 분위기에서 항상 수업이 시작되었다.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가? 코피 터지며 피땀 흘려 받아 쓴 월계관은 무엇인가? 명예와 값진 트로피를 받아 집으로 가져가지 않고 왜 학교에 바치는 걸까? 학교에서 압수하는 걸까? 프로가 아니고 아마추어 학생이기 때문에 자신을 키워준 은혜의 보답으로 당연히 그리고 아낌없이 바쳤을까. 그래서 우리 학생들에게 이 땅에서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고 권응찬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되새겨 보았다. 그렇다. 영원한 학생이듯 이 땅에서 영원한 소유주는 될 수 없다. 24 장로가 썼던 금면류관을 왜 벗어던지겠는가의 의미를 알면 답을 이해하게 된다.
<권응찬 교장선생님의 마지막 노래>
고향 생각 Yearning For HomeTown 조용남 해는 져서 어두운데 - https://youtu.be/WmPrO-p7F4U
중. 고 수업시간의 차이
중학교와 달리 고등학교에서 선생님을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었다. 중학교는 따라가는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팔봉 중학교에서 한 분이 1~3학년 전체를 가르쳐서 전공한 분야만 당연히 교사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고교는 같은 3학년에 세 분의 영어 선생님이 계셨다. 게다가 훌륭한 선생님들 가운데 법대 출신이 영어를 가르치고, 같은 수학과 선생님이라도 대학 교수처럼 인기가 많아 소문난 분도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전공보다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과 후 학교보다 학원에서 여러 선생님들의 공개 강의를 통하여 특히 인기 있는 선생님을 유심히 보았다.
먼저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머리에 정리하여 담아 가르칠 때는 교안을 보지 않고 학생 입장에서 무엇이 어렵고 쉬운지 콕콕 짚어주었다. 그리고 100명이든 500명이든 한 사람도 정신 파는 자 없도록 화장실도 못 가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예를 들면, 성문 기본 영어 선생님은 그림으로 단어 외우고 문법을 잘 정리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방법을 알기 위하여 종로 2가 서점을 돌며 공부 잘하는 법, 기억법 등 20여권을 구입하여 나름대로 정리하다 보니 일본 동경대학 입시 준비생들의 그림 기억법이 나에게 적격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저자라도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으면 맞추어 따라가든지 맞는 선생님을 찾아야 한다. 공부 잘하는 것과 못 하는 것은 별개이다. 나는 나처럼 공부 못하는 자를 의학적인 병자로 본다. 공부하는 법을 알아 공부병이 치료되면 얼마든지 월등하지는 못하여도 보통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왜 내가 공부하지 못하는가. 그 원인을 빨리 찾아 공부법을 깨우치면 공부에 자신이 생기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그늘 (지도해줄 자)을 찾으며 공부에 자신감이 생기면 대신 그늘막 (가르치는자) 이 되어주는 단계에 올라야 한다. 나의 경우 이 비법을 알고 난 후 새벽부터 건설 현장에 나갔다 오후에 수업 후 다시 들어와서 공휴일도 없이 바쁘게 일하는데도 신학교에서 논문이나 성적이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험 전 먼저 가서 친구들에게 가르쳐주면 그 친구들은 좋아라 며 따라붙고 나는 복습해서 득이되니 서로가 윈윈 win-win하게 되었다. 중.고 시절에 깨달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광명
간단한 초. 중. 고. 대학의 공부법
공부하기를 원하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원하는 나와 같은 이들을 위해 몇 자 적어본다.
초교 初校는 전공의 초보이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과목마다 잘 이해하면 따라간다. 교사는 흥미 위주로 적응시키는데 만일 실패하면 학생이 따라올 수 없다. 그리고 중학교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한자, 수학, 영어와 역사와 물리 등 기초와 예능과 독서에 취미를 붙여주면 좋다. 너무 앞서가면 학교 공부를 등한히 여기게 된다. 천재라면 당연히 앞서 공부해야 한다. 준재, 영재, 천재는 공부를 초월한 자들이기에 그 단계는 상상하지 못한다.
중교 中校는 초등 전공의 확대이다. 국어, 영어와 영어회화, 수학, 사회와 역사, 과학, 생물, 물리, 기술, 가정, 도덕, 체육, 음악, 미술, 한자, 외국어 중 한 과목 정도는(일어, 중국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등) 익혀야 한다.
캐나다에서 한국 학생의 경우 기본이 한국어, 영어, 불어 여기에 신경 쓰면 2개 국어 스페인어나 중국어만 해도 5개 국어를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왜냐하면 이민자들과 초등시절이나 중학교 3년간 어울리면 능통하게 각국어 회화를 한다. 시험공부는 교과서에 충실하면 좋은 성적을 받는다. 그러므로 고입 전에 기초를 완벽하다할 정도로 마쳐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와 떨어지는 분야를 분석하여 보충 공부하고 관심있는 독서에 대해 양을 높이면 좋은 결과를 얻는다.
예를 들면 광명북중학교 신 은총은 2학년에서 공부는 물론 운동도 못해 매일 아버지의 꾸지람을 듣던 학생이었다. 큰아들이 너무 크게 울자 창피하여 포천으로 이사하기 전 이 사정을 알았다. 학생에게 문제집 있으면 가져오라고 하니 사회와 역사 문제집뿐이었다. 그 자리에서 공부 중인 제1장을 가르치고 곧바로 뒤에 문제집을 풀라고 하였다. 70점이 나왔다. 전도사님에게 “이렇게 잘하는 학생에게 공부하는 방법만 가르치면 더 잘 할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 후 캐나다 영어 공부법 학원으로 아버지와 함께 찾아와서 “학원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3학년 1년 동안 수학은 수학 선생님에게 맡기고 나머지 과목을 직접 지도하여 주었다. 그런데 광문고등학교에서 10위권 내 들어 이 학생들에게 특별반 입시 집중교육을 시켰다. 은총이는 공부하면 할수록 점수가 늘고 등위가 올라가자 더 공부하려는 욕심이 생겨 스스로 쉬는 시간이 아까웠단다. 백석대학교 경영학과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한 후 졸업 후가 염려되어 시력이 약해 대구 육군사관학교로 전학하였다. 졸업 후 자대배치 받았다면서 연말에 찾아와 사진 한 장을 주었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고 하니 가운데 소위를 단 소대장이었다. 신 은총 때문에 “우리 집안이 발칵 뒤집혔어요.” 신성민 목사님의 고백이었다.
고교 高校는 중학교에서 기본 공부가 되어있는 상태라면 전공을 찾아 더 넓고 깊이 집중하여 공부하는 과정이다. 기초가 되어있지 않으면 먼저 학교 교과 과정에 충실해서 따라가야 성적이 차츰 오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공부의 맛을 알게 되어 집중하게 된다. 가속이 붙으면 공부하지 말라고 하여도 항상 책상이나 도서관에 가 있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러므로 공붓벌레가 되어서 대학 입시 과목을 잘 분석하고 대비하게 된다. 그리고 시험공부는 중학교 방식으로 하면 6~70점을 넘기 어렵다. 문제집의 하, 중, 상으로 풀면서 모르거나 약한 분야는 메모하면서 철저히 익혀야 한다.
대학 大學은 졸업장보다 목적과 필요 때문에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앞으로 전공에 대비하여 필요한 과목을 선택하여 연구하면 스스로 개발하고 창의적인 방향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단 박사는 견문을 넓히지 않으면 자기 것밖에 모르는 경우 바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또한 예능, 체육, 음악, 목회 등 특수한 전문 분야에 꼭 대학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대학도 기본교육이다. 전문 영역을 넓히려다 보면 평생 전문 대학원에서 1년이든 몇 년에 걸쳐 한 과목이라도 이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대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전문가의 길이며 반대로 자유분방한 중요한 시기이므로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언젠가 전문 학업과 생업마저 수포가 될 수 있다. 상아탑은 쌓기는 힘들어도 순식간에 무너져내린다.
결론적으로 학습자는 먼저 누가 나의 선생인가가 중요하다. 학교나 학원 선생님, 부모님, 앞서는 친구로 그는 우등생만이 아니라 내가 부족한 과목을 잘하는 친구이다. 그리고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과 해설서, 사전, 선배, 독서, 컴퓨터, 무릎을 꿇고 기도 하기 등 어떤 책이나 누구라도 학업을 위해 도움이 된다면 모두가 나의 선생임을 명심하고 도움을 청하면 좋다. 나의 최고 스승은 예수님 그리고 집중과 배우기 위해 일찍 앞자리에 앉으며, 홀로 골방에서 연구하기 그리고 깨우친 것을 동료에게 가르치는 학습자 자신이어야 한다. 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장학생이 되려고 혼자하는 이기적 공부법의 경우는 성격과 인격을 형성하는데 그릇되기 쉽다. 인격없는 지식은 고등죄악 高等罪惡이라고 미국의 한 신학자는 지적하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대인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마침 오후에 작업하다가 동료 양시옥 씨와 대화 중에 세 명의 바보가 똑똑한 한 사람 제갈량 諸葛亮보다 낫다고 하니 그는 공자의 논어 한 구절을 소개하였다. 「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이 말은 삼인행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즉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으니 그 중에 선한 것은 찾아서 따르고 선하지 못한 것을 보면 거울로 삼아 내 잘못을 고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참고) ① 기질: 성격의 유전적 본성- ② 성격: 행동 패턴 처신- ③ 인격: 성숙한 성격
다음으로 자동차에게 내비게이션이 필요하듯 학습자에게도 내비게이션적 공부법과 시대 전망을 해야 한다. 인공 지능 AI (Artificial Intelligence)을 넘어 창조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남산에서 서울을 내려다 보듯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 보면 걸어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이런 각도로 다양한 어학, 세계 여행 그리고 세계 지도자와 정치인의 생각에 또한 유의하면 인생 방향 설정에 유익하다.
그렇지만 배우고 싶은 욕망이 있어도 생활고와 어려운 환경으로 꿈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 아파할 때 설립자이신 정계훈 팔봉중학교 초대 이사장님과 권응팔 리라학원 초대 이사장님께서 얼마나 위대한가. 마더 테레사 Mother Teresa 수녀처럼 박사학위는 없어도 다시 한번 깊이 머리를 숙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길러낸 제자들의 학위를 씌워드리면 그 영광은 남산 위에 또다른 봉우리로 눈부시게 빛나게 될 것이다.
리라아트고등학교 1952.5.20 창립 당시 서울직업소년학교 (좌측) 설립자 권응팔 초대 이사장님 (중앙) 리라아트고등학교 (우측)
사랑의 우산 단칸방
1968년 12월 서울 마포 노고산동 산꼭대기 단칸방에 살며 신학기 전에 3개월간 이동 막사 구멍가게를 운영하였다. 형님은 형제뿐인 동생을 건축가로 키우기 위해 리라 공업고등학교 건축과로 지원시켰다. 이때 하고 싶었던 일은 웅변과 외교관이었다. 형님은 고향에서 장롱을 제작하는 목공소를 태안에서 운영하다가 일찍이 서울에서 팀장(세와)으로 건축 일하였다.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동생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굴레방다리 앞에 비좁은 단칸방에서 담요를 중앙에 걸치고 어린 조카, 형님 내외 셋이서 나와 각각 잠자리했던 추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신혼살림에 고교생인 시동생을 데리고 그렇게 산다는 일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53년이 지난 어머니 장례식에서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해야 하지 않았느냐"고 형수님께서 전과 똑같은 말씀 하실 때 이 은혜를 언제 갚아야 하나 핵우산보다 더 무서운 형님 내외의 사랑의 우산을 아~ 되돌려드려야 하는데 철없는 세월은 흘러만 가는구나.
그렇다고 무궁무진한 세계와 시간이 펼쳐있어야 한들 무엇이 도움이 되겠는가? 2004년 형님은 동생을 마련해 준 건물의 물받이 천정을 덮다가 10m 높이에서 떨어진 후 가족 동산에 지금까지 누워있다. 물론 형수님이 계시지만 형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있을까.
회고해 보면 중학생 때 수학을 잘하셔서 방바닥에 엎드려 가르쳐주기도 하고, 여름방학이면 나를 데리고 만리포에서 주부 대여로 주체할 수 없는 돈을 긁어모았다. 고교 시절부터 한방에서 키워주고 결혼 전부터 보인건업의 총무로 앉히면서 신학을 가르쳤다. 결혼과 개척자금은 물론 성전 대지 구매와 건축비도 앞장서서 감당하였다. 캐나다에 오셔서 동생의 형편을 둘러보고 한국으로 온 가족을 초청하였다. 46세의 동생은 나이가 있어 세는 힘들다며 매입 건물로 개척을 시작하게 하였으며, 가족과 직원들까지 설득하여 교회 성장에 장로로서 큰일을 감당하였다. 2년이 지나면서 우리 교회가 광명지방의 결산에서 네 번째가 되었다.
건축 사업가로서 형님은 동생이 건축기술사가 되어 함께 일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컸을 텐데 신학 한다고 할 때도 묵묵히 현장을 떠나지 않도록 경제적 뒷받침해주었다. 네 명의 조카들도 있는데 조금도 내색 없이 자기 능력을 쥐어짜면서 온 힘을 기울이어 비운의 죽임을 당하는 순간까지 동생 결혼 생활과 목회를 곁에서 협조한 형님은 사랑의 천사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형님은 건설 현장 일군 가운데 쌀 포대를 차에 싣고 가난한 노인, 언어장애인 노동자까지 나를 데리고 일일이 찾아가 위로하였다. 심지어 아무리 공사가 바빠도 아침에 일하다가 한 팀이 연장 가방을 쌀 때 외면하지 않고, "동생 작업 시간 빼지 말아. 0.2나 0.3 아니 더 달아줘. 안 만나더라도 노동판이라고 막 보지 말아. 사람은 돌고 돌아. 다시 또 만나는 거야."
현해탄 건너 스즈키 미사코 鈴木 美沙子
대학 입학 예비고사에서 쓴맛을 보았는데도 감싸주는 상은 큰누이가 고마웠다. 남산 국립극장 옆 금호동에서 자취할 때 연탄 갈아주고, 결혼 후에도 금호동 셋집에서 직장 다니도록 도시락 싸주며 동생이라고 늘 아끼지 않던 칭찬을 잊을 수 없다.
하루는 종로 서점에 들렀는데 한눈에 들어온 제목 『절망은 없다』 임동선 저서였다. 내용 중의 하나는 「지혜가 없으면…. 」(p.181) 두 번째는 「그 나라를 정복하려면…. 」문장이 번쩍였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만행을 듣고 자란 터라 원한이 있어 일본을 정복하려면 문화와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에 펜팔을 하게 된 스즈키 미사코 鈴木 美沙子는 여고 2년생이었다.
이때 나는 을지로 3가 정영옥 사장이 경영하는 한국 제일의 사진제판 진영사에서 암실과 수정 부에서 일하였다. 김창옥 부장은 일본 인쇄 사진제판 월간지에서 색상을 연구하는데 읽지는 못했다. 이때다 싶어 독일과 일본이 사진제판이나 인쇄술이 세계적이어서 일본을 정복하겠다는 신념으로 아침 일찍 일본어 학원에 다녔다. “박군, 여기 좀 번역해 와.” 김 부장께서 부탁하실 때가 참으로 고마웠다. 이렇게 터득한 일본어로 미사코와 펜팔을 하게 되었는데 목적은 일본 문화에 있었다.
교제 후 2년쯤 지났을까. 대학 입학하며 시작한 동아리 콘서트에서 찍은 키보드 활동사진 한 장을 편지에 담아 대한민국 육군 일병에게 보내왔다. 키도 훤칠하다. 긴 머리가 어깨너머 호리호리한 허리까지 흘러내린다. 웃음 띤 안경 너머 까맣고 초롱한 눈동자, 오뚝한 코에 예쁘장한 미인형 얼굴, 키보드 건반 위 호수 물결 같은 손길. 한결같이 표정이 밝은 대원들. 내 마음이 벌써 콘서트에 가있는 듯했다. 인쇄 공창 교정과에서 쉬는 시간에 광안리 건너편 쓰시마 對馬島 등허리 굽이굽이 바라본다. 대한해협이라는 현해탄 玄海弾(한국) 玄界灘(일본)이 일본 본토와 대마도 사이에 흐른다. 미사코가 동경 東京 위쪽에 인접한 사이타마 켄 埼玉県에 살고 있다 하니 꿈만 같았다.
고교 졸업 후 부쩍 커버린 나는 대한민국 군인 옆모습 한 장을 준비했다. 사랑하는 미사코 みさこさん 에게 빠른 회답을 간절히 바라며 외출증을 부관으로부터 받아 초고속 등기 항공우편으로 보냈다. 이래서 탈영하는가 보다. 하루가 천년처럼 손꼽아 기다릴 일이 또 있겠는가. 군사우편은 검열이 어찌나 심한지 혹 일본 편지라 보안에 걸리지 않을까 봐 하루하루 어지러웠다. 그런데 인편처럼 빨리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미사코의 마음이 벌겋게 달군 듯 속달 소인 消印이 찍혀 있었다. 조심스레 읽다가 정신이 번쩍인다. 마지막 부분 안녕 인사 직전 「アン・サンウォンさん, 私は あなたを 心の 中に 入れて います。종경씨, 저는 당신을 제 마음속에 담고 있겠어요.」 이 말에 정신이 나간 듯 난 너무 황홀한 기분에 싸여 단짝 홍성무에게 쉬는 시간마다 읽어주고 혼자 흙투성이 훈련복 주머니에서 하도 집어넣다 빼기를 마르고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평범한 일본식 인사인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할 겨를 없이 전율을 느꼈다. 문화를 알기 전에, 일본을 정복하기 전에 흔한 펜팔 편지의 사랑에 눈이 멀어 무장한 총구와 단도는 이미 벌겋게 녹이 슬기 시작했다.
1978년 제대 후에도 선물을 나누며 애틋한 정을 키웠다. 비가 자주 온다하여 노랑 우산 빨강 우산 받쳐 들고 도쿄 다이마루 백화점에서 쇼핑도 하기로 이미 초청까지 약속 받았다. 이쯤에서 미사코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어머님에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뗐다. 며칠 후 어머니는 마당의 낙엽을 쓸면서 “얘야, 종경아! 일본 여자와 결혼하지 않는 게 좋겠다.”라고 하셨다.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일본 정복? 삼천포로 빠진 줄도 모르고 나는 개탄만 하였다. 서울-현해탄-동경 1,159km, 왕복 2,318km를 지난 6년간 헤아릴 수 없이 건너다닌 예쁘게 접힌 하트가 내 마음속에서 하늘을 가로질러 화성 火星……. 올림픽 성화가 타오르기 직전 불발을 세계인들이 바라볼 때 그 안타까운 심정. 바로 코앞에서 「화성 火星」 화구 火口에 점화되지 못하다니. 짝을 찾는 숫사슴처럼 3년간 바라본 대마도. 어머니 말씀 한마디에 이제는 현해탄 해일이 일본 심장부 중앙 사이타마켄까지 덮쳐버려 미사코행 비행기 탑승이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의 항공 우주 편지, 엽서, 선물, 추억이 아른거리는 미사코 사진 그리고 어떤 수술로도 아물 수 없는 젊은 아들 마음의 찢어진 상흔. 오라, 영양가 없는 거름. 무더기 쓰레기 낙엽을 큰 삼태기에 수북이 담아 퇴비장에 살며시 쏟아부어 버리기까지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차분히 먼저 상은 큰누이에게 물었어야 했다. 그 후 미사코는 펜팔 쪽지에서 내 이름을 영원히 지워버렸다.
『절망은 없다』 임동선 저 (좌측) 김포공항- 도쿄- 사이타마 시 비행시간 (중앙) 사이타마 시 위치 (우측) |
소도 언덕이 있어야!
모든 일이나 혼자 열심히 한 것 같은데 돌아보면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발견한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비유처럼 나는 잊을 수 없는 감사를 해야 한다. 부모님께서 학교 기성회비 미납으로 집에 쫓겨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가난 중에도 완납, 정계훈 이사장님이 제자 사랑으로 열어주신 교육의 문, 권응팔 이사장님의 헌신과 세계관, 권응찬 선생님은 인생이란 싸움이며 월계관은 아낌없이 내놓는 것, 형님 내외의 전폭적인 아가페 사랑, 처남 셋이 말없이 경제 후원, 이병설 목사님의 사랑과 신학교 추천, 친구들의 사심 없는 동심일체의 손과 발 역할, 「절망의 극복」 책 한 권의 메시지, 성령님의 총감독으로 방향 지시와 지혜, 능력 공급 등 한편의 인생 드라마를 위해 이렇게 많은 제작진이 최상의 아이디어와 고급 시설까지 아끼지 않은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축복을 받지 못하고 홀로 방황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면 먼저 신탁받고 사명감에 최선을 다하자고 말하고 싶다.
제4장 잠언 16:9 욕망 慾望과 소명 召命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개역개정)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NIV) 人は 心に 自分の 道を 思い 巡らす. しかし, その 人の 步みを 確かなものにするのは 主である. (新改譯) 人心筹算自己的道路。惟耶和华指引他的脚步。(간체자) Le cœur d'un homme planifie sa voie, mais le Seigneur dirige ses pas. (프랑스어) Das Herz eines Mannes plant seinen Weg, aber der Herr lenkt seine Schritte. (독일어) לבו של אדם מתכנן את דרכו, אבל ה' מכוון את צעדיו. (히브리어) |
잠언 16장 9절을 암송하기는 쉬워도 생활화하기에 무척 어렵기도 하고 더 쉽기도 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한다.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여기에 인간의 욕심이 있고, 이 주체는 자기이다. 자기가 계획한대로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어느 정도는 돈이나 환경, 이웃의 도움으로 가능하나 궁극적으로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여기는 하나님의 소명 召命의 경지로 주체는 하나님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걸음을 인도하면 따라가는 주권 없는 종이기 때문에 인간은 초라하게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죄에서 구원하여 사명을 맡기심으로 더 나은 세계를 누리게 하신다. 쉽고도 어려운 비밀은 하나님에게 감춰져 있으나 공개하셨다.
군입대 전- 영적 고향 한얼산
입대 전에 인생의 변곡점 變曲點이 생겼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상이군인 이천석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한얼산 기도원 오순절 부흥성회에 참석하여 이틀 만에 방언도 하고 성령체험을 하였다. 그 순간 그동안 억눌렸던 키 작고 못생긴 얼굴이 이제부터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확신이 들어찼다. 내가 하나님의 몸이라는 깨달음은 내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지난 1년 동안 “주님, 저의 계획을 아시지요.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인쇄계 사진제판 분야에서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육군 인쇄공창에서 복무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런 일로 충무로 인쇄협회를 여러 번 끼웃거리며 담당자들을 만나보았으나 초조하고 불안할 뿐 답이 없었다. 그러자 기도원에 다녀온 후로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제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니 기도도 바뀌었다. “주님, 보내 주시는 대로 어디든지 가겠나이다.” 하고 나의 길을 포기하고 소명 召命에 순종하니 평안이 찾아왔다.
1976년 2월 20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M1 소총을 들고 6주간 받는 훈련은 무겁고 손이 시려 힘들었다. 다시 입소하라면 못할 것만 같았다.
부슬부슬 비 오는 날 내무반에서 쉬고 있는데 3주차에 면담을 위하여 인쇄 분야에서 종사하던 훈련병들을 호출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혹시나 반신반의하면서 담당관 소령과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변하였다. 그 후 병과를 받아 자대 배치받는 날이었다. 따블백을 멘 채로 판초 우의를 입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마지막까지 호명하지 않아 혹시 빠지지 않았는지 긴장되었다. 우의를 쥐어짜듯이 귀를 쫑긋 세워 호명을 기다리며 다시 기도하였다. “하나님, 사람을 의지했던 일 용서하여 주세요. 전방이든 가장 어려운 곳이라도 주님이 인도하시면 따르겠습니다.” 5~6백 명 중에서 마지막 한 그룹 정도 몇십 명만 남았는데 그때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남행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다음날 도착한 곳은 부산 보충대였다. 대기하는 기간에 주임 상사의 부탁으로 돼지 막사 설계도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기 7명이 육군인쇄 공창으로 명을 받고 4월에 배치되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으로 붙잡아 훈련하기 위한 부대였다. 범머리 십자루에게 지워진 과제는 출판물 교정이었다. 선임병 중에 이인교 상병과 윤 상병은 동기 박용하 이병과 내게 잘 대우해주었고, 총책임 군무원들과 어여쁜 아가씨들이 함께 있어 일반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초교는 우리 풋내기 몫, 이교는 선임자, 삼 교는 군무원, 최종 확인은 책임 군무원이 사인하였다. 일과 후에는 일기 수양록에 올려지는 일들이 감사뿐이었다. 밤샘 작업하던 회사 일에 비해 큰 부담이 없었다. 현해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광안리 우거진 숲을 더 푸르게 하고 규칙적인 군인의 병영생활을 윤택하게 휘감아 스쳐 갔다. 이처럼 활짝 핀 얼굴로 편하게 쉴 수 있고 사색할 수 있다니 별장이나 다름없었다.
꿈같은 병영생활
1976년 2월 20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하여 M1 소총을 들고 6주간 받는 훈련은 무겁고 손이 시려 힘들었다. 다시 입소하라면 못할 것만 같았다.
부슬부슬 비 오는 날 내무반에서 쉬고 있는데 3주차에 면담을 위하여 인쇄 분야에서 종사하던 훈련병들을 호출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혹시나 반신반의하면서 담당관 소령과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변하였다. 그 후 병과를 받아 자대 배치받는 날이었다. 따블백을 멘 채로 판초 우의를 입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마지막까지 호명하지 않아 혹시 빠지지 않았는지 더 긴장되었다. 우의를 쥐어짜듯이 귀를 쫑긋 세워 호명을 기다리며 다시 기도하였다. “하나님, 사람을 의지했던 일 용서하여 주세요. 전방이든 가장 어려운 곳이라도 가겠습니다.” 5~6백 명 중에서 마지막 한 그룹 정도 몇십 명만 남았는데 그때 좋은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남행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다음날 도착한 곳은 부산 보충대였다. 대기하는 기간에 주임 상사의 부탁으로 돼지 막사 설계도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동기 7명이 육군인쇄 공창으로 명을 받고 4월에 배치되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으로 붙잡아 훈련하기 위한 부대였다. 범머리 십자루에게 지워진 과제는 출판물 교정이었다. 선임병 중에 이인교 상병과 윤 상병은 동기 박용하 이병과 내게 잘 대우해주었고, 총책임 군무원들 (군속)과 어여쁜 아가씨들이 함께 있어 일반 회사와 다를 바 없었다. 초교는 우리 풋내기 몫, 이교는 선임자들, 삼 교는 군무원들, 최종 확인은 책임 군무원이 사인하였다. 일과 후에는 일기 수양록에 올려지는 일들이 감사뿐이었다. 밤샘 작업하던 회사 일에 비해 큰 부담이 없었다. 현해탄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광안리 우거진 숲을 더 푸르게 하고 규칙적인 군인의 병영생활을 윤택하게 휘감아 스쳐 갔다. 이처럼 편하게 쉴 수 있고 사색할 수 있다니 별장이나 다름없었다.
군수기지사령부 웅변대회
2주쯤 지났는데 중대 소위 부관께서 이등병인 나를 호출하였다. “자네는 웅변을 잘한다며.” 뜬금없는 질문에 군기가 바짝 들어 “아닙니다.” “그러면 해 보겠어?” “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방과 후 남산에서 아현동을 거쳐 봉원동까지 걸어오다가 웅변대회 게시문 앞에서 넋을 잃고 발길이 강력 접착제에 묻지도 않았는데 한참 서서 벽보를 바라본 적은 있었다. 욕구와 생각뿐이었는데 계속해서 부관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면 고려대 국문학과 3학년 김만수 일병에게 원고를 부탁할 터이니 한번 잘해봐.” “네.” 그 후 군수기지사령부 6.25 멸공 웅변대회에 창 대표로 선임되었다. 지난해까지만 하여도 6개 내무반대표가 나와 창 대회를 거쳐 선발하였는데 지명을 받다니 창 내에서도 나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을이 되니 지난번 경험 있으니 안전 웅변대회도 10월에 출전하라고 다시 임명받았다. 3년간 6회 혼자서 창 대표가 되다니 무슨 영문인가…….
제대 전 성환 탄약 창에서 마지막 안전 웅변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무반에서 걸터앉았다가 잠깐 졸았는데 비몽사몽간에 “너를 웅변대회 연사로 나가게 된 것은 대회 수상이 아니라 앞으로 너를 나의 종으로 쓰기 위함이다.”라는 선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리고 많은 군중 속에 앉아 있는데 대림감리교회 이병설 담임 목사님께서 내게로 걸어오셔서 목회자 가운을 입혀주시고 다시 강단으로 올라가셨다. 이때 나는 두렵기도 하고 나의 진로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대로 인쇄 사진제판 분야에서 세계 일인자의 꿈을 이루게 하시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보다 앞서서 철저한 계획과 준비로 장소와 훌륭한 지도자까지 준비하신 분임을 깨달았다.
신학에 앞서 청년회장 위한 기도
그렇다고 신학 한다면 부모님 두 분의 회갑이 코앞으로 다가오는데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하나 걱정이 생겼다. 입시학원의 목표도 수정해야 했다. 그래서 한 가지 청원의 기도를 드렸다. “만일 제대 후 청년회장을 시켜 주세요. 목회자의 길을 갈 수 있는지 시험한 후에 가도록 청년회장의 임무를 겪어 보겠습니다.” 다시 꿈같은 일이 일어났다. 대림감리교회 청년회가 일반 1 청년회, 대학부 2 청년회 두 개 부서가 있었다. 1 청년회는 김영호 회장이 있었지만 남아있는 회원은 말띠 김현중 유옥희 조양영과 제대한 나를 포함하여 네 명이었다. 여기서 나에게 '회장을 맡아주든지 아니면 1 청년회를 없애자'라고 하였다. 내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왜 없애느냐는 말은 꾹 참았다. 그래서 회장으로 지명받고 1980년도 50명 전도 목표를 세웠다. 그러자마자 차진순 회원이 고작 50명이냐고 반문하였다. 회장이 되면서 4명에서 10여 명의 청년이 모였는데 하나님께서 못하실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어 1979년 12월까지 2개월 목표로 변경했다. 표어는 <성령 받고 전도하자>로 정했다. 숨죽이고 기다렸던 동토의 새싹처럼 움츠렸던 회원들이 기지개를 켜는데 멈출 줄을 몰랐다. 멀리서 지켜보던 청년들이 모여 함께 전도에 혈안이 된 듯 새 회원들까지 몰려왔다. 속회도 늘어나고 50여 명의 회원 목표가 쉽게 달성되었다. 1980년 목표는 기드온 300명 용사였다. 10월에 총 전도 집회에 287명이 모였고 평균 화요일 청년집회에 2층 성전 본당에 120명 정도 모여 예배를 드렸다. 1980년 12월 청년 성가대원들에게 먼저 청년회부터 참석하고 크리스마스 행사에 나가도록 했다가 주일 대 예배 시간 설교 시간에 "요즈음 청년들이 무엇 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목사님에게 혼쭐나기도 하였다. 나는 청년회가 살아야 교회도 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청년 예배에 신중히 처리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세 자매 언니 박복순 회원이 듣던 최귀라의 찬양이 내 가슴을 시원하게 하늘을 향하여 활짝 열어주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반복해서 듣고 있다.
내영혼이 그윽히 깊은데서
<최귀라> https://youtu.be/SYHxR6HNguE
<영어찬송> https://youtu.be/9qYZros8oHI
순교자의 아들로 올겐 반주자인 강승구 씨는 당시 전두환 정권이 피종진 목사, 박조준 목사, 이천석 목사 등 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을 부정 축재자라고 하여 안기부에 끌어들여 고문을 자행했으며, 심한 고문을 당한 후, 나와서 얼마 있지 않아 소천했다고 진술했다. 아내 최귀라 씨는 미8군에서 노래했던 사람으로 패티킴이 선배이고, 윤항기 씨와는 같이 활동했다. 이후 33년 동안 복음 가수로 활동해오고 있다. <황규학 편집> |
대림감리교회 청년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처럼 사막 한가운데 메마른 모래 같은 청년들에게 쏟아지는 성령의 단비는 놀랍세 스며들었다. 하나가 되어 회사 전도에 앞장섰다. 매주 토요일마다 밤샘 기도하고 새벽예배는 청년회에서 사회를 하였다. 주일 낮 예배 후 심방에 주력하였다. 밤 근무자들은 늦게 찾아가 함께 자기도 하고, 여자의 경우 쌍문동에서 퇴근하며 김현중을 불러 밤늦게 환자 심방을 하였다. 담당 교사로 전순천 전도사님, 김수민 전도사님과 김진무 장로님께서 지도하여 주셨다. 특히 1 청년만의 사무실 아지트가 있어 주변 원풍모방 김옥희, 태평양 화학, 돈 보스코 천정희, 대방동 농심, JH 공업사에서 세 자매 박순희 박현순 동생을 데리고 나온 박복순 큰 언니가 들었던 최귀라 카세트는 인기가 대단하였으며, 남자들까지 전도하였다. 막내 박현순은 백양 메리야스, 영창 등 회사를 옮기면서도 불같이 전도하여 직장 속회를 만드는 데 앞장섰다. 42년이 흘렀는데도 "저는 할머니예요. 손자들이 있네요. 지영이 오빠가 그리워요." "그때는 청년회 막내였는데 현순이가 큰일을 했지." 일주일이 지나서 "오늘 지용이 오빠가 직접 전화 줄 거야." 서로 연결해 주었다. 이지용 회원은 양귀용, 임원빈과 회장 넷이서 똘똘 뭉쳐 기도 대장이었고 운동 신경이 발달하여 청년회 체육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재만 선교부장은 남대문 과일가게에서 일하며 피곤한데도 청년 행사에 빠지지 않고 아주 열정이었다. 가장 성실하고 미모의 부회장 이영숙과 결혼까지 하면서 부흥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 1980년 5월 대림감리교회 창립 예배에서 대표로 청년회장 기립시켜 뜨거운 칭찬과 박수로 격려받고, 그해 12월 송년 예배에서 박현순은 전도상까지 받았다. 이렇게 구성된 22개 속회 조직도가 벽에 붙었다. 이지용 양귀용 임원빈 이재만 이영숙 그리고 돼지띠 김용창 민광식 안상금 조순애 이경희 안순영 서정자 청년들은 밤새워 떡볶이를 간식으로 머리를 맞대고 아이디어를 모았다. 재정에 대해 '청년들 직장을 다니니 스스로 하라'라고 하셨던 이병설 목사님께서 이원홍 선교부장에게 선교비를 지원하라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여셨다. 새벽마다 기도하시던 영락장로교회 장로님께서 후원금을 보내주셨다. 야외에서 코치도 없이 남자 축구부와 여자 배구부는 이웃 회사팀들과 주일 예배 후 친선 경기를 하였다. 직장 여자들은 남자 직원들을 뜨겁게 전도하였다. 실내에서 탁구 게임도 하였다. 보고서 행정 서류와 전도지 문안 정리는 경희대학교 국문학을 하던 2 청년회 박남희 선생이 산뜻하게 도왔다. 이렇게 성령님께서 총감독이 되셔서 일사불란하게 부흥의 불길이 교회와 청년들의 가슴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다음 해 청년회장은 연이어 2년을 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교회 어머니와 강복순 권사님 두 분이 여선교회 설악산 관광하시며 혼사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 후 3주 만에 현재 아내인 서정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나는 얼떨결에, 아내 역시 사모의 길이 무언지 모르고 어머니 회갑을 앞둔 가정의 일로 제2 성전 건축 후 처음으로 11월 14일 혼례를 치르고 친지와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강릉 경포대행 고속버스 편에 홀가분하게 신혼여행을 떠났다.
나의 등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by 호산나 싱어즈 https://youtu.be/EZvrRoGEXdk
대림감리교회에서 청년회장 활동 [대림교회 30년사] 이병설 목사님은 총리원 총무 임기 후 기성교회에서 현상 유지냐 아니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교회 개척하느냐 갈림길에서 1971년 4월 11일 부활절에 대림교회를 서울 대림동에 개척하였다. 우리 가정은 1974년에 독산동으로 이사 와서 온 가족이 대림감리교회에 등록하였다. 당시 어머니 정금순 권사는 본 교회의 기도의 산증인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철야를 했는데 마치 얍복강에서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기도 내용에 100명이 모이면 1,000명을, 서울 큰 교회도 없을 때 개척 교회에서 버스와 자가용을, 5억 성전을 계획하면 10억과 교육관까지 달라고 기도의 불을 지피는 성도들의 본보기였다. (151쪽) 초창기에 대림교회는 청년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제대하고 돌아온 안상원 청년이 큰 활약을 했고, 화요 저녁 청년집회만 나오며 주경야독하는 이들이 많았다. 청년회원 중에 임복만, 김환희, 안상원 등은 훌륭한 목회자들이 되었다. (154쪽) 1981년 약 200여 명의 청년이 모여 한창 부흥하고 있을 때 여주 강가 여름 청년 수련회에서 해외 파견 근무를 열흘 앞두고 공성자 오빠와 친구 2명이 익사했다. 여주 여광원 박운환 장로와 지역 군 보안사 중령이었던 문현채 권사의 도움으로 대림교회에서 시신을 안치하고 장례를 치렀다. (169쪽) |
81.5.10 제2성전 정금순 장로 (중앙 녹색) | 이병설 목사 가운 안수식 | 2006.5.28 제 3성전 대림감리교회 |
4명이 200 여명으로 성장하는데 성령의 횃불이 되었던 청년들 (앞 좌 두번째 박현순 사진 전송)
제5장 기독교대한감리회 철산교회
현재명 : 행복한교회
신학생 전도사 철산교회 개척
친구들은 경험도 없으니 시골부터 시작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도시를 무서워하실까. 아니라면 도시에 선교지를 정해도 부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이미 광명시에서 셋째 여동생을 포함하여 이명숙 박귀분 대림 감리교인 세 집사가 교회가 멀어 준비기도 중이니 개척교회 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그대로 결정하고 이사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설교였다. 대한 상공회의소 현장이 남대문에 있어 서울역 앞 동자동에 있을 때 가까운 새벽예배에 나가 모두 귀가하면 작은 강단 앞에서 아침까지 설교 연습하였다. 캐나다 틴데일 신학대학원에서의 설교학 시험시간에 옷차림까지 지적하였다. 한국인은 흰색을 좋아하여 흰색 양말을 신었다가 검은 양복과 매치가 안 된다고 지적받은 학생은 의아해서 어쩔 줄 몰라 한 적도 있다.
일단 보인건업 현장 총무직을 사임하고 4학년 마지막 수업과 졸업 논문, 철산교회 창립 예배를 준비하였다. 이사한 철산동 사택에서 첫 기도회는 가족 중심이 되어 12명이 모였다. 그런데 건설 사업을 같이 했으면 했던 목회하는 동생을 배신자처럼 여기지 않고 오히려 형님께서 교회를 더 걱정하며 첫 출석부터 매주 나오셨다. 그리고 광명시청 앞에 24평 3층 건물을 보증금 800만에 월세 10만 원을 혼자 계약하였다.
개척 예배는 1984년 4월 22일 부활절에 대림감리교회 김후근 목사님을 모시고 이흥기 안상윤 집사의 가정에서 드렸다. 창립 예배는 신학교 친구들 특히 김경집이 썬팅을 예쁘게 했고, 여럿이 어깨띠를 띠고 여기 저기에서 손님 안내까지 맡아주었다. 6월 10일 성령강림절에 지방회 주관하에 대림교회 성도들까지 함께 드리며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하나님 힘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성령께서 인도하시옵소서! 경험도 목사 안수도 받지 않은 신학생입니다.” 첫해 오직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기도,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와 전도에 전념하였다. 형님은 교회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었다.
어느 주일 아침 교회로 오는데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고 성경책을 든 청년을 보고 우리 교회에 나오기를 기도하며 뒤따라왔다. 그런데 그녀가 나를 앞서서 철산교회로 올라가지 않는가.... 그 청년 정선옥이 자기 가족을 인도하여 교회에서 튼튼한 일군이 되었다.
또한 수요 저녁에 세 명의 여자 청년이 나왔는데 장판 위에 앉기가 얼마나 불편했는지 짧은 치마를 무릎 아래로 내리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을 보았다. 그 후 다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은 개척자의 애간장을 태웠다. 오히려 장의자를 마련해 놓는 기회가 되었다. 의욕과 실수를 번갈아 하며 연말에 평균 34명의 성도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렇게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최영 장군 부친의 유언처럼 경제가 잘 따라야 하면서도 무관한 목회자 삶의 첫해가 시작되었다.
교회 성장의 원동력, 헌신
공식적으로 11년 5개월 1984. 4. 22 부활절부터 1995년 9월 17일 주일 예배까지 개척하여 사역하는 동안 젊은 제자들이나 성도들 가운데 성직자들이 개척교회에서 적지 않게 배출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첫째로 헌신자들이 많아 열성이다. 둘째로 전도에 사명을 가지고 가족 인가귀도와 친구, 이웃을 인도한다. 셋째로 하나님 사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금한다. 넷째로 청년들과 학생회와 교회학교가 활발하다. 다섯째로 꿈을 가지고 산다는 특징이 있다.
철산교회는 온 가족과 형제자매들까지 출석하였다. 부모님께서 헌신적으로 아파트를 아들에게 유산하는 것보다 성전 대지 150평 매입비로 바치셨다. 7남매 중 형님은 건설업자답게 동생은 성전 건축에 걱정하지 말고 초신자임에도 동생 설교가 좋으니 교회 부흥시키는 일에만 신경 쓰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 보인건업에서 매주 월요일에 초청해서 기업예배를 부탁하였다. 이종수 자형은 수석 집사로서 교인들과의 회해와 담임자의 의견에 아멘으로 순종했다. 하루는 잠실에서 1시간 거리인데 금요 철야 기도회 후 차량으로 봉사하고 잠실로 귀가하던 중 피로를 견디지 못하여 성산대교 회전 난간에서 한쪽 바퀴가 넘어가 한강 백사장 위에서 대롱대롱 매달려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하였다. 매제들도 교회 봉고 운전과 자기 봉고차로 봉사하고 또 누이들과 같이 교회학교 교사로 충성하였다. 형수님은 속회 인도자로 막내 조카 미숙이는 피아노 학원하며 피아노 반주자로 주일예배, 철기도회까지 수고하였다.
신학생 담임 전도사 중심으로 첫해 30여명, 다음해 60여명이 모이자 24평이 부족하여 3년차에 철산 3단지 인복유치원 156평으로 이사한 후 120여명이 모였다. 자치적으로 부흥회도 일 년에 3~4회 열면서 포천여름산상성회, 사경회와 전도부흥회를 가졌다. 부흥 강사님들을 떠올리며 내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말씀을 전하고 찬송과 기도로 이끌면 성도들이 아멘하며 은혜 받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결단하였다. 또한 통성 기도 중에 회개와 치료의 역사가 일어났다. 봄 부흥회에 플래카드보고 시흥 신천리에서 사위 등에 업혀 오신 이금례 할머니는 다리가 치료되기 전에 성전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하여 가슴이 철렁거렸다. 그런데 집회 시작하던 첫날 나에게 이미 다리에 붓기가 있다가 이틀 후에 가라앉았다. 그 때 성도들이 “전도사님 무리하지 말고 집회를 쉬세요.”라고 하였으나 계속하였다. 그래서 이금례 성도님을 모셔왔을 때 함께 기도할 수 있었다. 기도실에서 주무시면서 집회에 참석하던 금요일 새벽에 의자라도 잡고 일어나시라고 하였다. 그러자 비틀거리더니 일어나자 할렐루야! 외치며 손뼉을 쳤다. 이일은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질병을 주셨다가 낫게 하시고 환자를 치료하여 주님 영접하게 하시려는 계획이셨다.
‘꿈 많은 소년’은 청년들이 내게 붙여준 별명이다. 어느 날 용산에 있는 음악학원에 등록하겠다는 정대길 정구현 어린 두 형제를 데리고 이숙희 집사님께서 오셨다. “얘들이 딴따라가 되겠다는데 어쩌면 좋아요?”라고 절망적으로 물으셨다. “네, 집사님 보내 주세요. 일단 배우게 꿈을 심어 주세요. 그리고 찬양단이 교회에서 대세이니 앞으로 전망이 있어요.” 그 후 동생은 학원에 나가지 못하고 형에게 배워 집에서 숟가락으로 베개를 놓고 밤낮으로 드럼 연습을 하여 아랫집과의 시비도 있었지만 이를 극복한 두 형제는 리빙사운드 찬양팀을 만들었다. 광명시를 벗어나 초청하는 곳이면 어디나 가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곧 신학하던 정대길 청년은 안양성결교회 담임 목사님의 눈도장을 받아 영문과 출신 딸과 결혼하여 목사가 되었다. 동생 역시 한영신학대학교를 졸업하고 전 철산교회인 행복한 교회에서 지금까지 찬양사역하는 부목사이다. 1989년 당시 성전 건축 헌금을 작정하는데 초등학생이었던 구현이가 10만원 작정했다고 봉투를 보여주자 이숙희 권사님은 너무 기특하여 얼른 10만원을 봉투에 담아주고, 이것도 모자라 조그만 집에서 넓은 집으로 이사하자마자 자신은 다른 교회 나가지만 3,000만원을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담보 대출하게 된 것은 오직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함께 자란 교역자가 청년 중에 김영만 목사와 김현석 선교사(호주) 형제, 이재수 목사, 이재연 전도사, 김국진 사모, 유경아 사모와 앞으로 꼭 기억해야할 강원도 출신 협성대학교 신학과 졸업한 여자청년 한사람이 더 있다. 그리고 권사 중에 이흥기 목사, 한난수 전도사, 집사 중에 강병기 목사, 소정순 목사, 김성수 전도사 모두 14명이 있다.
성전 대지 매입 과정
광명시 하안동에 대홍수로 안양천이 넘쳐 수재가 컸다. 또다시 철산동에도 수재가 발생하여 KBS 아파트 1층까지 덮치자 재개발 계획이 앞당겨졌다. 성전 부지 불하 拂下 조건으로 대지 35평을 기간 전에 사고 푹푹 빠지는 곳에 십자가를 올리느냐? 아니면 교회를 부흥시켜 성도들과 함께해야 하느냐? 여기서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 결과 광명시에서 성전 대지를 팔고 떠난 사람에 비해 우리 교회는 그러한 대지를 사게 되었다. 밤마다 성전 건축하기 위해 기도하였다. 먼저 성전 부지 150평에 두 배 이상 웃돈 주고 땅값 일억오천만 원을 위해 기도할 때 이봉희 권사가 계약금 일천오백만 원 마련하는데 한사람이 50만 원씩 하면 되겠다는 의견을 제안하자 전원 동의하여 기도 시간에 해결되었다.
성전 대지 매입은 이렇게 기적이었다. “형편이 다 어려운데 교인들에게 짐을 지운다”라며 형님의 걱정이 컸다, 이런 가운데 재무부장이었던 한혜시 집사는 불교 가정으로 출가하였다가 가까스로 광명에서 재미있게 교회 생활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일생」 소책자를 내며 크로스웨이 CROSSWAY 성경 대학 과정을 이수하고 이봉희, 임선영, 장영자 세 집사와 졸업식 날 함께 논문 발표도 하였다. 어느 날 “남편이 원주 시부모님 건강이 여의찮아 돌아가자고 하는데,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무거운 질문에 “네, 남편 의견을 존중하십시오. 부모님 곁으로 가십시오.” 떨어지지 않는 얘기를 하고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철산상업지구 3층에서 성전 대지를 위해 기도 중이었는데 결국 한 집사님은 순종했고, 우리 교회는 큰 일군을 보내게 되었다. 그 후로 2년간 매달 두 내외가 철산교회에 헌금을 보내며 가끔 먼 길을 달려와 함께 예배하기도 하였다. 그 사이 방문하면서 권사직 받은 다른 분들에 비해 원주제일감리교회에서 아직 집사 직분도 없었다. 이러한 그리움과 감사와 사랑을 다시 출석 교회에서 온전하게 신앙 생활하도록 당부하였다. 물론 우리와 함께 있었다면 어머니 최갑진 장로님처럼 장로 직분도 받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내게 남아있다.
부모님과 남편의 동의로 꿈을 싣고 수도권으로 이사하며 천사의 날개로 훨훨 날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7살 기성이와 온화한 아빠 이렇게 한 가정의 자녀 교육과 장래의 찬란한 별을 따서 망태에 가두는 듯 못난 목사의 말 한마디로 다시 울고 원주로 돌아가야 했던 1989년의 한 집사님의 모습을 그린다. 물론 지금도 당시 상황에서 원주로 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혜시 권사님은 말씀하지만 양 떼를 이끄는 목자로서 내게 맡겨준 양을 한 우리 안에서 떼어 다른 우리에 넣었다고 생각하니 할 일은 아니었기에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그날의 기억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다
필리핀 선교와 나락 목사 통역
1993년 월드선교회 유지열 선배의 권유로 필리핀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먼저 선교여행 하면서 나락 목사님을 소개받았을 때 열악한 가운데에서도 전도에 열정적인 헌신에 매료되었다. 따이따이에 본 교회가 있고 주변 지역에 22개 지교회를 세워 추수감사절이면 모든 지교회를 초청하여 함께 축제 예배를 드렸다. 두 번째는 필리핀에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은 김영삼 정부부터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어 해외 선교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나는 영어권인 필리핀선교에 호감이 갔다. 나락 목사님과의 교제와 저렴하게 선교 후원을 할 수 있는 장점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락 목사님의 불만은 UMC(United Methodist Church, 미국 연합감리교회) 소속으로 파송 제이기에 단기적인 목회 때문이었다. 2년이면 떠나야 하니 장기적으로 개교회나 지교회를 관리하기 어려웠다. 한국감리교회도 70년대까지 파송제였으나 교회 성장에 문제점이 있어 80년대 들어 장기 목회 제도가 도입된 점을 나락목사님에게 설명했다.
영어 회화에 깊은 관심이 있어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 학생들을 교회로 초청하여 학비 지원과 주일 설교 때 통역하였다. 그래서 나락 목사님 부부를 2주간 초청하였을 때 우리 교회는 물론 개봉 중앙장로교회에 초청받아 가서 초보인 내가 처음으로 주일 대 예배 통역 설교하였다. 그리고 필리핀에 사팡 필라 교회와 티바칸 교회를 150만 원과 200만 원 후원하여 건축하였다. 선교하면서 이 나라가 대통령의 장기 부정 통치로 1960년대 필리핀 이민 선호국 選好國이 빈민국가로 전락한 것을 알았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았다. 교회도 마찬가지여서 나락 목사님이 UMC 파송제에 불만이 컸던 것을 이해하며 그나마 한국감리교회와 우리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하였다.
제6장 장로 정금순 나의 어머니
성지순례를 따라가다
어머니 성지순례 여행 부금을 형님이 부어 잘 모시고 다녀오라고 내 비용까지 적지 않게 마련했다. 1994년 2월 10일간 20명 단체로, 11일간은 개인적으로 여행사에 의뢰하였다. 먼저 두 팀 40여명이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널 때 선장은 선상 설교를 부탁하였다. 그런데 아무도 나서는 이 없어 기회다 싶어 벌떡 일어났다. “영광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복장을 하고 2000년전 예수님께서 서셨던 이 자리에 선다는 일은 꿈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5장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제목으로 5분 설교를 하였다. 길이는 53km 넓이는 166㎢ 깊이는 26m. 이 광활한 갈릴리 호수가에서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이에 순종한 제자들에게 그리고 여러분과 저에게 똑같이 묻습니다. “왜 내가 여기에 왔느냐? 왜 너희를 이곳으로 인도하였느냐?” 다시 말씀드리면 갈릴리 바다에 예수님이 오신 목적과 우리를 이곳에 부르신 목적을 묻습니다. 그때 제자들 그리고 순례하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From now on, you will take people.”(헬라어로 사람을 사로 잡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영, 성령님께서 주신 이 말씀이 항상 저와 여러분에게 소명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단체를 보내고 터키 이스탄불과 그리스 아테네, 고린도를 둘러서 가이드까지 보내고 페리호 BLUE STAR FERRIES에 74세 엄니와 둘만이 승선하였다. 아침에 출발하여 8시간 걸려 오후에 밧모섬 Patmos에 도착하였다. 당일 저녁 8시에 돌아가야 했기에 도로도 익숙지 않지만 요한의 계시 동굴을 찾아 비탈진 자갈 산을 탔다. 2m 이상 되는 선인장 가시에 찔리면서 자갈에 주루륵 미끌어지는 데도 엄니는 힘들다는 말씀 한마디 없이 중턱에 이르러 수도원 신학교에서 호의로 베푸는 식사를 하였다. 계시동굴 입구에 신부님이 친절하게 계시 받을 때 천정 암벽이 세 갈래로 갈라졌던 동굴로 안내하였다. 망망한 지중해 연안 깊숙이 에게해 외딴섬에 귀양살이하며 실족하지 않았던 사도요한을 상상해 보았다. 그가 받은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 7교회에 보내는 예수님의 장차 나타날 예언이었다.
요한은 자신이 예수의 환난, 예수의 나라,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였다고 한다. 그는 목회자와 성도에게 제자의 도를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계1:9)
마지막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 M.Div를 마친 이집트 친구의 작은 아버지 교수댁에 이틀 머물며 알렉산드리아와 고센 땅으로 택시를 이용하였다. 박제된 요나의 큰 물고기를 둘러보고 나일 강 삼각주 고센지역을 돌아보니 참으로 기름지고 새까만 땅으로 비옥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혹 현대판 홍수 피해는 없었는지 염려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받기에 분에 넘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잘 먹고 자녀를 잘 낳아 애굽의 핍박을 피하여 다시 가나안 땅으로 입성할 히브리 민족으로 번창하지 않았나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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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 위 예수님 배 (좌) 그리스 영해 領海 밧모섬 (중앙, 터키 인접) 밧모섬 (좌)
동물인가? 인생인가?
아랫집 경호 아주머니께서 "종경 이는 어렸을 때 말할 수 없이 개구쟁이더니 이젠 조카가 글쎄 효자구먼." 하셨다. 효도 孝道라고 해봐야 아버지 어머니를 잘 공경하고 섬기는 도리라고 하는데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 반문하고 싶다. 울 엄마는 3남 6녀 출산하신 것만으로도 여자 인생 거의 다 보내셨다. .
먼저 홍역으로 어린 남매를 잃고 7남매를 키우며 농사일을 돌보다 6·25 때 입대한 아버지 대신 큰 누이에게 살림을 맡기고 보따리장수로 전쟁 통 험난한 위기를 극복하셨다. 머리에 이고 양길리 금학리 어송리 흑석리는 물론 배타고 고파도까지 안 가신 데가 없이 다니시며 하룻밤 묵고 집에 오실 때는 쌀보리 콩 마늘 등 잔뜩 머리에 이었다. 한 푼 벌어 텃밭도 넓히고 어려웠던 큰댁 집터도 마련해 주셨다 하니 보통 억척이 아니었나 싶다.
가끔 어머님의 힘을 자랑하기 위해 나는 짓궂게 다섯 딸에게 100세 어머니와 팔씨름해 보라고 한다. 인천 대공원에서도 팔씨름 애기가 나오자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어머니의 건강 비결이 타고난 힘이라면 다른 하나는 병원과 약을 일생 의지하지 않았던 데 있지 않나 생각한다. 아무리 아파도 병원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죽어도 하나님만 의지하겠다고 고집부린다. 자녀들에게 보통 짜증나는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제와 생각하니 좋은 점은 면역의 힘이다. 17년 전 84세 때 알게 되었다. 밤 중에 캄캄한 계단을 내려오시다 헛디뎌 발목이 딱 부러져 덜렁덜렁 거렸다. 생전 처음으로 입원하셨는데 두 달도 안 되어 퇴원하셨던 일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면역이 좋아 빨리 접합되지 않았나 하였다. 그리고 2021년 11월 8일 신장 기능이 약해져 호흡 혼란이 왔는데도 “이제는 병원가면 죽는다.”며 완강히 거절하셔서 119 구급차로 병원에 모시고 갔다. 어느 때는 체질적으로 병원 얘기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이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여전히 기억과 총명은 남다르다. 친정 손자녀들이 결혼해서 낳은 증손자녀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실 때 보통 듣는 이들에게 경이로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집안 결혼식 또는 돌이나 행사가 있을 때 앞장서서 어머니께서 가시려고 나서면 노인네가 다른 분들에게 피해준다며 가만히 집에 계시라고 누이들이 막아섰다.
늙으면 동물인가? 인생인가?
이쯤에서 “엄니는 100세지만 생각은 처녀처럼 젊은이 못지않으니 현대판 고려장이 되게 하지 말자”고 내가 지난해 형제들에게 권유했다. 친정 조카의 아들 결혼식에 다녀온 소감을 그날 저녁 회상하였다.
"97 노모, 그 친구들"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하루에 발품 세 곳
행복한 고민이로다.
팔순 감독님 초청 11시
윤 목사 아들 결혼 12시
외사촌 아들 결혼 12시
죄송한 마음으로 축의금 전달하고 친구에게 가자,
그런데 아침부터 노모님
화장에 밍크코트 챙겨 가부좌하시며 왈~
늦지 않게 가
연세 97이라
다섯 누이가 남들에게 부담 준다며
집에 족쇄를 채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니야!
나이는 불문이야.
회갑이 훌쩍 넘어도
더 젊어진다고 나 자신 착각하고 있잖아
어머니 그러면 남은 삶
송장처럼 무덤 집에 갇혀둔단 말인가?
고려장보다 더 악한 자식,
21세기 노인 문화가 엿보인다.
시간이 촉박하게 에스엔 에스 SNS 타전하다
어머님 모시고 있으니
모친 원하시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마음이 편하다.
꽁꽁 얼어붙은 차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처음으로 조수석에 앉혀드리니
그 풍채가 사장님 같다
워낙 나들이를 좋아하는 분이라
차타기, 여행은 멀수록 더더욱 신바람 낸다.
친구 분들과 LA, 하와이도….
가족과 한 주간의 휴가로
토론토 나이아가라 디트로이트 워싱턴 뉴욕 퀘벡 몬트리올을 도는 드라이브코스 여정
그다음 날
조용히 새벽기도에 나가 기도하던 여장 아니던가?
일본 후쿠오카 나고야 동경
중국 베이징
목사인 아들 따라
필리핀 마닐라 따이따이 주변 교회들 선교 탐방
평생소원 성지순례까지
아내도 못 가본 이집트 이스라엘 터키 그리스
작은아들 데리고 형님 배려로 3주간 원 없이 비행기 트랩을 오르내린다.
그뿐인가
타이태닉형 거물급 선박에 실려
에게 해 바람에 가슴 노출 만끽하기도~
밧모섬 해변에서 길을 잃어 방황하던 일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사도 요한 유배동굴 찾는 더듬이가 잘렸는지
길도 없는 가파른 돌 짝산 오르느라
키보다 더 자란 선인장 가시에 찔리고
그 사이로 미끄러질 때
20년 전 엄니 당찬 소년까지 저리 비켜 세웠다
아직도 산악회 야구장 찾는 분에게
죄인이 되고 싶지 않아 고향 결혼식으로 핸들을 돌린다.
식사는 뒷전
슬그머니 조카딸들 곁 식탁으로 옮겨 앉는다
친정 손자 결혼식에
손아래 다섯이나 되는 올케는 한 분도 보이지 않으니….
외롭지는 않으실까?
걱정이 앞선다.
그 순간 조카 딸들이 애교를 떨며 끌어안고
"우리 고모!"
어쩔 줄 몰라라 왁자지껄하다
아!
저 외사촌 누이동생들이 어머님의 친구들이로구나.
카메라 셔터를 터뜨리며
"너희들이 우리 엄마 친구가 되어주는구나!"
고맙다 고마워
이제 보니 어머니 친구 너무 젊다 젊어
만감이 교차하네.
폐가 된다고 무덤 집에 홀로 머물게 하더니
4~50대 조카 친구들과 꽃을 피운 오늘 하루
노모를 모시는 다른 생각 그 하나가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을 끌어안게 하는구나!
그래그래,
엄니 주변에 세워지는 친구들
가을 단풍 옷 갈아입듯
진귀한 풍경을 연출하며
세월 추리마저 예쁘게 꾸미어 간다.
그래서 엄니는
아침부터 몸매를 가꾸셨나 보다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노모
그 지혜야말로
어찌 알 수 있으랴
정말 돋보이는 백발의 영화가 아닌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December 2nd 2017 Andrew)
「정읍 구절초 사랑의 향기」
나들이에 며칠 전부터 들썩들썩
5남매 정읍 구절초 축제
함구령 내린 3년
지난 칠월 별이 되신 어머니
희고 검고 로고 마스크
누구에게 벗어줄까?
차라리 손에 든 채
야호!
노랗게 고개 숙인 김제 황금벌판
금빛 반사로 환영한다.
차창을 열고
활짝 기지개 켜며 외치는 함성에
가볍게 방향 잡는 운전대
푹 빠진 장거리 드라이브 네 시간
시흥시청 대전 호남고속도로 옥정호 테마공원
강장 항균 항염 면역 피로 개선
구절초 홍보물 보다
솔숲 잠, 꽃과 함께 춤 치료
강을 건너
보슬비 맞으며
너른 산길 따라
포토존을 찾아
덩생들의 따스한 손길에 인도되어
꼬마들 사이 구절초 앞에 서니
어느샌가 ‘김치’ 부르는 카메라
‘오늘따라 무척 가벼운 둘째 누이 발걸음
꽃보다 더 아름다운 양귀비
구절초 꽃향기 흠뻑 취하소서!’
한우 마을 거세 고기
1.5 kg 135,000원
싱글벙글
조기 매운탕 저녁 상차림 물리고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 조영남과 손잡은 미인들
차가운 산 공기 타고 콧노래가 흐른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마을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
별과 어울린 어제의 보름달이
오늘 우리에게도 비추어
더 케이 The K 가족호텔로 입성
이구동성으로
이게 웬일이야.
또 오자며 생기가 철철 넘친다.
어릴 때 고생하시던 큰 누이
셋째 소풍 가는 날
눈물만 흘리는 모습 보고
붕어빵 세 개 챙겨
다녀오라는 말에 뒤따라갔다는 이야기
밤새 뭉클~
새날 빛이 창문 틈으로 샌다.
노고단 등정에 제법 힘깨나 쓰는 아침 한우구이
이왕에 남편들까지 기력을 돋구자며
금산 인삼마을에서 6년근 인삼 뿌리 세 채씩
한 보따리 집어 들고 파안대소
그래 우리 남매들
언제나 푸른 청춘의 날개여
독일 나일강 토론토 나이아가라도
힘차게 날아보자
구절초 사랑
파이팅!
October 12th 2022
Andrew Ahn
엄니를 그리워하는 시 詩
『새하얀 구절초』 안상원
섬진강 물안개 따라
옥정 호에 피어나는 그윽한 향기
엄마의 품처럼
동그라미 미소로 맞아주는
새하얀 구절초
함구령 지난 삼 년,
어느 날 밤하늘별이 되신 엄마
해 저문 물가에 별을 켜니
하얀 잎이 잔잔한 너울에
유난히 반짝이는 은빛 물결
커튼 사이로 다가온 샛별이
이른 아침 눈부시게 비춘다.
October 15th 2022
Andrew Ahn
제7장 김영삼 대통령 세계 여행 자유화
아들이 보낸 나라 캐나다
“하나님, 이제야 당신의 뜻을 깨닫나이다.”
1995년 1월 22일 09:20 안진환의 소천
1995년 9월 20일 캐나다 온 가족 이민
“아빠, 이다음에 아빠처럼 될 거야.” 하던 아들은 엄마를 닮아 얼굴도 멋진 사나이처럼 외탁하였고, 키도 무럭무럭 자라서 나의 기쁨이요 희망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에 아무런 이상 징후 없이 자전거를 타던 건강한 아들이 팔을 올리지 못하는 모습을 철산교회 아동부 오후 예배 시간 어느 선생님이 발견하였다. 며칠 후 상태를 지켜보다가 광명시 외과병원에서 경희대학병원에 의뢰하여 정밀검사 결과 치료할 수 없는 근육종 악성종양으로 판명되었다. 아내와 둘이서 다시 한번 동숭동 서울대학병원에 진단서와 CT 자료를 가지고 상담한 결과, “이런 병은 고쳐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같은 답을 받았다. 그렇지만 포기할 수 없어 포천 기도원에 가서 보니 같은 질병이 있는 환자들이 가족과 함께 여럿이 하나님께 매달리고 있었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어깨를 그냥 지켜볼 수만 없어 지인을 통하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 수술을 전제로 입원하였다. 그 후 아들은 “한쪽 팔이 그냥 있는 느낌이야.” 어느 때는 “아빠. 언제 아프지 않을까.” 그러나 아들에게 치료 방법이 어렵다고 하지 못했다. 결국 권혁모 사모님의 안내로 강원도 광림교회 사랑의 집에 입원하게 되었다. 죽음의 치료를 위하여 가는 춘천 국도는 붉게 물들다 미쳐 낙엽이 되지 못한 채 매달려 있는 늦가을 단풍이 따스한 햇볕에 여운의 미소를 머금은 채 맑게 빛나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설악산 호텔처럼 조용하고 깨끗한 침실이 마련되어 아들은 아내와 아빠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걸어 침대에 올라앉았다.
이 글을 정리하다 보니 가슴 메는 일과 회개할 일들이 무더기처럼 쌓인다.
먼저 아들에게 무심한 아버지였다.
“미안하구나. 못난 아비를 용서해다오.” 가정보다 목회가 우선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엄마에게만 초등 5학년인 너를 맡겨놓고 돌보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자책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사촌인 지은이가 백혈병 혈소판 저하로 너무 자주 피를 토하여 모두가 얼마나 살까 그랬지. 그때 넷째 고모부는 직장을 그만두고 수년간 병간호에 매달렸어. 지금은 진경이 누이와 캐나다에서 유학하고 귀국하여 영어 선생 하다가 결혼까지 하여 예쁜 딸을 기르며 충주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 그런 생각을 하면 아빠의 삶이 네가 낳는 순간으로 돌아가고픈 심정이야. 그래서 아빠 박사과정을 밟다가 엄마가 “이제 아빠만을 위하지 말고 아이들 공부를 위해 도와요.”라는 말에 그 이후 미련 없이 학업을 그만두었어. 네가 보내준 캐나다 토론토에서 네 여동생 둘을 보았지. Janet 큰동생의 얼굴은 아빠 같은 데 눈동자나 성격은 다 엄마 닮았지. 큰언니랑 같은 라이어슨대학교 졸업하고 애완용 돌보는 직장에 다니지. 막냇동생 Pearl은 얼굴이나 피부가 너를 닮았어.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토론토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아빠 글로벌 독서토론회에서 함께 온라인으로 함께 책을 읽었어. 이번 9월 학기에 토론토 대학원에 입학하여 선생 훈련 코스 Masters of Teaching을 전공하고 있지. 엄마와 막냇동생은 네가 쉬고 있는 금학리 가족공원에 다녀왔어. 한국에서 교사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아마도 자주 오빠를 돌아볼 거야. 너도 알겠지만, 할머니께서 지난달 7월 10일에 할아버지 곁에 묻어달라고 하셔서 네 옆에 누워계시지. 아빠보다 먼저 천국에 가서 그 나라의 모습도 궁금하구나. 얼마나 좋으면 아빠를 잊고 사는지 27년간 꿈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구나. 아무쪼록 평화의 나라. 할아버지 권사님, 할머니 장로님, 큰아빠 장로님 자주 뵙는지도 모르겠다. 이 땅에 사는 날까지 아빠가 가족 동산 책임지고 예쁘게 가꾸려고 동산을 당숙에게서 샀어. 그리고 올해는 사과나무 네 그루를 심었어. 계절 과일이기에 너를 더 자주 기억하고 가서 풍성한 열매가 열리도록 힘쓰려고 해. 진경이는 1남 2녀의 조카를 두었지. 김나윤, 김도연, 김시우야. 하남에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 자형 김정현은 키도 크고 잘생겼어. 누이와 동생들을 잘 돌보고 있어서 아빠는 행복하지. 네가 아빠처럼 되겠다고 하여 아빠 친구들에게 아들 몫까지 산다고 하였는데 38살인 너처럼 박력 있게 살 수 있겠니. 네가 먼저 하나님 품에 안기지 않았다면... 울먹이다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멈추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는 항상 우리를 더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면서도 너를 생각하면 더 말을 잇지 못해. 그럼 또 대화하는 날 까지 이 땅에 남아있는 식구들을 위해 기도해줘. 아빠도 자주 가보고 동산 찾아 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게. 따뜻한 주님 품 안에서 잘 있거라. 안녕.
다음으로 회개할 일은 목회자로서 '원한'을 가져서 안 된다는 깨달음을 받았다. 간단히 스케치한 소제목 중에 제5장 2항에서 「아들이 보낸 나라 캐나다」와 서두에서 「아내와 함께 새로운 세계 캐나다 이민 생활의 독특한 문화에 푹 빠져 캐나다인으로 살아가기까지 일상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글이다.」라는 내용을 떠올리다가 ‘원한’ 두 글자가 선명하게 스쳐 갔다. 2022년 10월 1일 새벽 IT 프리미어 타워 당직실에 떠올랐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복음 아닌 원한을 품고 일본의 문화와 언어를 알아 정복하겠다니 웬 말인가?」 펜팔하던 미사코 양도 헤어지게 하시고, 1995년 2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하늘나라로 부르셨다. 아들로 인하여 온 가족을 일본 대신 캐나다로 이민시키면서 사명을 주셨다. 그런데도 「캐나다 거주민들을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라」고 보냈건만 자녀 교육과 Tyndale 대학원 공부에 빠지자 교회가 부흥하는데도 3년 만에 사임을 시키셨다. 그것은 소총수가 후퇴할 길을 미리 열어놓을 때 패전하듯 박준하 목사님 은퇴 후에 철산교회로 돌아갈 계획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한인교회도 떠나야 했고, 철산교회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형님의 도움으로 성요셉교회를 박종경은 2003년 1월 3일에 개척하였다. 그러면서 박종경 가족들 간에 철산교회 장로인 종경 형님과 자형인 이종수 장로와의 다툼이 일어났다. 이때 평화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첫째로 신임 한정호 감독님을 통하여 “목사님, 철산교회 들어갈 생각이 있어?” “아니요. 성요셉교회 개척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하고 종경은 대답한 후로 얼마나 후회하였는가? 둘째로 그러면 “왜 철산교회와 분쟁하느냐?” “둘째 자형 내외가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종경은 이종수 장로가 반대하지 않으면 부임하려는 생각이어서 해결이 안되자 원한만 있었다. 또한가지는 형님과 남택우 장로 사이에 2년 정도 기다리면 잘 해결되리라는 대화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성요셉교회 기둥이었던 형님이 2004년 6월 10일 성요셉감리교회 계단 천장 덮는 공사 중에 10m 아래로 추락하여 소천하였다. 물론 형님의 실수로 여길 수도 있지만 '원한'이란 초점으로 보면 형제 싸움을 방조하다가 종경의 곁에서 형님을 불러가신 것이다.
그 후로도 종경은 이장로 부부와 남매지간이지만 원한을 갖고 있다가 어머니 별세로 병약한 누이를 돌보려는 순수한 뜻에서 6남매 1박 2일 여행을 계획하였다. 10월 10~11일 휴가를 내어 어제 성사되었다.
또한 글로벌 독서토론회도 올해 5월에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발제자를 지적한 것이 화근이 되어 회원 탈퇴로 해산되었다. 그렇지만 광명시청에서 독서회 지원금 50만 원이 매체가 되어 원한을 샀던 일을 대화로 다시 소통하면서 오늘 오전 10시에 <시 강습>이 다시 준비되었다.
그동안 원한의 아픈 상처가 회복되면서 새벽에 번개처럼 ‘원한이 그동안 너를 묶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화해 기분으로 이끄는 종경에게 그동안 묶였던 일들이 “원한”의 장벽이었음을 새벽에 계시로 보여주신 것이다. 목회자는 개인이나 가족 간이나 국가 간에 화해자가 되어야 하고 복음으로 정복해야 한다는 사명을 많은 대가를 치르면서 종경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사이 연약한 종경을 돕기 위하여 얼마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며 오늘을 기다리셨겠는가? 나아가 하나님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난다고 하여도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고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종경이처럼 깨닫고 돌아올 때 모든 아픔의 비밀을 알리시고 최종 누구나 화평으로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확연하게 로마서 8장 26, 28절에서 보이셨다.
이 말씀 8:28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타락한 자들까지 인도하신다. <October 1st 2022>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In the same way the Spirit helps us in our weakness, for we do not know what we ought to pray for, but the Spirit Himself intercedes for us with groans that words cannot express. (Romans 8:26 NIV) 로마서 8: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Furthermore, since they did not think it worthwhile to retain the knowledge of God he gave them over to a depraved mind to do what ought no to be done. |
캐나다 상징 Maple Leaf (좌) 캐나다 군인 Janet (중앙) 캐나다 영토. 캐나다 여행 정금순 장로 (우.상) 안진환 잠 자리 곁에 할머니 (우.하)
예수사랑하심을 Jesus Loves Me, This I Know for the Bible tells me so
https://www.youtube.com/watch?v=Hap5fEeRUq0
저 무덤에서 깨어나라
내 영혼이 한얼산에서 자유의 몸이 되어 청춘의 날개를 달고 창공을 훨훨 날아오르는 그 날 그 시간 그 순간을 보여주신다.
“박종경, 저 무덤에서 깨어나라.”
살아 있으나 무덤에 갇혀 죽어있는 자가 있다.
죽어있으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자가 있다.
주님의 손
자유의 손
성령의 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1). Since, then, you have been raised with Christ, set your hearts on things above, where Christ is, seated at the right hand of God. |
이 글을 쓰게 하시는 목표를 하나님은 찾게 하신다. 우리가 가는 천국,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곳이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아파트는 안식처였고 돌아가고픈 곳이었다. 그 후 아파트는 텅 빈 느낌, 산소에서 돌아오다가도 가야산 개심사로 아니 그 무서운 역대급 태풍 힌남노가 몰려온다는데도 홀로 어두워가는 오솔길로 정상을 전망대로 올라 갔다. 갑자기 소낙비가 계속 쏟아졌을 때 얼마나 두렵고 긴장했던가. 끝이지 않는다면 홍수에 쓸려내려 얼기설기 앙상하게 드러난 소나무 뿌리처럼 나의 육신도 앙상한 뼈만 뒹굴지 않을까? 공허를 달랜다는 것은 내 안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 천국을 가져가셨는가? 아니라면 왜 평안이 없고 공허만 남아있는가? 저 사진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무덤에서 나오라.
네 자아에서 벗어나라.
자유의 날개는 성령께서 자아를 몰아내고 주인이 되셔야 날 수 있다.
종경이의 강점을 살려라.
나무하고 공동묘지 땅 일구며 목적을 두고 집중하는 일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열성이었지만 할 일이 없으면 무척 말썽꾸러기 짓만 골라 하였다. I was a zealous zeal that did not pass time on purposeful and focused tasks such as preparing firewood, cultivating land in a cemetery, but when I had nothing to do, I chose to do very troublesome things. |
지금 개구쟁이. 말썽꾸러기 짓만 골라하는 철없는 시절로 돌아가 있구나.
“아빠! 아직 세상에서 주님의 영광을 더 드러내세요.”
저 무덤을 통하여 천국에서 아들이 외치며 하소연하는구나.
주님이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sp. 최정원 https://youtu.be/BD66jwPtnn4
모세 80세의 부름이
세월이 너무 가버렸구나. 이제 2년 6개월이면 정년 은퇴이다. 이 정도면 목회를 정리할 때이다. 그래서 70까지 많이 남았지만 요즈음 같으면 수일이면 지나갈 것 같다. 은퇴 후의 삶을 뾰족이 준비하는 것도 아니어서 왜 태어났느냐 물으신다면 하나님께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지난 8년여 세월을 영어교실과 직장생활로 전도하지 못하고 자서전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니 한없이 부끄럽다.
그런데 오늘 정대길 목사를 만나니 활기가 넘치고 있다. 54평 성전에서 80명 이상 모인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코로나19로 대형교회들의 앞좌석이 많이 비어있는데 작은 교회나 개척교회의 어려움이나 문을 닫은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 수: 6,695개(국내외)
교인 수: 1,304,856명
교역자 수: 11,836명 <기독교대한감리회 2022. 4. 30>
통계에 의하면 한국교회 16%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기독교대한감리회만도 1,071개 교회와 224,776명의 교인의 감소세를 보여준다. 이럴 때 포기하냐? 아니면 희망에 차느냐? 위기에 소망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화살 같은 나이에 얼어붙은 전도열과 교회에 대한 불신까지 겹쳐 부흥은 너무 어려운 환경이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모세 나이처럼 세월이나 시대는 물론 지식, 빈부, 환경, 남녀, 지역, 장애까지 뛰어넘어 역사하신다. 어려울수록 일어서야 한다.
그런데 오늘 백근기 목사님을 만났다. 내년에 법 개정으로 정년퇴직이 73세로 연장될 수 있다고 한다. 깜짝 놀랐다. 어머니도 이제는 내 곁을 떠나 미디안 광야 세찬 바람에 날려 뒹구는 가시떨기 나무 잎새 하나처럼 홀로 남은 나에게 호렙산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종경아! 네게 은퇴 걱정하지 마라.” 또한 백 목사님은 가브리엘 천사장이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대답은 어떠했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I am the Lord’s servant. May it be to me as you have said.” 은퇴 5~6년간 더 남은 시간은 모세 나이 80세에 40년 더하신 것과 같다. 놀라운 세월의 축복 아닌가. 쓰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실로 감사 感謝할 수밖에 없다. 제일 먼저 떠오른 남택우 장로님과 통화를 하였다. 주님이 원하신다면 남은 생애 기쁨으로 일할 수 있겠다. 할렐루야!
교회를 인도하는 주체
성령의 순수한 교회
교회를 인도하는 주체
(다음에서 로그인이 안되어 10월 1일부터 네이버에서 작성합니다. 회복되면 다시 원고를 올리겠습니다.)
제5장 기독교 대한감리회 철산교회 1. 부흥의 방향과 성전 건축 성도와 종교부지 간의 중심추 산상성회 오후 강사 2. 목사 안수 지방교역자 수련회 크로스웨이 성경대학 한혜시 춘천 귀향 권유 자체 수련회와 포천 성회 3. 성지순례와 해외 선교 갈릴리 바다 선상 설교 필리핀 사팡필라와 티바칸 교회 4. 아들이 보낸 나라 캐나다 한인감리교회와 목양교회 토론토 틴데일 신학대학원 자녀 교육 캐나다 시민권 나이아가라 폭포와 블러프 공원 한국으로 귀환 제6장 교회 분쟁과 교회 개척 행복한 교회와 성요셉교회 안상희 장로 순교 어머니와의 동행 나들이 제7장 늦깍이 애인 독서 마중물 회원 온라인 고대 철학서 연구 글로벌독서토론회 제8장 함정이 많은 세상 소장과 주차원 녹원토피아 오피스텔 기전기사와 소장 IT 프리미엄 타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