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죽이 승승장구하면서 김철호 대표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해외출장을 연달아 다녀오고 가맹점들을 돌아보느라 연일 강행군이다.
“가맹점이 오픈할 때면 꼭 출장을 갑니다. 음식을 개발한 사람이 직접 자신의 노하우와 원칙, 철학 등을 전수하면 배울 점이 많지 않겠어요? 우리 가맹점 사장들은 본점 사장인 저에게 교육받은 것에 대한 자부심이 큽니다.”
김 대표는 항상 가맹점주들에게 본죽의 3대 정신인 ‘정성, 사랑, 건강’을 강조한다. 대학로 본점을 직접 운영해 보니 그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단다. 가맹점 오픈 때 출장과 교육을 사장이 직접 하고, 고집스럽게 준비상태를 점검하는 것도 ‘본(本)죽’의 이름처럼 기본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좋은 맛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식과 고객에 대한 원칙과 철학이 우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죽의 전국 가맹점들은 하루 4만 7,000그릇의 죽을 팔고, 연간 1,60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3년 만에, 가맹점 모집광고나 영업사원 하나 없이 이루어진 결과라면 믿겠는가. 게다가 죽 사업을 하기 전만 해도 그는 고단한 인생역정을 걸어온 무일푼에 불과했다.
김 대표가 처음 사업에 뛰어든 것은 6년 정도 일하던 신문사 광고국을 나오면서부터. 처음엔 인삼용품 제조·유통을 시작으로, 순식물성 목욕용품 업체를 차려 사업을 크게 일으켰으나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회사가 부도 나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청산 절차를 밟고 나니 서류가방 하나가 달랑 남았다. 채권단이 “재기하라”며 준 봉고차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처분했다.
“청산 절차를 밟는 데 꼬박 넉 달이 걸렸어요. 부끄럽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죠. 하지만 빈털터리가 되고 나니 가족 모두가 힘들어했고 정신력 강한 아내조차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어요.”
외식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그 길로 음식공부를 위해 요리학원을 찾았다. 수강료가 없어 학원 홍보와 총무 일을 봐 주는 조건으로 요리를 배웠고, 밤에는 학원 앞에서 호떡을 구워 팔았다.
“처음 호떡을 팔려고 리어카 앞으로 다가서는 것이 어찌나 어렵든지…. 포장마차 호떡이라도 깔끔한 분위기에서 판매하고 싶어 양복과 넥타이를 챙겨 입었지요. 장사가 꽤 잘되더라고요.”
호떡에 ‘꿀떡개비’라는 이름을 붙이고 양복에 위생장갑, 모자까지 갖춰 입은 그에게 호기심을 갖는 손님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비록 길에서 파는 호떡이지만 정성과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신념은 어느덧 그를 숙명여대 앞 명물 호떡장수로 변신시켰다.
2005년 여름, 그동안 고생한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모처럼 가장 노릇을 했다고 한다. |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지만 김 대표는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세상사 모든 것을 노점상 하는 각오로 살면 못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낸 뒤 그는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 창업 컨설팅을 동시에 해 주는 요리학원이었다.
“요리를 가르치고 음식점 창업 컨설팅까지 해 주는 학원은 없다는 데 착안했어요. 외환위기 직후라서 창업 수요와 함께 요리를 배우려는 사람이 많아 반응이 좋았습니다. 아내는 요리학원을 하고 저는 컨설팅을 맡아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업이 자리를 잡아 갈 무렵 자본을 대 준 친구가 회사에 합류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일하는 스타일이 달라 마찰이 잦았던 것. 결국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라는 마음으로 3년 만에 회사를 나왔다. 부부의 땀이 서려 있던 곳이었기에 아내는 눈물깨나 쏟았다고 한다.
“다시 무일푼이 된 저를 바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비워야 채워진다’는 신념대로 행동했어요. 만약 그때 우리 부부가 그 회사를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본죽은 없었겠죠.”
당장 먹고살 요량으로 김 대표가 음식점 컨설팅을 하면서 여러 사람에게 권했던 죽 전문점을 직접 운영하기로 했다. 아내는 메뉴 개발과 레시피 정리를 했다. 더 좋은 맛을 내기 위해 식구들 모두 6개월 동안 죽만 먹어 가며 개발에 매달렸다.
가게 터는 서울 대학로로 잡았다. 말이 좋아 대학로지 연건로 골목에 있는 2층 건물이었다. 2년간 주인이 네 차례나 바뀐, ‘누가 가도 망한다는’ 자리였다. 가게 터가 안 좋기로 소문이 난 덕분에 권리금은 거의 없었고 보증금도 대단히 저렴했다.
“처음엔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습니다. 죽 전문점이라는 생소한 아이템으로 장사를 하겠다고 하니 비웃는 사람이 많았죠. 처음부터 프랜차이즈를 구상했기 때문에 인테리어를 카페처럼 꾸몄고, 해외시장 공략을 위해 메뉴에 영어와 일본어도 함께 표기했습니다. 주위에서는 ‘다 망해 가는 자리에서 무슨 체인이냐. 잘 버티기나 하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 9월 죽 전문점 ‘본죽’을 오픈했다. 어렵게 영업을 시작했지만 며칠 동안 매상이 형편없었다. 근처 병원의 환자들이 죽을 포장해 가는 게 매출의 거의 전부였다. 그러나 한번 맛을 본 고객이 다시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예상 외로 죽에 대한 고정관념이 두터웠어요. ‘죽은 환자나 노인이 먹는 음식’이라는 등식을 깨뜨리기가 어려웠죠. 죽도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아내와 전단지를 들고 전철역으로 나섰습니다.”
부부는 갖고 있는 옷 중에서 제일 좋은 정장을 입고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전단을 뿌렸다. 그들의 정성에 감동받아 죽을 먹으러 오는 손님이 있을 정도였다.
음식점 운영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원칙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맛있고 양도 많게 만들어 정성 들여 팔다 보니 매출이 조금씩 상승했고, 3개월이 지나자 하루에 죽 100그릇이 팔렸다. 가게를 처음 세울 때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본죽은 일본에 진출, 2005년 7월 도쿄 아카사카에 1호점을 오픈했다. |
“우리 죽을 드신 분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체인점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핸드폰 배터리를 두 개씩 들고 다녀야 할 정도였습니다. 가게 문을 연 이듬해에 가맹점 1호를 개설했고, 건강에 관심이 많아지면서 예상 외로 빨리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김철호 대표는 자신을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가진 능력이나 노력에 비해 ‘운이 좋았다’는 것. 부족한 자신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에는 그만한 사명감과 책임이 따를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틈만 나면 오늘의 본죽이 있기까지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아내와 늘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한단다.
“어제는 둘이서 집 앞에 있는 술집에서 소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얘기했습니다. ‘사업이 잘된다고 해서 평생 못 입었던 고급 옷을 입느냐, 평생 먹어 보지 못했던 비싼 음식을 먹느냐. 우리는 달라진 게 없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고객과 가맹점주에 대한 책임, 본사 직원에 대한 책임…. 우리가 책임을 질 일이 많아진 것뿐이다’라고요.”
김 대표는 얼마 전 본죽 탄생 3주년 기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직접 집필, 출간했다. ‘어려운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으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본죽은 일본과 미국, 중국에도 법인을 설립했다. 본점을 오픈하고 프랜차이즈 가맹사업을 시작한 일본에서 반응이 아주 좋다고 한다. 앞으로 우리 고유의 맛을 해외 여러 나라에 알려 본죽을 ‘스타벅스’처럼 세계적인 체인으로 키우는 게 김 대표의 목표란다.
“일본 하면 ‘스시’가 떠오르듯이 한국의 음식을 ‘본죽’이 대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 한 그릇에도 혼을 담아 세계 최고의 죽장수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