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산행일:2010.12.12
2.산행지: 미숭산-주산
3.위 치: 합천군, 고령군
4.산행코스
A코스:합천청소년수련원-미숭산(757m)-미숭산동문-청금정(511.2m)-전망대-주산(310m)
가야고분군-고령 대가야유적-주차장(4:30)
B코스:대가야박물관-가야고분군-주산-대가야박물관 주차장(2시간)
5.시간계획: 상무세정아울렛(07:45)-염주체육관(08:00)-용봉쌍용차(08:20)-문예회관후문
(08:30)-합천청소년수련원(11:00)-산행시작(10:10)-산행완료(16:00)-뒷풀이
(17:00)-광주도착(19:30)
6.이동시간(광주~청소년수련원):약160km,2시30분
◆ 경북 고령군의 진산인 주산(310.3m)에서 미숭산(757m)까지 6km 종주 산행 코스
가야시대 고분들을 둘러보고 나서 잘 정비된 능선길을 따라 미숭산을 오르게 되는데, 이 능선길에서 보는 가야산(1,430m)에서 수도산(1,327.3m), 덕유산으로 이어지는 연봉의 파노라마가 기가막히다. 그뿐 아니라 경남 야로면과 경북 고령읍 경계에 놓인 미숭산과 고령읍 뒷산인 주산에는 산성이 그대로 남아 있어 밝고 지나가는 이끼 낀 돌에도 옛조상들의 삶과 역사를 뒤돌아보는 시간도 갖게 했다.
미숭산성은 고려 말 이성계의 집권에 항의하여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저버리지 않고 정몽주, 이색과 함께 끝까지 항거하던 안동장군 이미숭 잔군이 미숭산 정상에 높이 3m, 둘레 1.5km의 석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이태조 군사들과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원레 이름은 상원산이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이미숭 장군의 이름을 따서 미숭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주산산성에는 가야시대에 쌓은 이중성으로 내성은 돌로, 내성의 남북쪽 끝에서 타원형으로 쌓은 외성은 흙으로 쌓았다. 성안에는 우물터와 건물터들이 남아 있고, 가야시대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널려 있다. 두 산 모두 정상에 서면 산성의 위치가 말해주듯 주변 일대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미숭산을 오르는 길은 정상 못미처 일부 구간을 빼고 대부분 평탄한 능선길이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는가 싶으면 툭 터진 능선길에 접어든다. 중간에 지산리에서 중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전망대에서 가야생수를 마시며 숨을 고르고, 조금 더 올라가 412m봉에 통나무로 잘 지은 청금정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주산에서 미숭산까지 등산로에는 친절하게 잘 만들어진 안내표시판이 여러 군데 세워져 있다. 갈림길마다 봉우리마다 현위치와 다음 목표지점까지의 거리를 정확히 알려준다. 따라서 길 잃을 염려가 없다.
미숭산을 오르다보면 사방으로 운무에 가린 산, 산, 산이 겹겹으로 늘어서 있다. 그 사이로 들녘에 반짝 빛나는 것은 낙동강이다. 한 페이지의 역사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가야의 유물과 사적지를 둘러보면서 주산과 미숭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봉긋하게 솟아난 언덕만 봐도 고분으로 보이고 등산길에 맞닥뜨리는 바위마다에는 원시 암각화가 그려 있는 것 같아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이처럼 신비에 쌓인 가야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주산에서 미숭산 정상까지 약 5.9km. 소요시간은 3시간쯤 걸린다. 미숭산을 먼저 오른 다음 주산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미숭산을 오르내리는 다른 등산로로는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 경남청소년수련원 뒷길로 해서 미숭산성 서문지로 오르는 길이 있다.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주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1,500여 년 전에 조성된 크고 작은 고분 200여 기가 자리잡고 있다. 이 고분들에서 가야금관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출토되었으나 대부분 일제시대 때 도굴된 상태다. 그 가운데 1977년에 발굴된 왕릉으로 추정되는 제44호, 제45호 고분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순장묘로 밝혀졌다. 제44호 고분의 경우 중앙에 주인공을 안치한 주석실을 두고 남쪽과 서쪽에 부석실을 마련하고 그 둘레에 32개의 소석곽을 배치했다.
대가야 유물 전시관 주산 올라가는 입구에 있다. 지산동 제32호 고분에서 출토된 철갑옷과 투구를 비롯하여 금동관과 국보 제138호인 가야금관 등 고분에서 출토된 가야시대 장신구들을 비롯하여 여러 토기들을 수집하여 전시해 놓았다. 16대 왕조, 520년간 내려온 대가야시대의 화려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우륵기념탑 가야금의 창시자인 우륵이 살았다는 고령읍 쾌빈리 정정골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저리잡고 있다. 우륵은 중국의 쟁을 본따 만들었다는 가야금으로 평생 185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단 한 곡도 남아 있지 않고 12곡의 곡명만 남아 있다. 우륵의 가야금은 그후 일본으로 건너가 나라(奈良) 정창원(正倉院)에 1,300여 년 전 모습으로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예나 이제나 역사는 강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야국의 숨겨진 역사가 궁금하다
꼼꼼히 더듬을 시간은 없겠지만 잃어버린 대가야국의 숨결이 감도는 경상도땅 고령.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경북 고령(^^) 땅이다. ㅎㅎㅎ
▽ 고령은 유별나게 소문나 있는 고장이 아니기에 자주 찾는 곳은 아닌 것 같다. (근데 이 분도 다녀가셨네~)
▽ 왠지 잊어버린 옛 가야의 영향 때문인 것도 같아 연민의 정마저 든다.
▽ 등산로 입구에 대가야 유물전시관이 있다.
▽ 주산 아래 산마루금을 따라 대가야국의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 펼쳐져 있다.
경북 고령군에 있는 대가야국의 지산동고분군이다.
▽ 역사의 현장을 더듬으며... 걸어서 대가야까지 간다.
▽ 지산동고분군은 국사교과서에서 한 번쯤 들어봄직한 이름이다.
▽ 지산동고분군은 주산의 남동쪽 구릉의 동남쪽 사면에 위치한 대가야시대의 무덤들로 대가야의 전성기인 5-6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 대가야왕릉 전시관은 직경 27m에 높이 6m의 봉토분으로 중앙에 왕을 안치한 주 석실이 있고, 좌우 부속실엔 32개의 순장석곽을 배치했다.
692점이나 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단다.
▽ 산행은합천 종합야영장-미숭산 - 청금정 - 주산 - 대가야유물전시관 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미숭산에서 주산으로의 능선종주는 고령의 진산을 밟는 유별난 맛과 재미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산행 길로도 유명하다.
▽ 등산로표지판에 나와 있는 미숭산에서 주산까지의 전체 거리는 약 8Km 정도다.
주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표지판이 잘 구비되어있어 길 잃을 염려도 없다.
등산로 역시 고속도로(^^)라 할 만큼 말끔하고 널찍하다.
▽ 대가야국은 어떻게 역사에서 퇴장하게 되었는가.
지금까지도 대가야국의 역사는 무덤 속 고분에서만 찾을 수 있었다.
왜 대가야국의 역사는 그렇게 송두리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을까.
▽ 6C 초반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유지한 채 가야지역을 두고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관계에 돌입했다.
대가야는 신라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백제와 왜(倭)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일본서기에도 이들 세력들이 541년과 544년 두 차례에 걸쳐 백제 성왕이 주재한 대책회의에 참석한 기록이 있단다.
▽ 553년 신라가 진흥왕의 대외팽창정책으로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신주를 설치하므로 나제동맹은 해체된다.
대가야의 백제와 왜에 대한 우화적인 대외정책은 554년 백제 성왕이 주도한 연합군(백제, 가야, 왜)이 관산성(管山城 : 옥천)에서 신라군에 대패하여 실패로 돌아간다.
▽ 이 전투에서 승리한 진흥왕은 555년 창녕지역에 비사벌정(比斯伐停)을 설치하여 중앙군단을 주둔시키고 가야정벌을 본격화한다.
▽ 대가야를 맹주로 한 가야세력은 관산성싸움의 패배로 무기력해지고 일부세력은 신라에 항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백제의 원조와 후원이 끊기고 일부 세력마저 가야연맹에서 이탈하자 대가야의 위세는 크게 위축된다.
▽ 그리하여 562년 ‘이사부’가 신라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대가야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항복하였으며, 결국 가야제국은 역사에서 소멸되는 것이다.
힘없는 자는 망하는 것이다.
역사가 던지는 이 엄연한 메시지를 이 시대 젊은이들은 왜 모르는가.
▽ 지산동일대에는 무려 200여개의 고분이 몰려있는 국내최대의 고분군으로 우리나라 순장문화의 현주소라는 역사적 가치 때문에 주목받는 곳이다.
능 주인과 함께 32명을 산채로 매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순장 묘인 44호와 인근 45호분이 대표적으로 왕릉 전시관에는 이들 고분의 내부를 재현해 놓아 고분 내부와 순장풍습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가 함께 묻히다니... 끔직한 일이다.
▽ 고분들이 다소곳이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처럼 평지도 아니고, 조선시대처럼 명당을 찾아간 것도 아니다.
살았던 동네의 전망 좋은 산 능선에, 신라 왕릉보다는 작지만 동산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 묘들은 산봉우리가 되어 살았던 동네를 굽어보고 있는 것 같다.
대가야의 왕들은 죽어서도 도읍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산 능선에 묻혀 외침을 막는 수호신역할을 하려했던 것일까.
여섯 가야 중 유독 대가야만이 이처럼 험준한 산중에 고분들을 남겨놓았다고 한다.
▽ 산을 따라 내려가면서 마치 낙타 등처럼 이어지는 무덤 사이사이로 소나무가 띄엄띄엄 한 그루씩 마치 무덤을 지키는 묘지기처럼 자리 잡고 있다.
무덤과 소나무 그리고 초여름의 하늘이 빚어내는 그 절묘한 조화와 아름다움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 88올림픽고속도로 고령구간을 지나갈 때면 이색적인 산봉우리에 눈길이 간다.
어찌 보면 마치 이집트 왕가의 계곡처럼 보이는 곳이다.
피라미드처럼 이곳 무덤들도 큰 무덤, 중간 무덤, 작은 무덤 군으로 구분되어 있다.
▽ 고분행렬이 끝나는 산중턱에서 정상까지는 울창한 송림 길의 삼림욕코스다.
웅장한 고분들을 한눈에 보기 위한 기대감에 정상에 오르는 사람이 많지만 숲으로 시야가 가려있다.
▽ 왕릉 전시관에서 주산 정상까지는 1.84㎞로 1시간이면 넉넉하다.
고령군은 지산동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문화유적답사, 등산, 문화체험 등 관광코스를 마련해 놓고 있다.
주산은 야트막한 산이므로 산행 후 인근에 널려 있는 가야문화유적지를 살펴보면서 울창하게 우거진 송림을 걷는 삼림욕장소로는 으뜸이란 말을 실감한다.
▽ 고령(高靈)은 한반도의 고대국가였던 대가야의 요람이었다.
고령의 진산인 주산(主山)은 고령읍내에서 바로 등산로가 열리는 야트막한 봉우리지만 이름에 주인 주(主)자가 들어가는 것만 봐도 이곳 주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산임을 알 수 있다.
▽ 눈물고개길에 당도하니... 주산(主山, 310.3m)이다.
▽ 주산은 고령 읍내에서 바로 등산로가 연결되는 낮은 봉우리지만 주인 주(主)가 의미하듯 이곳 주민의 오랜 역사와 삶을 이어준 산이다.
▽ 산 능선을 넘나드는 한줄기 바람에 땀을 말린다.
잠시 숨을 고르며 옛 가야를 생각해 본다.
고령 주산은 고대 대가야시대의 중요한 고분들이 있는 문화의 보고다.
16대 도설지왕 때인 서기 562년에 신라에 멸망한 대가야의 오백년 역사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도 어렴풋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 정복당한 왕조의 애달픈 사연을 고분 안에 묻은 채 빛바랜 대가야의 찬란했던 문화는 아직도 우리역사에서 전설로만 남아있는 것이다.
▽ 주산 산성은 대가야의 고지인 고령군 주산에 위치한 석성이다.
산성은 북고남저의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 신라에게 철저히 패배한 가야다.
오백년 동안 존속했지만 패자이기에 역사에서 단 몇 줄로만 기록되고 있다.
저 주산 능선의 수많은 무덤들만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한을 새기고 있다.
무덤 앞마다 간간이 서 있는 소나무처럼 그저 외롭고 쓸쓸한 역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어느 날 무심히 지나가는 나그네로 하여금 시간의 무상함과 허망함을 깨우쳐주고 있다.
▽ 웬만한 고을에는 진산이 있게 마련이다.
높거나 수려하진 않더라도 크고 우람해야만 진산이냐며 원정산꾼들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만드는 산들이 있다.
대개 이런 고을의 진산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산에 얽힌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고,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등산로가 잘 가꿔져 있으면서도 다양하며,
작고 낮지만 조망만큼은 시원하고 호쾌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 주산은 누구나 쉽게 찾는 포근한 산으로 산림욕장과 체육공원도 자리하고 있다.
▽ 가야 할 청금정도 보인다.
▽ 짙고 아늑한 소나무 숲을 통과하며, 가야산일대를 품는 능선의 쾌청한 조망이 일품이라는데 오늘은 가스로 기대에 못 미쳐 아쉽다.
▽ 온 산은 철지난 낙엽으로 덮여 있고, 발바닥에 느껴지는 촉감도 흙의 부드러움 뿐이다.
또한 산길은 숲이 좋아 등산 내내 그늘이 이어져 여름철산행에도 안성맞춤이다.
▽ 나도 모르게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편안한 길이다.
오르막길도 경사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완만하다.
▽ 이런 길이라면 뛰어가는 것도 가능하겠다.
곳곳에 마련된 음수대는 고령군의 정성을 보는 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다.
▽ 아담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길을 따라 내려가니 약수터가 있는 넓은 공터다. (12:10)
▽ [가야국 옛 무덤은 산 위에 이어지고 월기(고령읍 지산리) 쓸쓸한 마을은 없어졌다 다시 사네.
어린 풀은 아롱아롱 봄기운이 한창인데 겨울이면 말랐다가 이듬해 그 혼 다시 돋네]
▽ 테마 길 열두군데를 만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고령군 화이팅~!!!
▽ 미숭산 가는 길은 대부분 평탄한 능선길이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는가 싶으면 툭 터진 능선 길에 접어든다.
쉼터에서 가야생수를 마시며 숨을 고른다.
▽ 미숭산에서 주산까지 등산로에는 친절하게 잘 만들어진 안내표시판이 여러 군데 세워져있다.
갈림길마다 봉우리마다 현 위치와 다음 목표지점까지의 거리를 정확히 알려준다.
따라서 길 잃을 염려가 없다.
▽ 이름 모를 꽃들에게도 가야의 한이 서려 있는 듯하다.
▽ 또다시 나타나는 쉼터 -.
▽ 청금정 오르는 길도 잘 정비되어 있다.
▽ 한참을 구불구불 걸어가다 약간의 계단을 오르니 청금정(廳琴亭, 412m)이라는 팔각정에 도착한다.
▽ 정자주변은 사방이 뚫려 바람이 유난히 시원하여 푹 쉬었다 가기에 더없이 좋다.
▽ 청금정은 악성 ‘우륵’선생이 대가야 가실왕의 명을 받들어 가야금을 만들어 연주하던 속칭 정정골이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가야금소리가 울린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 청금정에 올라 우리가 걸어온 능선을 바라본다.
오늘도 길고도 긴 여로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바람결에 ‘우륵’선생이 탔다는 가야금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잃어버린 대가야를 다시 찾을 수 없는 애절함이 서린 불귀(不歸)의 길을 걷는다.
▽ 정확하게 250m 간격으로 이정표가 매달려 있다.
▽ 등산로는 순한 산답게 길이 참 좋다.
특이한 것은 군데군데 나무에 송이채취를 금지하는 경고장을 붙여놓았다.
그러고 보니 산에 소나무가 진짜 많이 있어 송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 경북 고령군의 진산인 주산에서 미숭산까지 6km 종주 산행코스를 걷는다.
▽ 등로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반룡사는 미숭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고, 해인사와 같은 시기인 신라 애장왕 3년(802년)에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절터 형국이 용이 터를 잡고 앉은 형국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고려 말 ‘나옹선사’가 다시 중건한 고찰로 다층석탑과 동종이 유명하다고 한다.
▽ 한 페이지의 역사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가야의 유물과 사적지가 생각나 주산과 미숭산을 오르내리다 보면 봉긋하게 솟아난 언덕만 봐도 고분처럼 보인다.
등산길에 맞닥뜨리는 바위마다에는 원시 암각화가 그려 있을 것 같아 유심히 살펴봐진다.
자신도 모르게 신비에 쌓인 가야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 길가에 천제단이란 표석이 서있다.
이곳에서 옛 가야인들이 천제를 지냈을까.
▽ 간절한 기도를 하늘에 전하고자하는 염원의 길이다.
▽ 지금은 지고 없지만 철쭉단지라는 표지판이 나온다.
길 양쪽이 온통 사람 키보다 훨씬 큰 철쭉일색이다.
▽ 그 철쭉 사이로 난 좁은 길은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를 만큼 길다.
넓이도 무려 50㏊나 된다고 하는데... 하긴 철쭉은 고령군화(高靈郡花)라고도 한다.
▽ 연신 감탄하는 산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봄에 다시 오자고 한다.
산에서의 이런 약속이 한 두 번이 아니기에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없다.
철쭉꽃이 피면 이곳에 다시 오자는 다짐이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다 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상상하는 것이다.
▽ 생각만으로도 그 화려함이 온 몸에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철쭉단지는 거의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 미숭산 정상은 733.5m 표시와 757m 표시가 다르게 나타나 혼란스럽다.
▽ 이정표를 보고
옛 산성의 흔적을 밟는다.
▽ 드디어 미숭산(美崇山, 733.5m) 정상이다.
예쁜 정상표지판이 서있다.
고령은 처음 오는 곳이지만 산 위에서 쳐다보니 온통 산이다.
산이 너무 많아 몇 겹인지도 모르겠으니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 소금 땀을 흘리며 미숭산 정상에 오르니 합천군에서 세운 정상표석이 이곳 미숭산이 마치 합천군의 산 인양 선점하고 있고, 정상표석 뒷면에도 합천군 야로면 하빈리
산 3번지라 적혀있다.
등로의 각종 안내판은 고령군에서 설치하였으니 미숭산이 두 지자체의 산인 모양이다.
오늘 우리는 한쪽 발은 합천군을, 다른 발은 고령군을 딛고 서있는 것이다.
▽ 미숭산(美崇山)은 고려 말 요동정벌을 위해 진군하던 중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의 반란군에 끝까지 맞서다 순절한 안동장군(安東將軍) ‘이미숭(李美崇)’의 지조와
얼이 살아있는 역사의 산이다.
이 산은 원래 상원산(上元山)이었으나 고려의 재건을 목적으로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하여 ‘이성계’에 최후까지 항전한 ‘이미숭’장군의 절개와 충의를 기르기 위해
미숭산(美崇山)으로 이름이 바뀐 고령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 정상에 있는 달각바위는 ‘이미숭’장군이 합천군 야로면 월광촌에 있는 월광사석탑(보물129호)을 보고 활을 당겨 화살이 석탑에 이르면 이 바위가 먼저 알고 앞뒤로 약간
움직이면서 딸각소리를 낸다하여 달각암이라 불렀다.
1973년 월광촌 나무꾼들이 이 바위를 장난삼아 아래로 밀어 떨어드렸는데 그 후 마을의 청소년들이 우연히 큰 화를 입는 일이 속출하자 마을사람들이 그 화근이 달각암을
떨어뜨린 탓으로 알고 다시 본래 자리에 올려두었다.
허나 예전과 같은 움직임은 없고 소리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 미숭산은 고려에 충성한 ‘이미숭’장군을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부르며 꼬드겼으나, 이에 불복하면서 대항하다가 순절한 비운의 산이다.
저 멀리 가야산도 가야의 건국신화를 간직한 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한 맺힌 장소에서 한을 푼다.
▽ 미숭산은 경북 고령군 쌍림면과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고령읍의 주산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두 산을 함께 종주할 수 있어 좋다.
▽ 산성의 이끼 낀 돌을 밟으며 옛 조상들의 삶과 역사를 뒤돌아본다.
▽ 정상에서 동쪽으로 약간 내려오면 널찍한 평지에 잔디처럼 무성한 잡초가 자라 있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은 군사들이 훈련한 연병장이란다.
연병장주변에는 여러 군사시설이 있었는데 긴 세월동안 사람이 개간하여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넓은 평지흔적만 남아있다.
▽ 연병장 밑으로 음수대라는 약수터는 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높은 지형에도 불구하고 수량이 풍부하다고 한다.
▽ 서남쪽 가파른 절벽과 동북으로 둘러싸인 산성의 위엄에 새삼 이곳이 천연의 군사적요충지임을 실감케 한다.
▽ 미숭산성은 ‘이미숭’장군이 미숭산 정상에 높이 3m, 둘레 1.5km의 석성을 쌓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면서 이태조 군사들과 접전을 벌였던 곳이다.
정상주변 합천 쪽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용되었다는 미숭산성의 성문과 성터가 남아있다.
▽ 경남 합천군 야로면 월광마을에 월광사가 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태자는 가야산 여신 '정견모주'의 10세손으로 월광사를 창건했다고 전한다.
562년 대가야 멸망 후 태자는 망국 대가야국의 설움과 한을 삭이며 미숭산을 넘어와 월광사에서 남은 여생을 보낸다.
절 앞에 동서로 서있는 쌍 탑이 망국의 한을 달랬을 태자의 심경을 대변해 준다고 -.
▽ 합천군 야로면 일대는 삼국시대 대야성전투로 뜨거웠던 곳이다.
대야성은 신라 심장부 경주로 가는 최단코스의 중심 요충지였다.
한강하류 실지회복의 열망에 불타는 백제는 신라에 대한 집요한 공격을 단행했다.
대야성전투(642년)에서 백제의 ‘윤충’은 낙동강의 지류인 황강의 수로를 차단하고 대야성(합천)에 위치한 신라군의 지휘본부를 함락시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곳이다.
이곳은 야로의 철산을 확보하기 위한 신라와 백제간의 전쟁터였다.
결국 대야성전투 최후의 승자는 신라였는데, 신라는 마침내 삼국통일을 하기에 이른다.
▽ 야로철산은 조선시대에 와서도 3대 철산의 하나일 만큼 유명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야로현(冶爐懸)은 철이 많이 생산되어, 1년에 세공으로 정철 9,700근을 바쳤다고 기록되어있다.
야로의 옛 이름은 적화현(赤火縣)이었으며 통일신라시대까지 그렇게 불렀다.
적화란 붉은 불이니 시뻘건 불에 쇠를 달구는 모습 그 자체다.
그 뜨거운 이름이 바로 야로이다.
▽ 현재의 합천군 가야면과 야로면을 어우르는 야로현지역은 옛 대가야국의 영토로 고려 말까지 고령군에 속한 현(懸)이었다.
야로의 진산 미숭산 자락에는 철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금평리의 창동, 돈평, 성기리의 야동마을, 쌍림면 용1리의 불묏골 등이 이를 대변해주고 있다. (모처럼 샤워장에서 등산 후 샤워를 했다)
▽ 야로(冶爐)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역은 옛 부터 철을 생산하든 지역으로 가야의 힘의 근원지였다.
▽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의 한 국가였던 대가야는 생존을 위해 백제와 동맹관계를 유지했지만, 백제가 쇠약해지고 신라가 강해지니 신라 왕가와의 혼인까지 하며 버텼으나 결국
신라에 망한다.
▽ 약하면 망한다.
예나 이제나 이를 자각하는 일이 그리도 어려운가보다.
잃어버린 역사는 언제나 서글프다.
산행을 하다보면 참 아름다운 곳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곳에 살고 싶은 생각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정말로 그곳이 내가 살고 있는 곳보다 좋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내가 그곳에 살고 있지 않는 낯선 정경이어서 더욱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욕구는 한이 없습니다.
뭔가를 이루고 나면 또다시 다른 뭔가를 이루고 싶어집니다.
이 끝없는 욕구가 때로는 분란을 일으키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대왕이 막사에서 한없이 울더랍니다.
부하들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이제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우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매일 물을 마셔도 또다시 목이 마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의 삶도 욕구와 욕구의 연속인가 봅니다.
욕구가 욕구로만 이어지면 우리는 행복할 날이 없습니다.
내가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그리고 내가 어느 곳에 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똑같은 상황이라도 내가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달리 볼 수 있다면 내가 가진 것은 새로운 것이 되고 내가 사는 곳도 새롭게 다가옵니다.
‘마르센 프루투’라는 이는 ‘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데 있다’라고 말했답니다.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뭔가에 대한 욕구로 평생을 욕구불만으로 살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향한 새로운 시각과 세상을 전과 달리 볼 수 있는 새로운 발견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최복현’의 새로운 느낌 중에서)
|
첫댓글 사진과 글을 보니 산행하고난후 같은 기분이 듭니다. 자세한 안내 감사합니다.
신청합니다. 문예후문 승차.
걍 테마 여행이네요! 얼른 좌석 예약 해야할랑갑따!ㅎ
산행 신청 합니다 문예후문에서 승차합니다 (010-2559-5555)
1명더 추가합니다 (같이 문예후문에서 승차합니다)
참 조으네요~!!
함께 동행 할께요. 자리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