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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2강
III.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삶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부활한 그리스도인, 새 생명을 받아 새로운 창조에 속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들은 성령님 안에 있고 성령님도 그 안에 계신다[1]. 바로 이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바로 이 구원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큰 문제가 생긴다. 육신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 “필사적으로 대항”하기 때문이다. 리덜보스는 본장에서는 이 대항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단지 이것이 율법과 성령님 사이의 대립으로, 즉 구속사적 대립이라는 것만을 밝힌다. 이 둘 사이에서 대립이 있는 이유는, 율법이 못 하는 것, 즉 죄를 이기게 하지 못하는 것을 성령님께서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분이 그리스도인에게 약속만 주실 뿐 아니라 능력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에 따라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우리는 바로 앞에서 바울이 새 생명을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시킨 것을 보았다. 그런데 새 생명과 성령님 사이의 연관성도 그의 선포에서 그만큼 중요하다. 이것은 롬 6장에서 가르친,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은, 롬 8:9[2]에서 신자들은 더 이상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님 안(엔 프노이마티)에 있다”고 가르친 곳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앞에서[3] 성령님 모티브와 구속사 모티프가 바울의 구원론에서 서로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이들이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것은 더욱 아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새로운 시대(Aeon)의 위대한 개시자(Inaugurator)이며 은사이다[4]. 이로써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우리 육 사이에서 대립이 생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선포에서 우리는 성령님과 육신 사이의 대립을 형이상학적이거나 인간론적이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즉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에 의해 구분된 두 시대를 지배하는 두 가지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 성령님은 교회 실존 전체를 새롭게 하시지만, 육신은 이에 필사적으로 대항한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이 영에 대해 말할 때는 헬레니즘의 “영혼론”을 좇지 않고, 구약을 근거로 한다. 왜냐하면, 구약 전체는 성령님은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새 언약의 선물이며, 이 성령님이라는 선물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게 주어질 것이며[5], 앞으로 올 교회를 위한 생명의 원리(Lebenskraft=생명의 능력)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새로운 생명을 단지 기독론적인 범주에서만(“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일으킴을 받는다”) 아니라 성령님의 범주에서도 설명하는 것을 볼 때에도 이것은 분명해진다. 바울이 교회의 새로운 실존의 성령적 성격을, 그의 선포의 두드러진 특징인 성령님과 육 사이의 대립으로, 이것을 다른 곳에서는 성령님과 율법 및 약속과 율법, 그리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비를 통해 그림과 같이 선명하게 설명하는 것은, 교회의 실존 방식이 성령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것의 구속사적인 성격도 조명하기 때문이다. .
1. 율법과 성령님과의 대립
율법과 성령님 간에 근본적인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자 하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단지 구속사적인 대립이 있을 뿐이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그러나 구속사에서 정해진 때가 와서 성령님께서 믿음을 통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주신다.
이러한 대립의 소극적인(negative; 부정적) 면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 율법이 구원의 수단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설명했을 때 이미 다루었다. 롬 7:6은(“이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성령님과 율법 사이에는 구속사적인 대립이 있음에도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공통점(=“섬길 것”)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율법이 실패한 곳, 즉 죄의 권능에 대항한 싸움에 성령님이 등장한다. 율법의 무능에 대해서 날카로운 어조로 묘사되었다(롬 7장). 바울이 이렇게 부정을 사용해서 성령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과 성령님을 대비시키는 것은 성령이 율법의 내용 및 요구와 상반되기 때문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목적하는 바는, 율법의 요구가 그리스도 안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도 성취되는 것이다(롬 8:4). 이렇게 성령님과 율법은 각각 다른 체제(Regiment: 지배권)로서 서로 대립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육신이 연약하여 요구를 충족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죽음에 내어주지만, 성령님은 육신을 이김으로써 생명과 자유의 주님이 되신다.
이와 유사한 장인 갈 3, 4장도 율법이 – 원래는 선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싸우는 관계에 있지 않으면서도 –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율법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생명을 주고(21), 자녀를 선사하고,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족속을 축복하는 것을 말한다(참조: 롬 8:2!). 율법이 이것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율법은 인간이 그것을 완전히 성취해야만 구원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즉, 율법 자체는 선하고 하나님의 약속들과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약속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 말씀은, 단지 그것을 주시는 분에게서만 그의 능력을 얻고, 이 능력은 생명과 축복과 약속의 성취를 가져다 준다(갈 4:21-31).
이제는 때가 차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영인 성령님을 보내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성령님의 지배 아래에서 살게 되고 그분의 능력을 나누어 갖게 되어, 이제는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에게 성령님에 따라 행하라고 하는 권고(경고: 5:16)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들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버려서는 안 되지만(갈 5:1-12), 더는 죄 안에서 살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더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5:18). 즉, 그들은 죄에 팔려(ausgeliefert) 죄에 대해 무력하지 않고, 율법도 더는 그들을 향해 고소하고 죽이는 능력으로서(5:23), 그들의 적으로서 작용하지 않는다.
해설: 본 단락은 바울 신학을 이해하는 하나의 열쇄에 해당하므로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율법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의 죄를 근거로 지옥으로 보낸다고 위협할 수 없다. 이렇게 위협하는 것이 정죄의 의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죄가 있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 그는 이미 구원 받고 성령님이 그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님은 끊임없이 죄에 대해 경고하신다. 이것을 말씀(율법과 복음)과 양심과 이성을 통해서 하신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권고”이다. 신자는 늘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아야 거룩함과 사랑과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교인은 성령님은 정죄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자기 죄에 대한 계명의 경고도 무시한다. 성령님은 주로 계명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범하려는 생각을 경고하신다. 죄 된 생각은 성령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계명의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이 새로운 창조에 속한 새 사람일 수가 없다. 새 사람은 거룩함과 늘 하나님과의 교재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짓 신자는 이신칭의를 거꾸로 이해하여 죄 속에 살면서도 늘 자기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는 교사에게 분노한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뜻, 계명을 가르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양심이 새로워져서 자기 죄를 더욱 예민하게 깨닫고 죄에 대항해서 싸운다. 바로 이 싸움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우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신다. 우리는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힘입어 죄를 미워하고 이에 대항하여 싸우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덧입고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많은 은사 덕택으로 죄와의 싸움에 승리한다. 그러므로 죄와의 처절한 싸움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하나의 특징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능력을 덧입고 성장한다. 물론 우리는 늘 승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패배하고 넘어져 죽은 사람과 같이 될 때도 많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이기고 나를 크게 위로하셔서 다시 일으켜 주신다.
필자의 “하이델베르크논제 해설”의 “IV. 율법과 복음”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으므로 참조하라. 내가 체험한 한국 교인은 대부분 이러한 반율법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유럽과 미국의 경건한 그리스도인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우리는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2. 문자와 성령님과의 대립
성령님과 율법의 대립만큼 문자와 성령님의 대립도 특징적이다. 롬 2:27-29는 두 가지 할례에 대해 말한다. 즉, 육신적인, 실제로 육신에 행하여지고 사람을 율법의 문자 요구 아래에 세우는 할례이며, 또 한가지는 성령님을 통해 마음의 보이지 않는 것으로 하는 할례이다. 이것은 롬 7:6에서 옛 삶과 새로운 삶은 “문자의 낡은 존재로 섬기는 것(율법의 조문의 묶은 것)”과 “영의 새로운 존재로 섬기는 것(영의 새로운 것)”과 비슷한 관계이다. 이것도 옛 지배체제(Regiment)와 새 지배체제에 대한 것이다. 옛 체제는 단지 외적으로만 작용하므로 문자로 된 계명과 금지로만 사람을 대하므로 그 효과가 크지 않다. 그러나 성령님의 지배는 인간 마음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으며, 또한 진정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섬기도록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므로, 이 두 가지 지배체제는 서로 대립한다.
3. 옛 지배체제(율법과 문자)와 새 지배체제(성령님)의 대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바라본다
고후 3장은, 문자와 성령님의 대립에 대한 이러한 우리 이해가 옳다는 것뿐만 아니라, 옛 지배체제와 새 지배체제의 대립을 구속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바울은 그곳에서 자기 비판자에게 교회 자체를 잉크가 아니라 영으로 쓴, 그리고 돌판이 아니라 실제로 심장 위에 쓴 그의 추천서라고 말한다. 롬 2:29, 7:6에서와같이 율법의 “외적인 면(Äusserlichkeit)”과 성령님의 내적인 작용(Wirkung)의 대립에 강조점이 있다. 문자로서 부족한 이유는 그의 작용(Wirkung) 영역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그것은 성령님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 3:7-8).
돌 위에 쓰인 것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동역자들을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섬기는 “새 언약의 일꾼들”이라고 표현하면서, 심지어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을 줄 능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의 마음에 쓰실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바울은 이곳에서 새언약의 영의 약속과 연결한다(겔 11;19; 36:26; 렘 31:33): 이러한 대립을 두고서 그는 성령님으로부터 나오는 새삶의 영광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미 옛언약을 체결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면(참조: 출 34:29-30), 앞으로 영원히 존속될 성령님과 의의 새언약은 얼마나 영광스럽게 계시될 것인가!
4. 성령님 안에 있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교회 범주이다
그러면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의 교통(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교회와 성령 간의 교통(신자가 성령님 안에 있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일으킴을 받았다”는 것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성령님을 통한 삶)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곳에서도 집단이라는 관점이 결정적이다.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합병되었으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다. 즉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이렇게 연합되었으므로 교회는 성령님에게도 참여한다. 그 이유는 성령님은 주님의 영이기 때문이다(빌 1:19; 갈 4:6; 고후 3:18).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자는 성령님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롬 8:9). 따라서 성령님 안에 있는 존재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범주가 아니라 교회공동체적 범주이다(gemeindliche Kategorie).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즉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새로운 교회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세례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가득 채우는(“다 한 성령님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님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성령님으로 세례받는 것이다. 그래서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 된다(고전 6:17).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시기 때문에(엡 4:4), 하나의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있다는 것은 한 성령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벌써 이곳에서 단체적[6](korporative) 관점은 주인, 몸, 성령, 그다음에 신자의 성령에 참여라는 구조적인 순서를 명확하게 한다. 이들은 둘째 아담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단체적인 묶음(korporativer Band: 연합)에 의거해서 그와 함께 죽고 장사되어, 죄에 죽었고 하나님에 대해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이러한 새로운 삶의 연합 속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편입됨으로써) 육신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 안에 있게 된다[7](롬 8:9).
그러므로 “성령님 안에 있다는 것”은 주관적인 인식 상태가 아니라 “객관적인” 존재 방식[8](Seinsweise)을 나타낸다. 믿는 자가 믿기 전에는 “육신에” 있었고 그의 죄의 능력 아래에 있었던 것과 같이, 그는 지금 “성령님 안에” 있고 그의 자유롭게 하는 지배권 아래에 있다(롬 8:5-12). 그러므로 그는 더는 육신을 섬기거나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9]. 그러므로 그 대립을, 믿음의 주체인 개개인의 관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것은 두 “세계”들, 즉 두 종류의 권세와 영향력의 영역인 옛 시대와 새 시대에 속한 존재 방식으로서 서로 대비되고 있다(참조: 골 1:13; 갈 1:4).
“성령님 안에 있다”는 개념은 바울에게는 잘 나오지 않는데, 이때는 “육 안에 있다”말과 대립할 경우에만 사용되었다. 다른 곳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로 다음과 같은 표현이 사용된다: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특히 갈 5:25에서 “성령으로 살다”와 “성령으로 행하다”를 구별하는 것은 전자는 후자의 전제가 되는 어떤 특별한 상태를 가리키고, 후자는 전자에 수반되는 것으로서 전자가 삶 속에서 나타나는 행실이나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롬 8장에서는 “성령을 따르는 것”과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을 구별하고 다 나아가 그러한 구별은 “성령 안에 있는 것”과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으로 표현된다(14). 이러한 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진 새 생명의 삶의 맥락, 곧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삶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방식은 그들이 속량함을 받아서 이 새로운 통치 아래 놓이게 된 것에 합당한 것,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성령님 안에 있다(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말은 개인에게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삶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대해서는 바울이 다양한 방법으로 풍부한 용어로 표현한다. 그는 단지 “객관적이고” 초개인적인 측면에만 국한하지 않고 신자의 개인적인 삶 속에서도 성령님으로 말미암는 삶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가 그리스도 및 성령님과 교회 간의 관계를 일방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 독특하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그의 성령님 안에 있듯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도 신자 안에 있다. 성령님은 신자의 실존에 직접 관여하고, 생명을 주고 거듭나게 하고 내적으로 새롭게 한다(롬 8:11; 딛 3:5; 롬 7:6).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명확하게 보여주신 것인데 – 그에게 속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부어진다(롬 5:5,8).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속한 자의 새로운 삶이 표현된 모든 것들을 성령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성령님의 사역이 그리스도에 속한 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실존적인 사안이라서 우리가 자세히 살펴야 한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성령님이 주체가 된, 성령의 생각(롬 8:6), 성령의 사랑(롬 15:30), 성령이 원하는 것(갈 5:17), 성령의 기쁨(살전 1:6)이라고 말한다.
o 롬 8:5-6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o 롬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o 갈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o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성령님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의 일,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섬기는 일, 거룩하고 사랑의 일을 생각하여 그 결과 생명이 풍성하게 되고 평안함을 가진다(롬 8:5-6). 사도 바울은 교인을 성령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사랑했다(롬 15:30). 그러므로 끝이 없이 풍성하고, 헌신적이고, 구김과 가식이 없고, 그럼에도 절도가 있었다. 성령님께서 원하는 것을 하면, 이것은 계속 육신을 거역하는 것이다(갈 5:17). 계속 이렇게 산다면 우리 몸에 있는 육신의 소욕은 약해진다. 데살로니가 교인은 많은 환란을 통과해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받고 바울 일행과 예수님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살전 1:6).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하심 대로 살아갈 때 그들의 삶에는 반드시 열매가 맺힌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
또한 성령은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운 삶의 원리이자 능력, 즉 성화의 영이기도 하다(살후 2:13). 성령의 요구는 오직 육신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 즉 성령의 역사와 생각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또한, 성령은 „지식과 계시의 영“(엡 1:17),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 수 없고, 하나님이 준 것들을 알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주어진 성령,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 다 헤아리는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고전 2장)[10].
o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o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o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o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o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o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o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성령은 교회에 속한 자들을 신령한 자들이 되게 하여 신령한 일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하기 위하여 주는 특별한 능력들과 은사들의 원천이다(롬 12장; 고전 12장, 14장).
이 모든 것으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성령님 사역은 범위가 대단히 넓다는 것과, 바울이 새로운 삶을, 그의 근원뿐만 아니라 그의 실행과 완성에 있어서도 성령님과 그분의 활동과 능력과 은사로 돌린다는 것이다.
참조: 율법의 다양한 의미 층
지금까지 강의를 들은 사람은 리덜보스가 혹시 반율법주의자가 아닌지 의심이 들어올 수 있다. 그가 새 생명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과 성령님을 대립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46장에서 그는 “율법의 제3사용”이라는 제목으로 이 문제를 별도로 다룬다. 먼저 필자가 율법의 다양한 용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한다:
율법에는 다양한 의미 층, 혹은 용도가 있다.
1) 문자적 의미 층
율법을 일단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율법은 기본적으로 문자적으로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예: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또한 모든 제사법, 정결법도 여기에 속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이란 국가공동체가 이루어지며, 율법은 국가의 성문법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을 문자적 의미로 지키는 것 이상을 요구하신다. 율법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적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살아야 할 계명으로서의 의미도 가진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했으므로 항상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고, 율법의 본질적인 깊은 의미를 해설해 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척했다.
2) 정죄하는 용도
리덜보스가 “율법이 성령님과 대립”한다고 말할 때에는 율법의 정죄용도를 의미한다. 율법은 실제로 인간을 정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을 구하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구원의 수단으로는 부족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과 성령님 사이에는 구속사적 대립이 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서 온다.
3) 율법의 본래적 의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각 조항이 의미하는 본래적 의미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만 지켜서 자신이 오히려 의인인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율법 해설(예: 산상수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법은 완전한 거룩함과 완전한 사랑을 지향한다. 이것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들의 마음에 기록한” 율법이다.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이것이 또한 새 언약의 영의 약속이며, 성령님께서 새 언약 공동체인 교회에게 깨우쳐 주신다.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님께서는 구약의 율법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사도들이 가르친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 주셔서 지키게 하신다. 성령님은 그리스도 없이, 말씀과 동떨어져서 사역하지 않으신다. 이렇게 말씀 대로 사는 것이 리덜보스가 앞에서 말하는 “성령님 안에 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신자가 성령님 안에 있다는 것은 말씀이 그 안에서 분래적인 의미로 실행되고 있다는 것과 같다.
[1] 성령님과 그리스도는 바꾸어서 말할 수 있다.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2]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3] 리덜보스 한글판 14과 “높아지시고 다시 오실 퀴리오스인 그리스도”.”
[4]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사역에서 가장 핵심적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자기 대신 교회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그분을 통해 교회와 교통하신다. 이렇게 성령님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성령님은 지상에 계셨던 예수님의 사역을 대신하여 지속하신다.
[5]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6] 박문재는 이 말을 주로 “집단인격적”으로 번역하는데, 그것도 좋은 번역이므로 내가 때때로 그 표현을 사용한다.
[7]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시고 자기 대신 성령님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8] 내가 그렇다고 느끼는 것과 상관 없이 나는 이미 그리스도에 합병되어 있으므로 존재적으로 성령님 안에 있는 것이다.
[9] 그에게 죄를 멀리하도록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는 그리스도와 영적인 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도 생겼다.
[10] 이것은 사도 바울이 무슨 특별한 계시를 받았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이후 복음을 깨닫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구약성경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통해 복음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가르침은 모두 여기에 의존한다.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2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