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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송 카이펑에 잠들다
이미영
카이펑(개봉)의 여름 날씨는 대구와 비슷하다. 적어도 내가 방문한 2019년 여름은 그랬다. 눅눅한 공기와 찾기 힘든 바람이 습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대구의 여름과 형제자매 급이었다. 어디를 보아도 산자락 하나 없는 대평원의 카이펑에서 좁은 분지인 내 고향의 기운이 느껴지다니. 그래서인가 위용을 자랑하는 철탑을 보아도 넓디넓은 청명상하원을 걸어도 송림사 오층전탑이 생각나고 문경세재 영화세트장이 떠올랐다.
카이펑으로 답사를 하러가기 전까지 청명상하원은 들어 보았어도 도시 이름은 생소했다. 시안, 베이징, 뤄양은 귀에 익숙하지만 카이펑은 낯설었다.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는 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북송의 카이펑은 순위에도 없는 도시였다. 영남불교문화원의 2019 여름 답사 “석굴암의 원류를 찾아서”에 동행하기 전에는 북송, 남송, 판관 포청천, 「청명상하도」 같은 것들은 서로 낱낱이 떨어져 있었다. 철탑은 그야말로 처음 들어보는 유적이었다.
청명상하원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국보 제1호급으로 중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북송대 풍속화 「청명상하도」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청명상하원에 간 날도 한여름 대구와 같았다. 더위를 피해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서 턱을 괴었다.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재현해 놓을 이유가 있을까. 그저 민속촌 같은데. 땅속에 묻혀있다는 진짜 유적, 유물이나 꺼내 놓을 일이지. 저 멀리 로마의 폼페이 유적과는 대조적이다.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하루아침에 7m 이상의 화산재 아래에 묻힌 도시를 1748년부터 발굴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3/4을 발굴해냈다고 한다. 폼페이에 가면 79년의 로마를 보면서 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2019년의 카이펑에는 북송의 영화는 찾아볼 수 없고 현재의 중국 사람들이 먹고 마신다. 역사는 땅속에 켜켜이 쌓여있다. 깊은 잠에 빠진 중이다. 철탑이 남아 북송의 문화를 보여주고 「청명상하도」가 남아 당시를 상상하게 할 뿐이다.
카이펑의 운명을 황하가 좌우했다면 우리의 일정은 영남불교문화원 김재원 원장님의 해설이 지배했다. 답사일정 내내 버스를 타자마자 시작되는 해설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계속됐다. 중국 역사의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이어갔다. 그 놀라운 기억력과 열정에 감탄할 뿐이었다. 답사의 피곤함이 몰려와 눈꺼풀이 사정없이 내려올 때에도 김재원 원장님의 열정적인 해설을 들으려 눈을 번쩍 치켜세울 수밖에 없었다. 카이펑의 역사와 유적에 관한 설명은 황하와 변하의 범람으로 시작해서 도시의 수몰로 끝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황하와 연결된 인공 운하인 변하가 북송의 수도 카이펑의 번영을 이끌었지만 수몰로 인해 역사의 흔적을 묻히게도 만들었다.
나라의 수도는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할까. 안보라는 측면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또한 둘째 가라면 서럽다. 안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카이펑은 수도로는 한참 모자란다. 사방이 휑하게 트인 것이 역사와 지리에 문외한인 내게도 수도 방비는 어떻게 할 요량이었지, 괜한 의문이 들었다. 서울만 해도 북한산에다 한강이 흐르지 않는가, 경주는 또 어떻고. 이건 다 무슨 오지랖이란 말이가. 천 년 전에 일어섰다가 이미 오래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남의 나라 수도인 것을.
카이펑은 춘추시대에는 정나라의 계봉으로 전국시대에는 위나라 대량으로 역사의 중심이었다.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오대십국 때에는 네 왕조의 수도였고 이어 송나라에 와서는 번성한 수도로 꽃을 피웠다. 이는 카이펑을 망하게도 하고 흥하게도 했던 황하 덕분이다. 특히 북송시기(960~1127) 카이펑은 황하와 연결되는 인공운하인 변하를 통해 남쪽의 풍부한 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앙법의 도입으로 이모작이 가능해지면서 잉여 농산물이 역사상 처음으로 생겨났다. 변하를 통해 들어오는 풍부한 물자 덕분에 상업이 활발해졌고 이로 인해 도시의 인구는 100만이 넘었다. 이 시기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구를 자랑했고 그에 걸맞은 경제력이 뒷받침되었다.
나는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북송, 남송이 나오면 늘 헷갈렸다. 그냥 송나라로 부르면 될 것을 굳이 북송, 남송으로 가르느냔 말이다. 다 같은 조씨 왕조이고 금나라에 패해서 북쪽 카이펑에서 남쪽 항저우로 쫓겨 간 것인데 뭣 하러 헷갈리게 하는지. 그런데 답사를 다녀온 후에 카이펑에 관한 책들을 읽다 보니 북송과 남송이 지역 차이뿐만 아니라 문화의 향기가 얼마나 다른가를 알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과연 명언임을 절감했다.
카이펑의 수도 요건을 언급했으니 송나라를 짚고 가야겠다. 당 현종과 양귀비, 안녹산의 난으로 역사책을 휘저은 당나라가 망하고 혼란한 틈을 타 오대십국이 들어섰다. 이때 후주의 무장으로 절도사 출신인 조광윤이 황제로 추대되어 송나라를 건국한다. 송의 태조 조광윤은 당나라 멸망의 원인을 절도사에게 많은 권한을 준 지방분권에 있다고 판단한다. 해서 중앙집권제로 체제를 정비하고 문치주의의 깃발을 올렸다.
조광윤을 검색하면 그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나는 괜히 관모에 시비를 건다. 송 태조는 어깨너비 두 배나 되는 길고 가는 막대기가 가로로 꽂힌 관모를 쓰고 화가 앞에 앉았겠다. 판관 포청천이라는 드라마에서 보아서 그런지 관복과 관모가 낯설지 않다. 나는 늘 궁금했다. 저런 모자를 쓰고 어찌 걸어 다녔을까. 옆 사람과 부딪히기에 십상이고 혼자 걷기에도 불편해 보인다. 실제로 드라마 속 판관 포청천은 말할 때조차도 관모의 가로막대가 심하게 덜렁거렸다. 당나라만 해도 관모에 붙은 가로막대기가 송의 것보다 짧고 조금 두껍다. 원나라는 아예 동그란 모자를 썼다. 가로막대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말을 타고 달리던 민족이라 그런가 싶다. 관모는 의례용이지 실용적인 목적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내 눈에 비친 송나라 관모는 머리 외에 몸은 쓰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관모에서도 문치주의를 외치는 것 같다.
태조 이후 지도자들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체제를 정비해 갔다.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사대부를 존중했다. 변하를 통해 들어오는 물산들은 카이펑을 풍요롭게 했다. 상거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졌다. 불야성이라는 말이 북송 때 생겨난 것이라니 야간 통행 금지도 없앨 만큼 번성했을 카이펑을 그릴 수 있다. 송나라의 번영은 제4대 황제 인종(1022~ 1063) 때에 절정에 이른다. 인종(1049)이 카이펑의 철탑의 벽돌을 쌓기 시작하여 30년 후에 완공되었다. 그는 철탑의 아름다운 완성은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철탑과 철탑보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다.
어느 날 밤 떠들썩한 음악이 들려오자 인종이 궁인에게 물었다. “대체 어디서 들려오는 음악이냐?” “민간의 주루에서 나는 소리입니다. 폐하, 바깥 민간은 궁중의 적막함과 달리 즐겁습니다.” “너는 아느냐? 궁중이 적막하기에 바깥 백성들이 즐거울 수 있는 게다. 만약 궁중이 즐겁다면 바깥의 백성들은 적막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멋진 왕인가. 게다가 황제는 늘 황복皇服을 빨아서 입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는 인종 시절에 송나라가 가장 번성할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가 사망하자 백성들은 며칠씩이나 시장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지전紙錢을 태우고 궁 앞에서 곡을 하며 애도했다고 전한다. 그의 사후에 묘호에 붙인 칭호, 인종에는 왕이 가져야 할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예기』에 “공이 있는 자는 조가 되고 덕이 있는 자는 종이 된다.”고 기술되어 있다. 인으로 백성을 대했고 덕으로 정치를 펼쳤으니 마땅히 인종이 되었다. 철탑이 황하의 범람과 인공적인 수공의 반복에도 오늘까지 의연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북송의 백성들이 단단히 심은 공덕비인 까닭이라고 우겨본다. 북송과 외교적으로 티격태격하던 고려의 후손인 내가 카이펑을 찾아와 철탑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철탑의 위용에 놀라고 인종의 덕치에 감탄한다.
북송의 유적은 카이펑의 지하 10m 아래에 묻혀 있다. 철탑과 번탑만 살아남아 지상에서 볼 수 있다. 번탑은 답사코스에 없었기에 직접 본 북송의 유적은 철탑이 유일하다. 카이펑의 역사는 수난水難의 역사이다. 황하의 범람으로 땅속에 쌓이고 인공적인 수공水攻으로 덮여 왔다. 카이펑의 지세가 황하의 하상河床보다 낮기 때문에 황하를 이용한 수공에는 꼼짝없이 당해왔다. 황하의 지류에 물길을 터서 강의 물을 끌어들이고 하류에 제방을 쌓는다. 강물이 불어나면 제방을 터뜨려서 카이펑으로 쏟아지게 한다. 얼마 후 도시는 물에 잠기고 일부러 제방을 쌓고 터뜨린 쪽이 카이펑을 차지한다. 이런 수공이 전국시대부터 남송초기, 명나라 말기, 중일전쟁 때까지 반복되었다. 하여 카이펑의 지상에는 과거의 흔적은 사라지고 현재만 남아있다. 카이펑의 땅속은 시루떡처럼 층층이 역사를 담고 쌓아왔다.
철탑은 8각 13층에 높이가 55m나 되는 전탑이다. 여름 아침에 만난 철탑은 한 번도 더위를 겪어 무른 적이 없는 강철같이 단단한 모습이었다. 사진으로만 보았을 때는 목탑 같은 분위기가 풍겼는데 실제 모습은 윤기가 감도는 강철 같았다. 색깔은 산화된 철 같았지만 절대로 부식된 쇳가루를 날릴 것 같지 않았다. 멀리서도 강철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유일하게 만나는 북송 조의 유적이라 더 반가웠다. 천 년이 넘는 동안 홍수를 견디고 전쟁을 버티어 온 벽돌 탑은 옅은 반짝거림으로 강하고 아름다웠다. 가까이 다가가 “세월을 견디느라 수고했구나”하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답사 기간 중 가장 많은 사진을 찍은 장소이다. 전신을 찍어주기도 하고 벽돌의 아름다움이 드러나도록 최대한 다가가 찍기도 했다. 기단부는 땅속에 뿌리처럼 박혀 볼 수 없는 탑. 애틋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오래 곁에 머물렀다.
탑 안에 들어가면 계단을 걸어 올라 꼭대기에서 카이펑의 전망을 볼 수 있다는데 우리는 탑 주위만 빙빙 돌다가 왔다. 철탑의 꼭대기에서 카이펑을 한 번 내려다보았으면 좋았을 것을 사진을 꺼내 볼 때마다 아쉬움이 남는다. 벽돌마다 무늬가 박히고 청동빛이 감돌았다. 시선이 달라질 때마다 초록이 짙어지기도 하고 붉은빛이 감돌기도 했다. 55m에 이르는 높이와 한참을 걸어야 한 바퀴를 도는 넓이는 웅장함을 주었다. 누각식 전탑을 처음 만나는 까닭에 더 오래 머물며 살핀 것 같다. 팔각의 지붕 모서리마다 풍경 같은 종을 매달아 놓았다. 실바람에도 댕그랑 소리가 날 것 같았다. 화강암을 사용하여 삼층석탑을 주로 제작한 신라 석탑과는 형식이 아주 다르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쉽게 아름답다고 느끼기 어려운데 철탑은 그렇지가 않았다. 내 고향의 날씨와 비슷한 곳에서 송림사 오층전탑의 향기가 느껴져서 그리되었던가. 철탑이 철탑이라고 불린 것은 원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전체가 갈색 유리 벽돌로 덮여 있어서 마치 철로 만든 구조물같이 보였기 때문이란다. 또 다른 설은 그 많은 범람과 수공을 견뎌내고 굳건하기에 강철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유야 뭐가 됐든 철탑이라는 이름은 찰떡같이 붙였다.
청명상하원에서는 북송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민속촌에서 조선 시대의 껍데기를 경험하는 것처럼. 재현은 재현일 뿐이다. 벌써 옛날 일이 되어버렸지만, 간송미술관에서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전시회는 우리나라의 고미술품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였다. 1990년대 서너 해를 관람하러 다녔다. 얼마 전부터는 동대문 DDP에서 기획전시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당시에는 전시 기간이면 서울 길을 모르는 사람도 성북동 어디쯤 가면 줄을 선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대기 줄 끝에서 무작정 기다려 따라가면 간송미술관이 나왔다. 1930년대에 지었다는 건물이 정갈하고 고풍스러웠다. 구름 같은 관람객에 섞여서 입구로 들어간다. 1층, 2층 유리장 넘어 진열된 그림과 도자기를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건물 밖으로 떠밀려 나오게 되었다. 겸재 정선의 화첩, 혜원 신윤복의 화첩, 청자 매병, 귀여운 연적들이 잊히지 않는다. 주마간산 격으로 본 것인데도 여운은 오래 남았다. 진품이 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북송의 대표 풍속화 「청명상하도」는 보지 못했다.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모셔두고 외출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귀하신 몸이다. 물론 우리 답사의 목적은 석굴암의 원류를 찾아가는 것이지 「청명상하도」와의 만남은 아니었다.
청명상하원에서 천 년 전의 북송이 얼마나 번성하였나를 상상했다. 지금 카이펑의 10m 아래 홍교의 석축이 흩어져 있고 강남에서 가져온 차를 끓여 팔던 핫 플레이스 찻집이 있고 실크로드 대상들이 머물던 여관들이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면 송나라 민속촌 격인 청명상하원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대륙의 관문 북경 공항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오면 기다란 「청명상하도」가 이국의 방문자들을 가장 먼저 반긴다. 그때 김재원 원장님이 “자 이 그림 좀 보세요.” 하지 않았다면 그냥 스쳐 지날 순간이었다. 왜 이 그림을 입국하는 이들 앞에 두었을까? 처음에는 의문만 가졌다. 4박 5일 동안 중원을 쏘다니다 보니 점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천하제일도’, ‘중국의 모나리자’라는 「청명상하도」의 별칭을 보면 중국인들이 얼마나 사랑하고 관심을 가지는 가를 알 수 있다. 북송대 화가 장택단이 그린 빼어난 풍속화로만 알았는데 현대 중국인들의 지향점이 되고 있었다.
2010년 상하이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장에 전자판 「청명상하도」가 전시되었다. 이 그림을 보려고 줄을 선 중국인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의 경제와 문화가 세계를 압도하던 그 시절을 자랑스러워하고 지금 그 길로 쫓아가고 있다고 믿는 듯하다.
때는 북송 어느 청명절, 축제의 현장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펴가며 보는 두루마리 그림을 따라가 보자. 5m가 넘는 두루마리 안에서 북송의 번영이 펼쳐진다. 우리가 걸었던 청명상하원을 떠올리며 이 그림 속을 노닌다. 진입로 부분에는 청명날 교외로 성묘를 다녀오는 일행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면 홍교를 중심으로 강가에 정박한 배들, 마차와 수레, 낙타의 행렬까지 물건을 실어 나르는 사람들이 오간다. 큰 배들이 아래로 지날 수 있는 거대한 아치형 다리, 홍교는 당대當代의 건축술을 자랑하는 중이다. 대로 쪽으로 문을 낸 집들이 촘촘하다. 찻집과 주점, 여관이 즐비하다. 변하卞河에 오르내리는 배들은 당시의 교역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북송 시대의 카이펑은 부유함과 화려함이 천하제일이라는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북송의 청명절, 삶의 현장 한가운데를 그린 「청명상하도」는 회화의 완성도와 그림이 담은 내용 면에서 중국인이 내세울 만하다.
북송의 화가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는 이후 도시를 화제로 한 그림에서 많은 모사본을 낳았다. 명, 청대에 이르러 상업이 발달한 도시를 그리는 성시도가 유행했다. 태평성대를 보여주는 선전용 포스터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18세기 조선에서는 연암 박지원 등이 연행사로 중국에 갔을 때 「청명상하도」의 모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거중기로 수원 화성을 지었던 정조의 꿈처럼 상공업이 활발하게 일어나기를 바랐던 희망이 그림으로 그려졌다. 백성들은 시장에 나가 마음껏 장사를 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태평성대가 그림 속에서 완성되어 되어 병풍으로 만들어졌다. 18세기에 그려진 「태평성시도」는 번성했던 카이펑의 모습처럼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물건을 사고판다. 누각의 모양은 중국색채가 짙게 배어 나오지만 사람들의 의복은 조선의 그것이다. 현대의 중국인들이 「청명상하도」를 보면서 영광의 재현을 꿈꾸듯이 조선 후기의 백성들도 물산이 넘쳐나는 「태평성시도」 같은 곳에서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2019년 7월 초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장에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가 걸렸다. 국회의 문화체육관광위원들이 태평성시도와 같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명 같아 놀라웠다. 문화가 살아있는 국회의 회의장 같아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답사에서 돌아오는 날 비행기를 기다리던 베이징 공항 E15 번 문 근처에서 들판은 추수할 곡식으로 넘실거리고 사람들은 유유자적한 그림 하나를 보았다. 강물 위에 곡식을 가득 실은 배가 떠다니고 비옥한 들판에서 함께 일하는 농부들은 즐거워 보인다. 마을 뒷산은 푸르고 집 앞의 수양버들은 여유롭게 늘어져 있다. 소박한 가운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림만 보고 유추한 것이라 정확한 정보가 아님을 밝힌다.)그림의 제목은 우측 하단에 쓰인 「풍년」으로 보이는데 작가의 서명은 분명하지 않다. 평면 회화를 중국 온라인 TV 방송국에서 전자판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출국 문 광고판 사이에서 중국이 밝게 빛난다. 풍족하고 화평한 중국을 표방하는 것 같았다. 작은 「청명상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자꾸 눈길이 갔다.
「청명상하도」와 「풍년」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중국이 나에게 다가왔다. 여행의 시작과 끝은 방문국의 공항이 아닐까. 중국은 문화로 중국의 비전을 제시하는 중이다.
석굴암의 원류를 찾아서 떠난 답사에서 북송을 만났다. 철탑만 남은 카이펑에서 성군 인종을 떠올리며 청명상하원을 걸었다. 「청명상하도」에서 과거를 기리고 현재를 추구하는 중국인들을 본다. 국회 문화관광체육위원회 회의장에 걸린 「태평성시도」를 주목하며 우리의 문화정책을 긍정해 본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피는 지혜를 주고 답사는 현장감을 통해 시대를 읽는 지혜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기행수필이군요
카이펑에 갈일있음 필히 정독하고 갈께요
좋은 글 먼저 읽고가면 관광지가 더 눈에 들어올겁니다
2013년도 카이펑에 갔었는데 새삼... 사진 추억를 찾아서 올려보지요.
카이펑이라 무식하게도 처음 듣는 지명입니다.
먼저 다녀오신 분의 글을 읽었으니 직접 가보면 많은 참고가 되겠지요.
잘 읽었습니다.
석굴암의 원류를 찾아 떠난 북송 답사, 저는 영남불교문화원 김재원 원장님의 해설을 듣지는 못했지만 이미영 사무국장님의 이끄심따라 글을 읽으니 북송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