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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동시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허암 박일
계간평(문학도시 6월호)
인간스런 마음을 찾아주는 아동문학
박 일
어린이까지 독자를 확대한 문학이 아동문학이다. 어른들에게는 동심을 자극하여 현실의 팍팍함을 달래주고, 어린이들에게는 상상력을 키우면서 인간스런 마음을 찾아주고 세계를 넓혀준다. 아동문학이 따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학도시』 3월호에 실린 동시는 김용석의 「석간신문」외, 서정화의 「깡통 속 피라미」외, 4월호에는 공재동의 「양파」외, 김연숙의 「목련꽃」외 그리고 5월호에는 김춘남의 「달콤한 사람」외, 송영심의 「꽃샘추위」외, 하빈의 「폐교」외 1편이다.
우리집/저녁 밥상머리는/석간신문//
엄마 기자/고등어 한 손, 무 한 뿌리 값/하루가 다르다며/작은 한숨//
아빠 기자/회사 걱정, 나라 걱정,/세상 걱정//
우리 집 막내 기자/유치원 내 동생/짝지 자랑, 선생님 자랑,/ 노래 자랑, 춤자랑//
우리집/저녁밥상머리는/석간신문
-김용석「석간신문」전문
공감이 간다. 엄마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고, 아빠는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물가는 치솟고, 정치 수준은 초등학교 학생회보다 못하다고 하니까. 그래도 희망이 있다. 우리 집 막내가 있지 않는가. 그가 반전의 계기를 만든다. 짝지, 선생님, 노래와 춤 자랑까지 하면서 한숨과 걱정을 덮어 버린다. 이런 건강한 요소가 바로 아동문학의 매력이다. 수미상관의 형식이 안정감을 더해준다.
함께 실린 「단풍잎」은 단풍잎을 요정들의 쥘부채로 표현한 것이 절창이었다. 싱싱한 비유가 감동의 힘이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한다.
연못 속/빈 깡통 속에/집을 지은 피라미//
집이 좋아/먹고 자고 하더니/몸이 불어 못 나오네//
게으름 후회해도/어쩔 수 없네//
좁은 깡통 구멍/목만 내 놓고/뻐끔뻐끔
-서정화「깡통 속 피라미」전문
주제가 선명하다. 상관물인 피라미를 통하여 게으름 피우다 후회하는 경우가 있으니 근면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너무 교훈적이라서 그럴까? 교훈적인 것은 교실에 맡기면 된다. 그렇다면 문학을 비교훈적인 소재에 초점을 맞춰 보면 어떨까? 그것이 역설이나 반어가 될 수 있도록 은근히 추락해 보라. 더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게다.
「민꽃게」도 스타일이 비슷했다. 관념의 세계를 벗어던지고, 사유의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을 때 동시도 자유분방해질 게다.
하마나/하나마//
눈물로/양파 한 알/다 깠지만//
아직도/너를/모른다//
네 마음을/모른다.
-공재동 「양파」전문
동시로 다루기에는 다소 무거운 주제다. 주제가 무겁다는 이유로 동시가 외면한다면 동시의 외연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의 문학적 저력이 그런 점을 충분히 감안하였으리라. 양파를 까는 일은 쉽지 않다. 자극적인 냄새와 매운 맛이 눈물샘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을 겪고 양파를 까도 보여주는 게 없다. 그래서 ‘아직도/너를 모른다’ ‘네 마음을/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말 순정이 사라지는 세상에 암시하는 바가 크다.
까치가/나뭇가지 위에서/그네를 타는/아침//
겨울도 아닌데/가지 끝에/눈송이가 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쳐다보며/하얀 웃음 짓는/봄눈 온 아침!
-김연숙「목련꽃」전문
좋은 문학이란 감동의 요소가 지배한다. 그렇다면 목련이 피었을 때 그 순결한 빛깔을 보고 어떻게 감동할 것인가? 그 때 상상력을 동원시키면 된다. 겨울도 아니지만 눈을 부른다. 가지 끝에 올린다. 그러고 보니 ‘하얀 웃음 짓는/봄눈’이 되지 않는가. 목련꽃 향기처럼 상큼한 울림이 느껴진다. 그러나 너무 흔한 소재는 그 흔함을 추월하는 빛나는 상상력이 발휘되어야 한다.
아빠가/텃밭에서 노래 부르며 일을 한다./갑자기/말벌이 날아왔다.//
“아빠, 벌!”/“어디?”/“아빠 귀 뒤, 꼼짝 말고 있어요.”//
꿀 먹은 아빠의/굳은 표정에/우리도 긴장.//
다행히 벌이 날아갔다./무사한 아빠를 위해/엄마는 양 손의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빠가 웃으며/엄마에게 한 마디 한다.//
“겉보기는 무뚝뚝하지만,/ 벌이 찾아올 정도로 달콤한 사람이오!”
-김춘남「달콤한 사람」 전문
말벌은 위협적인 존재다. 생명도 앗아갈 정도로. 텃밭에서 일하던 아빠의 귀 뒤쪽에 날아와 앉았다. 가족 모두 긴장할 수밖에 없다. 공격적일 때 말벌도 공격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침착하고 태연한 척해야 한다. 날아갈 때까지 마음을 졸인다. 다행히 벌이 날아간다. 안도의 한 숨을 쉰다. 어쩌면 일상의 스토리텔링이다. 그러나 아니다. 마지막 연이 있다. 어떻게 표현해야 문학성을 획득할 것인지를 알고 있으니까 인내를 발휘했다. 동시든 시든 주제가 파악되면 더 읽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끝까지 읽히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 살아오면서 아빠가 무뚝뚝한 사람으로 여겼을지 모르지만, 벌이 날아올 정도라면 꽃처럼 달콤한 사람이 아니냐는 것을 과시하는 게 익살스럽다. 동시가 가져야 할 재미와 감동의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나뭇가지에 봄이 움트려 있어요//
이제 막 잠에서 깨어/기지개를 켜려/얼굴을 사알 내미니//
심술궂은 바람이 쌩!/아직은 아니라고/좀 더 있다 나오라고//
움트려 있는 봄/봄 나들이 가고파/이제나/저제나/눈치만 살피네
-송영심 「꽃샘추위」 전문
진보가 없으면 퇴보다. 남다른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퇴보다. ‘움트리’는 움트다의 명사형인데, ‘움트려 있다’는 무엇인가? 잎이 피기 직전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가 보이긴 한데…. 시인은 시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어를 활용하고 조합해서 감동을 만들어 내는 분이다. 단어가 시 속에 들어가면서 시너지 효과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거칠고 투박한 용어도 사용할 수 있다. 동시가 문학이 되려면 누구나 아는 상식을 가지고 서술하면 곤란하다. 심술궂은 바람이나 그 때문에 눈치를 보는 꽃샘추위도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신인이란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상상력과 뜨거운 가슴을 지닌 분이다.
낯익은 작품은 수정해도 신작이 아니다. 하빈의 동시에 대해서는 지난번 계간평에서 거론했지만, 절차탁마의 노력이 없다면 시인이란 이름도 사치일 수밖에 없다.
소년소설이 동화와 구분되는 요소는 작품 속에 구현되는 인물상의 차이다. 동화의 인물이 동심에 맞닿아 있다면 소년소설은 현실에 맞닿아 있다. 동화작가들이 소년소설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도 현실의 아이들과 살고 있고, 그들에 대한 객관적 조명을 하고 싶기 때문일 게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사를 이끄는 중심인물이다. 그의 이야기가 곧 작품의 서사가 되니까.
『문학도시』 3월호에는 김경순의 소년소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4월호에는 김영호의 동화 「아듀 아벨라」, 5월호에는 최경희의 동화 「개나리 활짝 핀 어느 봄날」이 실려 있다.
“엄마, 말 좀 빨리해. 천천히 하니까 짜증나!”
엄마는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정수야, 미안해. 말을 빨리 하려고 해도 잘 안 돼.”
나는 엄마가 말을 빨리 못하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엄마랑 무슨 얘기든 잘 안한다. 다른 엄마들은 자기 아이들이랑 말도 잘하고, 맛있는 것도 잘 만들어주고 한다는데 나는 그런 일이 없다.
-김경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전반부
이 소설의 제목이 비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제까지 말할 수 없었던 사정은 무엇일까? 정수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다. 엄마는 베트남에서 왔으니까 우리말이 서툴다. 갈등은 계속된다. 엄마랑 말도 하기 싫고, 동행해서 백화점 가는 일도 싫었다.
“여러분! 수고하신 경수 어머니께 감사하다는 인사의 박수를 쳐드리세요.”
선생님도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들도 내게 손을 흔들며 고맙다고 했다. 순간 어깨가 쑥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김경순 「이제는 말할 수 있다」후반부
엄마가 일일교사가 되었다. 베트남이란 국가에 대한 학습을 하는 과정에서 남다른 열정을 보인다. 체험이 실린 이야기였기 때문에 아이들도 공감한다. 정수 어머니의 활동을 보면서,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도 깨지기 시작한다. 정수도 어머니를 인정하게 된다. 열심히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떳떳이 말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다문화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은 상당히 많다. 그렇다고 그들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을까? 주인공이 더 고뇌하고, 갈등의 구조를 리얼하게 조직하면서, 치열하게 해결하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편견 해소에 어떤 영향이라도 끼칠 수 있을까?
내 이름은 아벨라.
키는 4.165(mm) 허리둘레 1,665(mm)
1996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25만 km를 달렸다.
엄청 올드한 카, 이제 20대가 된 내 나이인데도 길가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지금 온몸이 아픈 중환자이다.
-김영호「아듀 아벨라」 중반부
아벨라의 존재를 알 수 있다. 20년을 타고 다닌 고물 승용차인데, 이 차가 주인공인 ‘나’다. 그런 차였으니까 내가 느림보 여행을 할 수밖에 없었고, 여행하면서도 피로를 느끼곤 했었다. 이제는 한계까지 왔었다.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온 몸의 피부까지 망가졌으니까. 비로소 나는 주인님과 헤어질 때가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숨을 헐떡거리며 마지막 여행도 한다. 이 동화는 제3부로 구성되어 있다. ‘봄 풍경 그림 한 장’ ‘올드카의 독백’ 그리고 ‘아듀 아벨라’이다. 엄격히 따지면 물활론적 환타지는 제2부까지다. 제3부에서는 아벨라를 아듀하면서 아벨라와 나(아내)의 얽힌 추억의 이야기로 설정되어 현실 세계가 배경이 되어버린다. 결혼 중매 역할도 하고, 운전 교습도 이 차가 하게 하였다. 제3부의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 속에 녹여버렸으면 더 멋진 환타지가 되었을 것이다.
어린이, 어른 가릴 것 없이 환타지를 좋아하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 ‘광대한 자유의 표현’ ‘소원 성취의 세계’ ‘현실의 이탈성’ 등 현실 너머의 삶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을 가질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송이는 개나리꽃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축 늘어진 가지 하나를 잡고 개나리꽃을 얼굴에 대어보고 킁킁 냄새도 맡아봅니다. 짙은 향기는 없지만 노란 꽃잎에선 상큼한 봄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노란 개나리야, 내 이름은 한송이야. 초록 유치원에 다닌단다.”
송이는 나무 가지에 조롱조롱 매달려 핀 개나리가 대견하여 말했습니다.
“송이야, 우린 네 이름을 알고 있단다.”
개나리꽃이 입을 쫑긋거리며 말합니다.
-최경희「개나리 활짝 핀 어느 봄날」 전반부
초록 유치원에 다니는 송이가 개나리와 대화를 시작한다. 개나리꽃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꽃을 누가, 어디서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알기 위하여 개나리 나무 밑을 파기 시작한다. 마침내 지하로 가는 계단을 발견한다. 그 속에서 요정들을 만나고, 꽃과 향기를 만드는 공장을 알게 되었다. 그 지하 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은 환타지의 절정이었다.
할머니와 엄마가 송이를 부둥켜안으며 물어봅니다.
“나말이야, 꽃 만드는 공장에 갔다 왔어. 맛있는 사랑열매도 먹었어요. 나 이제 누구든지 다 사랑할 거야.”
“할머니, 엄마, 사랑해.”
송이는 할머니와 엄마 얼굴에 몇 번이고 뽀뽀를 합니다.
“우리 송이가 갑자기 사랑 병에 걸렸나 보네. 호호호.”
할머니와 엄마도 송이 얼굴에 뽀뽀를 해주었습니다.
-최경희「개나리 활짝 핀 어느 봄날」 후반부
공장 옆에 있는 큰 나무는 사랑 열매를 달고 있었다. 그 열매를 먹은 사람들은 큐피드의 금촉 화살을 맞은 것처럼 누구나 사랑하게 된다. 그래서 송이는 사랑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아마 송이처럼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열매를 나눠주고 싶었으리라.
동화작가 김문홍은 다음과 말한다. ‘오늘의 동화작가들은 어떻게 보면「아라비안 나이트」속의 ‘세헤라자데’ 가 되어야 한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밤이면 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공주, 이야기에 목말라 건조한 모래 기둥으로 서 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늘 판타지를 창조해야 하는 공주가 되어야 한다. (중략) 오늘의 아이들에게 진정한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여야 하는가? 서사의 입체성이 주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꿈을 잃은 그들에게 푸른 생명력을 주는 아름다운 판타지여야 하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이미 판타지를 잃은 지가 오래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창조적 콘텐츠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우리 아이들에게는 지금 판타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동화작가들에게 판타지가 없으니 아이들 역시 판타지에 목마르다. 그래서 판타지를 닮은 기미가 보이는 이야기를 발견하면 무척 반갑고 대견스럽다.’라고.
LH 스미스는 그의 저서 『아동문학론』에서 어린이가 싫어하는 책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책 대신 글로 대체해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어린이들의 천성에 어울리지 않는 책(글), 눈을 즐겁게 해주지 못하는 책(글), 생기 넘치는 강렬한 표현으로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책(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밖에 가르치지 못하는 책(글) 그리고 졸음은 자아내도 꿈은 이끌어내지 못하는 책(글) 등이다. 결국 아동문학의 존재 이유는 인간스런 마음을 찾아주면서 인간의 본성(동심)을 바라보게 하는 일이 아닐까? 요즘 일간신문들이 ‘가슴으로 읽는 동시’ ‘동시를 읽는 아침’ ‘열려라 동시’ 등의 코너를 할애하는 것도 초심(동심)을 회복시키는 약재가 곧 동시라는 믿음 때문이리라.
첫댓글 계간평 잘 읽었습니다.
후배들을 위해 등대 밝혀 주시니
따뜻한 불빛보며 힘을 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