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마지막 조선 "모두의 싸움, 모두의 승리"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1920년 마지막 조선 "모두의 싸움, 모두의 승리"
나라 뺏긴 설움이 우리를 소총잡게 만들었다. 이말이야 !!
독립전쟁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6월 7일은 봉오동전투가 일어난 날입니다. 홍범도 장군의 주도로 일어난 봉오동전투는 우리 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승리이자 혈전이었습니다.
<홍범도 장군>
1868년 10월 12일 평양에서 태어난 홍범도 장군은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부잣집 머슴으로 지내다가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으로 입대합니다. 하지만 조선 말기의 군대는 부패하여 군의 제대로 된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홍범도는 군의 부정부패와 사병에 대한 학대에 실망하다가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구타하고 병영을 탈출합니다.
그 후 홍범도는 몇 년간 노동자로 일하다가 1890년부터 약 1년 반 가량 금강산 신계사(神溪寺)에 들어가 지담대사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이기도 한 지담대사는 홍범도에게 임진왜란 당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과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사명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줄곧 들려줍니다. 이는 자신 스스로 존재에 대한 자아성찰과 동시에 투철한 항일의식으로 무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계한 후에는 뛰어난 사격솜씨를 활용, 명사수 사냥꾼으로 생활합니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강원도와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인 강원도 철령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타도하는데 앞장서기도 합니다. 의병진을 해산한 후 다시 본업인 사냥꾼으로 돌아갔다가 1907년 군대해산 후 다시 의병을 일으켜서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합니다. 사냥꾼으로 조직된 의병진은 지형지물에 밝아 다른 의병 부대와 달리 탁월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죠.
독립전쟁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
< 봉오동전투 지역 사진>
1910년 경술국치로 끝내 나라가 멸망하고, 홍범도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시베리아에 진출한 체코군은 귀환하면서 무기를 헐값에 판매하는 상황이었죠. 이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조직된 한인 무장단체에 신식 무기로 무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홍범도는 3․1운동 이후 본격적인 무장투장에 나서게 됩니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군무부 소속 군대의 일부를 인솔하고, 그 해 9월 간도에 도착하여 간도 대한국민회의 재정 지원과 병력을 지원받아 대한독립군을 편성합니다. 대한독립군은 1920년 초반 경부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규모 국내 진공작전을 감행합니다.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나드는 독립군 활동에 일본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죠. 일본은 중국과 여러 차례 교섭을 통하여 독립군을 일시에 진압하려는 술책을 펼치게 됩니다.
일제는 나남에 주둔한 조선군(일본의 조선주둔군) 제19사단 소속 남양수비대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 중대로 야스가와(安川) 소좌를 지휘자로 하는 월강추격대를 만들어 독립군을 추격합니다. 당시 월강추격대는 최신예 무기로 무장한 ‘백전무패’를 자랑하는 군대였습니다.
1920년 6월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에서 일본군 순찰소대를 습격하고 일본군을 공격합니다. 이에 일본군 소대 병력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나, 독립군은 삼둔자(三屯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힙니다. 이것의 봉오동전투의 전초전 격인 삼둔자 전투입니다.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6월 6일 종성군 하탄동에 집결, 오후 9시 이후부터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합니다. 6월 7일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일거에 공격하기 위하여 진격한 것이죠.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남봉오동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홍범도 등의 독립군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추격을 예상하였고, 봉오동 일대에서 격전을 벌일 계획을 수립합니다.
<홍범도 부대가 사용한 수류탄과 탄환 사진>
6월 6일 홍범도 부대 예하의 1개 중대가 기습공격을 당하고 퇴각하자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로 추격합니다. 그러나 사실 독립군은 이곳에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는 위장전술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독립군은 홍범도의 지휘에 따라 마을 주민을 모두 대피시키고, 북봉오동의 서산에 홍범도의 지휘부가, 동산에 최진동의 부대가, 남산에 신민단의 부대가 각각 대기 중인 상황이었습니다. 임전무퇴라는 비장한 각오로 일본군을 격멸하려는 긴박감과 함께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6월 7일, 독립군은 일본군 주력부대가 포위망에 완전히 걸려들기를 기다렸다가 홍범도 장군의 명령에 따라 3면에서 일본군을 협공합니다. 일본군은 동쪽 고지에 매복한 강상모 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강상모 중대는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합니다. 일본군은 봉오동 일대에 갑자기 밀어닥친 시커먼 먹구름과 쏟아지는 폭우를 이용하여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와 퇴각합니다.
제국주의에 희생된 독립군의 영웅
봉오동전투로 독립군은 일본군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되며, 이는 청산리대첩으로 이어집니다. ‘천하무적’ 일본군을 무찔렀다는 자신감이 독립군 단체에 팽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비록 빈약한 무기로 무장한 독립군이지만, 필사적으로 합심하고 협력하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패배의 보복으로 만주 일대에서 우리 동포들을 학살하는 잔혹한 ‘경신대참변’이라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파상공세에 직면한 독립군은 결국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로 건너가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는 러시아혁명 후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과 혁명 측인 적군의 적백내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적군은 공동의 적인 일본을 상대하기 위해 독립군을 받아들이나, 독립군 사이에도 이를 둘러싸고 내분과 갈등을 낳았고, 결국 ‘자유시참변’이라는 비극이 일어납니다. 이념적인 대립과 현실 상황에 대한 인식 차이가 빚어낸 참극이었습니다.
<만년의 홍범도>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를 믿고 일단 러시아군으로 편입합니다. 조국광복을 위한 원대한 꿈을 꾸면서요. 자유시에 설립한 고려혁명군관학교는 이와 같은 희망을 실현하려는 상징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한인들 항일무장투쟁단체의 해산을 러시아에 요구하며 독립군 활동을 저지하는데 진력을 기울입니다. 홍범도 이하 독립군은 무장해제를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더욱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이루어진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해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가 1943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비록 이국 땅에서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홍범도 장군은 봉오동전투라는 독립운동사상 불멸의 자취를 남겼습니다. 정부는 장군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무명의 사냥꾼에서 만주지역 독립군을 견인한 장군으로 활약한 홍범도를 위하여.
<봉오동전투기념비 (출처: 두산백과)>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가는 길목에 세워진 봉오동전투기념비는 당시 상황을 아련하게 들려줍니다. 현장은 저수지 건설로 수장되었으나 만주 벌판을 누빈 100만 독립군 용사의 얼굴이 여전히 아른거립니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이끈 전설적인 인물 홍범도를 기억하면서 말이죠.
[출처] 독립전쟁사에 빛나는 봉오동전투의 주역 홍범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 독립운동가 및 전쟁영웅) |작성자 독립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