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0 봉화 해저리(바래미마을) 만회고택을 갔다.
만회고택 주손이신 김시원 선생이 초대해주셨기에 다녀왔다.
서울 서초동에 잇는 심산 김창숙 기념관에서 사무총장님이 인솔하여 '심산역사탐방'을 진행하는데 참여하면 좋겠다는 연락이 그 몇일전에 있었고,그래서 심신기념관 박해남 사무총장님과 연락이 되었다.
심산 선생이 석주 이상룡 상해임정 국무령의 편지글을 갖고 예천 미산고택을 방문한 자료(아래 사이트 링크)를 사무총장님께 보여드렸고....자료로 출력을 해오셨다.
만회고택은 3.1운동에 유림들이 빠지자 심산 김창숙을 비롯한 유림들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파리장서'의 초안을 잡은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독립운동유적지이다.
만회고택은 12대에 걸쳐서 진사를 했고,대과급제를 6분이나 했다.해저리 바래미마을(바다밑을 봉화말로 바래미라고 한다)이 작은 단위이지만 어느 문중 못지 않은 대단한 인재들이 나왔다고 한다.
봉화 해저리 바래미마을은 조선시대 팔오헌 김성구 선생이 입향조인데,나중에 개암종택이 들어온 것이다.
개암(개암 김우굉)선생은 동강 김우옹선생과 형제이신데 성주에서 상주쪽에 와서 사시다가 나중에 해저리로 들어왓다고한다.팔오헌 김성구는 김우굉의 고손이라고 한다.
숙종때 대사헌과 관찰사를 지낸 팔오헌 종택이 들어온 이후 약 200여년간에 소과(진사)를 64장,대과를 14장 이룩한 문중이다.소과 64장이란 뜻은 진사아닌 사람이 없었을 정도란 뜻이다.
주인이신 김시원님과 나
사랑채 앞 좌측에 양복입은 분은 봉화군청 문화관광과장이신 박남주님이시다.박남주님은 고향이 전라도 신안인데 봉화에서 공무원생활하며 결혼을 해서 인제 봉화사람이 되었다고 한다.중간에 하얀색 상의를 입으신 분은 바래미마을 팔오헌 종손이시고 등을 보이는 분이 장달수님이시다.
집을 약간 손보고 오랜만에 서울에서 단체로 손님들이 거하게 들이닥치니 문화관광과장님도 출동하셨고..특히 아래 동영상에 보이는 구순의 노마님의 창을 들어 볼려고.....마을 주민분들도 구경을 오셨다....
봉화기차역앞에 있는 봉화송이식당에서 저녁식사후... 관광버스에서 내려서 만회고택으로 들어 가는 길이다.
위는 만회고택 사랑채이다.
개암고택이 있는 해저리(海底里)의 또 다른 고택 가운데 하나이다. 이 집은 순조 30년(1830)에 과거에 급제한 이후 현감, 부사를 거쳐 우부승지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김건수가 살던 집이다. 사랑채인 명월루는 그가 지었으며 철종 1년(1850)에 대규모 수리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안채는 김건수의 6대조가 이 마을에 처음 들어와서 이곳에 살던 여씨에게 구입했다고 전한다. 마을 동쪽 끝의 산자락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집 앞에는 우물과 수백 년 됨직한 오래된 소나무가 세월의 역사를 안내하듯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저녁을 먹고 들어왔더니...이내 날이 어두워진다....
독립투사 고(故) 김정진 옹의 맏아들인 시원씨가 설명을 하시고 내려가시고...허리가 굽으신 구순(94세)인 노모친께서 가사를 읊으시려 준비하는 동안 사무총장님의 설명이 이어지고...
경상도 양반집안에서 현재 90세 이상이신 분들은 규방가사를 다하셨다....그러나 그이후 세대는 잘 모르신다...대한민국의 전통문화 하나가 역사속으로 사라져가고 있는 현장의 안타까움이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쓴 여동생(성산이씨 부인)의 만사를 장달수님이 번역한 자료는 요기 참고.
첫댓글 자세한 글과 곁들인 사진 잘 보았습니다 공무상 바쁜 지방 출장중에도 알고 싶었던 봉화 해저리의 이야기 감사합니다
노는 놈이 더 바쁘다고....저번 겨울부터 주손분이 놀러오라고 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번에 마침 잘 되었다 하고 다녀왔습니다..ㅎ
가보니 공부거리가 많아서 몇번이고고 다시 가야겠더군요....
2편도 기대하시라~~
형님한테 한번 전하시소.... 순국지에 답사기를 좀 실으면 좋겠는데....
@범털과개털(미산고택 박갑로) 열정이 놀랍습니다 전하리다
사진과 설명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오후 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