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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주교 순례이야기
길고긴 여정을 순례이야기로 담는 것은 회상[AnaMNesis]을 위한 것이다. 회상[AnaMNesis]은 단순한 기억[Memory]이 아니다.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불멸의 영혼에 대한 오랜 과거에 대한 회상이다. 그리보면 우리는 모두 이데아[Idea] 세계에 대한 기억을 망각한 채, 모두가 다 치매이면서도 마치 가까운 과거를 잊은 사람들을 치매로 부르며 혀를 차는 오십보백보의 삶을 사는지도 모른다. 회상[AnaMNesis]이 무의식[Id]의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은 의학의 영역 안에서이기도 하다. 심박동기나 제세동기가 멈춘 심장을 다시 움직이게 하듯, 의식과는 상관없이 심장을 움직이게 하는 이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회상[AnaMNesis]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미사와 우리의 미사에 의해서이다. "나를 기억해서 이를 행하여라."는 예수의 만찬, 성체성사의 원형[ArcheType]은 예수의 미사가 우리의 미사가 되게 한다. 성체와 성혈의 나눔, 희생과 죽음의 십자 등의 회상이면서 이를 휠씬 넘어선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실체변화[TranSubstantiation]를 루터교에서의 공동변화[ConSubstantiation]나 칼빈교에서의 추억기억[Memory]와 구분하는 것이다. 성체와 성혈의 나눔, 희생과 죽음의 십자 등의 회상은 플라톤이 말한 불멸의 영혼에 초대 영역인 것이다. 천주교의 본향을 생각하는 노래인 사향가[思鄕歌]가 어쩌면 가장 걸맞는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인의 바람에 따른 초월함[Transcendental]이 절대의 원의에 의한 초월됨[Transcendent]에 이르러야 완성되는. 이병호주교의 순례이야기는 그런 회상[AnamNesis]이 담긴 순례이야기이다. 한 인생의 나서부터 죽음까지 이르는 동안의 기억이 본향으로 일관된 예수의 원형[ArcheType]을 따르는 전형[ProtoType]에 녹여내는 까닭이다.
이병호주교의 순례이야기는 익산으로부터 시작된다. 천호의 옛 공소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병호주교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정지용의 "향수"의 풍경처럼 떠오른다. 1927년 교토에서 엄마와 아내와 누이의 고향을 그리고 그리며 쓴 시. 실개천이 흘러내리고 누렁소가 울어젖히며 가족들이 재잘거리는 그런 고향은 꿈에도 잊지못할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그런 고향이다. 대첨례라고 부르는 크나큰 축제와 축일이 있게 되면 나바위성당까지 걸어갔을 것이다. 더러는 자신과 가족이 해먹을 밥을 위해서 지게를 지고 그 행렬을 했을 것이다. 천호성지로부터 나바위성당까지 가는 아름다운순례길. 그 길을 주교가 된 이후 다시 순례를 하는 동안 이병호주교가 떠올린 것은 어머니였는지도 모른다. 크나큰 축일에야 말끔히 차려입고 나서게 됐으리라.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옷 한 벌 해입기도 어렵던 시절에 한지를 뜨는 공소인 지소[紙所]에서 만든 종이를 기워 만든 옷으로 일상을 살기에, 조금만 잘못하면 실밥이 터져 속살이 드러나고 만다. 그런 가난이 함께 있던 고향의 어머니. 그 어머니에 관한 기억을 이병호주교는 향수[鄕愁]의 향수[香水]로 기억한다. 오감 중 눈이 먼저고 귀가 다음인 것이면 코는 저만치 있는데, 향기의 추억은 엄마의 기억과 중첩되기에 짙게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밖에서 뛰어놀다 돌아온 아이를 반기는 엄마의 치마폭. 그 치마폭에 안기면 온갖 일과 밭과 땀이 어우러져 있지만 샤넬도 저리가라 할 정도의 그윽한 향기를 품어내는. 그래서 엄마의 치마폭은 높이가 하늘보다 높고 너비가 바다보다 넓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하느님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머니란 것처럼, 하늘과 바다가 느껴지는 엄마의 치마폭에서 나는 향기에 대한 회상은 이병호주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순례의 발걸음으로 초대한다. 걸음 속에 피어오르는 향기와 더불어.
익산, 그리고 인심 좋기로 유명한 함열 등은 한편으로 먹고 살기에 안성맞춤이지만, 한편으로 원한을 해원에 담은 소리로 유명하다. 고흥 쪽의 서편제가 애절하게 소리를 끌어내고 남원 쪽의 동편제가 우렁차게 소리를 뿜어내는 모습이라면 동초제는 아우르는 듯한데, 익산에 이 소리 저 소리 이 소리꾼 저 소리꾼 모두 섞인 것은 아마도 목포의 열차와 여수의 열차가 익산서 만나 서울로 올라가는 까닭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소리의 풍[風]과 향[香]을 그리 구분짓는다고 하더라도 높이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친다면 한국인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말도 원한깊은 사연을 해원가득 풀어서 토로하기 때문일 것이다. 떡목소리꾼 정정렬이 그러하다. '이게 무슨 쇳소리지.' 하면서 들으며 '이건 결코 아니올세.' 하면서 젖혀도 이미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있을 정도의 소리다. 원한을 해원에 담아 승화시키는 이 소리 하나에 듣는 이가 동화돼 마치 저 깊숙한 곳에 숨겨둔 억울함을 풀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이제는 주먹을 불끈 쥐고 용기있게 나아가리라는 다짐이라도 하듯이 모두를 가슴뛰게 한다. 그런 토양은 소리에서 트로트로, 그리고 가요에서 팝송까지 이어지지만 음색이 달라도 마음은 하나다. 함열 출신의 김민기가 그렇다. 그리고 케이팝의 골든 안에 담긴 소리가 그렇다.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여기서 혹은 저기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인인 때문이라고 숨기지 않고 한국인인 덕분이라고 떳떳히 하며, 그런 까닭에 이런 빛깔의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햔다. 이병호주교에게 순례이야기들을 풀어달라고 했을 때 처음으로 잡은 주제가 케데헌의 골든이었다. 뜨고 있던 차였기도 했지만, 동향인 김민기의 죽음을 그토록 길게 기리는 강론과 강연을 한 이병호주교에게 소리는 저 과거와 이 현재의 누구나의 유전자에 담겼던 원한을 해원에 이끌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으로 기억됐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일까. 이병호주교와 오랫동안 바라보고 함께하면 파편적인 접두어와 전치사가 떠오른다. COM과 ON. COM[N]은 '함께'라는 의미이고, 흔히 공동체[ComUnity], 영성체[CommUnion] 등에서처럼, 하나가 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런데 COM은 더 깊이 어원적으로 보면 '자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엄마의 뱃속에 잉태된 아기. 이것만큼 하나된 완벽성이 있을까. 일부러 같은 언어적 감각으로 빚어진 것은 아니겠지만 비슷한 발음의 공[共]과 공[恭]도 의미는 상통한다. 설문해자를 한다면, 여럿이서[八] 하나의 대[一] 위에 받드는[廾] 것인데, 그것이 공[共]이고 거기에 마음[心]을 더하고 담아서 하는 것이 공[恭]이니, COM과 잘 어울린다. 이병호주교에게 프랑스에서의 석사논문이 뭐였는지를 물었을 때였다. 파리가톨릭대학을 다니던 어느 신부가 불교의 화엄사상을 다루면서 이병호주교의 논문을 보고 놀랐다는 얘기를 들은 까닭이기도 했다. 그 제목 중 눈에 띈 'ConNaturalité'. 생소하지만 자크마리땡[JaJacquesMaritain]이 다뤘다는 키워드는 통교,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우주, 사람과 하늘 사이의 통교 등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극히 가톨릭[Catholic]적이면서도 또 지극히 불교색채적이기도 한. 본성상 보자면 하나다. 그것은 본향의 회상으로까지 나아가야만 가능한 이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에 천착하지 않고 미래로 달려가야 하는. 어디까지. 오메가[Ω]포인트에 이르기까지 내달아야 하는. 그리고 마침내 시공을 깬 미래에서 만나는 과거의 본향[Nature Of AnaMNesis]. 그것이 천국이든, 신국이든, 천당이든, 낙원이든, 행원이든 간에 그것을 잠깐 맛볼 수 있는 시공을 찾아 이병호주교가 순례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바의 두 키워드는 이제 떼이야르드샤르댕에 심취하는 까닭을 어렴풋이 알게도 한다.
프랑스의 파리. 가난한 유학생이던 이병호주교가 막바지에 동기신부들을 맞이했을 때,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고 헤매니, '여러 해를 살았으면서 그것도 모른다.'고 우스갯소리를 하자, '지하철을 타고 다녀 지하길은 안다.'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가난한 유학생이 오로지 학교와 숙소, 그리고 책에 전념했음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세계삼대식물원인 파리식물원의 떼이야르드샤르댕연구소에 가면 지금도 '한국의 뱅상리[이빈첸시오, 이병호주교]를 아느냐.'고 물을 정도로 학계에서는 그를 먼저 알아본다. 당시에는 과학과 종교의 사이에서 오해를 수없이 받았던 떼이야르드샤르댕. 그러면서도 어느 한 쪽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히 펼친 그에게 가장 큰 키워드 중 하나는 오메가[Ω]이다. 창조와 진화의 논란, 마음과 영혼의 경계 안에서 떼이야르드샤르댕은 지혜를 모아 뭉치로 뒤섞인 실타래의 실마리를 푼다. 베이징원인을 동료사제와 함께 발굴하고 연구하며, 홀로만의 인간[Human]과 더불어의 인간[HumanE]은 변화를 겪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진화든 진보든 발전과 발달로 보이든, 그것도 아니라 퇴보와 퇴행의 경우라 하여도. 이 지점부터도 당시의 종교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늘의 창조는 뚝딱 됐어야 맞으니. 그렇다면 오늘날은 누구나 받아들일 육체의 변화에 더해서 정신은 변화를 겪는가. 마음은. 더 지평을 확대해 영혼은. 떼이야르드샤르댕은 바로 그 지점에서 과학으로만도 아니고 종교로서만도 아니며, 그렇다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섞어놓지도 않으며 둘 사이에 있을 가르마와 어울림을 명쾌하게 풀어내고자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날이 아니라 처음부터 역시도 이미 종교가 가지고 있었던 명쾌한 구분이 흐릿해진 것을 떼이야르드샤르댕은 풀었고 이병호주교역시로도 그것을 포착한 것은 아닐까.
하늘의 창조는 변화까지 허락한다. 그렇게 진화도 더불어서 펼쳐진다. 정신과 마믐도 상통하게 변화한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의 영역이다. 오메가[Ω]는 마음과 영혼이 만나는 지점이니 인간의 이해와 몰해의 사이다. 이정도의 이야기는 예수의 미사와 우리의 미사를 통해서도 알아챈다. 예전에는 '또한 사제와 함께.' 하던 것을 '또한 사제의 영[혼]과 함께.'로 본래의 미사의 경문을 되찾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축성된 사제는 설령 그가 기도나 미사를 집중해서 드리면서도 인간적인 잡념들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 순간의 경문인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가 예수의 원형[ArcheType]을 따른 전형[ProtoType]이면 좋으련만, 매너리즘의 모형[StereoType]에 그친다면 그 미사는 유효한가. 그것이 유효한 것은 축성된 사제의 영[혼] 안에서 하느님이 집전하는 미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제와 함께.'라고 하지 않고 '사제의 영[혼][Spiritus[Esprit]]과 함께.'라고 화답하는 것이다. 이 정도 안에서도 마음과 영혼을 명쾌하게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곧 나으리라.'를 '내 영혼이 곧 나으리라.'로 한 것이 사족[蛇足]이 돼서 바로잡은 것도 헷갈리게 함이 없지 않지만. 굳이 일본과 한국의 마음[Animus, Anima]이 '심리', '정신', 그리고 심지어 '영혼'으로도 번역되고 표현되니 반드시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남성형의 마음[Animus]이 용기와도 같은 마음을, 여성형의 마음[Anima]이 감정과도 같은 마음을 뜻한다면, 미사의 '내[Anima Mea]가 낫는다.'는 것은 흔들리는 갈대같은 마음이, 조금 더 나아간다면 감성에 이성이 곁들여진 오성이, 부연하면 연약하던 하와와 용기있던 아담도 꺾여버린 그 마음이 낫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동양적인 종교심성으로 섞어쓰기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인 마음과 영혼이 이미 이어져온 미사 안에서는 명쾌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명쾌함을 미사의 경문이 아닌 기도의 경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것 역시 헷갈리게 '내 영혼이 [주[님]를] 찬양하며.'와 '내 마음이 기뻐 뛰노나니.'로 있지만, '내 마음이 주님을 떠받들며[Magnificat Anima Mea Dominum[프랑스어 Mon Âme Exalte Le Seigneur].'와 '내 영혼이 하늘에 뛰노나니[Exultavit Spiritus Meus In Deo[프랑스어 Exulte Mon Esprit Dieu].'로 담는다. 앞서서처럼 뒤섞여진 동양적인 종교심성을 잠시 거둬내면, 인간의 의지가 담긴 마음이 분명한 목적어인 하느님[하늘]을 높이 떠받들고, 인간의 의지와 달리 영혼이 하느님[하늘] '안에서' 기뻐 뛰논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기뻐 뛰논다[Exulte]'가 바로 부활 때 천사들 무리가 용약[踊躍]하듯, 어쩌면 연비어약[鳶飛魚躍]의 독수리가 뛰날고 물고기가 치솟는 것이 목적을 두지 않는 자연스러운 표현인 것처럼, 하느님[하늘]의 영역 안에서는 도무지 그렇게 기뻐 뛰놀지 않을 수 없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매일기도 안에서 표현됨도 느낀다. 그렇다면 떼이야르드샤르댕에 앞서서도 이미 원형으로부터 마음은 어디까지이고 영혼은 어디부터인지 고백하며 살아온 것이다. 떼이야르드샤르댕은 바로 이런 지점을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합리적인 과학으로만 치닿는 과학자에게 영혼을 상기시켜주고 맹목적인 종교로서만 함몰된 종교인에게 마음을 알아차려준다. 그 가르마를 명료하고 명쾌하게 하기 위해서 역사적 발굴과 과학적 분석과 우주적 신비와 일상적 기도를 체화한 것이 떼이아르드샤르댕이다. 과학자가 겸손해지고 종교인이 겸양해지자, 오늘날 드디어 떼이아르드샤르댕이 제대로 보이게 된다. "그때 그말이 과연 그렇군."
약간 엉뚱한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잠시 살펴본다. 박스 안에 스스로 빛을 내는 라돈이 있고 빛을 감지하는 센서가 있으며 센서에 따라 움직이는 바와 그것에 따라 깨지는 독약이 든 병,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고양이가 있는 같은 공간인 박스가 실험의 내용이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사느냐 죽느냐 그것에 여러 해석을 내리고, 결국 이를 알기 위해 박스를 열면 죽기에 고양이는 어쨌든 죽는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확률의 문제라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파동과 입자를 연구한 슈뢰딩거라면 약간 비켜난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야광처럼 스스로 빛을 내는 라돈에서 나오는 빛의 파동에 따라 고양이의 죽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파동은 입자와 어떤 연계고리를 갖는가. 이것을 양자와 전자의 흐름으로 읽는다면 오늘날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를 심리학에서 마음의 작용으로 본다면 어떨까. 누군가 마음을 일으키거나, 일으킨 마음을 따라 추동된다면. 적어도 빛과 소리 등과는 다른 영역이겠지만, 심리학의 세계에서는 가능하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진화는 육체의 진화와 정신의 진화를, 그리고 마음의 진화도 거론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인과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에 받아들여진다. 신드롬[증후군]과 컴플렉스 등이 한겹두겹 풀려나가는 것도 그런 연유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은 어떠한가. 극히 예외적이고 희소적이며 차별적이기 때문에 공통분모를 잡아내기 어렵지만, 분명 추동되기에 진화는 아니더라도 고양이라던가 함양이라던가 하는 표현으로 변화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신병적인 면모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적이고 신학적이며 영성적으로 볼 때의 영[혼]의 식별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이는 파동과 입자의 어떤, 아니면 넘어선 어디쯤에 자리하는가.
조금 더 엉뚱한 얘기일 수 있는 레드재플린이라는 밴드의 "StairWay To Heaven[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이해를 돕는 해석을 줄 수도 있다. 하드락의 절정으로 극찬받는 이 노래는 태어난 것부터가 특이하다. 휴식차 간 휴양지 장작불 앞에서 로버트플랜트가 떠오르는 시상과 음율을 끄적였다고. 나중에 나온 숱한 해석과 달리 사탄을 의식하지도 마약에 의존하지도 알콜에 젖어들지도 않은 상태였다고 말하는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본인조차 아직까지도 풀어낼 마땅한 해석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영화에 삽입하고 싶다고 해도 '글쎄.' 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번 시상과 음율을 곱씹으면 이런 해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황금으로 천국을 사고 싶은 세상. 그런데 막상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도 문은 닫혀있는 듯 하고, 다시 황금을 모으려 하는데 새들은 '왜 저러지.' 하듯 재잘댄다. 서서히 해가 서쪽하늘로 저물어갈 무렵 죽음의 문턱에서 앞서간 누군가나 무언가의 영혼[Spirit]은 바람이 돼 일깨운다. 황금이 아니라고. 그리고 계단을 타지 말고 바람을 타라고. 마치 움켜쥔 황금을 던져버려야 비로소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다는 듯. 그렇게 급히 바람을 타고 오르는데 여전히 길게 늘어진 그림자의 영혼[Soul]은 다시금 황금을 모아 천국의 계단을 사라고 한다. 이미 천국의 바람을 타고 다다랐는데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눈부신 빛 안에 빨려든다. 황금을 모을 때는 느릿느릿 가듯 음율도 더디다가, 바람을 탔을 때는 빠르면서도 고음이 계속된다. 마치 영혼[Spirit]이 영혼[Soul]에 천착하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가듯. 이 지점이 하드락의 진수라고 하는 부분이다. 레드재플린에 매료된 보컬들이 고래고래 흉내내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모형[StereoType]은 자칫 시끄러운 잡음이 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다랐을 때, 안도의 숨을 "휴" 하고 쉬듯 노래는 마무리된다. 영혼에 대한 이런 해석은 어떠한가.
그러한 모습은 단테의 "신곡" 안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옥과 연옥을 경험하는 동안 단테의 길안내자는 현인이었던 베르길리오이다. 세상에서의 지식은 그렇게 연결고리가 이어져 길안내자의 역할까지도 하는 것이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겨우 지옥과 연옥에 해당하는 것에 불과하니 늘 겸손하고 겸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린다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마치 불교의 지옥도처럼 묘사된 단테의 신곡 안에 나타나는 지옥과 연옥은 이후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성당의 궁륭과 벽면을 채운다. 그리고 이어진 천국의 초입에서 만난 연인 베아트리체. 연인은 누구나가 그리던 천국으로의 여정 안에서 여러 별들을 거친다. 사랑은 지식을 넘어서 천국을 안내하는 길안내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절정에 다다르기까지 안내할 것만 같았던 사랑조차 막바지에서는 한계로 남는다. 그렇게 전형[ProtoType]의 역할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나타나는 베르나르도. 현인도 연인도 하지 못하는 코치를 성인이 한다. 영혼으로 가기 위해서라면 무언가를 하지 마라고. 마음과 영혼의 경계에서 오로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의탁[ReCour]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며, 마치 성모학자인 자신이 마리아를 통해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듯 한다. 프라도미술관에는 성모의 젖가슴에서 나오는 젖을 머금는 베르나르도의 모습이 담긴 작품이 있다. 옷도 입은 채이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슨 야한 그림처럼 전혀 보이지 않지만, 어느 베르나르도라는 세례명을 가진 신부에게 다른 신부가 '너는 오늘 점심 안먹어도 되겠다.'고 농담을 한 것처럼 성모에 대한 공경이 컸던 베르나르도. 어디 점심 뿐이겠는가. 그런 베르나르도가 의탁의 원형[ArcheType]인 성모마리아에게 안내하고, 성모마리아는 마침내 빛으로 빨려드는 모습으로의 하느님의 영역으로 이끈다.
단테의 신곡을 여러 화가들이 그림으로 보여주기에 그 해석이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중 가장 압권은 시스틴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심판일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시간의 역순으로 그린 것도 결국 회상[AnaMNesis]으로 돌아가는 곳에 꿈꾸던 천국이 있음을 보여주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없이 패러디된 아담의 창조와 힘없이 떨군 아담의 손과 강하게 뻗은 하늘의 손이 닿을락말락 하는 모습 안에서 영[숨/기]이 불어넣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온통 시선이 거기에 집중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또다른 묘사에서 드러난다. 뇌구조처럼 생긴 하늘의 망또. 그리고 그 안에 천사들. 천사들 사이의 성모와 예수를 본다면, 이미 아담의 창조 때부터 성모와 예수가 계획됐음을 보여준다. 하늘이 부여한 자유는 하늘을 배반할 정도의 지식으로 마음껏 펼쳐지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꾀에 넘어가 함정에 빠지고 족쇄에 걸리니, 그것을 풀 수 있는 성모와 예수가 시공을 넘어서 준비됐음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환한 모습이 아닌 위험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는 천사들의 시선. 거기에 성모 역시 두 눈을 크게 뜨고 몹시 불안해하고 염려스럽게 응시한다. 안고 있는 아기는 시선을 돌리고 뿌리치려 하는데, 하늘의 손은 이미 아기의 어깨에 강하게 얹어져 있다. '바로 너다. 창조된 인류를 구원할 당사자. 그게 나다.' 하듯이. 이로써 미켈란젤로는 창조 이전에 예수가 원형[ArcheType]으로 자리함을 보여준다. 단순한 화가로서의 모방과 상상이 아닌, 신학과 영성에 따른 이 작품 안에서 영혼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성부, 성자, 성령. 그렇게 삼위일체의 하늘은 인간의 마음의 작용을 넘어서, 발달이든 발전이든 진보이든 인간이 스스로 다다를 지경까지 허용하지만, 종국에는 영혼에 맡겨지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미켈란젤로의 제자 베르니니도 영혼이 도대체 어떠한 것인지를 작품 안에 담으려던 고심의 흔적이 엿보인다. 나선계단을 통해 기하학적 곡선의 신비를 선사한 보로미니만큼 뛰어난 수학적 감각은 못하더라도, 장면들에서 보는 신화학적 순간의 신비를 포착한 베르니니기에 하나하나에서 감탄이 절로 난다. 그 중 가장 압권은 승리의성모[산타마리아데빅토리아]성당의 성녀 대데레사의 '탈혼'이다. 탈혼[Ecstasy]을 법열[法悦], 환시, 광희[狂喜], 신혼초발[神魂超拔] 무아[Verzückung], 황홀[Hingerissenheit], 매료[Entzücken] 등으로 해석하지만, 우리 식으로라면 넋이 나갔다거나 혼이 빠졌다거나 하는 정도로 알아들을 수 있다. 신화적이라는 것은 천사의 화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신학적으로 천사인 모습은 신화적으로 에로스, 즉 사랑의 신의 형상이다. 그가 쥔 화살이 증오의 납화살이 아닌 사랑의 금화살인 까닭에, 작품은 에로스와 프쉬케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즉 사랑과 영혼의 이야기라는 것인데, 영화 '사랑과 영혼'의 줄거리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화살을 맞은 순간 영혼으로 묘사된 성녀 대데레사의 자태는 어떠한가. 넋[혼, 프쉬케]이 나갔지만, 바로 거기가 영[프뉴마]을 맞이하는 찰라임을 베르니니는 포착하고, 그 순간을 마치 사진작가가 대작의 아침햇살을 담기 위해 몇날며칠 기다렸다가 겨우 한 폭 건지듯, 건져낸 작품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움의 지경이 넋[혼]이 나갈 지경에까지 이르르게 하는 것이 사랑인데, 그때에야 비로소 하느님의 빛[영]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어의 넋[혼, 프쉬케]과 영[프뉴마]의 미묘한 구분은 실은 섞어쓰기도 하기 때문에 긴가민가 하기도 하지만, 어느 세계에서건 자리한다. 그 영혼의 세계를 보다 잘 이해하게 해주는 것은 철학적 영역에서이기도 하다.
천재적인 화가의 영성이 담긴 해석과 표현은 누구나가 잘 아는 고흐에게서도 나타난다. 강한 붓터치로 사진이 나타난 세상에 더 이상은 회화가 자리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대를 뒤튼 고흐. 그런 고흐에 깊이 매료된 사람이라면 프랑스의 파리와 아를르, 오베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미국 등 누군가가 사들여 걸어놓은 작품 한 점을 보기 위해 순례와도 같은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를르의 정신병자 요양시설 수녀원에서 그린 피에타는 고향인 네덜란드에 있고, 들라크르와의 피에타를 모방한 것이기에 그다지 놀랍지 않게 본다. 밀레나 혹은 다른 모방작품도 전혀 새로운 붓놀림 덕택에 비교전을 허락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딱히 창조적인 영감이라고는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모의 품에 안긴 예수의 주검과 그 얼굴의 가시관에서 피어오르는 장미를 본다면, 고흐가 영적인 무언가를 담아내고자 한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새의 뿌리에서, 아니 도무지 끝나버린 것과도 같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피어난 새싹이 장미가 된 장면은 여러 회화가와 조각가와 목격자의 표현으로, 성모의 발에서 피어오른 장미로 보여진다. 성탄을 준비하는 마리아만이 아닌 누구나에게 희망으로 자리하는 이 메시지는 예수의 죽음에 이르러서 사람들을 등돌리게 한다. 그것은 배반한 유다만이 아니다. '이자가 아니야.' 그렇게 돌아서려는 순간, 예수의 가시관에서 피어오르는 장미를 본다면, 희생이 희망을 불러온다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별이 빛나는 밤[Starry Starry Night]"이라는 노래에서 우울증을 심하게 앓던 가수가 '이제 잿빛 가시에서 피어오르는 장미를 알 것 같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통한 고흐의 영의 식별. 그리고 그것의 알아차림이 전해지는 순간, 고흐의 사이프러스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아이리스꽃밭서 피어나는 향기도 이해된다.
어느 해의 성탄. 이병호주교의 성탄엽서에 등장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먼저 간 연인 베아트리체와 천국으로 이르는 길에서 만난 숱한 앞서 간 이들의 별들. 알퐁소도데의 차마 말하지 못하는 짝사랑과의 밤샘 안에서의 별들. 가장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산 누이수녀를 상해에서 하늘로 떠나보내고 떼이야르드샤르댕이 내몽골 오르도스[심장/중심] 사막에서 만난 쏟아지는 별들. 오타줄리아가 유배의 끝자락인 고즈시마[신의나루]라는 더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곳에서 만난 헤일 수 없는 별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장미 한 송이를 머금은 별을 포함한 저마다 나름대로의 사연을 간직한 별들. 그렇게 별들은 연인과 동심을 부른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가족이다. 가람 이병기는 서늘한 바람에 뜰 앞에 나서서 별을 바라보면서, 징병간 아들이 행방불명된 채였다가 기다림에 지쳐 '이제 저 별이 됐겠지.'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해환 윤동주는 먼저 세상을 떠난 누이가 별이 돼 저렇게 빛나고, 아슬이 먼 북간도의 어머니가 밤별로 찾아와 이국생활을 위로했을 것이다. 영지 정지용은 영혼 안에 외로운 불이 바람처럼 이는 회한에 피어오르다가 성근 별들이 이제 모래성으로 발을 옮긴다고 말하며 향수에 젖는다. 김대건신부도 안중근의사도 봤을 그 무수한 별들. 이병호주교는 성경말씀을 곱씹으며 말한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립 02,15] 이병호주교가 성탄엽서에 담은 고흐의 별들은 아를르의 바람에 흔들거리지만, 동방박사들이 그랬듯이 좌표를 허락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정이 될 것이다. 비가 개이고 무수한 하느님의 자녀들이 별들로 와닿는 순간, 시인인 모두는 홀로여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루브르박물관에 가면 바빌론 기슭에서 가져온 숱한 유물들이 있다. 그 중 하나에 붙은 제목은 '태초의물[L'EauPrimordiale]'. 물이 담겨진 항아리에서 샘이 솟구쳐오른다. 그 물은 이내 옆구리들로 흘러내리고, 그곳에 물고기떼들이 뛰놀며, 대지도 흠뻑 적신다. 그리 크지 않은 조각상이지만, 보는 순간 의미가 크게 와닿는다. 신비의 영약[Elixir]도 아니고 그저 물인데, 그것이 그리 큰 의미를 선사하는 것이다. 태국에 가면 모두가 존경하는 프라루앙이라는 왕이 있다. 주변국가인 크메르에게 무력으로 숱하게 당했는데, 그 중 하나는 물을 가져다 바쳐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 담을 용기조차 변변치 않았는데, 가벼운 나무소재를 엮어만든 동아리에 물을 담아건네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던 일화로도 유명하다. 지혜로움을 시샘한 크메르의 왕은 백성에게 돌아와 그저 겸손하게 수도승처럼 빗자루질을 하며 사는 프라루앙을 죽이라고 장수에게 명령한다. 그 장수가 태국땅에서 마침내 죽이려고 칼을 뽑아든 순간, '움직이지 마라. 여기 머물러라.[Don't Move. Stay Here]' 하자 돌처럼 굳었다는 일화도 간직돼 있다. 나중에 지어진 얘기겠지만, 어쩌면 이런 정도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막상 죽이려고 가서 봤더니 왕이 초라한 그리고 겸손한 차림으로 마당을 쓸고 있다. '아.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이다. 내가 쥔 칼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는 얼음처럼 굳어있다가 칼을 버리고 제자가 됐다. 그림이 얼추 그려지는 이런 모습에서도 프라루앙이 이미 샘솟는 영원한 물을 선사했음을 느낄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이병호주교를 '온샘'이라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전주니 온전함[全]을 써서 그리 했겠지 하는 생각이지만, 영어로 온[ON]은 더 큰 의미이다. 그것이 외우기식의 '위에'가 아니라 '곁에'를 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샘은 '늘 가장 곁에 있는 샘솟는 물'인 것이니 앞선 얘기들과 다를 바 무엇인가.
'온가'라는 리사이클[뉴사이클] 쉐어링 가게를 꾸린 적이 있었다. 거기의 '온'에 여러 가지 중의적인 뜻을 담았다. 따뜻함[溫]도 편안함[穩]도 온전함[全]도 오롯함[Only]도 담은 이 표현은 한 마디로 영어로 치자면 '결에' '뽀짝[바짝]' 있는 온[ON]으로 귀결될 것이다. 어여와[ComeOn], 곁으로[TakeOn], 기대봐[LeanOn] 등에서처럼. 그런 원래는 없었을 나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인다면, 누군가가 보기에는 아부와 아첨이 극에 달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일인당 국민소득이 제일 높다는 싱가폴 신앙인들을 삼년째 전국성지순례로 도맡아서 하고 있다. 이제는 말레이도 인도신도 소문을 듣고 온다. 그런데 그곳 지도신부인 프란치스코테오신부의 이력이 볼만하다. 말레이에서 태어나 싱가폴에서 자라고 아프리카에 봉사가 사제가 될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는 이태석신부와 원선오신부의 경우처럼 수단과 케냐에 가서 청년 아프리카와 부대끼고 시름하며 살았다. 싱가폴 신앙인들은 그를 몹시도 존경한다. 세계평화전당의 김영수신부에게서도 감동받아 내년에는 더불어서 아예 단독피정까지 신청했다. 그런 프란치스코테오신부가 가장 부러워하는 것 하나는 한반도의 물이다. 일년 내내 단 한 번도 비가 오지 않는 곳도 있다는 아프리카 오지. 그 얘기를 듣고 성지순례의 계획에도 없던 한 곳을 집어넣었다. 원래는 방탄소년단[BTS]도 다녀가고 국내외 모두가 찬사를 아끼지 않는 아원을 끼고 갔는데, 이번에는 그런 아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소개한 '동상면사람들'에 어여 가자고 재촉한다. 하이트맥주의 반전포인트, 천둥소리탁주 감칠막걸리, 그리고 알알이터지는 한살림탄산수 극찬의 그 물을 머금은 동상. 감동은 말할 것도 없다. 이병호주교의 조카가 만드는 그 물공장에 간 이튿날 더불어 이병호주교를 만났다. "이제는 물까지 팔려고."라는 말에다 "이제는 물까지 주세요."라고 받는다. 그 '온샘' 물. 이게 아부와 아첨의 속셈.
'내게 얼마나 많은 자녀가 있는지 아느냐.' 우리나라 인구가 줄어들자, 이병호주교에게 '성직자들이 결혼도 안하니 성직자들 탓도 있다.'고 농담을 건네며, 주교도 자식이 없으니 자식 둔 부모 심정을 모르는 철부지와 다름없다고 하자 돌아온 말이다. 처음에는 뻘로 들었는데 궁금해져서 물으니 그저 피식 웃는다. 그러다가 언젠가 누가 '내 자녀가 죽음에서 나온 것은 이병호주교님 덕택이예요.' 하는 몇옃의 목소리를 듣고는 '이건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자살하려던 아이가 돌아온 것이었다. 낳는 것만이 아니라 지킨 것까지 치자면 자녀가 많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곁에서 보면 그 특효약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경청' '순례' '식사' 이런 것임을 느낀다. 그런데 그게 먹힌다. 신기하게도. 그래서 그런 처지에 놓인 아이들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으면 이병호주교에게 떠넘긴다. 주위에서는 '감히 바쁘신 주교님한테.' 하지만, '안 풀리는 일을 해결하라고 있는 것이 주교님 아닌가요. 사실 신자나 사제도 대리자일 뿐.' 하며 되받는다. '마지막 보루'이니 따지고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리고 특효약의 키워드도 계속해서 곱씹으면 원형이 예수임을 알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불안해하는 얘기를 '듣고' 함께 '걷던' 끝자락에 빵을 '나눌' 때, 비로소 눈이 열렸다고 하는 것을 보면. 어느 누군가가 자녀 문제로 땅이 꺼져라 걱정을 하기에, 이병호주교에게 귀뜸을 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얘기를 하는 것이 좋지만, 판을 깔아도 나오지 않으니 하는 수 없었다. 자신의 가족사를 얘기했다고 버럭 화를 낸 그에게, '나는 그 아이를 위해 하루에 헤아릴 수 없이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국내에 있을 때도. 해외에 있을 때도. 틈만 나면 성당이고 사찰이고 가서. 죽음의 그림자가 언제 드리울지도 몰라서 도움을 청하는 얘기를 한 것이다.'고 했더니, 이제는 오해가 이해로. 이것이 이병호주교 순례이야기 썰을 푸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 인상으로 남는 광고들이 있다. 개울에 발을 담갔는데 물고기들이 다 죽고서 떠오르는 문구가 무좀약인 것이라든지, 스위스에서 곰을 비롯해 모든 동물들이 눈길에 미끄러져 벼랑으로 굴러떨어지는데 벼랑 끝에 먼저 선 곰과 다른 동물들이 간신히 서고 뒤이어 곰발바닥에 금호타이어 표시가 있는 광고. 실연당해 울고있는 여인의 차창 밖에서 주유중에 연신 앞유리를 닦는 주유소 직원이 담긴 세정제 광고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그 중 하나 인도의 스승인 구루가 검지를 들고 비행기를 타고 다시 차를 타고 머나먼 이국땅으로 향하는 모습을 묘사한 광고도 있다. 제자들과 사람들은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있는 양 따라가는데, 머문 곳에는 어느 한 젊은이의 풀린 신발끈이 있고 검지를 가운데 대자 젊은이가 신발끈을 웃으면서 묶으며 광고는 끝난다. 그만큼 케어를 하겠다는 뜻의 광고로 기억한다. "야곱신부의 편지"라는 영화에는 억울한 누명으로 오랜 감옥살이를 한 뒤 출소해 나이든 야곱신부의 편지를 읽어주는 일을 하는 여인의 얘기가 나온다. 이미 모날대로 모난 그녀는 나중에서야 가족의 간절한 편지에 의해 연결고리가 돼 야곱신부의 집에 그 일을 하러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병호주교가 여러 청소년들과 순례도 하고 경청도 하고 희망도 주는 것에 이유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일백삼십팔억년의 지구. 그 지구별이 우주 안에서는 가장 작은 모래알 한알보다 보잘것없다. 그러니 그 안의 인간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이병호주교가 흔히 하는 말의 말미는 이렇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 인간 하나를 만들기 위해 하느님은 온 우주를 다 동원했다. 그러니 한 인간이 죽는 것은 우주가 사라지는 것이다. 구루의 손가락과 신발끈의 광고처럼 떠오르는 대목이다. 자의건 타의건 한 청소년의 죽음은 우주의 사라짐과 같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순례중에 청소년이 알아차린다. 자존감으로.
"물질심장[LeCoeurDeLaMatière]"-"예수성심[SacréCoeur]" 떼이야르드샤르댕의 거장 둘이 만났다. 일본의 나카이신부와 한국의 이병호주교가 그들이다. 나카이신부는 떼이야르의 예수성심을 깊이 묵상하던 중 김수환추기경과의 만남을 계기로 사제가 될 결심을 했다. 그리고는 사회교리와 노동사목에 투신, 일제강점기 징병과 징용의 조선인노동자를 대변하고 한일주교회의에서는 희생자들을 다시 재론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LaudatoSi']" 이후 나온 프랑스예수회 신부의 환경생태에 관한 영성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환경생태영성피정도 이어간다. 한국의 이병호주교는 불교의 '더불어서의낢[ConNaturalité]'에 심취했다가 떼이야르를 접하고, 지금도 떼이야르학회에서 가장 인정받는 학자 중 한명이다. 예수시기의 사람들에게 우주란 그저 지구 한켠 정도였다. 과학의 발달과 인식의 변화는 말 그대로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우주의 별들을 얘기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변함이 없는 것은 예수. 그리고 그가 말한 진리. 진화와 창조의 접점. 변화와 고정의 접점. 이 조화가 거기서 펼쳐진다. 그 조화를 꿰뚫으면 지평은 열린다. 이해의 깊이로. 물질도 사람도 자연도 우주도. '그래서 그랬군.' '그래서 그렇군.' 나카이신부가 지금도 시모노세키의 달동네 똥굴마을 곁의 조선인마을을 바라보는 시선을 간직한 까닭이다. 더불어 살면서. 이병호주교가 여전히 가난한사람들 움츠린 닫힌공간 안의 백색순교자를 주목하는 눈길을 담지한 이유이다. 순례를 하면서. 둘은 이런 깊은 교감 안에서 만났고, 물질심장이 예수성심서 귀결됨을 재확인했다. 일본의 잠복그리스도인도 조선의 공소그리스도인도 놓지 않았던 예수성심. 일본은 곁에 성모자나 천상모후 도상이 한국은 곁에 성가정과 성모성심 도상이 자리하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이다. 둘은 헤어지면서 사진 한 컷으로 부족한지 포옹한다.
